베드로후서 제2강


믿음의 7가지 덕목

믿음의 7가지 덕목~벧후1:4-7절
본문:베드로후서 1장 4-7절
제목:어제는 국가가 정한 장애자의 날이었고, 오늘은 교계가 정한 장애인 주일입니다. 우리 주위에는 선천적으로 장애를 가지고 태어나는 사람들이 있는가 하면 후천적으로 장애를 입는 사람들도 많이 있습니다. 과거에는 장애인들에 대해 냉대했는데 그래도 요즘은 많은 관심과 사랑을 가지게 된 것이 사실입니다. 물론 장애를 입고 살아가는 사람들에게는 만족스럽지는 못하겠지만 사회전반에 걸쳐서 지속적인 관심과 더불어 함께 살아가려는 노력들이 많이 보입니다.

우리가 장애를 입어보지 않고 장애자들이 안고있는 마음과 육신의 고통을 다 이해할 수 있다고 말하는 것은 모순이라고 생각을 합니다. 그러나 한가지 분명한 것은 장애란 이 짧은 육신의 생애를 살아갈 동안만 불편을 준다는 것입니다.

오히려 육신의 장애보다 더 중요한 장애는 마음의 장애라고 생각합니다. 작년에 저희교회 헌신예배를 인도하러 오셨던 맹인 목사님을 기억하시리라 생각을 합니다. 저는 그 목사님과 신학교 3년동안 기숙사 같은 방을 사용했습니다. 그런데 얼마나 밝고,적극적이고,긍정적으로 사시는지 오히려 곁에 있던 많은 분들이 그 목사님을 통해 많은 것들을 배우곤 했습니다.

그런데 장애를 가지고 있지 않은 사람들 중에는 마음이 비뚤어지고,악한생각으로 가득찬 사람들이 많이 있습니다. 어떤사람들은 장애인들이 이 사회에 있음으로 사회가 건강하지 못하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살아가는 사회를 혼탁하게 만들고, 사회를 불안하게 만들고, 나아가서 범죄가 일어나는 것은 거의 대부분이 육신의 장애인들에 의해서가 아니라 육신이 건강하다고 말하는 마음의 장애자들에 의해서 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정말 경계해야할 것은 마음의 장애입니다. 그런데 또 우리가 경계해야 할 장애가 있습니다. 이것은 그리스도인들에게 해당되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인들에게도 육신의 장애가 아닌 또 다른 장애가 있습니다. 그것은 \'믿음의 장애\'입니다.

정상적인 그리스도인이라면 믿음의 연륜이 더해갈 수록 그 믿음이 성장을 해야 합니다. 그런데 믿은지 오래 되었는데도 불구하고 그 믿음이 항상 제자리에 머물러 있다면 그 사람은 믿음의 장애자 입니다.

성경은 언제나 육신의 장애자들에 대해 탄식하고 있지 않습니다. 육신의 장애를 입은 사람들에게는 우리 주님께서 더 많은 관심과 사랑으로 대하셨습니다. 오히려 믿음의 장애를 가지고 살아가는 사람들을 책망하고 있습니다. 당연히 자라나야 함에도 불구하고 자라나지 못하게 하는 믿음의 장애를 경계하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우리의 믿음이 정상적으로 자라나기 위해서는 어떤 일들이 선행되어져야 할까요?

첫째는 하나님의 말씀을 배워야 합니다.

로마서 10장 17절에 보면 \"믿음은 들음에서 나며 들음은 그리스도의 말씀으로 말미암았느니라\"고 했습니다. 즉 하나님의 말씀을 듣는 것을 통해서 우리의 믿음이 성장한다고 말씀합니다.

만약 우리들 가운데 주일을 지킨다고 말하면서 주일 대예배 한번만 나와서 하나님께 예배드리고 그때 하나님의 말씀을 들은 것으로 만족하면서 믿음이 성장하기를 기대하는 사람이 있다면 그 사람은 일주일에 식사를 한끼만 하고도 건강한 몸을 유지하고 사회생활을 지칠줄 모르고 하기를 기대하는 사람과 똑 같습니다.

또 성경을 일주일 내내 집에 고이 고이 모셔두었다가 교회와서야 한번 펼쳐보는 사람들은 봄철에 농부가 볍씨 하나를 갖고 논에 나가서 그것 하나 심어 놓고 1년 내내 기다리고 앉아서 거기에서 100섬의 쌀을 거두기를 기대하는 농부와 같습니다. 만일 농부가 그렇게 하고 앉아 있다면 지나가는 사람들이 뭐라고 하겠습니까? 마찬가지로 우리가 일주일에 단 한번 교회에 와서 성경을 펼쳐보는 것으로 우리의 신앙이 성장하기를 기대한다면 하나님이 보시기에 얼마나 한심스러운 일이겠습니까?

그러므로 우리는 기회가 있는대로 하나님의 말씀을 읽고, 묵상하고, 배우는 일에 열심을 내야 믿음이 성장할 수 있습니다.

두번째는 기도생활을 해야 합니다.

하루는 예수님께서 열 두제자 가운데 세 제자를 데리고 변화산 위에 올라가셨습니다. 그때에 산 아래 남아 있던 아홉 제자에게 귀신 들린 한 아이의 부모가 그 아이를 데려왔습니다. 아마 예수님의 제자들이 이 아이를 고쳐 줄 수 있을 것이라고 믿고 왔던 것 같습니다.

그런데 그 아이부모의 기대와는 달리 제자들은 귀신을 쫓아내지 못했습니다. 얼굴이 벌개지고 인간적으로 얼마나 부끄럽고 망신스러웠겠습니까? 그때 예수님께서 산에서 내려오셨습니다. 이때 그 아이의 어머니가 제자들이 귀신을 쫓아내지 못한 것을 말하면서 예수님께 귀신을 쫓아내 달라고 부탁을 했습니다. 예수님은 그 어머니의 부탁을 받고 즉시 귀신을 쫓아내셨습니다.

제자들이 예수님께 가서 물었습니다. \"예수님 왜 우리는 그 귀신을 쫓아내지 못했습니까?\" 그랬더니 예수님께서 하시는 말씀이 \"너희 믿음이 적은 연고니라 기도 외에는 이런 능력이 일어날 수 없느니라\"고 하셨습니다.

그렇다면 결국 믿음은 무엇을 통해서 점점 커질 수 있다는 말입니까? 기도입니다. 기도하지 않고서는 믿음이 결코 성장할 수가 없습니다. 여러분! 하루에 두번내지 세번기도하는 것 가지고 신앙이 성장하지 않습니다. 아침식사 때 30초, 점심식사 때 다른 사람들이 보니까 슬쩍 넘어가버리고, 아니면 양심은 있어서 그냥 지나가지 못해 슬쩍 눈을 감았다가 뜨고, 저녁은 조금 시간적인 여유가 있으니 1분정도 기도하고, 이렇게 기도하는 것으로는 신앙이 성장하지 않습니다.

여러분이 진정으로 믿음의 장애자가 되지 않으려면 기도해야 합니다. 건강하게 자라기를 원한다면 하나님과 교제하는 시간을 더 많이 가져야 합니다.

세번째로 헌신을 해야 합니다.

하나님 앞에 받은 믿음이라고 하는 것은 세상에 그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보배로운 것입니다. 값진 것입니다. 이것을 우리는 하나님께 선물로 받았습니다. 그러므로 이 영생을 선물로 받았다고 하는 감사와 감격이 있는 사람은 자기의 모든 생애를 하나님 앞에 내놓고 헌신해야 합니다.

예로부터 우리민족에게는 좋은 풍습이 많이 있습니다. 그 중에 음식을 나눠 먹는 것입니다. 집에서 맛있는 음식을 하면 꼭 한접시 담아서 이웃집에 나누어 주곤 합니다. 그 음식을 받은 사람은 또 그 접시를 그냥돌려 주는 법이 없습니다. 그곳에다 또 무언가를 담아서 돌려 줍니다. 얼마나 아름다운 풍습인지 모르겠습니다.
그런데 저와 여러분이 그 접시에 담아서 받은 것이 무엇입니까? 영생입니다. 세상에 무엇과도 바꿀수 없는 영원한생명입니다. 맛있는 음식을 한 접시 받고도 그냥 돌려보내지 않으면서 하물며 세상에서 가장 값진 것을 받은 우리들이 하나님께 그냥 빈 접시로 돌려드리면 되겠습니까?

흔히 헌신이라고 하면 꼭 교회에서 봉사하는 것으로만 알고 있습니다. 헌신하면 꼭 목사가 되고, 장로가 되어야 하는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헌신하면 꼭 무슨 헌금을 많이 바치는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것은 헌신의 일부분일 뿐입니다.

여러분! 헌신이 무엇입니까? 영원히 죽을 수 밖에 없는 내가 하나님의 뜻으로 말미암아 믿는 자가 되었고 영생을 얻어서 이제는 하나님의 것이 되었으니 내 인생을 내가 좌지우지 하지 않고 전폭적으로 하나님께 나를 맡기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뜻에 따라 순종하면서 살아가려고 하는 생활태도가 곧 헌신입니다.

그 방법중에 하나가 시간을 내어서 교회에서 봉사하고, 주신 물질을 정성스럽게 하나님앞에 드리기도하고, 선한일을 하기도 하는 것입니다.

헌신이 없이 결코 믿음이 성장하지 않습니다. 항상 뒷전에서 남들이 하는 것을 지켜보고 방관하는 자세에 있는 사람들은 하나님나라에 가서도 다른 사람들이 다 상을 받을 때도 역시 저 멀리서 지켜보는 자가 되고 말것입니다.

네번째는 덕스러운 생활을 하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이 이것을 말하고 있습니다. 사도 베드로는 그래서 일곱가지 덕목을 우리들에게 제시를 하고 있습니다. 이것을 실천하는 사람이야 말로 그 믿음이 성장할 수 있다고 말합니다. 그 일곱가지 덕목중에 첫번째가 \'덕\'입니다.

우리는 주위에서 보면 남들이 따라갈 수 없을 정도로 열심히 믿는 사람이 있습니다. 기도도 열심히 하고 세상이 감당치 못하는 믿음이 있습니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인격적인 결함이 있어서 덕을 세우지 못하는 경우를 종종 볼 수 있습니다. 개인적인 믿음은 참 좋은데 그 분이 가는 곳곳마다 문제가 생기고 시끄럽습니다. 이런 경우 믿음은 있는데 덕이 없기 때문입니다.

덕이 무엇입니까? 선하고 정직한 성품에서부터 표현되는 관용과 포용과 화해와 사랑의 자세를 다른사람에게 드러내고 생활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덕\'이란 말의 원래 뜻은 \"사물이 그 원래의 목적대로 쓰임을 받는 것\"을 말합니다. 가령 예를 들어 땅의 원래의 목적은 소산물을 내는 것입니다. 소산물을 내기 위해 땅이 쓰여지는 것은 땅이 존재하는 원래의 목적입니다.

마찬가지로 그리스도인이 존재하는 원래의 목적은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기 위해서 우리들에게 필요한 것이 \'덕\'입니다. 믿음이 아무리 좋아도,교회에서 아무리 많은 봉사를 해도 \'덕\'이 없으면 그 사람 주위에는 사람들이 머물지 못합니다. 언젠가는 덕스럽지 못한 그 성격을 그 사람이 믿는 하나님을 욕하고 다 돌아서 버립니다. 그러므로 믿음에 있어서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덕\'입니다.

두번째는 \'지식\'입니다. 덕에 지식을 더하라고 했습니다. 덕있는 사람에게도 몇가지 결점이 있을 수 있습니다. 우유부단 하거나 덕을 앞세워서 판단과 선택을 잘못하는 경우가 더러 있습니다. 또 상황과 환경에 지배받아 흔들릴 가능성도 많습니다.

그래서 덕이 중요하지만 덕에다가 지식이 더해져야 그 덕이 바로 설 수 있습니다. 그리고 여기서 말하는 지식이란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지식을 뜻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분명한 지식이 있어야 이 일이 덕스러운지 아닌지가 구별이 되어집니다.

세번째는 \'절제\'입니다. 지식이 많게 되면 자연히 판단력과 비판력이 앞섭니다. 그래서 공부를 많이 한 박사들을 보면 다른 사람보다 무엇을 판단하고 비판하기는 참 잘합니다. 대안이 부족하고 행동은 모자라도 판단하는 것은 잘 합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지식이 풍성하게 되면 그 지식을 가지고 이것은 잘못됐고, 저것은 잘됐다. 저 사람은 저래서 잘못됐고, 이 사람은 이래서 잘못됐다고 판단을 잘합니다.

그래서 그 지식에 필요한 것이 \'절제\'입니다. 자기 자신에게 기준을 두었을 때는 절제할 수가 없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 기준을 두고 다른 사람에게 기준을 두었을 때에는 절제할 수가 있습니다. 지식이 중요하지만 그것이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또 다른 사람의 유익을 위하여 잘 절제될 때 그 지식은 값진 것이 됩니다.

예수님께 책망을 많이 받았던 바리새인들의 경우도, 그들은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지식은 누구보다도 많았지만 그 지식이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쓰여진 것이 아니라 자신들의 영광을 위해서 사용했기 때문에 그 말씀을 가지고 다른 사람을 판단했습니다. 그러므로 지식에 꼭 필요한 것이 절제입니다.

간혹 우리주위에 지식이 풍부한 사람들이 있습니다. 처음에는 그 사람의 지식을 칭찬하다가도 절제를 하지 않고 많은 것을 쏟아놓으면 사람들은 은연중에 \"저 사람 또 잘난체 하네\"라고 생각을 합니다. 이렇게 되면 아무리 지식이 풍부해도 결국은 절제되지 않은 것 때문에 자신이 더 곤경에 빠지게 됩니다.

네번째는 \'인내\'입니다. 인내가 없으면 절제할 수가 없습니다. 절제한다고 하는 것이 얼마나 힘든 일인지 모릅니다. 좋아하는 음식이 있는데 의사가 병이 나으려면 그 음식을 먹지 말라고 할 때 그것을 참기란 쉬운일이 아닙니다. 고통스럽습니다. 그러므로 절제를 하는데는 고통이 따르기 마련입니다. 그런데 이 고통을 이길 수 있는 방법은 한가지 입니다. \'인내\'하는 것입니다.

인내가 필요한 사람들 중에 예를 들라면 아무래도 \'운동선수\'일 것입니다. 이들은 경기를 앞두고 절제해야 할 것들이 많이 있습니다. 먹고 싶다고 해서 함부로 먹을 수도 없습니다. 쉬고 싶다고 마음대로 쉬어서도 안됩니다. 모든 것에 절제하지 않으면 경기에서 결코 승리할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절제하기 위해서는 \'인내\'하는 수 밖에 없습니다.

우리는 사람과 사람사이에서 종종 이런 말을 합니다. \"내가 지금까지는 참았는데 더 이상을 못참겠다\"하면서 화를 냅니다. 이런 경우 이 사람은 지금까지 참은 것이 아닙니다. 화 낼 기회를 기다리고 있었을 뿐입니다.

다섯번째는 \'경건\'입니다. 인내가 필요하다고 무턱대고 참을 수 만은 없습니다. 앞에 무엇이 약속되어 있어야 그 약속을 기대하고 참을 수 있습니다. 환자가 먹고 싶은 음식을 안 먹는 것도 건강이 좋아진다고 하는 약속이 있기 때문입니다. 운동선수가 모든 것을 참는 것도 그렇게 할 때 경기에서 승리할 수 있는 확률이 더 높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모든 절제에 따르는 인내를 할 수 있는 것은 그 앞에 약속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 약속이 무엇입니까? \'경건\'입니다. 이 경건은 하나님을 두려워 하고 그 앞에서 조심스럽고 겸손하게 생활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에 대한 소망이 있는 사람은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목적이 있기 때문에 인내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않는 자는 인내할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인내에는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경건이 더해져야 한다고 말씀한 것입니다.

여섯번째는 \'형제우애\'입니다. 그저 예의를 지키는 것은 경건이 아닙니다. 남에게 공손하게 대하는 것이 경건은 아닙니다. 성경에서 말하는 경건에는 몇가지가 있는데 그 중에 하나는 이웃을 돌아보는 것입니다.

요한일서 4장 20절 말씀을 보면 \"누구든지 하나님을 사랑하노라 하고 그 형제를 미워하면 이는 거짓말하는 자니 보는 바, 그 형제를 사랑치 아니하는 자가 보지 못하는 바, 하나님을 사랑할 수 없느니라\"고 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을 사랑하고 두려워하는 그 경건에는 반드시 형제우애가 따라오게 되어 있습니다.

그리고 마지막 일곱번째가 \'사랑\'입니다. 사랑과 형제우애는 같은 말 같은데 사실은 그렇지 않습니다. 여기서 말씀하는 사랑이란 어떤 인본주의적인 사랑이나 박애주의적인 사랑이나 인도주의적인 사랑을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사람들은 대개 상대방이 나에게 호의를 베풀었을 때 나도 상대방에게 호의를 베풀곤 합니다. 서로 뜻과 성격이 맞을 때 형제우애가 됩니다. 그러나 이런 인간적인 사랑에 그리스도의 사랑을 더해야 합니다. 우리 주님께서는 우리를 사랑하실 때 우리와 약속하고 사랑하신 것이 아닙니다. 우리와 협의를 거쳐서 우리를 사랑하신 것도 아닙니다. 내가 사랑받을 만한 일을 했기 때문에 우리를 사랑하신 것은 더욱 아닙니다.

우리는 전혀 사랑을 받을 수 없는 죄인들이었습니다. 하나님을 배반하고 하나님으로부터 멀어져 있었던 존재들입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사랑을 베푸셨습니다. 우리에게 한없는 자비를 베푸셨습니다. 그러므로 진정한 형제우애가 이루어지기 위해서는 이런 그리스도의 사랑이 있어야 합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오늘 우리가 장애인 주일을 맞이해서 우리 주위에 있는 많은 장애를 안고 살아가는 사람들을 다시한번 생각해봅시다. 그들의 고통과 아픔을 인본주의적인 모습이 아닌 그리스도의 사랑으로 그들과 사랑을 나눌수 있어야 합니다. 그리고 더욱 깊이 생각해야 할 것은 이 시대의 진정한 장애인이 누군지를 생각해보아야 할 것입니다.

앞서보 말씀드렸거니와 육신의 장애를 안은 사람들 때문에 이 사회가 어지러워진 것이 아닙니다. 마음의 장애를 안고 있는 사람들 때문에 사회가 더욱 악해져 가고 있습니다. 그리고 이렇게 되기까지는 믿음이 정상적으로 성장하지 않고 믿음의 장애를 가지고 있는 우리들에게 더 큰 잘못이 있다는 사실도 솔직히 인정을 해야 할 것입니다.

성도 여러분!
이제는 우리가 자라야할 때입니다. 오랜 신앙생활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그리스도의 초보를 버리지 못하고 그 수준에 머물러 있어서는 안됩니다. 이 장애인 주일에 누가 진정한 장애인인가 다시한번 생각하시는 기회가 되시길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