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베소서 제10강
에베소서 강해설교 10
시민권자의 특권(엡 2:19-22)
외국에 살다 보니 영주권이니 시민권이니 하는 말이 상당히 중요한 의미가 있다.
한국에 살 때에는 당연히 한국인으로서 스스로 서울 시민인 것이 당연하고,
또 특별한 의미를 갖지 않았는데, 미국에 와서 보니 그것이 신분을 확정해 주는
상당히 중요한 문제가 된다.
그래서 영주권자가 되기 위하여 복잡한 서류 작성을 하고 자격 심사를 하기도 하며,
시민으로 살려면 그렇게 간단치 않은 시험을 치루고 있다.
영어를 말할 줄 모르는 노인들이 시민권 시험을 보러 간 이야기가 많다.
이 이야기가 사실인지 모르겠지만, 어느 한국 할머니가 미국 시민권 시험을 치루려고
손주의 도움으로 열심히 공부했다.
그런데 시험관이 \"미국에서 가장 북쪽에 있는 주는 무슨 주인가?\"를 물었다.
아차! 그건 그 노인이 준비한 예상 문제집에 없던 것이었다.
다급한 노인은 \"알라 새끼! 별 걸 다 묻네.\"라고 사투리로 작은 목소리로 욕을 해버렸다.
그러자 시험관이 맞다고 하는 것이 아닌가? 알라스카와 발음이 너무 비슷했던 것이다.
만일 천국 시민이 되기 위해서 시험을 쳐야 한다면 어떻게 될까?
아마 그 시험 공부를 위해서 대학 시험보다도 더 머리를 싸매고 무섭게 공부할 것이다.
그것도 뇌물을 써서 실력을 위조하거나 시험 문제를 유출시키는 일은 없을까?
시험을 치룰 때 옆 사람의 것을 보고 쓰는 부정행위도 있지 않을까?
그러나 참으로 감사하고 다행스런 것은 천국 시민이 되는 것이
이런 복잡하고 어려운 시험으로 되는 것이 아니라,
빈부의 차이나 유식자와 무식자의 차별, 또는 인종 차별이 전혀 없이,
누구든지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나타난 하나님의 은혜를 믿기만 하면 되는 것이니
하나님은 참으로 마음이 넓고, 아무도 멸망하는 것을 원치 않으신다는 말씀이 분명하다.
이제 순전한 믿음으로 구원받은 사람들의 새로운 신분과 그 역할에 대해서 알아 보자.
\"그러므로 이제부터 너희가 외인도 아니요 손도 아니요 오직 성도들과 동일한 시민이요
하나님의 권속이라\"(2:19).
예수 그리스도를 구주로 믿고 마음에 받아 들이면
이제 더 이상 하나님의 나라에 있어서 낯선 외국인이나 지나가는 손님이 아니다.
사도 바울이 살던 시대에 외인들은 마치 낯선 얼굴이 어느 동네에 들어온 것처럼 생각되어,
그를 보는 사람들마다 의구심을 갖고 쳐다 보거나, 눈쌀을 찌푸리게 하는 대상이었다.
그래서 그들 사이에서는 \"다 허물어져 가는 집에 있는 것이 남의 나라에 나그네가 되는
것보다 낫다\"는 말이 있을 정도로, 외지인이 되는 것을 싫어했다.
아마 조상들이 애굽에서 오래 동안 나그네 생활을 했고,
또 광야에서 40여년 간 떠도는 나그네였기 때문일 것이다.
그리고 유대인들이 지난 2,000년간 세상에 흩어져 사는 나그네였기에 지금도 외지인으로
사는 것을 좋아하지 않는다고 한다.
유명한 음악가 \"호스터\"의 노래 가운데 우리가 즐겨 부르는 \"Home Sweet Home\"이
왜 그렇게 유명한가? \"즐거운 곳에서는 날 오라 하여도, 내 쉴 곳은 작은 집 내 집 뿐이라.\"
아무도 아는 사람이 없는 낯선 곳에서 외로운 밤을 혼자 지내 본 적이 있는가?
얼마 전에 가족과 떨어져서 혼자 어느 곳에서 잠시 지낸 적이 있었다.
아무도 나를 방해하지도 않는 것은 괜찮은데, 아는 채도 하지 않고,
혹 새벽녘에 거리에 지나가던 사람이 눈인사를 하는 것 정도였다.
소매치기가 많은 유럽의 대도시에 관광을 가면, 절대로 거리에서 두리번거리거나
높은 빌딩을 올려다 보느라고 목이 아플 정도로 고개를 들고 있지 말라고 한다.
그가 그 도시에 처음 찾은 사람인 것을 알고 가방을 털릴 경우가 아주 흔하다는 것이다.
본인이 미국에 약 4년간 아내와 아이들과 떨어져서 유학생으로 지낸 적이 있었다.
한국에 두고 온 가족들이 더 고생을 많이 했지만, 혼자 떨어져 있어서인지
공연히 마음이 허전하고 외로울 때가 많았다.
특히 무슨 명절이 되면 주변의 온 집의 식구들의 시끄럽게 웃고 떠드는 소리가 들리는데,
혼자서 라면을 끓어 먹거나, 높은 뒷산에 올라가 멀리 하늘을 바라 보며,
찬송을 하거나 기도도 하지만, 외로움은 사라지지 않을 때가 많았다.
무엇보다도 사랑하는 사람을 먼저 멀리 떠나 보낸 이들의 외로움을 누가 이해하겠는가?
부모를 잃은 아이들의 두려움과 외로움과 불안을 누가 본인들처럼 느끼겠는가?
정말 하나님이 늘 함께 계시지 않는다면, 이 세상에 아마 외로움 때문에 죽을 자도 많으리라.
예수 그리스도를 모르고 그를 믿지 않은 이들은 영광스런 하나님의 나라와는 상관이 없이
떠도는 방랑자와 같은 인생을 살 수 밖에 없고, 이곳 저곳에 잠시 머무는 나그네와 같다.
남들과 함께 어울려 살지 못하는 외지인이나, 접근하기 싫은 이상한 무리라는 것이다.
그래서 오히려 마약과 도박과 같은 중독성있는 악한 습관에 쉽게 빠지는 것이리라.
그런데 예수 그리스도를 믿은 후에 우리의 신분이 완전히 달라진 것이다.
하나님의 백성들과 동일한 시민권자가 되었고,
하나님의 집에 속한 식구가 되었다는 사실이다.
이제는 집을 떠난 나그네나 방랑자가 아니라는 것이다.
이제는 안정을 찾았고, 이제는 쉼과 웃음과 편안함을 회복한 것이다.
마치 집을 떠나서 이리 저리 방황하며 제 멋대로 살다가 지치고 찢긴 마음으로
아버지 집에 돌아온 어느 탕자처럼, 이제 예수 안에서 드디어 제 집을 찾은 것이다.
하나님이 나라 시민에게는 어떤 책임이 있을까?
무엇보다도 이 세상에서 하늘 나라 시민답게 사는 것이다.
성도로서 하나님께로부터 받은 시간과 재능과 재물과 생명을 하나님을 위해서 써야 한다.
그것들은 모두 우리에게 맡기신 것이므로, 우리는 다만 관리자일 뿐이다.
우리는 원래 벌거벗은 몸이며 빈손으로 이 세상에 나왔기 때문에,
지금 우리가 가진 모든 것은 노력을 했든지 고생을 했든지 다 받은 것이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이름이 조금이라도 부끄러움을 당하지 않도록 주의하고 신중해야 한다.
오히려 하나님의 이름이 높여지도록 말과 삶이 불신 세상에 모범이 되어야 할 것이다.
결국 우리의 삶의 목적 자체가 하나님의 이름에 영광을 돌리도록 하는 것이 최고의 의무이다.
그런 반면에 하나님의 나라 시민에게는 많은 특권이 주어졌다.
우선 하나님이 우리의 아버지시니 그 분의 절대적인 보호를 받는다.
우리에게 무엇이 필요한지를 아시는 아버지께서 때를 따라 도와 주시며,
우리의 간절한 기도를 들으시고, 어느 때나 어디서나 동행하시는데,
어느 선교사의 간증처럼 우리가 걷기에 너무 힘겨워하면 안고 가시는 하나님이시다.
설교자 챨스 스펄젼은 전도서 9:4절에 있는 \"산 개가 죽은 사자보다 낫다\"는 말씀을 통해
하나님의 나라 시민으로 사는 것이 좋은지를 이렇게 표현했다.
\"산 개가 죽은 개보다 집을 잘 지키고,
십자가에서 회개한 강도가 왕좌에 앉아 있는 시져보다 낫고,
개들 가운데 있는 거지 나사로가 공회원들 가운데 있는 시세로보다 나으며,
하나님의 눈에는 가장 무식한 그리스도인이 철학자 플로톤보다 낫고,
천국에서 가장 작은 자가 천국 밖에서 가장 큰 자보다 낫다\"고 말했다.
하나님 나라의 시민이요 천국 가족으로 산다는 것이 이렇게 영광스런 것이다.
그래서 생명없는 웃음보다는 생명을 가진 자의 한숨이 오히려 낫고,
하나님없이 세상에서 재벌로 사는 것보다 가난한 그리스도인이 훨씬 행복하다는 사실이다.
\"너희는 사도들과 선지자들의 터 위에 세우심을 입은 자라. 그리스도 예수께서 친히
모퉁이 돌이 되셨느니라\"(2:20).
신앙은 마치 작은 씨를 뿌린 후에 나무가 자라는 것과 같고,
기초를 든든하게 공사한 후에 높이 세우는 빌딩과도 같다.
고층 건물일 수록 터가 튼튼하고 기초 공사가 견고해야 한다.
미국의 그 높은 앰파이어 스테이트 빌딩이 오래 견고하게 서 있는 이유 중의 하나는
그 기초가 거대한 바위여서 쉽게 흔들리지 않는다고 한다.
우리의 신앙에도 기초가 있다. 그리고 그 기초가 어떤가에 따라서 신앙의 건축물이 결정된다.
우리가 딛고 서 있는 믿음의 기초는 무엇인가?
어떤 사람들은 지난 날에 경험한 신유나 신비한 체험이나 환상을 의지하기도 하고,
어떤 사람들은 어려서부터 배운 성경 지식에 의지해서 차디찬 교회 생활을 하기도 한다.
뜨거운 감정적인 것에 너무 의지하다가 보면 너무 변화가 심해서 자주 흔들리고,
차가운 논리와 교리적인 지식만 가지고 신앙 생활을 하다 보면 감동과 감격이 없다.
우리 신앙의 유일한 터는 그리스도이시다.
\"이 닦아 둔 것 외에 능히 다른 터를 닦아 둘 자가 없으니 이 터는 곧 예수 그리스도라\"
(고전 3:10). 터가 견고해야 큰 건물을 세울 수 있고, 또 그 건물이 견고한다.
예수님만 영원히 무너지지 않는 우리 신앙의 견고한 터라는 사실이다.
예수만이 모퉁이 돌이요, 머릿돌이기 때문에, 거기서 진정한 신앙이 시작되고,
그것이 그 건물 전체를 받쳐 주며, 또한 거기에 건물 소유주의 이름이 적혀 있다.
결국 교회는 어떤 멋진 신학적인 교리나, 황홀한 체험이나, 특별한 교파나 교단의 주장에
근거해 서 있지 않고, 다만 예수 그리스도의 말씀 위에 서 있어야 흔들리지 않는다.
언젠가 캘리포니아 서해안을 운전해 가다가 바다가 아주 가까운 해변 모래 근처에 예쁘게
세워진 집을 보았다. 그런데 얼마 후 잠시 폭우가 쏟아져서 잠시 교통이 혼잡해 졌는데,
그 길을 돌아오다 보니 그 예쁜 해변 주택이 완전히 바다물 쪽으로 기울어 무녀져 있는
것이었다. 모래 위에 집을 세웠으니 무너지지 않으면 이상하지 않겠는가?
보기에는 부러움을 살 정도로 멋졌지만, 터가 너무 약한 곳에 세웠기 때문이다.
나의 신앙은 지금 어디에 터를 두고 서 있는가?
일점 일획도 변함이 없는 하나님의 말씀에 근거한 신앙 고백에 기초를 두면,
환경이 변하고, 신앙 때문에 고통스런 일이 생겨도 흔들림이 없이 견딜 수 있다.
요새 미국의 어느 주 교육국에서는 진화론을 과학책에서 빼기로 했다고 하는데,
그 이유가 무엇이겠는가?
진화론자들의 주장의 근거는 어디선가 발견된 오래된 듯한 물체의 년수를 추정하여,
그것이 수 백만 년이나 또는 수 천만 년이라는 추측을 하는 것이다.
추측과 짐작을 가지고 진리라고 주장하기에는 그 터가 너무 약하기 때문이다.
하나님을 믿는 우리의 신앙이 결코 독선적이며 근거없는 억지가 아니다.
영이신 하나님을 눈으로 본 사람이 없어서 하나님은 없다고 우기는 것은,
마치 바람이 눈에 보이지 않기 때문에, 무서운 태풍을 겪으면서도
바람이 없다고 말하는 것과 흡사하다.
공기가 이동하는 바람 자체는 보이지 않으나 그것이 지나가는 위력을 보고 있지 않은가?
영이신 하나님은 볼 수 없으나, 그 분이 하시는 놀라운 일들을 우리는 얼마든지 본다.
그래서 바울은 우리가 사도들과 선지자들의 예수 신앙 고백 위에 서야 한다고 말한다.
즉 주는 그리스도시요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고백과
하나님만이 우리의 유일하신 창조주시요 세상의 유일한 구원자라는 신앙 고백인 것이다.
특히 예수 그리스도께 대한 바른 신앙 고백이 없으면,
그가 아무리 하나님을 부르고, 하나님의 이름을 의지한다고 해도 허상이 된다.
왜냐하면 하나님 아버지께로 가는 유일한 길은 예수 그리스도 뿐이기 때문이다.
이 모퉁이 돌은 그저 기념으로 거기에 둔 것이 아니다.
그것이 무너지면 집 전체가 무너지고 마는 가장 중요한 기초라는 사실이다.
그래서 \"예수님이 계신 곳이 곧 교회다\"라는 말이 있다.
사람들이 아무리 많이 모여서 찬송하고 기도해도 예수님이 계시지 않으면 교회가 못된다.
어떤 성도는 만일 천국에 예수님이 계시지 않는다면 그것은 천국이 아닐 것이라고 하면서,
아무리 험하고 고통스런 곳이라도 예수님이 계신 곳에서 영원히 살겠다고 고백하였다.
마치 엄마와 아빠없이 혼자서 호화판 호텔에서 사는 것보다,
사랑하는 식구들과 함께 작은 아파트에서 사는 것이 낫다고 하는 말과도 같다.
그와 같이 우리 신앙의 근거와 의미는 바로 예수 그리스도에게 있는 것이다.
\"그의 안에서 건물마다 서로 연결하여 주안에서 성전이 되어 가고, 너희도 성령 안에서
하나님의 거하실 처소가 되기 위하여 예수 안에서 함께 지어져 가느니라\"(2:21-22).
성경이 말하는 교회는 우리가 흔히 생각하는 건축물이 아니라고 반복해서 설명했다.
그러나 마치 거대하고 웅장한 건물을 짓듯이 성도 한 사람 한 사람이 연결되어
보이지 않는 하나님의 집으로 지어져 간다.
그리스도인들로 지어져 가는 하나님의 성전의 모습을 살펴 보자.
첫째로, 성도들은 주 안에서 지어져 간다.
이것은 멋진 무슨 대리석 건물을 짓는 것이 아니다.
보이지 않지만 모든 성도들로 구성된 아름다운 하나님의 교회를 세우는 것이다.
우리 주변에 멋지게 지은 교회 건축물들이 많이 있는데,
실은 그것보다 더 중요한 것이 영적인 하나님의 교회가 바로 서 가는 것이다.
여기 언급한 대로 \" 주 안에서\" 성전이 되어 가고 있다.
즉 주 예수를 믿는 믿음 안에서 세워져 간다는 뜻이다.
그렇다면 습관과 여가 시간 이용을 위해서 예배당에 열심히 다닌다고 해도
진실한 믿음을 갖지 않은 이들은 여기에 아직 포함되지 않는 것이다.
이 보이지 않는 하나님의 성전이 완성되는 때에 주님은 재림하신다.
너무 거창하고 화려한 건물에 욕심을 갖지 않는 것이 좋다.
그보다 각 사람이 주 안에서 견고한 성전이 되는 것이 훨씬 더 급하고 중요하다.
\"너희 몸은 너희가 하나님께로부터 받은 바 너희 가운데 계신 성령의 전인 줄을 알지 못하느
냐? 너희는 너희 것이 아니라 값으로 산 것이 되었으니 그런즉 너희 몸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라\"(고전 6:19-20).
우리 교회에도 모든 성도가 함께 모여 예배하고 기도하고 찬양하고 많은 활동을 할 수
있는 공간이 필요한 것은 사실이다. 하나님께서 정하신 때에 정하신 방법으로 주실 것이다.
그런데 그것보다 성도 각 사람이 주 안에서 견고한 성전이 되도록 더욱 힘쓰라.
둘째로, 이 성전은 서로 끊어짐이 없이 함께 연결되어 있다.
벽돌집을 연상하면 쉽게 이해가 된다.
커다란 돌덩이 한 개로 깎아서 집을 지을 수도 있겠지만, 하나님의 집은 작은 돌들로
꼼꼼하게 지어진다. 그래서 사도 베드로께서는 \"사람에게는 버린 바 되었으나 하나님께는
택하심을 입은 보배로운 산 돌이신 예수에게 나아와, 너희도 산 돌같이 신령한 집으로 세워
지고...\"(벧전 2:3-4)
모든 그리스도인은 하나님의 성전의 구석 구석에 놓인 돌과 같은테, 그것은 산 돌이다.
오래 전 유모어에 머리나쁜 사람을 \"돌대가리\"라고 놀리면서, 그 머리에 돌을 올려 놓으면
맷돌이 되고, 시내물에 머리만 내놓고 있으면 징검다리가 된다고 놀렸다.
그런데 생각하라. 그리스도인은 생명이 있는 돌이다.
그래서 집을 지을 때처럼 작고 큰 돌이 하나도 버릴 것이 없다.
어떤 돌은 많은 사람들이 드나들며 보는 정문에 놓이기도 하지만,
어떤 돌들은 아무도 봐 주지 않는 뒷뜰 쪽에 놓이기도 한다.
그리고 심지어 어떤 돌들은 땅 속에 깊이 박혀서 아무도 볼 수 없는 경우도 있다.
만일 눈에 잘 띄이지 않는다고 마루 밑에 있는 돌들이 제 자리를 벗어나면 어떻게 되겠는가?
아무리 멋진 지붕과 기둥과 화려한 무늬의 벽으로 된 건물이라도 금방 무너지고 만다.
교회에서는 누가 가장 사랑을 받아야 하는가? 목사인가? 장로나 권사나 집사나 무슨 위원장
인가? 하나님은 그들 모두에게 각기 다른 직분과 위치와 섬길 일들을 주셨기 때문에, 아무도
푸대접받을 수 없는 곳이 교회다.
예루살렘 성벽을 건축할 때에 유대인들은 모두 참여하고 싶었다.
그래서 동쪽벽은 부유한 사람들이 일꾼을 고용하여 건축했고,
남쪽벽은 귀족들이 건축했으며, 북쪽벽은 정부에서 세웠고,
서쪽벽은 돈없는 일반 시민들이 직접 손으로 벽돌을 찍어 세웠다.
그런데 AD 70년에 로마가 공격으로 예루살렘 성벽이 무너질 때에 서쪽벽만 남았다.
거기는 돌틈에 쓸모있는 금부치같은 것들을 숨겨 놓지 않았을 것이기 때문이다.
지금 남은 서쪽벽이 흔히 \"통곡의 벽\"이라고 하는 곳이다.
교회에서는 교인 한 두 사람이 모든 것을 주장하는 독불장군은 없다.
자기는 교회에서 있으나 마나 하는 존재라고 자신을 비하시키면서 팔장끼고 교회 일에
구경만 하면서 전혀 상관도 하지 않는 것도 문제이지만,
반면에 마치 자기가 없으면 마치 교회가 금방이라도 무너질 것처럼 생각하는 것은
교만이요 비뚤어진 생각이다.
하나님은 교회의 질서와 영적인 방향과 성숙을 위해서 영적인 지도자로 목사를 세우셨지만,
모든 성도들에게 다양한 재능을 주셔서, 모두 제 몫을 제 자리에서 감당해야 건물이 제대로
반듯하게 세워져 간다.
셋째로, 이 성전은 성령 안에서 지어져 간다.
진흙과 세멘트나 철근으로 되는 것이 아니라, 성령으로 서로 연결하여 지어져 간다.
이것은 교리나 교파, 사상, 의리, 같은 고향 사람들, 친구 관계 등으로 세워지는 것이 아니다.
성령 안에서 세워진다는 것은, 교회가 성령의 인도를 받으며, 성령의 역사가 나타나고,
성령으로 충만한 것이 바른 교회의 모습인 것을 말한다.
그러나 오해가 없어야 할 것은, 성령 충만이 마치 왁자지껄하고 요란스러우며,
무슨 \"거룩한 웃음\"이라든지, 심한 몸짓같은 것을 해야 한다는 것이 아니다.
조용하지만 강력한 태양빛처럼, 소리없지만 온 땅을 적시는 이슬비처럼
각 사람이 성령 안에서 그 은혜에 충만해야 한다는 것이다.
넷째로, 이 성전은 하나님이 거하시는 처소가 되는 것이다.
교회는 결국 누가 주인인가? 모퉁이 돌이 되시는 예수님이시다. 즉 하나님이시라는 것이다.
이제 멀지 않은 어느 날 하나님의 때에 이 영광스런 성전이 완성될 것인데,
거기 우리 하나님이 우리의 아버지요 영광의 주로 거하게 되신다.
비록 시간이 많이 걸리지만 이렇게 하나님의 성전이 완성되는 때를 기다리면서
어떤 이는 멀리 외롭고 언어도 통하지 않고, 늘 질병과 생명의 위협을 느끼는 선교지에서,
어떤 이는 주변에 불신앙인 밖에 없는 직장에서 소리없이 빛과 소금으로 살고,
어떤 이는 아무도 알아 주거나 봐 주지 않아도 골방에서 기도로 하나님의 일에 힘쓰며,
어떤 이는 특별한 재능이 없다고 생각하여 교회에서 궂은 일을 찾아 하며 성전이 세워진다.
나는 하나님의 집에서 어떤 종류의 교인인가? 교인의 종류를 흥미있게 묘사한 것이 있다.
\"당신은 뒤에서 밀어 줘야 간신히 앞으로 가는 휠체어 교인인가?
당신은 등을 두드려 줘야 칭얼거리기를 그치는 어린애같은 교인인가?
당신은 도무지 언제 어디로 튈지 예상할 수 없는 미식 축구공같은 교인인가?
당신은 바람만 잔뜩 들어서 언제 터질지 모르는 고무풍선같이 불안한 교인인가?
당신은 끌어 주지 않으면 꼼짝도 하지 않는 트레일러같은 교인인가?
당신은 항상 불이 들어왔다 나갔다 하는 깜빡등과 같은 교인인가?
아니면 당신은 성령 안에서 믿음을 가지고 꾸준하게 자기 몫을 감당하는 성실한 성도인가?\"
이제는 하나님의 집에서 나그네나 외인이나 손님처럼 지내지 말자.
이제는 하나님의 나라의 시민이요 천국 가정의 식구로 사랑하며 돌보며 살자.
이제는 주님이 교회에 위탁하신 특별한 사명을 위해서 같은 방향으로 힘써서 노를 젓자.
혹 자기 자리가 너무 뒷자리이거나, 사람 눈에 잘 띄지 않는 귀퉁이에 있다고 해도,
주님이 할 일을 주신대로 바로 거기서 충성스런 하나님의 사람이요 예수님의 동역자로 살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