베드로후서 제8강
주의 날을 사모하라
주의 날을 사모하라~벧후3:10-18절
본문:베드로후서 3장 10-18절
제목:
거짓선생들은 우리들에게 언제나 \'평안하다 안전하다\'라고 말합니다. 우리가 지금 영적으로 어떤 처지에 있고, 어떤 곤경에 처해있는지 그것은 그들에게 별로 중요하지 않습니다. 단지 그들은 우리가 듣기에 좋아할 말만 골라서 합니다. 간지러운 우리의 귀를 살살 간질러서 시원하게 해줍니다. 그런데 실상은 그 귀가 시원한 것이 아니라 귀 속은 썩어들어가고 있습니다.
오늘 우리한국교회 성도들의 신앙은 너무도 나약합니다. 그런데 우리 조상들은 이렇게 나약한 신앙의 소유자들이 아니었습니다. 교회사를 보면 그들은 열정이 한마디로 열정이 있었습니다. 그래서 교회에서 부흥사경회를 하거나 교회에 어떤 일이 있으면 그것을 나의 일같이 생각을 했습니다. 그래서 수십리 떨어진 곳에서 와서 부흥사경회에 참석했습니다. 교회일이라면 자다가도 벌떡 일어나 달려갔습니다.
그런데 오늘날 우리들은 어떻습니까? 미국에서 설문조사를 했는데 젊은이들이 가장 선호하는 교회는 예배시간이 짧은 교회였습니다. 목사가 설교를 짧게하고 딴말하지 않고 간단명료하게 논리적으로 필요한 말만하고 그것도 자신들이 듣기에 거북스럽지 않은 말만 하는 교회를 선호한다는 조사결과가 나왔습니다. 그런데 오늘날 한국교회가 그 모습그대로 답습을 하고 있습니다.
설교가 조금만 길어지면 몸을 비비꼬기 시작을 합니다. 수십번씩 시계를 들여다보고 아직도 끝날때가 되지 않았나?라고 생각합니다. 자신에게 부담스러운 말은 전혀 들으려 하지 않습니다. 교회에서 단지 위로 받기만 원합니다. 소망적이고 기쁜말만 듣고 싶어합니다. 용기를 주고 힘을 북돋와 주는 말을 듣고 싶어합니다. 아무 부담없이 와서 예배를 드리고 아무 부담없이 교회를 빠져나가고 싶어합니다.
실제로 교인들이 교회에서 제일 듣기 싫어하는 말이 헌금에 대한 말입니다. 교회에 갔더니 목사가 헌금을 강요하더라는 둥, 소득의 십분의 일을 내면 어떻게 살아라는 말이냐는 둥,헌금한 사람의 이름을 꼭 주보에 실어야 하느냐? 예배시간에 헌금위원들이 헌금을 거두어야 하느냐?는 둥 별의 별 얘기가 다 나옵니다. 그래서 자기 마음에 맞지 않으면 교회에서 상처 받았다고 말하고 교회를 떠나버리는 예는 비일비재합니다.
여러분!
무엇이 교회입니까? 예수그리스도께서 피로 사신 것이 교회입니다. 교회는 거짓선생들과 다릅니다. 거짓선생은 우리들이 듣기에 좋은 말만 합니다. 절대로 우리의 귀에 거슬리는 말을 하지 않습니다. 설령 하나님께서 말씀하신 것도 자기들의 말로 바꾸어서 말합니다. 그러나 교회는 그렇지 않습니다. 내가 듣기 싫은 말도 선포되는 곳이 교회입니다. 설령 그것이 나에게 부담이 되어도 하나님의 말씀이라면 증거되어지는 곳이 교회입니다.
\'회개하지 않으면 지옥 간다는 말\' 많은 사람들에게 부담스러운 말일지라도 선포되어지는 곳이 교회입니다. \'믿음으로 살지 않고 세상과 적당하게 타협하면서 살면 하나님의 무서운 심판이 임한다\'는 사실이 선포되어지는 곳이 교회입니다. \'십일조하라\'는말, 많은 사람들이 부담스럽게 받아들이는 말이지만 그 말씀이 선포되어지는 곳이 교회입니다.
베드로 사도는 말세의 두드러진 현상 가운데 하나가 거짓선생들이 나타나서 하나님의 말씀을 왜곡시키고 자기들의 말만 한다고 했습니다. 그들은 자신들의 삶을 바꾸기 싫어서 하나님의 말씀을 바꾸어서 말하는 자들이라고 했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심지어 하나님께서 사도들과 선지자들을 통해서 계속해서 말씀해 오신 예수그리스도의 재림마저도 부인을 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므로 베드로 사도는 마지막으로 이 편지의 결론으로 다시한번 예수그리스도의 재림에 대해 설명을 하고 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베드로 사도는 예수그리스도깨서 재림하시는 날에 어떤 일이 일어날 것을 말씀하고 있습니까? 그날에는 하늘이 큰 소리로 떠나가고 체질이 뜨거운 불에 풀어지게 될 것입니다.
그런데 지금 우리가 살아가고 있는 이 시대가 바로 이런 시대입니다. 언제 하늘이 불에 타서 체질이 뜨거운 불에 녹아질지 모르는 세대를 살아가고 있습니다. 세계 곳곳에 전쟁이 사라지지 않고 지구상에 보유하고 있는 핵은 이 지구를 수십번 아니 수백번 파괴할 만한 가공할만한 힘을 지니고 있습니다.
어쩌면 베드로 사도가 지금 우리가 살아가고 있는 이 시대를 멀리 내다보면서 이 말씀을 했는지도 모릅니다. 그렇다면 이러한 시대에 우리들이 구체적으로 어떻게 살아야한다고 말씀하고 있습니까? 하늘이 뜨거운 체질에 사라져 버릴 주의 날이 가까운 때에 우리는 어떻게 주의 날을 대비해야 합니까?
첫째는 경건한 삶을 살것을 말씀하고 있습니다.(11-14절)
오늘 본문에서 여러번 반복되어져 나오는 단어가 있습니다. \'바라본다\'란 단어입니다. 그런데 이 단어는 사도행전 3장에서 성전 미문에 앉아 있던 사람에게도 사용되어졌던 단어입니다.
사도행전 3장을 보면 베드로와 요한이 기도시간에 성전에 올라가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성전 문 밖에 친구들에 의해 데려다가 앉혀진 사람이 있었습니다. 그 사람은 태어날 때부터 앉은뱅이였습니다. 그는 성전을 오가는 사람들에게 구걸하기 위해서 그곳에 앉아있었습니다. 그런데 기도시간에 맞추어서 베드로와 요한이 성전에 들어오는 것을 이 사람이 보고 손을 내밀어 구걸을 했습니다.
그때 베드로는 자신을 향해 손을 내미는 이 사람에게 \'우리를 보라\'고 했습니다. 그랬더니 그가 \'저희에게 무엇을 얻을까 하여 바라보았다\'고 성경은 말합니다. 여기서 앉은뱅이가 베드로를 바라보았다는 말고 오늘 본문에서 나오는 바라본다는 말이 같은 말입니다.
그렇다면 \'바라보다\'란 말은 어떤 뜻입니까? 그것은 \'기대\'하고 \'소망\'한다는 것입니다. 앉은뱅이가 베드로를 바라본 것은 무언가 얻기를 소망해서 베드로를 바라보았습니다. 마찬가지로 오늘 본문에서 하나님의 날, 주의 날을 바라본다는 말은 우리의 소망과 기대를 이 땅에 두지 않는 다는 말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참된 그리스도인의 삶은 이 세상에 기초를 두지 않습니다. 이 세상에 있는 사람들과 다른 양식으로 살아가야 합니다. 다시말씀드려서 \'나그네 같이\' 혹은 이 땅에 사는 동안 \'외국인 같이\'살아야 합니다. 왜냐하면 이 세상은 우리의 본향이 아닙니다. 이 땅은 더 나은 곳인 영원한 도성에 가기위한 과정이며 우리는 그 길을 걸어가는 순례자이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경건하게 살고 거룩하게 살수 있는 방법은 이 땅을 소망하지 않는 것이며, 이 땅에 대한 기대감으로 살지 않는 것입니다. 세상은 언제나 우리들에게 달콤하게 속삭입니다. \'단 한번 사는 인생 즐겁게 보내라\'고 속삭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말씀은 \'단 한번의 인생이기에 눈앞에 보이는 것을 위해 살지 말고 하늘을 소망하면서 살아라\'고 말씀합니다.
이번주 뉴스를 보셨으면 아시겠지만 우리나라 경제에 비상이 걸렸습니다. 수출은 부진하고 수입은 눈덩이 같이 불어나고 있습니다. 반년만에 81억달러에 달하는 경제적 적자를 기록했습니다. 81억달러면 우리돈으로 2조 4000억에 달하는 규모입니다. 그런데 이 위기속에서도 사람들은 인생을 즐기는 것에 더 관심이 많습니다. 이제는 직장도 돈 많이 받는 곳보다는 여가를 선용할 수 있는 곳을 선호합니다. 물론 우리가 여가를 잘 보내는 것이 중요합니다.
그런데 그 여가를 어떻게 보냅니까? 휴일이나 주일이 되면 고속도로는 연일 정체 현상을 일으킵니다. 왜 그렇게 많은 사람들이 쏟아져 나오는지 차안에서 몇시간을 소비하면서도 마냥 휴일을 즐기기 위해서 어디론가 달려가고 있습니다. 그러나 여러분! 그들이 달려가고 있는 그 길이 어떤 길입니까? 멸망의 길입니다. 그들이 달려가고 있는 길은 훗날 하나님앞에서 심판받게 될 심판의 길입니다.
길은 여러가지가 있습니다. 만약에 한쪽길은 10차선으로된 아스팔트길이고 또 다른 한쪽은 울퉁불퉁한 산길이라고 합시다. 이 둘중 좋은 길은 어떤 길입니까? 당연히 10차선 아스팔트길이라고 대답하시겠지요? 아닙니다. 그 길이 좋은 길인지 아닌지는 그 목적지가 어디냐에 따라 달라집니다.
10차선 아스팔트길을 신나게 달리다 그 끝이 낭떠러지면 그 길은 좋은 길이 아닙니다. 그 길은 죽음의 길입니다. 파멸의 길입니다. 그러나 울퉁불퉁한 산길일찌라도 그 목적지가 화려한 궁전이면 그 길은 좋은 길입니다. 여러분! 예수믿으면서 살면 당장은 손해 보는 길인것 같습니다. 울퉁불퉁 산길일 수도 있습니다. 그렇다고 여러분의 길이 나쁜길입니까? 여러분의 길이 손해보는 길입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여러분의 삶을 제재하고, 여러분에게 요구하는 것이 많아서 불편하다고 여겨지십니까? 그렇다면 10차선 대로로 달려보시기 바랍니다. 한동안은 신나게 달릴 것입니다. 그침없이 뻥뚫린 대로를 활기차게 달릴 것입니다. 그러다가 결국은 낭떠러지로 추락하고 말것입니다.
오늘날 많은 그리스도인의 관심이 현재의 삶에 있습니다. 10차선 대로를 달리는 사람을 부러워합니다. 남들처럼 넓은 아파트에 살고 싶어서 안달입니다. 남들처럼 좀더 좋은 자동차를 타고 싶어서 애를 씁니다. 남들처럼 주말이면 근사한 곳으로 아이들을 데리고 나들이 하고 싶어합니다. 내집을 위해서라면 봄 가울로 가구도 바꾸고, 분위기도 새롭게 단장하지만 우리영혼의 집을 위해서는 별로 관심을 갖지 않는 것이 사실입니다.
제가 어렸을 때 저희집이 상당히 부유했습니다. 그래서 남들이 없었던 가구나 가전제품들이 많이 있었습니다. 제가 기억나는 것은 어렸을 때 냉장고가 저희집에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 냉장고를 가지고 왔을 때 위치를 어디다 두느냐가 문제였습니다. 그런데 그 냉장고는 곧 안방으로 들어갔습니다. 일종의 과시용이었습니다. 손님들이 집에 오면 이집에 냉장고가 있구나 하는 것을 금방알아차립니다.
그러다가 세월이 흘렀습니다. 처음 쓰던 냉장고를 바꾸어야 할 때가 되었고 이미 그때는 냉장고를 가진 집이 상당이 늘어났습니다. 그때는 냉장고를 바꾸면서 마루에 두었습니다. 이것은 일종의 과시용과 실용성의 중간을 택한 것입니다. 그런데 오늘날은 어떻습니까? 냉장고를 안방에 두거나 마루에 두는 사람은 없습니다. 모두 부엌에 두고 씁니다. 무엇을 말합니까? 우리가 육체적으로 만족을 얻고자 하는 것은 한때 다른 사람들에게 뻐겨보는 것에 지나지 않습니다. 그것이 우리들에게 만족을 가져다 주지 않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이런것을 얻기 위해 얼마나 많이 싸우고 인생을 허비하지 않습니까?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하나님의 날이 임하기를 바라보고 간절히 사모하는 자는 거룩한 행실과 경건함을 소유해야 합니다. \'거룩\'이란 \'분리\'를 뜻하고 \'단절\'을 뜻합니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들을 이방인중에 불러내시고 그들을 분리시키셨습니다. 그래서 이스라엘 백성들을 가리켜 \'거룩하다\'고 했습니다. 마찬가지로 그리스도인들도 원래는 하나님이 없는 세상에 거했는데 하나님께서 불러내신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님만을 위해 따로 불러 세우신 사람들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세상과 분리된 삶을 살아야 합니다. 거룩하고 경건한 삶을 살아야 합니다. 관심이 세상으로 향할 것이 아니라 하늘을 향해야 합니다.
여러분!
우리가 그리스도의 심판대앞에 서는 것은 참으로 두렵고 심각한 사건입니다. 그 때 우리가 이 세상에서 어떻게 살았는지 연말에 연말 정산하듯이 낱낱이 우리의 행위에 대해 정산을 하게 될 것입니다. 만일 우리가 하늘을 소망하면서 거룩하고 경건한 삶을 살았다면 그날에 부끄러울 것도 두려울 것도 없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렇지 못하면 그날에 부끄러운 정도가 아니라 하나님의 무서운 책망이 나를 치게 될 것입니다.
두번째는 잃어버려진자들을 향해 구원하는 삶을 살도록 요구하십니다.(15-16절)
하나님께서는 세상을 심판하시고 세상의 모든 것을 일순간에 불살라 버리실 수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지극히 자비하시며 우리에게 오래 참으시는 분이십니다. 우리중 어느 누구도 멸망치 않고 모두 회개에 이르기를 원하십니다.
베드로 사도는 형제 바울도 이 사실을 지적했다고 했습니다. 무식하고 굳세지 못한 자들은 바울의 가르침을 곡해했습니다. 그들은 바울의 가르침에 대해 \'우리가 은혜로 구원받기 때문에 우리가 어떻게 사느냐 하는 것은 아무런 가치가 없다\'고 말했습니다. 또 어떤이들은 바울이 교회안에서 유대인과 이방인이 평등하며 그리스도안에서 자유하다고 가르쳤기 때문에 률법에 위배된다고 말했습니다.
그러나 베드로 사도는 맹목적으로 성경을 곡해하는 자들에게 그들은 \'스스로 멸망에 이르게 될 것\'이라고 말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오늘날에도 이와같은 거짓선생들이 점점 많아지고 있습니다. 그들은 성경을 잘못가르치며 궁극적으로는 많은 사람들을 멸망의 길로 인도하려합니다. 이러한 때 우리가 해야할 일을 그들을 그리스도의 품으로 데려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이들이 하나님의 품으로 돌아오기를 바라시면서 오래 참으시고 계십니다. 그러나 우리는 알 수 없습니다. 하나님의 오래 참으심이 언제까지 계속될 지 아무도 알지 못합니다.
어느 순간에 천사장의 나팔소리와 함께 이 땅에 강림하실지 모릅니다. 어쩌면 우리가 내일해야지 하며 미루는 그 순간에 구름을 타고 오실는지 모릅니다. 지금이 잃어버린자들을 구원해야할 때입니다. 그들을 찾아나서야 할 시기입니다.
오늘 여러분은 어떻습니까? 여러분은 잃어버려진자들을 찾고 있습니까? 조금만 주위를 돌아보아도 우리가 관심을 갖고 기도하며 주께로 인도해야할 사람들이 많이 있습니다. 우리 주님은 목자의 심정으로 길 잃어버린 방황하는 영혼들을 찾고 계십니다.
지난 월요일 새벽에 차운행을 하는데 술취한 사람이 길 한복판에서 이리비틀 저리비틀하면서 걷고 있었습니다. 저 멀리서 보니 벌써 술취한 사람이라는 것을 한눈에 알 수 있었습니다. 저는 미리 조심을 하면서 운전을 했습니다. 그런데 아니나 다를까? 이 사람이 비틀비틀하더니 차가 지나가는 쪽으로 갑자기 몸이 확 쏠렸습니다. 제가 미리 방어운전을 하지 않았더라면 그 사람은 영낙없이 차에 치었을 것입니다.
여러분!
우리주위에 이렇게 방황하는 영혼들이 있습니다. 언제 지나가는 차를 향해 자신의 몸을 던질지 모르는 수 많은 영혼들이 있습니다. 이들이 갈 곳이라곤 한 곳 밖에 없습니다. 그들이 회개하고 자신의 삶을 청산하지 않는 한 그들은 영원한 형벌이 기다리고 있는 지옥으로 가게 될 것입니다. 그사람이 여러분의 아내일수도 있습니다. 그 사람이 여러분의 남편일수도 있고, 여러분의 자녀일수도 있습니다. 그리고 여러분의 형제일수도 있습니다. 그렇다면 여러분은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세번째는 그리스도를 아는 지식에서 자라갈 것을 말씀합니다.(17-18절)
본문 17절을 보면 \'삼가라\'는 말이 나옵니다. 이 말은 \'계속해서 자신을 경계하라\'는 의미를 지니고 있습니다. 지금 베드로의 편지를 읽고 있는자들은 진리를 잘 알고 있는자들입니다. 그러나 그들의 지식만으로 충분한 보호가 될 수 없다고 베드로는 말합니다. 즉 \'선줄로 생각했다가 넘어질까 조심하라\'는 경고였습니다.
우리가 굳센데서 떨어지지 않는 방법이 무엇입니까? 영적으로 자라는 것입니다. 영적으로 자라되 지속적으로 자라야 합니다. 그리고 이것은 그리스도를 아는 지식에서 자랄 때에만 가능합니다.
어린아이의 특징이 무엇입니까? 어린아이는 감정의 변화가 심합니다. 금방 웃다가 울기도 합니다. 조금전까지만 해도 잘 지냈는데 뒤돌아서서 보면 발로 차고, 얼굴을 할키고 싸웁니다. 성도들도 마찬가지입니다. 아직 성숙되지 못한 사람은 잘 싸웁니다. 쉽게 감정이 노출되고, 자기의 감정이 타인의 감정보다 더 중요합니다.
자기는 항상 옳고 남들은 다 틀렸습니다. 왜 이러한 생각을 하게 됩니까? 그리스도를 아는 지식에서 자라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그리스도를 아는 지식이란 신앙의 연륜과는 상관이 없습니다. 내가 아무리 오랫동안 신앙생활했어도 그리스도를 아는 지식과는 상관이 없는 삶을 살 수 있습니다.
그리고 여기서 말하는 그리스도를 아는 지식이란 세상의 학문을 습득하는 것과 같은 그런 지식을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들이 성경을 아는 것과 성경의 중심주제인 예수그리스도를 아는 것은 전혀 다른 것입니다.
제가 2장을 설교하면서 자유주의 신학자를 많이 비판했습니다. 사실 학문으로 따지면 보수주의 신학자들의 학문은 학문이라고 말하기 부끄러울 정도로 진부한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들에게 요구되는 것은 학문이 아닙니다. 성경적인 지식만도 아닙니다. 그리스도! 그 분을 아는 것입니다. 그 분을 알아가는 데 자라야 합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여러분은 주님을 얼마나 알고 계십니까? 그 분에 대해 알기 위해 얼마나 노력을 하고 계십니까?
영적성장의 결과가 무엇입니까? 그것은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죄와 음행에서 우리자신을 구분시킬 때 우리는 우리주님을 영화롭게합니다. 또한 우리가 그리스도를 아는 지식에서 자라갈 때 주님을 닮아가는 삶을 살 수 있습니다.
오늘 이 편지를 쓰는 베드로는 자신의 삶을 통해서 심지어는 죽음의 순간에도 하나님을 영화롭게 했습니다. 지금 우리 주위에는 배고자들과 이단들이 바쁘게 움직이고 있습니다. 그들은 아직도 성숙되지 못한 많은 그리스도인들을 미혹하고 있습니다. 우리들은 그들을 보호해야 하며 또 내 자신도 그리스도를 아는 지식에서 자라가야 합니다.
말씀을 맺겠습니다.
여러분은 주님의 날을 사모하고 계십니까? 그 날이 속히 임하기를 바라고 계십니까? 그렇다면 여러분의 삶이 경건해야 합니다. 잃어버려진 자들을 찾기위해 분주해야 합니다. 그리고 그리스도를 아는 지식에서 자라야 합니다. 이 말씀이 오늘 여러분의 심령속에 파묻히고 주님이 오시는 날까지 이 말씀에 순종하는 생애를 사시길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