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베소서 제14강
에베소서 강해설교 14
부르심에 합당한 삶(엡 4:1-6)
에베소서는 내용에 있어서 크게 두 부분으로 나눌 수 있다.
앞의 1-3장은 교회와 성도에 관한 근본적인 신앙 원리를 제시한 것이고,
4-6장은 그 교회와 성도를 위한 구체적인 행동 지침을 말해 준다.
즉 앞 부분은 교실에서 배우는 이론이었다면, 이제부터는 현장에서의 실천인 셈이다.
마치 강의실에서 운전 요령을 배운 후에, 이제부터 복잡한 거리에서 직접 운전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비록 교실에서 필기 시험에 만점을 받아도, 실기에서 실패하면 운전면허를 못 딴다.
그리고 운전은 운전자와 다른 사람의 목숨이 걸린 것이기 때문에 매우 심각한 일이다.
사실 이론적으로 아무리 많이 알아도 실제로 사용될 수 없는 지식이라면 죽은 것이다.
어떤 사람이 유능한 농구 코치가 되는가? 농구에 관한 역사와 철학을 잘 아는 학자인가?
농구장을 잘 건설한 건축가나 내부 장치를 멋지게 한 실내장식가인가? 아니다.
왕년에 유능한 농구 선수로 날렸던 사람이 가장 좋은 농구 코치가 된다.
누가 군대 지휘관이 되어야 하는가? 군대에서 많은 훈련과 실전을 겪은 사람이 훨씬 좋다.
마찬가지로 우리가 교회나 신앙 생활에 대해서 책이나 설명을 듣고 아무리 많이 배워도,
가정과 학교와 직장이라는 실제의 삶의 현장과 무관한 것이면 아무 소용도 없다.
예수님이 제일 싫어하시면서 책망하시던 대상이 누구였는가?
말만 번드르르하고 행위는 전혀 그와 다른 위선적인 바리새인들이 아니었는가?
군대의 징집 명령서를 받으면 아무리 바쁜 일이 있어도 입대해야 한다.
외국에 여행 중이라도 대통령이 귀국하라고 부르면 만사를 젖혀 놓고 돌아가야 한다.
주말에 아무리 파티가 신난다고 해도, 학생은 다시 학생이라는 부름에 합당한 생활로
돌아가야 정상적인 학생으로 인정받는다. 이것이 바른 삶이다.
그래서 신앙 생활에서도 가장 근본적이며 시발점이라고 할 수 있는 것이 주의 부르심이다.
운전하다가 길을 잃으면, 잘 아는 곳이나 출발 지점으로 돌아가서 다시 찾는 것이 지혜다.
그리고 수학공부에도 기초가 튼튼해야 더 어려운 문제들도 풀어 갈 수 있다.
구구단이나 일차 방정식도 제대로 모르면서, 고등 수학을 풀려고 한다면 웃기지 않겠는가?
기준과 기본이 허술하면 한 동안은 버티다가도 어느 새 와르르 무너지고 만다.
이것이 바로 신앙에 있어서 주님의 부르심과 마찬가지라는 것이다.
군인으로 부름을 받았으면, 뇌물을 주면서 이리 저리 편한 자리만 찾아 갈 것이 아니라,
강한 훈련을 통해서 씩씩하고 정의롭고 용감한 군인이 되어야 한다.
사회 질서와 정의를 위해 부름받은 법조인이라면 신분에 맞게 스스로 법준수에 앞서야 한다.
그리고 인간의 생명을 다루는 의료인은 의료인대로, 자기 유익이나 돈보다는 환자의 생명을
더 귀하게 돌보는 것이 그에게 합당한 삶이다.
이와 마찬가지로 그리스도인은 신앙인답게 살라고 하는 특별한 부르심을 받았다.
우선 우리는 예수 안에서 복음을 통하여 하나님의 자녀로 부르심을 받은 자들이다.
정말 예수 그리스도를 주님으로 믿고 마음에 영접하고 의지한다면 이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모든 그리스도인이 다 하나님이 보시기에 합당한 삶을 살지 못하기 때문에,
세상에서 손가락질을 당하기도 하고, 법정 싸움을 벌이고, 서로 상처를 내는 것이다.
그러면서도 종교라는 옷을 입고, 가장 선량하고 멋진 모습으로 사람들 앞에 설 수 있다.
마치 가면 무도회처럼, 화려한 모습으로 가린 그 가면 뒤에는
어둡고 부끄러운 자신이 숨겨 있을 수도 있다는 것이다.
그래서 종교인들에게 있어서 가장 위험한 것이 선을 가장하는 위선이라는 것이다.
토마스 왓슨이 쓴 \"위선\"에 관한 도전적인 글을 읽었다.
\"위선자는 외형적으로 아름답지만, 그 속은 언제나 썩었고 어둡고,
위선자는 금색을 입힌 썩은 기둥이며, 신앙고백의 가면 밑에 전염병의 상처를 감춘다.
위선자는 눈이 하늘을 향하는 것 같지만, 마음은 땅에 속한 욕심에 가득하고,
위선자는 겸손을 가장하지만, 실제로는 출세를 위한 방편일 뿐이다.
위선자는 사람들이 보는 앞에서는 박수받을 일을 하지만, 가정과 골방을 등한시하고,
위선자는 성경은 끼고 다녀도, 마음에는 담아 두지 않는다.\"
이제 성도에게 마땅한 삶에 대한 사도 바울의 강력한 호소와 권고의 말을 깊이 생각해 보자.
\"그러므로 주 안에서 갇힌 내가 너희를 권하노니 너희가 부르심을 입은 부름에 합당하게
행하여\"(4:1).
바울은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하다가 옥에 갇힌 상황인데,
한번도 자기 연민이나 절망에 빠지지 않고, 오히려 더욱 복음에 불타는 마음을 가지고,
몸은 자유로워도 믿음 때문에 고난받는 감옥 밖에 있는 성도들을 격려하고 있다.
그는 감옥에서 나올 때까지 기다릴 수가 없을 정도로 중요하고 긴박한 마음이었기에,
하나님께 무릎을 꿇고 간곡한 심정으로 이 글을 써서 보내는 것이다.
\"너희가 부르심을 입은 그 부름에 합당한 삶을 살라!\"
이 말은 간단하게 쓰여진 한 줄이지만, 너무도 많은 의미를 함축하고 있다.
당시에 유대교와 이단과 사이비 종교와 우상 종교들 때문에, 순전한 신앙을 유지하기가
너무 어려워서 많은 성도들이 성도로서 합당치 않은 일들을 하고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하나님의 자녀답지 않고, 천국 백성답지 않게, 죄의 흙탕물에 뒤섞여서 세상과 타협하고,
자신을 보호하기 위해서 혹 비겁한 일도 서슴치 않고 행하는 사람들이 있었던 것이다.
그것은 성도로서 결코 합당치 않은 삶이라는 것을 강하게 말해 주고 싶었던 것이다.
그러면 어떻게 사는 것이 하나님의 부르심에 합당한 덕목이며 삶인가?
성경 전체에 무수하게 많은 것들이 쓰여 있지만, 오늘 성경 본문에서 몇 가지를 보자.
그리고 모두 자신에게 적용하고자 하는 마음으로 하나님의 말씀을 경청하자.
그 구체적인 내용이 4:2-3절에 언급되어 있다.
이 구절에서 우리는 적어도 네 가지의 실제적인 요소를 발견한다.
\"모든 겸손과 온유로 하고, 오래 참음으로 사랑 가운데서 서로 용납하고, 평안의 매는
줄로 성령의 하나되게 하신 것을 힘써 지키라\"(4:2-3).
첫째는, 모든 것에 있어서 겸손한 것이 그리스도인에게 합당한 덕목이다.
요즘 세상에는 겸손이라는 단어가 별로 매력이 없다.
어딘가 약한 느낌을 주거나, 허리를 굽히고 자기 의견을 제대로 제시하지도 못하는
어떤 소극적이며 부정적인 인상을 주기도 한다.
그러나 원래 의미의 겸손은 상당히 강한 단어이다.
마치 잘 훈련된 크고 건강한 군마처럼, 언제 어디서나 펄펄 날 듯이 뛸 수 있지만,
기수의 손에 이끌려 계곡을 뛰어 건너거나 불길을 뚫고 지나가라고 하면 서슴치 않고 달리며,
또한 반드시 가야 할 곳에서는 아무리 달리고 싶어도 이유가 없이 선다.
이것이 진정한 겸손 속에 숨겨진 의미이다.
초등 학교에서 배운 대로 겸손의 반대말은 교만이다.
제 잘난 척을 하고, 제 멋에 살며, 자기 자랑하기에 바쁜 것이 교만이다.
교만한 사람은 종종 자기가 한 작은 일은 몇 배로 불려서 크게 말하면서도,
남이 한 큰 일은 마치 흔한 일처럼 대수롭지 않게 말하면서 지나치려고 한다.
그런데 교만한 사람일 수록 열등의식이 강하다는 사실을 아는가?
진정한 의미의 겸손은 겉보다 속에 아주 강한 힘을 가지고 있다.
그래서 성경은 말하기를 겸손한 자가 지혜를 얻고, 겸손한 자에게 하나님이 은혜를 베푸시며,
겸손한 자의 소원을 들어 주신다고 말한다.
즉 하나님은 똑똑하고 자기 스스로 의로운채 하는 자보다 겸손한 자에게 가까이하신다.
그러므로 겸손하지 않은 자는 하나님의 은혜와 기도 응답을 기대할 수 없다.
그래서 성경은 서로 겸손으로 허리를 동이라고 말한다(벧전 5:5).
허리끈이 끊어지면 바지가 흘러 내려서 앞으로 달려 가기가 어려운 것처럼,
겸손으로 허리를 단단히 묶어야 믿음의 삶에 탄력이 붙는다.
이것은 겸손이 힘이 되라는 것이요, 겸손을 승리와 성공의 비결로 삼으라는 것이다.
구약의 모세는 그 겸손함이 다른 누구보다도 뛰어났다고 성경은 칭찬하였고,
교만한 사울왕은 끝내 비극적인 종말을 맞았다.
그런데 예수님은 여기서 한 가지 우리가 주의할 것을 경고하셨다.
그것은 예수님 당시에 가장 경건하고 가장 의로운 자처럼 떠벌이던 바리새인들처럼
일부러 겸손한 척 하는 것인데, 그것은 오히려 범죄하는 것이라고 경고한다(골 2:18).
결국 교만하면 자기 잘난 맛에 도취되어 살다가 무의미한 인생을 마치지만,
겸손하면 하나님께로부터 칭찬을 받으니, 인생의 끝이 좋도록 되어 있다.
그런데 경계할 것은 겸손은 그것을 얻었다고 생각하는 순간 잃어버린다는 사실이다.
둘째는, 온유함이 그리스도인들에게 합당한 삶의 덕목이다.
이 온유라는 단어도 얼핏 보기에는 아주 허약한 사람들을 생각나게 한다.
목소리도 여리고, 늘 부드럽게 사람들을 대하고, 다른 사람과 대결하지 않는 느낌을 준다.
맺고 끊는 것도 없어 보이고, 무엇 하나 딱부러지게 하는 것이 없이 허술한 느낌도 준다.
원래 온유라는 단어는 거칠고 무례하고 시끄럽고 자기 주장이 강한 것에 반대이다.
그런데 딱딱한 돌이 깨어지기 쉬운가, 아니면 힘없어 보이는 스폰지가 깨어지는가?
사람의 마음을 울리는 것은 커다란 북소리가 아니라 작은 피리 소리이다.
온유하다는 것은 결코 무능하거나 나약하거나 뼈없는 무골충(無骨蟲)이 아니다.
자기 주장도 없고, 수동적이며 남에게 끌려 다니는 것이 결코 아니다.
그것은 힘을 통제하는 것을 의미한다. 그래서 온유와 겸손은 아주 가까운 친구와 같다.
실제로 떠벌이는 사람보다 입이 무겁고 부드러운 사람이 더 무서운 경우가 많다.
우리 속담에도 빈 깡통이 소리가 크고, 알곡보다 쓸모없는 잡초가 더 잘 자라는 것과 같다.
우리 속에 귀한 것으로 가득히 차 있지 않으면, 허풍을 떨거나 위선을 떨게 된다.
그러나 정말 실력있고 속이 찬 사람은 쉽게 흔들리지 않고, 가볍게 움직이지 않는다.
전에는 지능지수를 말하는 IQ가 얼마나 좋은가를 많이 말했지만,
요즘에는 그의 품성과 감성을 다 포함한 지수로 EQ라는 말이 더 많이 쓰인다.
그리고 대기업에서도 지능이 높은 사람보다는 감성적으로 안정된 사람을 선호한다.
비록 꾀는 없고 요령은 부족하지만, 성품이 안정되고 성실하며 충성스런 사람이
처음에는 남에게 지는 것처럼 보이지만, 훈련만 잘 받으면 후에 남보다 앞서 가는 것을 본다.
특히 성품이 너무 느리거나 급하든지, 반면에 결단성이 없어서 항상 우유부단하거나,
한편 너무 성급하여 자주 실수한다면, 하나님께서 그런 것들도 바꾸시고 다스리셔서,
오히려 하나님의 교회를 위해서 장점으로 쓰시도록 간구하라.
불같은 성품을 가졌던 베드로가 변해서 예수님의 강력한 제자가 된 것을 기억하라.
하나님은 우리의 약점까지도 성령으로 변화시켜서 하나님의 일에 귀하게 쓰실 수 있다.
하나님께는 고침받지 못할 사람이 아무도 없다고 믿어도 된다.
셋째는, 오래 참음으로 사랑 가운데서 서로 용납하는 것이 그리스도인에게 합당하다.
그리스도인에게 합당한 인품 가운데 하나는 오래 참는 것이다.
이것은 일반 모든 사람이 참는 정도에서 그치는 것이 아니라 그 이상까지 참는 것이다.
어린 아니나 어른이나 모든 사람은 어느 정도 다 참을성이 있다.
뜨거운 물을 참고 마시고, 주사를 맞으면서 아프지만 참는다.
화가 날 때마다 조금도 참지 않고 다 화를 내다가는 아마 그 자신이 단명할지도 모른다.
그러나 여기서 의미하는 참음은 그런 정도를 넘는 오래 참음이다.
참다가 못 참을 정도에 이르렀는데, 놀랍게도 그 단계에서도 참게 되는 것이다.
이것은 우리의 힘으로만은 불가능하다. 성령의 열매이다.
그런데 성령께서 우리 마음과 생각을 주장하시면, 자신도 놀랄 정도로 참는 것이 가능해진다.
예전 같으면 당장 주먹이 날아가거나 칼부림이 날만 할 텐데, 그것을 참게 되는 것이 놀랍다.
이것은 비단 자기가 당하는 고난이나 고통만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다.
그래서 단점이 많아 보이는 이웃을 서로 용납하는 것이 필요하다.
남의 실수를 조금도 용납하지 못하고 벌컥 화를 내거나 다투는 이들이 있다.
그런데 실제로는 자신도 그런 실수를 종종 범하고 있지 않은가?
\"남의 흉을 보면서 배운다\"는 말이 있듯이, 비판을 많이 하는 사람은 비판을 많이 받는다.
은행에서 진짜와 가짜 화폐를 구별하는 방법에 관한 이야기를 들었을 것이다.
가짜를 연구하는 것이 아니라, 진짜를 많이 다루다 보면 쉽게 가짜가 구별된다는 것이다.
이단을 너무 깊이 연구하다 이단에 빠질 우려도 없지 않다.
한국의 어느 여자 교수는 무속(미신)을 깊이 연구하다가 결국 무당이 되고 말았다.
귀신을 너무 많이 생각하고 연구하다가는 귀신에 들리기 쉬운 것도 마찬가지이다.
이제 사랑 가운데서 서로 용납하자.
우선 부부 사이에 다른 성격과 생각을 판단하거나 비판 거리로 삼지 말고,
먼저 용납한 후에 잘못이 분명하게 드러나면 그때에 고치도록 시도하자.
부부 모두가 다 온전치 못하기 때문에 서로 그렇게 짝을 지으시고 도우며 살게 하셨다.
그래서 혹 부부 싸움에서 한 쪽이 이긴다고 해도 그것은 같이 지는 것이다.
다 같이 이기려면 서로 약점과 허물을 이해하고 받아 주고, 보완해 주어야 한다.
남편이 아내를 자기가 원하는 성품으로 변화시키려고 하거나,
아내가 남편을 고치려고 하면 늘 고민이요 갈등이다.
그것이 아주 참을 수 없이 나쁘고 자녀와 남들에게 악한 영향을 끼치는 심각한 것이라면,
어찌하든지 도와서 고칠 수 있도록 노력하겠지만,
그렇지 않다면 그의 성격과 됨됨이를 그대로 받아 들이는 사랑과 용납이 필요하다.
그런데 약점만 보이는 사람에게도 반드시 장점이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서로 그것을 격려하여 그가 잘 할 수 있는 것을 하게 하는 것이 지혜다.
부모와 자녀와의 관계에서도 그렇다.
물론 부모는 자녀가 바로 성장하도록 고쳐 줄 책임도 있다.
특히 자녀들이 어릴 적에는 아직 굳어지지 않았으므로 좋은 형상을 갖도록 도와야 한다.
그러나 그 방법에 있어서 부모 자신이 본이 되지 못하면 그 교육은 점수를 얻기 어렵다.
예수믿고 많이 변하기는 해도 성품 자체가 다 바뀌기는 어렵다.
그러나 주님은 우리의 약점을 장점으로 변화시켜서 선한 일에 Tm시기도 한다.
자기는 밭고랑을 고르게 갈 줄 모르면서, 아들에게 바르게 갈라고 하면 되겠는가?
바다의 게가 자기는 옆으로 걸으면서 새끼 게들을 보고 똑바로 걸으라고 한다면 우습다.
자신은 늦잠을 자면서 아이들에게만 일찍 일어나라고 호통을 친다면 잘 듣지 않을 것이다.
그리고 교회에서 성도들 사이에서는 더욱 이런 오래 참음과 용납이 필요하다.
교회야 말로 수 많은 다른 배경을 가진 다양한 성품과 신앙 색깔의 사람들이 모인 곳이다.
그리고 다 지난 날에 경험한 것이 다르기 때문에 요구 사항이 같을 수가 없다.
만약 그 많은 의견들을 다 받아들이면 결국 사공이 많아져서 배가 어디로 가겠는가?
어느 분의 말처럼 산으로 가는 것이 아니라 물에 침몰하고 만다.
그래서 정해진 방향과 목적지가 분명해야 하며, 선장이 필요한 것처럼,
교회에서도 목회의 방향과 사명이 뚜렷하여, 성도들과 함께 한 마음으로 가야 한다.
그리고 성도들 사이에서는 좀 더 참고 서로 용납하도록 힘쓰자.
특히 세상에서 속이 좁다고 비판을 받기 쉬운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더욱 그렇게 하자.
기독교인들이 법정에서 마주 대하게 되면 골탕먹는 것이 판사라는 말에 가슴이 철렁한다.
이스라엘 백성이 사울왕이 죽은 후에 왜 그렇게 어려웠는가?
각자 자기들의 소견대로 주장하고 고집하는 바람에 나라가 엄청난 혼란에 빠진 것이다.
깡패나 이단집단들은 자기들끼리 잘 뭉치고 서로 용납도 잘하지만,
어떤 경우에 보면 교회 다니는 이들이 더 마음이 올종해 보일 때가 있다.
우리가 그런 나쁜 인식이나 소문을 완전히 뒤집어 놓거나 불식시키자.
다만 이단과 사이비와 부패한 것들은 절대로 용납할 수 없다.
여러 해 동안 한국의 대학생들에게 유혹이 되었던 JMS라는 대학생 동아리(서클)가
드디어 서울 대학 당국에서 축출되었고, 성폭행을 당한 사람이 부끄러움을 무릎쓰고
그 사실을 공개하는 바람에, 사이비 기독교 교주의 악한 행적이 다 드러난 것이다.
교회를 해롭게 하거나 성도를 시험들게 하는 것를 방치하지 않는 것이 용기요 분별력이다.
우리가 마음을 넓히자. 아무리 심한 경쟁 사회이지만 교회에서만은 조금씩 양보하자.
아무리 사회에서 서로 높아지려고 치열한 격전을 벌이지만, 우리는 조금씩 손해를 보자.
그것이 당장은 지는 것 같지만, 길게 보면 결국 이긴다.
넷째는, 성령님이 우리를 하나되게 하신 것을 힘써 지키는 것이다.
\"몸이 하나이요 성령이 하나이니 이와 같이 너희가 부르심의 한 소망 안에서 부르심을
입었느니라. 주도 하나이요 믿음도 하나이요 세례도 하나이요, 하나님도 하나이시니 곧
만유의 아버지라. 만유 위에 계시고 만유를 통일하시고 만유 가운데 계시도라\"(4:4-6).
이것이 바로 유기체적이 공동체의 모습이다.
우리 몸의 모습처럼 손과 발과 머리와 다리가 모양과 기능이 다르면서도
한 몸에 붙어서 한 방향으로 움직이고 있는 것과 같다.
즉 다양성 가운데 이뤄지는 연합을 의미하다.
여기서 일곱 가지의 하나됨을 볼 수 있다.
첫째로, 몸이 하나이다. 즉 몸된 교회는 하나라는 것이다. 교파와 교단은 다르고, 지역에
따라 사방에 교회들이 있지만, 그것은 예배당이 그렇게 많다는 것이며, 교회는 하나이다.
둘째로, 성령이 하나이다. 교파에 따라서 성령에 대한 약간의 수용 방법이 다르고, 강조가
다르기는 하지만, 여전히 성령은 한 분 뿐으로서, 하나님의 영이요 그리스도의 영이며, 그가
진리의 영이시다.
셋째는, 우리의 소망이 하나이다. 물론 사람마다 소원과 희망이 다르다.
그러나 궁극적으로 우리의 하나님의 나라에서 영원히 거하는 한 소망의 부르심을 받았다.
넷째는, 우리의 주님이 한 분이시다. 세상에는 종교도 다양하고, 사상과 주장도 많지만,
우리가 섬기고 사랑하는 주 예수님은 한 분이다.
다섯째는, 믿음이 하나이다. 물론 믿음의 성숙과 그 깊이는 조금씩 다를 수 있다.
항상 부드러운 손으로 돌봄을 받아야 간신히 신앙을 지키는 아직 어린 신앙인이 있는가 하면,
남을 돌봐 주고, 유혹과 시련을 당해도 당황하거나 흔들리지 않는 성숙한 이가 있다.
그러나 주 예수를 믿는 신앙의 종류는 하나라는 사실이다.
여섯째는, 세례가 하나이다. 물을 뿌리는 것과 물에 잠기는 세례 방식은 달라도,
성부, 성자, 성령의 이름으로 거행하는 세례는 하나이다. 세례를 자주 받는 것이 아니다.
사실 성령의 세례도 한번이며, 단 성령 충만이 반복되는 것이다.
일곱째는, 하나님이 한 분이라는 것이다. 너무나 당연하고도 분명한 진리이다.
미신과 힌두교와 일부 종교들이 여러 신들을 세우고 의지하다가 마음에 들지 않으면
내팽게쳐 버리기도 하지만, 우리의 창조주 하나님은 한 분이시다.
최근에 티베트의 종교 지도자인 달라이 라마가 자주 뉴스에 등장하고,
종종 대도시를 순회하며 종교 강연을 한다.
그런데 자본주의 물질사상에 이제 만족을 느끼지 못하는 많은 현대인들이
그의 말에 귀를 기울이며, 무엇인가 새롭고 놀라운 말을 듣고 싶어서 많이 모인다.
그 내용은 간단하다. 세상에 하나님은 없으며, 모든 인간 속에 신이 있으므로,
그 신을 찾아 내고, 스스로 신처럼 살라는 것이다. 이것은 다른 종류의 범신론이다.
이것이 뉴 에이지 사상의 대표적인 특징이다.
그래서 서양 사람들이 자꾸 참되신 하나님을 멀리 하고 인간 중심으로 돌아가는 것이다.
그런데 성경은 그 반대로 말한다.
인간 속에 선한 것보다는 악한 것들이 더 많아서, 항상 선악이 갈등하며 싸운다고 말한다.
그러나 예수 안에서 먼저 하나님과 화목되어 하나가 되고 나면, 비로소 이웃과도 화목하고,
더불어 살 수 있다고 말한다.
이제 우리의 삶을 다시 차근 차근 돌이켜 보자.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스스로 자기 삶이 변한 것을 의식하며, 또 가까이 있는 사람들도
그것을 알게 된 것이, 과연 자기의 결심이나 뚝심 때문이었는가?
하나님의 은혜요, 그가 부르신 것이 아니겠는가?
아브라함은 하나님의 부르심에 합당하게 순종하며 살아서 믿음의 조상이 되었지만,
사울은 왕으로 부르신 것에 합당치 않게 살아서 비극적인 최후를 맞았다.
사무엘은 선지자로 부르심을 받아서 합당하게 살았기에 위대한 인물로 기억되지만,
엘리라는 사람은 제사장으로 부르심을 받았으나 합당치 못하게 살아 슬픈 죽음을 당했다.
어떤 사람은 평범한 어부의 신분에서 예수의 제자로 부르심을 받았고,
어떤 사람은 불량배의 인생을 살다가 전도자와 선교사로 부르심을 받기도 하였다.
우리는 모두 하나님의 자녀요 거룩한 백성으로 부르심을 받았다.
과연 어떻게 살아야 그 부르심에 합당한 삶인가? 다시 깊이 생각하며 살아 가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