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베소서 제7강
에베소서 강해설교 7
어둠에서 빛으로(엡 2:1-7)
얼마 전 터키에서 강진이 나서 수 만 명의 사상자가 났다.
그때 흙더미에 깔려서 여러 날을 버티다거 구조된 사람들이 있었다.
구조대원들은 그들을 구해 낼 때 그들이 햇빛을 보기 전에 눈을 가려 주었다.
여러 날 어둠 속에 있어서 갑자기 햇빛을 보면 시력을 잃을 위험이 있기 때문이다.
탄광 매몰지에서도 굴에 갇혔던 사람들이 밖으로 나올 때에는 눈을 가린다.
캘리포니아에서는 태양이 강렬해서 색이 짙은 선글래스를 써야 하고,
개기 일식 때에도 태양을 육안으로 직접 보다가는 눈을 상하게 한다.
그 만큼 태양빛이 강하기 때문이다.
사실 인간은 빛보다 어둠에 더 익숙하다.
그래서 성경에서도 빛이 왔지만 사람들은 자기 행위가 악하므로 들통이 날까 봐
빛보다 어둠을 더 사랑했다고 말한다(요 3:19).
불이 발견되기 전에는 사람들이 어둠에 아주 익숙했으며,
불이 발견된 후에는 밤에도 밝기 때문에 삶의 형태가 크게 변했다.
뉴욕에서 약 30-40분간 온 시내가 정전 사고가 났을 때에
얼마나 많은 약탈과 강도와 살인 사건이 발생했는지 우리는 들었다.
아무도 안 본다고 생각하고 잠시 동안에 그렇게 악한 본성대로 날뛴 것이다.
우리의 마음에도 어둠과 빛이 있다.
창조주 하나님이 만들어 놓으신 양심이 그 방이다.
하나님은 우리를 원래 밝은 빛 가운데 만드셨지만,
아담의 범죄 이후로 우리 속에는 어둠이 자리를 잡고 앉게 되었다.
하나님이 만드신 방은 원래 밝은 빛으로 가득찬 방이었다.
그런데 범죄하면서 문이 닫히고 커텐이 내려져서 어둠으로 차게 되었다.
그리고 그 속에서 각종 범죄가 생기게 된 것이다.
사람들은 거기서 하나님의 눈을 피할 수 있는 줄로 생각하여
숨어서 죄를 짓고, 거기서 슬픔과 고통과 죽음이 판치게 되었다.
요즘에는 대낮만 아니라 이른 아침과 심지어 밤에도 검은 선글래스를 쓰는 것을 본다.
무엇인가 자신을 노출시키지 않으려는 숨겨진 마음을 보는 것 같다.
사람들은 빛 가운데 있을 때에는 그래도 예절을 지키고 행동을 조심하지만,
어둠 속에 들어가면 품위가 사라지고, 본성과 죄성이 드러나는 경우가 많다.
그래서 음큼한 젊은이들이 컴컴한 영화관을 자주 찾는 것이다.
남자들은 멋진 양복으로 자신을 가리고, 가운으로 자신을 숨기기도 한다.
그런데 신사 양복을 입었을 때에는 점잖을 떨다가도
군복이나 예비군복을 입게 되면 행동이 마구잡이가 되는 경우를 흔히 보았다.
반면에 청바지에 티샤츠를 입고 있을 때에는 행동이 별로 곱지 않던 여성들도,
고운 한복을 차려 입으면 평소와 달리 행동을 조심하는 것도 보았다.
자신을 무엇으로 가리거나 아무도 안본다고 생각하는 어둠에 있을 때에 속 사람이 드러난다.
그래서 언제나 어둠 속에 죄가 있고, 거기에 죽음이 따른다.
사나운 짐승들은 밝은 낮보다 어둔 밤을 좋아하고,
강도나 도둑은 밤이 그들에게 친숙한 활동 무대가 되는 것을 보라.
이제 우리가 어떤 어둠 속에 있다가 어떻게 빛으로 옮겨졌는지 생각해 보자.
\"너희의 허물과 죄로 죽었던 너희를 살리셨도다\"(2:1).
죽었던 사람을 살리셨다면, 정말 에베소에 있는 사람들이 죽은 시체였는가?
그렇다. 생명의 주를 만나기 전까지는 하나님이 보시기에 그들은 모두 죽은 자들이다.
그러면 왜 어떻게 죽었는가? 질병인가, 사고인가, 아니면 살인인가?
성경은 그들이 허물과 죄로 죽었다고 말한다.
여기서 \"죄\"라고 말한 단어는 헬라어의 \"하마르티아\"(Hamartia)인데,
그 뜻은 무슨 악한 짓을 했다는 것이 아니라 단순히 \"과녁을 빗나간다\"는 뜻이다.
즉 하나님이 원하시고 기대하시는 표준에 미치지 못한 인간의 상태가 바로 죄라는 것이다.
그러므로 다른 사람과 비교하여 상당히 도덕적인 사람이라도
하나님의 기준에 비춰 볼 때에는 결국 다 죄인으로 드러나게 된다.
그리고 \"허물\"이라고 하는 단어는 \"파랍토마\"(Paraptoma)라는 것으로서,
\"길에서 벗어나다\" 또는 \"미끄러지다\"라는 의미이다.
즉 하나님이 정하신 길에서 미끄러져서 벗어난 상태가 허물인 것이다.
비탈길을 달리던 트럭이 미끄러지면서 개울창에 빠져 버린 것같은 상태이다.
이렇게 에베소에 있는 사람들이 죄로 인해서 영적으로 죽은 상태였는데,
바울이 전하는 생명의 복음을 듣고 새 사람으로 살아난 것이다.
죽은 종교를 믿다가 생명되신 그리스도를 받아 들인 것이다.
영적인 생명이 없는 사람은 영적인 어둠에 산다.
즉 빛되신 하나님을 바로 알기 전에는 그 양심과 영혼에 빛이 없다.
그래서 자기가 옳다고 주장하는 길도 하나님이 보시기에는 잘못되어 있고,
흥분되고 신나는 즐거움의 끝에도 슬픔이 오게 된다.
\"모든 사람이 죄를 범하였으매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하더니\"(롬 3:23).
이것은 생명과 빛에 이르지 못하는 것이며, 하나님의 기준에 미치지 못하는 것이다.
멋지게 생긴 손전등이라도 그 안에 배터리가 없으면 아무 소용이 없고,
아무리 고급스런 자동차라도 거기에 개솔린이 없으면 움직이지 못하는 고철이다.
마찬가지로 아무리 외면적으로 훌륭해도 그 안에 하나님이 계시지 않으면 죽은 자이다.
그렇게 하나님을 떠난 인간의 실제적인 모습은 어떠한가?
\"그 때에 너희가 그 가운데서 행하여 이 세상 풍속을 좇고 공중의 권세잡은 자를
따랐으니 곧 지금 불순종의 아들들 가운데서 역사하는 영이라. 전에는 우리도 다 그
가운데서 우리 육체의 욕심을 따라 지내며 육체와 마음의 원하는 것을 하여 다른 이들과
같이 본질상 진노의 자녀이었더니\"(2:2-3).
첫째로, 이 세상 풍속을 좇으며 산다.
하나님을 모르면 따라 가야 할 모범이 분명치 않다.
청소년들은 연예인과 가수와 운동선수를 따라 가고,
성인들은 자기 주장과 고집을 주관이라고 말하면서 달려 간다.
남들이 그렇게 하니 나도 그렇게 하고,
남들이 그렇게 사니 나도 그렇게 산다.
남들이 부정직하게 돈을 벌어도 별 탈이 없으니 나도 그렇게 하고,
남들이 하나님없이도 잘 사는 것 같으니 나도 그렇게 한다.
돈이 최고라는 세상 풍속을 따라서 돈에 매여 살고,
쾌락 추구가 멋지다고 하니 생각없이 그렇게 살며,
세상이 흘러 가는 대로 살게 된다.
아무리 큰 물고기라도 죽은 것은 허연 배를 위로 보이고 물에 떠내려 가지만,
산 물고기는 작은 것이라도 물을 거스려 헤엄쳐 올라간다.
세상의 거친 물길을 당할 힘이 없으니, 그저 섞이고 어울려서 갈 뿐이다.
이 세상이 가는 풍속 밖에는 따를 것이 없는 사람이 바로 영적으로 죽은 자이다.
반드시 가야 할 길이 있고, 반드시 알아야 할 진리가 있지만,
마음의 눈이 어두워져서 전혀 그것을 볼 수 없으니, 그저 밀려 가는 것이다.
혹시 이렇게 생각도 없고, 진지하게 찾지도 않으면서 그저 물결대로 사는가?
둘째로, 공중에 권세잡은 자를 따르며 산다.
이것은 불순종의 자녀들 속에서 활동하는 마귀의 세력을 의미한다.
당시 사람들은 이 대기가 온통 수 많은 좋고 나쁜 영들로 가득 차 있다고 믿었다.
그런데 여기서 의미하는 것은 그 가운데서 주장하는 사단의 세력을 말하는 것이다.
과거 방송이나 신문 잡지도 없고, 전기 보급이 적어서 밤이 칠흑같이 어둘 때에
사람들은 붉은 얼굴에 뿔이 나고, 뾰족한 꼬리가 달리고, 손에 창을 들고 있는
괴상한 괴물을 사단이라고 상상했다.
근간에는 Vampire라고 하여 두 개의 송곳니가 뾰족한 흡혈귀를 마귀로 그리며,
드랴큘라같이 관 속에 사는 음산하고 무서운 모습으로 마귀를 등장시키고 있다.
그러나 성경은 전혀 다르게 표현하고 있다.
오히려 우리에게 아주 친숙한 광명의 천사 모습으로 나타난다는 것이다(고후 11:14).
외면적으로는 전혀 위협이 될 것 같지 않아서 친근하게 우리에게 다가 선다.
만화 영화 중에 나오는 \"친근한 귀신\"(Friendly Ghost)은
우리에게 전혀 위협이 되지 않는 존재로 다가온다.
한국에서는 이런 귀신 이야기가 판을 치고 있으며,
심지어 어린이들의 학용품에도 귀신 그림이 아주 많다.
마귀도 웃는 얼굴로 접근하기 때문에 우리가 그의 진짜 신분을 알 수가 없어 쉽게 속는다.
생각해 보라. 만일 뱀의 모습으로 나타난 사단이 지금처럼 징그럽고 무서웠다면
하와가 그렇게 가깝게 대화했겠는가?
아마 대단히 부드럽고 친절한 말로 접근했을 것이다.
거절하기 어렵도록 다정하고 꿀이 흐르는 말로 접근했을 것이다.
실제로 지금도 사단은 많은 사람들의 마음을 장악하고 있다.
정치인들의 마음을 장악하여, 국민의 행복보다는 정권 쟁탈을 위해서 서로 싸우게 하고,
연예인들의 마음을 장악하여, 인기만 된다면 아무리 음란한 것도 서슴치 않게 하고,
경제인들의 마음을 장악하여, 돈벌이만 되면 부정과 불의를 마구 행한다.
사단은 청소년들의 마음을 장악하여, 음란과 폭력과 방종에 빠지게 하고,
부부들의 마음을 장악하여, 쉽게 별거하거나 이혼하게 하며,
또한 노인들의 마음도 장악하여, 여생을 허망하게 살도록 유도하기도 한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어서 마음에 성령이 계시지 않는 사람은
공중에 권세잡은 이 영적인 존재를 따라 산다는 것이 성경의 가르침이다.
그리고 하나님의 힘이 아니면 그 영향력에서 벗어나지 못한다.
셋째로, 육체의 욕심을 따라 산다.
이것은 하나님에 의해서 금지되고 잘못된 것을 의도적으로 좇아 가는 습성을 말한다.
하지 말라고 하면 더 하고 싶은 것이 우리의 부패한 속성이 아닌가?
먹을 것이 많았던 에덴 동산에서 따먹지 말라고 하신 과일을 따 먹은 것이나,
광야에서 끊임없는 기적으로 항상 넉넉하게 먹이고 마시게 해 주셨지만,
여전히 불평하고 원망하며 범죄한 이스라엘 백성의 모습에서 우리의 모습을 본다.
이것이 바로 육체의 욕심을 따라 사는 것이다.
몰래 먹는 떡이 더 맛있고, 금지된 영화를 몰래 보는 것이 더 신난다.
잘 하다가도 부모가 와서 더 잘 하라고 하면 하던 것도 중단하는 아이가 있고,
가지 말라면 더 가고 싶고, 하지 말라면 더 하고 싶은 것이 우리의 부패된 마음이다.
나의 마음을 무엇이 다스리는가?
양심은 길을 막는데, 그래도 그것을 밀치고 쾌락과 흥분을 위해서 그 소리를 거절하는가?
어느 트럭 운전자가 험한 고갯길을 운전하고 있었다.
그곳은 비록 길이 험하지만 이미 여러 번 지나간 곳이어서 두렵지 않았다.
그런데 그 앞에 한번도 본 적이 없는 \"STOP. DEAD END\" 표지가 붙어 있는 것이다.
지금 시간을 다투면서 중요한 것을 운반하고 있는데 왠 막다른 길이라니?
그는 누군가 경쟁 업자들이 자기를 골탕먹이려는 것으로 생각하고 그대로 통과했다.
시간을 놓치면 사업에 막대한 손해를 가져 올 것이기 때문이었다.
그런데 얼마를 가다 보니 바리케이크가 쳐 있고 또 \"스톱\" 싸인이 붙어 있는 것이다.
\"이건 확실히 어느 놈의 수작이구나!\" 그대로 통과했다.
바로 거기서 비탈길을 돌아서는데 갑자가 그 앞에 길이 끊어진 곳이 있는 것이 아닌가?
미쳐 브레이크를 밟을 겨를도 없이 그는 트럭과 함께 절벽으로 굴러 떨어지고 말았다.
양심이 막을 때에나 하나님의 말씀이 강력하게 도전할 때에 그것을 밀치고 가면 위험하다.
브레이크를 밟고 정신을 차리고 바른 길을 찾아야 한다.
하나님의 인도와 통치를 받지 않는 마음은 이렇게 자기 욕심을 따라 살 수 밖에 없다.
넷째로, 육체와 마음에 원하는 대로 산다.
가장 대표적인 것이 음란의 문제이다.
교양과 신앙 때문에 많이 절제하지만, 우리 속에는 본성적인 음란이 숨어 있다.
성령의 다스림을 받지 않으면, 우리의 가라앉은 본성이 언제 끓어오를지 모른다.
그것을 악용하는 것이 오늘 날의 영화와 도색 잡지이다.
누군가가 계속해서 보고 애용하기 때문에 그런 영화 사업이 망하지 않는 것이다.
구약 시대의 우상 숭배는 성적인 문란과 흔히 혼합되었다.
이스라엘에도 농업의 신인 바알은 아스다롯과 성행위를 통해서 농사에 복을 준다고 믿었다.
그것을 본따서 우상 숭배의 제사에는 언제나 음란한 행위가 중심이 된 것이다.
그래서 선지자 사무엘은 부흥을 외칠 때에 \"바알과 아스다롯을 떠나라\"고 부르짖었다.
그러나 여기서 말하는 육체와 마음에 원하는 것은 그 외에도 여러 가지이다.
재물 문제에 약한 사람은 항상 돈 문제로 범죄하고,
명예에 약한 사람은 인기와 명예 때문에 신앙이 퇴색된다.
불같은 성격을 가진 사람은 그것이 종종 약점이 되어 자주 실수하여 넘어지고,
한편 말이 급한 사람은 혀 때문에 다시 주워 담지 못할 실수를 저지르기도 한다.
그래서 결국 하나님을 떠난 자들은 하나님의 진노의 대상이라는 사실이다.
하나님은 원래 피조물된 인간들에게 평안과 풍성한 삶을 약속하셨지만,
불순종한 인간은 진노의 대상으로 전락하고 말았다.
마치 특혜와 유익이 많은 대통령의 아들이 권한을 남용하여 죄수가 된 것과 같고,
남보다 훨씬 많이 가진 재벌이 욕심을 부리다가 하루 아침에 다 잃어버린 것과 같다.
영광스런 하나님의 자녀로 살 수 있는 자들이, 진노의 대상이 되었다.
그런데 어떻게 그 어둠 가운데서 벗어나서 기이한 빛에 들어가게 되었는가?
\"긍휼에 풍성하신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신 그 큰 사랑을 인하여 허물로 죽은 우리를
그리스도와 함께 살리셨고 (너희가 은혜로 구원을 얻은 것이라), 또 함께 일으키사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함께 하늘에 앉히시니\"(2:4-6).
그것은 나의 공로나 업적이나 선행이나 하나님의 율법을 잘 지킨 결과가 아니다.
그것은 긍휼에 풍성하신 하나님의 사랑 덕분이다.
여기서는 우리의 믿음도 언급하고 있지 않다.
즉 믿음이 강해서 구원받은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그래서 성경은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저를 믿는 자마다 멸망치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니라\"(요 3:16)고 말씀하며,
\"우리를 구원하시되 우리의 행한 바 의로운 행위로 말미암지 하이하고 오직 그의 긍휼하심을
좇아 중생의 씻음과 성령의 새롭게 하심으로 하셨나니\"(딛 3:5)라고 말씀한다.
그 사랑이 우리를 어떻게 바꿔 놓으셨는가? 세 가지가 언급되어 있다.
첫째는,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셨다. 겨자씨보다도 작은 믿음을 보시고,
우리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려 주셨다.
허물로 죄 때문에 죽은 자를 새 사람으로 만드신 것이다.
이제는 죄 가운데 사는 옛 사람이 아니고, 그리스도와 함께 사는 의로운 자가 되었다.
둘째는, 살리신 후에 일으켜 세우셨다. 이제 냄새나고 더러운 곳에서 일어나게 하셨다.
전신 마비로 누워 살던 어느 병자가 \"일어나라!\"는 예수님의 음성을 듣고 벌떡 일어났 듯이 ,
주의 음성을 듣고 그 죄와 허물과 수치와 불안한 자리에서 일어서게 하셨다.
자아의 울타리와 이기주의에서 일어나게 되었다.
셋째는, 살리시고 일으키신 후에 하나님의 우편에 예수님과 함께 앉아 주셨다.
우리는 아직 이 세상에 속해 살고 있는데, 이미 우리의 자리가 마련된 것이다.
그것은 영광스런 하나님의 우편이다.
이제 우리의 자리는 엄청나게 달라진 것이다.
\"이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우리에게 자비하심으로써 그 은혜의 지극히 풍성함을 오는
여러 세대에 나타내려 하심이니라\"(2:7).
우리를 이렇게 죽음과 어둠의 자리에서 살리신 이유가 여기 분명하게 언급되어 있다.
그것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사랑하시는 그 사랑 속에 나타난 은혜가
얼마나 크고 풍성한 것인지를 우리 자녀와 오는 세대에 나타내려는 것이다.
즉 예수의 사랑을 이 시대에 사는 사람들 뿐 아니라
우리의 자녀들에게도 자자 손손 전해 주게 하시는 것이다.
이것은 우리의 책임이다.
우리 세대에 아무리 부흥을 경험하고, 성령의 은사를 맛보고, 구원의 감격을 기뻐해도,
그것이 우리 자녀와 다음 세대에 이어지지 않으면,
그 물줄기는 끊어지고 말라 버리고 만다.
이 명령에 순종하지 않는 많은 서양 교회들이 그래서 이미 박물관 역할로 전락된 것이다.
우리는 변해야 한다. 그런데 스스로 변화할 수 없으니 변화를 받아야 한다.
변한 것처럼 보이는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실제로 변화를 경험해야 한다.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이다.
이전에 엉켜 살던 어둠은 지나갔고, 이제는 빛 가운데 사는 새로운 삶을 누려야 한다.
과거라는 망령에 붙잡혀서 제 자리 걸음만 하고 있으면 뒤쳐지고 결국 무너진다.
우물 안에 사는 개구리는 그 좁은 우물이 그의 온 세계이다.
그러나 거기서 뛰어 나와 보라.
얼마나 넓고 할 일 않은 세상이 있는가?
우리 세대에서 복음을 전해 들을 사람들이 얼마나 많은가?
하나님의 은혜가 얼마나 풍성한지를 전해 줘야 할 사람들이 얼마나 많은가?
우리는 하나님의 도우심도 없이 변해 보려고 애쓴다.
\"호박에 줄을 긋는다고 수박되냐?\"는 우스꽝스런 말이 있듯이,
겉사람보다는 우리의 속 사람이 변해야 한다.
10대와 20대의 연련층의 여자들이 메이크 업하는 것은 화장이라고 하고,
30대와 40대의 여성들이 하는 것은 분장이라고 하며,
50대와 60대의 여성들이 하는 것은 변장이라고 한단다.
좀 심한 말이지만 70-80대가 하는 것은 환장이라고 한단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우리를 속속들이 새롭게 하실 수 있다.
그것이 전정한 의미의 변화이다.
저주를 감사로, 한숨을 찬송으로, 싸움을 화평으로, 그리고 독불장군을 협력자로 바꾸신다.
그 뿐인가?
진노에서 용서로, 어둠에서 빛으로, 정죄에서 구원으로,
그리고 영원한 형벌에서 영원한 생명으로 변화시켜 주신다.
이제는 사도 베드로의 말대로 우리를 어둠 가운데서 불러 내어
그의 기이한 빛에 들어가게 하신 자의 덕을 더 힘차게 선전하는 예수의 사람들이 되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