베드로전서 제16강
은혜에 굳게서라!
본문: 5:10-11
본문에서 베드로는 사악한 대적자보다 더 강한 분이 하나님이라는 확신과 위로의 말을 전한다. 즉 베드로는 그리스도께서 성도를 불러 자기의 영원한 영광에 들어가게 하실 것인데, 그리스도의 권세가 영원하여 성도를 온전케 하실 것이라고 말한다.
사람은 살다 보면 수없이 많은 고난을 경험하게 됩니다. 때로는 원인도 모를 그런 엉뚱한 고난도 있고, 좀더 나은 미래를 만들기 위해 기꺼이 감수하는 고난도 있습니다. 성도에게 있어서도 이러한 고난이 예외일 수는 없습니다. 그리스도의 말씀을 따라 살려고 할 때에 이유도 모를 여러 가지 환난과 연단이 임하기도 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좌절하거나 낙심해서는 안 될 것입니다. 고난에는 뜻이 있기 때문입니다. 또 한 고난에는 나름대로 법칙도 있습니다. 이제 본문을 통해 성도가 겪는 고난의 법칙에 대해 살펴보기로 하겠습니다.
1. 고난은 왜 오는가?
\'모든 은혜의 하나님 곧 그리스도 안에서 너희를 부르사 자기의 영원한 영광에 들어가게 하신 이가 잠간 고난을 받은 너희를 친히 온전케 하시며 굳게 하시며 강하게 하시며 터를 견고케 하시리라\'(10절). 본문을 보면 고난은 아무런 이유도 없이 찾아오는 것이 아님을 알게 됩니다. 다시 말하면 고난에는 어떤 목적이 있다는 것입니다. 베드로가 본문에서 말한 고난의 목적, 곧 고난을 통하여 이루게 되는 내용을 살펴보면 다음과 같습니다. 첫째, 온전케 한다고 하였습니다. 원래 이 말의 뜻은 조정한다, 정돈한다는 의미를 지닙니다. 즉 고난은 성도로 하여금 흐뜨러진 심령 상태를 바르게 하는 기능을 지닌다는 뜻입니다. 둘째로 굳게 하시고 강하게 하신다고 했는데 이는 험하고 어지러운 세상에서 흔들리지 않도록 주님이 붙잡아 주심을 의미합니다. 성도는 고난을 통해 도우시는 하나님의 손길을 한층 뚜렷이 의식하게 되며 그로 인해 세상에서 실족하지 않게 됩니다. 셋째로 터를 견고케 하신다고 했는데, 집을 세울 때에 튼튼한 기초를 먼저 다지는 것처럼 고난은 성도의 신앙을 이룩하는 기초가 됩니다. 이렇듯이 고난은 아무런 이유가 없는 것이 아닙니다. 군인이 전쟁에서 살아남아 승리하려면 실전과 다름없는 힘들고 고된 훈련을 받아야 하듯이 성도들도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신앙 수준에 도달하려면 고난을 통해 연단을 받아야만 하는 것입니다. 주를 믿고서 아무런 고난도 경험하지 못했다면 그것은 분명 세상과 타협한 증거입니다. 고난이 있을 때에 성도들은 당당하게 임하여 신앙 성장과 성숙의 목적을 달성할 수 있어야 할 것입니다.
2. 고난의 유익
본문을 살펴보면 성도에게 임하는 \'잠간 동안의 고난\'은 하나님으로부터 계획되었음을 알게 됩니다. 하나님께서 이 고난을 계획하셨다면 여기에는 필경 성도에게 유익이 있게 마련입니다. 고난이 가져오는 유익에 대해 살펴보면, 첫째로 하나님은 고난을 통해 인간을 회복시키십니다. 여기에서 회복이란 연약함을 보충하는 것, 교만한 마음을 낮추어 겸손한 마음으로 만드는 것 등을 의미합니다. 역경과 고난을 통해 그 인격이 다듬어지는 존재가 인간임을 생각할 때 어느 면에서 고난은 필수 불가결의 요소라 말할 수 있겠습니다. 고난을 겪지 않은 위인, 고난을 통하지 않은 영광이란 존재하지 않는 것입니다. 두 번째로 하나님은 고난을 통해 성도들을 강하게 만드십니다. 노력이나 훈련을 쌓지 않은 성도는 결코 강할 수 없습니다. 안일한 가운데 성장한 신앙보다는 고통과 슬픔, 눈물과 좌절을 경험하면서 연단된 신앙이 더욱 고결하고 강인함을 두말할 나위 없습니다. 불 가운데 연단된 철이 더욱 강하듯이 성도들도 고난을 통해 더욱 강해짐을 알아야 하겠습니다. 세번째로 하나님은 고난을 통해 성도를 정착시키십니다. 사람은 누구나가 극한 시련을 당할 때에 당신만을 의뢰하는 자를 보호하시고 오히려 이전보다 더욱 부흥하게 하십니다. 고난을 겪어 본 사람일수록 주께 대한 의뢰가 깊음을 잊어서는 안 되겠습니다.
3. 고난에서 임하는 성도의 자세
먼저 성도들은 고난에 대한 긍정적인 시각을 가져야만 합니다. 다윗이 수많은 고난을 겪고 모범적인 왕이 되었음을, 욥이 엄청난 고난 후에 인내의 사람으로 칭송받게 되었음을 기억해야만 합니다. 자신에게 닥친 고난에 대해 결코 낙심하거나 좌절해서는 안 됩니다. 고난에 대해 긍정적인 시각을 갖는 것이 신앙 첫걸음임을 명심해야 합니다. 다음으로 고난을 승리의 계기로 삼아야 합니다. 하나님이 고난을 주실 때에는 반드시 그 다음에 축복이 대기하고 있는 법입니다. 세상의 모든 일이 그렇듯이 성공을 이루기 직전에는 반드시 커다란 고난이 있게 마련입니다. 그 고난을 이기느냐, 이기지 못하느냐에 따라서 성공자와 실패자가 구분됩니다. 욥이 커다란 고난 후에 그보다 큰 축복을 받았듯이 성도들은 고난을 고난으로만 여기지 말고 축복이 시작되는 계기로 알고 용기를 내어야 하겠습니다. 모든 고난에는 나름대로 뜻이 있습니다. 우리들은 고난에만 집착해 그 뒤의 하나님 축복을 보지 못하는 어리석음을 범하지 말아야 하겠습니다.
사람들은 조그마한 시련에도 다른 사람을 원망하거나 하나님을 버리겠다고 선언하곤 한다. 그러나 성도는 시련 속에서도 하나님의 뜻을 발견할 수 있어야 한다.
본문:5:13-14
본문에서 베드로는 개인적인 인사말로 본 서신을 끝맺는다. 즉 바벨론에 있는 함께 택함받은 자와 자신의 아들이라고까지 부른 마가의 안부를 전한 뒤 독자 모두에게 평강이 있으리라는 축복의 말로 서신을 맺는다.
본문은 소아시아의 다섯 지방, 즉 본도, 갈라디아, 갑바도기아, 아시아와 비두나아에 흩어진 그리스도인들(참조, 벧전 1:1)에게 보낸 베드로 사도의 편지 중 마지막 작별 인사에 해당되는 부분입니다. 이제 이러한 본문을 통해 그리스도인들이 문안해야 할 대상은 누구이며, 그 내용은 어떠해야 하는지에 대해 생각해 보도록 하겠습니다.
1. 그리스도인의 문안은 함께 택하심을 입은 자들끼리의 문안입니다.
\'함께 택하심을 받은 바벨론에 있는 교회가 너희에게 문안하고\'(13절). 본문에서 말하고 있는 문안은 우리가 거리에서나 시장에서 안면이 있는 사람을 만날 때 단순히 고개를 끄덕이는 정도의 인사를 의미하는 것이 아닙니다. 베드로 사도가 전하고자 하는 문안은 서로를 깊이 알고 뜨겁게 사랑하며, 때문에 진심으로 서로의 어려움을 돕고 위로해 줄 수 있는 사람끼리의 진실된 문안입니다. 이러한 문안이기에 베드로 사도는 문안의 대상과 범위를 \'함께 택하심을 받은\' 자들로 제한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고난 당하고,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배척받으며,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극한 외로움과 고독을 맛보아야 하는 자에게 참된 위로와 사랑, 그리고 격려를 줄 수 있는 자는 그리스도 안에서 믿음으로 말미암아 새로운 생명을 얻은, 그리스도를 뜨겁게 사랑함으로 또한 서로를 진실로 사랑해 줄 수 있는 \'함께 택하심을 입은 자들\' 뿐이기 때문입니다.
2. 그리스도인의 문안은 서로의 허물을 덮어 주는 용서의 문안입니다.
\'내 아들 마가도 그리하느니라\'(13절). 본문의 \'내 아들 마가\'라는 표현은 마가가 베드로의 친아들이라는 의미가 아니라 마치 디모데가 바울의 아들로 여겨졌던 것처럼(참조, 딤전 1:2, 8) 마가 역시 베드로에게 믿음의 아들로 여겨졌다는 말입니다. 마가는 본래 바나바의 조카(참조, 골 4:10, 11)로서 본명은 요한 마가(참조, 행 12:12, 25)였습니다. 그는 바울의 1차 전도 여행 때 동행하였으나 전도 여행의 어려움을 이기지 못하고 중도에서 포기했던 자였습니다(참조, 행 13:13). 이러한 이유 때문에 바울은 2차 여행 때 마가를 데리고 가지 않았으나(참조, 행 16:36, 37) 후일 그의 회개와 더 큰 열심히 인해 바울은 로마에서 투옥될 때 그가 자기와 함께 해주기를 바랐고(참조, 딤후 4:11), 마가는 그러한 바울의 요청을 받아들여 그와 함께 투옥되기도 하였습니다(참조, 골 4:10, 12 ; 몬 1:24). 이렇듯 한때는 주의 사역을 회피하고 도망갔던 마가였으나 믿음의 동역자들은 회개하는 마가를 버리지 않고 그를 여전히 자신들의 동역자로 삼아 그리스도의 큰 일꾼으로 서게 하였으며, 베드로 사도는 그를 자신의 영적 아들로 삼아 이방인 교회에 함께 문안을 전하는 자로 세웠던 것입니다. 이것이 용서와 관용의 위대함입니다. 정죄와 심판은 사람을 죽이지만 용서와 사랑, 죄인을 받아들이는 관용은 그를 살리고 그리스도의 사역에 크게 쓰임받는 일꾼으로 서게 합니다. 그리스도인의 문안은 바로 이러한 용서를 포함하는 문안입니다. 한 번의 실수를 돌이키지 못할 죄악으로 치부하는 것이 아니라 더 큰 발전의 디딤돌로 만들게 하는 용서, 그러한 용서를 전제로 하는 것이 그리스도인의 문안인 것입니다. 왜냐하면 우리 역시 결코 온전할 수 없는 연약한 인간이기 때문이며, 그러한 인간을 우리 주님께서 사랑하시고 계시기 때문이고, 또한 만일 우리가 서로 단점이나 죄악만을 바라본다면
그리스도인 상호간의 문안은커녕 성도의 거룩한 모임 그 자체도 불가능하기 때문입니다.
3. 그리스도인의 문안은 진실한 사랑을 나누는 문안이어야 합니다.
\'너희는 사랑의 입맞춤으로 피차 문안하라\'(14절). 이러한 입맞춤은 서로가 한 형제일 뿐 아니라 서로에게 아무런 적의가 없고, 진실로 상대방을 사랑하고 있다는 의미입니다. 바울 역시 거룩한 입맞춤(참조, 롬 16:16 ; 고전 16:20 ; 고후 13:11)이라는 표현으로 이러한 입맞춤의 시행을 강조했습니다. 마음속에 거짓이 없고, 위선이나 가증됨, 음욕이나 완악함이 없는 거룩하고 진실한 만남을 사도들은 강조하였던 것입니다. 서로를 위하되 뜨겁게 위하고, 서로를 위로하고 격려하되 그의 고통을 진실로 나의 고통으로 아는 참사랑이 내포된 문안, 이것이 성도끼리 행하는 문안의 핵심이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4. 그리스도인의 문안은 그리스도 안에 있는 평강을 비는 문안입니다.
\'그리스도 안에 있는 너희 모든 이에게 평강이 있을지어다\'(14절). 참된 평강은 그리스도 안에서만 가능합니다. 물질과 명예, 권세는 더 큰 욕심과 그에 따른 불만족, 그리고 불안감만 줄 뿐 참 평안을 가져다주지는 못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인의 문안은 \'그리스도 안에\'가 강조되어야 합니다. 그것이 곧 참 평안을 얻는 비결이요 진실된 행복을 얻는 길입니다. 모든 것의 근원이신 그리스도 안에 거함으로 모든 것의 주인이 될 수 있고 축복의 주체가 될 수 있는 것입 니다. 모든 불안 요소도 그리스도 안에만 있으면 깨끗이 해소됩니다. 우리가 그리스도 안에 있을 때 그리스도께서는 우리 안에 내주하시며 우리 삶의 주관자가 되어 주시기 때문입니다.
험난한 세상 속에서 어려움을 겪으면서도 사랑을 실천하며 살아가야 하는 그리스도인들에게 있어서 서로의 안부를 확인하는 것은 작은 일이지만 중요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