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베소서 제9강
에베소서 강해설교 9
그 때와 이제(엡 2:11-18)
우리에게는 과거라는 것이 있다. 그리고 그것을 추억이라고 부른다.
추억에는 항상 기억하고 싶은 좋은 것도 있지만, 잊고 싶은 아프고 슬픈 추억도 있다.
어른들은 흔히 \"내가 젊을 때에는...\"이라고 하면서 자랑한다.
어렸을 때에는 공부도 잘하고 인기도 많았다는 말들을 많이 하는데,
아무도 본 적이 없으니 무슨 말을 해도 그냥 믿을 수 밖에 없다.
청소년들은 산 날보다는 살 날이 많으므로 앞을 생각하는 미래를 많이 말하지만,
살 날이 많이 남지 않은 노인들은 대개 지난 날의 추억을 많이 돌아 본다.
우리는 과거를 돌아보는 것도 필요하고, 미래를 바라보는 것도 필요하다.
그리고 비록 연세는 높아도 앞날을 꿈꾸며 사는 사람은 젊게 사는 것이다.
그러나 보다 적극적인 삶은 오늘과 내일에 대한 희망과 기대가 있는 삶이다.
특히 그리스도인의 삶은 과거를 교훈삼아서 오늘과 미래를 살아야 한다.
과거의 잘못을 거울삼아 오늘을 바로 살며 또한 내일 더 멋지게 살려는 꿈을 가지는 것이다.
우리 그리스도인 대부분에게는 \"그 때와 이제\"라는 감격스런 신앙 고백이 있다.
지난 날 죄와 갈등과 의심과 불안 가운데 살던 때가 있었는가 하면,
주 예수를 만날 때의 그 감격과 그 후의 놀라운 변화 그리고 감사할 일들에 관한
아름다운 고백을 하게 된다.
만일 그리스도를 만난 경험이나 하나님을 통한 생각과 삶의 변화가 전혀 없어서
아무에게도 자기의 신앙을 분명하게 고백할 것이 없다면
다시 한번 자신의 신앙을 심각하게 점검해 보아야 할 것이다.
처음 가는 길에 확신이 없으면 지도를 자주 들여다 보며 재확인하는 것과 같다.
신앙의 확인은 자주 해도 상관이 없다. 더욱 감격스럽고 안전할 뿐이다.
이제 오늘의 성경 말씀을 통해서 우리의 과거와 오늘을 비교해 본다.
성경은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즉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마음에 받아 들여
바른 신앙을 갖게 되면 새로운 피조물이라고 말한다. 즉 변했다는 것이다.
하나님의 진노를 받고 심판을 당해야 하는 비참한 신분에서,
이제는 살아있는 동안에 천국 향취를 맡으며,
이 세상을 떠날 때에도 소망이 있는 완전히 새 사람이 되었다.
그래서 이제는 생각하는 것과 말하는 것 그리고 행동하는 것이 날이 갈 수록 변하는 것이다.
즉 세상의 풍조와 유행만 따르다가 이제는 삶의 모범되시는 예수님을 따르게 된 것이다.
먼저 우리가 그리스도를 통해서 하나님의 자녀라는 특권을 받기 전의 우리 모습을 보라.
\"그러므로 생각하라. 너희는 그 때에 육체로 이방인이요 손으로 육체에 행한 할례당이라
칭하는 자들에게 무할례당이라 칭함을 받는 자들이라. 그 때에 너희는 그리스도 밖에 있
었고 이스라엘 밖의 사람이라, 약속의 언약들에 대하여 외인이요 세상에서 소망이 없고
하나님도 없는 자이더니\"(2:11-12).
이 구절에서 우리는 바른 신앙을 갖기 전에 경험한 일곱 가지의 어둠을 보게 된다.
그것은 비극일 수도 있으며, 결국 정죄 가운데 사는 자의 모습인 것이다.
첫째는 우리가 육체적으로 볼 때 이방인이다.
유대인들 외에는 모든 사람이 이방인이며, 비록 예수를 믿는다고 해도,
미국인이나 한국인이나 이방인으로 사는 것은 마찬가지이다.
그런데 성경이 이방인이라고 말할 때에 그것은 하나님으로부터 멀리 떨어져 있는
소외되고 대우받지 못하는 자들을 의미하는 것이다.
이방인에게는 하나님의 율법이 없고, 여호와 신앙이 없다.
이방인은 하나님의 선택에서 제외된 자들이므로, 나그네요 \"이상한 사람들\"(Strangers)이다.
둘째는 우리가 무할례당이었다는 것이다.
유대인들은 남자 아이가 태어난지 8일 만에 할례를 받게 한다. 포경 수술과 비슷하다.
아이의 성기 끝을 조금 잘라서 피를 내고, 하나님과의 언약의 표시로 삼는 것이다.
그들은 그것이 하나님의 선택된 백성의 표라고 믿었고, 지금도 그렇게 행한다.
그것은 하나님께 대한 순종이요, 하나님께 속한 특별한 자녀임을 나타내는 것이다.
또한 이 할례는 단순한 의식만이 아니라, 하나님의 율법에 대한 철저한 준수를 의미한다.
아주 어릴 적에 받는 할례에서 비롯하여, 이제 한 평생 율법을 지키겠다는 것이다.
사실은 여기서부터 그의 일 평생은 율법에 얽매이게 된다.
그러나 이방인에게는 그런 할례라는 관례가 없다.
그러므로 무할례당이라는 말은 하나님의 법을 모르는 자들이라는 의미를 포함한다.
사실 특히 한국 백성은 불교와 유교와 미신 문화 속에서 살면서 하나님을 몰랐다.
선교사들이 들어오기 전까지는 달과 별과 바위와 고목을 섬기는 사람들이 아주 많았다.
하나님을 알기 전에 우리는 이렇게 하나님의 율법과는 거리가 먼 사람들이었던 것이다.
셋째로, 우리는 그때에 그리스도 밖에 있었다.
그리스도가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시니, 그리스도 밖에 있다는 것은
길을 찾지 못한 것이요, 진리를 모른다는 것이요, 영원한 생명이 없다는 것이다.
그리스도가 빛이시니, 그리스도 밖에 있는 것은 곧 어둠 가운데 있다는 말이다.
예수 그리스도가 목자시니, 그리스도 밖에 있다는 것은 목자없는 양이 되었다는 것이다.
목자없이 뜨거운 뙤약볕 아래에서 물과 풀을 찾아 헤매는 양들을 생각해 보라.
그리스도 밖에 있는 것은 삶의 주인이 아직도 여전히 자기 자신인 것을 말한다.
유일한 구원이신 예수를 떠나 있으니, 죄로부터 구원을 받지 못한 상태이다.
즉 아직 하나님을 바로 알지 못하는 처지에 놓인 것이다.
세상의 피조물의 신비와 양심을 통해서 어렴풋이 하나님을 안다고 하지만,
예수 그리스도를 모르면 하나님께로 바르게 올 수 없기 때문이다.
누구든지 성령으로 거듭나기 전에는 그리스도 밖에 있는 것이다.
비록 기독교인이라도 자청해도 그리스도를 마음에 영접한 적이 없으면 그리스도 밖에 있다.
넷째로, 이스라엘 밖의 사람들이었다.
유대인들은 히브리 사람, 이스라엘 사람 등의 이름을 대단히 명예로운 이름으로 여겼다.
그러므로 이스라엘 나라 밖에 있다는 것은 하나님의 백성이 아니라는 뜻이다.
우리는 이스라엘 백성이 아니다. 미국인이며 한국인이다.
성경에서 의미하는 것은 하나님의 보호와 공급과 사랑을 받는 백성이 아니라는 것이다.
하나님의 백성이 아니면 누구인가? 누구에게 속해 있는가? 무소속인가?
아니면 끝없이 유리 방황하는 갈 곳 없는 무리인가?
성경은 하나님께 속하지 않은 자는 결국 세상에 속한 자요,
공중에 권세잡은 악한 자에게 속해 있다고 말한다.
다섯째로, 약속의 언약들에 대해서는 외인이었다.
성경은 하나님의 약속으로 가득 차 있다.
그의 말씀을 경청하고 순종하는 자에게는 엄청난 복을 약속하시고,
반면에 불순종하고 거역하는 자에게는 무서운 심판과 형벌이 있다고 말씀하셨다.
그래서 하나님을 순종한 자들은 풍성한 삶을 살았고,
그의 말씀을 거역하고 대적한 자들은 재앙과 진노의 대상이 된 것이다.
약속없는 삶을 사는 것 만큼 비참하고 처량한 것이 없다.
멀리 간 부모 또는 남편이 반드시 돌아온다는 약속이 있으면 그래도 소망을 가지고 살지만,
아주 떠난 경우에는 삶이 무너지기 쉽다.
그런 경우에 하나님의 약속의 말씀도 의지하고 않고 산다면, 그것은 절망이다.
여섯째로, 세상에서 소망도 없었다.
그리스도를 믿기 전에는 진정한 의미의 소망이 없다.
우리는 내일 일을 알지 못하는데, 자신이 자기 삶을 붙잡고 있으니 소망이 불투명하다.
왜 자살하는가? 살 소망을 잃었기 때문이다.
어떤 유행가 가수 때문에 투신 자살한 여학생도 아마 살 소망이 사라졌기 때문일 것이다.
그러나 그리스도 안에 있는 자는 죽을 때에도 소망이 있다고 성경이 말한다.
마지막 일곱째로, 하나님도 없는 자들이었다.
하나님은 예전이나 지금이나 변함없이 살아계시다.
그러나 그를 믿지 않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이 죽으신 것과도 같다.
그래서 불신앙의 철학자인 니체는 \"하나님은 죽었다\"고 말했지만,
하나님은 그를 향하여 \"나를 모르는 네가 죽은 것이다\"라고 말씀하신다.
하나님없이 사는 인생은 마치 황량한 벌판에 홀로 버려진 인생과 같아서,
타는 목을 적실 물이 없고, 영혼의 배고픔과 두려움을 해결할 방법이 없다.
그래도 사람들은 자기 힘으로 악착같이 살아 보지만, 결국 남는 것이 무엇인가?
솔로몬이 술회한 그대로 \"헛되고 헛되고 헛되니 모든 것이 헛되도다\"라는 말 뿐이다.
그래서 원래 \"허무주의\"는 하나님을 떠나거나 하나님없이 사는 인생이 만들어 낸 것이다.
이와 같이 하나님의 자녀가 되기 전의 우리의 상태는 겹겹이 정죄받은 상태에 놓여 있었다.
그 상태로 있으면 결국 영원한 심판과 형벌 외에는 소망이 없었던 것이다.
그런데 어떻게 해서 새로운 변화를 얻게 되었는가?
\"이제는 전에 멀리 있던 너희가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그리스도의 피로 가까워졌느니라\"
(2:13).
유대인과 이방인은 원래 서로 상종하지도 않고 멀리 떨어져 있었다.
유대인은 스스로 선택된 백성으로 자처하면서 교만하였고,
이방인들은 하나님과 무관한 채 자기들의 방식대로 살아 갔다.
그런데 여기 놀라운 일이 생겼다. 예수 그리스도의 피로 그들이 가까워진 것이다.
예수께서 십자가에서 죽으실 때에 그것은 온 세상을 위한 죽음이었다.
우선 종교인인 유대인을 위한 것이었고, 또한 이방인을 대표하는 헬라인을 위한 것이었다.
이것은 바로 우리를 위한 죽으심인 것을 밝혀 주는 것이다.
그리스도의 죽음이 사람들 사이에 놓인 계곡에 다리가 되신 것이다.
이 죄라는 깊고 깊은 계곡은 아무리 넓이뛰기를 잘해도 건널 수 없고,
어떤 것으로도 건널 수 없도록 철저하게 막혀져 있다는 것을 깨달아야 한다.
예수님이 유대인과 이방인 사이에 완전하신 다리가 되셨다.
하나님의 손과 우리 인간의 손을 동시에 잡으실 수 있는 분은 사람으로 오신 예수님 뿐이다.
예수님이 사람의 몸을 가지신 하나님이셔서, 그 거대한 죄와 사망의 계곡에 다리가 되셨다.
세상 어느 종교의 창시자가 감히 하나님과 인간 사이에 중보자가 되겠는가?
예수께서 어떻게 유대인과 이방인을 하나로 만드셨는지 성경이 설명해 준다.
서로 원수처럼 지내던 두 부류의 사람들이 어떻게 하나가 될 수 있었는가?
이것은 또한 갈라섰던 부부, 등을 대고 살던 부모와 자녀간에도 예수님이 가장 확실한
다리가 되실 수 있다는 것을 시사해 준다.
\"그는 우리의 화평이신지라 둘이 하나를 만드사 중간에 막힌 담을 허시고,
원수된 것 곧 의문에 속한 계명의 율법을 자기 육체로 폐하셨으니 이는 이 둘로
자기의 안에서 한 새 사람을 지어 화평하게 하시고, 또 십자가로 이 둘을 한 몸으로
하나님과 화목하게 하려 하심이라. 원수된 것을 십자가로 소멸하시고, 또 오셔서
먼 데 있는 너희에게 평안을 전하고 가까운 데 있는 자들에게 평안을 전하셨으니
이는 저로 말미암아 우리 둘이 한 성령 안에서 아버지께 나아감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2:14-18).
예수님은 우리의 화평이시다. 주님은 우리 사이에 진정한 의미의 평화를 만드셨다.
예수께서 십자가에서 이루신 평화의 일이 무엇인가? 여기 적어도 다섯 가지를 볼 수 있다.
1. 유대인과 이방인 중간에 막힌 담을 허셨다.
이것은 두 부류의 사람들 사이에 놓인 무서운 율법이라는 높은 장벽이었다.
유대인들은 그것을 지킨다고 하면서 죄 가운데 살고, 이방인들은 율법없이 범죄하며 살았다.
서로 남을 향하여 죄인이라고 하지만, 실상은 양쪽이 다 하나님 앞에서 죄인이다.
사도 바울이 로마서에서 무엇이라고 말하는가?
\"무릇 율법없이 범죄한 자는 또한 율법없이 망하고 무릇 율법이 있고 범죄한 자는 율법으로
말미암아 심판을 받으리라\"(롬 2:12). 즉 율법을 아는 유대인이나 율법을 모르는 이방인이나
하나님 앞에서도 모두 죄인이라는 사실이다.
\"모르는 것이 약\"일 때도 있고, \"아는 것이 병\"이 될지 모르나 \"알고 행치 않는 것은 죄다.\"
예수님은 그 자신이 십자가에 죽으심으로 계명의 율법을 자기 육체로 폐하셨다는 것이다.
즉 이제는 더 이상 율법이 그리스도인들의 삶에 군림할 수 없게 하셨다.
이제는 십계명을 지켜야 사는 것이라거나, 구약의 제사를 지내야 한다는 것이 아니다.
이제는 하나님 앞에서 서는 자격 조건이 완전히 달라졌다.
그때까지는 까다로운 율법 조항을 완벽하게 지키려고 항상 눌려 살았지만,
이제는 그 율법 외에 다른 법을 하나님의 자녀되는 자격 조건을 제시하신 것이다.
그것은 예수 그리스도를 통한 믿음이라는 자격 조건이다.
그런 의미에서 예수님은 율법을 폐하셨을 뿐 아니라
율법의 요구를 완벽하게 충족시킴으로서 율법을 완성하신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가 믿음으로 말미암아 율법을 폐하느뇨? 그럴 수 없느니라. 도리어 율법을
굳게 세우느니라?\"(롬 3:31).
지금도 예수님은 가운데 높이 쌓아 놓은 벽 때문에 갈라진 부부 사이와 부모와 자녀 사이
그리고 형제와 이웃 사이를 그의 보혈로 허무시는 분이다.
백인 우월주의 사상이 지금까지 팽배하여 인종차별이 아직도 심한데,
예수믿는 신앙이 아니었으면 어떻게 백인과 유색인들이 같이 살겠는가?
2. 그 안에서 한 새 사람을 지으셨다.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이다.
어둡고 부끄럽고 죄책감에 빠졌던 이전 것은 지나가고 새로워지는 것이다.
생각이 새로워지니 행동이 새로워지고, 행동이 새로워지니 습관이 달라진다.
좋은 습관을 갖게 되니 좋은 인품을 지니게 되고, 결국 그것이 운명이 되는 것이다.
자신의 운명을 성경을 통해서 예측하고 산다는 것은 참으로 신기한 특권이다.
놀라운 것은 한번 새로워진 후에 그후로 다시 낡아 가는 것이 아니라,
주 안에 있는 자는 날마다 새로워진다고 하나님이 약속하신다.
이 세상에서 날마다 새로워지는 것은 \"그리스도 안에 있는 삶\" 외에는 찾을 수가 없다.
\"우리의 겉사람은 날로 쇠퇴하고 늙어가지만 우리의 속사람은 날로 새롭도다.\"
얼마나 멋진 일인가? 얼마나 신나는 일인가?
주 안에서 새롭게 된 사람은 옛 사람과 다르다.
땅에 속한 것만 바라보며 살다가 이제는 하늘을 보며 살게 되고,
돈과 물질에만 정신을 빼앗기다가 이제는 영혼에 관한 것에 마음을 쓴다.
오늘 발 앞에 있는 것에만 관심을 갖다가, 영원에 대한 것에 관심을 갖는다.
3. 십자가로 하나님과 화목을 이루셨다.
이것은 정말 놀라운 일이다.
원래 우리는 하나님을 불순종하고 불신한 죄 때문에 하나님의 원수와 같은 자들이었다.
이것을 예수님은 십자가로 소멸하시고, 화목을 이루신 것이다.
화목에는 적어도 세 가지가 있을 것이다.
그 첫째는 하나님과의 사이에 화목하는 것이고,
둘째는 이웃과의 화목이며,
또 한 가지는 자기 자신과의 화목이다.
이 세 가지 화목의 기본이 바로 하나님과의 화목인 것이다.
창조주 하나님과의 사이에 죄 때문에 높은 장벽이 놓였다.
그래서 죄인된 우리는 하나님을 알 수 없고, 접근할 수도 없게 되었다.
마치 태양이 작렬하지만 먹장 구름이 가로막아서 온통 어둠이 덮인 것과도 같다.
부부가 불화해도 얼마나 마음이 불편하고 아픈가?
부모와 불화하면 얼마나 죄송하고 견디기 힘든가?
자녀와 불편한 관계만 되어도 얼마나 답답하고 속이 상하는가?
하물려 하나님과 불화하는 인생이 얼마나 깊은 죄의식에 살겠는가?
그런데 예수께서 십자가에 우리를 대신하여 죽으심으로
그 빽빽하고 시커먼 구름이 말끔히 걷혀진 것이다.
그 이후로부터 하나님과 대화하며 사랑하며 살게 되었다.
4. 모든 이에게 평안을 전하셨다.
어떤 사람은 이 세상에서 제일 고요하고 갈등과 다툼이 없는 곳은 공동묘지라고 했다.
그러나 사실 육체는 고요할지 모르나 어느 영혼은 큰 고통 중에 있을 것이다.
그리고 수 많은 현대인들이 진정제를 복용하면서 마음에 평화를 찾고 있다.
세상 여러 곳에서 평화 회담을 하는데, 그 회담 주변에는 총을 찬 군인들이 지키고 있다.
예수믿는 자들에게 공통적으로 주어지는 특권 중의 하나는 마음의 평안이다.
삶에는 언제나 풍랑이 있고, 넘기 어려운 높은 언덕이 있으며,
가슴을 아프게 하는 일들이 그치지 않고 생기지만,
하나님이 주시는 마음 깊은 곳의 평안은 아무도 빼앗아 가지 못한다.
\"내게 강같은 평화...\" 이것은 깊게 고요히 흐르는 강물같은 평화를 의미한다.
오늘 성경 말씀에서는 하나님과 화목한 사람이 이제 이웃들과도 화목하는 것이다.
우선 유대인과 이방인이 구별하지 않고 한 하나님의 백성이 되는 것과 함께,
진정한 평화는 주 예수 안에서 드디어 이뤄진다.
하나님과 가장 가깝게 지낸다는 유대인에게도 예수님을 통해서 평화가 주어지고,
또한 하나님에게서 먼 데 있었던 이방인에게도 이 놀라운 평화가 주어졌다.
그리고 하나님에게서 가장 멀리 떨어져 살던 우리에게도 이 평화가 선물로 주어졌다.
\"내 영혼이 은총입어 중한 죄짐 벗고 보니, 슬픔많은 이 세상도 천국으로 화하도다.
할렐루야, 찬양하세. 내 지은 죄 사함받고, 주 예수와 동행하니 그 어디나 하늘 나라.\"
\"평화, 평화로다. 하늘 위에서 내려 오네. 그 사랑의 물결이 영원토록 내 영혼을 덮으소서!\"
5. 함께 한 성령 안에서 하나님께 나아갈 수 있게 하셨다.
언젠가 한국 국회의사당에 국회 신우회에서 설교를 부탁받아서 들어간 적이 있다.
평소에는 일반인이 자유롭게 드나들지 못하지만, 그 날은 출입증을 주어서 들어갈 수 있었다.
국회의원이 되려고 머리를 싸매고 운동을 하고, 엄청난 돈을 쓰고 당선이 되어도
국민들에게 별로 인기가 없는데도 불구하고, 그 건물 안에 들어가는데 수속이 복잡했다.
대학생 시절 공화당 때에 청와대를 방문하러 갈 때에는 수속이 더 복잡했다.
신분 조사를 다하고, 좌우에서 경찰이 호위를 하면서 안내하는 것이었다.
정말 대단치도 않은 곳이지만, 거기 그래도 한 나라의 대통령이 있으니 그럴 수 밖에.
어느 군인 부대에 설교하려고 들어갈 때에 기억이 난다.
부대 앞에는 총을 든 보초들이 지키고 서 있어서, 부대 안으로 들어가려면 절차가 있다.
그런데 부대장이 탄 찝에 동승하고 들어가니 보초병들이 경례를 부치며 무사 통과다.
거룩하신 하나님이 계신 곳에 들어간다는 것은 얼마나 까다롭고 수속이 복잡할까?
그런데 놀랍게도 하나님께 나아가는 방법이 의외로 간단하다.
성령 안에서 있으면 되는 것이다. 마치 대장의 자동차를 타고 부대에 들어가는 것처럼...
더 놀라운 사실은 그 하나님이 우리의 아버지시므로
아버지 집에 들어가는 것이니 누가 막겠는가?
누가 아버지 집에 들어가는 자녀를 가로막는가?
이제 우리 자신의 그 때와 이제를 비교해 보라.
나는 주 예수님을 바로 알기 전에 어떤 삶을 살았었는가?
그리고 예수를 마음에 영접한 후에 어떻게 삶이 변화되었는가?
모든 것이 새로워졌다고 담대하게 증언할 수 있는가?
끊어야 할 것은 과감하게 끊고, 잡아야 할 것을 최선을 다해서 잡자.
예수님과 함께 걷고 함께 사는 엄청난 특권을 잠시도 잊지 말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