신학의 거장들 연구 / 노원두

<# 아래의 신학의 거장들을 연구 하여

요점만 정리 하여 본교로 제출하기 바랍니다.

*제출기간:2010년 4월9일 까지

Ubs 박사원>

 

 

 

실천신학 신학의 거장연구(1-30page)

박사원 노원두

 

 

Kurt Aland(쿠어트 알란트)

Aland was born in Berlin-Steglitz. From 1933 he studied theology at the Friedrich-Wilhelms-Universität in Berlin. On the 23rd of March that year, he was examined before the Bruderrat (council of brothers) in the Bekennende Kirche (Confessing Church). During his studies, he worked for the journal of the Confessing Church, Junge Kirche (Young Church). In an ideological brochure, Wer fälscht? (Who is lying?), written against Mathilde Ludendorff, he confirmed the position of the Confessing Church and identified with them. In 1939 he studied for his bachelor\'s degree under the guidance of Hans Lietzmann. In 1940 he was released from military service; and in 1941, after Lietzmann\'s death, he took over the responsibilities of editing the theological magazine. He graduated in this same year, and in 1944 was ordained as minister of the parish of Berlin-Steglitz.

 

Aland disapproved of the marxist government of East Germany, and was persecuted as a result. In 1953 he was accused of smuggling watches to West Berlin and kept under arrest for three months. Several times Aland spoke out publicly against various forms of state oppression directed at Churches, and demanded freedom of speech in East Germany. In July 1958, he lost his job at the university. However, in September that year, he successfully escaped to West Berlin. In 1959 became a professor at the Westfälische Wilhelms-Universität in Münster. Here he founded the \"Institut für Neutestamentliche Textforschung\", which he directed until 1983. He died in Münster, Westfalen in 1994.

 

 

쿠어트 알란트

신학박사이자 문학박사, 1915년에 태어남. 독일 Munster에서 교회사 및 신약학 가르침.

그의 저서 「인물로 본 초대 교회사」“가이사라의 유세비우스”편에서 “가이사랴의 유세비우스의 교회사는 역사의 보물창고로 들어가는 출입문이며 잃어버린 전통과 역사의 근원을 찾아가는 지름길이다”고 유세비우스를 극찬하고 있다. 쿠어트 알란트는 이러한 유세비우스를 그의 역사 기록 속에서 “콘스탄틴을 찬양한다는 이유로 부륵하르트로부터 ‘황제 찬미가들 중에 가장 역겨운 자’, ‘철저하게 불성실한 최초의 고대사가’라는 혹평을 받았고, 부륵하르트를 지지하는 사람들에 의해 이 칭호는 100년간을 득세하였으며, 지금도 지지자들이 생겨나고 있다” 쿠어트 알란트, 「인물로 본 초대 교회사」, 김성주 옮김, (서울: 도서출판 엠마오, 1997), 199,200.

고 했다. 그러나 로마의 10대 박해와 특히 콘스탄틴 바로 앞 황제인 디오클레시안의 박해 때 유세비우스의 스승이자 동역자이며 친구였던 팜필루스가 순교하는 등 그 시대의 교회가 처한 상황을 고려한다면 기독교를 로마 제국의 종교로서 인정한 콘스탄틴을 유세비우스가 찬양한 점에 대해 그렇게 혹평할 수는 없을 것이다.

“유세비우스는 고대 교회사에 있어 가장 탁월한 역사가였다. 진정한 의미의 교회사 서술이란 유세비우스에게서 시작되었다. 유세비우스의 다음 세대에도 역사가들은 많이 있었지만 그들 중에 유세비우스만한 인물은 결코 없었다” 위의 책, 202.

고 쿠어트 알란트는 말한다.

이와 같이 교회사에 있어서 하나의 획을 그은 유세비우스의 「교회사」를 공부하는 것은 매우 중요함이 분명하다. 그러므로 유세비우스의 교회사를 본격적으로 연구하기에 앞서 유세비우스는 어떤 인물인지 그리고 그의 세계사관과 그 의미는 무엇인지를 알아보고, 그런 다음 유세비우스의 교회사를 통해 무엇을 배울 수 있는지를 살필 것이다.

1. 유세비우스(Eusebius of Caesarea, 260-340)의 생애

유세비우스는 260년경 팔레스타인에서 태어나, 카에사레아(Caesarea) 한글 개역성경에서는 “가이사랴”로 번역되어 있다.

에서 성장했다. 그러나 그곳에서 장로로 안수를 받았다는 것 외에는 그의 초기 생애의 역사에 대해서는 거의 알려져 있지 않다. 그의 부모에 대해서도 알려진 바가 없고, 그가 기독교 가정에서 성장했는지, 후에 개종을 했는지도 확실치 않다.

그가 카에사레아의 유세비우스로 알려진 이유는 그가 생의 대부분을 그 곳에서 보냈고, 그 곳의 감독직을 맡았기 때문이다. 물론, 시대적 사명감을 가진 유세비우스는 많은 작품을 저술할 여러 가지 좋은 여건들을 갖추고 있었다. 특히 그의 관심은 예루살렘, 티루, 안티오크 같은 곳으로 여행을 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그는 영적인 생활을 추구하기 위해서 카에사레아를 떠날 필요성을 느끼지 않았다. 카에사레아는 유세비우스가 출생하기 약 30년 전부터 학문으로 유명한 도시였기 때문이다.

 

 

Albrecht Alt

(라이프지히(Leipzig) 대학의 구약교수/폰 라드(1901-1971)스승)

(20 September 1883 in Stübach (Franconia) – 24 April 1956 in Leipzig), was a leading German Protestant theologian.

Eldest son of a Protestant minister, he completed high school in Ansbach and studied theology at the Friedrich-Alexander-University in Nuremberg and the University of Leipzig. From 1907 to 1908 he was a candidate for the office of Lecturer at Munich Predigerseminar. In 1908 he was a scholarship holder of the German Protestant Institute of Archaeology of the Holy Land and undertook his first Palestine journey. In the same year he became a supervisor of the theological College in Greifswald. In 1909 he wrote Israel and Egypt as part of his Doctorate at the University of Greifswald.

 

In 1912 he became an extraordinary professor in Greifswald, an in 1914 was named by Bernhard Duhm as a Professor at the University of Basel. During the First World War he served as a Leader in the Cartography Department of the German Eastern Army. After the war he was again appointed a professor in Basel, then Provost at the Evangelical Church of the Redeemer in Jerusalem. In 1921 he was appointed to the University of Halle, in 1923 to the University of Leipzig, although he was given one year off to completion of his activities in Jerusalem

 

폰 라드(1901-1971)

20세기가 낳은 최고의 구약학자로 일컬어지는 폰 라드는 20세기가 막 시작된 1901년 독일 동남부 뉘른베르크의 루터교 가정에서 태어났다. 이 도시는 나치정권이 유대인을 학살할 때유대인 수용소가 있는 곳 가운데 하나였다.

그는 한 때 학문의 길로 나서기 전에 “목회의 길이냐 학문의 길이이냐?”라는 문제로 그의 스승이요 동시에 라이프지히(Leipzig) 대학의 구약교수인 알브레히트 알트(Albrecht Alt)에게 자문을 구한 적이 있었다. 그러나, 그는 1930년, 마침내 알트 교수의 충고에 따라 라이프지히 대학에서 가르치는 생활을 시작하였고 그 때 이래 줄곧 그는 “학자의 길” 만을 걸어 왔었다. 그는 만 70세를 일기로 1971년 10월 30일 세상을 떠나기 직전까지도 끊임없는 저작활동을 하였던 20세기의 대표적인 구약성서 신학자였다. 주요 저서로 <육경의 양식사 문제>, <신명기 연구>, <고대 이스라엘의 거룩한 전쟁>, <창세기 주석> 등이 있다.

그는 에어랑겐(Erlangen) 대학교와 튜빙겐(Tuebingen) 대학교에서 수학(修學)을 하고 오토 프록쉬(Otto Procksch) 교수와 알브레히트 알트(Albrecht Alt) 교수의 지도 아래 “신명기에 나타난 하나님의 백성”(Das Gottesvolk im Deuteronomium, BWANT, 47; Stuttgart: W. Kohlhammer Verlag, 1929)이라는 제목의 박사학위 논문을 썼으며, 교수(敎授) 자격(資格) 논문은 “역대기서에 나타난 역사상”(Das Geschichtsbild des Chronitischen Werkes)이라는 주제로 썼다.

그는 1930년에 라이프지히 대학에서 대학강사(Privatdozent) 생활을 한 후 1934-1945년에는 예나(Jena) 대학에서 교수 생활을 하였으며 1945-1949년에는 괴팅겐(Goettingen) 대학으로 옮겨서 교수 생활을 계속하였다. 그리고 그는 괴팅겐 대학의 교수 재직 기간 동안의 1944-1945년 사이에는 독일 군대의 징집을 받아 군대생활을 한 적도 있었으나 1949년에는 하이델베르그(Heidelberg)로 옮겨 1967년까지 즉 그가 교수직에서 은퇴할 때까지 거기서 교수 생활을 하였다.

 

그가 그의 생신 70주년 축하식을 마치고 1주일 후에 세상을 떠나기까지 정확히 만 70년 생애 동안 남긴 저작들은 단행본으로는 18권의 권위있는 저서가 있고 학술 논문으로서는 73편의 논문이 있으며 71개의 서평을 남겨 놓았다.

 

폰 라트에게 학문적 영향을 준 것은 프록쉬(Otto Procksch)의 신학(神學)과 알트(Albrecht Alt)와 노트(Mratin Noth)의 역사학(歷史學)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므로 그의 신학을 그의 신학 방법론적 배경에 따라 정의한다면, “알트-노트의 전승사적 역사비평학을 기초로 하고 그 위에 프록쉬의 기독론적 구약신학을 융합하여 이룩한 신학”이라고 정의할 수 있을 것이다. 이것은 그의 신학이 알트-노트의 전승사적/역사신학적 구약연구에 기초하여 구약성서를 전승사에 나타난 “구원사적” 흐름에 따라 추구해갔다는 말이 된다.

 

따라서, 요약해서 말한다면, 그의 신학은 종교사적으로는 나아가지 아니하고 어디까지나 구약으로부터 신약의 그리스도에게로 나아가는 “통시적(通時的: diachronic)-구원사적(救援史的) 신학”이라는 성격을 띈 신학이었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Karl Barth(칼 바르트)

Karl Barth (May 10, 1886(1886-05-10) – December 10, 1968) (pronounced \"Bart\") was a Swiss Reformed theologian whom critics hold to be among the most important Christian thinkers of the 20th century; Pope Pius XII described him as the most important theologian since Thomas Aquinas.[1] Beginning with his experience as a pastor, he rejected his training in the predominant liberal theology typical of 19th-century European Protestantism.[2] Instead he embarked on a new theological path initially called dialectical theology, due to its stress on the paradoxical nature of divine truth (e.g., God\'s relationship to humanity embodies both grace and judgment).[3] Other critics have referred to Barth as the father of neo-orthodoxy[2] — a term emphatically rejected by Barth himself.[4] The most accurate description of his work might be \"a theology of the Word.\"[5] Barth\'s theological thought emphasized the sovereignty of God, particularly through his innovative doctrine of election.

 

 

칼 바르트

카를 바르트카를 바르트(Karl Barth, 1886년 5월 10일~1968년 12월 10일)은 스위스의 개혁교회 목사이자 신학자이다. 예수를 도덕적으로 모본을 보인 인간으로, 성서를 인간의 종교적인 경험의 기록이요, 윤리적인 지침서로 이해하던 자유주의 신학에 반대하여, 그리스도인들이 헌신적으로 복종해야 하는 하느님의 말씀 예수 그리스도를 강조하였다. 그의 이러한 신학적인 성격을 신정통주의라고 부른다.

 

구 자유주의 신학과의 결별 [편집]

신학자 프리드리히 프리츠 바르트의 장남인 카를 바르트는 유년기와 청년기를 베른에서 보냈으며, 1904년 베른 대학교, 베를린대학교, 튀빙겐 대학교에서 공부하였다. 신학생 카를 바르트는 교수들의 영향으로 당시 유럽신학계의 주류였던 구 자유주의 신학를 배웠다. 1911년부터 1921년까지 스위스 작은 마을 자펜빌의 교회에서 목사로 목회하면서 자본가가 노동자를 착취하는 잘못된 사회를 바로잡고자 하였다. 당시 자유주의 신학을 따르던 그에게 하나님의 나라는 하나님의 질서와 통치[1]가 아닌, 사회정의와 평등이 실현되는 현실 속의 체제였기 때문이다. 그래서, 자본가들로부터는 \'빨갱이 목사\'(Red Pastor)라는 비난을 받았고, 일부 공장주들은 개신교에서 로마 가톨릭으로 교파를 바꾸는 일도 있었다 한다.

 

그는 자신이 배운 자유주의 신학에 대해서 한계를 느끼게 되는데, 그 이유는 죄를 미워하는 하느님의 거룩함과 정의로운 심판에 대해 설교하지 않는 그리고 성서(성경)를 기독교인들이 하나님의 말씀이 아닌, 윤리책으로 오해하는 자유주의 신학의 잘못들을 발견했기 때문이다. 특히 1914년 8월 자유주의 신학자들의 대부분이 전쟁을 지지한 \'어둠의 날\'은 그에게 자신이 배운 자유주의 신학에 대해 환멸을 느끼게 한다. 이때부터 그는 하나님은 인간을 심판하시는 분이라고 반박하여 하나님의 심판을 가르치지 않는 자유주의 신학을 신랄하게 비판하였다. 당시 로마 가톨릭 신학자 카를 아담은 \'카를 바르트가 자유주의 신학자들의 놀이터에 폭탄을 던졌다\'고 말할 정도로 유럽신학계의 충격은 컸는데, 카를 바르트 자신도 \'나는 우연히 잡은 교회종의 줄을 잡아당겨, 마을 사람들이 모두 잠에서 깨게 한 사람 같았다\'고 할 정도였다.

 

개신교 신학자 박만 부산장신대 교수는 바르트 신학을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3]

말씀 중심, 예수 그리스도 중심의 신학

바르트 신학의 특징은 하나님 말씀에 대한 신뢰였다. 바르트는 \"하나님은 말씀하신다.\"(Deus Dixit)라는 명제를 가지고 말씀 중심의 신학을 전개했다. 철저히 하나님말씀을 높이고, 존중하는 신학을 전개한 것이다. 여기서 말씀은 사람으로 오신 말씀(Logos) 예수 그리스도를 뜻하므로, 바르트 신학은 그리스도 중심의 신학을 말한다. 그는 신학의 출발점과 귀결점을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자신을 계시한 하나님을 있는 그대로 가르치는 데 있다고 보았다. 따라서 바르트는 성서가 말하는 예수 그리스도를 떠나서는 하나님에 대해서 말할 수 없다고 보았는데, 이는 하나님의 말씀이 아닌, 기복신앙[4]과 윤리를 가르쳐 온 일부 한국교회에 시사하는 바가 있다.

 

교회중심의 신학

바르트는 신학은 교회가 하나님 말씀을 분별하고 실천하게 하는 데 있다고 보았다. 즉, 신학자 카를 바르트는 교회에게는 신학을 중요하게 생각하고, 신학의 지혜에 따라 교회를 이끌 책임이, 신학자에게는 교회에 대해 생각하고, 교회에 생명을 불어넣는 책임이 있다고 본 것이다.

 

예언자적 신학

바르트는 구약성서에 나오는 예언자들처럼 하나님의 말씀으로 시대를 분별하고, 인도해야 한다고 보았다.그래서 바르멘 선언을 형제교회 성직자들과 함께 발표할 수 있었던 것이다.

 

 

 

 

에른스트 블로흐 [Ernst Bloch, 1885.7.8~1977.8.4]

독일의 철학자. 하이델베르크대학교에서 막스 베버에게 배우고 야스퍼스·루카치와 사귀었다. 1918년 망명 중인 스위스에서 《유토피아의 정신》을 간행하였다. 1938년 미국으로 이주하였으며, 모스크바로 망명한 루카치와 ‘표현주의 논쟁’을 전개하였다.

루트비히스하펜암라인 출생. 유대인 철도 관리의 아들로 태어나 하이델베르크대학교에서 막스 베버에게 배우고 야스퍼스·루카치와 사귀었다. 1918년 망명 중인 스위스에서 《유토피아의 정신》을 간행하였다. 1920년 독일로 돌아와 1922년 《토마스 뮌처》를 간행하였다. 이 때문에 1933년 나치스의 박해를 받아 다시 스위스로 망명하였다. 이 동안에 《이 시대의 유산(遺産)》(1935)을 집필하였다. 1938년 미국으로 이주하였으며, 모스크바로 망명한 루카치와 ‘표현주의 논쟁’을 전개하였다. 그뒤 동독의 라이프치히대학교, 서독의 튀빙겐대학교에서 강의하며 《자연권과 인간의 존엄》(1961) 《이화(異化)》(1962) 《그리스도교 안의 무신론》(1968) 《유물론의 문제》(1972) 등의 저술을 남겼다.

Christoph Blumhardt

Christoph Blumhardt (1842-1919) was a German Lutheran theologian and one of the founders of Christian Socialism in Germany and Switzerland. He was a well-known preacher. In 1899 he announced his support for socialism and joined the Social Democratic Party of Germany; for this, he lost his position as minister. The next year, he was elected to the state parliament of Württemberg.

 

As World War I broke out, he declared his belief in a coming Kingdom of God, declaring \"we live in the time before a massive change in the world. This darkness will be vanquished through the Lord Jesus Christ.\"

 

He was a significant influence on the theologians Karl Barth, Hermann Kutter and Leonhard Ragaz, who were also Christian socialists.

 

블룸하르트 (Johann Christoph Blumhardt 1805∼1880)

독일 프로테스탄트교회 목사. 슈투트가르트 출생. 크리스토프 프리드리히 블룸하르트의 아버지이다. 튀빙겐대학 신학부를 졸업하고 각지의 교회에서 일한 뒤, 메트링겐교회의 목사가 되었다. 이 교회의 회원 고틀리빈 디투스의 질병과의 싸움, 그 치유를 통하여 <예수는 승리자>라는 확신을 얻게 되어 그 교회를 중심으로 독특한 신앙각성운동이 일어났다. 1852년에는 바트보르로 옮겨 그곳의 요양소를 경영하고 신체적·정신적 환자의 친구가 되었다. 말년에는 종말대망(終末待望)의 자세를 강하게 나타냈고, 제1차세계대전 전후에 시작된 신학의 종말론적 조류의 선구자로 일컬어졌다. 아들과 함께 K. 바르트 등에게 커다란 영향을 주었다.

 

Bonhoeffer

Born February 4, 1906 (1906-02-04)

in Breslau, Germany

Died April 9, 1945 (1945-04-10) (age 39) in Flossenbürg concentration camp

Church Evangelical Church of the old-Prussian Union

Confessing Church

Education Doctorate in theology

Writings Author of several books and articles (see below)

Congregations served Zion\'s Church congregation, Berlin

German-speaking congregations of St. Paul\'s and Sydenham, London

Offices held Associate lecturer at Frederick William University of Berlin (1931-1936)

Student pastor at Technical College, Berlin (1931-1933)

Lecturer of Confessing Church candidates of pastorate in Finkenwalde (1935-1937)

Dietrich Bonhoeffer (German pronunciation: [ˈdiːtrɪç ˈboːnhøfɐ] (February 4, 1906 – April 9, 1945) was a German Lutheran pastor and theologian. He was also a participant in the German Resistance movement against Nazism, a founding member of the Confessing Church. His involvement in plans by members of the Abwehr (the German Military Intelligence Office) to assassinate Adolf Hitler resulted in his arrest in April 1943 and his subsequent execution by hanging in April 1945, shortly before the war\'s end. His view of Christianity\'s role in the secular world has become very influential.[1]

 

 

 

 

디트리히 본회퍼 [Dietrich Bonhoeffer, 1906.2.4~1945.4.9]

독일 고백교회의 목사이자 신학자이다. 히틀러 정권 하에서 반나치스운동을 펼쳤으며 히틀러 암살계획이 실패하자 1943년 게슈타포에게 체포되어 강제수용소에서 처형되었다.

1906년 2월 4일 독일 프로이센 브레슬라우(현 폴란드 브로츠와프 Wroclaw)에서 출생하였다. 아버지는 신경정신과 의사였으며 어머니는 독실한 기독교도 였다. 그는 8명의 형제 중 6번째였다. 튀빙겐대학 ·베를린대학에서 신학을 공부하고 이탈리아 로마에서도 수학하였다. 미국 유학 후 베를린으로 돌아와 목사가 되었다. 신은 전지전능하지 않고 나약하며 그 나약함으로 인간을 구제하기 위해 강림했다고 역설했다. 당시 그의 신학사상은 직선적이고 과격한 것으로 받아들여 지기도 하였다. 1931년 베를린 공과대학의 강사가 되어 히틀러의 나치스가 정권을 잡은 뒤에도 반(反)나치스의 자세를 고수하였으며, 1935년 비합법적인 포교활동을 하였다는 죄목으로 교수자격이 박탈되었다. 제2차 세계대전이 일어나기 직전에 강연여행 중이던 미국에서 귀국하였고, 1940년에는 강연 ·집필 금지처분을 받았다.

 

1942년 국방군의 빌헬름 카나리스 제독, 오스터 장군, 몰트케 백작 등과 함께 반나치스 지하조직을 주도하였다. 하지만 이러한 사실이 발각되자 1943년 게슈타포에게 체포되었으며 베를린의 터겔형무소에 수감되었다. 그는 수감된 동안 히틀러 암살계획을 세우고, 1944년 7월 20일 스타우펜베르크 대령 등 동지들과 함께 히틀러 암살을 시도하였다. 폭약이 터졌지만 히틀러는 살아남았고 그의 동지들은 모두 체포되어 처형되었다. 본회퍼는 1945년 4월 미군의 진출 직전 플뢰센베르크의 수용소에서 처형되었다. 1951년 《옥중서간》이 출판되었다.

Günther Bornkamm

Günther Bornkamm (1905 – 1990) was a German New Testament scholar and Professor of New Testament at the University of Heidelberg.

He was a student of Rudolf Bultmann with Ernst Käsemann (Tübingen), Ernst Fuchs (Marburg) and Hans Conzelmann (Göttingen).

He was a proponent of the Second Quest for the Historical Jesus (Albert Schweitzer) and suggested a tighter relationship between Jesus and the theology of the early church (in contrast to the \'First\' and \'No Quest\' periods ending in 1953).

Numbered among his opponents, Rudolf Bultmann argued for a divorce between the two, but their approaches remain similar in many aspects.

The work by Ernst Käsemann is also valuable for understanding Bornkamm\'s work.

 

 

Emil Brunner

Heinrich Emil Brunner (December 23, 1889 – April 6, 1966) was a Swiss Protestant (Reformed) theologian. Along with Karl Barth (see Relationship with Karl Barth), he is commonly associated with neo-orthodoxy or the dialectical theology movement.

Emil Brunner was born in Winterthur, near Zurich, Switzerland.

 

He studied at the universities of Zurich and Berlin, receiving his doctorate in theology from Zurich in 1913, with a dissertation on The Symbolic Element in Religious Knowledge. Brunner served as pastor from 1916 to 1924 in the mountain village of Obstalden in the Swiss Canton of Glarus. In 1919–1920 he spent a year in the United States studying at Union Theological Seminary in New York.

Brunner undoubtedly holds a place of prominence in Protestant theology in the 20th century and was one of the four or five leading systematicians.

 

에밀 브루너 [Emil Brunner, 1889.2.23~1966.4.6]

스위스의 프로테스탄트 신학자이자 변증법적 신학 창시자의 한 사람이다. 1924년부터 1953년까지 취리히대학교 조직신학·실천신학 교수를 역임하였다.

 

빈터투어 출생. 대학 졸업 후 영국에서 고등학교 교사로 근무하다가 1924년부터 1953년까지 취리히대학교 조직신학·실천신학 교수를 역임하였으며, 한때(1942∼1944) 총장도 지냈다. K.바르트 등의 초기 변증법 신학운동에 참가, 슐라이어마허를 비판한 《신비주의와 언어(言語)》(1924)를 발표하였다.

 

자연신학의 가부(可否)를 둘러싸고 바르트와 논쟁하여 신(神)과 인간의 결합점으로서의 이성을 인정한 《자연과 은총》(1934)을 썼는데, 바르트로부터 《부(否)》라는 논문으로 논박을 당하였다. 그후에도 바르트와 여러 차례 논쟁을 벌였다.

 

마르틴 부버 [Martin Buber, 1878.2.8~1965.6.13]

독일의 유대인 사상가. 시오니즘의 문화운동에 종사하며 예루살렘의 헤브라이대학에서 사회철학 교수도 지냈다. 헤브라이어 성서를 독일어로 번역하기도 하였다. 그는 유대적 신비주의의 유산을 이어받아 유대적 인간관을 현대에 살리려고 하였다.

빈 출생. 빈대학에서 학위를 받고 시오니즘의 문화운동에 종사하여 그 기관지와 도서출판에 손대는 한편 경건주의 및 동양철학을 연구하고, 헤브라이어 성서를 독일어로 번역하였다. 1923~1933년 프랑크푸르트암마인대학에서 비교종교학을 강의했고 1938~1951년에는 예루살렘의 헤브라이대학에서 사회철학 교수로 있었다.

 

그는 유대적 신비주의의 유산을 이어받아 유대적 인간관을 현대에 살리려고 하였다. 그는 유대적 인간은 감수적·객관적이기보다도 발동적(發動的)·주체적이며 실체내(實體內)가 아니라 오히려 관계내(關係內)에서 산다고 생각하였다. 여기에서 ‘나’와 ‘너’의 연관이 그의 철학의 중심 문제로 수립되어 독자적인 실존주의적 사상이 전개됨과 동시에, 사회와 국가의 관계를 묻고, 마르크스주의를 배격하였으며 오히려 ‘유토피아에의 길’을 탐색하였다. 주요저서에 《인간의 문제 Das Problem des Menschen》(1948) 《유토피아에의 길 Pfade in Utopia》(1950) 《사회와 국가》(1952) 등이 있다.

 

 

돌프 불트만 [Rudolf Bultmann, 1884~1976]

독일의 프로테스탄트 신학자로 신약성서의 양식사적(樣式史的) 연구를 개척하였다. 변증법적 신학운동의 추진가였다.

올덴부르크 근교 출생. 오랫동안 마르부르크대학의 교수직에 있었다. 신약학자(新約學者)로서 신약성서의 양식사적(樣式史的) 연구를 개척하였으며, 변증법적(辨證法的) 신학운동(神學運動)의 추진가였다. 제2차 세계대전 후에 그가 제창한 성서의 비신화화론(非神話化論)은 큰 반향을 불러일으켰으며, 이와 표리일체(表裏一體)를 이루는 해석학(解釋學)의 문제는 전후(戰後) 신학의 한 주제가 되어, 그 영향하에서 불트만 학파가 성립하였다. 주요 저서에는 《예수》(1926) 《신약성서의 신학》(3권, 1948∼1953) 등이 있다.

John Calvin

Sixteenth-century portrait of John Calvin by an unknown artist. From the collection of the Bibliothèque de Genève (Library of Geneva)John Calvin (Middle French: Jean Cauvin; 10 July 1509 – 27 May 1564) was an influential French theologian and pastor during the Protestant Reformation. He was a principal figure in the development of the system of Christian theology later called Calvinism. Originally trained as a humanist lawyer, he broke from the Roman Catholic Church around 1530. After religious tensions provoked a violent uprising against Protestants in France, Calvin fled to Basel, Switzerland, where in 1536 he published the first edition of his seminal work Institutes of the Christian Religion.

Calvin was influenced by the Augustinian tradition, which led him to expound the doctrine of predestination and the absolute sovereignty of God in salvation.

Calvin\'s writing and preachings provided the seeds for the branch of theology that bears his name. The Presbyterian and other Reformed churches, which look to Calvin as a chief expositor of their beliefs, have spread throughout the world.

 

Final years (1555–1564)

John Calvin at 53-years-old in an engraving by René Boyvin.Calvin\'s authority was practically uncontested during his final years, and he enjoyed an international reputation as a reformer distinct from Martin Luther.[48] Initially, Luther and Calvin had mutual respect for each other. However, a doctrinal conflict had developed between Luther and Zürich reformer Huldrych Zwingli on the interpretation of the eucharist. Calvin\'s opinion on the issue forced Luther to place him in Zwingli\'s camp. Calvin actively participated in the polemics that were exchanged between the Lutheran and Reformed branches of the Reformation movement.[49] At the same time, Calvin was dismayed by the lack of unity among the reformers. He took steps toward rapprochement with Bullinger by signing the Consensus Tigurinus, a concordat between the Zürich and Geneva churches. He reached out to England when Archbishop of Canterbury Thomas Cranmer called for an ecumenical synod of all the evangelical churches. Calvin praised the idea, but ultimately Cranmer was unable to bring it to fruition.[50]

 

Calvin\'s greatest contribution toward the English-speaking community was through his sheltering of Marian exiles in Geneva starting in 1555. Under the city\'s protection, they were able to form their own reformed church under John Knox and William Whittingham and eventually carried Calvin\'s ideas on doctrine and polity back to England and Scotland.[51] However, Calvin was most interested in reforming his homeland, France. He supported the building of churches by distributing literature and providing ministers. Between 1555 and 1562, over one hundred ministers were sent to France. These efforts were funded entirely by the church in Geneva, as the city council had refused to become involved in missionary activities at the time. Henry II severely persecuted Protestants under the Edict of Chateaubriand and when the French authorities complained about the missionary activities, Geneva was able to disclaim responsibility.[52]

 

존 칼빈

장 꼬뱅(Jean Cauvin, 장 칼뱅의 본명)은 1509년 7월 10일, 프랑스 북부 피카르디 지역의 누와용이라는 조그마한 마을에서 태어났다. 누와용이란 도시는 한때 성 머다드(St. Merdad) 성 엘오이워스 (St. Eloiwas)와 같은 주교들이 살았던 유명한 곳이었다. 또한 후일 신성 로마 제국 황제에 즉위한 카롤루스 대제가 768년 당시 누우스트리아(라틴어: Neustria, 새로운 땅)이라 불린 서 프랑크 왕국의 왕으로 즉위한 곳이며, 987년에는 카페 왕조의 창시자이자 프랑스의 왕이었던 위그 카페가 왕으로 즉위한 곳이었다. 역사가 윌 듀란트에 따르면 누와용이 교회와 감독에 의하여 지배받는 교회 도시였으며, 이는 깔뱅의 신정정치의 개념에 많은 영향을 주었다. 여기서 처음부터 칼뱅은 하나님의 이름으로 성직자들에 의하여 사회가 지배되는 신정정치의 한 예를 보았다고 한다. [1] 교회도시라는 누와용의 특징으로 인해 칼뱅은 어린 시절부터 하나님의 다스림이 자신의 삶의 영역에서 가깝게 느꼈다. 칼뱅의 이런 의식은 제네바의 종교개혁에 큰 영향을 주었다.

 

그의 아버지 제라르 꼬뱅(Gérard Cauvin)은 교회 서기였으며 어머니 쟌느 르프랑(Jeanne Lefranc)은 칼뱅이 어릴 때 사망했다. 칼빈의 어머니는 깜브레(Cambrai)의 여인숙 주인의 딸인 쟌느 르 프랑끄(Jeanne Le Franc)이었다. 제라드는 노용에서 2 마일 쯤 떨어진 항구로서 외스(Oise)강을 가로지르는 퐁 레베크 (Pont l\'Eveque)라는 작은 마을에서 사공(boatman)을 하거나 아니면 물통을 만들고 수리하는 일에 종사했던 것으로 알려진다. 일반적으로 칼빈은 아버지의 예리하고 조직적인 두뇌를 물려 받았으며 어머니의 경건심을 이어 받았다고 알려진다. 물론 그의 용모는 아버지를 닮았다고 한다. 그의 아버지는 누와용 주교 비서 그리고 후에 대성당 참사회 소송 대리인과 그리고 주교의 재정 공중인이 되었다. 이렇게 교회와 관련된 제라드의 직업은 부르주아로 신분의 상승을 의미하였고 노용에 있는 귀족들과 좋은 관계를 갖게 했고 후에 칼빈으로 하여금 귀족들의 자녀들과 함께 교육을 받는 계기가 된다.[2]

 

제라르과 잔느 르프랑 사이에는 5명의 아들이 있었다. 첫째 샤를르(Charles)는 로마 가톨릭의 사제가 되었지만 1537년 이단으로 고발되어 파문된 채 사망했다. 둘째가 칼뱅이었고, 셋째인 앙뚜완느(Antoine)는 제네바에서 칼뱅과 합류하여 칼뱅의 신실한 협력자로 일했다. 그리고 다른 두 명의 동생인 앙뚜완느와 프랑수와(François)는 어린 나이에 사망했다.[3]

 

칼뱅의 아버지는 아내가 사망한 후 재혼하여 두 명의 딸을 더 낳았다. 칼뱅의 두 이복동생 가운데 마리(Marie)는 두 오빠를 따라 제네바로 와서 살았고, 이름이 알려지지 않은 다른 한 명은 누와용에 남았다.

 

 

 

테야르드샤르댕 [Pierre Teilhard de Chardin, 1881.5.1~1955.4.10]

프랑스의 가톨릭계 신학자·철학자·인류학자. 극동(주로 중국)과 남아프리카에서 생물학을 연구하고 많은 발굴에 참가했으며 북경원인 발견은 유명하다. 많은 저서를 통해 생물학·인류학에 입각한 철학사상을 그려내어 세계의 비전에 일치되는 인간의 정신을 보였다. ‘진화자로서의 그리스도’ 론을 주창했다.

오르신 출생의 예수회(會) 회원. 1920년 파리의 가톨릭 학원에서 지질학 ·생물학을 강의하였다. 극동(주로 중국)과 남아프리카에서 생물학을 연구하고 그 동안에 많은 발굴에 참가하였는데, 북경 원인(北京原人)발견은 유명하다. 1950년 과학아카데미 회원, 1951년 이후는 뉴욕의 웨나 그렌 연구소의 인류학 부문에서 인류학 연구에 종사하였다.

 

많은 저서를 통하여 생물학 ·인류학에 입각한 철학사상을 그려내어 세계의 비전에 일치되는 인간의 정신을 보였다. 진화가 노리는 인간의 뛰어난 위치를 주장하여 진화론을 인정하였는데, 그 도달점으로, 그리고 창조의 끊임없는 진보의 추진자로서의 그리스도를 생각하였다. 이것이 그가 주장한 ‘진화자로서의 그리스도’의 이론이다.

Oscar Cullmann

Oscar Cullmann (25 February 1902, Strasbourg - 16 January 1999, Chamonix) was a Christian theologian in the Lutheran tradition. He is best known for his work in the ecumenical movement, being in part responsible for the establishment of dialogue between the Lutheran and Roman Catholic traditions. Because of his intense ecumenical work, Cullmann\'s Basel colleague Karl Barth joked with him that his tombstone would bear the inscription \"advisor to three popes.\" He was invited to be an observer at the Second Vatican Council.[1]

 

Cullmann was born in Strasbourg (then in Germany) and studied classical philology and theology at the seminary there. In 1926 he accepted an assistant professorship, a position previously held by Albert Schweitzer.

Cullmann\'s studies on Christian eschatology and Christology drove him to propose a third position over against the popular positions of C. H. Dodd and Albert Schweitzer, known as \"redemptive history\". He wrote that Jesus Christ was the midpoint of sacred history, which informs general history, and which runs linearly from creation to consummation.[1] He stressed the objective reality of sacred history against the existentialist interpretation of Rudolf Bultmann, a fellow German theologian.

Upon his death at age 96, the World Council of Churches issued a special tribute to Cullmann in honor of his ecumenical work.

 

Bernhard Duhm

Bernhard Lauardus Duhm (October 10, 1847 – November 1, 1928) was a German-Swiss theologian born in Bingum, today part of Leer, East Frisia.

 

He studied theology at the University of Göttingen, where he had as instructors Albrecht Ritschl (1822-1889), Heinrich Ewald (1803-1875) and Julius Wellhausen (1844-1918), with the latter becoming a good friend and colleague to Duhm. In 1873 he became a lecturer at Göttingen and subsequently an associate professor of Old Testament studies (1877). In 1888 he relocated to the University of Basel, where he was one of the more influential Old Testament scholars of his time.

 

Duhm is remembered for his exegetical work on the prophets of the Old Testament, particularly studies dealing with the complexities of the Books of Jeremiah and Isaiah. Regarding the Book of Isaiah, he provided in-depth analysis of the \"Deuterojesaja\" (Second Isaiah, chapters 40-55), and the so-called \"Tritojesaja\" (Third Isaiah, chapters 56-66).

 

He was the father of three sons, Hans (1878-1946) Dietrich (1880-1940) and Andreas (1883-1975), all of whom were professional chess players. Bernhard Duhm died in Basel on November 1, 1928 as the result of car accident.

 

Gerhard Ebeling

Gerhard Ebeling (1912-2001) was a student of Rudolf Bultmann at Zurich University. He was a prominent participant in the movement known as \"the New Quest for the historical Jesus\"[1]

 

Walther Eichrodt (August 1, 1890, Gernsbach, Baden - May 20, 1978, Basel) was a German Old Testament scholar and Protestant theologian.

He taught as a professor at the Basel University (1922-1960).

 

Eichrodt believed that the book of Genesis was added as a prologue to the Old Testament after the writing of Exodus had been

 

Otto Eissfeldt

Otto Eissfeldt (September 1, 1887 - April 23, 1973) was a German Protestant theologian, known for his work on the Old Testament and comparative near-east religious history. His magisterial 860-page The Old Testament: An Introduction (1934, 1965), giving a detailed literary-critical assessment of the history of the formation of each part of the Old Testament on the basis of the documentary hypothesis, has been called the \"best of its kind\".[1]

 

프리드리히 고가르텐 [Friedrich Gogarten, 1887.1.13~1967.10.16]

독일의 프로테스탄트 신학자이자 변증법적 신학의 대표자 중의 한 사람이다. 브레슬라우대학과 괴팅겐대학의 조직신학 교수를 역임하였다. 주요 저서에 《비신화화(非神話化)와 교회》 등이 있다

 

독일 도르트문트에서 출생하였고 하이델베르크 대학에서 신학을 전공하였다. 1917년 목사로 활동하였고 1925년 예나 대학교 신학부에서 강의하였다. 1931년 브레슬라우 대학교수를 역임하였고 1935년 이후부터 은퇴할 때까지 괴팅겐대학에서 조직신학(組織神學) 교수로 재직하였다.

 

변증법적(辨證法的) 신학의 대표자 중 한 사람이며, 실존주의적 경향이 강하여 신학적 인간학을 주장하였다. 루터의 이른바 이신득의(以信得義) 교리를 발전시켜 신앙실재론을 창도하였고 하느님의 말씀을 개인의 종교적인 경험과 체험에서 율법과 복음으로 경험될 수 있는 역사적 사건으로 이해하고자 하였다. 주요저서에 《비신화화(非神話化)와 교회》(1953) 《신앙의 현실성》(1957) 등이 있다.

헬무트 골비처 [Helmut Gollwitzer, 1908.12.29~]

독일의 신학자로 제2차 세계대전 중에 포로가 되어 1945년부터 5년 동안 소련에서 억류생활을 보냈다. 옥중 수기인 《원하지 않는 곳으로 끌려가다》는 많은 독자들에게 감명을 주었다.

 

파펜하임 출생. 예나대학의 가르텐 교수와 본대학의 프리드리히 립 교수 밑에서 공부하였다. 제2차 세계대전 중에 포로가 되어 1945년부터 5년 동안 소련에서 억류생활을 보냈다. 그때의 수기가 《원하지 않는 곳으로 끌려가다》이다. 이 책은 옥중수기이기는 하나, 그의 신학사상을 바탕으로 하여 썼기 때문에 지금도 많은 독자들에게 감명을 준다.

 

1950년에 귀국, 본대학의 신학교수가 되어 교조적(敎條的) 공산주의의 경화증(硬化症)에 걸린 무신론적 공산주의 비판에 적극적인 자세를 취하였다. 1957년 서베를린 자유대학의 신학 ·철학 교수로 부임, 그리스도교 윤리를 교수하는 한편, ‘공산주의의 자유화’를 위하여 공산주의에 관한 연구도 하였다.

 

세계교회의 궁극적 목표는 소외된 인간성의 회복과 평화로운 세계공동체의 실현에 있으므로, 인류의 존속 자체를 위협하는 핵전쟁은 절대로 일어나서는 안 된다는 반전론을 폈다

Hermann Gunkel

Hermann Gunkel (1862-1932) was a German Protestant Old Testament scholar. He is noted for his contribution to form criticism and the study of oral tradition in biblical texts. He was an outstanding representative of the \"History of Religion School.\"

Gunkel became an outstanding representative of the \"History of Religions School\" (die religionsgeschichtliche Schule), which addressed the history of traditions behind the biblical text. In addition to Gunkel, the original group also included Albert Eichhorn, William Wrede, Wilhelm Bousset, Johannes Weiss, Ernst Troeltsch, Wilhelm Heitmüller, and Paul Wernle. In the beginning they were primarily concerned with the origins of Christianity, but this interest eventually broadened to include the historical backgrounds of ancient Israelite and other Near Eastern religions.

 

아돌프 폰 하르낙

(독일어: Adolf von Harnack, 1851년 5월 7일~1930년 6월 10일)은 독일의 자유주의 신학자이자, 교회사 연구가이다.

1851년 독일 도르파트(독일어: Derpat,현재 에스토니아)에서 독일인 신학교수의 아들로 태어났으며, 라이프치히(1876년),기센(1879년),마르부르크 대학교(1886년)를 거쳐 베를린 대학교(1888년-1921년)에서 가르쳤다. 1914년 독일제국 황제 빌헬름 2세로부터 귀족작위를 받아, \'하르낙의 아돌프\'라는 뜻의 아돌프 폰(Von) 하르낙이라는 이름을 갖게 되었다. 저서로는 1899년부터 1990년까지 베를린 대학교 학생 600여 명에게 강의한 내용을 출간한 《기독교의 본질》(독일어: Wesen des Christentums)[1],《교리사》등이 있다.[2]

 

신학 [편집]

신학적인 업적 [편집]

1873년부터 1912년까지 많은 종교 논문을 썼으며, 사회적인 복음을 주창했다. 19세기 독일교회에는 더욱 고도화된 성서비평학이 왕성했으며, 성서(성경)과 역사적 예수에 대한 역사비평적인 방법이 표준화되었다. 이는 모두 하르낙의 업적을 따르는 것이다. 하르낙은 초대 기독교 문서들에 대한 그리스 철학의 영향을 캐내었으며, 초대 교회의 교리에 의문을 제기했다. 그는 요한 복음서를 배척하고 공관 복음서를 중시했다.

 

교리사 연구 [편집]

하르낙은 《교리사》(1886년-1889년)를 쓸 정도로 뛰어난 교리사학자였는데, 그가 제일 관심을 가진 분야는 터툴리안, 키프리안주교등의 초대교회 교부들이었다. 그는 기독교가 그리스철학의 영향으로 헬라화되면서, 예수의 가르침이 사도 바울로에 의해 예수에 대한 종교로, 더 나아가 예수를 성자 하느님으로 신격화하는 성육신 교리로 변형되었으며, 복음은 각 시대마다 역사형식은 달랐지만, 영원한 진리를 담고 있다고 보았다. [3]

 

그리스도론 [편집]

하르낙은 예수의 가르침을 하느님 나라와 도래,성부와 인간 영혼의 무한한 가치, 더욱 숭고한 정의와 사랑의 계명을 주제로 하고 있으며, 예수가 가르친 하느님 나라는 영원하다고 보았다.[4]

 

사도신조 수용논쟁 참여 [편집]

근대 유럽교회에서는 사도신조에 대한 의문이 제기되었다. 사도신조가 정말 사도로부터 계승(사도적 전승)되었는지, 기독교 교리를 충분히 설명하는지, 신화적 표현들을 기독교신앙으로 받아들일 수 있는가에 대해 의문이 든 것이다. 정통주의기독교인들도 사도신조의 교리적 불충분성이 지적했다. 결국 1871년 세례 집전시 어느 목사가 사도신조를 사용하지 않아, 성직을 해임당할 정도로 사도신경 수용논쟁은 독일 개신교회내에서 치열해졌고, 아돌프 폰 하르낙은 이 문제에 대해 개입하지 않을 수 없게 되었다. 그는 사도신조를 대신한 신조(Creed)를 가져도 된다고 보았으며,예수의 동정녀 탄생을 비롯한 일부 내용에 대해 비판적인 모습을 보였다. 하지만 그는 일부에서의 해석과는 달리, 사도신조 수용에 대해서는 반대한 것은 아니다 .단지 사도신조의 문자적 해석을 해야만 믿음 좋은 신자이거나 성숙한 신학을 가진 것은 아니며, 사도신조의 기본적인 내용에 대해 동의한다면 기독교인으로 남을 수 있다고 보았다. 즉, 사도신조 수용을 강제하는 것에 대해 반대한 것이지, 사도신조를 반대한 것은 아니다.[5]

 

Joachim Jeremias

He was born in Dresden and spent his formative years in Jerusalem, where his father, Dr Friedrich Jeremias, worked as a Propst (provost) for the Lutheran Erlöserkirche (German name: Church of the Redeemer). He studied Lutheran theology and oriental languages at Tübingen and Leipzig. In Leipzig he obtained both a \"Doctor philosophiae (Dr.phil.)\" (1922) and a \"Doctor theologiae (Dr.theol.)\" (1923) degree (PhD and Doctor of Divinity in English), followed by his Habilitation (1925). His mentor was the renowned Gustaf Dalman.

 

After other teaching assignments, Jeremias was appointed in 1935 to the chair of New Testament studies at the Georg-August University of Göttingen, where he taught until his retirement in 1968. In 1976, Jeremias moved from Goettingen to Tübingen, where he died in 1979.

 

His achievements found national and international acknowledgment, recognized by the admission into the Göttingen Academy of Sciences in 1948 and the award of honorary doctorates from the universities of Leipzig, St Andrews (Scotland), Uppsala (Sweden), and Oxford (Britain). He was also made a member of the Royal Dutch Academy of Sciences and the British Academy. Finally, in 1970 he was made an honorary fellow of the Deutsche Verein zur Erforschung Palästinas (German association for research on Palestine).

 

Carl Jung(칼 융)

Jung in 1910

Born 26 July 1875(1875-07-26)

Kesswil, Thurgau, Switzerland

Died 6 June 1961 (aged 85)

Zürich, Switzerland

Influenced New Age Movement, Psychoanalysis, Adam Philips, Jackson Pollock, Northrop Frye, Oxford Group, Alcoholics Anonymous,Barbara Hannah

Carl Gustav Jung (German pronunciation: [ˈkaːɐ̯l ˈgʊstaf ˈjʊŋ]; 26 July 1875 – 6 June 1961) was a Swiss psychiatrist, an influential thinker and the founder of analytical psychology (also known as Jungian psychology). Jung\'s approach to psychology has been influential in the field of depth psychology and in countercultural movements across the globe. Jung is considered as the first modern psychologist to state that the human psyche is \"by nature religious\" and to explore it in depth.[1] He emphasized understanding the psyche through exploring the worlds of dreams, art, mythology, religion and philosophy. Though not the first to analyze dreams, he has become perhaps the most well known pioneer in the field of dream analysis. Although he was a theoretical psychologist and practicing clinician, much of his life\'s work was spent exploring other areas, including Eastern and Western philosophy, alchemy, astrology, sociology, as well as literature and the arts.

 

Jung emphasized the importance of balance and harmony. He cautioned that modern people rely too heavily on natural science and logical positivism and would benefit from integrating spirituality and appreciation of unconscious realms. He considered the process of individuation necessary for a person to become whole. This is a psychological process of integrating the conscious with the unconscious while still maintaining conscious autonomy.[2] Individuation was the central concept of analytical psychology.[3]

 

Jungian ideas are not typically included in curriculum of most major universities\' psychology departments, but are occasionally explored in humanities departments.[citation needed][dubious – discuss] Many pioneering psychological concepts were originally proposed by Jung, including the Archetype, the Collective Unconscious, the Complex, and synchronicity. A popular psychometric instrument, the Myers-Briggs Type Indicator (MBTI), has been principally developed from Jung\'s theories.

Jung died in 1961 at Küsnacht, after a short illness.[20][21]

 

칼 융

카를 구스타프 융(Carl Gustav Jung [ˈkarl ˈgʊstaf ˈjʊŋ], 1875년 7월 26일 - 1961년 6월 6일)은 스위스의 정신의학자로 분석심리학의 개척자이다.

목사의 아들로 태어나 가문의 전통을 이어받지 않고 바젤대학교와 취리히대학교에서 의학을 공부하여 정신과의사가 되었다. 부르크휠츨리 정신병원에서 일하면서 병원원장이었던 오이겐 블로일러의 연구를 응용해 심리연구를 하기 시작하였으며 이전 연구자들이 시작한 연상검사를 응용하면서 자극어에 대한 단어연상을 연구하였다. 이 연상은 비도덕적이며 금기시되는 성적인 내용을 담고 있는 경우가 많아서 의식적으로 제외된다. 그는 이 상태를 설명하기 위해 지금은 유명해진 \'콤플렉스\' 라는 단어를 사용해 이에 관련된 학설의 기초를 마련하였다. 또한 프로이트와 함께 정신분석학연구를 하기도 했지만 프로이트의 성욕중심설을 비판하고 독자적으로 연구하여 분석심리학설을 수립하였다. 그는 인간의 내면에는 무의식의 층이 있다고 생각하였고, 개체로 하여금 통일된 전체를 실현하게 하는 자기원형이 있음을 주장했다. 그는 자신의 경험으로부터 심리치료법을 개발하여 이론화하였고 심리치료를 받는 사람들에게 \'개체화\' 라는 자신의 신화를 발견하는 과정을 통해 더 완전한 인격체가 될 수 있다고 생각하였다. 그 후 취리히 연방과학기술전문대학의 심리학 교수, 바젤대학교의 의학심리학 교수로 재직하였다. 그는 85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

 

에른스트 케제만(Ernst Käsemann

(1906년 ~1998년 )은 루터교 신학자이자 신약학 교수로 마인쯔(1946~1951), 괴팅겐(1951~1959), 튀빙겐(1959~1971) 대학에서 가르쳤다.

에른스트 에른스트 케제만 (Ernst Käsemann, 1906년 ~1998년) 루터교 신학자. 에른스트 윙거 (Ernst Jünger, 1895년 ~ 1998년) 독일의 작가, 사상가.

 

위르겐 몰트만

위르겐 몰트만(Jürgen Moltmann,1926- )은 독일의 신학자이다

몰트만은 1926년 4월 8일 독일 함부르크(Hamburg)의 자유스러운 세속적 가정에서 태어났다. 그는 수학과 원자물리학을 전공하기를 원했다. 그의 우상은 아인슈타인이었다. 그는 성서보다 괴테, 쉴러의 문학 작품을 더 즐겨 읽었다. 하지만 17살이 되던 해에 전장에 투입되어 전쟁을 수행하던 그는 영국의 \'고모라 작전\'에 의해 함부르크가 엄청난 화염 속에서 무참히 파괴되는 것을 목도했다. 수많은 동료들이 산산이 부서지는 지옥과 같은 전장에서 그는 기적적으로 살아남았다. 이듬해에 전쟁 포로가 되어 벨기에와 스코틀랜드에서 3년간 수용소에 갇혀 있는 동안 그는 자신의 삶의 확실성이 무너지는 것을 경험했다. 그러던 중에 한 군목이 건네준 성서를 읽어가던 그는 성서 속에서 새로운 삶의 희망을 발견했다. 이 경험은 그에게 절망과 자포자기를 이겨내는 생명력을 선사했다. 그리하여 그는 그리스도인이 되어 고향으로 되돌아왔다. 그는 자신에게 생명력을 허락한 능력을 파악하기 위해 신학 공부의 문을 두드렸다. 이와 같은 전쟁 체험은 일평생 그의 신학이 연대적, 현실적 특징을 갖도록 방향을 지워 주었다. 개인이 경험하는 삶의 상황은 개인적이기만 한 것이 아니라 항상 사회적, 집단적 경험과 관련되어 있음을 그는 자각하게 된 것이다. 찢기고 죽임을 당한 수많은 인간들을 목도하면서 하나님을 향해 부르짖었던 그는 결코 세상에 대해 초연한 자세나 개인적 관심만을 고집할 수 없었다. 포로수용소에 신학을 공부하기 시작한 그는 석방된 후에 괴팅엔(Göttingen) 대학에서 신학을 공부하여 신학박사 학위를 취득했고, 브레멘-바써호스트(Bremen-Wasserhorst)라는 작은 마을에서 5년 동안 교회를 섬기면서 대학교수 자격을 취득하는 논문을 완성했다.

그 이후 그는 부퍼탈(Wuppertal), 본(Bonn) 대학에서 교수하였고, 1967년에 튀빙겐(Tübingen) 대학의 부름을 받아 오랫동안 가르쳤고, 지금은 현직에서 은퇴하여 명예교수로 활동하고 있다. 그 동안 그는 세계의 수많은 기관 대학의 초청을 받아 강의와 강연을 행해 왔고, 수많은 사람들에게 자극을 주었을 뿐만 아니라 그들로부터 그도 항상 많은 자극을 받아왔다. 이번의 한국 방문 동안에도 그는 학문적 천재성과 함께 뛰어난 기억력과 놀라운 정신력을 발휘했다. 아마도 그는 꽤 오래 살 것 같다. 그래서 그가 5월 12일에 서울신학대학을 방문했을 때, 필자는 그에게 다음과 같이 말했다. 선생님이 \"하나님, 왜 내가 죽지 않고 살아남았습니까?\"라고 종종 질문하셨다면, 앞으로는 이렇게 질문하셔야 할 것 같습니다. \"하나님, 왜 내가 이렇게 오래 살고 있습니까?\" 그러자 그는 빙그레 웃음을 지었다. 만약 그가 꽤 오래 산다면, 앞으로도 계속 희망의 복음을 더 힘차게 전해 주리라 믿는다.

 

 

 

 

 

Sigmund Mowinckel

Born August 4, 1884(1884-08-04)

Died June 4, 1965

Education University of Oslo

He was educated at the University of Oslo(1908; ThD 1916) (in those days Oslo was still officially called Kristiania), and from 1917 onwards he was a lecturer there. He retired in 1954.

From the 1920s onwards Mowinckel headed a school of thought on the Psalms which sometimes clashed with the Form Critical conclusions of Hermann Gunkel (see Form criticism) and those who followed in Gunkel\'s footsteps (Hans Joachim-Kraus etc). In broad terms, Gunkel strongly advocated a view of the Psalms which focussed on the two notable names for God occurring therein: Yahweh (JHWH sometimes called tetragrammaton) and Elohim. The schools of Psalm writing springing therefrom were termed \"Yahwist\" and \"Elohist\".

Mowinckel\'s approach to the Psalms differed quite a bit from Gunkel\'s. Mowinckel explained the psalms as wholly cultic both in origin and in intention. He attempted to relate more than 40 psalms to a hypothetical autumnal New Year festival

 

라인홀드 니부어

출생 1892년 6월 21일

미국 미주리 주 라이트(Wright)

사망 1971년 6월 1일

미국 매사추세츠 스탁브릿지

(Stockbridge)

국적 미국

직업 신학자

배우자 우르술라 케셀 콤프턴

(Ursula Kessel-Compton)

칼 폴 라인홀드 니부어(Karl Paul Reinhold Niebuhr, 1892년 6월 21일 ~ 1971년 6월 1일)는 개신교 신학자이다. 기독교 신앙을 현실적인 현대 정치와 외교에 접목시킨 것으로 유명하다. 현대 정의로운 전쟁(just war) 사상에 크게 기여하였다.

 

미국 미주리 주 라이트 시(Wright city)에서 독일 선교사인 구스타프 니부어(Gustav Neibuhr)목사의 아들로 태어났다. 구스타프 목사는 복음주의 개혁교회(Evangelical and Reformed Church)의 신학을 따르는 북미 복음주의 시노드(Evangelical Synod of North America)의 목사(Pastor)였다. 동생인 헬무트 리처드 니부어(Helmut Richard Niebuhr)와 함께 아버지와 같은 길을 걷기로 결심하였다. 일리노이 주의 엘름허스트 대학(Elmhurst College)에 입학하여 1910년에 졸업하였다 (同대학에는 그를 기리는 동상이 세워져 있다). 후에 미주리 주 세인트루이스(St. Louis)에 있는 에덴 신학교(Eden Seminary)에서 공부하였고, 다시 예일 대학교(Yale University)에서 1914년 신학사 학위(Bachelor of Divinity Degree, 약칭 B.D.)를 받고 알파 시그마 파이회(Alpha Sigma Phi Fraternity)의 회원이 되었다. 개신교 목사 안수를 받은 것(=정식으로 목사가 된 것)은 1915년.

 

독일 복음주의 선교 위원회(the German Evangelical mission board)는 그를 디트로이트(Detroit)로 보냈다. 도착 당시 신도의 수는 65명이었으나 1928년 그곳을 떠날 때에는 700명에 이르렀는데, 이러한 증가는 당시 자동차 산업의 붐에 이끌린 새로운 인구의 유입에 힘입었다. 산업화가 노동자들에게 끼친 비도덕화에 괴로워하여 헨리 포드를 비판하였고, 설교를 통해 노조를 조직하도록 돕거나 공장의 조립 라인이 초래하는 비인간적인 노동조건과 잘못된 근로관행에 관한 글을 썼다.

생애 전반에 걸쳐 저술과 출판활동을 계속하였으며, 1941년부터 1966년까지 잡지 《기독교와 위기》(Christianity and Crisis)의 편집자로서 일했다.

 

Martin Noth

Martin Noth (August 3, 1902 – May 30, 1968) was a German scholar of the Hebrew Bible who specialized in the pre-Exilic history of the Hebrews. With Gerhard von Rad he pioneered the traditional-historical approach to biblical studies, emphasising the role of oral traditions in the formation of the biblical texts.

Noth was born in Dresden, Kingdom of Saxony. He studied at the universities of Erlangen, Rostock, and Leipzig and taught at Greifswald and Königsberg.

 

From 1939-41 and 1943-45, Noth served as a soldier during World War II. After the war he taught at Bonn, Göttingen, Tübingen, Hamburg, and University of Basel. He died during an expedition in the Negev, Israel.

 

 

Wolfhart Pannenberg

Pannenberg was baptized as an infant into the Evangelical (Lutheran) Church, but otherwise had virtually no contact with the church in his early years. At about the age of sixteen, however, he had an intensely religious experience he later called his \"light experience.\" Seeking to understand this experience, he began to search through the works of great philosophers and religious thinkers. A high school literature teacher who had been a part of the Confessing Church during World War II encouraged him to take a hard look at Christianity, which resulted in Pannenberg\'s \"intellectual conversion,\" in which he concluded that Christianity was the best available religious option. This propelled him into his vocation as a theologian.

 

Pannenberg\'s epistemology, explained clearly in his shorter essays, is crucial to his theological project. It is heavily influenced by that of one mentor, Edmund Schlink, who proposed a distinction between analogical truth, i.e. a descriptive truth or model, and doxological truth, or truth as immanent in worship. In this way of thinking, theology tries to express the doxological truth. As such it is a response to God\'s self-revelation. Schlink was also instrumental in shaping Pannenberg\'s approach to theology as an ecumenical enterprise - an emphasis which has remained constant.

 

Pannenberg\'s understanding of revelation is strongly conditioned by his reading of Karl Barth and Georg Wilhelm Friedrich Hegel, as well as by a sympathetic reading of Christian and Jewish apocalyptic literature. The Hegelian concept of history as an unfolding process in which Spirit and freedom are revealed combines with a Barthian notion of revelation occurring \"vertically from above\". While Pannenberg adopts a Hegelian understanding of History itself is god\'s self-revelation, he strongly asserts the Resurrection of Christ as a proleptic revelation of what history is unfolding. Despite its obvious Barthian reference, this approach met with a mainly hostile response from both neo-Orthodox and liberal, Bultmannian theologians in the 1960\'s, a response which Pannenberg claims surprised him and his associates[1]. A more nuanced, mainly implied, critique came from Jürgen Moltmann, whose philosophical roots lay in the Left Hegelians, Karl Marx and Ernst Bloch, and who proposed and elaborated a Theology of Hope, rather than of prolepsis, as a distinctively Christian response to History.

 

Pannenberg is perhaps best known for Jesus: God and Man in which he constructs a Christology \"from below,\" deriving his dogmatic claims from a critical examination of the life and particularly the Resurrection of Jesus of Nazareth. This is his programmatic statement of the notion of \"History as Revelation\". He rejects traditional Chalcedonian \"two-natures\" Christology, preferring to view the person of Christ dynamically in light of the resurrection. This focus on the resurrection as the key to Christ\'s identity has led Pannenberg to defend its historicity, stressing the experience of the risen Christ in the history of the early Church rather than the empty tomb.

 

Central to Pannenberg\'s theological career has been his defence of theology as a rigorous academic discipline, one capable of critical interaction with philosophy, history, and most of all, the natural sciences. Pannenberg\'s theology has much influenced the American theoretical cosmologist Frank Tipler, most notably his theories of a closed universe and the Omega Point; see Tipler (1989, 1994, 2007).

 

볼파르트 판넨베르크

볼파르트 판넨베르크(Wolfhart Pannenberg 1928년 10월 2일에 폴란드(당시 독일), 슈체친에서 태어남)은 독일의 개신교 신학자이다.

판넨베르크는 루터교회에서 유아세례를 받았으나 어린 시절 교회를 다니지는 않았다. 16살 되던 해, 나중에 \"빛의 경험\"이라고 부르게 되는 강렬한 종교적인 경험을 하게 된다. 이 경험을 이해하기 위하며 위대한 철학자와 종교 사상가들을 공부하게 된다. 제2차 세계대전 당시 고백교회 신자였던 고등학교 문학 선생님이 판넨베르크에게 기독교에 대해 연구하라고 권했다. 이를 계기로 \"지적 회심\"을 하게 된 판넨베르크는 기독교가 현재 최선의 종교적인 선택이라고 결론을 내린다. 이를 계기로 그는 개신교 신학자가 된다.

 

판넨베르크의 신학적 경력의 가장 중심이 되는 것은 신학을 학문으로 볼 수 있다는 옹호이며, 이는 철학, 역사, 자연과학과 교류할 수 있다고 본다.

 

그의 대표작은 \"예수:신이자 인간\"일 것이다. 거기에서 그는 그리스도론을 \"아래에서부터 위로\" 구축한다. 나사렛 예수의 생에에서부터 교의를 도출하는 것이다. 그는 전통적인 칼케돈 공의회의 두 본성론 즉, 예수 그리스도는 완전한 하느님이자 참된 인간인데, 그분의 인성과 신성은 분리되지 않는다는 교리를 배척하고, 그리스도를 부활의 맥락에서 본다. 그는 부활을 그리스도의 자기정체성를 이해하는 가장 중요한 요소로 꼽는다.

 

게르하르트 폰 라트

게르하르트 폰 라트(독일어: Gerhard von Rad, 1901년 10월 21일 ~ 1971년 10월 31일)는 독일의 성직자이자 구약학에서 흥미로운 논문과 연구를 남긴 유명한 구약학자이다.

게르하르트 폰 라트는 1901년 10월 21일 남부 독일에 있는 바바리아 지역의 도시인 뉘른베르크에 사는 복음주의적인 부모 밑에서 태어났다.

 

폰 라트는 에를랑겐 대학과 튀빙겐 대학에서 교육 받았다.

 

카를 라너

카를 라너(Karl Rahner,1904년-1984년)은 독일의 로마 가톨릭 신학자이다. 익명의 그리스

1904년 독일 프라이부르크에서 출생

1924년 예수회에 입회

철학과 신학을 뮌헨, 팔켄부르크(네덜란드), 프라이부르크, 인스부르크에서 공부했다.

1932년 뮌헨에서 사제서품을 받았다.

1937년부터 인스브루크,뮌헨, 뮌스터 대학교에서도 신학자로 활동했으며, 제2차 바티칸 공의회 신학 자문으로도 활약했다. 당시 칼 라너는 독일과 유럽의 로마 가톨릭 교회가 교회의 안위를 우선시해, 나치독일의 유대인 학살에 대해 침묵한 과오에 대해 잊지 말아야 한다고 했다. 이를 계기로 로마 가톨릭 교회는 교회의 사회역사적 책임에 대한 목소리를 높이게 되었다.[1]

1971년 은퇴 후에도 학문 활동을 계속했으며, 1984년 오스트리아의 인스부르크에서 별세하였다.

저서 [편집]

《주님의 어머니 마리아》(가톨릭출판사)

《영성신학논총》(가톨릭출판사)

《누가 너의 형제냐》(분도출판사)

《침묵속의 만남》(광주가톨릭대학교 출판부)

《말씀의 청자》(가톨릭대학교 출판부)

Rolf Rendtorff

Rolf Rendtorff (born 10 March 1925) is Emeritus Professor of Old Testament at the University of Heidelberg. He has written frequently on the Jewish scriptures and is notable chiefly for his contribution to the debate over the origins of the Pentateuch (the first five books of the Old Testament.

Rendtorff was born at Preetz, Holstein, Germany. He studied theology 1945-50 at the universities of Kiel, Göttingen and Heidelberg. He undertook his doctoral studies under Gerhard von Rad, 1950-53.

 

알베르트 슈바이처

알베르트 슈바이처알베르트 슈바이처(독일어: Albert Schweitzer 1875년 1월 14일 ~ 1965년 9월 4일)는 독일의 의사, 음악가, 철학자, 개신교 신학자이자 루터교 목사이다. 슈바이처는 \'생명에 대한 경외\'[1]라는 그의 고유한 철학이 인류의 형제애를 발전시키는데 기여한 공로로 1952년 노벨 평화상을 수상하였다. 이 철학은 그가 중앙 아프리카 서부 지역의 랑바레네에서 알베르트 슈바이처 병원을 세울 때에 설립 이념이 되었던 것으로 가장 잘 알려져 있다. 1955년에는 영국 명예 메리트 훈장을 받기도 했다(honorary Member of the Order of Merit). 한편 음악가이자 오르간 연주자이기도 했던 그는 독일의 작곡가 요한 세슈바이처는 1875년 알자스의 카이제르스부르크에서 루터교 목사인 루이 슈바이처 목사의 큰아들로 태어났으며, 몸이 약한 아들의 건강을 걱정한 부모의 뜻에 따라 농촌 귄스바흐에서 자랐다. 형제로는 누나와 2명의 여동생, 남동생 1명이 있었다. 그가 태어난 알자스는 독일과 프랑스의 영토 다툼이 심하던 곳으로 그가 태어날 당시에는 독일 영토였으나, 제1차 세계 대전 후 프랑스로 넘어가 현재에 이른다. 카이제르스부르크에서의 유년시절은 슈바이처의 기독교믿음과 정신 성숙에 영향을 주었다. 루터교회 목사인 아버지는 아들이 성서를 읽으며 궁금해하는 내용을 알기 쉽게 설명해주었으며, 교우들의 대부분이 가난한 농부들이었던 주위환경은 슈바이처가 가난한 사람들에 대해 관심을 갖도록 했다. 뿐만 아니라 슈바이처의 아버지는 성찬예배[2]때 아프리카 사람들의 비참한 삶에 대해서 자주 설교했다. 이러한 성장환경은 슈바이처를 역사적 예수연구 1세대에 참여한 신학자이자, 아프리카 의료봉사자가 되는데 중요한 밑거름이 되었다. 알자스는 복잡한 역사때문에 종교적으로 개신교 신자와 로마 가톨릭 신자가 같이 살고 있었다. 이들은 교단은 달랐지만 기독교인이라는 공통점을 갖고 있었으므로, 서로의 전례에 따라 하느님을 예배했다. 이러한 유년시절의 경험은 슈바이처가 자신과 다른 사상을 존중하는 너그러움을 갖게 해주었다.

 

군대 복무 중 성령강림주일 휴가를 집에서 보냈는데, 이때 \"나는 이렇게 가족들과 행복하게 휴가를 보내는데, 이러한 행복을 나만 누려도 되는가?\"라는 생각을 했다. 어려서부터 갖고 있던 가난하고 비참한 사람들에 대한 관심이 \"나만 행복하게 살 수 없다\"라는 인식으로 성숙한 것이었다. 그래서 30세 되던 해인 1905년 의학과정에 진학했으며, 1912년에 의학 박사 학위를 받았다. 이듬해인 1913년 아내 헬레네 브레슬라우(스위스에서 별세)와 함께 프랑스령 적도 아프리카(현재 가봉 공화국)의 랑바레네에서 의료봉사를 시작했다. 통역은 백인 선교사들과 동역한 흑인 누쳉이 해주었으며, 병원건물은 선교사가 사용했던 닭장을 수리하여 사용했다. 제1차 세계대전동안에는 프랑스의 적성국가였던 독일 사람이라는 이유로 구금되었으며, 나중에는 전쟁포로로 프랑스에서 억류당하는 수모를 당했다. 하지만 전쟁이 그에게 준 가장 큰 상처는 어머니가 1916년 프랑스 군인들의 군마(軍馬)에 치여 죽은 사건이었다.[4] 그 후 독일이 제1차 세계 대전에서 패하자 슈바이처의 고향은 프랑스 영토가 되었고, 이에 따라 그는 프랑스 국적을 선택할 수 있었다. 슈바이처는 프랑스 식민지였던 가봉에서 활동하는데 어려움이 없도록, 국적을 독일에서 프랑스로 바꿨다. 1924년 아프리카 병원으로 다시 돌아온 그는 한센병 환자 거주지도 추가로 세우는 등 활발한 활동을 했다. 그의 이러한 활발한 활동은 36명의 백인 의사, 간호사 그리고 다수의 원주민 직원들의 봉사가 있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병원운영에 필요한 돈은 3년에 한 번 꼴로 유럽으로 돌아와 연주회를 열어 번 돈과 저서의 인세, 강연으로 받은 돈과 기부금으로 충당되었다. 1957년 라디오 강연과 신문 기고를 통해 핵무기에 반대하는 반핵운동을 하였으며, 1965년 랑바레네에서 그가 사랑하는 바흐의 음악을 들으면서 숨을 거두었다.

 

신학 연구와 사상 [편집]

알베르트 슈바이처는 《예수의 생애 연구사》(1913년작,원제:《라이마루스에서 브레데까지..》)에서 자유주의 신학의 예수전들이 사실은 저자가 갖고 있던 생각과 당시 시대배경을 역사적 예수에게 투사한 것이라고 규명하여,예수전들에서 묘사한 역사적 예수의 모습은 초기 자유주의 신학자들이 생각하던 도덕적으로 이상적인 인간 즉, 성인의 이미지일 뿐이지 역사적 예수의 진짜 모습이라고 할 수 없다는 것이 밝혀졌다.[5] 슈바이처는 예수가 말한 하느님의 나라를 앞으로 오게 될 종말론적인 나라로 이해하여, 하느님의 나라를 정의와 평등이 실현되는 현실속의 나라로 이해한 자유주의 신학자들의 견해를 받아들이지 않았다.제국 시기의 독일에서 태어난 그는, 예수를 바라보는 관점에 있어서 그의 생존 당시 일부 학문 집단을 중심으로 유행했던 역사적 관점에 기초하는 비종교적 접근 방식과 예수를 세상의 종말을 예언한 그리스도로 보는 전통적인 종교적 접근 방식에 모두 반대하였다.간혹 슈바이처를 예수를 윤리적으로 완전한 인간으로만 이해하여 사회선교에 헌신했다고 주장함으로써 자유주의 신학자로 이해하는 경향이 있으나, 오히려 슈바이처는 역사적 예수론에 대해 예수를 완전한 윤리적 인간으로 이해함으로써 이 투영된 것이라고 비판하였다. 슈바이처가 이해한 예수는 하느님 나라의 도래를 기대했으나 자신의 기대대로 되지 않자 스스로 고난을 불러왔으며,갈릴래아에서 그랬듯이 나를 따르라고 요청하는 분이다. [6] 슈바이처는 일생동안 현실에 근거한 보편적 도덕 윤리를 찾고자 하였으며, 또한 이것이 모든 인류에게 전파되게 하고자 노력하였다.[7] 이러한 그의 정신은 그가 생전에 남겼던 다음과 같은 말에 잘 나타나 있다.

 

\"동정심이라는 이름의 원을 모든 생명에게로 넓히기 전까지는, 인간은 진정한 평화를 느낄 수 없다.\"

(Until he extends his circle of compassion to include all living things, man will not himself find peace.)

 

\"나는 여러분의 운명을 알지는 못 하지만, 이 한 가지만은 확실히 알고 있습니다: 여러분들 중 정말로 행복할 수 있는 사람은 오직 봉사란 어떻게 해야 하는 것인지를 끊임없이 탐구하여 깨달은 사람일 것이라는 점입니다.\"

(I don\'t know what your destiny will be, but one thing I do know: the only ones among you who will be really happy are those who have sought and found how to serve.)

 

SCHLEIERMACHER, FRIEDRICH DANIEL ERNST (1768-1834)

독일 신학자·철학자. 브레슬라우 출생. 19세기 프로테스탄트 신학의 일인자이다. 개혁파 목사의 아들로 태어나 소년시절에는 헤른푸트형제단의 학교에서 교육을 받았다. 그러나 청년시절에는 경건주의에 반발하고 계몽주의를 동경하여 아버지의 반대도 무릅쓰고 할레대학에 들어갔지만 다시 경건주의로 되돌아왔다. 신학국가시험에 합격한 후 가정교사와 목사를 거쳐 1796년 베를린의 자선병원 목사가 되었다. 베를린 체재중 낭만주의 그룹과 접하고 동생 슐레겔과 함께 플라톤 번역을 계획하였다. 그러나 슐라이어마허 혼자의 힘으로 번역, 1804∼1828년에 걸쳐 출판하였다. 이 번역은 19세기의 플라톤 연구에 큰 영향을 주었다. 《종교강연(1799)》 《독어록(1800)》은 이 시기의 작품이다. 《종교강연》은 종교를 경멸하는 계몽주의자에 대한 낭만주의의 종교옹호이고, 종교를 철학과 도덕으로부터 구별하여 독자적인 영역, 우주의 직관과 감정의 영역으로 보았다. 종교는 하늘에서 내려온 불과 같은 힘에 사로잡힌 순간이고, 무한자와의 합일(合一)이다. 종교의 개체적 체험은 항상 공동체 형태를 취하고 역사적으로 파악된다. 《독어록》은 윤리학적 연구에 대한 최초의 성과였다. 1804년 할레대학 조교수 겸 부설교회 목사가 되었지만, 1806년 나폴레옹의 점령으로 대학이 폐쇄되었다. 1807년 베를린으로 돌아와 자유강연을 하며 대학 창설에 전력, 1810년 신설 베를린대학 교수가 되었다. 신학강의와 교회설교는 그의 천직이었다. 《신학통론(1811)》 《그리스도교적 신앙(1821∼22)》은 이 시기의 저서이며, 뒤의 것은 자유주의신학의 기초가 되었다. 그것은 신앙을 <절대의존의 감정>이라고 보고, 그리스도교를 예수에 의한 구제에서 비롯된 윤리적 유일신교로 보아, 그 특유의 감정을 신과 세계와의 관계를 나타내는 것이라 하여, 죄와 은총의 대립하에 분석하였다. 종래 슐라이어마허의 사상에 대해서 W. 딜타이의 미완성의 연구에 의거하여 철학의 입장에서 신학을 보는 경향이 강했지만, 최근에는 딜타이의 유고(遺稿)를 토대로 신학의 입장에서 철학을 보는 연구가 행해지고 있다.

 

<슐라이어마허>의 교육사상

독일의 철학자이며 교육학자인 슐라이어마허는 피히테와 함께 국가존속과 문화국가를 목적으로 하는 문화적 국가주의 교육의 대표라 할 수 있다. 그는 프랑스에 패한 조국과 민족을 건지는 길은 오직 교육뿐이며, 그리고 교육만이 전세대의 문화를 후대에 전달하여 창조하는 작용이라고 하였다. 그는 자연 발생적인 생활교육을 강조하고 개인 및 사회의 도덕적 형성을 목표로 하는 개인적 자연성의 이성화를 주장하였다. 그의 교육의 방법은 아동발달단계에 따라 이루어지는 것을 주장하여 아동의 개성존중과 자기활동을 조성하여 악을 억제하여 도덕적 사회적인 성원을 만드는 것이었다. 그의 교육의 본질은 보호와 반작용과 조성을 들 수 있다. 그의 교육사상은 사회적, 문화적, 국가적 교육사상에 크게 영향을 주었다.

 

Ernst Sellin

Ernst SellinErnst Sellin (May 26, 1867 in Alt Schwerin - January 1, 1946 in Epichnellen bei Eisenach) was a German theologian.

Sellin studied theology and oriental languages. During 1897 - 1908 he taught at the evangelical faculty of theology in Vienna, during 1908 - 1913 at the University of Rostock, during 1913 - 1921 in Kiel and in 1921 - 1935 in Berlin.

Sellin was pioneer of application of archaeology into Biblical sciences. He participated on excavations in Palestine (e.g. in Jericho and Ta\'anach).

As a theologian he dealt with topics from Old Testament. He also tried to integrate ideas of Sigmund Freud into theolog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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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울 틸리히

파울 요하네스 틸리히(Paul Johannes Tillich, 1886년 8월 20일~1965년 10월 22일) 또는 폴 틸리히(Paul Tilich)은 독일의 신학자이자 루터교 목사이다.

1886년 8월 20일 루터교회 목사,이자, 훗날 루터교회 주교가 되는 요한 오스카 틸리히 목사와 빌헬미나 마틸드 사이에서 태어났다. 1891년 작은 시골에서 자랐으며, 열다섯 살 되던 해인 1901년 베를린의 프리드리히 빌헬름 고등학교에서 공부했다. 1902년에는 루터교회 목사인 아버지가 집전하는 견진성사(견진예식, 견신례라고도 한다.)를 받음으로써 정식으로 그리스도인이 되었으며, 3년 뒤 할레대학교에서 신학을 공부했다. 1909년 목사후보생고시에 합격, 수련을 받던 중 브레슬라우 대학교에서 철학박사학위를 받았다. 이렇듯 다양한 수학은 폴 틸리히를 철학자의 신학자이자 신학자의 철학자라고 불리게 했다. 1911년 신학 분야의 최고 권위인 신학전문직 학위를 받음에 따라 대학교에서 가르칠 자격을 얻었다.

 

불트만의 영향 [편집]

틸리히는 같은 시대에 활동하던 신정통주의 신학자 루돌프 불트만(Rudolf Bultmann)의 영향을 받았다. 불트만은 현대의 남성과 여성에게 우주의 외계인을 그리게 하는, 하늘의 도시나 삼층적 우주 같은 신화적인 용어를 버려야 한다고 주장했다. 불트만은 그런 신화적 용어들 때문에 많은 현대인들이, 성서와 성서 이야기에 나타나는 고유한 구원의 메시지를 함께 거부하는 경향을 보인다고 생각했다. 그가 보기에 이런 상황을 해결하는 방법은, 그리스도의 구원을 현대적이고 철학적이며 심리학적이고 과학적인 언어로 다시 쓰는 것이었다. 그럴 때에야 비로소 현대의 남성과 여성은, 신화적인 용어가 더 이상 전달하지 못하는 기독교의 진리를 확인할 수 있을 것이라고 여겼다. 그래서 불트만은 그의 신학적 저술에서 기독교 메시지의 신화적인 표현을, 새롭고 실존적인 해석으로 교체시키려고 시도하였다. 틸리히는 성서의 \"비신화화(demythologization)\"를 요청하는 불트만의 메시지가 인상 깊었다.

 

키르케고르그의 형이상학적 접근에서 틸리히는, 존재의 본성에 초점을 맞추는 확고한 실존주의자이었다. 그는 신과 인간의 관계에 대한 신학적 접근 방식으로 \"상호 관계의 방법\"(method of correlation)을 제시했다. 틸리히에 따르면, 그 방법의 목적은 \"상호의존 관계에 있는 실존적 질문과 신학적 대답을 통해 그리스도교 신앙의 내용을 설명하는 것\"을 목표로 한다.

“ 신은 존재하지 않는다. 그는 실재와 존재를 넘어서는 존재 자체이다. 그러므로 신의 존재에 대한 논쟁은 그를 부인하는 것이다. ”

— 틸리히,

틸리히는 상징이 신앙에서 매우 중요하다고 주장했다. 왜냐하면 \"신앙은 궁극적으로 관심하는 존재의 상태\"이기 때문이다.[5]

C. S. 루이스는, 기독교의 메시지가 \"비신화화\"를 필요로 한다는, 틸리히가 불트만과 함께 한 주장에 대해 언급했다. 루이스는 성서의 이야기에 표현된 신화적인 용어가, 틸리히의 실존주의적인 용어보다 더 풍부하고 더 다채로운 성격을 지니고 있다고 주장했다. 루이스는 자신의 신화에 대한 강조와 틸리히의 상징에 대한 강조가, 아마도 같은 것에 대한 서로 다른 표현 방법으로 해석될 수 있다고 여겼지만, 그럼에도 틸리히가 이야기를 불필요하게 비신화화 시켰다고 생각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루이스는 틸리히가 기독교의 전통적인 이야기로부터 극단적으로 동 떨어져 있다고 보는 견해를 거부했다.

 

Ernst Troeltsch

Ernst Troeltsch.Ernst Troeltsch (17 February 1865 – 1 February 1923) was a German Protestant theologian and writer on philosophy of religion and philosophy of history, and an influential figure in German thought before 1914. His work was a synthesis of a number of strands, drawing on Albrecht Ritschl, Max Weber\'s conception of sociology, and the Neo-Kantians of the Baden school.

His The Social Teachings of the Christian Church (two volume edition in translation by Harper Row, 1960) is a seminal work in this area.

While religious thinking in the days of the Weimar Republic moved away from his direction, Troeltsch\'s work in the sociology of religion remains important.

Julius Wellhausen

Julius Wellhausen (May 17, 1844 - January 7, 1918), was a German biblical scholar and orientalist, noted particularly for his contribution to scholarly understanding of the origin of the Pentateuch/Torah (the first five books of the Bible).

 

Born at Hamelin in the Kingdom of Hanover, the son of a Protestant pastor,[1] he studied theology at the University of Göttingen under Georg Heinrich August Ewald and became Privatdozent for Old Testament history there in 1870. In 1872 he was appointed professor ordinarius of theology at the University of Greifswald. He resigned from the faculty in 1882 for reasons of conscience, stating in his letter of resignation:[2]

 

I became a theologian because the scientific treatment of the Bible interested me; only gradually did I come to understand that a professor of theology also has the practical task of preparing the students for service in the Protestant Church, and that I am not adequate to this practical task, but that instead despite all caution on my own part I make my hearers unfit for their office. Since then my theological professorship has been weighing heavily on my conscience.

He became professor extraordinarius of oriental languages in the faculty of philology at Halle, was elected professor ordinarius at Marburg in 1885, and was transferred to Göttingen in 1892 where he stayed until his death.

 

He is best known for his Prolegomena zur Geschichte Israels (Prologue to the History of Israel), a detailed synthesis of existing views on the origins of the first five books of the Old Testament: Wellhausen\'s contribution was to place the development of these books into a historical and social context. The resulting argument, called the documentary hypothesis, remained the dominant model among biblical scholars until later in the 20th century.

Wellhausen\'s uncompromisingly secular approach to the Bible and the detailed cogency of his re-creation of early Israelite history (one which dismissed such fundamental Jewish beliefs as their status as God\'s \"chosen people,\" and even the originally monotheistic nature of ancient Israelite religion) led to accusations from conservative Jews, and even Christians, that he was motivated not by the dispassionate search for truth but by a desire to destroy the Jewish religion. This accusation was frequently cast in terms of \"anti-Semitism,\" but, whatever the truth of these accusations, insinuations of a causative connection between Wellhausen\'s endeavour and the events that transpired in Germany in the decades after his death are problematic at most.[3]

 

 

 

Claus Westermann

Rev. Dr. Claus Westermann was an Old Testament scholar[1]. He was born on October 7, 1909 in Berlin[2].

Prof. Westermann taught at the University of Heidelberg from 1958 to 1978[3]. Born to African missionaries, he finished his studies in 1933 he became a pastor. During his theological studies he started studying the Old Testament, and became particularly interested in the content of the Psalms. During the Nazi regime he served in the German army for five years where he was a translator on the Russian front. After the war Westermann started preaching again and also went to serve as an Old Testament academic at Heidelberg where he taught for twenty years.Westermann is considered by many one of the premier Old Testament scholars of the 20th century. Particularly notable in his work is his lengthy and comprehensive commentary on the Book of Genesis, especially Genesis 1-11.

 

에른스트 뷰르트바인 Ernst Wuerthwein

뷔르트 바인은 튀빙겐대학교에서 신학박사학위를 취득하였고, 튀빙겐대학교 구약학 전임강사를 거쳐 동대학교 부교수를 역임하였으며 마르부르크대학교 신학부 정교수로 있다가 1974년 동대학교에서 정년퇴임하였다. 저서로는 Der \'amm ha\' arez im AT, 1936; Die Weisheit Agyptens u. das AT, 1960 등이 있다.

 

또한 우리나라에 번역된 그의 저서로는 <성서본문 비평입문>과 <책임>이 있다.

 

신학교육은 특수 언어인 히브리어, 헬라어, 라틴어가 필수이다. 구약신학을 함에 있어 히브 리어는 필수이다. 서구의 기독교가 문화의 요람이요, 학문의 왕관인 신학을 형성하는 것은 성서의 언어연구를 필수적으로 한 덕분이다. 영어 일변도, 영성목회 일변도라는 현대판 중세 적 암흑기에서 탈출해야 한다. 인간 경험과 지혜에 의존한 주제설교나 도덕적인 교훈에서 벗어나 하나님이 히브리어 본문에서 자신을 알려주는 말씀에 귀 기울여야 할 때이다. 즉, 히브리어 문자적, 역사적, 신학적 해석이 요청된다.

 

교의 신학의 주장도 있고, 유대인 문학의 철학적 해석같은 사조도 있다. 그러나 이런 사 조들이 있다고 해서 성서 신학을 그것과 동일한 차원에서 다룬다면 오산이다. 꼭 해석학(주 석)연습을 해야 한다. 성서 구절과 히브리어의 문법, 어휘를 숙지하고 분석하는 과정을 일단 거치면 본문 속의 내용들과 핵심 정점을 파악하기가 용이해진다. 이런 연습은 기본적인 안내서의 도움을 받아야 할 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연습을 도와줄 수 있는 책에는 G. 포오러의 <성서해석학 입문>, 방석종 교수의 <구약 해석 입문서>, 히브리어 본문비평을 위한 E. 뷔르트바인의 <성서본문 비평입문>이 있다. 성서본문과 히브리어와 얼마나 씨름하느냐에 성서 신학의 생명이 달려있다.

특히 뷔르트 바인의 <성서분몬 비평입문>은 성서 본문의 내용과 문자를 정확하게 살피는 것은 성서신학의 기초적인 작업이다. 저자는 책을 통해 언어로 된 전승, 원어의 번역본, 거기서 파생된 또 다른 번역본들의 특징과 문제점들을 꼼꼼하게 밝히고 있다. 성서 본문 비평의 목적과 방법을 이해하고 싶은 이들에게 좋은 책이다.

 

그리고 두 번째 저서인 <책임>은 \"기독교적 가치관으로서의 \'책임\'을 성서로 해석\"한 것으로 메르크와 함께 저술한 책인데, 크게 구약성서와 신약성서로 나누어 깊이 있게 다루고 있다.

이 책의 전(前)이해에서 밝힌 법적인 책임의 개념은 세가지로 구성요소를 갖는다. 1. 인간이 그 앞에 서서 자신을 책임져야 할 재판정, 2. 의무로서 지켜져야 할 규범들 3. 한 인간이 자신의 행동에 대해 옹호하며 그것에 대해 자신을 책임져야하는 세계관. 인간들은 법정에서 자신에 대해 책임져야 한다. 책임의 이러한 법적인 이해는 후기에 발전되었다. 이 개념이 인간들에게 요구된다고 생각되는 모든 관계들, 특히 도덕적인 본성의 그러한 관계들을 표현하는 것이다.

 

그리고 저자는 구약성서에서의 책임을 이스라엘의 신앙 즉 하나님과 교제 - 생활률과 공동체 안에서의 규범과 종교적, 법적, 사회적, 성(性)적인 영역에서의 책임을 들로 나누어 해설하고 있다. 이스라엘이 자신들의 하나님에 대해서 갖고 있는 책임성에 관한 표상은 하나님의 이해의 일면일 뿐이며, 그것은 전혀 우선적인 것이 아니며, 그들의 하나님 신앙의 출발점이 아니라, 오히려 그 신앙에서 나온 결과라고 보는 것이다.

그들은 선조들의 하나님 신앙, 출애굽의 하나님, 시내산에서 하나님의 나타나심 이때의 하나님은 항상 먼저 시작하는 자이며 베푸시는 자로 경험된다.

 

또한 그는 히르쉬의 책이 출간되기 전에 이미 자신의 논문「구약의 이해에 대하여」에서 종교현상학적인 관점에 대해 비판하였다. 다시 말해서 종교사적 견지에서 구약을 하나의 역사적 사료 문헌으로 다룰수 있으나, 그런 경우에 학자는 초연한 관찰자의 입장에 머문다고 말했다. “나는 내게 주장하는 그 어떤 새로운 것을 원칙적으로 전혀 체험하지 못한다. 나는 현재가 아니라 과거를 다루고 있다.”

그리고 구약석의 목표는 “선포, 구약의 메시지를 밝혀내는 것”으로 정의된다. 하지만 이 메시지의 내용은 특정한 형태의 실존주의 신학이다. 본문의 내적 관심을 꿰뚫어보는 것은 “본문 속에 표현된 실존의 형태”를 꿰뚫어 보는 것을 의미한다. 인류학적 접근 방법은 구약의 수신자가 옛 이스라엘이라는 난점을 해결해 준다고 말한다.

 

 

 

 

발터 찜멀리 Walther Zimmerli

침멀리는 1907년에 스위스의 쉬어스(Schiers)에서 태어났다. 그는 취리히와 베를린, 괴팅엔 등지에서 신학과 셈어를 배웠다. 그는 수년 동안 아르부르크에서 개혁 교회 전통에 선 목사로 봉사하였다. 1935년에 그는 취리히 대학에서 구약성서, 종교사, 근동 언어 등을 가르쳐 달라는 요청을 받고 수락하였다. 1951년에 그는 하이델베르크 대학으로 옮긴 폰 라트의 자리를 메꾸기 위해 괴팅엔 대학으로 옮겨갔다. 그는 1975년에 은퇴하여 1983년 12월 4일에 스위스에서 운명하였다. 괴팅엔 대학의 교수였던 침멀리는 알트, 노트, 폰 라트, 베스터만 등과 함께 유럽 대륙을 대표하는 구약 학자들 중의 한 사람으로 이해된다. 그는 문헌 비평, 양식 비평, 전승 비평에서 뛰어난 주석가로 알려져 있다.

그러나 불행하게도 그러한 희망은 그의 갑작스런 죽음으로 인하여 이루어지지 못했다.

폰 라트와 계약 개념을 중심점으로 본 아이히로트, 프리젠 등과는 다른 입장을 가지고 있는 침멀리는 아이히로트와 프리젠 등에 동의하면서도 “이스라엘의 하나님, 살아 계신 분, 자유로우신 분이신 야웨”야말로 구약성서의 중심점이라고 주장했다. 이처럼 중심점을 지향하는 서술하는 침멀리의 구약 신학은 전승사적이고 통시적인 방법론을 비롯한 다른 방법론들과 대조를 이룬다. 침멀리는 이스라엘의 시작인 출애굽 사건으로부터 시작한다.

이스라엘은 하나님 앞에서 순종하는 삶을 살아야 한다. 하나님의 가르치심은 인간의 응답을 요청한다.침멀리는 폰 라트를 비롯한 다른 사람들과 마찬가지로 구약성서의 지혜를 구약 신학 안에 통합시키는 문제를 가지고 씨름한다. 침멀리의 구약 신학 마지막 부분은 원역사와 역사적인 설화들, 예언서, 예언에 뿌리를 둔 묵시문학 등에 있는 “위기와 희망”에 관심을 기울이고 있다.

 

 

 

 

 

카를 라너

카를 라너(Karl Rahner,1904년-1984년)은 독일의 로마 가톨릭 신학자이다. 익명의 그리스도인이라는 말로 유명하다.

1904년 독일 프라이부르크에서 출생

1924년 예수회에 입회

철학과 신학을 뮌헨, 팔켄부르크(네덜란드), 프라이부르크, 인스부르크에서 공부했다.

1932년 뮌헨에서 사제서품을 받았다.

1937년부터 인스브루크,뮌헨, 뮌스터 대학교에서도 신학자로 활동했으며, 제2차 바티칸 공의회 신학 자문으로도 활약했다. 당시 칼 라너는 독일과 유럽의 로마 가톨릭 교회가 교회의 안위를 우선시해, 나치독일의 유대인 학살에 대해 침묵한 과오에 대해 잊지 말아야 한다고 했다. 이를 계기로 로마 가톨릭 교회는 교회의 사회역사적 책임에 대한 목소리를 높이게 되었다.[1]

1971년 은퇴 후에도 학문 활동을 계속했으며, 1984년 오스트리아의 인스부르크에서 별세하였다.

 

2010.3.2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