베드로후서 제6강


개와 돼지

개와 돼지~벧후2:17-23절
본문:베드로후서 2장 17-23절
제목:

지난주 이 시간에 \'거짓선생을 경계하라\'는 제목으로 말씀을 드렸습니다. 베드로 사도는 그들을 경계해야 할 이유를 여러가지로 설명을 했습니다. 거짓선생은 남을 속입니다. 사신 주를 부인합니다. 그들의 마음은 탐심으로 가득차있고,호색하는 자들입니다.

그런데 우리가 여기서 알아야 할 것이 하나있습니다. 그렇다면 왜 거짓선생이 이토록 판을 치는가 하는 것입니다. 그것은 두말할 필요없이 종말이 가까왔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베드로 사도도 그 시대를 가리켜서 노아의 때와 같고,롯의 때와 같다고 표현을 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잘 알고 있듯이, 노아의 때는 그 시대가 홍수로 끝을 맺고 말았습니다. 롯이 살았던 소돔과 고모라 성도 하나님의 심판이었던 유황불로 그 화려했던 시대를 마감했습니다. 그런데 그 심판의 때가 다가왔는데도 불구하고 그 시대의 사람들은 그것을 인식하지 못하고 있었습니다.

노아시대때 노아는 방주를 예비하는 120년동안 계속해서 하나님의 심판을 말했습니다. 그런데 아무도 그 말에 귀를 기울이지 않았습니다. 어쩌면 \"노아 할아버지가 나이가 드시드니 망령이 났나?\"라고 말했을는지 모릅니다. 아니면 \"이 맑은 하늘에 비라니 미쳤군\" 이렇게 말했을는지도 모릅니다. 아뭏튼 노아가 그토록 하나님의 홍수심판을 외쳐댔지만 그 말에 귀를 기울이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습니다. 즉 심판이 다가오고 종말이 다가와도 모두가 그것을 제대로 인식하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롯의 시대도 마찬가지였습니다. 하나님께서 소돔과 고모라 성을 멸망시키겠다고 하셨을 때 대부분의 사람은 이렇게 생각했을 것입니다. \"아니 우리가 이제 사람다운 삶을 사는 듯 한데, 인생을 멋지게 살만한데 종말이라니, 아마 그것은 우리가 인생을 즐기면서 사니까 그렇게 살지 못하는 사람들이 시기해서 그렇게 말하는 것일꺼야!\"라고 말입니다.

베드로는 자신이 편지를 쓰고 있는 그 시대가 바로 이때와 같다고 말합니다. 세상의 종말이 가까왔다고 말합니다. 그리고 종말이 가까올수록 거짓선생들은 더욱 많이 나타나게 될 것임을 말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노아시대와 롯의 시대처럼 대부분의 사람들이 종말을 종말로 인식하지 못하고 살아가고 있다는 것이 문제였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오늘 우리가 살아가는 이 시대는 어떠합니까? \'말\'로는 믿는 사람이든 믿지 않는 사람이든 지금 이시대를 가리켜서 \'말세\'라고 말합니다. 언젠가 대학교수인 아들이 아버지를 살해하는 것을 보고 사람들은 \'말세야 말세\'라고 말들 하셨습니다. 중학생정도 되어 보이는 아이들이 어른들 앞에서 담배를 피우고 있는 모습을 보고도 \'세상 말세야 말세\'라고 말씀들 하십니다. 그런데 오늘날의 문제도 이것입니다. 말로는 입으로는 말세라고 말하면서도 정작 세상에 종말이 다가왔다는 사실을 인식하고 살지는 안는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어느 철학자의 말대로 \'세상의 종말이 와도 한그루의 사과나무를 심겠다\'는 여유있는 삶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아예 종말이 다가오지 않을 것이라고 착각하면서 사는 삶입니다.

종말이 다가오면 두드러지게 나타나는 현상이 있습니다. 진짜와 가짜가 구별이 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즉 선과 악이 분명치 않습니다. 가치기준이 다 무너지고 맙니다. 사람과 사람사이의 신뢰가 상실되고 맙니다. 사회는 운통 음란한 것으로 완전히 물들어 버리고 맙니다. 가만히 생각해보면 지금 우리가 살아가는 시대가 바로 이런 시대입니다. 진짜와 가짜가 구별이 되어지지 않습니다. 오히려 진짜보다 가짜가 더 인기를 끄는 시대가 되고 말았습니다. 제각기 자기 멋에 살고 자기 기분에 도취되어 생활을 합니다. 그래서 가면 갈수록 무슨 질문이 던져졌을 때 \'예\'혹은 \'아니오\'라는 분명한 대답 대신에 \'글쎄요\'라는 말이 더 많아졌습니다. 이것은 분명한 가치가 없어졌다는 얘기일뿐 아니라 무엇이 진짜이고 무엇이 가짜인지 구별할 수가 없는 시대가 되었다는 단적인 예인 것입니다.

어디 그뿐입니까? 이 시대는 음란한 것으로 가득찬 세상입니다. 지난주에 미국에서 컴퓨터에 대한 이상한 판결이 있었습니다. 아마 젊은 분들은 인터넷이라는 말을 들어보셨으리라 생각합니다. 인터넷에 대해 여기서 자세히 설명을 드릴수는 없고 간단히 말씀드리면 전세계를 하나의 컴퓨터 통신으로 연결하는 것을 말하는데 여기에는 온갖 정보들이 띄워지는데 그러다보니 아주 음란한 것까지도 다 그 인터넷을 통해 볼수가 있습니다.

그런데 지난주에 이 인터넷을 통해 음란한 것을 보내는 것이 합법이냐 불법이냐 하는 1심재판이 있었습니다. 결론은 통신의 자유를 위해 그것은 법적으로 아무 하자가 없다는 판결이 내려진 것입니다. 결국 음란한 것을 보느냐, 보지 않느냐 하는 것은 각자가 알아서 하라는 것입니다.

여러분!
이시대는 법적으로도 음란한 것을 막지 못하는 시대입니다. 이런 것을 볼 때마다 정말 울화가 치밀고 한편으로는 안타깝기 짝이 없습니다. 그러나 진짜 안타까운 것은 다른데 있습니다. 그것은 우리 스스로가 이런 것들을 안타깝게 생각하면서 내 자신이 이러한 것으로 부터 나를 구별시키고 있는가?하면 그렇지 않다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정말 그리스도인으로서 여러분의 삶을 구별시키셨습니다. 세상사람들의 안타까운 모습을 보면서 \"쯧쯧\"하며 혀를 차면서도 과연 나는 그들로 부터 나를 구별시키고 있는가 하는 것입니다.

베드로 사도는 말세에 우리의 삶이 분명하게 구분되어지지 않는다면 그것은 개나 돼지와 다를바가 없다고 말합니다. 그래서 오늘 본문에서는 개의 많은 근성 가운데 한가지를 지적하고 있습니다. 그것이 무엇입니까? 토한 것을 다시 핥아 먹는 것입니다. 오늘 우리들의 근성이 바로 이 질 좋지 않은 개와 같다고 말합니다. 이 말씀은 보시면서 베드로 사도가 너무하다고 생각이 되십니까? 그 많은 표현가운데 하필이면 \'개\'에 비유하느냐고 항변이라도 하고 싶으십니까? 아닙니다. 어쩌면 가장 적절하게 표현한 말인지도 모릅니다.

한번 생각해봅시다. 개가 토한 것을 핥아 먹는 것을 보면 밥맛이 뚝 떨어집니다. 아침에 먹었던 것도 모두 올라오려고 합니다. 지금 이 말을 듣는 분들 중에 벌써 \'욱\'하는 분들이 계실지 모르겠습니다. 그런데 우리의 모습이 이와 별로 다를바가 없습니다. 우리가 얼마나 많이 눈물을 흘리고,콧물도 흘리고, 회개를 하지 않았습니까? 그런데 뒤돌아 서면 다시 그것을 또 다시 그대로 핥아 먹습니다. 눈물을 흘리며 토해놓았던 것 뒤돌아 서면 그것을 그대로 다 주워 먹는 것이 우리들이 아닙니까?

다시는 안 먹겠다고, 다시는 그러지 않겠다고 말하고서는 또 며칠 못가서 먹고 마시고 과거에 했던 행동 그대로 행하지 않습니까? \"다음부터는 주일 꼭 지켜야지 했다가도 주일을 범합니다. 그러면 이번엔 다음달부터는 정말 꼭 지켜야지 했다가 또 어깁니다. 그러면 내년부터는 꼭 지켜야지 했다가 다음해가 오면 또 주일을 제대로 지키지 않습니다. 이렇게 미루면서 반복하는 모습이 우리들에게 얼마나 많습니까?

이것이 개의 근성과 같습니다. 자신이 토해낸 것을 그대로 다시 먹습니다. 여러분! 똥개가 왜 똥개입니까? 거리를 다니면서 온갖것을 다 먹습니다. 그런데 거기에는 자신이 토해낸 것, 자신이 뒤로 내 보낸 것까지 있기 때문입니다.

또 본문에서는 돼지로도 표현하고 있습니다. 돼지는 깨끗하게 씻겨 놓으면 또 다시 꿀꿀이 죽통으로 들어가서 뒹굽니다. 그런데 우리가 돼지라는 것은 어떤의미를 지니고 있습니까? 우리가 하나님 앞에 회개하고 기도함으로 죄 용서함을 받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그 기쁨과 그 감사가 얼마가지 못해서 다시 죄의 구렁텅이 속에 들어가서 뒹글어 버립니다.

\"다시는 거짓말 하지 말아야지, 다시는 말씀을 떠나서 살지 말아야지, 다시는 내 마음 내키는대로 살지 말아야지\" 결심하고도 또 다시 그 자리에 들어가서 뒹구는 것이 우리의 삶이기 때문입니다.

돼지들은 깨끗하게 씻겨놓으면 다시 꿀꿀이 죽통에 들어가서 뭔가 먹을 것이 남았는가 해서 자신의 코를 그 죽통에 박고서는 꿀꿀꿀 하면서 찾아헤맵니다. 그 모습보면 정말 한심한 생각이 듭니다. 그런데 여러분 그 모습이 누구의 모습인가 하면 바로 우리의 모습입니다. 저와 여러분의 모습니다.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죽으심으로 우리를 깨끗게 하셨는데 우리는 여전히 꿀꿀이 죽통을 찾아 이리저리 헤매는 돼지들입니다.

그렇다면 베드로 사도는 왜 우리가 세상과 구별되지 못하고 개와 돼지처럼 살아가고 있다고 말합니까? 오늘 본문 20절 하반절을 보면 그리스도를 알면서도 세상의 더러움을 피한 후에 다시 그 더러움 속에 얽매이기 때문에 개와 돼지의 근성을 버리지 못한다고 말합니다.

여러분!
얽매인다는 것은 무엇을 말합니까? 적당하게 타협하는 것입니다. 즉 세상이 시키는대로, 세상이 요구하는대로 따라하는 것을 말합니다. 뿐만아니라 완전히 세상적인 사고와 가치관에 지배받고 있다는 말입니다. 자기의 욕심과 정욕으로 자기의 욕구를 만족시킨다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성경은 우리들에게 말하기를 그리스도의 좋은 군사가 되기위해서는 자기 생활에 얽매이지 말아야 한다도 말씀했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우리자신의 생활에 얽매여 있습니다. 세상과 타협을 하고, 그 속에서 나를 합리화시킵니다. 우리는 그리스도를 위하여 자기의 권리와 권한은 하나도 포기하지 못하면서 죄를 위하여는 왜 그렇게 양보하고 권리를 포기하는 것이 많은지 모르겠습니다.

여러분 자신을 이 두가지를 비교하면서 한번 생각해보시기 바랍니다. 첫째는 과연 내가 복음을 위해서 사는 일에 얼마나 헌신적인가? 두번째는 죄를 위해서 내가 얼마나 많은 것을 양보하고 있는가를 말입니다.

우리는 종종 천국의 소망을 가지고 살아간다고 말하지만 실제로는 이 땅을 소망하면서 살아가고 있습니다. 왜냐하면 하늘의 것을 바라보기 보다는 지금 당장 편하고 유익하고 잘먹고 잘사는 문제에만 더 관심을 가지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베드로 사도는 이런 삶을 사는 자들을 가리켜서 개와 돼지 같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여러분!
개, 돼지 라는 말 참 듣기 거북스럽고 싫으시지요, 이 말씀을 전하는 저도 매우 거북스럽고 역겹습니다. 그러나 실제로 우리의 삶을 돌이보면 별반 다를바가 없다는 것이 더욱 마음을 안타깝게 할 뿐입니다. 그렇다고 여기서 주저앉을 수만은 없습니다. 우리는 구체적으로 이러한 근성에서 벗어날 수 있는 방법을 모색해야 합니다. 그렇다면 어떻게 할 때 그것이 가능할까요? 어떻게 하면 세상과 구별되어지고, 어떻게 하면 노아의 때와 롯의 때와 같은 마지막 시대를 살면서 하나님앞에 인정받고 종말을 인식하면서 살수 있을까요?

첫째로 세상의 것을 과감하게 버릴 수 있어야 합니다.

그리스도인이면 누구나 세상의 것을 취하면서 살수 없다는 것을 잘 압니다. 그러나 우리는 언제나 안다는 것으로 우리는 언제나 과감하게 버리지 못하는 우리 자신을 위로하고 있습니다. 여러분! 아는 것으로 여러분 자신을 위로하려하거나, 안다는 것으로 여러분의 마음에 있는 부담을 덜어 보려고 해서는 안됩니다. 과감하게 버려야 합니다.

여러분!
조용히 여러분 자신을 향해 한번 물어보시기 바랍니다. 여러분은 죄를 미워합니까? 아니면 죄의 낙을 사랑하고 즐기고 있습니까? 죄를 지어서는 안된다고 말하면서도 우리는 죄와 타협할 때 얻는 그 기쁨 그 재미를 더 원하고 있습니다. 마약에 중독이 된 사람은 마약이 바쁘다는 것을 압니다. 그것이 자신을 망친다는 사실도 압니다. 그러나 그들이 쉽게 마약을 끊지 못하는 것을 마약을 투여했을 때 느끼게 되는 그 짜릿한 환각의 상태를 잊을 수 없기 때문입니다. 마찬가지로 우리는 죄를 미워한다고 말합니다. 그래서 죄를 멀리해야 하는 것도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실제로 그것을 멀리 못하는 이유는 죄가 주는 짜릿함이 있기 때문입니다. 죄가 주는 즐거움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이것을 과감하게 버리지 않는 한 우리는 개와 돼지 같은 인생을 살 수 밖에 없습니다.

둘째로 고통을 기쁘게 여길 수 있어야 합니다.

본문 7,8절을 보면 롯이 소돔과 고모라에서 사는 동안에 어떤 마음을 가졌다고 합니까? 의로운 롯이 이런 불법의 행실을 보고 들으면서 그 의로운 심령이 상했다고 했습니다. 오늘 이 시대가 믿는 사람들을 향해 믿는 티를 낸다고 조소하고 조롱하고 비방할때에 받는 그 고통을 두려워 하게 되면 우리는 세상과 모양이 같아질 수 밖에 없습니다. 세상과 구별된 색깔을 보일 수가 없습니다.

우리가 의롭게 산다고 손가락질 할 때 그것을 롯처럼 기쁨으로 받아들일 수 있는 자만이 이 세상에서 개와 돼지의 근성에서부터 벗어날 수 있습니다.

여러분!
세상 사람들이 다 같은 인생의 여정을 걸어갑니다. 그런데 한쪽은 아스팔트가 깔려 있고 좌우에 예쁜 꽃들이 피어 있는 넓은 길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흥겹게 노래 부르며 춤추면서 인생의 여정을 걸어갑니다. 그런데 그 큰 길 옆에 조그마한 길이 있는데 포장도 되어 있지 않습니다. 먼지도 납니다. 울퉁불퉁합니다. 거기에 몇사람이 그 길을 걸어가고 있습니다.

그럴 때 이 큰 길을 걸어가는 사람들이 그 사람들을 향해서 손가락질합니다. \"왜 같은 길을 가면서 하필 그 길을 가시오? 이렇게 넓고 꽃도 있고 노래도 있고 춤도 있느데 왜 이 길을 가지 않고 무엇하러 그 길로 가는 거요?\"

이렇게 조롱한다고 생각해봅시다. 그렇다면 우리는 어느 길을 가는 사람들입니까? 큰 길 가는 사람들이 똑 같은 인생을 가는데 왜 하필 그렇게 걸어가야 하느냐고 조소하고 조롱하는 것을 기쁘게 여기고 있습니까? 아니면 그것을 고통스럽게 여기고 있습니까?
큰길을 가는 사람들이 말합니다. 인생은 어차피 다 짐을 지는 인생인데 이왕이면 가벼운 짐을 지고 가자며 솜뭉치를 지고 가고 있습니다. 인생은 이렇게 가볍게 가는 거라고 , 될 수 있으면 가벼운 것을 지고 가는거라고 하면서 콧노래를 부르며 춤추며 꽃향기를 맡으며 걸어가고 있습니다. 그런데 좁고 울퉁불퉁한 길을 걸어가고 있는 사람은 나무로 된 십자가를 하나 지고 갑니다.

그럴 때 큰 길을 걸어가는 사람이 \"세상 사는 방법이 여러가진데 왜 하필 저렇게 살까? 정말 답답하구만 뭣하러 인생을 저렇게 사나,\"라고 말하면서 덧붙혀 말합니다. \"여보시오 왜 하필 그 많고 많은 인생길에 이런 길을 걷고 있소 이리 오시오 그리고 그 무거운 짐 벗고 가벼운 짐을 짊어지시오\"라고 말합니다.

그러면 여러분은 어떤 반응을 보이시겠습니까? \"옳거니 내가 저 길로 가야지, 이왕가는 인생길 좀 가벼운 짐을 지고 가야 오래 가지\"하면서 지금까지 지고 있던 짐을 벗어버리시겠습니까? 아니면 그 무거운 짐을 끝까지 지고서 감사하시겠습니까?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세상에서 좁은 길 가는 사람, 십자가를 지고 가는 사람은 마지막 인생의 결승점에 도착했을 때 예수께서 십자가를 벗겨 주심으로 우리는 허리를 펴고 황금과 보석으로 꾸며진 넓은 길에 들어가게 되지만 세상에서 꽃밭길 아스팔트길에 솜뭉치를 지고 가볍다고 콧노래를 부르며 춤추며 걸어가던 사람들은 인생의 종착역에 도달했을 때, 예수께서 그가 짊어지고 온 솜뭉치에다가 양동이의 물을 부으실 것입니다. 솜이 물을 먹으면 어떻게 됩니까?

말씀을 맺겠습니다.
베드로 사도는 어떤 사람이 개와 돼지 같다고 말합니까? 거짓선생들입니다. 그러나 이 말씀을 그 때 당시에 있었던 사람들로 국한시켜서 생각해서는 안됩니다. 만약 우리들 중에 거짓선생들이 즐기던 것을 즐기고 그들이 행하였던 습성을 그대로 간직하고 있다면 이 말씀은 우리들에게도 그대로 적용되어지는 말씀입니다.

여러분은 지금 무엇에 얽매여 있습니까? 여러분의 삶을 세상과 구별시키셨습니까? 여러분의 가장 값진 인생을 누구에게 맡기고 계십니까? 한번 밖에 없는 인생 하나님께 드리고 있습니까? 아니면 죄의 종이 되어서 여전히 죄의 왕인 사단에게 여러분의 인생을 맡기고 계십니까?

\'개와 돼지\' 정말 듣기 싫은 말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그들이 가진 근성을 버리지 아니하면 이 듣기 싫은 말을 들을 수 밖에 없습니다. 이제 이 말씀을 통해 여러분의 인생을 어떻게 꾸려나가야 할 것인지를 이 시간 깊히 생각하시는 은혜가 있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