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베소서 제5강
에베소서 강해설교 5
시력이 얼마인가?(엡 1:15-19)
눈이 밝은 것도 복이다.
어릴 적에는 어른들이 안경을 쓴 것이 멋있게 보여서, 그것을 쓰고 싶었는데,
막상 나이가 들고 시력이 나빠져서 늘 안경을 쓰다 보니 여간 불편한 것이 아니다.
땀나면 흘러 내리고, 물에 들어 갈 때에는 벗어야 한다.
손수건과 티슈로 자주 닦았더니 안경알에 상처가 많이 생겨서 뿌옇게 되어
마치 안개가 낀 것처럼 불편하기도 했다.
우리가 가진 지식의 약 80%가 눈을 통해서 들어온다고 하니,
시각 장애자들의 고충이 얼마나 큰지를 새삼 깨닫게 된다.
우리에게는 세 종류의 눈이 있다.
사물을 보는 육체의 눈이 있고,
마음인 눈은 도덕심과 지식과 수치심과 관련되어 있다.
그래서 글을 모르는 사람을 \"까막눈\"이라고 부르고,
글을 깨우치면 \"눈을 떴다\"고도 말한다.
또 하나의 눈은 영혼의 눈이다.
이것은 믿음을 통해서 하나님을 알아 보는 눈이다.
육체의 눈이 어두우면 안경이나 콘텍트 렌즈로 시력을 교정할 수 있고,
눈이 밝아지면, 책을 읽거나 운전할 때에 편하다.
마음의 눈이 어두우면 공부하고 훈련하여 실력과 도덕심을 함양하기도 한다.
마음의 눈이 밝아지면, 교양있는 사람이 되고, 지성인 대우를 받을 수 있다.
그리고 영혼의 눈은 성령을 통해서 하나님의 말씀이 충분히 공급될 때에 밝아진다.
영혼의 눈이 밝아지면, 성경을 더 깊이 깨닫게 되고,
하나님을 더 가까이 알게 되므로, 더욱 주님을 닮고 경건한 믿음의 사람이 된다.
마귀는 우리의 눈을 어둡게 하여 성경도 모르고,
이 마지막 시대의 흐름도 눈치채지 못하게 하지만,
우리 영혼의 눈이 더 밝아지기만 하면,
하나님의 뜻을 더 알게 되고, 보다 견고한 신앙의 뿌리를 내리게 될 것이다.
바울은 감옥에서 에베소서를 써서
주 안에서 진실한 두기고라는 형제에게 부탁하여 편지를 에베소로 보내면서,
그곳에 있는 성도들의 영의 눈이 더욱 밝아지기를 위하여 기도하고 있다.
그는 자신을 위한 기도가 아니라 성도들을 위한 기도에 더욱 마음을 쓰는데,
우리가 영적인 시력이 밝아질 때에 과연 무엇을 볼 수 있는지
사도 바울의 기도의 내용을 통해서 생각해 보자.
\"이를 인하여 주 예수 안에서 너희 믿음과 모든 성도를 향한 사랑을 나도 듣고, 너희를
인하여 감사하기를 마지 아니하고 내가 기도할 때에 너희를 말하노라\"(1:15-16).
사도 바울이 이렇게 간절하게 기도를 드리게 된 동기는 무엇인가?
그는 자기가 시작한 에베소 교회 성도들이
믿음을 잘 지키며 깊이 사랑한다는 말을 전해 듣고, 마음에 감사가 끓어오른 것이다.
그들은 극심한 우상의 도시에 살며, 점쟁이와 마술사와 익숙하던 사람들이었다.
그런데 바울을 통해서 복음을 듣고,
참 하나님이 어떤 분이며, 구주가 누구신지 알게 됨으로 인생이 온통 바뀐 사람들이다.
그들은 예수를 믿고 받아 들인 후에
우상 숭배가 생활화된 가족과 이웃들에게 비난과 놀림을 당하면서도, 믿음을 잘 지켰고,
또한 성도들 사이에 깊은 사랑의 사귐을 나누고 있었던 것이다.
그것이 그들로 하여금 어려운 상황에서 잘 견디고 버티게 하는 힘이었다.
바울은 이런 소식을 들으면서 하나님께 깊이 감사하면서 기도하게 된 것이다.
믿음과 사랑의 소문이 나는 것은 좋은 일이다.
돈이 많은 부자 교회라거나, 박사들이 많이 나오는 교회,
또는 시설이 좋은 교회라는 소문이 난 교회가 있지만,
성도들의 믿음이 순전하고 깊다는 소문이 난다면 더욱 좋다.
다투고 갈등하고 싸우는 단체와 교회가 적지 않은데,
성도들이 뜨겁게 사랑하고 서로 섬긴다는 소문이 나는 것은 참으로 좋은 것이다.
그리스도인이 개인적으로도 좋은 믿음의 소문이 날 수 있으면 얼마나 좋겠는가?
그러나 혹 교회에 골치 덩어리라거나, 문제가 많은 사람, 말이 많은 사람,
목사를 괴롭히는 사람 또는 인간성이 고약한 사람이라는 등의
나쁜 소문이 나는 것을 보기도 한다.
다른 어떤 것보다도 믿음이 좋다는 소문이 나기를 바란다.
신앙 때문에 환난을 많이 당하던 데살로니가 교회는 좋은 소문이 많이 난 교회였다.
바울은 그것을 데살로니가로 보내는 편지 내용에서 잘 언급하고 있다.
\"너희의 믿음의 역사와 사랑의 수고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소망의 인내를
우리 하나님 아버지 앞에서 쉬지 않고 기억함이니\"(살전 1:3).
\"...하나님을 향하는 너희 믿음의 소문이 각처에 퍼지므로 우리는 아무 말도 할 것이
없노라\"(살전 1:8). 참 좋은 일이다!
그리고 서로 자기를 내세우기 위해서 남을 모함하고, 다투고 서로 남을 짓밟는 세상에서,
서로 섬기며 사랑한다는 소문이 나는 것이 얼마나 좋은가!
에베소 교인들은 믿음의 떨어지지 않게 하려고 서로 세워 주고 격려하며,
믿음과 사랑의 사귐을 나눴다.
그들은 교회를 사랑하였고, 또 성도를 사랑하였다.
서로 헐뜯지 않았으며, 빌립보 교회의 경우처럼 다툼이나 허영으로 일하지 않았다.
사랑은 잘못을 자백하는 이들을 덮어 주며, 또한 따끔한 책망도 마다하지 않는다.
이런 좋은 소식을 전해 들은 바울은 기도하려고 무릎을 꿇을 때마다 감사가 나왔다.
이것이 전도자가 누리는 놀라운 기쁨이다.
자기가 복음을 전한 사람들이 믿음 가운데 살며, 사랑 가운데 섬긴다는 말을 듣는 것보다
더 흥분되고 신나는 일이 또 있겠는가?
전도자들은 가끔 그와 비슷한 경험을 하면서 사역의 의미와 보람을 느낀다.
어느 곳에 설교하러 갔다가 낯선 어느 젊은이를 만났는데, 크게 반색을 하는 것이다.
여러 해 전에 한국 군대에 있을 때에 나에게 전도 훈련을 받았는데,
그때 신앙이 깊이 박혀서 결국 미국 신학교에 유학까지 오게 되었다는 내용이다.
나 자신은 다 잊었지만, 그 전도자는 그것이 계기가 되어 헌신하여 사는 것이다.
그 당시에는 몰랐지만, 세월이 지난 후에 들은 그런 간증은 참으로 복된 간증이다.
그런데 어떤 사람을 생각하면, 마음이 무겁고 안타깝다.
왜 그렇게 오래 동안 이웃과 갈등하며 불편한 관계로 지내는지?
왜 아직도 교회 주변만 맴돌며, 좀 더 깊은 신앙의 자리로 들어가지 않는가?
우리에게 복음을 전해 준 이들에게 기쁨이 되는 삶을 살자.
우리를 생각할 때마다 감사한 마음이 생기는 삶을 살자.
우리가 복음을 전한 사람들을 늘 기억하며 기도하자.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하나님, 영광의 아버지께서 지혜와 계시의 정신을 너희에게
주사 하나님을 알게 하시고(1:17).
이제 사도 바울은 에베소에 있는 성도들을 위하여 드리는 기도의 내용을 적고 있다.
바울은 그들이 건강하고 안전하고 넉넉하게 사는 것보다
더 중요한 기도의 제목을 갖고 있었다.
에베소에 있는 성도들의 사업이 잘 되거나, 자녀들이 출세하기를 위해서 기도하지 않았다.
그의 기도 제목은 참으로 고상하고 분명했다.
하나님께서 그들에게 지혜와 계시의 정신을 주시기를 구하는 것이다.
거룩한 지혜와 하나님의 비밀을 아는 계시의 정신을 달라는 기도이다.
솔로몬이 기도할 때에 재물이나 장수를 구하지 않고 지혜를 구했더니,
하나님께서 그 지혜와 함께 다른 좋은 것들도 주셨던 것처럼,
지혜와 영적인 분별력을 갖기만 하면, 참으로 가치있는 삶을 살 수 있다.
이 지혜는 세상의 지혜와 다르다.
여기서 \"지혜\"라는 단어는 헬라어의 \"소피아\"(Sophia)인데,
하나님에 대하여 더 깊이 안다는 의미이다.
사도 야고보는 세상에 속한 지혜에 대하여 잘 설명하고 있다.
\"...이러한 지혜는 위로부터 내려온 것이 아니요 세상적이요 정욕적이요 마귀적이니,
시기와 다툼이 있는 곳에는 요란과 모든 악한 일이 있음이니라\"(약 5:15-16).
즉 지혜가 있기는 있는데, 하나님과는 상관이 없는 것이며,
결국 자기 자랑이나 주장을 내세우는 것이라는 뜻이다.
그리고 여기서 \"계시의 정신\"이라는 것은
하나님에 관하여 더욱 넓고 깊게 알아 가는 것을 말한다.
마치 의사가 새로 개발되는 의료 기술을 계속해서 익혀야 하고,
과학자가 계속해서 새로워지는 과학 기술에 대하여 더욱 익혀야 하듯이,
하나님의 사람들은 하나님을 향하여 날이 갈 수록 더욱 넓고 깊게 알아 가야 한다.
지혜와 계시의 정신을 어느 번역에서는 \"지혜의 성령과 계시의 성령\"으로 말하고 있다.
성령이 충만하면 지혜가 생기고 계시의 정신을 갖게 되어 비밀을 볼 수 있다는 것이다.
하나님은 아는 것은 학교 공부로 불가능하다.
하나님의 영에 속한 비밀은 머리를 짜내고 연구해서 되는 것이 아니다.
무턱대고 열심을 낸다고 하나님의 비밀을 아는 것도 아니다.
하나님께서 성령을 통하여 거룩한 지혜를 주셔야 하나님을 바로 알게 된다.
그래서 구약의 선지자인 호세아는
\"그러므로 우리가 여호와를 알자. 힘써 여호와를 알자. 그의 나오심은 새벽빛같이 일정하니,
비와 같이 땅을 적시는 늦은 비와 같이 우리에게 임하시리라...\"(6:3)고 말했다.
그는 자기 백성이 하나님을 아는 지식이 없어서 망한다고 안타깝게 부르짖었다.
실제로 경제력이나 군사력 때문에 망하는 것보다,
하나님을 모르기에 부강한 나라도 부패하고 음란하며 손가락질을 받는 나라가 된다.
하나님으로부터 지혜와 계시의 정신을 얻도록 구하자.
우리 자신이 이런 지혜와 계시의 정신이 더 생기도록 구하자.
우리 자녀가 이런 은혜를 받도록 구하자.
우리의 아내와 남편들이 이런 지혜와 계시의 성령으로 충만하도록 구하자.
그리고 우리의 교회가 이런 성령의 이끌림을 받도록 구하라.
\"너희 마음 눈을 밝히사 그의 부르심의 소망이 무엇이며 성도 안에서 그 기업의 영광의
풍성이 무엇이며 그의 힘의 강력으로 역사하심을 따라 믿는 우리에게 베푸신 능력의 지
극히 크심이 어떠한 것을 너희로 알게 하시기를 구하노라\"(1:18-19).
두 맹인 부부가 오래 동안 서로 음성만 들으며 살다가 개안 수술을 받아 눈을 뜨게 되었다.
그들이 처음 얼굴을 보면서 한 인사말이 재미있다.
\"처음 뵙겠습니다.\"
\"예. 그 동안 말씀은 많이 들었습니다.\"
눈을 떠서 처음 보았으니 말은 맞다.
마음에도 눈이 있다.
그리고 그 눈은 무슨 이유로든지 어둡고 더러워질 수 있다.
사회에 대한 원망과 부유한 자들에 대한 적개심으로 눈이 어두워졌던 자들이
무서운 강도짓을 하며 살인을 자행하던 것을 기억하는가?
바울은 성도들의 마음 눈이 밝아지기를 위해서 계속해서 기도하고 있다.
이것은 바로 영혼의 눈이 밝아지기를 바라는 것이다.
이것은 지식이 많아진다거나, 상식이 느는 종류의 마음눈이 아니라,
하나님을 더욱 깊이 알아 가는 영혼의 눈을 의미하는 것이다.
바울은 에베소 교회의 교인수가 늘거나 재산이 불어나는 것에는 관심이 없고,
다만 그들의 마음 눈이 밝아져서 하나님의 더 깊은 것들을 깨닫게 되기를 바란 것이다.
마음 눈이 밝아지면 무엇을 알게 되는가?
적어도 세 가지가 언급되어 있다.
첫째는 하나님의 부르심의 소망을 알게 된다.
주님은 우리를 불러 하나님의 자녀로 삼으셨다.
이 부르심은 지난 날에 이뤄진 것이지만,
현재도 주님은 계속해서 하나님 나라에 합당한 삶을 살게 하신다
\"이는 너희를 부르사 자기 나라와 영광에 이르게 하시는 하나님께
합당히 행하게 하려 함이니라\"(살전 2:12).
그런데 이 부르심에는 소망이 담겨 있다.
그의 부르심에는 꿈과 미래와 영원한 것들이 있다는 것이다.
그리고 성경에서 말하는 이 소망은 결코 허망된 꿈이나 망상이 아니라,
소망의 대상이 있고, 또 좋은 것을 염두에 두고 가지는 소망을 말한다.
무엇인가를 기대하되, 두려움 가운데 떨며 기다리는 것이 아니라,
흥분과 기대를 가지고 어서 속히 되기를 바라는 소망이다.
얼마 전에 증권 투자가 한 사람이 자기가 거래하는 회사에 대하여 소망이 사라지자
직원과 고객을 향하여 총을 난사하여 무고한 사람들이 여러 명 목숨을 잃었다.
인생에 희망이 없다고 생각하는 사람 만큼 비참하고 처절한 사람이 없다.
우리는 절망의 시대에 산다.
정치인이나 교육자나 군사에 기대를 거는 이들이 거의 없다.
심지어 교회에도 별로 소망이 없고 또 기대를 걸지도 않는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우리를 부르시고 소망을 주신 것이다.
즉 우리를 주 안에서 불러 그의 자녀로 삼으실 때에
그와 함께 삶의 소망을 우리에게 주셨다.
그래서 의인은 죽을 때에도 소망이 있다고 솔로몬은 고백했다(잠 14:23).
\"나 여호와가 말하노라. 너희를 향한 나의 생각은 내가 아나니 재앙이 아니라
곧 평안이요 저희 장래에 소망을 주려 하는 생각이라\"(렘 29:11).
하나님은 비록 우리가 현실적으로는 고난을 당하는 경우에도
재앙을 당하여 좌절하고 절망하는 것에서 그치지 않고
결국 그런 것을 통해서 평안과 장래에 소망을 주신다는 약속이다.
그런데 이런 소망은 마음의 눈이 크게 떠져야 비로소 알 수 있다는 사실이다.
돈을 잘 버는 사람의 눈에는 주변에 돈이 될 만한 것들이 널려 있다고 한다.
일을 잘하는 사람의 눈에는 일거리가 잘 보인다.
마찬가지로 성령으로 마음의 눈이 밝아지면
전도할 대상자가 보이고, 섬길 일들이 보이며, 감사할 일들이 보인다.
마음 눈이 밝아지면, 고민하는 사람들의 진정한 필요가 무엇인지 알게 되고,
영혼의 갈급함이나 소리없는 아우성을 듣는 귀도 열린다.
이와 같이 마음의 눈이 밝아지면 하나님의 소망의 부르심을 더욱 밝히 알게 된다.
둘째는 성도에게 약속하신 상속이 얼마나 영광스런 것인지를 알게 된다.
하나님은 그의 자녀된 우리들에게 무엇을 상속하시겠다고 약속하셨는가?
가장 궁극적으로는 천국을 허락하셨지만,
이 땅에 사는 동안에도 성도들에게는 수고하고 무거운 짐을 내려 놓고 쉴 수 있는 안식과,
세상이 줄 수 없고 알 수도 없는 평안과, 기도에 응답하시며,
우리를 위하여 최선의 것을 준비해 두시고 계시다는 사실이다.
자기가 받을 몫이 얼마나 큰지를 아는 사람은 오늘의 어려움을 잘 이길 수 있다.
콜라 공장에 견학을 갔을 때에, 맘껏 마시고 가라고 하여 실컷 마신 적이 있다.
장난감이 선더미처럼 쌓인 회사의 사장은 작은 인형 하나에 인색하지 않다.
마찬가지로 하나님이 약속하신 거대한 상속을 보장받은 성도는
사소한 일에 흥분하거나, 시시한 일에 열을 올리지 않는다.
그런 것보다 비교가 안될 만큼 훨씬 크고 많은 것들이 약속되어 있기 때문이다.
세상 사람들은 가치가 너무 적은 일에 시간과 정력과 재물을 낭비하는 경향이 있다.
다른 사람보다 먼저 승진하고, 다른 사람보다 먼저 집을 사고,
다른 사람보다 더 편하게 산다고 해서, 그것이 우리의 삶을 투자할 만큼 가치있는 것인가?
셋째는 우리에게 주신 능력이 얼마나 큰 지를 알게 된다.
예수믿는 사람들이 종종 나약한 사람들로 비춰 질 때가 있다.
일마다 때마다 하나님을 찾고, 많은 경우에 다른 사람들에게 양보하며,
참아 주고, 견디는 것을 보면서, 그렇게 잘못 생각하는 이들이 있다.
그러나 로마의 박해를 피해서 땅굴 속에 살며 신앙을 지키던 카타콤의 성도들을 보고,
비겁한 자들이라고 말하는 사람이 있는가?
소련이 공산화될 때에 산에 숨어 살던 그리스도인들을 누가 겁쟁이라고 하는가?
공산당의 압력을 받으면서도 굴과 지하에서 모여 찬송하며 믿음을 지키는
북한의 성도들을 누가 나약한 사람들이라고 말하는가?
오히려 그들은 신앙을 위해서 위험을 무릎쓰고 생명의 위협을 받으면서도
잘 버틴 믿음의 사람들이 아닌가?
죽음 앞에서도 찬송하는 그런 힘이 어디서 나오는가?
복음을 전하다가 군중의 돌에 맞아 죽어가던 스데반 집사가
아무도 원망하거나 저주하지 않고 오히려 \"하나님, 저들을 용서해 주십시오.
저들이 하는 일을 몰라서 그런 것입니다\"라고 말하며
천사와 같이 밝은 얼굴로 죽었는데, 그가 과연 나약한 자라는 말인가?
1777년 겨울, 전쟁이 심할 때에 죠지 워싱턴 장군은 하나님께 무릎을 꿇고 기도했다.
1787년에 연방정부 헌법 회의에서 격렬한 논쟁이 있을 때에
벤자민 프랭클린은 휴회를 선포하고 기도회를 모였고, 결국 미국 헌법이 탄생했다.
신앙과 기도의 정치인인 아브라함 링컨도 아들이 병들었을 때나 전쟁 중에도
항상 무릎을 꿇고 하나님께 기도한 인물이다.
이들을 누가 약한 자라고 하는가? 이들이야 말로 강한 자들이 아닌가?
가장 강하신 하나님을 의지하는 이들이기 때문이다.
나의 영적인 시력은 얼마인가? 마음의 눈이 더 밝아져서 이 하나님의 깊은 은밀하고도
놀라운 비밀들을 더 발견하여, 보다 활기차고 신나는 신앙 생활을 하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