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베소서 제13강

에베소서 강해설교 13


성장과 함께 성숙을(엡 3:14-21)

아이들이 자라는 것을 보면서 자주 놀라기도 한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안고 다니고 업고 다녔는데, 어느 새 멋진 소년과 소녀가 되어 있다.
엄마 치마에 매달려 다니는 것을 보던 아이가 의젓한 대학생이 된 것도 놀랍고,
결혼 주례한지 얼마 되지 않은 것 같은데, 아기를 안고 와서 축복기도를 받는다.

작은 아이일 때에는 엄마가 어디를 가기만 하면 앞서서 먼저 따라 나섰는데,
초등학교에 5-6 학년만 되어도, 잘 따라 나서지 않고,
조금만 더 커지면 \"엄마, 어디가?\"가 아니라, \"얘야, 어디 가니?\"로 바뀐다.
우리의 세대보다도 요즘 아이들이 그렇게 더 빨리 자라는 것같다.

그런데 키는 커가고 체중은 늘면서도 전혀 정신적으로는 어린 아기같은 미숙아가 있다.
발이 커져서 큰 운동화를 신어야 하고, 옷도 큰 아이의 옷을 입는데,
여전히 서너 살 정도의 지능을 가진 정신박약증을 가진 환자인 것이다.
손가락을 빨고, 공부하는 것을 전혀 모르고, 아무 것도 스스로 할 수 있는 것이 없다.
그래서 덩치큰 소년이 되었어도, 입고 씻는 것 등 모든 것을 부모가 대신 해 준다.

반면에 상당히 조숙한 아이들도 있다.
중학생이 되면서 벌써 부모가 겪는 고충들을 눈치채고 조용히 협력하며,
직장에서 힘들어 하는 아버지나 병든 어머니를 돕는 소년 소녀 가장 역할을 하는 것이다.
그래서 아마 옛 어른들은 \"젊어서 고생은 돈주고 사서도 한다\"는 말을 한 것 같다.

그 동안 한국의 대부분의 교회는 성장 위주로 경쟁하면서 서로 몸을 키워 갔다.
원래 종교성이 강한 민족이기도 하지만, 불교와 유교와 미신이 강력했던 민족 역사가 있다.
그런데 그런 것이 교회에도 적지 않게 관련된 것이다.
불교에서는 아무튼 거대한 법당이 작은 것보다 낫고,
유교에서는 복잡한 의식이 더 권위있고 품위있게 생각되었으며,
또한 기독교에서는 큰 교회 건물과 많은 교인이 거의 공통적인 목회의 목표가 된 것이다.

그래서 교인들이나 목사들이 만나서 대화 중에 교회 이야기가 나오면,
상대방의 교회에 출석 교인이 얼마나 되고, 건물은 어떻고, 예산은 어느 정도의 규모인지를
이리 저리 간접적으로라도 은근히 묻는다.
그러면서 자기가 속한 교회보다 건물이 크고 교인이 좀 더 많으면 약간 주늑이 들고,
반면에 예상보다 숫자가 적기라도 하면, 자기 교회를 은근히 자랑하는 것을 보았다.

교인의 숫자가 많은 것이 아무래도 자원도 많고 봉사 활동도 많이 할 수 있기 때문에
그것 자체를 비난하거나 은근히 성장하는 교회를 시기할 필요는 결코 없다.

그러나 단기간에 등록 교인 숫자를 늘이고, 시설을 거창하게 하고,
행사와 전시 효과를 많이 하는 교회들은, 대개 그 기초가 약하기 쉬워서,
한번 세찬 바람이 불거나 환난이 오면 낙엽처럼 흩어지고 떨어지기 쉽다.
건물은 엄청난데, 매월 지불해야 하는 거액의 월부금 때문에 고심하고,
등록 교인 숫자는 많은데, 실제로 주일 예배 참석자는 약 반 정도에 불과한 것이 현실이다.

그러다가 IMF라는 낯선 된서리를 맞으면서 온 나라가 무섭게 휘청거렸던 것이다.
그것은 교회도 예외가 아니어서, 파산한 교회들이 여러 군데 있다고 들었다.
거액의 돈을 은행에서 융자받아서 대형 건물을 짓기 시작하였는데,
돈줄이 막히니 공사를 계속할 수가 없고, 건물 전체를 뺏긴 교회까지 있다고 들었다.
또 어느 공식적인 조사를 해보니, 한국의 교인 숫자도 그 동안 너무 많이 불려 있었던 것이
밝혀졌다. 정말 가슴아픈 일이다.

그래서 이제는 성장 위주의 생각에서 보다 알찬 성숙으로 우리의 관심이 바뀌어야 한다.
오늘 성경 본문을 통해서 우리는 사도 바울이 에베소에 있는 성도들을 향하여 드린 기도를
읽으면서, 실속없는 껍데기 성장보다는 알맹이가 찬 신앙의 진정한 성숙에 관해서
다시 한번 깊이 생각해 본다.

\"이러하므로 내가 하늘과 땅에 있는 각 족속에게 이름을 주신 아버지 앞에 무릎을 꿇고
비노니\"(3:14-15).

지금 바울은 어둡고 감옥 안에서 무릎을 꿇고 성도들을 위하여 하나님께 기도하고 있다.
그는 가장 어려울 때나 위험한 때에 의지할 곳이 있었다.
그것은 몸에 밴 유대교의 율법이나 예식이 아니고, 또한 자기 지식도 아니었다.
다만 다윗처럼 그 어둔 상황에서도 눈을 들어 하나님을 바라보는 것이다.

그가 하나님을 묘사하면서 \"하늘과 땅에 있는 각 족속에게 이름을 주신 하나님\"이라고
표현한 것은, 하나님의 권능과 주권과 창조주되심을 말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이런 기도는 막연한 독백이나 우상을 향하여 허공을 치는 외침이 아니라,
살아계시고 그의 기도에 가까이 귀를 기울이시는 아버지 하나님이심을 강조하는 것이다.

그 실력있고 유능하고 담대하고 잘 훈련된 사도 바울같은 사람도 기도를 소홀히 할 수 없었
던 것을 기억하라. 세상 사람들은 자기들의 비장한 방법들을 갖고 있어서, 하나님께 기도하지
않고도 사는 사람들이 많다. 그러나 그것은 인생에 가장 위험한 것임을 잊지 말라.

그리고 바울이 무릎을 꿇고 빌었다는 의미는 그의 간절함과 진실성과 긴박성을 나타낸다.
유대인들은 흔히 서서 하는 기도가 많았고, 특히 바리새인이나 서기관같은 지도자들은
다른 사람들이 보는 길거리나 시장터에서 손을 높이 들고 큰 소리로 기도를 자주 드렸다.
그래서 예수님은 기도하는 것을 과시하는 위선을 심하게 책망하신 것이다.

그런데 여기 바울은 감옥 안에서 무릎을 꿇고 하나님께 매달리고 있다.
그것도 자신의 석방을 위해서나 편의를 위한 것이 아니라, 성도들을 위한 것이다.
그 기도의 내용도 에베소에 있는 성도들의 비지네스나 건강을 위한 것이 아니라,
한 마디로 요약하면 영적으로 강해지고 견고해 지기를 비는 기도임을 알 수 있다.

우리의 기도가 그렇게 되어야 하지 않을까?
부끄럽게도 우리의 기도를 우리가 자주 드리는 기도를 엄밀하게 들여야 보면,
대부분 자기 가족과 자신과 자기 사업이나 자기와 가까운 관심사가 대부분이다.
그리고 자기가 속한 교회나 교단 또는 친구와 친척 정도가 많은 것이 사실이다.
그것도 너무 귀한 기도이지만, 우리 기도의 폭이 좀 더 넓어져야 하겠다.

우리 교회 뿐 아니라, 어려움이 많고 갈등이 잦은 이민 교회들,
경제적으로는 그래도 풍성하지만 도덕적으로는 한없이 근두박질을 하는 미국 사회,
엎치락 뒷치락하면서 빈부의 차가 심해지고 정계가 불안한 두고 온 한국 사회,
그리고 인간 우상 독재와 기근과 가난으로 죽어 가는 북한,
또한 복음을 위해서 매일 매 순간 위험을 무릎쓰는 세상에 흩어져 있는 이름모르는 선교사들,
참으로 우리의 기도가 우리 가정과 교회의 울타리를 넘어야 하겠다.

이제 바울이 무릎꿇고 간절하게 드린 기도 내용을 몇 가지로 나눠서 생각해 보자.

첫째는 성도들이 성령을 통해서 속 사람이 더욱 강건해 지기를 바라는 것이다.
\"그 영광의 풍성을 따라 그의 성령으로 말미암아 너희 속 사람을 능력으로 강건하게
하옵시며\"(3:16).

참으로 멋있는 기도가 아닌가!
우리의 건강과 사업의 번창과 자녀의 미래 그리고 가족들을 위해서 기도하는 것은
사실은 가장 기본적이며 필수적이 것이다. 그러나 거기서 그치지 않아야 한다는 것이다.

바울은 에베소에 있는 성도들이 생활의 외면적인 것이나 겉 사람이 아니라,
속 사람이 강건해 지기를 위해서 기도하고 있다.
껍데기만 화려하여 남들이 보기에는 굉장하면서도 실속이 없는 위선적인 신앙이 아니라,
참으로 속 사람이 건강하고 강건해 진다는 것은 삶을 진정으로 고귀하게 만든다.

어떻게 그런 것이 가능한가? 성경 본문에서 적어도 두 가지의 중요한 요소를 발견한다.
우선 그리스도인의 내면적인 힘은 예수님의 영광스런 풍성함에 근거를 둔다는 것이다.
가진 것도 없이 허풍을 떠는 것이 아니라, 실제로 풍성한 공급처가 있다는 것을 말한다.

학생의 실력과 부모의 경제적 여유만 있다면 우리의 자녀들을 좋은 사립 대학에
보내고 싶지 않은 부모가 있겠는가? 무엇인가 부족하기 때문에 그런 곳에 못 보낸다.
그런데 우리 주님은 우리의 실력을 묻지 않으시고 풍성하게 공급하신다는 것이다.
만약 내 실력을 보고 공급 여부를 결정한다면 정말 자신있는 이들이 얼마나 될까?

그리고 성령의 능력을 의존해야 속 사람이 강건해 진다.
너무 자기 만족과 자만심이 강한 사람은 하나님을 의지하기가 상당히 어렵다.
그것을 세상 사람들은 독립심이 강하다거나 자존심이나 줏대가 강하다고 말할지 모르나,
성경은 그 반대로 모든 일에 기도와 간구로 하나님께 구하는 자가 더 강하다고 말한다.

그러기 위해서 먼저 너무 자신에 대한 교만과 자만심을 극복해야 한다.
\"난 아무에게도 도움을 받지도 않고 주지도 않는 사람이요\"라고 말하는 것이 훌륭한가?
항상 독야청청(獨也靑靑)하는 것을 자랑으로 여기는 것이 신앙인에게는 적합하지 않다.

바른 신앙인은 그렇지 않다. 정말 건강한 신앙과 삶을 살기 원하는 이는 그렇게 하지 않는다.
오히려 때마다 일마다 어린 아이처럼 하나님을 의지하고, 비록 실패하고 넘어질 때가 있지만,
거기서 좌절하거나 포기하지 않고, 여전히 주님을 향한 눈길을 떼지 않고, 그 손을 놓지 않아
야 다시 벌떡 일어설 수 있다.

그래서 성경은 \"의인은 일곱 번 넘어져도 다시 일어난다\"고 여러 차례 말씀하는 것이다.
이런 말은 한국의 속담만이 아니라 원래 성경에 있다.
그래서 겉으로는 허술해 보이는 그리스도인이 죽음 앞에서도 그렇게 강한 것이다.

둘째는 믿음을 통해서 주 예수님이 그들의 마음 속에 항상 계시기를 바라는 것이다.
\"믿음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께서 너희 마음에 계시게 하옵시고...\"(3:17).

우리는 우리 마음의 문을 두드리시는 예수님의 음성을 듣고 믿음으로 영접했다.
예수님은 \"영접하는 자 곧 그 이름을 믿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다\"
고 말씀하셨고(요 1:12), 또한 \"누구든지 내 음성을 듣고 문을 열면 내가 그에게로 들어가
그로 더불어 먹고 그는 나로 더불어 먹으리라\"(계 3:20)고 말씀하셨다.

우리는 태어나면서부터 자기 자신이 자기의 삶의 주인으로 살았다.
그래서 자기가 원하는 것을 먹고, 원하는 학교에 가고, 원하는 직장을 택하며,
또 원하는 사람과 결혼하고, 원하는 일들을 찾아서 한다.
그러나 원하는 모든 것을 다 할 수 없는 것들도 있다.
예를 들어서 원하는 곳에서 원하는 때에 고통없이 죽을 수 없고,
또 죽음 후에 원하는 천국으로 마음대로 갈 수가 없다.
그래서 삶의 주인을 자신에게서 예수님을 주님 곧 주인으로 바꾸는 것이 신앙의 결단이다.

그렇게 예수님을 마음에 믿고 입으로 주님이라고 시인할 때에 우리는 구원받는다(롬 10:10).
그러나 오늘 성경 본문의 말씀은 그렇게 일생에 한번 예수님을 영접한 후에 그 사실을
까맣게 잊어버리지 않기를 기도하는 내용이다.
즉 항상 그 마음 속에 주님으로 거하게 되기를 바라는 것이다.
작고 큰 일에 있어서 주님께 기도하며 인도를 받고자 하고,
어떤 상황에서나 주와 함께 동행하고자 하는 진실된 마음이 변치 않기를 기도하고 있다.

사람은 대개 상황이 좋을 때에 그와 가까이 지낸다.
사업이 번창할 때에는 마치 둘도 없는 친구처럼 자주 만나고 전화하던 사람들이,
사업이 기울고 아무런 도움을 줄 수 없을 때에는 소리없이 떠나는 사람들을 종종 보았다.
인기있을 때에는 그와 함께 사진도 찍고, 싸인도 받고, 자주 접촉하지만,
인기가 떨어지면 가장 쓸쓸한 것이 연예인들이라고 하는데,
우리 예수님은 우리가 처하는 상황이나 어려움과 상관없이 영원히 함께 계시겠다고 약속하셨
다. 이것은 정말 놀라운 사실이다.
사도 바울은 그렇게 성도의 마음 속에 주님이 평생 계시기를 바라는데,
이것은 전세방에 들었던 사람이 기한이 되면 떠나는 입주(入住)(Entering)가 아니라,
영원히 떠나지 않으시는 의미의 내주(內住)(Dwelling)하시기를 기도한다.

셋째는 주를 사랑하는 가운데서 더 뿌리깊은 신앙이 되기를 바라는 것이다.
\"너희가 사랑 가운데서 뿌리가 박히고 터가 굳어져서\"(3:17).

성도들을 위한 바울의 기도는 점점 더 깊어진다.
그렇게 예수님을 영접하여 마음에 모시고 사는 것으로만 만족하지 말고,
이제는 더욱 그 뿌리가 깊어지고 터가 견고해 지기를 위해서 기도하는 것이다.

우리가 믿는 복음의 신앙은 돌맹이나 조각품이 아니라 생명의 씨를 심은 것이어서
주의깊게 관리만 하면 잘 자라게 되어 있다.
그런데 이 신앙이라는 나무가 자라는데에도 어떤 순서가 있다.
마치 흥부와 놀부에 나오는 호박 이야기처럼, 씨를 심자 마자 며칠 사이에 싹이 나고 자라서
금방 열매가 주렁 주렁 열리는 것은 소설같은 이야기에 불과하다.

우선 뿌리가 내려야 한다. 잔뿌리가 조금 가진 나무가 크고 강하게 자라는 것을 보았는가?
버섯과 전나무의 뿌리는 그 깊이가 결코 같지 않다.
하루 이틀만 물을 주지 않아도 노랗게 죽어가는 잡초와
매년 풍성한 과일을 많이 맺는 거대한 과일 나무의 뿌리는 절대로 같지 않다.

신앙에도 뿌리가 깊어져야 터가 굳어진다.
얕은 시냇물가에 발을 담그고 물장구치는 놀이는 재미있지만,
거기서 생계를 유지할 만큼 경제성있는 물고기들을 잡을 수는 없다.

이 신앙의 뿌리는 \"사랑 가운데\" 깊어져야 한다.
미움이 뿌리를 깊이 내리면 그것은 너무도 무서운 결과를 초래한다.
부유한 자들에게 대한 증오심이 가슴에 뿌리를 내리니 \"막가파\"와 \"지존파\"들이 생겼다.
욕심이 뿌리는 깊이 내리니 부정 부패와 사기와 불법이 생기는 것이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사랑 가운데 뿌리가 깊어지면 경우가 달라진다.
거기 이해와 용납과 허물을 덮어 주는 넓은 마음이 생기고,
거기서 자기 자랑이나 자기 만족이 아닌 남을 생각하는 마음도 싹이 튼다.

그리고 사랑 가운데 뿌리가 깊어지면, 그 위에 높고 거대한 믿음의 집을 지을 수 있다.
최근에 미국에 다시 세계 최고의 고층 빌딩을 세울 계획이라고 한다.
무엇이 가장 급한 일이겠는가?
아마 수 년에 걸쳐서 땅을 파고 기초 작업을 단단히 할 것이다.
그래야 하늘을 찌를 듯한 그 건물이 심한 바람과 태풍에도 견딜 수 있기 때문이다.

또 하나의 기도 내용은 이제 그리스도로 그 삶이 충만해 지기를 바라는 것이다.
\"능히 모든 성도와 함께 지식에 넘치는 그리스도의 사랑을 알아, 그 넓이와 길이와 높이
와 깊이가 어떠함을 깨달아 하나님의 모든 충만하신 것으로 너희에게 충만하게 하시기를
구하노라\"(3:18-19).

예수를 영접할 뿐 아니라 그와 더불어 살며, 사랑 가운데 뿌리가 깊어짐에 따라,
이제는 다른 성도들과 더불어 그리스도를 더욱 넓고 깊게 깨닫고 경험하며,
나아가서는 하나님의 그 모든 엄청난 보화로 가득해 지기를 기도하고 있다.

이 단계에 이르면 단순히 예수님이 나를 사랑하신다고 한 마디로 말하기가 어렵다.
그의 사랑의 넓이와 길이와 높이와 깊이가 어느 정도인지를 헤아려 깨닫게 됨에 따라
그 광대하시고 크신 하나님의 모든 것들로 우리의 삶이 풍성해 진다는 것이다.

예수님도 말씀하시기를 \"도적이 오는 것은 도적질하고 죽이고 멸망시키려는 것 뿐이요,
내가 온 것은 양으로 생명을 얻게 하고 더 풍성히 얻게 하려는 것이라\"(요 10:10)고 하셨다.
그저 목숨만 간신히 살아서 힘겹게 숨을 몰아 쉬며 식물인간처럼 사는 것이 아니라,
푸른 창공을 높이 나는 독수리처럼 힘있게,
그리고 먹이를 걱정하지 않고 바다에 유유하게 헤엄치는 큰 물고기처럼,
그 보다도 자기에게만 집중된 삶에서 이웃과 다른 민족에게도 도움의 손길을 돌리는
넉넉한 삶을 살기를 주님이 원하신 것이다.

예수님의 사랑의 넓이와 길이와 높이와 깊이에 대해서 곰곰히 생각해 본 적이 있는가?
주님의 가슴은 너무나 넓어서 그 품에는 언제나 여유가 있었기에 나도 포함된 것이고,
그의 사랑은 너무 길어서 아무리 멀리 도망가도 거기서도 나를 붙잡고 계시며,
그 사랑은 높은 사랑이어서 그 사랑에 한번 포로가 되면, 이 낮은 땅과 세상에만
마음을 둘 수가 없고, 저 높은 곳을 향하여 매일 소망하며 살게 하신다.
그리고 그 사랑의 깊이가 얼마나 깊은지, 실패와 죄책감과 공허함이라는 밑바닥에
좌절하고 앉아 있는 이에게까지 그 사랑의 손길이 미치는 것이다.

불순종과 불신 때문에 광야를 헤매던 이스라엘 백성을 향하여 하신 말씀을 들어 보라.
\"마치 독수리가 그 보금자리를 어지럽게 하며 그 새끼 위에 너풀거리며 그 날개를 펴서
새끼를 받으며 그 날개 위에 그것을 업는 것같이, 여호와께서 홀로 그들을 인도하셨고,
함께 한 다른 신이 없었도다\"(신 32:1).

다윗이 너무 심한 고통을 당하던 때에 새벽에 일찍 일어나 멀리 바다 끝으로 도망치려고 했
지만, 어느 틈에 주님은 거기 계셔서 \"이제 왔느냐?\" 하시는 것이다(시 139:9-10).
깊은 죄의식과 불안한 마음을 가지고 집에 돌아온 어느 탕자를 그의 아버지는 어떻게 맞아
주었는가? 방망이를 들고 나가서 때리고 버릇을 고쳐 주셨는가? 아니다.
멀리서 먼저 그의 걸음거리를 알아 보고 먼저 달려 와서 끌어 안아 주지 않았는가?
이것이 우리 하나님의 변함없는 사랑의 마음이시다.

그리고 이제 이 모든 일에 대한 박수와 영광은 결국 누가 받아야 하는가?
\"우리 가운데서 역사하시는 능력대로 우리의 온갖 구하는 것이나 생각하는 것에서 더
넘치도록 능히 하실 이에게, 교회 안에서와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영광이 대대로 영원
무궁하기를 원하노라. 아멘\"(3:20-21).

한 마디로 말하면 모두 하나님이 받으셔야 한다.
사람이 그것을 가로챌 때에 바로 이단의 교주가 되고, 사이비 종교 지도자가 된다.
성경에서도 헤롯왕이 하나님의 영광을 가로채서 어깨를 뻣뻣하게 하다가 벌레에 먹혀 죽었고,
구약의 사울왕도 교만하여 결국 문둥병에 걸려서 비참한 최후를 맞았다.

하나님이 받으실 영광을 우리가 가로채지 말자.
기도 응답도 자기 기도가 세서 응답받은 것처럼 자랑하지 말고,
사업이 잘되고 건강한 것도 자기의 실력과 운동 때문만이라고 장담하지 말자.
자녀들이 바르게 성장하는 것도 자기의 뛰어난 가정 교육 때문이라고 자랑하지 말고,
교회에서 즐겁게 봉사하고 섬기는 것도 자기가 아니면 안된다는 교만이 되지 않게 하자.
그 모든 것이 하나님의 은혜라는 사실을 잠시도 잊지 말자.

이 하나님은 우리가 기도하며 바라고 구하는 것보다 항상 더 좋은 것을 넘치게 주신다.
예를 들어서 200불이 필요해서 기도했는데, 어떤 경우에는 500불을 주시기도 하고,
아무 직장이나 먹고 살 수 있게만 해 달라고 기도했는데, 넉넉하게 하시기도 한다.

만일 우리가 일일이 구하는 것만 주시는 하나님이시라면 참으로 위험한 인생이 된다.
아침에 출근할 때에 \"오늘도 보호해 주옵소서!\"라고 대충 기도할 때도 있는데,
하나님은 우리의 운전대를 잡아 주셔서 생명을 보호하신 적이 얼마나 많으며,
\"저를 도와 주옵소서!\"라고 엉성한 기도를 드렸는데도,
하나님의 때에 기대보다 훨씬 좋은 것들로 응답하신 경험이 있지 않은가?

이제는 큰 것과 많은 것과 비싼 것과 새 것이 좋은 것으로 알던 성장의 수준에서,
더 귀하고 가치있고 의미있는 삶과 신앙을 위해서 노력하자.
근간에 Bob Buford 쓴 \"Half Time\"이라는 책에 말한 대로, 인생의 중간 지점에 와서,
이제는 \"From Success to Significance\" 즉 성공위주의 삶에서 의미있는 삶으로 변화를
시도하자. 특히 이 시대에는 교회의 외면적인 성장보다 성도의 내면적인 성숙이 더
중요하다는 사실을 마음에 각인하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