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 소망을 주신 하나님을 찬송하리로다 본문: 베드로전서 1:3-7(12) 주제: 산소망, 선택된 나그네의 삶 서론 제1강에서는 신자의 신분이 \'선택된 나그네\'임을 살펴보았다. 신자는 본향인 천국을 떠나 이 세상에서 정처 없는 일시체류자인 외국인으로 본향을 사모하고 본향의 가치관대로 살아가는 나그네이지만, 하나님이 영원 전에 깊은 뜻대로 예정하시고 현재 성령으로 성별 하시고 예수 그리스도의 피 뿌림 안에서 성결된 순종된 삶을 살도록 선택하신 자이다. 신자는 나그네이지만 복권처럼 우연히 뽑힌 자가 아니라 영원 전부터 영원 후 까지 신분이 보장되어 있고, 현재와 현세를 도피하는 자가 아니라 성결한 순종의 삶을 역동적으로 살도록 성부 성자 성령 삼위일체의 총애를 받는 존재인 것이다. 제2강에서는 \'선택된 나그네\'의 삶이 어떠한 것인지 살펴볼 것이다. 오늘 본문에서(1:3-7) 신자는 어디로 가는지 알 수 없는 나그네가 아니라 미래의 소망을 향하여 가고 있는 자임을 밝혀져 있을 뿐 아니라(1:3-5), 현재의 시련이 오히려 그 소망을 더 확실하고 영광스럽게 하는 것을 체험하는 자임이 밝혀져 있다(1:6-7). 1. 신자에게 주어진 소망은 어떠한 것인가? 신자는 소망을 향하여 가고 있는 나그네인데, 본문에는 소망이 세 가지 각도에서 제시되어 있다. 소망의 성격을 나타내는 헬라어 전치사 \'에이스\'(to, unto)가 3절의 \'산 소망\'앞에 붙어 있고, 4절의 \'기업\' 앞에도 붙어 있고, 5절의 \'구원\' 앞에도 붙어 있어서 소망(3절)=기업(4절)=구원(5절)이 확연히 드러나 있다. (1) 산 소망(1:3) 선택받은 나그네로서 이 세상에 살고 있는 신자들에게 주신 소망은 살아 있는 소망이다. 왜 소망의 성격이 살아있다는 것일까? 본문의 소망은 내가 무엇을 소망한다고 할 때 \'소망하는 나\'에게 초점을 둔 \'소망\'이 아니고 즉, 소망하는 행위나 상태가 아니라 \'소망의 대상\'(무엇)으로서의 \'소망\'을 말한다. 소망의 대상으로서의 소망을 \'산 소망\'이라고 한 것은 \"죽은 자들로부터의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을 통하여 우리를 산 소망에로 낳으신 자\"라는 문맥에서 볼 때, 죽음과 대치되는 \'산 소망\'이다.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을 통하여 예수 그리스도의 생명이 신자에게 전달되었고 이 생명이 소망을 \'산 소망\'으로 만드는 것이다. 산 소망은 부활하셔서 살아 계신 그리스도에 그 기초를 둔다. (2) 하늘의 기업(4절) 산 소망은 미래의 기업( )에 대한 소망이다. 이 동일한 단어가 70인역 성경에서는 이스라엘에게 약속되었던 땅의 소유를 지칭하는데 사용되고 있다. 그 땅은 이스라엘에게 하나님의 선물로 주어졌던 이스라엘의 소유물이었다. 그리스도인의 기업은 적대 세력에 의해 파괴될 수 없으며 너무 익은 과일처럼 상하거나 색깔이 변하는 법이 없다. 베드로는 세 단어를 통해서 그리스도인의 기업의 영원성을 점층적 방법으로 묘사하고 있다. 썩지 않고( ) 더럽지 않고( ) 쇠하지 아니하는( ). 이 기업은 하나님의 말씀이 결코 파괴될 수 없는 것과 마찬가지로 파괴될 수 없다. \"썩지 않는다\"는 것은 죽음과 부패로부터 보호된다는 것을 말한다. 신자의 기업은 사망이나 부패가 해치지 못하는 것이다. \"더럽지 않는다\"는 것은 도덕적 부정으로부터 보호되는 것을 말한다. 신자의 기업은 도덕적인 부정이 전혀 없는 것이다. \"쇠하지 않는다\"는 것은 자연과 시간으로부터 보호되는 것을 말한다. (3) 마지막 순간에 나타날 구원(5절) 마지막 순간에 나타난 구원은 미래의 구원을 말한다. 사단의 포위와 박해와 고통으로부터의 완전한 구원을 의미한다. 여기서 구원은 하나님께서 신자들을 그들의 원수들로부터 건져 내사 그들의 억울한 사정을 풀어주시고 그들로 하여금 그들의 기업을 얻게 하시는 것을 말한다. 마지막 순간에 나타날 이런 구원이 지금은 \"예비되어\"있다. 사람들의 눈에는 보이지 않으나 하나님의 손에는 예비되어 우리를 기다리고 있는 것이다. 2. 하나님은 신자에게 주신 산 소망을 어떻게 지키시는가? 신자들이 소유할 소망은 \'산 소망\'이고 부패 오염 쇠퇴가 없이 하늘에 간직되어 있는 기업이고 마지막 순간에 계시되기로 예비된 구원이다. 그러나 아무리 영광스럽고 화려한 소망이라고 할지라도 그것을 상속할 우리가 위험이나 실수나 나약으로 그것을 차지하지 못한다면 무슨 유익이 있겠는가, 장래에 상속할 기업이 안전하고 영광스러운 것이라면 그것을 상속할 상속자도 역시 안전하게 보호되어야 마침내 그것을 차지할 수 있는 것이다. 과연 우리에게 주어진 \'산 소망\'은 어떻게 보호되며, 상속자인 우리들 또한 어떻게 보호되는 것일까? (1) 하나님이 해산하시므로(3절) 베드로는 하나님을 \"죽은 자들로부터의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을 통하여 우리를 산 소망에로 다시 낳으신 자로\"로 지적하고 있다(1:3). 여기에 하나님의 해산(解産)이 언급된다. 하나님은 우리를 낳으신 자이시다. 하나님이 \"산 소망에로\" 해산하사 그 결과로 태어난 자들이 우리이므로 소망의 상속은 너무나 확실하고 안전한 것이다. \"다시 낳으신 자(거듭 낳으신 자)\"는 능동태로 사용되었다. 이것은 곧 하나님이 중생의 주도자이심을 강조하는 것이다. 하나님은 육신적 생명의 주인이실 뿐 아니라, 영적인 생명의 주인이시다. 하나님은 \"그의 많은 긍휼을 따라\", 죽은 자들로부터의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을 통하여 우리를 산 소망에로 거듭 낳으신 자\"이시다. 하나님의 해산의 동기: \"그의 많은 긍휼을 따라\". \'은혜\'는 하나님이 주시는 모든 것을 가리키고 \'긍휼\'은 그 모든 것을 주게 하는 하나님 자신 속의 성품을 가리킨다. 긍휼이라는 말은 상대방의 비참한 상태를 보고 거기에서 구출해 주고 싶은 마음의 움직임이다. 상대방에게 은총을 받을 만한 선행과 공로가 있다면 긍휼은 불필요하다. 상대방에게 아무런 선행과 공로가 없기 때문에 긍휼이 동하는 것이다. 다시 말하면 하나님께서 우리를 \'산 소망에로\' 거듭 낳으신 것은 우리의 선행과 공로 때문이 아니라 오직 그분의 긍휼 때문이다. 그분이 주도적으로 긍휼을 베푸신 것이다. 긍휼을 베푸시는 그분의 성품이 불변하기 때문에 상속자인 우리의 신분은 그만큼 확실하게 보장된 것이다. 해산의 수단: \"죽은 자들로부터의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을 통하여.\" 하나님께서 우리를 \'산 소망에로 거듭 낳으신\'것은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을 통해서이다. 예수 그리스도를 부활하게 하신 하나님의 능력이 \'산 소망\'에로의 우리의 중생을 가능하게 한 것이다.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은 죽음으로부터의 새 생명이며, 이 새 생명이 신자들의 \'생명에로의 중생\'을 가능하게 하였다. 다시 말해서 \'산 소망에로의 중생\'에는 하나님의 부활의 능력이 개입된 것이다. (2) 하나님의 능력 안에서 믿음을 통한 보호하심(믿음으로 말미암아 보호하신다)(5절) 하늘의 기업을 상속받을 신자들은 그 출생 자체가 하나님의 해산에 의한 것이다. 따라서 상속인의 안전은 그만큼 강하게 보장된 것이다. 상속인의 안전은 하나님의 해산에 의한 중생이라는 그 시발점에서만 보장된 것이 아니라, 상속인이 하늘의 기업을 상속받기까지 현재의 삶에서 하나님의 능력 안에서 믿음을 통해 보호되고 있다는 점에서도 강력하게 보장된 것이다. 5절의 \"말세에 나타내기로 예비하신 구원을 얻기 위하여 믿음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능력으로 보호하심을 입었나니\"에서 \"보호하심을 입었나니\"는 원문상 \"보호하심을 입고 있나니\"라는 뜻이다. 즉 하나님의 능력의 보호는 과거에 한 번 임한 것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현재 계속 진행되고 있는 것이다. 현재 계속 진행되고 있는 \'보호\'는 마치 요새에서 보초가 보호하는 것과 같은 보호이다. 마치 무장 보초가 요소나 군부대를 보호하는 것처럼 하나님이 자신의 능력으로 하늘 기업을 상속받을 신자들을 현재 계속 보호하시고 계신다. 인간은 나약하고 또한 이미 타락한 본성을 소유한 자들이다. 그리고 세상은 인간을 타락하도록 만드는 수많은 유혹들로 가득 차 있다. 만약 이러한 처지와 환경 속에서 하늘 기업을 차지하는 것이 인간의 의지에만 맡겨져 있다면, 인간 자신의 능력에만 맡겨져 있다면, 그 어떤 인간이 하늘 나라의 기업을 차지할 수 있겠는가? 하나님은 우리 상속인들을 자신의 능력으로 보호하시되, 우리 속에 믿음을 불러일으키심으로써 보호하신다. \"믿음으로 말미암아\"라는 구절이 이점을 보여준다. 여기서 말하는 믿음은 고난 중에도 끝까지 하나님을 신뢰하고 하나님이 약속하신 하늘 기업을 믿는 것을 말한다. (3)시련을 통한 믿음의 연단을 통해서 보호하신다.(6-7절) 하나님께서 이토록 하늘나라의 기업을 지켜주시고 보호해주시는데 왜 신자들은 세상에서 고난을 당하며 어려움을 느끼면서 \'여러 가지 시험\'을 받으며 살아야 하는가? 물이 흐를 때 같이 흐르면서 수영하는 자는 수영이 힘들지 않다. 세상 사람들은 세상의 가치관이 흐르는 대로 같이 흐르기 때문에 별로 어려움을 느끼지 않는다. 그러다가 마침내 멸망의 폭포에 이르게 되는 것이다. 그러나 신자는 세상의 흐름을 거스리면서 수영하기 때문에 세상의 거센 물살과 끊임없이 부딪히고 싸워야 하지만 마침내 영광의 낙원에 이르게 된다. 신자들이 당하는 \'여러 가지 시험\'은 \'산 소망\'을 약화시키거나 무효화시키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그것이 \'산 소망\'을 붙잡는 믿음을 순화시킨다는 차원과 하늘 기업을 더 풍성하게 얻게 하는 계기가 된다. 시련으로 인한 근심에서(6절) 베드로는 수신자들이 당하고 있는 시련을 여러 가지 시험, 잠간의 시련, 외부의 시련을 통한 내적 근심, 시련의 필요성 면에서 분석했다. \"여러 가지 시험\"에서 \'시험\'은 죄를 범하도록 유인하는 유혹들이 아니라 \'시련들, 시험의 경험들\'을 의미한다. 즉 박해로 인한 고통, 가난, 질병 등을 포함하여 온갖 가능한 고통을 총칭하여 \'시련들\'이라고 했을 것이다. 신자들이 세상에서 당하는 다양한 시련들은 시간적으로 \'잠시성\'을 띠고 있다. 이땅의 시련들을 하나님의 관점에서 볼 때 잠시이고(벧후3:8-9), 영원한 영광에 비할 때 잠시이고(고후4:17), 하나님의 섭리 안에서 속히 끝나기도 하기 때문에 잠시이다. 이러한 시련들은 신자들이 우연히 당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 보시기에 필요해서 당하는 것이다. 예수님의 고난이 하나님이 보시기에 필요한 것이었듯이, 신자들의 시련도 하나님 h시기에 필요한 것이다(벧전4:12). 시련으로 인한 믿음의 연단으로(7절) 신자들에게 시련들이 필요한 것은 시련들이 믿음을 제련하기 때문이다. \"믿음의 시련\"은 결과의 측면에서 본 \"믿음의 연단\"을 가리킨다. 믿음의 연단 자체가 제련된 금보다 귀하다는 말씀이 아니라, 연단을 통하여 순화된 결과 즉 믿음의 순수성이 제련되어 불순물들이 제거된 금보다 더 귀하다는 것이다. 반짝이는 것이 모두 금은 아니다. 반짝이는 것을 용광로에 넣어보면 진짜 금인지 아닌지가 판가름난다. 믿음으로 보인다고 하여 모두 믿음이 아니다. 시련의 용광로에 들어가 봐야 참 믿음과 거짓 믿음이 드러난다. 뿐만 아니라, 진짜 금이라 할지라도 용광로 속에서 불순물이 제거되듯이, 참 믿음이라 할지라도 고통의 용광로 속에서 약간의 교만, 허영, 이기심, 세속성, 관능등의 불순물이 제거된다. 용광로에서 제련된 금이 그 광채를 더욱 드러내듯이 고통의 용광로에서 단련된 믿음이 그 광채를 더욱 드러내게 된다. 칭찬과 영광과 존귀의 상급을 베푸신다(7절). 시련들의 용광로에서 불순물이 제거된 믿음은 예수 그리스도가 나타나실 때 즉 구원의 최종완성을 위하여 그분이 나타나실 때에 \"칭찬과 영광과 존귀\"의 결과를 얻게 된다. 작은 배는 작은 배에 맞게 가까운 바다에만 다닌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당신을 큰 배로 만들어 많은 보물을 싣도록 하시려 한다면 당신에게 큰 파도가 무엇인지를 알게 하셔야 한다. 파도의 진노를 체험하면서 마침내 \'깊은 속에서 그의 경이\'를 보게 하신다\"(Spurgeon). 3. 우리의 찬양의 근거와 참된 기쁨의 근거가 되시는 하나님(8-12) 하늘의 기업을 소망으로 보장하시고 그 기업을 상속할 우리들을 낳으시고 보호하시는 하나님은 마땅히 찬양을 받으실 분이신 것이다. (1) 우리의 찬양의 근거가 되시는 하나님 3절에 \"찬송하리로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아버지 하나님\"이라고 찬양한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아버지 하나님\"은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을 통하여 우리들을 중생하게 하심으로써 우리들의 아버지이시기도 하다. 그는 우리들의 아버지로서 하늘 기업을 우리에게 상속하게 하신 것이다. 이런 하나님을 우리 양자들은 찬양해야 마땅한 것이다. 신자는 하나님의 양자로서 하나님의 해산으로 태어났고 하나님의 능력으로 보호받고 마침내 하나님이 예비하신 상속재산을 차지할 것이기 때문에 항상 찬양을 드려야 한다. (2) 우리의 기쁨의 근거가 되시는 하나님 베드로는 하늘 기업을 얻도록 우리를 낳으신 하나님 아버지를 찬양할 뿐 아니라, 신자들도 역시 \"크게 기뻐한다\"는 사실을 지적했다. 신자들은 앞으로 상속받을 소망이 확실하고 그 소망을 얻을 우리들이 하나님의 능력으로 완전하게 보호되고 있으므로 기뻐서 펄쩍펄쩍 뛰는 자들인 것이다. 밖으로 다양한 시련들이 있고 안으로 그것들로 인한 심적인 고통이 있지만, 하늘의 기업을 생각하면 기쁨이 넘치는 것이다. 제3강: 영광스러운 즐거움으로 인한 산 기쁨 본몬: 베드로전서 1:8-12 주제: 기쁨. 구원. 즐거움. 소망 서론 이 세상에서 나그네로서 살아야 하는 성도들의 삶은 어떠해야 하는가? 베드로당시에 이 편지를 받아보았던 흩어져있는 나그네들은 여러 가지 어려운 상황에 처해있었었다. 그들은 자신들의 삶의 터전을 떠나 머나먼 이국 땅에서 나그네로서 살아야 했으며, 그곳에서도 환영을 받지 못하면서 어려운 형편가운데 살아가고 있었다. 이방문화와 동요되지 않기 위해서 그들은 신앙을 굳게 지키고자 했지만, 그러면 그럴수록 그들은 여러 가지 어려움을 겪게 되었던 것이다. 심지어 이들은 네로 황제가 로마시를 불태우고 나서 그 범죄를 그리스도인들에게 돌렸기 때문에 이들은 더욱더 어려움을 당했으며, 그 당시 로마인들에게 야만인으로 여김을 받았고, 근친상간을 하는 사람들로, 사람을 잡아먹는 사람들로, 로마제국을 반역하는 폭도들로 여김을 받았었다. 이들은 수많은 오해와 편견 속에서 신앙의 자유를 지키기 위하여 때로는 컴컴한 지하 세계 속에서 평생을 살아야 했었고, 때로는 맹수의 밥이 되고 투사들의 훈련용이 되기도 하였으며, 수많은 로마인들의 즐거움을 전해줘야 하는 하나의 놀이기구가 되었고, 미쳐버린 네로에 의해서 로마시의 밤을 환히 비추는데 사용된 인간 햇불이 되기도 하였던 것이다. 이러한 상황가운데서 베드로는 먼저 이 세상에서 나그네로서 살아가는 성도들에게 환난 가운데서 오히려 기뻐하라고 말한다(6절). 세상 가운데서 나그네로 살기 때문에 당하는 환난이 우리의 믿음의 연단이 되고, 이것을 이겨내면 예수님이 오실 때 오히려 칭찬과 존귀함을 얻기 때문이다고 말한다(7절). 또 이러한 믿음으로 살아갈 때 우리는 종국적인 구원 즉 환난에서 벗어나 영혼의 구원을 얻는다(9절)고 말한다. 1. 성도의 기쁨은 무엇인가?(왜 기뻐하는가?) (1) 사랑으로 얻어지는 기쁨(8절상) 성도의 기쁨은 예수 그리스도를 보지 못하였으나 사랑하기 때문에 얻어지는 기쁨이다(8절상). 베드로전서의 수신자들은 베드로처럼 예수 그리스도를 육신의 눈으로 실제적으로 본 체험이 없는 자들이다. 이것은 현재의 모든 성도들도 마찬가지이다. 예수 그리스도는 과거에 땅위에서 활동하실 때 육신으로 눈으로 보였고 앞으로 재림하시면 눈으로 뵐 수 있으나 지금은 보이지 아니하신다.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를 육신의 눈으로 보지 못하나 사랑하고 있다. 예수 그리스도를 보는 데는 네 단계가 있다. 예언에 의한 기대와 갈망이 있으나 실제로는 보지 못하는 단계(눅10:23,24), 성육신 한 예수 그리스도를 실제로 보는 단계(행10:39), 승천하신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의 눈으로 보는 단계(요20:29), 영화 된 예수 그리스도를 재림 후에 대면해서 보는 단계(요일3:2). 베드로는 의 단계에서 예수 그리스도를 육신의 눈으로 직접 보았다. 그러나 베드로전서 수신자들과 우리들은 의 단계에 속한 자들로서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의 눈으로 보는 자들이다. 예수 그리스도를 육신으로는 보지 못하지만 믿음의 눈으로 그를 보면서 그를 사랑하는 것이 우리 성도들이다. 성도들은 이렇게 예수 그리스도를 보지 못하나 사랑하는 자들이다. 그런데 보지 못하고 하는 사랑은 이기주의나 감정에 매인 사랑이 아니라 순수한 사랑이다. 많은 성도들이 이러한 순수한 사랑을 가지고 있을 뿐 아니라, 생명을 바칠 정도로 열정적인 사랑을 가지고 있다. 그리스도를 위하여 순교하는 자들도 있고, 그리스도를 전하기 위하여 식인종들에게로 찾아가는 자들도 있다. 베드로전서의 수신자들은 눈에 보이는 것은 시련들뿐이지만 시련을 통해 보이지 않는 주님을 더욱 사랑하게 되었다. 시련을 통해서 연단 된 믿음은 주님에 대한 사랑으로 성숙하고 주님에 대한 이러한 사랑에서 기쁨이 솟구치는 것이다. 토저(A. W. Tozer)는 \"천국의 위인들은 다른 사람들이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보다 하나님을 더 사랑한 자들이다\"고 말했다. 허드슨 테일러(Hudson Taylor)는 무엇이 선교의 가장 자극적인 동기였느냐는 질문을 받고 바로 그것은 \"그리스도에 대한 사랑\"이라고 대답했다. 윌리암 부스(William Booth)가 사회의 버림받은 자들, 소외되고 불쌍한 자들을 열정적으로 도와준 것은 그리스도에 대한 열정적인 사랑 때문이었다. 주님을 보지 못하지만 주님에 대한 사랑 때문에 주님의 일을 하고 사랑 때문에 세상 사람들을 사랑하는 것이 기독교의 매력이다. 주님을 사랑하면서 살아가는 자는 주님으로 인한 기쁨이 넘치는 삶을 살게 되어 있다. 시련 때문에 마음이 상할 때 눈을 들어 주님에 대한 사랑을 고백해야 한다. 윌리암 카우퍼(William Cowper)는 다음과 기도했다. 주여, 나의 사랑이 나약하고 미약한 것, 이것이 나의 최고의 안타가움입니다. 그러나 나는 주님을 사랑하고 흠모합니다. 오, 주님을 더욱 사랑하도록 은혜를 주소서! 시련을 당할 때에 주님에 대한 사랑을 고백하고 주님을 더욱 사랑하는 은혜를 구하면, 시련이 상처를 내는 독약이 아니라 치료를 하는 양약이 될 것이다. 이것이 바로 성도의 기쁨이다. 성도는 눈에 보이는 시련 때문에 좌절하고 실망하는 것이 아니라, 눈에 보이는 시련 중에도 눈에 보이지 않는 주님을 사랑하므로 참된 기쁨을 누리며 사는 것이다. (2) 믿음으로 얻어지는 기쁨(8절하) 1:8 상반절에서 이미 그리스도를 보지 못한다는 것이 언급되었는데 1:8 하반절에서 다시 보지 못한다는 것을 언급하면서 \"이제도\"란 말이 덧붙여져 있다. 여기 \"이제도\"는 상반절의 과거에 \"보지 못하였으나\"와 비교되기도 하지만, 여러 가지 시련을 당함에도 불구하고 구원자가 보이지 아니하는 고통스러운 현실과 비교되기도 하며, 앞으로 마침내 나타나실 구원자와 비교되기도 한다. 우리는 지금 그리스도를 보지 못하지만 믿는다. 믿음은 앎의 방식과 삶의 기초로서 시각을 초월한다. \"믿음은 지각도 아니요, 시각도 아니요, 이성도 아니라, 하나님을 말씀으로 붙잡는 것이다\"(\"Faith is not a sense, nor sight, nor reason, but taking God at his Word\": A. B. Evans). 우리는 그리스도를 보지 못하지만 그분이 우리의 구원자로 살아 계시다는 것과 천국의 존재와 영광을 보는 것처럼 확실하게 믿는다. 어느 노파가 여름 수련회에 참석하는 동안 넘어져 발이 부러졌다. 노파는 목사님을 찾아가서 \"저는 주님이 저를 이곳으로 인도하신 줄로 압니다. 그러나 왜 내게 이런 일이 일어났는지 볼 수 없습니다! 이 일에서 조금도 유익을 보지 못합니다\"고 했다. 이때 지혜로운 목사님은 \"로마서 8:23에는 우리가 모든 것이 합력 하여 선을 이룬다는 것을 \'우리가 보거니와\'라고 하지 않았고 \'우리가 알거니와\'라고 했습니다\"고 대답했다고 한다. 우리는 보는 것에 따라 사는 자들이 아니라 믿음에 따라 사는 자들이다. 보지 못하지만 믿을 때에 \"말할 수 없는 영광스러운 즐거움으로 기뻐\"하게 된다. 세상 사람들은 신앙생활이 삶을 고달프게 하고 슬프고 우울하게 한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신앙은 삶을 우울하게 하는 것이 아니라 삶을 행복하게 하는 것이다. 신앙인들은 기뻐할 뿐만 아니라, \"말할 수 없는 영광스러운 즐거움\"으로 기뻐하는 자들이다. 기쁨의 강도가 표현할 수 없는 영광의 차원이다. 그리스도께서 구원사역을 이루시고 우리에게 성령을 보내셔서 세상이 주지 못하고 알지 못하는 기쁨, 환란 중에도 가누지 못하는 기쁨을 누리게 하셨다. 장차 완성될 천국에서 이 기쁨이 완성되겠지만 지금도 정도의 차이는 있으나 질은 같은 그 영광스러운 기쁨을 미리 맛보고 있다. 인도의 미션 스쿨을 다니는 어느 여학생이 종일 자신의 일을 하면서 노래를 불렀다. 어째서 그렇게 행복한가라는 질문을 받은 그녀는 이렇게 대답했다. \"저는 우상숭배로부터 구원을 받았습니다. 당신은 그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결코 모르실 겁니다. 저는 자유를 얻었습니다. 그것은 마치 한밤중의 어둠으로부터 대낮의 밝은 영광으로 빠져 나온 것과 같습니다.\" 어느 만화가는 인류 전체를 두 종류로 나누어 묘사했다. 그는 우물가의 두 여인 그림을 그렸다. 두 여인은 각기 물길을 두레박 하나씩을 가지고 있다. 그 중 한 여인은 슬프고 우울한 표정을 지으면서 이렇게 말했다. \"인생은 지긋지긋해. 이 두레박을 채울 때마다 잠시 후에는 그것이 다시 비어 버리고 말거든.\" 다른 여인은 아주 흡족한 표정으로 이렇게 응수했다. \"나는 인생이 놀랍다고 생각해. 이 두레박을 비울 때마다 다시 그것을 채울 수 있거든.\" 예수 없는 인생은 가득 채워진 듯하나 다음 순간 다시 공허해지는 삶이지만 예수 모신 인생은 인생의 고뇌로 비워진 두레박을 순간순간 예수로 채울 수 있는 삶이다. 우리는 예수님을 육안으로 보지 못하지만 믿음으로 그를 보고 말할 수 없는 영광스러운 즐거움을 맛보는 자들이다. 공허해 질 수밖에 없는 우리 인생의 두레박에 예수가 가득 채워져 있기 때문이다. 물질을 가지고 인생의 갈증을 해소하려고 하는 사람은 짚을 가지고 불을 끄려고 하는 사람이다. 물질로는 참된 기쁨을 소유할 수 없는 것이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를 믿으면 물질로 해갈되지 못하는 인생의 갈증이 해소될 뿐 아니라, 말할 수 없이 영광스러운 기쁨에 동참하게 되는 것이다. (3) 영혼구원으로 얻어지는 기쁨(9절) 성도들이 말할 수 없이 영광스러운 기쁨으로 현재 기뻐하는 것은 주님이 재림하실 때에 \"믿음의 결국 영혼의 구원\"을 받을 것이기 때문이다. 스펄전은 \"작은 믿음은 여러분의 영혼을 하늘로 인도할 것이지만, 큰 믿음은 하늘을 여러분의 영혼으로 운반할 것이다\"고 말했다. 베드로는 시련 중에 있는 신자들에게 시련 중에도 하늘을 사모하라고만 한 것이 아니라, 사랑과 믿음을 사용하여 하늘의 영광을 지금 시련의 현장에서 체험하라고 한 것이다. 성도의 기쁨의 원천 2. 말씀을 통해 더 커지는 산 기쁨(10-12절) (1) 말씀을 부지런히 살필 때 더 커지는 기쁨(10절) (2) 말씀을 묵상할 때 더 커지는 기쁨(11절) 제4강: 모든 행실에 거룩한 자가 되라! (선택된 나그네의 거룩한 삶) 본문: 베드로전서 1:13-21 주제: 성도의 거룩한 삶 서론 예수 그리스도의 아버지 하나님이 그의 크신 긍휼대로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로 말미암아 우리를 거듭나게 하사 산 소망을 허락해 주셨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소망은 살아있는 소망으로서 썩지 않고 더럽지 않고 쇠하지 아니하는 기업으로서 영원한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세상에서 선택된 나그네로서 살아가는 우리 신자들에게 이토록 커다란 구원의 은혜와 변치 않는 산 소망을 주셨을 뿐만 아니라 그 산 소망과 기업을 받을 상속자인 우리 자신들까지도 하나님의 능력으로 말세에 나타날 구원을 얻기까지 보호해주시고 계신다. 이 세상에서 나그네로서 살아야 하는 신자들은 세상 사람으로서 사는 것이 아니라 선택된 나그네로서 살아야 한다. 선택된 나그네들은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로 말미암아 거듭난 자들이며, 또한 산 소망을 소유한 자들이다. 이처럼 산 소망은 선택된 나그네들의 새로운 출생의 기초가 되며, 또한 신자들이 이 세상에서 선택된 나그네로서 거룩한 삶을 살도록 이끄는 원동력이 된다. 새로운 출생을 위해 선택을 받은 자들은 그들을 부르신 거룩한 자처럼 역시 모든 행실에서 거룩한 삶을 살아야 할 책임이 있는 것이다. 이것이 세상 속에서 선택된 나그네가 살아 가야할 삶인 것이다. 그렇다면 우리는 이 세상에서 어떻게 산 소망을 소유한 자들로서 살아가야 할까? 1. 거룩한 삶을 위한 준비(1:13-16) 거룩한 삶을 위한 준비는 무엇인가? 베드로는 다섯 가지의 명백한 훈계(크게는 두 가지의 명령)를 통해서 선택된 나그네들이 거룩한 삶을 살기 위해서 무엇을 준비할 것인가를 언급하고 있다. \"너희 마음의 허리를 동이고 근신하여 은혜를 온전히 바랄지어다(소망을 가지라) 사욕을 본 삼지 말고 모든 행실에 거룩한 자가 되라\" 베드로는 거룩한 삶을 위한 준비로서 \"소망을 가지라\"와 \"거룩한 자가 되라\"는 두 가지 명령을 하고 있다. 즉 마음의 허리를 동이고 근신하여 소망을 가지라는 것이며, 사욕을 본 삼지 말고 모든 행실에 거룩한 자가 되라는 것이다. (1) 마음의 허리를 동이고 근신하여 소망을 가지라(1:13) \"허리를 동이다\"란 근동인들의 의복과 연결된 비유적 표현이다. 근동인들은 헐렁한 옷을 입었기 때문에 달리거나 도망하거나 무슨 일을 시작하기 위해서는 옷을 치켜올리고 끈으로 허리를 묶어야 했다. 하나님께서 애굽의 초태생을 죽이는 재앙을 앞두고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유월절 어린양을 잡아먹으라고 명령하실 때에 \"허리에 띠를 띠고 발에 신을 신고 손에 지팡이를 잡고 급히 먹으라\"고 하셨다(출 12:11). 하나님께서 그의 크신 권능으로 이스라엘을 애굽으로부터 이끌어 내사 그들에게 새로운 삶을 살도록 하시는 그 출발점에서 하나님은 이스라엘로 하여금 모든 만반의 준비를 시키시는 것을 보게 된다. 아무리 이스라엘인들이라 할지라도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지 않을 때는 애굽에서 구원을 얻지 못하고 애굽에서 죽임을 당하는 것을 알 수 있다. 이처럼 \"허리를 동이다\"는 명령은 노동이나 경주나 전쟁을 위한 준비자세로서 마음의 헐렁한 옷을 치켜올리고 마음의 허리를 동이라는 것이다. 신자들은 이 세상에서 나그네로서 살아가지만 그러나 이들은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로 말미암은 거듭난 삶을 살고 거룩한 삶을 살아야하는 신분인 것이다. 이들이 거룩한 삶의 여정을 가기 위해서 해야할 것은 무엇보다도 먼저 마음을 가다듬고 철저한 순종의식을 준비해야 한다. 순종은 의지의 의식적 행동이다. 투쟁 중에 있는 그리스도인은 즉각 행동에 옮길 수 있는 실천적인 거룩함을 필요한다. \"근신하여\"라는 명령을 통하여서 베드로는 더욱더 이 세상에 사는 선택된 나그네들이 거룩한 삶을 살기 위해서 철저하게 준비태세를 갖추어야 할 것을 강조하고 있다. \"근신하라\"는 말은 \'자제하다\'(네포 )라는 동사로부터 온 네폰테스( )를 번역한 말이다. 이 단어는 모든 형태의 정신적, 영적 술취함 혹은 부적절로부터 자유로움을 의미한다. 거룩한 삶을 살아야할 선택된 나그네들은 이 세상으로부터 자유로워야 한다. 모든 형태의 정신적, 영적 술취함 부절제로부터 자유함을 누려야 한다. 세상의 흐름을 좇아서는 거룩한 삶을 살 수 없다. 세상의 가는 길은 죄악의 길이요 그 필경은 멸망이기 때문이다. 신자들은 외부적 상황들에 의해 지배받기보다는 자기 자신 내부로부터의 지시를 받아야 한다. 세상에서 나그네들이 어려움을 당할 수밖에 없고 시련과 고통을 만날 수밖에 없다. 그렇다고 신자들은 이 세상의 환난과 핍박과 시험과 시련에 영향을 받아서는 안 된다. 우리의 나그네로서의 삶은 잠간이요, 우리에게는 영원한 기업이 있고 산 소망이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이 세상 속에서 나그네로서 살면서 방황하고 방종 하는 나그네가 아니라 선택된 나그네로서 거룩한 삶을 살기 위해서는 우리의 마음의 허리를 동이고 근신함으로써 산 소망을 바라며 살아야 한다. 어떻게 우리가 이처럼 준비하며 살 수 있을까? 결혼을 얼마 앞둔 예비 부부가 자신들의 모든 계획을 미래의 결혼에 비추어 짜는 것처럼 우리 신자들은 삶 전체의 계획과 행동이 그리스도의 재림에 대한 소망에 집중해야 한다. 우리가 산 소망을 바라보며 그리스도의 재림에 우리의 생각을 집중하며 우리의 전진을 방해하는 세상의 많은 유혹들을 물리칠 수 있다. 따라서 우리는 하늘의 소망을 바라보며 방종하고 방황하는 나그네가 아닌 선택된 나그네로서 이 세상에서 거룩한 삶을 살아야 한다. (2) 사욕을 본 삼지 말고 모든 행실에 거룩한 자가 되라(1:14-16) 이 세상에 나그네로 살아가는 신자들은 그 본질상 신분이 세상에 속한 자들이 아니라 하나님 나라에 속한 자들이다. 우리도 한때는 불순종의 아들들(엡2:2)처럼 하나님을 알지 못하고 이 세상의 풍속을 좇고 공중의 권세 잡은 자를 따랐으며 육체의 욕심을 따라 지내며 육체와 마음의 원하는 것을 하며 살았던 본질상 진노의 자녀였었다. 그러나 지금의 신분은 어떠한가? 비록 세상에 살고 있지만 하나님께 아신 바 된 자들이요 하나님으로부터 부르심을 받은 선택된 나그네들이다. 산 소망을 가지고 이 세상에서 거룩하게 살아야할 자들이다. 따라서 신자들은 사욕을 본받지 말고 산 소망안에서 살아야 한다. \"사욕\"은 성욕만이 아니라 물욕 권력욕 명예욕 쾌락욕 등 강렬하게 몰고가는 충동적 자기추구의 욕망들을 가리킨다. \"본 삼지 말고\"라는 말은 그런 욕망들을 본으로 삼고 그것들을 따르지 말라는 것이다. 베드로당시 사회 저변에는 극심한 가난이 있었지만 상부에는 공작새의 뇌와 나이팅게일의 형 요리까지 등장했다. 비텔레우스 황제의 한 번 연회에 고기 2000마리와 새 7000마리가 희생되었다고 한다. 열 번째 남편과 결혼한 여인도 있었고, 5년 동안 8명의 남편을 둔 여인도 있었으며, 남편과 아내가 각기 21째의 아내와 21번째의 남편이라는 기록도 있다. 헬라와 로마에서는 동성연애가 흔한 관행이어서 자연스러운 것으로 여겨지고 있었다. 이처럼 그 당대는 \"사욕\"에 지배되는 사회였다. 이러한 상황에서 선택된 신자들의 삶은 어떠해야 하는가? 사욕을 본받지 말고 모든 행실에서 거룩한 삶을 살아야 한다. 2. 거룩하게 살아야 하는 이유(1:16-21) (1) 우리는 하나님에 의해 다시 태어난 자녀들이기에(1:16) 왜 선택된 나그네들은 이 세상에서 세상과 구별되어 거룩하게 살아야 하는가? \"내가 거룩하니 너희도 거룩할지어다\"라는 레위기 11:44절의 말씀을 인용하면서 베드로는 신자들이 왜 거룩한 삶을 살아야 하는가에 대한 이유를 설명해준다. 우리를 죄악가운데서 부르시고 우리에게 산 소망을 주신 하나님은 거룩하신 분이시다. 그분은 거룩 자체이시다. 그분은 우리의 왕시며, 아버지이시다. \"내가 거룩하니 너희도 거룩하라\"는 것은 왕이신 하나님이 거룩하시니 그의 백성이 마땅히 하나님의 성품을 모방해야 한다는 것이다. 또한 그분은 우리의 아버지이시다. 따라서 하나님의 자녀인 우리들이 우리의 아버지이신 하나님을 닮아야 한다는 것은 너무나도 당연한 것이다. 자녀가 아버지를 닮는 것은 자연스러운 현상이고 이치이다. 우리가 원래는 하나님의 형상대로 창조되었으나, 인간의 자유의지를 하나님을 거역하고 반항하고 범죄하는데 사용함으로써 타락하여 하나님의 형상을 잃어버렸고 거룩한 모습을 상실하였던 것이다. 그러나 우리의 왕이시며, 아버지되시고 우리의 주님의 아버지가 되시는 하나님께서 우리를 사랑하사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로 말미암아 우리가 잃어버린 하나님의 형상을 다시 회복시키는 재창조의 놀라운 사역을 이루셨다. 따라서 신자들은 우리의 아버지가 거룩한 것처럼 이 세상에서 거룩하게 살아야할 이유가 있는 것이다. (2) 각 사람의 행위대로 판단하시는 하나님의 심판이 있기 때문에(1:17) (3) 흠 없고 점 없는 그리스도의 보배로운 피로 구속받았으므로(1:18-21) 3. 거룩한 삶의 구체적인 실천(영역)(1:22-2:3) (1) 형제에 대한 진정한 사랑(1:22-25) (2) 죄에 대한 회개(2:1) (3) 영적 성장에 대한 사모하는 마음(2:2-3) 제5강: 뜨겁게 피차 사랑하라! 본문: 베드로전서 1:22-25 주제:성도의 사랑 벧전1:13-21은 소망자의 성결생활에 대해서 말한다. 1:13절의 \"소망하라\"는 말씀은 그 이전에 나오는 하늘의 기업을 소망의 대상으로 삼으라는 권유적 명령인데, 바로 이런 소망을 가진 자는 이 세상에서 나그네로 사는 동안에 거룩한 삶을 사는 것이 마땅하다는 말씀을 다룬 것이다. 소망자가 거룩한 삶을 일상생활에서 영위해야 할 이유는 하나님의 자녀로서 하나님을 닮아야 하고, 하나님의 \"가족 심판\"이 있고, 또한 그리스도의 보혈로 구속하신 하나님의 사랑이 있다는 점이다. 이제 1:22-25은 소망자의 형제사랑을 다루고 있다. 1:13-21이 하나님에 대한 소망자의 태도와 관계를 다룬것이라면, 1:22-25은 대인관계에 대한 소망자의 태도를 다룬 것이다. 소망자의 대신관계의 핵은 거룩이고, 소망자의 대인관계의 핵은 형제사랑이다.8 1. 명령: 마음으로 뜨겁게 피차 사랑하라. (1) 형제사랑은 하나님의 명령이다. 하늘의 영광스러운 기업을 소망한 자는 하나님을 향하여 거룩할 뿐만 아니라, 서로 사랑해야 한다. *갈6:10 \"모든 이에게 착한 일을 하되 더욱 믿음의 가정들에게\"해야 한다. *엡5:2 \"그리스도께서 너희를 사랑하신 것 같이 너희도 사랑 가운데서 행하라 그는 우리를 위하여 자신을 버리사 향기로운 제물과 생축으로 하나님께 드리셨느니라\" (2) 형제사랑의 자세 \"마음으로 뜨겁게(마음으로부터)\" = . 마음에서 우러나오는 사랑 가식이나 외식이 없는 마음에서 우러나오는 진정한 사랑 입술만의 사랑이나 겉치례만의 사랑, 마음이 없는 사랑을 하지 말고 마음에서 우러나오는 참된 사랑을 하라는 것이다. \"뜨겁게\" = 열정적으로, 진지하게 , 끊임없이 신자들의 형제사랑은 강도가 뜨거울 뿐 아니라 지속기간이 끊임없어야 한다. 2. 형제사랑의 근거: 영혼순화(삶의 순화)(1:22) (1) 이미 이룬 삶의 순화 \"너희가 진리를 순종하여 너희 영혼을 깨끗하게 하여 거짓이 없이 형제를 사랑하기에 이르렀으니\" = 헬 직역: \"너희가 가식없는 형제사랑을 위하여 진리를 순종하여 너희의 혼들을 순화하였으니\" \"순화하였으니\" = 순수하게 되다, 순화하다, 깨끗하게하다의 뜻을 가짐 즉 \"이미 순화하였으니\"= 성령님께서 이미 너희 삶을 순화하였으니... (2) 순화의 수단=\"진리를 순종함\" 신자들이 삶을 순화한 것은 \"진리를 순종함\"을 통해서 되었다. (3) 순화의 목표= 형제사랑 베드로는 순화의 수단을 진리에 순종하는 것으로 제시하고 순화의 목표를 형제사랑으로 제시하고 있다. 3. 형제사랑의 근거: 말씀을 통한 중생(1:23) 4. 말씀의 성격:(1:23-24) \"세세토록 있는 영원하신 말씀\" 복음즉 하나님의 말씀 제6강: 신령한 젖을 사모하라!(함께 자라갑시다.) 본문: 베드로전서 1:22-2:3 주제: 구원에로의 성장 서론 새 생명의 탄생은 너무나도 경이롭고 엄숙하기까지 하다. 그것이 사람이던지 아니면 미물에 불과한 작은 생물이라 할지라도 마찬가지이다. 한 생명이 탄생한다는 것은 무엇인가? 그것은 곧 생명을 가진다는 것이다. 살아서 움직인다는 것이다. 갓 태어난 어린 사슴이나, 갓 태어난 어린 송아지의 모습은 너무나도 아름답기만 한다. 물기가 채 가시지도 않은 모습으로 너무나도 서툴고 어색한 첫 걸음을 위해 안간힘을 쓰며 일어서려는 모습은 애처롭기까지 하다. 그러나 그 모습은 정말로 아름다운 모습이 아닌가 생각된다. 갓 일어난 어린 사슴과 어린 송아지가 본능적으로 어미에게 다가가서 어미의 젖을 빠는 모습은 커다란 감동을 자아낸다. 그 모습은 너무나도 평온한 모습이요, 너무나도 행복한 모습이다. 사람도 마찬가지이다. 엄마의 품에 안겨서 젖을 먹는 어린아이의 모습은 정말 아름답지 아니한가? 아무리 귀한 생명이라 할지라도 성장하는데 필요한 젖을 공급받지 못한다면 그 생명은 잃어버리고 말것이다. 오늘 주어진 본문(2:1-3)에서 베드로사도는 \'구원에로의 성장\'이라는 주제를 다루고 있다. 베드로는 성장을 위해서는 먼저 버려야 할 것이 있다는 것을 지적하고 힜다. \"모든 악독과 모든 궤휼과 외식과 시기와 모든 비방하는 말\"은 공동체를 파괴하는 죄악들이다. 이런 것들을 버리라고 한다. 그리고 적극적으로는 \"순전하고 신령한 젖을 사모하라\"고 권면하고 있다. 신령한 젖을 통하여 주의 인자하심의 맛을 볼 수 있게되고 그 결과 더욱 사모하게 된다. 갓 태어난 어린아이가 생명을 유지하고 성장하기 위해서는 젖을 먹어야 한다. 어린아이가 젖이나 우유를 먹지 못한다면 어떻게 되겠는가? 우리의 영혼도 마찬가지이다. 우리의 영혼이 성장하기 위해서는 \'신령한 젖\'을 먹어야 한다고 베드로 사도는 말하고 있다. 그리고 역시 육신의 몸이 성장하는 것처럼 우리의 영혼도 성장해야 함을 말하고 있다. 우리의 영혼이 성장하기 위해서는 어떻게 해야 하는가? 1. 모든 악독을 버려야 한다(2:1) 산 소망을 가진 성도는 이 세상에서 \'선택된 나그네\'로서 살아야 한다. 세상과는 다른 가치관 다른 세계관을 가지고 살아야 한다는 것이다. 하나님께 대해서는 \'거룩\'의 태도로 나아가야 하며, 사람사이의 대인관계에 있어서는 \'마음으로부터 우러나오는 형제사랑\'을 실천하면서 살아야 한다. \'거룩\'과 \'형제사랑\'을 통해서 산 소망을 가진 거룩한 나그네들은 이 세상에서 하나님의 백성으로서의 삶을 연습하면서 그 믿음이 성장하여 가는 것이다. 육신의 성장을 위해서는 편식해서는 안되고 골고루 성장에 필요한 모든 영양소를 섭취해야 한다. 어느 것 하나 부족하게 되면 영양의 결핍이 생기게 되고 결국 균형 있는 성장을 하지 못하게 된다. 또한 모든 나쁜 균들로부터 잘 보호받아야 할 것이다. 질병은 우리의 성장을 방해하고 심하면 우리의 생명까지도 빼앗아 갈 수 있기 때문이다. 산 소망을 가진 자들에게 반드시 있어야 할 영양분은 바로 \'거룩\'과 \'형제사랑\'이다. 그렇다면 \'선택된 나그네\'들이 버려야 할 것은 무엇인가? 왜 버려야만 하는가? 궤휼과 외식을 버려야 한다. 궤휼이란 쉽게 말해서 속임수이다. 응큼한 속셈을 가지고 말하거나 행동하는 일체를 의미한다. 외식은 하나님과 사람들 앞에서 말과 행동, 생각과 행동, 주일의 삶과 평일의 삶, 가정생활과 직장생활의 불일치를 의미한다. 그러면서도 안 그런 척, 안 그러면서도 그런 척 하는 것이다. 궤휼과 외식, 이 두 가지 죄악은 속임이라는 공통점을 가지고 있다. 궤휼은 남들을 이용해 먹으려고 속이는 것이고 외식은 남들에게 잘 보이려고 속이는 것이다. 궤휼은 남들을 쳐서 내가 덕보기 위해서 속이는 것이고 외식은 남들에게 나를 과시하기 위해서 속이는 것이다. 하늘의 영광스러운 기업을 소망하는 신자들은 남들과의 관계에서 형제사랑을 방해하는 궤휼과 외식을 버려야 한다. 시기와 비방을 버려야 한다. \"시기\"는 내가 가지기를 원하지만 가지지 못한 것을 남이 가지고 있을 때에 그것을 부러워하여 속으로 그를 미워하는 것이다. 시기는 그리스도를 십자가에 못박도록 넘겨준 자들의 악한 동기 중의 하나였다. 남들의 유익을 구하는 것이 그리스도인의 특징이므로 그리스도인 속의 시기는 그리스도인이 그리스도인답지 못한 자가당착이다. (예): 질투 많은 독수리 질투 많은 독수리는 다른 독수리들을 몹시 질투하여 미움을 많이 샀다. 한번은 이 독수리가 사냥꾼에게 찾아와서 이렇게 말했다. \"사냥꾼 아저씨, 저 독수리를 쏘아서 떨어뜨리지 않으실래요? 난 저 독수리가 미워 죽겠어요.\" 사냥꾼은 그 질투 많은 독수리에게 만일 그러기를 원한다면 화살에 달 깃털 몇 개를 뽑아 달라고 했다. 그 독수리는 얼른 날개 깃털 몇 개를 뽑아 주었다. 사냥꾼이 그것을 화살에 달고 다른 독수리를 향해서 쏘았으나 빗나가고 말았다. 질투에 가득 찬 독수리는 자꾸만 자기 깃털을 뽑아주며 사냥꾼을 독촉하였다. 나중에는 깃털을 너무 많이 뽑아 주어서 날아갈 수조차 없게 되었다. 그것을 본 사냥꾼을 얼씨구나 하며 그 질투많은 독수리를 잡아가고 말았다. 시기는 결국 자신을 망치는 것이다. \"마음의 화평은 육신의 생명이나 시기는 뼈의 썩음이니라\"(잠언14:30) 시기는 또한 상대방과의 관계에 금을 가게 하는 것이므로 형제사랑의 공동체를 파괴하는 죄악이다. \"비방하는 말\"은 누구를 거스려서 하는 말이다. 이것은 주로 남이 없을 때에 남의 약점이나 결점을 들어 남을 비판하는 것이다. \'뒤에서 물어 뜯는것\'이다. 신자들은 흔히 기도제목을 나눈다고 하면서 그에 대한 나의 걱정이나 근심을 말한다고 하거나 남의 치명적인 결점을 고쳐주기 위해서 말한다거나 혹은 그의 문제를 나누는 것이 좋아서 말한다고 하면서 남을 헐뜯는 말을 별미처럼 즐기는 경우가 많다. \"남의 말하기를 좋아하는 자의 말은 별식과 같아서 배속 깊은 데로 내려가느니라\"(잠18:8). 야고보는 다음과 같이 비방의 신랄하게 지적했다. \"형제들아 피차 비방하지 말라 형제를 비방하는 자나 형제를 판단하는 자는 곧 율법을 비방하고 율법을 판단하는 것이라 네가 만일 율법을 판단하면 율법의 준행자가 아니요 재판자로다 입법자나 재판자는 오직 하나이시니 능히 구원하기도 하시며 멸하시고 하시느니라 너는 누구관대 이웃을 판단하느냐\"(약4:11-12). 비방은 하나님의 재판권을 찬탈하는 무서운 죄악인 것입니다. 시기와 비방, 이 두 가지 죄악은 경쟁심에서 애기되는 죄악이다. 내가 가지고 싶으나 내게는 없고 남이 그것을 가지고 있을 경우 속으로 경쟁하면서 애르 태우느느 것이 시기이고, 이런 시기가 말을 통해 밖으로 터져 나오는 것이 비방이다. 시기는 마음을 부패케 하고 비방은 입을 오염시킨다. 모든 악독을 버려야 한다. 2. 신령한 젖을 사모해야 한다(2:2) 구원에로 성장하기 위해서는 우선 위에서 언급한 궤휼 외식 시기 비방 등 모든 죄악들을 버려야 하고 적극적으로는 말씀을 사모해야 한다. 죄악을 버리지 않으면 말씀에 대한 욕구가 없고 말씀을 먹지 않으면 주님의 은혜의 맛을 알지 못한다. 따라서 구원에로 성장하기 위해서는 소극적으로는 죄악을 청산하고 적극적으로는 말씀을 사모해야 한다. 구원에 이르도록 자라기 위해서는 갓난아이들 같이 말씀의 젖을 사모해야 한다. 갓난 아이 처럼 허위나 가식이나 속임이 없는 신령한 젖을 사모해야 한다. 사막에서 목이 타는 사람이 물을 갈망하듯이, 사슴이 헐떡거리며 시냇물을 갈망하듯 신자가 전혀 오염되지 않은 말씀을 갈구할 때에 신앙이 성장하는 것이다. 3. 주님의 맛을 체험해야 한다(2:3) 너희가 주의 인자하심을 맛을 보았으므로- \"너희는 여호와의 선하심을 맛보아 알지어다 그에게 피하는 자는 복이 있도다\"(시34:8) 신자들은 하나님의 말씀을 통하여 예수 그리스도께서 인자하시다는 것을 실제로 체험을 통해 맛을 본 자들이다. (예): 어떤 총각-여자 친구-짝사랑-편지 대달부, 3주연속 계속적인 접촉이 결국 결혼으로 골인하게 된 것이다. 계속적인 접촉이 사랑의 성숙에 이토록 중요한 것이다. 우리가 주님과 계속 접촉하는 방법은 하나님의 말씀을 사모하는 것이다. 말씀을 통해서 주님과 접촉하게 되고 말씀을 통해서 주님의 인자하심이 어떤한지, 그 맛을 보게 된다. 그러면 더욱 갈구하면 그 결과 더욱 성장하게 된다. 맺는글 하나님은 베드로를 통하여 신자들이 미래의 완성된 구원에로 성장하도록 촉구하셨다. 하늘의 영광을 소망하는 자들로서 하나님에 대해서 거룩하고 형제들을 사랑하기 위해서는 성장해야 한다는 것이다. 성장하기 위해서는 사기 위선 시기 비방 등 모든 악독을 버리고 순수한 말씀의 젖을 갈구해야 한다. 제7강: 보배로운 산 돌(산 돌 위에 세워진 신령한 집) 본문: 베드로전서 2:4-10 주제: 예수 그리스도, 교회론, 크리스천, 믿음의 성화, 성장 서론 1. \'신령한 집\'의 기초석이 되시는 산 돌 (1) \'산 돌\'이신 예수 그리스도 (2) \'신령한 집\'으로 지어지는 \'산 돌들\' 서로 다른 설계도? 하나님의 설계도? 어떤 어린 소년이 사우스 다코타에 있는 자기 집을 떠나 방황하고 있었다. 그의 부모는 그를 발견할 수 없었다. 그래서 주 경찰, 보이 스카우트 회원들, 이웃 사람들 등이 함께 소년 찾는일에 나섰다. 그들 수백 명은 3일 동안 그 넗은 초원을 두루 다녔으나 도무지 그를 찾을 수 없엇다. 4일 남 아침 그 사람들 중의 한 사람이 이런 제의를 했다. \"우리 이렇게 할 것이 아니라, 하나의 긴 선을 만듭시다. 우리 손을 맞잡고 소년을 찾을 때까지 ... \"왜 좀더 일찍 손을 맞잡지 않으셨습니까?(반복) 2. 믿는 자들에게는 보배요, 믿지 아니하는 자들에게는 부딪히는 돌과 거치는 돌이 되신 산 돌 \'산 돌\'은 하나님이 두신 돌이다(6절). \"경에 기록하였으되 보라 내가 택한 보배롭고 요기한 모퉁이 돌을 시온에 두노니...\" \'산 돌\'에 대한 두가지의 반응 (1) 모퉁이 돌에 대한 신앙의 반응(6-7절) \"보라 내가 택한 보배롭고 요긴한 모퉁이돌을 시온에 두노니 저를 믿는 자는 부끄러움을 당치 아니하리라\"= 이사야 28:16 \"그러므로 주 여호와께서 가라사대 보라 내가 한 돌을 시온에 두어 기초를 삼았노니 곧 시험한 돌이요 귀하고 견고한 기초돌이라 그것을 믿는 자는 급절하게 되지 아니하리로다\" (2) 모퉁이 돌에 대한 불신앙의 반응(7-8절) 베드로는 2:7에서 불신앙은 하나님이 선택하신 모퉁이 보석을 버린 것으로 지적했다. 불신자들은 인생 건축가들로서 그리스도를 시험해 보고 인생건축에 쓸모없는 것으로 버린 자들이다. 베드로는 불신앙을 이렇게 모퉁이 보석을 버린 것이라고 지적할 뿐 아니라 말씀을 순종치 아니하는 것으로 규정했다(2:8). 불신자들에게 그리스도는 파멸의 수단이 된다. 그리스도를 안 믿었다는 이유로 그들은 멸망한다. 불신자들은 자신들의 가치관에 따라 그리스도를 인생건축의 무용지물로 보고 버린 자들이고, 그 결과 멸망에 이른다. 왜 사람들이 모퉁이돌의 가치를 알지 못하고 버리게 되는가? 유대인들은 그들의 종교적 관습 때문에, 그들의 교만 때문에, 그들의 우월감 때문에, 그들의 역사와 전통 때문에, 그들의 지위 때문에, 모퉁이돌을 버렸다. 이방인들은 그들의 허탄한 신화대문에, 그들의 그릇된 양심 때문에, 그들의 빗나간 종교적 열심 때문에, 그들의 사악한 마음 때문에, 모 퉁이 돌을 버렸다. 3. \'신령한 집\'의 신분과 사명 (1) \'신령한 집\'의 신분(9-10절) 택하신 족속 왕 같은 제사장 거룩한 나라 그의 소유된 백성 (2) \'신령한 집\'의 사명(9절) 9절에 \"이는 너희를 어두운 데서 불러내어 그의 기이한 빛에 들어가게 하신 자의 아름다운 덕을 선전하게 하려 하심\" 신자들은 하나님의 창조와 구속과 심판에 나타난 속성들과 행위들, 예수 그리스도의 탄생과 삶과 죽음과 부활과 재림에 나타나는 속성들과 행위들을 \'선전\'하는 사명을 받은 자들이다. 무디(D. L. Moody) \"내가 죽고 난 다음 내가 원하는 기념비는 두 다리를 가지고 전 세계를 돌아 다니는 사람의 모습, 즉 구원받은 죄인이 예수 그리스도의 구원을 전하는 모습의 기념비이다.\" 우리 신자들은 다 구원받은 죄인들로서 예수 그리스도의 구원을 전하는 복음전파를 통하여 하나님의 덕을 선전하는 자들이다. 뿐만 아니라, 하나님이 거룩하시기 때문에 신자들은 거룩한 삶을 통하여 하나님의 탁월성들을 선선하게 된다. 결론 제8강: 그리스도인의 의무(그리스도인의 사회생활) 본문: 베드로전서 2:11-12 주제: 그리스도인의 사회생활. 서론 본문(2:11-12)은 소망자의 사회생활을 다룬 2:11-3:12의 내용의 서론이다. 다시 말해서 본문은 소망자의 사회생활 헌장이라 할 수 있다. 소망자의 국가관은 어떠해야 하고(2:13-17), 직장생활은 어떠해야 하며(2:18-25), 부부관계는 어떠해야 하며(3:1-7), 형제들 혹은 원수들과의 관계는 어떠해야 하는지(3:8-12)를 다루기에 앞서 이 모든 사회규범(social code)의 헌장을 베드로는 본문에서 제시했다. 6강에서 우리는 신자들의 신분이 아주 고귀하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택하신 족속,\" \"왕같은 제사장,\" \"거룩한 나라,\" \"그의 소유된 백성\"이라는 고상한 신분을 생각하다가 보면 자칫하면 은하수 세계에 사는 자들이라는 착각을 할 수 있다. 그러나 이와같이 고귀한 신분을 가진 우리들의 현주소는 \"나그네와 행인\"이며 국가의 일원들이고 직장의 일꾼들이며 가정의 구성원들이고 형제들 특히 원수들과 날마다 만나며 살아가는 자들이다. 우리의 삶은 땅에 뿌리를 내리고 있으므로 구체적으로 상회생활을 어떻게 할 것인가를 생각하지 않을 수 없다. 본문은 사회생활의 헌장을 우리들이 \"나그네와 행인\"으로서 이방인들에 둘러싸여 살고 있다는 맥락에서 제시하였다. 이방인들은 우리 주변에서 우리들의 행동을 살피고 있다. 이런 상황에서 \"왕같은 제사장들\"의 삶은 소극적으로는 육체의 정욕을 제어하고 적극적으로는 선한 행실에 힘써서 이방인들로 하여금 하나님에게 영광을 돌리게 하는 것이어야 한다. 1. 육체의 정욕을 제어하라(2:11) (1)사랑받는 자들이기 때문에 베드로는 육체의 정욕을 제어하라고 권면할 때 \"사랑하는 자들아\"라는 표현을 썼다. \"사랑하는 자들\"은 원문상 \"사랑을 받는 자들\"(beloved)이다. 그들은 베드로의 사랑을 받을뿐 아니라 하나님의 사랑을 받는 자들이다. 우리들은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을 통해서 \"산 소망\"에로 중생한 \"선택된 나그네들\"로서 하나님의 최상의 사랑을 받고 있는 자들이다.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시는 것은 우리 자신 속에 사랑할 만한 것이 있어서가 아니다. 예수 그리스도 때문이다. 베드로는 이처럼 신자들을 사랑받는 자들이라 부르면서 육체의 정욕을 제어하라고 권면하고 있다. 우리가 경건하게 사는 동기는 단순히 그렇기 해야 하는 의무 때문이 아니라, 우리가 주님을 사랑하고 주님의 사랑을 받고 있기 때문이다. 하나님과의 사랑의 관계, 예수님과의 사랑의 관계를 통해서 우리가 경건하게 살아야 하는 이유가 있는 것이다. \"너희가 나를 사랑하면 나의 계명을 지키리라\"(요14:15). \"사람이 나를 사랑하면 내 말을 지키리니\"(요14:23). 우리는 하나님의 사랑을 받는 자들이라는 것을 우리 스스로에게 계속 환기시켜야 한다. 우리가 누구인지를 명심할 때에 바로 살게 되는 것이다. (2) 선택된 나그네이기 때문에 신자들은 \"선택된 나그네\" \"행인\"이다. 하늘의 산 소망을 향하여 하나님의 뜻대로 살아가는 자들로서 이땅에 거주하는 이방인들이다. 신자들은 우리의 주변문화와 주변환경에 대해 이방인들이다. 왜냐하면 우리의 시민권은 하늘에 있고 이땅은 우리가 영주할 곳이 아니기 때문이다. 이땅이 우리의 영주지가 아니므로 이땅에서 영원한 소유물들을 추구하면 안된다. 이 땅의 일들이 하늘로 가는 여행을 방해하도록 허락해서도 안된다. 이 세상의 일들을 열심히 해 나가면서도 하늘의 소망과 연결하여 그렇게 해야 한다. 이 세상의 재물이 우리의 삶을 방해하도록 허락하면 안된다. 나그네는 이렇게 이 세상에 매여서는 안될 자이다. 따라서 \"육체의 정욕\"을 피하는 것은 당연한 귀결이다. \"육체의 정욕들\"은 \"이전 알지 못할 때에 좇던 사욕들\"이며(1:14) \"어두움\"에 속한 욕망들이다(2:9). 육체의 정욕들은 타락한 옛 성품을 가리킨다. 육체의 정욕들은 바울은 로마서7장에서 \"죄\"라고 하였고(롬7:23), 야고보는 야고보서에서 \"정욕\"이라고 하였다(약4:1). 베드로사도는 육체의 정욕을 제어하라고 명령한다. 신앙생활은 영혼과 육체의 끊임없는 싸움이다. 우리가 \"왕같은 제사장들\"이라고 하여 육체의 정욕들에 완벽하게 면역된 자들이 아니다. 육체적인 정욕들과 끊임없이 싸워야 하는 자들이다. 국가의 일원, 회사의 직원, 가정의 가족, 교회의 교인으로서 우리는 주변의 있는 사람들과 싸울 것이 아니라, 우리 속에서 불같이 일어나는 \"육체의 정욕들\"과 싸우는 자들이다. 다른 사람들이 적군이 아니라, 내 안에 있는 \"정욕들\"이 적군이다. (ex:) 한번은 어떤 젊은이가 무디에게 찾아와서 \"선생님, 저는 그리스도인이 되고 싶습니다. 그리스도인이 되려면 세상을 포기해야 합니까?\" 하고 질문을 했다. 이때 무디는 \"젊은이, 젊은이가 철저한 그리스도인의 삶을 살면 세상이 젊은이를 포기할 걸세\" 라고 대답했다. 그리스도인으로서 세상의 정욕을 제어하는 삶을 살면 결국 세상이 그를 포기한다는 것이다. 어떻게 우리는 \"육체의 정욕들\"을 제어할 수 있을까? 로마서 8장과 갈라디아서 5장을 보면 육체의 정욕을 제어할 수 있는 힘이 우리에게 있음을 알게 된다. 바로 성령이다. 성령이 우리 속에서 역사하시고 계신다. 그러므로 \"육체의 정욕을 제어하라\"는 말씀을 접할 때에 \'나는 그럴 능력이 없다\'고 생각하는 것은 자신을 부인하는 신앙이 아니라 핑계이다. \"제어하라\"고 할 때는 제어할 힘이 우리에게 주어져 있다는 것이 전제되어 있으므로 순종만 하면 되는 것이다. 2. 선한 행실을 가지라(2:12) 성도의 삶은 매일의 삶이다. 하나님에 대한 경건과 거룩, 형제들에 대한 사랑이 포출되는 삶의 모습이다. 베드로는 이런 성도의 매일의 삶이 \"선한\"것이 되도록 권면했다. \"선한\"이라는 형용사는 소망자의 사회생활을 특징짓는 것이다(2:12, 15-16, 20; 3:1-2, 6, 13, 16). (1) 누가 보고 있기 때문이다. 앞에서 말한대로 이 세상 나라의 기준으로 보면 불시나들은 \"시민권자들\"이고 우리는 \"이방인들\"이지만, 하나님 나라의 기준으로 보면 우리는 \"시민권자들\"이고 불신자들은 \"이방인들\"이다. 소망자들이 매일 선하게 살아가야 할 이유는 \"이방인들\"이 그들의 삶을 보고 있기 때문이다. 신자들의 삶은 물론 하나님께서 은밀한 중에 보시지만, \"이방인들\"도 항상 보고 있다. \"너희 선한 일을 보고\"라는 표현은 그들이 계속 보고 있다는 말이다. 누군가가 나를 보고 있다는 인식은 선한 삶을 유발하는 하나의 동기가 될 수 있다. (EX:) [오늘을 위한 진리] 13권 2호 1992년 젊은 어머니가 인생길을 들어서면서 \"이 길이 깁니까?\"고 질문을 했다. 질문을 받은 안내자는 \"그렇습니다. 이 길은 어렵습니다. 이 길 끝에 이르기 전에 당신은 늙을 것입니다. 그러나 끝이 시작보다 좋을 것입니다\"고 대답했다. 젊은 어머니는 마냥 행복했다. 도대체 이보다 더 좋은 길이 어디 있을까 싶은 생각마저 들었다. 그녀는 자녀들과 장난을 치고 길을 따라 가면서 자녀들을 위하여 꽃을 꺽어 모으기도 했으며 맑은 시내에서 목욕도 했다. 젊은 어머니는 \"이보다 더 아름다운 것은 없을 거야\"라고 소리를 질렀다. 그러다가 밤이 찾아왔다. 폭풍우는 몰려오고 길은 어두었으며 아이들은 두려움과 추위에 떨고 있었다. 어머니는 아이들을 가까이 안고 외투로 덮어 주었다. 그랬더니 아이들은 \"오, 엄마, 엄마가 가까이 계셔서 무섭지 않아요. 우리는 해를 받지 않을 것예요\"라고 말했다. 어머니는 \"밤이 낮보다 더 낫구나. 내 아이들에게 용기를 가르쳐 줄 수 있었으니까\"고 말했다. 다시 아침이 왔다. 저 앞에 언덕이 있었다. 아이들의 언덕을 오르면서 곧 피곤해졌다. 어머니도 역시 피곤해졌으나 아이들에게 \"조금만 더 참으면 꼭대기에 이를 것이다\"고 말했다. 그래서 아이들은 참고 오르고 또 올랐다. 드디어 정상에 이르렀을 때 아이들은 이렇게 말했다. \"엄마, 엄마가 없었으며 여기까지 오를 수 없었을 것예요.\" 그날 밤.... (2) 세상사람들이 비방의 눈으로 보고 있기 때문이다. 베드로당시 이방인들은 신자들을 보고 악행한다고 비방했다. 신자들 간에 \"형제 자매들\"이라고 하니까 근친상간을 한다는 등, 성찬식에서 \"몸을 먹고 피를 마신다\"고 하니까 식인종이라는 등 황제숭배를 거부하니까 국가를 반역하고 로마의 평화를 파괴한다는 등 비방을 했다. 어떤 사람은 신자들이 악덕들 때문에 미움을 샀다고 했고, 어떤 사람은 신자들을 \"새롭고 위험한 미신에 사로잡힌 부류\"라고 했다. 이러한 비방은 공개적으로 이루어졌고 당국자들의 귀에 들릴 때는 박해의 근거가 되었다. 베드로 당시만 아니라, 지금도 불신자들은 신자들을 보면서 비방하고 있다. 신자들이 바로 살아도 비방하지만 바로 살지 못해도 비방한다. 이방인들이 보고 있을 뿐만 아니라, 그들이 신자들을 오해하고 비방하고 있으므로 더욱 착한 삶을 매일 살아갈 필요가 있었다. 신자들이 선하게 살면 그들을 비방하던 이방인들이 \"선한 일을 보고 권고하시는 날에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게\"된다. 우리는 입술로도 전도하지만 행동으로도 전도한다. 제9강: 국가에 대한 신앙인의 태도 본문:베드로전서 2:13-17 1. 순복하는 태도 (1) 순복의 대상 13절에 \'인간에 세운 모든 제도\'를 순복의 대상으로 말하고 있다. 하나님에 의해 세원진 모든 제도들을 순복하라는 것이다. 특히 2장에서는 모든 인간의 제도중에서도 특히 \'위에 있는 왕이나 혹은 악행하는 자를 징벌하고 선행하는 자를 보상하기 위하여 그의 보낸 방백\'을 구체적으로 지적하고 있다. 즉 순복의 대상으로서 본문은 주로 국가제도와 위정자들에 대한 신자들의 태도를 다루고 있다. 신자들이 순복해야 할 대상들은 어떤것인가? 여기서 왕은 로마제국에서 황제를 가리킨다. 방백은 로마 황제가 로마속령에 파송한 총독들을 가리킨다. 그런데 앞서 지적한 대로 총독들은 황제에 의해 파송된 자들이 아니고 황제를 통해서 하나님에 의해 파송된 자들이다. 하나님이 황제도 세우셨지만 총독들도 세우셨다는 것이 그 통해서 란 표현에 전제되어 있다. 황제와 총독들이 순복의 대상이다. 모든 제도와 위정저가 순복의 대상이라는 말씀은 영구불변의 진리이다. 오늘날에도 적용되는 진리로서 하나님의 말씀이다. 우리는 대통령을 위시한 위정자들에게 순복해야 한다. 국가제도를 무시하지 말고 그것에 순응해야 한다. 위정자는 \"하나님의 사자가 되어 네게 선을 이루는 자니라 그러나 네가 악을 행하거든 두려워하라 그가 공연히 칼을 가지지 아니하였으니 곧 하나님의 사자가 되어 악을 행하는 자에게 진노하심을 위하여 보응하는 자\"이다(롬13:4) (2) 순복하라 순복은 복종을 의미한다. 이 단어의 어원이 얼마나 본문에 반영되어 있는 지는 확인할길이 없지만 참고로 말하면 \"순복하다\"는 \"밑에 서다\"는 말이다. 그것은 하나님이 세우신 권위밑에 서는 것이다. 모든 권세는 하나님 밑에 있고 백성들은 하나님이 인간세계의 질서를 위해 주신 모든 권세자들 밑에서 그 권위를 인정해야 한다. 순복은 신자들의 사회규범의 주제이다. 2:18에는 종이 주인에게 순복해야 하고, 3:1에는 아내가 남편에게 순복해야 하며, 5:5에는 젊은이들이 장로들에게 순복해야 한다고 되어 있다. 그리스도인의 가정질서와 교회질서와 사회질서와 국가질서는 순복의 질서이다(엡5:21; 6:1, 5; 골3:10, 20, 22; 딛2:5, 9) 오늘날은 이 순복의 질서가 깨어진 것 같다. 가정에서 자녀들이 부모에게 순복하지 않고 아내가 남편에게 순복하지 않는 것 같다. 교회에서 교인들이 모고히자에게 순복하지 않고 평신도들이 장로들에게 순복하지 않는 것 같다. 지작에서 직원들이 상사들에게 순복하지 않는 것같다. 국가에서 국민들이 위정자들에게 순복하지 않는 것 같다. 사회의 대류가 순복하는 자는 주체의식이 없고 시키는 대로만 하는 바보로 간주되는 방향으로 흐리고 있다. 순복의 질서 붕괴는 곧 사회 전체의 질서붕괴이고 마침내 이 사회가 사람들이 살 수 없는 강도들과 도적들과 반역자들의 소굴이 되는 것을 의미한다. 순복의 질서가 깨어지는 배경을 이해할 수 없는 것은 아니다. 순복할 말한 사람들이 못되고 순복할 만한 일을 하지 않기 때문에 순복하지 않는 것이다. 이것은 충분히 이해한다. 본문에서 특히 \"악행자를 징벌하고 선행자를 포상\"해야 할 위정자들이 선행자를 괴롭히고 악행자 편드는 현상이 있을 때 순복할 수 없다는 것이다. \"순복하되 선하고 관용하는 자들에게만 아니라 또한 까다로운 자들에게도 그리하라\"(2:19). 정부와 위정자들에게 순복하는 것이 신자의 태도라고 해서 모든 것을 다 순복할 수는 없을 것이다. 베드로와 사도들은 유대 당국이 예수의 이름으로 아무 사람에게도 말하지 못하도록 명령을 내렸을 때(행4:17) \"하나님 앞에서 너희 말 듣는 것이 하나님 말씀 듣는 것보다 옳은가 판단하라 우리는 보고 들은 것을 말하지 아니할 수 없다\"고 했다. 인간 권세의 명령이 그 위에 있는 하나님의 명령과 어긋날 때에는 하나님의 명령에 순복하고 인간 권세의 명령에 불복한 경우이다. 인간 권위가 그를 세우신 최상급 권위인 하나님의 권위와 충돌할 경우는 인간의 권위에 불복하는 것이 성경적이다. 그러면 어떤 경우가 인간의 권위가 하나님의 권위와 충돌하는 경우인가? 넓은 의미로 하나님의 정의 면에서 생각하면 정부가 하는 거의 모든 것들이 하나님의 권위와 충돌하는 것처럼 느껴질 것이다. 그렇게 되면 사사건건 정권에 불복해야 할 것이다. 그러나 베드로가 로마제국의 제죽주의 정권과 로마속령의 식민정권을 상대해서 순복을 권면하였다는 사실을 기억해야 한다. 사도행전의 사도들은 당국자들이 소위 \'사회정의\'와 관련된 어떤 것을 명령할 때 불복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지 못하게 할 때 즉 \'종교적인 문제\'에 있어서 하나님을 거역하도록 할 때 불복한 것이다. 이렇게 볼 때 정권에 불복하는 경우는 극도로 제한된 것으로 보아야 한다. 신사참배를 강요한다든지 예수를 믿지 못하게 한다든지 하는 경우와 같이 하나님을 명백하게 거역하도록 하는 정권인 경우 불복해야 한다. 소위 \'사회정의 문제\'는 이렇게 볼 수도 있고 저렇게 볼 수도 있는 경우가 많은데 자신의 이념이나 신념에 맞지 않는다고 해서 무조건 하나님의 정의와 어긋나는 것이므로 그런 것을 법제화하는 정권을 저항하고 전복해야 한다는 것은 성경의 교훈과 명백하게 배치된다. 그러나 정권에 불복할 경우에도 구체적으로 하나님의 명령과 명백히 배치되는 그 조항에 불복하는 것이지 정권 자체의 권위에 불복하는 것이 아니다. 사도행전의 사도들이 유대인 당국의 위협적인 명령에 불복하면서도 인간 권세를 무시하지 않았고 그것에 저항하기 위해 선동하거나 조직적인 운동을 전개하지 않았다. 유대인 당국자들이 투옥하면 투옥당했고 그들에게 저항하지 않았다. 유대인 당국자들이 투옥하면 투옥당했고 그들에게 저항하지 않았다. 즉 유대인 당국자들의 재판권과 재판 겨로가대로 형을 집행하는 권한을 거부한 것이 아니다. 하나님의 명령에 어긋나는 일을 인간 권위자가 할 때에는 그의 명령보다 하나님의 명령에 어긋나는ㄴ 일을 인간 권위자가 할 때에는 그의 명령보다 하나님의 명령을 따르되 하나님이 세우는 권위의 질서를 존중하면서 그 질서 안에서 합법적으로 겸손하게 의견을 고해야 한다. (무죄한 다윗을 추격하고 살해하려고 지명수배까지한 사울에 대한 다윗의 태도를 보라. 다윗은 하나님이 세우신 자가 자기 손아귀에 들어왔을 때에도 굴 속에서 그를 자기 손으로 처치하지 않았다. 느부갓네살 왕궁에 포로로 잡혀간 나니엘이 느부갓네살의 우상숭배와 직결된 음식법이 하나님의 명령과 충돌하기 때문에 그 음식법을 거부하면서도 권위의 질서에 순응하는 것을 보라. 환관장에게 겸손하게 요청해서 허락을 받아 음식법을 거부한 태도를 보라. 모든 권위는 하나님이 주신 것이므로 \"권세를 거스리는 자는 하나님의 명을 거스림이니 거스리는 자들은 심판을 자취\"할 것이다(롬13:2). 베드로는 본문에서 국민의 대국가적인 순복을 다루고 있지만 물론 순복은 일방적인 것은 아니다(엡5:21). 자녀는 부모에게 순복하라는 것과 부모는 자녀를 노엽게하지 말라는 것, 아내는 남편에게 순복하라는 것과 남편은 아내를 사랑하는 것, 종은 주인에게 순복하라는 것과 주인은 종을 성실하게 대우하라는 것. 이렇게 성경의 교훈은 쌍방적이다. (3) 손복의 동기 \"주를 위하여\", 혹은 \"주님때문에\"이다. 주님이 국가제도를 제정하셨고 위정자들에게 권세를 주셨기 때문에 그들에게 순복하는 것은 그들을 세우신 주님에게 순복하는 것이 된다. 에베소서 5:22-6:9의 부부관계 부자관계 주종관계 윤리의 핵심이 주님인 것과 같은 원리이다. \"주를 위하여\"란 말씀은 후에 주님 자신의 모범적인 행동과도 연결된다. 2:21-24에 \"그리스도도 너희를 위하여 고난을 받으사 너희에게 본을 끼쳐 그 자취를 따라오게 하려 하셨느니라 저는 죄를 범치 아니하시고 그 입에 궤사도 없으시며 욕을 받으시되 대신 욕하지 아니하시고 고난을 받으시되 위협을 하지 아니하시고 오직 공의로 심판하시는 자에게 부탁하시며 친히 나무에 4달려 그 몸으로 우리 죄를 담당하셨으니 이는 우리로 죄에 대하여 죽고 의에 대하여 살게 하려 하심이라. 2.선행해야 한다 (1) 하나님의 뜻(2:15) \"왜냐하면 이렇게 선행하면서 어릭석은 사람들의 무지를 틀어막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기 때문이다.\" 순복과 선행, 더 예리하게 지적하면 순복위의 선행이 신자의 대국가관에 있어서 \"하나님의 뜻\"이다. 국가가 잘못한다고 해서, 위정자들이 잘못한다고 해서 권위 자체에 불복하고 악행하는 것이 하나님의 뜻인 것은 아니다. 순복하고 선행하는 것이 어째서 하나님의 뜻인가? 첫째, 하나님께서 권위를 세우셨기 때문이고, 둘째, 어리석은 사람들의 무지를 틀어막기 때문이다. (2) 그리스도인의 자유(2:16) 국가와 위정자들의 권위에 순복하고 선행하라고 할 경우에 그리스도인은 자유인인데 그렇게 권위에 매일 필요가 있는가?는 반문이 제기될 수 있을 것이다. 2:16에 \"자유하나 그 자유로 악을 가리우는 데 쓰지 말고 오직 하나님의 종과 같이 하라\" 그리스도인이 자유인이라는 것은 예수 그리스도의 피로 \"조상의 유전한 망령된 행실\"로부터 구속된 자유디. 그것은 \"이전 알지 못할 때에 좇던 너희 사욕\"으로부터의 자유이고 하나님의 빛이 없는 어두움으로부터의 자유이다. 그리스도인의 자유는 하나님만이 우리의 왕이요 주인이라고 주장하면서 로마식민정권과 3. 공경하라 제10강: 성경적인 직업윤리 본문: 베드로전서 2:18-25 주제: 직업윤리. 노동. 고난에 대한 태도 서론 오늘 본문은 하늘나라의 산 소망을 가진 \'사환\'들이 어떻게 이 땅에서 살아야 하는가를 보여주는 본문이다. 이 땅에서 산 소망을 가지고 살아가는 수많은 \'사환\'들 즉 직장인들은 어떻게 살아야 할까? 우리 인간은 혼자서는 도저히 살 수 없는 존재이다. 그래서 인간을 \"사회적 동물\"이라고 정의하는 사람도 있다. 사람은 누구나 태어나면서부터 사회와 집단과 주위 환경즉 \'생활세계\'속에서 존재하게 된다. \"생활세계\"속에서 생존하는 다양한 법들을 학습하게 되고 습득하면서 성장하게 된다. 그 중에 중요한 것이 바로 \'노동\'(Work)이다. \'노동\'은 하나님께서 사람을 창조한 후에 제일 먼저 주신 명령적인 규례이다. \"하나님이 그들에게 복을 주시며 그들에게 이르시되 생육하고 번성하여 땅에 충만하라 당을 정복하라, 바다의 고기와 공중의 새와 땅에 움직이는 모든 생물을 다스리라 하시니라\"(창1:28). 사람은 창조될 때 일하시는 하나님의 형상을 본받아 창조되었으므로 일할 수밖에 없으며, 하나님은 사람에게 일을 하도록 또한 명령하셨다. 에덴동산에서는 아무 일도 하지 않고 그저 편하게 무의도식했으리라 상상하기 쉬운데 아담은 창조되자마자 일을 했으며(창2:15, 20) 일함으로써 창조하신 하나님의 형상을 나타내었고 그의 명령에 순종했다. \"여호와 하나님이 그 사람을 이끌어 에덴 동산에 두사 그것을 다스리며 지키게 하시고...아담이 모든 육축과 공중의 새와 들의 모든 짐승에게 이름을 주니라\"(창2:15,20). 그러므로 사람들의 삶에 있어서 일은 중요할 수밖에 없으며, 일을 하지 않거나 할 수 없는 상황은 사람에게 가장 커다란 비극이 아닐 수 없다. 직장에서 해고를 당하거나 직장을 구하지 못하는 사람들이 오늘날 사회적으로 문제가 되고 있는데, 이것은 사회경제적인 측면에서 심각한 문제가 되기도 하지만, 그 이전에 일하는 속성을 가진 인간의 존엄성을 크게 해치는 일로서 창조 원리에 위배되는 것이다. 우리가 직장에서 일을 하거나 가정에서 일을 할 때, 일이 즐거울때가 있는가하면, 때로는 일하는 것이 짜증스럽고 또 일하고난 후에 육체적으로 고통스러울때도 적지않으며, 일과 관련된 정신적 스트레스로 고통당하는 경우도 또한 적지 않다. 때로는 직장의 동료나 직장의 상사나 직장의 부하사이에서 여러 가지 갈등으로 고민할때도 있다. 이러한 가운데 직장인들의 사람들이 한 번쯤을 자신이 다니는 회사를 그만두고 다른 회사로 옮기려고 한다거나 아에 전직을 희망하는 사람도 많다는 것을 알게 된다. 일은 하나님께서 우리 인간에게 주신 명령인데 왜 이토록 힘이들때도 있고 갈등으로 괴로워할때가 있는가? 왜 대부분의 사람들이 일의 업무로 시달리고 있고, 직장내와 사회내의 대인관계에서 오는 갈등과 충돌로 인하여 기진맥진해 있는가? 그 이유는 인간의 타락 때문이다. 최초에 아담과 하와가 범죄함으로 인해 그들은 하나님과 분리되었을 뿐 아니라 자기들 사이에도 분리가 일어났고 그들이 하던 일에 고통이 따르게 된 것이다. \"네가 얼굴에 땀이 흘러야 식물을 먹고 필경은 흙으로 돌아가리니 그 속에서 네가 취함을 입었음이니라 너는 흙이니 흙으로 돌아갈 것이니라 하시니라\"(창3:19). 사람의 죄악은 영적인 면에만 영향을 미친 것이 아니라 일상 생활의 구석구석에까지 영향을 미쳤던 것이다. 사람의 죄악의 결과는 사람을 고통스럽게 만들었을 뿐만 아니라 하나님이 원치않는 일들을 만들어내게 된다. 오늘 우리 사회에는 직업으로 인정되긴 하지만 사실상 있을 필요가 없으며, 있어서는 안 될 직업들도 많이 있다. 또한 일을 할 때 찾아오는 갈등의 문제들도 역시 마찬가지이다. 또한 많은 사람들이 일을 하면서 불안감을 느끼고 있다. 일을 통해서 하나님의 창조의 속성을 본받아 창조하는 즐거움을 맛보야할텐데 그러지 못하는 것이 오늘날 우리들의 현실이다. 직업전문가들은 직장인들이 두려움을 느끼는 영역을 다음과 같이 말한다. 자신의 신뢰성이 의문시될 때 어떤 결정을 하는데 자신을 제외시킬 때 사람들 앞에서 비판을 받을 때 성공에 필요한 정보를 얻지 못 할 때 중요한 과제가 다른 사람에게 주어질 때 관계가 나빠질만한 의견의 불일치를 느낄 때 끝이 보이지 않는 일에 빠졌을 때 수고한만큼 인정을 받지 못할 때 팀플레이어로 인정을 받지 못할 때 10.자신의 제안이 비판으로 오해받을 때. 11.일의 성취도가 높지 않을 때 12.해고되는 것에 대해. 이처럼 불안과 두려움에 관한한 직장내에서 직장인들에게 가장 커다란 영향을 미치는 것은 아무래도 상관이나 고용인의 태도일 것이다. 비록 기도로 아침을 시작했을지라도 상관이 어떻게 대하는가에 따라 그날의 기분이 달라지는 것이 직장인들의 현실이다. 그래서 어떤 직업 전문가가 다음과 같이 상관들의 전형적인 태도에 대해서 정리해 놓았다. (1) 침묵 침묵은 의사소통을 의한 좋은 도구가 될 수도 있다. 그러나 지나친 시간 동안 침묵을 하는 것은, 그것도 쳐다보면서 그렇게 하는 것은 상대를 겁나게 만든다. 이것은 상대의 판단에 대해 의문을 제기하는 태도이다. 이럴 때 사람들은 다음에 무슨 말을 할지 몰라 더듬게 된다. (2) 뚫어지게 바라봄 어떤 사람은 상대를 뚫어지게 보기만 하므로 상대가 가지고 있던 자신감을 싹 시들어버리게 만든다. 이것은 단순히 쳐다보는 것과는 달리 상대에 대한 시험과 평가를 담은 눈초리이다. 이것은 상대로부터 별로 기대할 것이 없음을 암시하는 태도이며 이것은 침묵과 더불어 의사소통을 완전히 막아버리는 아주 좋은 수단이 된다. (3) 아주 간단히 대답해버림 질문이나 코멘트에 대해 아주 딱 부러진 톤으로 냉정하게 대답하는 것을 말한다. 아무런 설명없이 \"잘했어\"라고 말을 잘라버릴 때 대화는 더 이상 지속되지 못한다. (4) 무시하는 태도 상대와 자신과 격이 있다는 식의 태도를 말한다. 자신의 위치나 경험, 상대하는 대상들을 암시하면서 이야기하거나 쳐다보지 않고 무시하는 투로 이야기할 때 대화가 단절되며 분위기가 굳어진다. (5) 욕설이나 억누름 말을 막거나 신뢰성, 자존심에 금이 가는 말을 하는 것을 말한다. 비아냥거리는 투로 이야기하거나 다른 사람까지 끌어들여서 기분을 상하게 하는 것이다. 이런 일을 당할 때 사람들은 두려움과 분노가 함께 나타나며 이런 기억은 사람들의 뇌리에서 쉽게 사라지지 않는다. (6) 책임을 추궁하며 불신을 표명함 이것은 일어난 문제의 책임을 다른 사람에게 돌리려는 태도이다. 어느 한 사람을 몰아붙이기 위해서 계속적으로 추궁을 하게 된다. (7) 직무와 관련한 위협 \"이번 행동을 기억해 두겠다\" \"이러면 어떻게 되는지 알지?\" 등의 말처럼 현재의 직책을 빼앗을 듯한 암시를 주는 말을 하거나 아예 \"해고하고 말겠다!\"고 말하는 것이다. 이럴 때 우리는 노예처럼 아무소리도 할 수 없게 된다. (8) 큰소리를 지름 사람들이 듣는데 큰소리를 지르는 것은 두려움의 원인이 된다. 특히 다른 사무실에 까지 들리도록 소리치는 것은 실수를 공식화하려거나 상대를 모욕하려는 의도가 담겨있다. (9) 분노를 폭발하고 자제력을 잃음 이런 행동은 일종의 폭발이다. 사무실내의 집기를 내어던지면서 감정을 표현하는 것이다. (10) 물리적인 위협 이 정도되면 범죄행위가 되기 일보직전의 행동이 된다. 폭력을 써서 물리적으로 손상을 시키는 행위인데 이런 일을 당할 때는 사람들의 두려움이 극에 달하게 된다. 만약, 당신이 직장내에서 또는 사회내에서 이와같은 상사를 만났다면 어떻겠는가? 그 상사에 대한 당신의 태도는 어떠할 것 같은가? 직장 상사에 대한 사람들의 태도를 세가지 정도로 생각해 볼 수 있다. 첫째는 무조건 불평을 일삼는 태도이다. 윗사람이 선하고 인격이 있는 관용적인 사람임에도 불구하고 그 인격을 제대로 알아보지 못하고 무조전적으로 불평하는 사람들이 있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자신이 이 부류에 속하지 않는다고 확신하지만, 그러나 의외로 이 부류에 속한 사람들이 많다. 둘째는 선하고 인격적이고 관용적인 상사에게는 존경하며 깍듯하게 예의를 갖추어 대우하지만 그렇지 못한 사람들에게는 쉽사리 복종하지 못하는 태도이다. 이런 사람은 자신이 잘못해서 당하는 수모에 대해서는 순순히 받아들이지만 조금이라도 억울하다고 생각하면 참지 않고 상사에게 따지거나 대든다. 스스로 똑똑하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다. 아마도 많은 사람들이 자신이 이 부류에 속한다고 생각할 것이다. 셋째는 까다로운 윗사람, 즉 인격적으로 존경할 많안 사람이 아닐지라도 순순히 복종하는 사람이다. 비롯 윗사람이 하는 말이나 행동이 한심하다고 느낄지라도 질서를 위해서 순종하며 그리스도의 사랑으로 용납하는 자세이다. 이런 자세를 가진 아랫사람은 자신이 당하는 일이 좀 억울하다고 느낄지라도 참는다. 그렇게 하는 것이 하나님 앞에 아름다울 것을 알기 때문이다. 여러분은 어떤 부류에 속한다고 생각되는가? 사도 베드로는 오늘 본문을 통해서 바로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이 세 번째 부류에 속하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고 말한다. 본론 1. 사환들은 그 주인에게 순복해야 한다(18절). 역시 여기에서도 \'순복\'의 원리가 즉 \'복종\'원리가 그대로 적용되고 있다. 사환들은 상사에 대해서 순복하라는 것이다. 순복하라는 것은 무엇인가? \"밑에 서다\"란 것이다. 즉 그 권위의 밑에 서라는 것이다. 그 순복의 동기는 무엇인가? 성도들이 나라와 국가의 통치자들에 대해서 \"주를 위하여\" 또는 \"주님 때문에\" 순복하는 것처럼 역시, 사환들도 상사에게 순복하는 동기도 역시 같은 맥락에서 생각해 볼 수 있다. 베드로사도는 사환들에게 \"범사에 두려워함으로\" 주인들에게 순복하라고 했다. \"범사에 두려워함으로\"는 직역하면 \"모든 두려움 ?/fon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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