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현대목회에서 요구되는 기독교적 영성 |
| 글쓴이 : 권다니엘 교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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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현대목회에서 요구되는 기독교적 영성 서 론 제 1 절 연구의 목적과 문제제기 한국 개신교 선교 100년의 역사를 회고해 보건대 무엇보다도 놀라운 양적 성장을 이루어왔음을 알 수 있다. 금세기 선교 역사상 유래없는 일이다. 그러나 양적인 성장에 비례하여 질적인 성장도 보폭을 맞추어왔는가 하는 질문에 대해서는 반론의 여지가 없다. 양적인 성장과 함께 아울러 질적인 성장이 비례하여 왔어야 함에도 불구하고 지나친 양적 성장추구에 따라 교회 및 목회자 자신의 질적인 수준저하를 가져왔음을 누구도 부인할 수 없다. 물론 지식적인 발달과 더불어 수많은 정보와 자료 및 지식이 축적되어 왔으나 그러한 정보 및 자료의 소화와 영성화(靈性化)에는 게을렀던 것이 사실이다. 현대의 과정 철학자 화이트 헤드(A. N. Whitehead)는 “현대는 하나님을 잃어버렸으며, 그래서 하나님을 다시 찾고 있다.”고 말하였다. 또한 영국의 현대 영성 신학자 케네스 리치(Kenneth Leech)는 “현대 서양인들의 영적 고갈의 근본 원인은 그들의 하나님을 상실에서 비롯되고 있다”고 하였다. 그 이유로 쮜리히의 분석학자 C. G. 융은 현대인들이 하나님 없는 사회에서 무료하고, 불안하게 사는 이유는 현대종교가 현대인들에게 “하나님의 상”을 제대로 제시하지 못했기 때문이라고 하였다. 즉 그들이 요구하는 영적인 욕구를 제시해줄 만한 영성이 제시되지 못하고 있다는 것이라고 해도 좋을 것이다. 지금은 새로운 영성운동이 일어나야 할 시점에 왔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20세기 중엽이후 기독교에서 영성신학을 탐구하며, 신학대학 교과과정에서 영성신학이나 영성수련에 관한 시간을 마련하는 것은 기독교에 새로운 시기가 다가오고 있음을 읽게 해주는 징표가 된다. 사실 기독교회사에서 영성에 대한 추구가 치열하게 나타났던 시기는 모두 새로운 시기가 도래하려는 시기들이었다. 3, 4세기 경 게르만의 침입으로 헬레니즘 사회가 혼돈에 빠지고 그 다음 게르만의 프랑크 제국 등이 새워져 유럽 사회에 새로운 질서가 재편되는 무렵에 성 안토니우스나 성 파코미우스, 성 바질등은 사막에 들어가서 치열하게 영성을 탐구하여 나중에 베네딕또 수도원의 기초를 닦았으며, 11, 12세기 경 유럽 사회 전체가 십자군 전쟁으로 아노미 상태에 빠진 다음 교황권에 기초한 중세제국이 세워지는 무렵에 씨토수도원이 건립되고 성 프란치스코나 성 도미니꼬등의 탁발승단이 생겨나 가난과 정결과 순명의 의미를 새롭게 해 주었다. 그리고 마틴 루터나 존 칼빈등 종교개혁자나 성 이그나티우스 로욜라, 십자가의 성 요한 등 가톨릭의 개혁자들이 나타나 영성의 깊이를 더한 것도 16세기 종교개혁으로 기독교 제국이 로마 카톨릭세계와 개신교 세계로 재편되는 무렵이었다. 그러면 20세기 후반에 새롭게 시작되는 영성 탐구열은 현대인의 어떤 고민을 반영하고 있으며 어떤 세계로 나아가려고 하는가? 목회자의 영성은 어떤 면에서 목회 전체의 관건이 된다. 현대의 목회는 복합적이고 다양한 삶의 형태에 직면하여 갖가지 방법론과 실천을 요구한다. 그리하여 목회자의 품성 혹은 인격의 형성이 비인격적인 혹은 제도적인 장치에 의해 위축되는 결과를 낳는다. 그러나 오히려 그럴수록 더욱 목회자의 인격과 삶이 교회의 중심적인 부분임을 인식하지 않을 수 없다. 바른 인격의 형성과 영성 생활을 기본으로 하지 않는 어떤 목회 양식도 진실한 하나님의 집을 세울 수 없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현 시점에서 교회와 성도들을 이끌어야 할 목회자가 영성에 대한 올바른 이해를 갖지 못한다면 스스로 도태되고 말 것이다. 또한 심각한 영적 소용돌이 속에서 성도들에게 새로운 영성적 비전(Spiritual Vision)을 제공하여야 할 목회자로서 영적 자질을 개발해야 함을 물론이다. 이러한 고민을 해결해 나가야 할 현대목회자들에게 새로운 영성훈련과 미래적 목회로서의 방법을 제시할 필요에 도움이 되고자 함이 본 논문의 목적이다. 영성(靈性)이란 성서에서 말씀하고 있는 영적인 속성내지는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하나님을 인식하는 방편으로서의 실천적인 것으로서 영혼과 관련된 성질을 말한다. 활동적인 영성보다는 내면의 정적인 영성을 가르키는 용어로 많이 쓰여왔다. 이러한 영성의 성서적 기독교적 정의에 따른 목회는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성서적 목회영성을 알게 해줌으로서 목회의 분명한 소명과 영성개발을 통한 질적인 수준향상 및 참다운 인간실현으로서의 영성개발의 창조적인 리더가 될 수 있을 것이다. 제 2 절 연구방법 및 범위 본 논문에서는 한국교회의 기독교적 영성의 잘못된 이해와 왜곡된 흐름으로 인한 교회 및 목회자 자신의 질적 성장을 방해하는 폐단을 점검해보고 현대적 목회에서 요구되는 영성을 제시해 보고자한다. 특별히 성서 및 교회사적 흐름의 요목을 짚어보고 현대적 목회에의 적용과 그에 따른 영성개발의 모델을 제시하고자 한다. 이를 위하여 성서적인 영성을 통하여 기본원리를 살펴보고, 교회사에 있어서의 영성(Spirituality)의 두줄기 흐름-수도원적 영성과 교회적 운동-의 이해를 통하여 현대 한국적인 상황에서 요구되는 목회영성을 제시하도록 할 것이다. 본 논문은 현대적 상황(context)에서 활발히 논의되고 있는 인간의 영성의 문제를 목회학적인 관점에서, 영성의 창조적인 리더로서 목회자의 영성적 자질향상, 그리고 21세기의 미래를 바라보는 한국교회에 적응할 수 있는 목회의 장으로서 영성개발을 중심으로 논의할 것이다. 이러한 점들을 고찰하기 위해서 본 논문은 다음과 같이 연구되어 질 것이다. 제 1장에서는 영성의 이론적인 기초로서 구약과 신약에 나타난 기독교 영성의 성서적인 특성과 그 구체적인 전개를 살펴보고, 교회사에 나타난 기독교 영성의 흐름을 살펴보도록 한다. 제 2장에서는 영성이 인간에게 미치는 영향을 목회적인 관점에서 고찰하고, 목회의 장(場)에서 목회신학으로서 영성신학의 정립문제를 다루고자 한다. 제 3장에서는 목회적 영성개발의 필요성과 목표를 제시하고, 이러한 목표의 관점에서 우주성과 영성을 관련시켜 이해하고자 했던 샤르댕(Teilhard de Chardin)을 중심으로 영성과 미래목회의 문제를 살펴본다. 이러한 원리의 실제적 적용모델로 포스터(Richard Foster)의 3단계 영성개발훈련법을 살펴본 후에, 포스터식 영성훈련법을 보완하여 현대적 영성훈련의 원리로서 공동체를 통한 영성훈련의 모델을 제시하게 될 것이다. 제 4장에서는 한국교회의 영성의 현황과 문제점 및 실천적 대안을 살펴보고, 이를 토대로 목회현장에서 해결해야 될 문제를 영성적차원에서 인간의 전인성에 목표를 둔 전인교역(全人敎役)모델을, 신학적 차원에서 웨스트호프(John Westerhoff)의 신앙공동체-문화화모형(FE모형)을 제시하고자 한다. 이상의 연구를 통하여 현대적 목회에서 요구되는 영성의 실제적인 훈련 및 개발에 대한 모델을 제시함으로서 실제로 목회현장에서 활용할 수 있는 길을 모색해 보고자 한다. 그러나 본 논문에서는 몇 가지 한계를 두고자 한다. 흔히 공동체적 영성과 관련된 것은 활동적인 또는 외부적인 영성으로 표현되는 것이 개신교적 경향이다. 그러나 목회자 자신 혹은 개개인 성도들이 추구하는 영성은 대개 내면적인 영성 혹은 정적인 영성으로 구분되어 왔다. 본 논문에서는 성도 개개인의 영성보다는 지도자로서 공동체 및 개개인의 영성을 지도개발 해야할 리더로서 목회자 자신의 영성이해 및 확립에 초점을 맞추고자 한다. 그러므로 현대 신학현상 및 신학적 조류에 대한 전반적인 고찰은 되도록 지양하고, 성서 및 교회사적 흐름에 입각한 현대목회에서 요구되는 영성적 측면을 다루고자 한다. 또한 영성분야를 타종교 및 동양적 영성과의 비교는 하지 않기로 한다. 제 1 장 영성에 관한 성서 및 역사적 이해 제 1 절 영성의 성서적 이해 현대 기독교 용어중 가장 흔하게 들을 수 있는 용어중의 하나가 ‘영성’(spirituality) 혹은 ‘기독교 영성’이란 말이다. 그러나 기독교 영성에 대한 개념은 사람에 따라 다르며, 또한 그 용어의 사용자의 입장에 따라 다양한 의미로 쓰이고 있기 때문에, 기독교 영성이 정말 어떤 것인지 혼동을 가져오는 경우가 많이 있다. 또한 영성이란 말이 너무 흔하게 사용되므로써 영성의 본래적 의미가 퇴색되는 경우도 종종 보게 된다. 영성(spirituality)이라고 부르는 용어는 기독교회 안에 오랜 역사를 가지고 있으며 신학사에서 다양한 명칭으로 표현되고 사용되어 왔다. 어떤 이는 영성신학(spiritual Theology)라고 부르기도 하였고, 또 다른 이들은 영성생활(spiritual life), 신심생활(deveat life), 내적 생활(interior life), 신비적 수련(Mystical evo- lution) 및 기독교적 완덕신학(Theology of Christian Perfection)등의 이름으로 불려져 왔다. 그러나 성서에서는 영성이라는 명사가 나오지 않는다. 그러나 형용사로 영적(spiritual)이란 용어가 있으며 이는 하나님나라에 들어간 자의 특성을 서술하는데 자주 사용되었다. 영적이란 말은 신약에서 교인들의 독특한 속성을 나타내는 단어였다. 그러므로 영성이란 의미의 바른 이해를 돕기 위하여 기독교 영성의 개념적 정의를 살펴보고자 한다. 1. 영성의 정의 기독교 영성에 대한 정의는 보는 관점에 따라 다양하게 표현되고 있다. 칼 라너(K. Rahner)는 \"영성이란 인간이 창조때부터 창조주 하나님으로부터 지음받은 초자연적인 생명이며, 세례로 말미암아 죽었던 속사람의 생명이 다시 소생하여 살아난 은총의 생명으로 성체성사를 통하여 끊임없이 성장, 성숙하는 실체적인 초자연적 불멸적 생명“이다 라고 정의하였다. 현대 카톨릭의 영성신학자인 오먼(J. Aumann)은 “‘영성’이란 개념은 ‘영’(spiritus)이나 ‘정신’(pneuma)\"이라는 말과 깊은 관계가 있는 말로서 ‘신성한 능력, 초자연적 능력’을 뜻하는 말이며, ‘성서적 영적 능력’과 일치하는 말이 된다. 그러나 진정한 ‘참 영성’은 예수 그리스도의 그 영성에서만 찾아볼 수 있다고 하였다. 훔즈(Urban, T. Holmes)는 영성을 인간의 의식속에 그리스도의 진리를 실체적으로 유효하고 적절하게 파악하는 하나의 방법적인 시도로 이해하고자 하였다. 즉 영성이란 하나님을 흡족하고 영화롭게 해 드리는 하나님의 자녀안에 있는 생명의 특질로서 이해될 수도 있다고 하였다. 한정애 교수는 기독교의 영성이해는 기독교의 진리 안에서 살아가는 기독교인의 삶 전반을 의미하는 것으로서, 이는 “하나님의 형상(imago Dei)의 동태적 현상으로서 자기초월의 능력을 지닌 인간이 하나님, 인간, 자연과의 제반관계들 속에서 창출해내는 인간성의 생동하는 삶의 체험현상과 그 창조적 힘으로 정의될 수 있으며, 성령의 은사체험과 같은 특수체험에 국한되지 않은 그리스도인의 삶의 전체성, 스타일, 지향성에 관계된 것”으로 볼 수 있고, 나아가서 “하나님 앞에서와 그가 지으신 세계 한 가운데서의 실존적 삶 그 자체, 즉 하나님 안에서 기도하며 사는 것, 그리고 그 분, 그 분의 아들, 그 분의 영을 통하여 변형되어 가는 인간 정신일체를 포괄하는 것”으로 보아야 할 것이다고 정의하였다. 박재만 교수는 영성이란 인간이 실천하는 신심 곧 하나님 섬김이며, 예수 그리스도의 신비에의 참여이다. 곧 성령의 은총안에서 그리스도와의 일치하며 성부께로 향해 나아가는 삶이다라고 성령에 의한 삶을 강조하였다. 또한 영성은 “하나님의 은혜로 주어졌고 그리스도 안에서 보존되고 확증되었으며, 복음안에서 열매맺는 하나님의 나라를 향해 열려있는 참 인간적 삶의 능력”이라고 영성이 은혜로 주어졌고 은혜로 이어져야 함을 주장하였다. 오성춘 교수는 영성의 정의를 다음과 같이 내렸다. “영성은 우리속에 이루어지는 어떤 성품이라기 보다는 하나님과 교제하는 삶의 과정이요, 하나님의 성령께서 우리를 고쳐나가는 과정이요, 성령의 역사로 이루어지는 하나님의 형상이요,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자기 십자가를 지고 고난받는 형제 자매들 속에 나아가 그들의 삶에 참여하고 그들을 구원하시는 하나님의 구원에 동참하는 것이다”고 하였다. 이상의 학자들의 견해를 종합하면, 영성이란 인간속에 하나님을 섬기는 생명의 특질로, 참 영성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본받아가는 삶이며, 구체적이면서 공동체속에서 실천되어지는 삶 전반을 가리킨다. 즉 삼위일체이신 하나님의 역사를 통하여 하나님과의 관계성 속에서 하나님의 형상으로 변해가는 인간의 정신일체를 포괄한 삶 전체를 가리킨다고 할 수 있다. 2. 성서적 이해 기독교 영성은 하나님의 말씀인 성서로부터 비롯되는 성서의 열매(산물)라고 말할 수 있다. 왜냐하면 기독교 영성의 모든 주제와 내용이 성서에 근거하고 있기 때문이다. 즉, 기독교 영성의 핵심 주제는 하나님과 우리 인간과의 바른 관계성 회복(형성)과 증진이라고 말할 수 있는데, 성서의 모든 말씀들이 바로 이 주제에 관해서 말하고 있기 때문이다. 컬리(Iris V. Cully)는 말하기를, 영성의 성서적인 근거는 하나님을 아는 사람들이 그들의 삶 가운데서 어떻게 하나님과 관계를 맺어왔는가 하는 성경말씀의 설명 가운데서 발견되어진다고 하였다. 성서에 언급된 ‘영’이란 Spirit(히: וּר, 루아흐, 헬: πνευμα)로 그 의미는 바람, 생명, 정신, 성령, 입김, 호홉(숨), 공기의 움직임을 말한다. 이 말의 기원은 창세기 1:26-27과 창세기 2:7절에서 찾을 수 있다. (1) 구약에서의 영이해 기독교는 전통적으로 영을 육과 대립되는 개념으로 파악하여, 이를 비물질적 존재자, 생명의 능력/담지자로 이했하였는데, 이는 희랍적인 이분법적 인간이해에 기초한 영(ψυχη)이해에 기인한다. 구약성서의 히브리적 영이해는 보다 포괄적인 것으로 생명의 원리로서 하나님이 모든 만물에 부여한 것으로 인식됐고, 야훼종교의 구성적인 요소로 자리잡고 있다. 구약에 영을 의미하는 낱말 וּר는 약 389회 나오고, 그중 113회 가량은 바람과 같은 자연세력을 의미하는 입장이고, 129회의 경우는 인간이나 동물이나 거짓 신들에 적용하여 사용되었고, 138회의 경우 하나님과 연관되는 방향으로 의미를 담고 사용되었다. 첫째 부류에 속하는 어의는 바람이다. 공기가 아니라 움직이는 공기중에도 미풍을 가리킨다. 바람의 움직임과 유사한 신비한 힘의 움직임, 그리고 불가항력적인 강한 세력을 지니고 불어대는 폭풍도 그 의미권에 속할 수 있다. 죽은 땅에 구름과 비를 운반하여 만물을 소생하게 하는 바람(왕상18:45), 날아다니는 독수리같이 이리저리 흐르는 공기의 이동(신 32: 11), 바닷물을 말리고(출14:21), 메추라기 떼를 몰고 오는(민11:31) 변화를 가져오는 힘을 말하며, 예언자를 잡아나꾸어 들어올려 다른 장소에 심는(겔3:12,14,11:1) 바람을 의미한다. 둘째 의미는 인간의 호홉작용이다. 하나님이 모든 생물에 보내어 일으키는 호홉운동 기식작용이다. 구약은 이 기식운동을 하나님이 인간내에 “호홉을 빚으셨다”(슥12:1)하고, 하나님의 창조력의 결과로 나타냈다. 그 호홉은 하나님만이 주입하시는 활력생산 요소요, 기운 공급원으로 그것이 뼈에 근육과 살과 가죽이 붙게 하고, 그 속에 들어가 생명이 된다고 하였다(겔37:6-8,10,14). 그러므로 וּר는 섬세하고 진동하는 사람 목과 코의 숨이요, 호홉이요, 기식이다. 셋째는 총괄적으로 분류해 사람의 영을 지칭하는 의미이다. 구약에 나오는 וּר가 인간의 영으로 의미할 때가 적지 않다. 앞서 고찰한 “바람”이라는 의미, 그리고 “호홉”이라는 의미를 인간의 정신, 인간의 영, 인간의 혼과 연관시켜 생각하게 되는 것은 인간의 호홉, 기식, 호홉, 숨을 “영(정신, 감정, 마음)”과 구별해 설명할 수 없는 분위기의 구약의 사고 세계이기 때문이다. 다시 말하여 영이 인간의 지식, 이해, 판단기관과 관계가 있다고 생각되는 것은 사람의 호홉작용의 기복이, 즉 인간 숨소리가 감정과 밀접하게 관련되어 있기 때문이다. ① 고로 “영”이 인간의 영을 의미할 때 첫째는 인간의 감(感 :感慨, 感激, 感動, 感情, 感化)을 의미한다. 즉 인간의 마음자세, 마음보, 심사와 유관한 기류를 생각할 수 있다. 욥을 공격하는 엘리바스의 말에 너는 “네 영으로 하나님을 반역한다”(욥15:13)했는데, 이때의 “영”은 인간의 흥분상태, 불쾌한 상태를 의미하며 설득으로 풀릴 수 있는(삿8:3), 사그러질 수 있는 격노, 흥분상태를 의미한다. ② “영”이 인간의 영을 의미하는 둘째 영역은 인간의 의지(意志, 뜻)이다. “영”이란 대체로 שׂ의 의미와 관련이 있는 “마음의 태도”, “느낌의 움직임”을 묘사함과 동시에, “인간 의지의 힘있는 활동”을 의미하기도 한다. 램51:11에서 하나님이 메데왕들의 “영”을 휘저으셔(개역:마음을 격발하여...) 자멸을 초래케 하였다 한 것은 “영”이 인간내재의 동력(윤리적으로 중립적인)을 의미한다. 특히 겔36:26, 11:19에는 장래에 새 영을 설치하여 새 마음을 준다 하여, 하나님의 영과 인간의 마음을 동일선상에 병행시켜 인간의 의지(마음)가 하나님의 영과 연결되어 순순한 양심의 안내로 그린 것은 시18:31의 마음과 영을 새롭게 할 것을 다짐하는 생각과 같은 맥락이다. 인간의지의 힘과 인간의지의 자유가 하나님의 유효한 세력에 의존하고 있음을 말한다. 고로 여기의 “영”은 인간의 확고부동한 의지력을 말하며, “영”이라고 번역하기보다는 의지 혹은 뜻으로 번역함이 낫다. 넷째로, 하나님의 영 : “영”의 의미는 하나님의 영이다. 시33:6에 “말씀이 하늘을 창조하고 하나님의 입의 호홉(영)이 만물을 만들었다.”고 한 것은 하나님의 생명 창조력, 생명 공급력, 활명소성(活命素性) 동력을 의미한다. 요엘선지는 종말에는 하나님의 영이 모든 이스라엘에게 주입되어 보편적인 현상을 그렸다(욜2:28). 엘리사의 소원은 자기 스승인 엘리야 선지가 받은 영의 갑절을 하사받는 것이었고(왕하2:9f, 15), 여호수아를 모세의 후계자로 임명하신 하나님을 “모든 육체의 생령의 신”이라 하였은즉(민27:16, 참조16:22), 이런 경우에서 “영”은 하나님이 임의로 모든 육체에게 할애, 분배하시는 활력소와 생명력이 되는 비상한 선물, 특출한 권위를 의미한다 하겠다. 결국 계시의 방편으로서의 하나님의 영은 그 작용이 다양하게 나타나고 하나님의 영을 소유하는 것을 특징으로 하는 고정집단이란 없다고 보아야 한다. 어느 정도는 분리할 수 있고, 또 어느 정도는 전혀 독특한 세력이다. 종합해 말하자면, 하나님의 영은 구약에 규범지어 정의되지 아니한 미지수 영역으로 접을 수 있다. (2) 구약성서에서의 영성이해 이상에서 살펴본대로 구약에서의 영이해에 기초로 구약성서의 영성은 영/육의 합일체로서 인간이 하나님과 갖는 교제(communion), 인간의 존재 전 영역에서의 하나님과의 만남(encounter)등으로 표현할 수 있다. 이 개념을 좀더 구체적으로 역사적인 관점에서 살펴본다면, 야훼 하나님의 선택된 백성(chosen people)인 이스라엘의 삶 속에서의 구원자이신 하나님과의 만남과 교제로 볼 수 있고, 이를 신학적인 관점에서 본다면 피조물인 인간이 창조주되시는 하나님과의 관계성으로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구약의 하나님에 대한 바른 이해가 구약성서의 영성이해의 출발점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구약성서의 하나님은 역사속에서 자신을 드러내시는 “계시의 신”(deus revelatus)인 동시에 자신을 숨기시는 “감추어져 있는 신”(Deus abscconditus)인 상반된 모습으로 표현되어 있는 인간의 이성으로는 파악하기 어려운 실재(elusive Presense)로 나타난다. 야훼께서 말씀을 계속하셨다. “너는 나의 옆에 있는 한 곳, 그 바위 위에 서 있어라. 나의 영광이 지나갈 때에, 내가 너를 바위틈에 집어넣고, 내가 다 지나갈 때까지 너를 나의 손바닥으로 가리워 주겠다. 그 뒤에 내가 나의 손바닥을 거두리니, 네가 나의 등을 보게 될 것이다. 그러나 나의 얼굴은 볼 수 없을 것이다.”(출33:21-23) 그 때에 야훼께서 구름에 싸여 내려오셔서, 그와 함께 거기에 서서, 거룩한 이름 “야훼”를 선포하셨다. 야훼께서 모세의 앞으로 지나가시면서 선포하셨다. “야훼, 나 야훼는 자비롭고 은혜로우며, 노하기를 더디하고, 한결같은 사랑과 진실이 풍성한 하나님이다. 수천 대에 이르기까지, 한결같은 사랑을 베풀며, 악과 허물과 죄를 용서하는 하나님이다. 그러나 나는 죄를 벌하지 않은 채 그냥 넘기지는 아니한다. 아버지가 죄를 지으면, 본인에게 뿐만 아니라 삼사대 자손에게까지 벌을 내린다.”(출34:5-7) 이 구절들은 바로 하나님의 자신의 드러냄과 감추이심의 존재적 특성을 잘 드러내 보여주는 대표적인 구절로서 그 양면성이 서로 대조적인 표현(얼굴:등)으로 잘 나타나 있고, 아울러 그 속성(은혜, 불쌍히 여김/긍휼)도 잘 묘사해 주고 있다. 이것은 바로 다름아닌 야훼 하나님의 존재양식과 계시양식의 특성을 나타내주는 표현들로 보는 것이 좋을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구약영성의 근원인 이 하나님을 이스라엘의 역사의 자리에서 구체적으로 그 이해를 시도해야 한다. 즉 이스라엘의 하나님 야훼는 구원행위를 통해서 이스라엘과 구체적인 역사적 관계를 가진 분으로서 약한 자와 억눌린 자를 돌보시는 신이라는 것이다. 야훼 하나님의 이스라엘 역사속에서 그 백성들을 이집트의 압제와 바빌론의 속박에서 해방시킨 구원자로서의 구원행위에서 “해방의 영성”(spirituality of liberation:정의, 공의, 자유의 정신)을 엿볼 수 있으며, 이스라엘을 자신의 백성으로 선택하여 부르시고 관계를 맺으시는 계약의 행위에서 “창조의 영성”(spirituality of creation: 살롬의 정신)을 찾을 수 있다. 마지막으로 선민 이스라엘의 하나님을 배반하고 그와의 관계를 파기시킨 관계단절이라는 파멸의 상태에서 그들을 사랑하시고 용서하시고 새로운 관계를 모색하시는 그의 적극적인 관계회복의 행위에서 “새창조의 영성”(spirituality of new creation:화해의 정신)을 발견할 수 있다. 이를 기초로 구약성서의 영성을 해방, 창조, 재창조의 영성으로 정리할 수 있다. 이처럼 구약신앙은 이스라엘의 역사속에 개입하셔서 그들을 구원하시는 하나님, 그들과 선민으로 관계를 맺으시고, 이러한 관계를 파기한 이스라엘과 새로운 관계를 찾으시는 하나님의 역사로 이 역사는 이스라엘의 구체적인 역사의 자리였으며 그들의 삶속이었다. 구약의 신앙은 생활속에서 하나님과 인간과의 영적으로 살아있는 관계속에서 항상 생동감이 넘쳤음을 성서를 통해서도 알 수 있다. 하나님과 인간의 살아있는 관계속에서 구약의 영성은 ‘다스’(הא)와 ‘셰키나’()라는 용어로 집약될 수 있다. 그리고 구약종교의 후기에 나타난 종말신앙도 포함된다. ‘다스’는 ‘지혜’로 번역할 수 있어, 하나님의 계획을 분별함을 의미하고, ‘셰키나’는 햇빛이 물체에 접촉하는 것처럼, 하나님이 인간속에 와서 자신을 드러낸다는 의미로, 이러한 자기실현은 햇빛처럼 어디에나 임재하게 된다. 박근원 교수는 이러한 ‘셰키나’에 근거를 둔 영성으로 유대교 역사 후기에 이 세상에 아무런 희망이 없을 적마다 하나님께서 이 역사속에 찾아오셔서 세상을 심판하신다는 종말신앙(apoclyticism)과 비슷한 사상이 태동하여 메시야를 기다리는 사상으로까지 발전되었다고 하였다. 이러한 사상적 근거가 신약의 종말론적 메시지와 함께 시작되는 예수님의 사역을 보여주는 중요한 기반이 된다. 그러므로 구약성서의 영성을 탈 역사적인 관점에서 바라보며 이해하려는 소극적인 자세에서 우리의 삶의 현장속에서 역사의 주로서 활동하고 계시는 하나님과 적극적인 만남을 모색하는 적극적인 자세로 구약영성을 이해해야 한다. 구약성서의 영성은 하나님의 계약백성으로서 이스라엘 백성들의 삶의 이해에 그 기초를 둔 것으로, 하나님의 구원역사에 부름받은 자로서의 합당한 삶, 하나님과의 올바른 관계 즉 자신에게 부여된 사명감을 최선을 다해 이룩하는 의미있는 삶을 영위해 나가는 것을 의미한다고 보아도 좋다. (3) 신약성서의 영성이해 신약에 나타난 영성을 이해하기 위해선 필수적으로 예수님의 영성적 삶을 모델로 삼을 수밖에 없다. 그 이유로 류기종 박사의 말을 빌리면, “기독교 영성은 한편으로는 성서 특히 예수 그리스도의 말씀인 복음에 기초하며, 다른 한편으로는 그의 삶과 그의 깊은 영적 체험에 기초한다. 그런 점에서 그리스도는 기독교 영성의 원천이며 또한 궁극적 모범이요, 모형이라고 말할 수 있다.”고 하였다. 그러나 전통적인 기독론 연구분야는 예수 그리스도의 신성에 집중되었으며 인간인 예수님의 고뇌와 내면생활, 종교적인 체험에는 관심이 부족했던 것이 사실임을 문상희 교수는 지적하고 있다. 영성을 언급할 때 그 구심점은 그리스도와 성령임은 주지의 사실이다. 그러므로 신약의 영성의 근거는 예수 그리스도의 하나님체험과 그리고 제자들의 부활체험과 초대교회의 성령강림사건에 있다. 케이는 “예수”란 책에서 “예수님의 교훈의 핵심은 예수님과 하나님과의 인격적인 관계체험”이라고 했다. 예수 그리스도의 하나님체험의 구체적이고 직접적인 기록은 성서에서 발견할 수 없다. 그러나 간접적 체험과 예수 그리스도의 말씀과 사상과 선교활동, 그 분의 삶속에서 추측해 볼 수는 있다. 특별히 요단강에서의 세례사건과 광야에서의 시험기사는 예수님의 하나님체험을 제공해주는 중요한 기록이다. 세례요한을 통해 요단강에서 비둘기 같은 성령으로 충만한 세례를 통하여 예수님은 성별되었다. 예수님은 여기에서 영적 능력의 도래를 체험한 것이다. 마가복음에는 “예수에게”(to him), 마태와 누가는 “예수위에”(on him), 마가는 “예수속으로”(into him) 들어왔다고 표현한다. 마가의 기사는 성령이 예수님 속으로 들어가서 머물러 있음을 암시한다. 이는 세례받던 그날 예수님에게 성령이 강림했다가 거두어간 것이 아니다. 예수님안에서 성령이 계속 머물러 있게 된 것을 말한다. 중요한 것은 복음서들이 한 목소리로 증언하듯이, 이 사건에서 예수님은 성령에 의해서 종말론적인 사역을 위해 준비되었고, 또한 종말의 시작과 함께 새로운 창조가 시작된다는 확신을 얻게 되었다. 예수님이 본 “하늘의 열림”의 환상은 종말론적인 새로운 창조를 의미하는 것이었다. 그러므로 다른 사람에게 있어서 회개의 표시였던 그 세례가 예수님에게는 전혀 다른 의미를 주었다. 즉, 그것은 하나님의 종말론적인 구원 사역을 위해서 부름을 받는 소명(召命)사건이었다. 이 사건 후에, 예수님은 40일 동안 광야에서 금식하신 후 마귀의 시험을 받았으나 마귀의 시험을 물리치고 공생애 사역에 들어가신다. 광야에서의 40일을 통한 영성수련을 통해서 그는 사탄을 유혹을 극복하였고, 그 영적 승리는 상실된 에덴낙원 상실이후에 잃어버렸던 하나님의 형상으로서의 인간의 원형적 삶을 회복시켜 주었다는데 중요한 의미를 가진다. 즉 잃어버렸던 에덴낙원의 궁극적 회복을 이루리라는 재창조적 영성을 보여주는 좋은 실례라 할 수 있다. 그런데 이 두 가지 하나님체험 사건을 통하여 중요한 의미를 발견하게 된다. 그 하나는, 이 사건을 통하여 예수님은 자신안에서 약동하고 있는 하나님의 성령을 체험했다. 두 번째 예수님의 신앙체험은 하나님의 아들이란 의식이다(막1:11). 그는 자신을 하나님의 아들로 특별한 아들로 인식하고 있으며, 아들로서의 권한을 자의로 사용하지 않고 하나님의 뜻과 그 분의 방법에 따라 사용할 것임을 확인했다는 것이다. 예수님의 교훈, 선교, 사상, 그리고 행동은 예수님과 하나님과의 영적 교제, 즉 신앙체험의 외적 표현이다. 그리고 예수님께서 전한 것은 바로 이러한 체험이었다. 예수님은 영성생활에 있어서 “은밀성”을 강조했다. 그가 영성생활에 있어서 은밀성을 강조한 이유는 영성생활은 본질적으로 그리고 가장 우선적으로 나와 하나님 사이의 문제라는 것이다. 그렇기에 예수님의 영성생활의 모습을 우리는 성경을 통해서 단편적으로밖에 볼 수 없다. 예수님은 당시의 정형화되어 있던 영성생활 관습들을 대폭 무시했다는 사실이다. 아침, 오후, 저녁에 드리는 정례적인 기도나 일정한 날짜를 정하여 지키는 정례적인 금식의 관습을 무시했던 것 같다. 기도의 경우 형식화된 기도를 거부하고 진실된 기도를 중시했다. 금식의 경우에는, 광야를 떠난 후 거의 하지 않았던 것 같다. 그러기에, 왜 당신들은 금식을 하지 않느냐는 질문에 봉착하였던 것이다(마9:14-17, 막2:18-21, 눅5:33-39). 그러나 예수님 자신은 분주한 시간중에서도 틈틈이 홀로 떨어져서 기도를 했다는 전승은 복음서 전승 전체 속에 나타난다. 예수님은 정례화된 기도를 거부했지만, 다른 한편 언제나 기도하는 삶을 살았다. 예수님의 기도 생활의 한 단면을 보여주는 증거 중 다른 하나는 “아바”(abba)라는 용어이다. 이 용어는 기도에 있어서 예수님의 하나님 체험의 중요한 단서를 제공한다. 예수님은 기도의 경험속에서 하나님에 대한 친밀성을 느끼고, 그러한 독특한 감정을 이렇게 어린아이의 용어로 표현했을 것이다. 그의 기도는 의식적인 것이 아니라 매우 열려있고 친밀한 기도였다. 예수님은 또한 그의 제자들을 이 친밀성의 관계안으로 불러 들였다. 초대 교회는, 성령안에서 신자들도 예수님과 같은 열린 관계로 들어 갈 수 있다고 믿었다. 예수님에게 있어서 율법은 모세를 통해서 주어진 것으로서 인간의 죄성을 전제하고 주어진 것이었다(마19:1-9, 막10:2-9). 따라서 이제 하나님 나라의 도래와 함께 이루어진 새창조 안에서 율법은 그 기능을 다하고, 새로이 창조된 인간은 율법의 준수는 영성을 이루어가는 방편이 더 이상 아니었다. 예수님에게 있어서 율법의 완성은 하나님 나라에로 부름받은 새로운 존재의 변화의 결과였다. 정결의 개념에 대해서도 아무리 철저히 율법을 지켜서 레위기적 정결을 이룬다 하더라도 내면적인 정결을 이루지 못하면 참된 정화에 이루지 못한다는 것이다. 영성생활의 목적은 내면적인 정화에 있는 것이지, 형식적인 행위에 있지 않다는 뜻이다. 그렇다면 왜 예수님은 당시의 정례화된 율법과 형식을 거부하는 행동을 취하게 되었을까? 모세에게 주어진 율법은 타락한 죄인의 하나님 형상회복이라는 대 전제하에 주어진 것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하나님의 형상이 상실된 인간은 내면적인 변화없이 외형적인 준수에 머무르게 되었다. 앞서서 살펴보았듯이, 구약의 영성은 하나님의 형상이 상실내지 왜곡된 인간을 새로운 관계속에서 만나주시길 원하시는 하나님의 행위의 역사이다. 즉 새창조의 영성이라고 살펴보았다. 이러한 새창조의 역사의 구심점이 곧 예수님이시다. 신약의 영성을 근본적으로 그리고 전체적으로 결정지어 주고 있는 근거는 예수님 자신이 종말론적인 비전 안에서 조망(眺望)했던 새창조의 현실이다. 하나님의 결정적인 구원 사건이 일어날 “그 날”, “여호와의 날”을 대망했던 예언자들은 종말론적인 유형론(eschatological typology)에 따라서 새 창조의 출현을 기대했다. 즉, 하나님의 구원의 날이 이르면, 타락된 원 창조가 회복될 것이라고 기대하였다. 그것은 엄밀히 말해서 원 창조의 회복이지만, 가히 “새 창조”라고 부르기에 충분한 사건이 될 것이라고 기대하였다. 이러한 예수님의 새 창조의 역사는 부활로서 증명되었다고 할 수 있다. 부활은 성령의 인도와 하나님과의 영적 교제에서 비롯된 역동적 활동이었고, 이어서 부활을 체험한 제자들과 초대교회에 이러한 영적 힘이 계승되었다. 그러나 이러한 새창조의 역사는 강력한 성령의 역사이다. 부활신앙에 활력을 부여한 원동력이 바로 성령의 역사이다. 그 하나님체험의 역사가 바로 오순절날 성령의 역사이다. 오순절의 성령강림과 더불어 인간의 영성은 성령과 더 친밀한 관계에 놓이게 된다. 진리의 영이시며 보혜사이신 성령(요14:16)은 인간에게 모든 것을 가르치시고, 생각나게 하시고, 깨닫게 하신다(요14:26). 성령은 또한 인간에게 지혜와 계시의 정신을 주심으로 하나님을 알게 하시고, 마음의 눈을 밝히사 그의 부르심의 소망이 무엇인지를 알게도 하신다(엡1:17-18). 이런 의미에서 Lewis Sperry Chafer의 “그리스도인의 참된 영성이란 곧 성령충만한 상태를 의미한다.”는 말은 의미심장하다. 성령의 역사가 예수님의 영성, 즉 새창조의 역사를 이끌어가는 주역인 것이다. 예수님에게 있어서 영성생활을 하나님의 뜻대로 이룰 수 있었던 것은 성령의 역사라고 할 수 있다. 결국, 분명한 것은 예수님은 자신의 사역을 통하여 새로운 창조, 즉 원 창조의 회복이 실현되고 있다고 믿었던 것이다. 이 새창조는 예수님과 그의 제자들에게 있어서 영성 추구의 출발점이었다. 이러므로 예수님의 영성을 “새 창조의 영성”(new creation spirituality)이라고 할 수 있다. 이러한 새창조의 영성의 출발점은 구약의 메시야 사상에 뿌리를 둔 종말론적인 근거를 가진다. 또한 새창조의 영성적 노력이란 구원받은 성도들이 성령의 능력으로 자기자신을 변화시켜 나가는 일련의 삶의 과정이라고 말할 수 있다. 오순절 성령강림으로 교회가 세워지고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이 강력하게 증거되었다. 즉 부활로 증명된 예수님의 새로운 창조의 역사가 곳곳에서 성령의 역사와 더불어 나타나게 되었다. 이러한 신약의 영성-새창조의 영성-에서 핵심적인 인물은 사도 바울이다. 그는 부활하신 예수님을 체험하고 회심하는 영적인 체험이 풍부하였음에도 불구하고 이러한 체험이 한 인격을 실증적으로, 외적으로 인식하는 사건이라는 것을 명백히 함으로 기독교의 영성을 바르게 정립하였다. 바울의 영성이해는 헬라철학의 범주에 머물지 않고 ‘십자가의 신비주의’로 승화하여 비로소 기독교 영성의 역사적 기반을 수립하였다. 바울에게서 볼 수 있는 신비주의적인 영성은 “교제의 신비”(Communio Mystica)라는 말로 표현된다. 즉 그리스도를 머리로 하여 그에 대한 복종 및 그와의 교제의 관계에서 사는 것을 말한다. 이런 의미에서 볼 때 예수님의 새 창조의 영성은 개인의 주관적인 하나님체험도 되지만 그것은 공동체적 체험이 되어야 함도 말하고 있다고 볼 수 있다. 왜냐하면 그는 영성의 모델이신 예수님안에서 우리 모두가 지체로서 그리스도의 몸을 이루어간다고 말하고 있기 때문이다(고전12장, 엡1:21-22). 사도 바울은 이러한 새 창조의 영성회복이 곧 만물의 회복으로까지 보았다. 정학봉 교수는 이러한 새창조의 영성을, 타락한 인간이 본래의 위치와 신분-즉 만물을 관리하고 하나님과 교제하는 삶-의 회복으로 보았다. 하나님의 자녀로서의 신분회복이 나아가 우주만물의 질서를 회복할 수 있는 길로 본 점은 “새 창조의 영성”의 범위를 폭 넓게 해석하였다고 하겠다. 제 2 절 영성의 역사적 이해 1. 초대교회 시대의 영성 초대교회 시대는 A.D. 30년경부터 기독교가 공인된 A.D. 313년까지의 시기에 해당된다. 교회가 최초로 나타나게 된 것은 예루살렘 원시적 공동체였다. 그들은 예루살렘에 머물며 약속하신 성령을 기다렸고 재림을 믿고 모여서 말씀을 연구하고 전혀 기도에 힘쓰며 서로 사랑을 나누고 구제에 힘썼으며 서로 애찬을 나누고 하나님을 찬양하였다. 그들의 심령은 세속을 떠나 순수함을 간직한 채 모이기를 힘써 사실상 영성에 힘을 기울였다. 성서를 보면, 초대교회는 영성의 훈련과 생활이 조화되었다. 기도와 성서연구 그리고 사랑의 모임이었다. 이어서 사도들은 이러한 영성생활을 잘 계승하였고 신학적으로 정립하였다. 만일 초대교회가 열정만 가지고 끝났다면 그 다음 시대가 기독교의 영성을 이해할 수 없었을 것이다. 이 시대는 박해, 정치적인 압박, 타신앙인들과 그들이 신봉하는 절대자에 대한 경배예절의 차이에서 오는 대립, 그리고 그리스도교 신앙에서 유래하지 않은 다른 영지적(靈知的)인 사상과의 충돌을 들 수 있다. 우리의 관심은 이러한 복잡한 상황속에서도 혼합종교주의적인 요소들로부터 헤어나려 노력했던 시대의 영성에 있다. 이 시대는 일치와 연대성, 창조성을 지녔던 시대였으며 교회가 막 세상과 접촉을 시작하는 자기 개방의 시대였다. 초대교회의 영성은 두 가지 특징을 가지고 나타난다. 하나는 관조적이며 정적인 것이며 다른 하나는 동적이요 실천적인 영성이다. 공관복음서에서는 주로 회개의 세례(막1:4), 마음의 청결(마5:3)로서의 회개(Metanoia)와 청빈생활을 통해서 찾아볼 수 있고, 사도 요한에게서는 빛과 어두움가운데서 빛이요 생명이신 그리스도에게로 향한 십자가 사랑안에서 그 영성이 나타나고 있다. 그리하여 요한의 영성은 하나님 신비주의(God-Mysticism) 혹은 성령 신비주의(Spirit-Mysticism)로 표현된다. 내적이면서도 정적인 영성의 개념이었다. 그러나 바울에게서는 그리스도의 십자가와의 연합과 또한 그리스도의 마음을 소유하기 위한 것으로서(골1:26) 표현되었고, 그 속에서 역사하는 성령은 동적이고 실천적인 삶으로 이끌었다. 즉 동적인 영성으로 표현되었다. 사실 이러한 것은 예수님의 종말론적인 개념하의 새창조의 영성을 이루는 두 가지 영성의 표현이라고 볼 수 있다. 종말론적 개념은 그들로 하여금 자신을 돌아보게 하는 내면의 영성, 정적인 영성을 갖게 하였고, 새로운 질서를 향한 새창조적 영성은 그들로 하여금 성령의 역동적인 삶을 살게 하였던 것이다. 초대교회 기독교는 당시의 헬라철학의 흐름인 플라톤주의와 영지주의의 위험에 노출되어 있었다. 신플라톤주의의 핵심은 인간이 금욕적인 삶을 통해서, 세상의 삶으로부터 거리를 두고 정신적인 격리의 삶을 산다면 영원의 세계와 통한다는 것이다. 그들은 하나님의 은총보다는 자신의 금욕적인 삶을 통해 영원을 소유한다는 점에서 비기독교적인 것이었다. 이와함께 영지주의와의 투쟁은 기독교 역사상 가장 힘겨운 투쟁이었다. 그들의 공통적인 주장은 영지(靈知 : Gnosis)인데 이것은 영성이고 영적인 것을 가지고 영을 가르치며 구원을 가르치는 것이다. 영성이란 면에서 볼 때 그것은 이미 기독교와 대립되는 것이었으며 기독교는 이 영지주의를 인하여 커다란 시련을 겪게 되었다. 문제가 된 것은 이원론(二元論)이다. 이것은 악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것으로 모든 것에는 두 가지 원리가 있는데, 빛과 어두움, 선과 악등이 주장되었다. 여기에서 도출된 결과는 물질세계 즉 우리의 지상생활에 관련된 것은 모두 악한 것이라는 것이다. 따라서 이 악의 물질세계를 극복해야 해방되고 돌아갈 수 있다는 것이다. 결론적으로 초대교회의 영성은 금욕적 방법을 강조하는 이단사상에서 기독교 영성을 지키려는 노력의 기간이었고, 이런 연고로 기독교 신학의 기초를 닦는 계기가 되었던 것이다. 마음을 청결과 단순성을 중요시하였고, 동적인 영성보다는 관조적 정적인 영성운동의 흐름을 보였다고 할 수 있다. 2. 중세시대의 영성<4-15세기> 중세기 시대의 영성적 특징은 상상적이며 정적이다. 이 시대에는 점차 영성이론이 조직적인 단계로 발전해 나가면서 교리를 보다 깊이 이해하는 성격으로 나타나게 된다. 초대교회의 수도원운동은 기독교가 세속적, 이교적 사고방식에 적응하려는 것 때문에 일어난 저항운동이며, 주후 312년 이후 즉 기독교가 공인받고 박해없는 시대가 시작되면서 순교정신이 사라진데 대한 제2의 피흘리지 않는 하얀 순교정신의 발현에서 비롯되었다. 또한 소수 특정인의 올바른 생활은 전 기독교인에게 구원의 역할을 한다는 것이다. 이러한 여러 가지 원인들로 인하여 수도원주의가 생겨나게 되었다. 초대교회의 영성은 예배시간 특히 성례전에 참여하는 것이라고 생각하였기에 성만찬 중심의 예배가 영성의 중심이었다. 초대교회의 영성은 세상에서 하나님께로 가는 것을 강조했다고 볼 수 있다. 초대교회의 영성에 이어 중세의 영성운동은 그 출발점을 수도원 운동에서 찾아볼 수 있다. 영성은 수도원 제도를 통하여 역사적으로 기독교 세계로 보존되어 왔다. (1) 교부시대<4-7세기> 이 시기에 2-3세기에 형성된 알렉산드리아 학파와 안티오기아 학파간의 그리스도론적 논쟁이 정립되었다. 그리스도론이 정립되기 시작했다는 것은 예수 그리스도와 그의 구원적 역사가 신앙의 중심이요, 모든 신학의 핵심이라는 사실이 밝혀지기 시작했다는 것이다. 더 나아가서 이제 그리스도교적 영성이 삼위일체론적이며 그리스도론적이고 교회론적인 골격을 갖추기 시작했다는 것이다. 이 시기는 학문과 성덕에 있어서 위대한 스승들이 나타나서 ‘가르치는 교회’의 시대가 시작된다. 커다란 변화와 함께 전승을 형성하는 시대이고, 학문보다 영성이 더욱 중요하게 여겨지던 위대한 시대이다. 사도적 교부들의 시기에는 순교, 동정성 등을 말했으나 이제는 수도자, 수도원, 은수자, 독수자, 광야 수도자들의 수덕적인 규칙을 보게 된다. 이 시대의 영성을 말하려면 수도생활의 정체성에 대해 확인해보아야 한다. 그들이 사막으로 들어가게 된 것은 물론 소명이다. 그들은 특별한 부류라기보다는 그리스도교적 사상을 자신의 모든 것을 바쳐 이루기 위해 근본적인 바탕이 되는 방법들을 잘 이용하는 일에 치중했던 아주 신심 깊은 평신도들이었다. 사막이란 단순히 지리적인 것 이상의 의미를 내포하고 있다. 이스라엘 백성에게 있어서 사막은 구원자이신 야훼 하나님과 인간이 만나 밀월 여행을 시작한 장소요, 하나님 현존의 거룩함과 위대함이 드러나는 곳이다. 또한 해방의 장소요, 밝은 미래를 기약하는 장소였다. 수도자들 역시 이러한 인식하에 사막은 그리스도교적인 완덕을 쌓기 위한 최적의 장소이기에 수도원 안에 반드시 갖추어야 할 장소로 인식하기 시작했던 것이다. 바로 이러한 체험에서 초대교회 수도자들에 의해 새로이 인식되고 체험된 ‘사막의 영성’이 나온다. 이것이 점차로 수도원의 형태로, 그리고 공동체적 독신주의로 발전하면서 유명한 수도원의 설립자 누르시아의 베네딕토(Benedicto de Nursia, 547년)에게 이른다. 초대 교부시대의 영성가중 하나인 히포의 성 어거스틴(354-430)은 그리스도교 철학의 창시자라고 할 수 있다. 특히 ‘고백록’(Confessions)은 뛰어난 영성으로 인해 아주 특별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다. 어거스틴의 영성을 한마디로 표현하자면 끝없이 진리(하나님)를 추구하는 구도자의 영성이라고 말할 수 있다. 어거스틴은 자신이 참으로 그리고 간절히 알기 싶어하는 것 두 가지는 바로 하나님과 영혼의 실상이라고 말하였다. 그는 인간의 마음 즉 인간의 영혼도 하나님의 실재처럼 신비지극하고 무한한 깊이를 지닌 심연(abyss)과 같은 존재이다. 왜냐하면 인간 즉 인간의 영혼은 바로 ‘하나님의 형상’(Imago Dei)대로 지음 받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하나님을 아는 일과 인간 영혼의 실상을 아는 일은 별개의 일이 아니다. 우리의 영혼이 맑게 정화되어서 하나님의 형상이 온전히 회복되어질 때, 그때 비로소 우리는 하나님을 바로 볼 수 있으며 또한 그분과의 연합이 가능하게 되는 것이다. 또다른 영성가로 디오니수스 아레오파지트(Dionysius Areopagite, 500년경에 활동)를 들 수 있다. 그는 희랍 철학적 신비주의, 특히 플로티누스(Plotinus)의 일자(一者)사상, 필로(Philo)의 유대교적 신비주의, 그리고 기독교 교부들과 성서적 신비주의를 결합시켜 기독교 ‘신비 신학’이란 큰 물줄기를 이룩해 놓으므로써, 그 이후의 전 기독교 영성사에 큰 영향을 미쳤다. 그의 사상의 핵심은 하나님에 관한 신비적 사상이다. 그가 본 하나님은 부정의 방법으로밖에 알 수 없는 어둠(darkness)라는 것이다. 그 하나님을 만나는 방법이 관상(contemplatio)기도라는 것이다. 서구영성의 아버지라고 부르는 대 그레고리(Gregory the Great, 540-604)는 상상적이며 관조적이며 정적인 영성의 경계에 있었다. 서구적 영성은 그레고리의 영향을 많이 받았는데 그레고리는 도구적 영성으로 금욕적 교리와 봉사를 덕으로 삼는 내적 삶을 강조했다. 수도원 운동에 기록될 만한 인물로 평가될 성 베네딕토(St. Benedict, 480-543)가 있다. 그의 수도규칙은 8C부터 13C까지의 서방 수도생활을 거의 독점적으로 지배하다시피 했다. 베네딕토를 중심으로 한 수도원은 개인 중심적 금욕주의와 고행주의를 보다 높은 영성신학으로서 진리의 빛을 찾는 ‘하나님을 찾는 학교’로 수도원의 성격을 변화시키고 공동생활을 통한 공동체의 몸의 신학과 경건훈련을 확립하였다. 베네딕토는 순종, 침묵, 겸손을 수도원의 3덕목으로 삼았다. 그리고 ‘기도하며 일하라’(Ora et Labora)는 표어는 베네딕토 수도회의 생활신조로 역사적으로 일과 기도사이에 대한 불균형이 문제시되었지만 그는 기도와 일에 대해 균형있는 가르침을 주고 있다. 뿐만 아니라 베네딕토 수도원은 철저한 규율 속에서 수도원장의 치리감독에 순종하며 자기절제와 끊임없는 훈련을 강조하면서 공동기도를 중심으로 침묵과 노동속에서 그들의 영성생활에 정진하였다. (2) 중세 교회시대<8-15세기> 중세기는 역사적, 교의적, 영성적인 반향들이 매우 다양한 시기이며 인류역사의 종교적인 발전에 있어서 자랑스러우면서도 부끄러운 시대이다. 교회에 어두움이 드리워지기 시작하는 원인들이 생겨나고, 교도권과 세속의 권한 사이에 일어나는 복잡한 권력 다툼이 교차되기도 하고, 지역 문화와의 마찰은 물론이요, 그리스도께 대한 신앙과 미신적인 요소들이 뒤얽힌 복잡한 시대이다. 그러나 어느 때보다도 영성이 진보되고 다양화되는 시기였다고 하겠다. 새롭고 다양한 변화의 요인을 통해 교회의 모습을 확립했고, 세력을 갖추기 시작했으며, 내적으로 풍부한 신앙적, 영성적 가치를 발견하기 시작했다는 의미에서 과도기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중세시대의 영성과 신심에 있어서 중요한 특징을 찾아본다면 인간-그리스도의 중재에 대한 개념의 부족으로 인해 부수적인 중재자들에 대한 개념이 꽃을 피우기 시작했다는 것이다. 이런 가운데 세속화된 교회와 수도원개혁의 일환으로 수도원 개혁운동이 있었다. 먼저 살펴볼 수 있는 것은 클루니(Cluny)개혁운동이다. 이 개혁운동은 원래의 영성원칙을 가지고 갱신하자는 것이었다. 이 운동은 후세에 전체 교회갱신운동으로 발전하였다. 중세기의 중요한 특색은 교회갱신운동이었고 이것은 수도원을 중심으로 일어난 것으로서 중세의 중요한 영성운동이었다. 성 버나드(St. Bernard)는 시토회를 중심으로 새로운 수도원 개혁운동을 일으킨 사람이다. 그는 12세기 위대한 영성 신학자이며 실천적 지도자로서 기독교 영성사에 있어서 ‘사랑’에 근거한 ‘사랑-신비주의’를 확립시킨 영성가이다. 버나드는 신앙과 이성의 관계에 있어서 어거스틴과 안셀므스의 입장인 신앙과 이성의 협력과 조화(credo ut intelligam, 나는 알기 위하여 믿는다)를 인정하면서도, 종교적 지식에 있어서 영성적인 체험적 인식의 중요성을 강조했다. 버나드의 신비 사상의 특징은 그 성격이 감각적인 것이다. 신은 단지 이지적으로만 인식되는 것이 아니라 경험되고, 감수되고 그보다 더 감촉(Sentire)되지 않으면 안된다. 신과의 합일에 도달하는 신비적 체험을 영적결혼(Spirituale martimonium)이라고 부른다. 보통 이것을 그리스도의 신비주의(Christus mistik)이라고 부른다. 김경제 교수는 평하기를 버나드의 영성은 네오플라토니즘과 어거스틴의 전통을 이어오는 하나님체험의 직접성과 그리스도와 합일의 체험을 강조하는 그리스도 신비주의자라 하였다. 12세기경부터 동방교회의 승려들과는 다른 양상의 수도회들이 생기기 시작했다. 이때에 아씨시의 성 프란치스꼬가 과거 수도사들과는 전혀 무관한 생활을 하면서 새로운 운동을 전개하였다. 후에 교회에서는 이들로 모나키(monachi)라고 부르기 시작했다. 성 프란치스코를 중심으로 한 이 수도회원들은 수도원 안에서만 사는 것이 아니라 사람들 가운데서 일했기 때문에 탁발수사라고 불렀다. 이들은 탁발승단(Mendicant Friars)이라 불리웠는데 프란치스코회(Franciscans), 도미니코회(Dominicans), 깔멜회(Carmelites), 어거스틴회(Augus- tins)등이 그들이다. 프란치스코회는 정적이고 도미니코회는 관조적이다. 걸식 수도단은 과거의 수도생활과는 반대로 새 교단의 이상을 세웠다. 세속을 떠나는 수도생활보다 세속 속에 뚫고 들어가 대중화, 평민화된 포교운동을 하였다. 금욕, 봉쇄로 고독 속에 살며 어떤 때는 귀족적 권력의 보호를 받는 수도원이 아니라 수도사 개인이 재산이나 소유를 갖지 않을 뿐만 아니라 프란치스코 교단같은 것은 수도 단체로도 아무 것도 소유하지 못하게 했다. 철저한 청빈주의로 나갔다. 이어서 중세 스콜라신학의 이론적이고 사변적인 경향에 도전세력으로 중세 신비주의가 등장하였다. 13-14C 신비주의자들은 지적인 추구를 포기하고 깊은 사색과 명상을 통해 절대자와 접하려는 신비주의자들이 생긴 것이다. 이들 중 대표적인 인물이 에크하르트(Meister Eckhart, 1260-1327)이다. 그는 독일 최대의 도미닉파 신비주의자였다. 그는 신 플라톤주의에 의해 만물 가운데서 실재하는 것은 신뿐이라고 했고, 인간의 영혼에 하나님의 섬광(Spark)이 있다고 했다. 그러므로 인간의 최고 목표는 자기영혼에 하나님이 탄생하도록, 다시말하면 거주하도록 노력하고 달성하는 것이다. 이것이 하나님과 완전 사귐에 들어가는 것이고 내주하는 하나님의 지배를 받는 것이다. 이것이 신인(神人)의 신비적인 연합이라고 한다. 그리고 신비주의 운동으로 두 단체가 유명했는데 하나는 “하나님의 친구”(The Friends of God)이요, 다른 하나는 “공동생활 형제단”(the Brethren of Common Life)이었다. 이 단체에 속한 토마스 아 켐피스(Thomas A Kempis, 1380-1471)의 작품인 “그리스도를 본받아”는 소박하고 신비한 교회적인 경건을 주장하는 소중한 작품이다. 수도원 운동을 통한 영성훈련과 생활은 교회갱신, 사회정화, 구제사업, 교육제도 발전, 농축기술개발, 위대한 성인을 배출하는 등 큰 공헌을 하였다고 볼 수 있다. 이는 영성생활의 승리였다. 3. 중세 개혁기의 영성 (1) 종교개혁의 말씀영성 이 시기의 종교개혁의 근원을 영적인 시각으로 보았던 폴 틸리히는 이렇게 말한다. “토마스(1225-1274)의 합리주의는 옥캄(Guillermo Ockham, 1300-1350)의 \'유명론’(nominalism)에 의해 단순화되게 되었다. 그는 완덕에 이르기 위해 불필요한 모든 것을 잘라버리고 단순한 규범들로 새롭게 만드는 것이었다. 마이스터 에크하르트의 신비주의는 유명론적인 고립화에 대하여 균형을 잡아주는 힘을 가지게 되었으나 성서에 근거한 객관적인 계시성을 빠트렸던 것이다. 그러므로 유명론과 신비주의는 둘 다 어느 정도까지는 종교개혁을 위한 준비였다고 볼 수 있다.” 종교개혁운동은 순수한 기독교를 재발견하려는 운동이었다. 교황의 칙령, 교회의 회칙과 수도원의 규칙에 매인 심령을 풀어주고 성경말씀에로 인도하자는 것이었다. 예배의식, 교리, 전통신학, 신비체험, 선행의 공동등으로 구원을 객관적으로 보장하지 못하며 그것들은 유한한 것으로 절대화해서는 안된다는 주장이었다. 그러므로 프로테스탄트의 영성신학의 특징은 말씀 중심이 되었다. 개신교의 영성은 루터, 칼빈, 쯔빙글리 등 종교 개혁자들의 교회 개혁운동과 또한 그들의 신학 사상에 깊이 관련되어 있다. 16세기에 독일과 프랑스와 스위스 등 유럽을 중심으로 일어난 그들의 개혁운동은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에 입각한 순수한 영성적 교회로, 즉 기독교의 본래의 모습으로 되돌아가려는 운동이었다. 그렇기 때문에 그들의 근본 동기와 목적은 침체된 기독교 영성을 다시 회복시키려는데 있었다고 말할 수 있다. 그러나 여기서 짚고 넘어갈 것은 이 운동의 중요한 특징은 종교적인 부흥이 단지 인간의 일이 아니라 하나님이 인간의 역사에 직접 개입하신 결과이고 성령의 사역이라는 확신이었다. 개신교의 영성운동은 성서중심이 되었다. 개신교가 성서해석과 설교중심의 예배종교가 되어 성서속에 무진장한 영적 보화와 진리의 샘터속에 개신교 영성신학의 뿌리가 내린 것은 위대한 전환이었다. 이제 종교개혁의 선봉자인 루터(Martin Luther, 1483-1546)와 칼빈의 영성에 대한 개념을 살펴보도록 한다. 마틴 루터의 종교개혁 사상의 핵심과 근본 목표를 한마디로 요약하면 “하나님을 하나님 되게”(Let God be God)였다. 그에 따르면 하나님의 말씀인 성서가 우리의 신앙의 근거와 내용이며 또한 우리의 신앙을 자라게 하는 터전이다. 그런 점에서 루터의 영성의 근거도 또한 성서라고 말할 수 있다. 루터에 의하면, 우리의 신앙의 근원과 대상은 바로 하나님이다. 이러한 하나님에 대한 참지식은 성서를 통한 우리의 신앙과 하나님의 자기 현시인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지 않고는 불가능하다고 보았다. 이런 점에서 그의 신앙과 영성은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영성이라고 말할 수 있다. 따라서 루터의 복음주의 영성은 바로 그의 3대 중심주의, 즉 하나님 말씀 중심주의, 그리스도 중심주의, 그리고 십자가 중심주의 영성임을 알 수 있다. 루터의 신학의 핵심은 행함으로서가 아니라 하나님의 은혜와 ‘믿음으로 의로워지는’(justification by faith) 칭의의 신학이란 점이다. 그러나 믿음으로 의롭게 되는 그리스도의 의(義)에는 두 종류가 있다. \'남의 의\'(alien righteousness)와 \'고유한 의\'(proper righteousness)가 그것이다. 고유한 의는 우리를 진정한 의로운 자로 되어지게 하는 의를 말한다. 이렇게 믿음은 우리 안에 이러한 두 종류의 의를 성취시키는 역할을 하는 것이다. 따라서 그리스도를 믿음으로써 의롭다고 인정받는 것에 만족할 것이 아니라, 우리 안에서의 성령의 활동으로 우리의 영혼(혹은 존재)이 실제로 변화되어 참의인이 됨으로써, 의로운 삶을 살아야 하는 것이다. 이것이 루터가 진정으로 의미하는 칭의(稱義)의 근본정신이며, 그리고 바로 여기에 루터의 영성의 핵심이 들어 있다고 말할 수 있다. 칼빈은 그의 기독교강요의 “성령론” 안에서 신생(Regeneration)과 함께 그리스도인의 생활을 다루고 있음을 볼 때, 그는 루터의 이신득의(以信得義)에서 멈추지 않고 성화에로 지향하고 있다. 칼빈에 의하면 죄의 사유와 성화 또는 의인과 중생(重生)은 우린가 그리스도와의 합일로 말미암아 얻게되는 최상의 두 선물이다. 그런데 신앙과 그 내용인 그리스도는 직접적으로 연결되는 것이 아니라 성령의 중재로 결합되는 것이다. 칼빈의 영성적 관심은, 그리스도인의 삶의 목적이 오직 하나님께 영광돌림(soli Deo gloria)에 있다는 그의 표현 속에 요약되어 있다. 그는 그리스도인의 생활을 말함에 있어서 경건하고 의로운 삶, 즉 성화된 삶을 강조했다. 그는 루터가 강조한 칭의에다 성화를 첨부하였다. 칼빈에 따르면 칭의와 성화는 분리될 수 없이 연결되어 있다. 즉 칭의는 하나님이 우리를 그의 자녀 곧 의인으로 인정해 주시고 받아주심이고, 성화는 성령에 의한 우리 안에서의 계속적인 변혁 작업이며, 우리를 거룩함으로 이끄는 점진적인 과정이다. 따라서 칭의와 성화는 믿음의 이중 열매로서 그리스도인의 영성생활의 전 과정에 관련되며, 또한 효력을 갖는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인의 삶은 언제나 하나님의 은혜와 믿음안에서 이 칭의와 성화가 진행되는 영적 성장의 삶이 되어야 하는 것이다. 또한 성화는 그리스도와의 연합과 합일이 없이는 이루어질 수 없으며, 또한 그리스도와의 연합없이는 하나님과의 연합도 불가능하다. 그는 성화의 궁극적인 목적을 하나님과의 완전한 연합에 두었다. 우리를 그리스도와 연합하게 하는 것은 성령의 활동으로 보았다. 또한 성화는 우리 인간 안에 파괴된 하나님의 형상과 온전한 회복을 의미한다. 칼빈의 영성은 우리의 삶을 통하여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며, 하나님 앞에서 경건하고 의롭게 살며, 믿음과 성령안에서 하나님과의 깊은 연합의 관계를 가지고, 그리스도를 본받아서 세상과 사람들을 섬기는 봉사와 헌신의 영성이라 말할 수 있겠다. 종교개혁은 중세기를 이끌어왔던 교황권의 타락과 수도원 중심의 영성이 이제는 세속 일반의 생활과 격리되어 은둔되었기에, 진정한 그리스도의 병사는 인간들의 생활 한복판에서 이를 봉사하기 위한 실질적 훈련의 필요성에 의한 것이라고도 할 수 있다. 결국 종교개혁의 영향으로 전통적인 축제 및 성례중심의 영성에서 말씀중심의 영성으로 전환하게 되었고 성직자들도 세속에 대한 의무와 책임을 가지게 되었다는 점은 높이 평가할 만하다. (2) 근대 스페인의 영성 스페인의 개혁은 매우 독특하다. 독일과 스위스에서 이루어진 교회밖으로의 개혁과는 달리 16세기 스페인의 개혁 분위기는 관상수도회들이 자신들 스스로 이룩한, 교회 안으로부터의 개혁이어서 매우 긍정적인 움직임이었다. 스페인의 영성은 매우 추상적이며 또한 금욕적이었다. 대중의 영성을 인도하던 책들도 ‘철학적 사상’을 기술하려고 했던 것이 아니라 영성생활의 다양한 방법론을 제시하려고 노력했다. 신앙을 행동으로 옮길 수 있도록 도와주기 위해 인간의 의지와 지성(이해)의 움직임을 깊이 연구했다. 이러한 노력의 결과는 영성수련법으로 발전했다. 스페인의 영성가로서는 이냐시오 로욜라(Ignatius Loyola, 1495-1556)와 아빌라의 테레사(Teresa of Avila, 1515-1582), 십자가의 성 요한(St. John of the Cross, 1542-1591)등이 대표적이다. 이냐시오 로욜라는 ‘예수회’(the Society of Jesus)의 창설자이다. 그의 주된 사상의 총화는 영성수련으로 그의 영성신학의 목적은 이 세상 안에서의 하나님의 섬김이라고 말할 수 있다. 모든 하나님의 자녀들은 하나님의 다른 자녀들과 피조물들을 섬기기 위해 있는 것이다. 아빌라의 테레사의 영성사상은 주로 관상(영)적 기도에 의한 우리 영혼의 하나님과의 연합(합일), 하나님께 대한 절대적인 신앙과 사랑, 목적의 단순성, 내면적 자아의 발견, 그리고 겸손과 사랑의 실천등에 집중되어 있다. 테레사와 함께 갈멜수도회의 개혁을 주도했던 인물로 십자가의 요한을 들 수 있다. 그는 기독교 역사상 가장 뛰어난 영성가중의 하나로 인정되고 있다. 그의 영성 사상의 핵심은 ‘어두운 밤’(Dark Night)의 개념에 집중되어 있다. 요한에게 있어서 이 ‘밤’은 결국 하나님과 만남과 일치의 경지에 이르기 위한 영적 투쟁의 긴 터널과 같은 것이다. 결론적으로 스페인의 영성은 종교개혁기 카톨릭의 갱신운동의 중요한 한 물줄기라고 할 수 있다. 변화와 개혁을 요구하는 시대에 관상과 실천적인 영성으로서 흐름인 것이다. 4. 현대의 영성<15세기 이후> 18세기 전체에 걸쳐 교회 안의 보수진영 다수파들은 계몽주의 이성주의에 대항하여 맹렬히 싸움을 벌였다. 이로 인하여 프로테스탄트와 로마카톨릭을 막론하고 그 정통주의 진영 내에서는 권위-성경이나 혹은 교회를 막론하고-를 지나치게 강조하게 되었다. 또한 자연 세계 내에서의 초자연적인 간섭에 대해서도 보다 과장된 강조가 행해졌다. 기적, 특별섭리 그리고 신적인 예정등이 중추적인 문제로 등장하였다. 계시와 인간이성 사이의 불연속성도 과거 어느 때보다도 더 강조되었다. 표면적으로 본다면, 이러한 보수적이고 교회적인 정통주의는 계몽주의 운동의 가장 중요한 경향과 정반대처럼 생각된다. 그러나 보다 더 깊은 차원에서 보건대, 이 양자는 모두 세계와의 관계에서 하나님의 초월성을 극도로 강조함으로써 그를 영적으로 별 상관이 없는 존재로 만들게 되었다. 하나는 그를 초월적이요, 형이상학적인 영원계로 추방함으로써 그 위치를 지식인들과 철학자들에게만 소용되는 신의 모습으로 축소시켰다. 다른 하나는 ‘세상 밖의 신’이라는 관념을 강조함으로써, 우주에 관련한 그의 외부성을 일방적으로 내세웠다. 그리하여 그는 전능한 존재, 그의 창조계 외부에 존재하면서도 발생하는 모든 일들을 다 비밀리에 통솔하는 존재로 만들어지게 되었다. 그리하여 세상속에서의 하나님의 행동은 그가 인간들 ‘속에서’ 혹은 ‘함께’하는 사역이 아니라, 그들을 ‘향해서’ 혹은 ‘위해서’하는 행동으로 정의되기 십상이었다. 그리하여 다시 인간의 가슴과 생애 가운데로 하나님을 불러들이는 것이 19세기 신학의 중요한 문제요 임무가 되었다. 프리드리히 슐라이어마허(Friedrich D. E. Schleiermacher, 1768-1834)와 게오르그 헤겔(George W. F. Hegel, 1770-1831)의 두 사람이 이 새로운 형태의 신학을 창건한 인물로 손꼽혀지고 있다. 이 둘은 특유한 방법으로 인간속에 하나님의 내밀성과 내부성을 다시 확립하고자 하였다. 또한 인간정신의 근본적인 통일성을 인정하였다. 슐라이어마허는 ‘느낌’의 확대된 개념을 기반으로 하여 이를 이루고자 하였는데 반하여, 헤겔은 ‘이성’의 관념을 확대하여 정신의 모든 측면들과 동일시하는 모습을 보였다는 점이었다. 현대로 접어들면서부터는 중세에 있었던 개인의 실존적 차원의 영성이 지양되는 반면에 사회적이며 정치적인 현실에 초점이 맞춰지게 된다. 개인전도와 신비적, 미래지향적인 William Law(1686-1761)의 영성에 비교하여 John Wesley(1703-1791)의 영성에서는 보다 사회복음적인 봉사와 현세적인 경향이 두드러진다. 역사적으로 카톨릭교회는 12세기를 전후해서 꽃을 피운 신비주의 신학을 계속 수정, 보완하여 오늘날의 영성신학(Spirituality Theology)으로 발전되었고, 새로운 분야로 정립이 되었고, 현재에도 많은 수도자들과 신도들도 영성에 대한 깊은 이해와 실천적인 움직임이 매우 활발하다고 볼 수 있다. 그러나 아쉽게도 개신교회는 영성에 대한 신학적인 기반을 제대로 구축하지 못한 실정이며 아직도 미개척 분야로 이해되어지고 있다. 개신교회는 이신득의(以信得義)의 교리는 잘 물려받았으나 종교개혁자들의 영성적인 면은 제대로 계승하지 못하였다. 이처럼 영성에 관한 이해와 신학적 기반의 계승이 결핍됨으로 인하여, 이에 대한 반작용으로 크게 두 가지의 양상을 띄면서 산발적으로 나타난 것을 살필 수 있다. 첫째 양상으로는 내향적 운동(Inwawd movement)으로서 경건주의(Pietism), 정적주의(Quietism), 성령운동(Charismatic movement)등이 있고, 두 번째 양상으로 외향적 운동(Outward movement)이 있는데 사회참여 운동, 인권운동 등을 들 수 있다. 내향적 운동의 특징은 개인의 성결과 개인 영혼구원에 중점을 두었고, 외향적 운동의 특징은 사회의 성결과 구조악을 개선하는 면에 강조점을 두었다. 이처럼 서로 방향을 달리하는 이 두 가지 운동의 흐름이 현대에 이르러서는 극단에 이르러 결국에는 선교의 양극화(Polarization)라는 비극을 낳는 결과가 되고 말았다. 그러나 이런 경향은 교회일치라는 목표아래 에큐메니칼적 분위기하에 서서히 서로를 이해하는 입장으로 돌아서고 있다. 현대 영성운동의 있어서 빼놓을 수 없는 신학자요, 탁월한 신비사상가요 영성가중의 한 사람이 떼이야르 드 샤르댕(Teilhard de Chardin, 1881-1955)이다. 샤르댕의 영성은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 그리스도에게 집중되어 있다. 예수 그리스도는 인간을 포함한 모든 생명체와 물질세계 전체의 창조의 수단이며 중심이며 목적이다. 그를 통해서 만물은 창조되고 생기와 활기를 얻으며, 성화되며, 영화되어진다. 따라서 예수 그리스도는 전 우주적 그리스도이다. 그의 영성사상은 하나님의 창조세계 전체를 포괄하는 전 우주적일 뿐아니라, 그 중심에 있어서는 어디나 그리스도 중심이고, 성서적이며, 교회적 영성에 기초하고 있다. 그의 영성은 그리스도가 하나님의 창조 전체의 영성화와 완성을 위해서 오셨다는 사실을 통하여 자연에 새로운 의미를 부여하였고 인간과 자연 사이에 일종의 공동체적인 한 연대관계를 깨닫게 해준다. 여기에 현대교회의 영성운동의 방향에 새로운 자극을 주는 신학이 정치신학, 민중신학, 혁명신학 혹은 해방신학이라고 할 수 있다. 해방신학은 실질적으로 가난한 자와 압제받는 자들과 일체화되는 것이라고 주장한다. 보편적으로 제 3세계 신학에는 영성이 없다고 지적한다. 그러나 사실은 제 3세계 신학의 영성은 성인, 성녀들의 암흑의 영성, 사막의 영성과 통한다. 해방신학의 뿌리에는 하나의 신비사상 즉 뚜렷한 영성을 발견할 수 있다. 곧 가난한 이들과 주님과의 만남이다. 해방신학은 해방의 영성을 축으로 하는데 우리로 하여금 현실적인 경제적, 산업적 사람들을 염두에 두어야 함에 주의를 주었던 것이 강점이다. 최근에 이르러서는 마틴 루터 킹(Martin Luther King, 1929-1968), 마더 테레사(Mother Teresa)의 영성속에서 보다 공동체적인 경험으로서의 영성이 부각되고 있다. 영성은 교회사를 통하여 다양한 차원으로 발전되어 왔으며 서방교회보다는 동방교회에서 그 전통을 중점적으로 이어 받아왔고 또한 카톨릭 영성이 의식적이며 객관적, 성례전적인데 비하여 개신교의 영성은 주관적이며 직접적이며 비성례전적인 특징을 지니고 있다. 오늘의 이 복잡하고 메마른 산업 사회의 생활 구조속에서도, 우리에게 다가오시는 하나님의 임재의 체험과 또한 그분과의 깊은 만남의 경험을 통하여 ‘내면적인 풍요함’을 맛봄과 동시에 그 분의 뜻을 올바로 식별하고 실천하며 사는 삶이 바로 오늘의 그리스도인의 영성적 삶이다. 제 2 장 목회와 영성의 관계성 인간이 어떠한 존재인가를 이해하며, 하나님과 인간의 중개자(仲介者)로서의 역할을 수행하는 일이 목회이다. 목회는 자신의 사역에로 부르시는 하나님의 부르심과 동시에 사람들이 부름이 교차하는 곳에서 그 동기를 부여받게 된다. 벤 존슨(Ben C. Johnson)은 “목회자의 영성은 하나님과의 관계로부터 나와서 신앙공동체 안에서 조정되고 형성되며 목회자가 자신의 궁극적 목적을 위해 일하는 그 시대, 그 삶의 현장에서 표현되는 것”이라고 하였다. 김외식교수는 목회자의 영성의 특징을 다음과 같이 설명했다. 첫째, 그가 안수받는 성직(an ordained minister)에로 부름 받았다는 소명에 있다. 둘째, 그가 “상징 담지자”(symbol bearer)라는 사실에 있다. 안수받은 성직자는 그리스도 또는 하나님 현존의 상징을 담지하는 기능을 수행하고 있다. 셋째, 그가 하나님과 일반 회중 사이에서 가교(a bridge) 혹은 중재자(intercessor)역할을 하는데 있다. 그러므로 목회는 개인영성의 개발이상의 의미를 지닌다. 어떻게 하나님의 자녀를 하나님과의 관계성속에 이끌어갈 것인가가 목회의 구심점이기도 하다. 목회는 결국 인간과 하나님과의 관계속에서 양자에 봉사하는 기술이다. 그렇다면 인간과 하나님간의 관계점 즉, 접촉점을 찾아 효율적으로 봉사해야 할 책임이 있음을 주지의 사실이다. 이 접촉점인 영성의 본질을 형태적으로 이해하고 체계화하는 데는 다양한 방법들이 있어 왔음을 알게 된다. 홈즈(U. T. Holmes)는 인간의 영성을 현상적인 차원에서 분석했다. 즉 영성의 현상적인 특성을 관조적, 정적, 상상적, 공적인 차원에서 이해해 나갔다. 전통적인 방법으로는 윤리적 행위로서의 ‘완덕’(完德)과 신비적 품성으로서의 성성(聖性)으로, 전자를 수덕신학(修德神學), 후자를 신비신학(神秘神學)으로 나누는 것이었다. 이것이 정화의 길(Catharsis), 조명의 길(Photismos), 합일의 길(Theleiosis - heonosis)의 세 단계이다. 칼 라너는 이와같은 두 가지 전통적인 영성의 노선을 ‘존재론적 성성’과 ‘윤리적인 성성’ 으로 재표현하면서 이에 대한 상호관련성을 고찰하기도 하였다. 본 장에서는 목회와 영성은 구체적으로 어떠한 관계속에서 상호이해하며 개발되어져야 할 것인가를 살펴보고자 한다. 제 1 절 목회와 영성의 상호필연성 헨리 나우엔(Henri J. M. Nouwen)은 영성(Spirituality)과 교역(ministry)을 간명하게 구별지으면서 그 상호연계성을 밝히고 있다. 교역은 주님의 이름으로 교역하는 것이다. 교역은 가난한 자에게 복음의 좋은 소식을 가져오며, 갇힌 자에게 자유를, 소경에게 다시 보게함을, 눌린 자에게 해방을 선포하는 것이요, 주님의 은혜의 해를 널리 전하는 것이다(눅4:18). 영성은 우리 안에 계신 성령께 관심을 집중하여, 성령을 따라 사는 삶이다. 영성은 우리를 광야 사막과 산위로 보내어 기도하게 하는 것이요, 우리 가슴과 머리를 열고 주님앞에 서는 것이요, 살아계신 우리 하나님의 놀라우신 아름다움을 마음으로 명상하는 것이다. 이 양자는 중국의 음양설의 음과 양과 같이 서로 연결된 전체의 양면이라고 할 것이다. 즉 그는 교역과 영성이 본래부터 분리된 두 개의 영역으로는 존재할 수 없으며, 이 양자는 예수 그리스도를 주님으로 믿는 그리스도인들의 하나의 삶의 양면임을 시사하고 있다. 그러므로 기독교영성과 기독교 교역은 교역자의 하나의 삶의 양면을 의미하며, 이중 어느 한면의 약화는 다른 한면의 약화를 가져오며, 동시에 어느 다른 면의 강화는 동시에 전체의 삶의 강화를 도모할 수 있다. 기독교 영성이란 말은 ‘하나님 앞에서 내가 어떠한 사람이 되어가고 있는가?’에 관심을 갖는다. 이것은 기독교 교역(Christian ministry)이 ‘우리가 하나님과 함께 하나님을 위하여 무엇을 할 것인가?’에 초점을 맞추는 것이다. 교역이 우리의 ‘할일’에 관심을 둔다면, 영성은 우리의 ‘사람됨’에 관심을 갖는다. 교역이 봉사에 초점을 맞추는 반면에 영성은 하나님과의 사귐(관계)에 초점을 맞춘다. 결국 양자는 모두 하나님과의 관계속에서 되어지는 봉사와 사귐이다. 영성에 대해 포괄적으로 정의하고 있는 Urban T. Holmes는 기독교 영성을 하나님과 인간과의 관계수립을 통하여 인간이 하나님의 능력 속에서 살고, 하나님의 본질을 역사속에서 창조적으로 실현시키는 것이라고 하여 관계성속에서 이해하려고 하였다. 반면, 노만 샤우척(Noman Shawchuck)은 이 관계가 하나님이 주신 선물임을 강조하고 있다. 즉 양자는 ‘하나님의 성령과 관계성’이라는 하나의 영성점에서 일치하고 있다. 김경재 교수는 영성을 초월자와의 관계의 차원을 넘어서 사회의 삶의 현장속에서 그 결과가 표현되어야 함을 강조한다. 이상의 학자들의 견해에 의해 다음의 결론을 도출할 수 있다고 오성춘 교수는 말한다. “첫째, 기독교 영성은 하나님께서 인간속에 불어넣어 준 인간의 영의 갈망에서 출발한다. 둘째, 하나님께서 성령을 인간의 피조세계속에 보내어 인간을 찾아 새로운 피조물로 변화시키려는 하나님의 은혜와 역사속에서만 기독교 영성은 가능하다. 셋째, 기독교 영성은 인간의 영과 하나님의 영이 만나 지속적인 관계를 맺고 사는 것이다. 넷째, 인간이 하나님의 성령과 관계를 맺고 교제하며 살 때에 인간은 새로운 의식 의미와 힘을 얻게 된다. 다섯째, 그때에 인간은 하나님의 뜻과 삶을 이 세상 속에 실천하는 삶을 살게 된다.” 이런 정의하에 그는 ‘교역, 즉 목회란 이 기독교 영성이, 인간의 영이 하나님을 만나 하나님의 교역을 이 땅위에 실천해 나갈 수 있는 중간 개념이라고 정의한다.’ 또한 목회란 구체적인 역사현장속에서 하나님의 삶을 구체화시키며, 하나님의 나라를 확장하며 하나님의 구원을 실천해 나가는 그리스도인의 봉사이다. 그런데 영성은 초월을 추구하는 인간의 영이 어떻게 초월하신 하나님의 성령과 만나 그 분과 지속적인 관계를 맺어 궁극적인 의미와 힘을 경험하며, 하나님의 삶에 참여할 수 있는가를 구체적으로 추구한다. 그러므로 인간의 영이 구체적으로 하나님의 삶을 이 세상에서 실천하는 교역(목회)에 참여하려면 반드시 영성훈련을 통하여 영성의 깊이에 서지 않으면 안되는 것이다 라고 그 양자를 필수불가결한 양면임을 명백히 한다. 제임스 민즈(James E. Means)는 목회자의 자질을 말하면서, “많은 목회자들이 하나님과의 개인적 관계에서 취약함을 보인다. ‘의(義)와 경건과 믿음과 사랑과 인내와 온유’(딤전6:11)와 같은 깊은 영성의 증거를 갖지 않고서는 그 어느 누구도 교회의 지도력을 구하거나 소유할 수 없다.”고 하였다. 이것은 영성이 곧 목회현장의 기초임을 말해준다. 다니엘 D. 윌리암스(Daniel D. Williams)는 “교역은 모든 교역자들뿐만 아니라 모든 그리스도인들이 담당해야 하는 것으로 인간을 돌보시는 하나님의 은혜에 응답하여 하나님의 구원의 능력에 관한 지식과 깨달음을 다른 사람들과 함께 나누는 것이다.”고 하며 교역은 교역자의 그리스도에의 충실성, 즉 교역자와 그리스도의 성령과의 관계의 깊이 즉 영성의 깊이에 따라 달라질 수 있다는 것이다. 넬슨 타이어(Nelson Thayer)는 목회 최우선의 기능은 사람들을 격려하여 성경의 하나님의 성령의 현존을 체험하게 하며, 성령과의 지속적인 관계를 맺고 살게하며, 성령의 인도하심을 따라 자기들의 삶을 재구성하여 그리스도 중심의 삶을 살게 하는 것이라고 말한다. 그런 의미에서 기독교 영성개발과 목회의 중심적 사명과는 동일하다고 주장한다. 이상에서 살펴본 바와 같이 교역은 인간과 하나님과의 관계성 증진을 위한 삶 전반에서 표현되는 봉사라고 할 수 있다. 그런데 인간의 영이 하나님과의 관계성을 가지기 위해서 반드시 필요한 중간 매개체가 영성임을 살펴보았다. 그렇다면 교역자는 끊임없이 자기의 영성을 개발하여 목회현장속에 현존하시는 하나님의 성령에 민감할 때에라야 진정한 의미에서의 교역(목회)을 할 수 있을 것이다. 제 2 절 목회와 영성신학 정립의 문제 앞서서 우리는 목회와 영성의 상호필연성을 살펴보았다. 교역자는 하나님과 인간사이에 서있는 중보자요, 인간을 들으며 동시에 하나님을 들어야 하는 자이기 때문에 끊임없이 하나님앞에 서는 훈련을 쌓아야 한다. 하나님 앞에 서서 하나님을 청종하는 것이 하나의 삶의 스타일이 되기까지 고난당하는 사람에게 하나님의 능력과 도움을 전달하는 은혜의 통로의 역할을 충실히 감당할 수 없는 것이다. 그렇다면 목회자가 교역의 현장에서 하나님의 은혜의 전달의 통로로서 사역을 충실히 감당하기 위해서 신학적 기초가 분명히 서 있어야 할 것이다. 그의 영혼을 하나님이 원하시는 방향으로 인도해야 할 목회자라면 분명 하나님의 말씀과 성서적 삶의 적용을 충분히 전달해야할 신학적인 사고를 소유해야 할 것이다. 이런 의미에서 목회자는 영성신학의 정립을 필요로 한다고 하겠다. 영성과 신학이란 개념의 연합이 영성신학이다. 그러므로 영성신학의 올바른 정의를 내리려면 두 가지 개념에 대한 이해가 선행되어져야 한다. 영성의 개념을 앞서서 홈즈의 표현대로 하나님과 인간의 관계성차원에서 살펴보았다. 특히 목회와의 연계성에서 영성은 하나님과 인간의 관계성속에서 하나님의 교역을 실현하는 중간 매개체로서 또한 하나님의 삶을 실현하는 과정에서의 목회를 위한 힘과 깊이를 주는 것이 영성임을 알았다. 영성이란 개념은 ‘영’(Spirit)이나 ‘정신’(pneuma)이란 말마디로서 신령한 능력, 즉 초자연적인 능력을 지칭하는 성서적인 용어와는 일치하는 것 같다. 그러므로 진정한 영성은 예수 그리스도를 중심으로 하고, 그 분을 통하여 성삼위에서 이르는 영성일 뿐이다. 이는 영성생활의 생명적인 원리인 창조된 은총이 단지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만 우리에게 올 뿐아니라, 영성생활에 정진하는 사람이라면 누구든지 다 자신들이 처한 종교적 위치에 관계없이 의식적으로나 무의식적으로 그리스도의 가르침을 따라야 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영성신학은 신적인 계시진리와 개개인의 종교체험에서 시작하여, 초자연적 생활의 본질을 밝히고, 그 성장과 발전을 위한 지침을 규정하며, 영성생활의 시초에서 완성에 이르기까지의 영혼들의 진보과정을 설명하는 신학의 한 영역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영성신학이 다른 신학과 다른 분야 특히 조직신학이나 교의학과 차이점이 있다면 체험을 중요시한다는 점이다. 그런 면에서 영성신학은 추상적인 이론적 신학이 아니라 “체험의 신학”( a theology of experience)이라고 말할 수 있다. 또한 영성신학은 그리스도인의 영성적 삶에 관계되기 때문에 기독교 윤리와 관계되며, 목회자의 영성과 교인들의 영적 성장과 훈련에 관계되기에 실천신학, 특히 목회학과 기독교 교육에도 관계되고, 기독교 신앙(영성)의 본질의 규명에 관계되기 때문에 조직신학과 불가분리하게 연결되어 있다. 이런 점에서 영성신학은 체험에 바탕을 둔 하나의 새로운 “종합신학”(comprehensive thology)이라고 말할 수 있다. 에티엔느 질송(Etiemnne Gilson)은 이러한 전통적 신학개념을 다음과 같이 영성생활 신학에 응용하였다. 원래 영성생활은 하나님의 생명이 영혼과 상통하는 통교이기 때문에, 여기에 관한 언급은 그 무엇이나 하나님에 관한 학문, 즉 신학으로 연결된다. ‥‥ 영성신학이 사변적인 학문인 만큼 그것은 결국 신적 생명의 본질과, 이 생명이 영혼과 상통하는 일반 범칙들을 다루게 되고 이러한 이론과 지식들과 연관된다. 또 이것은 성스러운 학문이고, 특히 신학의 한 특수부분인 만큼 방법론에 있어서 신학 자체의 방법이외의 다른 방법을 쓰지 않는다. 그러므로 그것은 교회가 보존하고 해석하는 하나님의 말씀에서 출발하여 교리적으로 전개된다. ‥‥ 그것이 하나님의 말씀에 근거를 둠으로써 영성생활의 신학 자체도 권위에 의거하여 전개된다. ‥‥ 영성신학은 모든 영성생활이 따라야 하는 법칙들을 교리적으로 언급한다. 이런 법칙들은 그 기원과 목적에서 추론되기 때문이다. 신학을 영성에 관계지으려고 한다면, 그것은 폴 틸리히(P. Tillich)가 신학자들에게 “논리적 차이를 경건의 요소로 채우지 말라”고 경고한 그 금지된 방범이 되어서는 안된다. 이미 류기종박사를 통하여 살펴보았듯이 영성신학은 윤리에 관계된 것과 실천에 관한 신학이므로 이론으로 경건을 능가해서는 안된다는 것이다. 그것은 반지성적(反知性的)일 뿐만 아니라 반영적(反靈的)이기도 한다. 왜냐하면 지성은 필연적으로 영에 속하면서 영은 지성보다 훨씬 포괄적인 실제이기 때문이다. 이상에서 살펴본 것처럼 영성과 신학은 인간이 하나님을 찾는 두 길이다. 얼핏보면 그들은 서로 다르지만, 결국 그들은 일치한다. 영성은 기도, 예배, 훈련에 의해 향상된다. 이러한 수단들에 의해 사람들은 그들 자신을 초월하였으며, 그들의 인간 존재는 고양되었고, 그들은 하나님과 교제하는 법을 알았다. 신학은 반면에 지적탐구에 의해 향상된다. 그것은 지적 성실성을 신뢰하는데 대한 곤란은 인정한다. 그렇지만 신학의 길을 추구하는 사람들은 이것 역시 그들을 초월하도록 하는 훈련임을 발견한다. 역동적인 신학은 그것이 지적인 사랑의 정열에 의해 고무되어지기 때문에 과학적 훈련이 되기를 멈추지 않는다. 그것은 하나님에 관한(about) 지식으로 만족할 수 없으며, 그것은 적극적으로 하나님에 관하여 잡담하는 것을 싫어한다. 하나님 지식은 우리 친구들에 관한 지식처럼, 결국 교제에 근거를 둔 지식이어야 한다. 하나님 지식은 하나님 사랑과 병합된다는 것이다. 결국 영성신학은 지성과 영성이 조화되는 하나님에 관한 지식을 심화시켜 삶의 현장에서 진정한 하나님의 교역을 실천하는 영성분야라 하겠다. 목회의 현장에서 필연적으로 만나는 모든 영적인 문제를 효과적으로 다루는 지식을 습?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