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베소서 제6강
에베소서 강해설교 6
가장 높은 자리(엡 1:20-23)
우리 사회는 자리 다툼이 대단히 많고 심하다.
예를 들어서 세무 공무원들 중에는 자리에 따라서 수입이 엄청나게 차이가 난다고 한다.
물론 뇌물과 선심 공세에 따른 별로 떳떳하지 않은 수입이기는 해도 그렇다.
어떤 공무원은 건축 관계 자리에서 엄청난 액수의 뇌물을 챙기다가 지금 감옥에 있다.
군대에서는 진급 문제가 대단히 심각한 일이다.
일반 사병도 그렇지만 장교들 사이에서 진급과 자리 다툼은 치열하다.
영관급에서 장성급으로 진급하면 수 십 가지가 달라진다고 한다.
예를 들어서 운전 기사가 딸린 자동차를 제공해 준다거나,
특혜가 많아지는 것 등 대령과 준장의 차이가 아주 크다고 한다.
경쟁이 심한 일반 회사는 더 말할 나위도 없다.
이것은 완전히 자리를 놓고 전쟁을 벌이는 것처럼 살벌하다.
가까운 동료로 사귀다가도 자리 문제가 생기면 남남처럼 대하기도 한다.
왜냐하면 그 자리에 따라서 월급이 다르고, 대우가 다르기 때문이다.
예수님은 원래 하나님의 독생자이신데, 가장 높고 영광스런 자리를 포기하시고,
아주 낮고 낮은 모습으로 이 세상에 오셨다.
\"그는 근본 하나님의 본체시나 하나님과 동등됨을 취할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시고,
오히려 자기를 비어 종의 형체를 가져 사람들과 같이 되었고,
사람의 모양으로 나타나셨으매 자기를 낮추시고 죽기까지 복종하셨으니
곧 십자가에 죽으심이라\"(빌 21:6-8).
그런데 이렇게 자신을 낮출 대로 낮추신 예수님을 하나님은 놀라운 방법으로 높이셨다.
\"이러므로 하나님이 그를 지극히 높여 모든 이름 위에 뛰어난 이름을 주사
하늘에 있는 자들과 땅에 있는 자들과 땅 아래 있는 자들로
모든 무릎을 예수의 이름에 꿇게 하시고,
모든 입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주라 시인하여
하나님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셨느니라(빌 2:9-11).
예수님은 가장 낮은 자리에 오셔서, 바로 거기 있던 나를 건지셨다.
그것은 베들레헴의 마굿간보다도 더 누추하고, 어둡고 컴컴한 곳이었다.
그곳은 갈등과 원망과 불평이 가득한 곳이었는데,
거기서 우리를 만나 주시고, 끌어 올리셔서
가장 높은 자리에 함께 앉히신 것이다.
이런 이야기가 있다. 어떤 사람이 길에 가다가 웅덩이에 빠졌다.
마침 그곳을 유명한 철학자가 지나가면서
\"쯧쯧. 어쩌다가 빠졌는가? 생각없이 사니 그렇지.\"라고 하면서 그냥 지나갔다.
한 과학자는 \"거기 그 웅덩이가 있다는 것을 미리 조사하지 않고...\"라고 말하고 지나가고,
한 이름난 종교인은 \"불쌍하구나! 최선을 다해서 살아 나시구료!\"라고 말했다.
그리고 어떤 재벌은 돈을 몇 푼 던져 주면서 \"어떻게 해 보슈!\"라고 했다.
그때 마침 예수님이 지나가시다가 그것을 보고 몸을 엎드려 손을 내밀어 그를 끌어 올렸다.
몸을 낮출 대로 낮추셔서 그 바닥까지 닿도록 하신 것이다.
이것이 바로 복음의 한 모습이다.
이제 가장 영광스런 자리에서 가장 누추한 자리까지 내려 오신 예수님의 생애를 보면서,
우리의 위치를 다시 확인하고, 그의 사랑과 은혜를 다시 생각하자.
\"그 능력이 그리스도 안에서 역사하사 죽은 자들 가운데서 다시 살리시고 하늘에서
자기의 오른편에 앉히사\"(1:20).
하나님의 능력이 그리스도 안에서 역사하여 죽은 자 가운데서 사흘 만에 부활하게 하셨다.
예수님이 부활하신 것은 하나님의 능력으로 된 것이다.
그것은 세상을 창조하신 능력이다.
없는 것을 있게 하시는 창조주의 능력인 것이다.
그 동일한 하나님의 능력이 우리 안에서 활동하면 참으로 놀라운 일들이 벌어진다.
하나님의 능력으로 질병을 이길 수 있고,
하나님의 능력으로 죽은 영혼이 다시 살아난다.
그 능력으로 마음과 가정과 사회의 어둠이 물러나고,
의심이 떠나고 확신이 생기며, 절망이 물러나고 소망이 생긴다.
그 능력으로 죄가 처리되며, 지옥으로 향하던 자가 천국으로 돌아서게 된다.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죽은 자들이 하나님의 아들의 음성을 들을 때가 오나니
곧 이 때라. 듣는 자는 살아나리라\"(요 5:25).
정말 죽은지 나흘이나 되어 썩은 냄새가 나던 나사로라는 사람이
\"나사로야, 나와라!\"라고 하시는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살아 나왔다.
12년간이나 혈루병으로 죽음의 문턱을 넘나들던 어느 여인은
\"네 믿음이 너를 구원했다\"는 말씀으로 완치가 확인되었고,
전신 마비로 38년간 거적을 깔고 누워 살던 어느 병자는
\"네가 낫고자 하느냐?\"라는 말씀에 따라 그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그런데 바로 그 주님이 우리도 이렇게 살리셔서 완전히 새로운 삶을 살게 하지 않으셨는가?
그리고 우리의 신분이 하나님의 친 자녀가 되어, 천국을 기대하며 살게 되지 않았는가?
나와는 전혀 상관이 없어 보이던 천국을 감히 소망하며 살게 되지 않았는가?
십자가에서 그렇게 죽으신 예수님을 하나님 아버지는 다시 살리셔서
승천하신 후에 하나님 우편에 앉게 하셨다.
앉으신다는 것은 모든 것을 마치고 완성하신 후에 오는 모습이다.
주님은 우리의 구원을 위한 모든 것을 완성하시고 드디어 거기 앉으셨다.
그리고 우리는 그 예수님과 함께 하나님의 후사가 되었다는 것을 기억하라.
\"모든 정사와 권세와 능력과 주관하는 자와 이 세상 뿐 아니라 오는 세상에 일컫는 모든
이름 위에 뛰어나게 하시고\"(1:21).
우상을 많이 섬기던 당시 에베소의 사람들은 천사를 대단한 존재로 여기며 섬겼다.
여러 종류의 천사 숭배 사상을 가졌던 것이다.
그런데 사도 바울은 그 모든 종류의 천사나 영적인 존재보다도 예수님이 훨씬 더 높으시며,
더 큰 권능을 갖고 계시다고 선포하는 것이다.
여기 열거한 정사와 권세와 능력이라는 표현은 천사들을 비유적으로 말한 것으로 이해되며,
천사들이 아무리 힘이 있는 존재라고 해도,
예수님은 그 위에 뛰어나시다고 분명하게 말한다.
옛날 애굽에서 이스라엘 백성이 탈출해 나올 때에 열 가지 재앙이 쏟아진 적이 있다.
그 재앙들의 내용을 보면 모두 애굽 사람들이 섬기던 우상들에 대한 도전이었다.
즉 나일강의 신, 개구리의 신, 가축의 신, 태양신 등이 여호와에게 패배한 것이다.
한국인들의 다수는 죽은 조상의 혼령이 우리의 삶에 많은 영향을 끼친다고 믿는다.
그래서 죽은 넋을 위하여 위령제를 드리고, 제사를 하며, 미신을 많이 믿는다.
근간에 점쟁이들이 더욱 기세를 얻는 것은, 바른 신앙이 힘을 잃고 있는 현상이기도 하다.
우리 안에 계신 하나님은 세상에 있는 어떤 세력보다도 강하시다.
그에게 피하는 자가 안식을 얻으며, 그에게 달려가는 자가 안전하게 된다.
예수님은 결코 상상이나 이론이나 망상 속에 계시는 분이 아니다.
우리의 삶의 현장에 오늘 그리고 지금도 함께 계시는 살아계신 하나님이시다.
그래서 힘들 때에 하소연하고, 슬플 때에 마음을 털어 놓을 수 있는 분도 우리 주님이시다.
또한 기쁠 때에 주님을 찬송하고, 두려울 때에 그에게 달려 간다.
그래서 히브리서를 쓴 필자는 \"때를 따라 돕는 은혜를 얻기 위하셔 은혜의 보좌 앞에
담대히 나아간다\"고 말한다(히 4:16).
즉 도움이 필요한 때에 언제나 달려 갈 수 있는 주님이시라는 것이다.
그리고 예수님은 현실적인 이 세상에서 뿐 아니라,
앞으로 재림하여 이뤄질 새로운 세상에서도 그의 이름이 가장 뛰어나신 분이라는 것이다.
잠시 후에는 안개처럼 사라져 버릴 이 세상에서만 강하신 분이 아니라,
영원한 나라에서도 가장 뛰어나시고 가장 의지할 수 있는 분이시다.
우리는 바로 이런 주 예수님을 믿고 사랑하고 의지한다.
우상을 섬기다가 스스로 멸망하고, 천사를 숭배하다가 허망한 인생을 사는 자들이 있지만,
우리 예수님의 권능과 위대한 이름을 의지하는 자들은 든든히 설 수 있다.
권세자의 이름을 의지하다가 인생이 망가진 이들이 있고,
허망한 종교을 의지하다가 영원한 생명을 얻지 못한 이들이 많지만,
주 예수의 이름을 의지하고 산 자 가운데 실패자를 찾아 보라.
그의 이름이 얼마나 크고 위력이 있는지 아는가?
\"예수\"라는 이름 속에는 너무나 귀하고 아름다운 비밀이 담겨져 있다.
그 이름은 구약 시대에 살던 이들은 들어본 적이 없고,
마굿간에 태어나시면서 부르게 된 이름이다.
그 이름의 뜻은 \"백성을 자기 죄에서 건져 내실 분\"이라는 뜻이다.
그 이름으로 베드로는 평생 불구자를 일으켰고,
그 이름으로 바울은 더러운 귀신을 쫓아내었으며,
그 이름으로 예수의 제자들은 영적인 싸움에서 승리하였다.
전도자와 선교사들은 그 이름을 위하여 목숨을 걸었고,
우리 그 이름의 능력을 의지하여 하나님께 기도한다.
그래서 그 이름은 세상의 모든 이름 위에 뛰어난 이름인 것이다.
예수의 이름을 더 의지하라. 그 이름으로 능력있는 삶을 살 수 있다.
그 이름 속에 비밀이 숨겨져 있다.
\"또 만물을 그 발 아래 복종하게 하시고 그를 만물 위에 교회의 머리로 주셨느니라\"
(1:22).
이제 예수님의 권세가 여기 더욱 분명하게 언급되어 있다.
하나님은 만물을 예수 그리스도의 발 아래 복종하게 하셨다.
예수님이 모든 것 위에 뛰어나시다는 것이다.
이것은 예수님 자신이 이미 언급하신 적이 있다.
\"예수께서 나아와 일러 가라사대 하늘과 땅의 모든 권세를 내게 주셨으니...\"(마 28:18).
그리고 그 권세를 의지하여 모든 족속을 예수의 제자로 삼으라고 말씀하신 것이다.
복음을 전하고 사람들을 예수의 제자로 삼을 때에 그 이름을 의지하라는 말씀이다.
그런데 실제로 온 세상이 예수님의 발 아래 복종하고 있는가?
오히려 많은 사람들이 예수를 거역하고, 반대하며 불순종하지 않는가?
그래서 우리 가운데 싸움과 분쟁과 아픔이 그치지 않는 것이다.
가장 높은 권세를 무시하고 살기 때문에, 영혼이 매마르고 불안하고 쉼이 없는 것이다.
그에게 복종하기만 하면, 놀라운 평안을 누릴 것인데...
그에게 무릎을 꿇기만 하면, 죄의식에서 해방될 것인데...
그에게 나의 삶을 드리기만 하면, 마음에 노래와 입술에 감사를 주실 텐데...
이 예수님이 만물 위에 교회의 머리가 되셨다.
그리고 교회는 그의 몸이 된 것이다.
몸이 되었다는 것은 하나가 되었다는 의미이다.
그리고 예수님이 그 몸의 머리라고 하신 것은
몸을 다스리고 인도하는 주님이 되신 것을 의미한다.
우리 개인의 삶에서도 예수님이 머리가 되시면 통일이 이뤄진다.
우리의 가정에서도 예수님이 머리가 되시면, 일치와 한 마음이 이뤄진다.
교회도 마찬가지이다. 예수님이 주인이 되시면, 하나됨과 사귐이 견고해 진다.
인간은 아담의 범죄 이후에 모든 것이 갈라지고 분리되고 흩어졌다.
무엇보다도 죄 때문에 하나님에게서 분리되었고,
아담과 하와 사이에도 간격이 생기면서
그 결과로 사람들 사이에 분렬이 일어났다.
가인과 아벨 형제 사이에 갈등이 생겨서 가인이 아벨을 쳐 죽인 것과,
사람들이 높은 바벨탑을 쌓다가 흩어진 것도 교만이라는 무서운 죄 때문이다.
그 후로 나라와 민족이 서로 으르렁거리며 싸우게 되었고,
나아가서 아름다운 피조물인 자연에게도 공해와 파괴로 고통을 주게 되었다.
이 모든 것이 예수님을 머리로 모시게 될 때에
부부 사이가 화목되고, 부모와 자식들이 하나가 되며,
나아가서는 자기 자신과의 화목도 회복된다는 사실이다.
예수님을 머리로 삼을 때에 모든 것에 질서가 잡히고 연합이 이뤄진다.
\"교회는 그의 몸이니 만물 안에서 만물을 충만케 하시는 자의 충만이니라\"(1:23).
여기서 말하는 교회는 물론 예배당 건물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주 예수를 믿는 백성을 의미하는 것이다.
교회는 그리스도의 몸이다.
그러므로 교회가 한 몸이기 때문에 나뉘면 상하고 죽는다.
교회가 아픔을 당하거나 손상을 입는 것은 예수님이 고통을 당하시는 것이다.
예배당 건물은 전쟁 중에 파괴되고, 오래 되어서 낡아질 수 있다.
그러나 하나님의 백성인 교회가 허물어질 수는 없다.
하나님은 이 교회를 통해서 하나님은 만물을 충만하게 하신다.
약한 점이 많고, 종종 비판의 대상이 되기도 하는 이 교회를 통해서
주님은 온 세상에 그의 능력과 복음으로 충만하게 하시는 뜻을 갖고 계시다.
그리고 예수님은 교회와 만물을 다스리시는 주님이실 뿐 아니라
우리 각 사람의 삶도 주관하시는 주님이시다.
사람들은 세상에 속한 여러 가지로 충만하려고 애쓴다.
집 안에 보석이 가득하고, 머리에 지식이 가득하고, 통장에 현금이 가득해도,
마음과 영혼은 텅 비어 공허한 삶을 사는 이들이 많다.
실제로 우리를 충족시켜 주시는 분을 떠나 살고 있는 까닭이다.
그러므로 예수님으로 가득한 삶이 가장 고상하고 가치있는 삶이다.
어느 자리가 가장 높은 자리인가?
그리고 그 자리를 차지하기 위해서 나의 삶을 온통 바쳐도 좋을 만한 것인가? 예수님 때문에 영원한 소망이 생겼는가?
이 세상에서 돈이 없는 것은 서러운 일이고, 공부를 많이 못한 것도 서글픈 일이며,
권세없고 배경없는 것도 슬픈 일이지만, 꿈과 비젼이 없는 것이 가장 슬픈 일이다.
돈이 없어도 비젼이 있으면, 열심히 일하고 수고하여 돈을 벌 수 있다.
학력이 없어도 비젼이 있으면, 열심히 배울 수 있고,
배경이나 건강이 없어도 미래에 대한 꿈과 비젼이 있으면 힘있게 살 수 있다.
우선 자신을 향하여 꿈을 가지라. 먼 훗날의 자신을 보는 비젼을 가지라.
자녀를 향한 꿈과 비젼도 가지라. 그리고 교회를 향하여 꿈과 비젼을 가지라.
앞으로 10년 20년 이후에 아름답게 변할 우리 교회의 모습을 꿈꾸라.
어느 유리 공예가의 작품 제작 과정을 보았다.
불덩이같은 유리를 가지고 이리 저리 돌리며 여기 저기 자르고 붙인다.
무엇을 만드는 것인지 알 수가 없는데,
나중에 그것들을 다 붙여 놓으니 아름다운 한 쌍의 젊은이가 춤추는 모습이 되었다.
제작자는 불구덩이 속에서 녹고 있는 유리 덩어리 속에서
이미 아름다운 완성품을 보고 있었던 것이다.
지금 보이는 것만 가지고 불만을 갖거나 투정하거나 실망하지 말라.
우리 인생의 제작자이신 하나님의 눈에는 한 아름다운 인생이 그려져 있다.
비젼을 갖는다는 것은 바로 그 하나님의 마음을 아는 것이다.
놀라운 것은 예수께서 우리를 이미 하나님의 오른편에 앉혀 주셨다는 것이다.
이것은 우리의 막연한 꿈이나 희망사항이 아니라,
이미 예약된 좌석이며, 그것은 주 안에서 보장된 자리이다.
그것은 장차 반드시 되어질 약속된 사실이다.
예수님은 그리스도인이 \"높아지기를 원하면 스스로 낮아지라\"고 말씀하시고,
예수님 자신이 스스로 낮아지셔서 제자들의 발을 씻기시기도 하셨다.
그래서 하나님의 영광을 버리고 종의 모습으로 이 땅에 오신 것이다.
그렇지 않았으면 어떻게 나같은 자에게 손이 닿을 수 있었겠는가?
이것이 하나님의 방법이요, 세상과 전혀 다른 방법이다.
선교사들에 관한 일화가 많다.
어느 노 선교사가 평생을 수고하고 약한 몸으로 은퇴하여 귀국하게 되었다.
그가 타고 온 비행기에는 마침 어느 유명한 정치인이 함께 타고 있었다.
공항에 도착하자 그 정치인을 환영하는 피켓과 꽃다발이 가득했는데,
은퇴하는 그 선교사를 마중나온 사람은 고향의 늙은 친구들 몇 사람 뿐이었다.
그는 섭섭한 마음으로 이렇게 혼자 중얼거렸다.
\"하나님. 저는 하나님의 명령에 따라
평생 어려운 곳에서 복음을 전하며 외로운 선교사로 살았습니다.
저 정치인은 무슨 일을 했는지 모르지만 저렇게 환영객이 많은데,
저는 환영하는 사람도 없고, 이렇게 마음이 쓸쓸한 까닭이 무엇입니까?\"
그때 마음에 들려오는 주님의 음성을 들을 수 있었다.
\"사랑하는 나의 아들아, 나도 이해한다. 내가 이 세상에 올 때에도 그렇게 쓸쓸했단다.
그렇지만 네가 천국에 오는 날 가장 큰 환영 행사가 벌어질 것이다. 조금만 기다려라!\"
지금은 외롭고 쓸쓸하지만, 그에게는 너무도 황홀하고 아름다운 날이 가디라고 있는 것이다.
그는 다시 한번 소리없이 감사의 눈물을 닦으며 공항을 나왔다.
지금 어떤 자리를 차지하려고 노력하는가? 좀 더 편한 자리인가,
좀 더 돈이 많이 생기는 자리인가? 아니면 좀 더 권세가 높은 자리인가?
모두 잠간 후에는 지나가 버릴 현실에만 속한 것들인가?
가장 낮아지셨던 예수님의 본을 따라서, 자기를 낮추고, 자신을 비워서
주님으로만 만족하자. 주 예수님으로만 충족하도록 하자.
이것이 가장 낮아 보이지만 가장 높은 자리임을 잊지 말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