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베소서 제16강
에베소서 강해설교 16
\"더 높은 곳을 향하여\" (엡 4:13-16)
\"주를 앙모하는 자 올라가, 올라가, 독수리같이,
모든 싸움 이기고, 근심 걱정 벗은 후, 올라가, 올라가, 독수리같이.
주 앙모하는 자, 주 앙모하는 자, 주 앙모하는 자, 늘 강건하리라\"(찬 394장).
예수를 믿는다는 것은 땅에만 관심을 두고 살던 우리의 시야가 하나님을 바라 보며,
저 높은 곳, 더 높은 곳을 향하여 우리의 생각과 삶의 방식이 변하는 것을 의미하기도 한다.
나 자신 밖에 모르던 존재에서, 남도 생각해 주게 되고,
받고 움켜 쥐기만 하던 삶에서, 나누고 베푸는 것에서 기쁨을 찾는 것을 의미하기도 한다.
그리고 정상적인 신앙인은 언제나 더 높은 곳을 향하여 부단히 올라간다.
등산을 해 본 사람은 알 것이다.
비탈길을 오르기가 힘들고 어렵지만, 일단 정상에 오르기만 하면 그 상쾌함은 놀랍다.
왜 그 높은 히말라야를 목숨을 걸고 등반하느냐는 질문을 받고,
어느 등산가는 \"거기 산이 있어서...\"라고만 대답했다는데,
사실은 그 위험과 고통을 무릎쓰고 산을 정복하는 스릴과 기쁨 때문일 것이다.
그리고 그런 산의 정복은 무서운 추위와 눈사태만 아니라 자신과의 싸움이 더 힘든다고 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자신과의 싸움에서 이기며 더 높은 곳을 향해서 가야 한다.
우리의 신앙 생활도 그저 낮은 곳에서 아무 부담감이나 책임도 느끼지 않으면서
남의 대접만 받으며 자기 만족에 취하여 사는 것이 아니다.
죄와 유혹과 세상의 악들에 대한 영적인 전쟁터에 나선 군인처럼,
악에 빠지지 않도록 정신을 차리고 어둔 세상에서 승리하며 살아야 한다.
그러면 우리 신앙의 목표는 구체적으로 어디에 있는가?
\"우리가 다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것과 아는 일에 하나가 되어 온전한 사람을 이루어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이 충만한 데까지 이르리니\"(4:13).
여기서 우리는 우리가 붙잡아야 할 두 가지의 확실한 목표점을 발견할 수 있다.
첫째는, 하나님의 아들 예수님을 믿고 아는 것에 하나가 되는 것이다.
알지도 못하면서 무턱대로 믿는다고 덤비는 것은 위험하고,
알면서도 믿지 않는 것은 교만이요 의도적인 불순종이며, 그것은 죄다.
한 쪽에 치우치면 언제나 비정상적이며 불건전한 종교 생활에 휘몰리고 만다.
그래서 신앙에 있어서 믿는 것과 아는 것은 별개의 것이 아니고 동전의 앞뒤면과 같다.
우선 무엇을 믿어야 하는지 분명히 알라.
성경과 복음에 대하여 짐작이나 대강 추측으로 스스로 결론을 내리지 말라.
여기 저기서 주워 들은 조각 지식을 가지고 성경을 판단하지 말라.
가끔 다른 사람들의 어깨 너머로 들은 것들을 가지고 복음을 오해하지 말라.
\"복음이 과연 무엇입니까?\"라는 진지한 질문을 받았다면 어떻게 대답하겠는가?
그저 늘 듣던 대로 \"예수믿는 것\"이라고 간단하게 답변하겠는가?
그러면 예수를 믿는다는 것이 무엇인지를 물으면 어떻게 대답하겠는가?
혹 이런 질문까지 하면 귀찮다는 듯이 \"그런 건 목사에게 물어 보시오\"라고 할 것인가?
둘째는, 믿고 아는 것에 하나가 되면, 그리스도를 온전히 닮게 된다는 사실이다.
믿음과 바른 지식이 하나가 될 때에 비로소 신앙이 바르게 성숙한다.
믿음과 지식 어느 한 쪽에 치우치지 말라.
어느 신학교에서는 신학만 가르치고 예수를 경험하게 하지 못하기 때문에,
신학교를 졸업해도 복음에 대한 뜨거운 열정이 전혀 없어서 다만 삯군이 될 뿐이다.
한편 복음적인 신학 지식을 가르치지 않고,
단기간에 걸쳐서 신앙 체험을 주로 강조하는 신학교를 나오면 종종 오류에 빠지기도 한다.
그러다 보니, 성경을 바르게 가르치고 전하기보다는
이상한 신비 체험이나 성경적 근거가 희박한 이상한 것들을 강조하다가
급기야는 자기가 마치 하나님이나 된 것처럼 비뚤어지는 경우가 생기는 것이다.
이런 신앙의 목표를 가져야 할 필요성은 무엇인가?
\"이는 우리가 이제부터 어린 아이가 되지 아니하여, 사람의 궤휼과 간사한 유혹에 빠져
모든 교훈의 풍조에 밀려 요동치 않게 하려 함이라\"(4:14).
신앙적인 어린 아이 단계에 머물러 있지 않게 하기 위함이다.
그래서 세상의 궤휼과 유혹에 속임을 당하지 않고, 요동하지 않기 위해서다.
어린 아이들에게는 몇 가지의 공통점이 있다.
무엇이든지 남에게 줄 줄 모르고 자기만 가지려고 한다.
남을 돌보는 것은 고사하고 항상 누구의 돌봄을 받아야 한다.
그리고 스스로 음식을 먹을 수 없어서, 누군가가 떠먹이거나 씹어 주어야 한다.
그래서 집 안에서는 어린 아이가 상전이 되기 쉽다.
신앙이 성숙해지면 여러 면에서 변화가 온다.
우선 성경 말씀을 듣고 읽는 태도부터 달라진다.
설교를 들으면서 계속해서 잠에 빠지는 데에는 설교자가 졸게 하는 이유가 가장 크지만,
한편 성경 말씀에 관심이 별로 없이 듣는 사람에게도 문제가 있다.
중국을 잠시 방문했을 때가 기억난다.
그곳에는 신학교 훈련을 받은 사람들이 거의 없기 때문에,
예전에 일찍 예수를 믿은 노인이나 어디서 잠시 교육을 받은 사람들이 설교하는 것이 예사다.
그런데도 추운 겨울 그 이른 새벽에 냉기가 도는 예배당에는 앉을 틈이 없을 정도로 많은
성도가 매일 그렇게 모여서 성경 읽어 주고 조금씩 설명해 주는 것을 듣는 것이다.
설교하는 사람이 달변도 아니고, 유창하지도 않고, 학식도 적지만,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니 꿀송이처럼 달게 말씀을 받아 먹는 것이다.
교회에 다닌지 벌써 여러 해 혹은 수 십년이 되었는데도 여전히 영적인 어린 아이와 같은가?
아직도 누군가가 이끌고 오지 않으면 예배에 올 수 없고,
아직도 주변 사람들에게 인정받기 위해서 봉사하고,
자기의 기도가 원하는 대로 응답되지 않으면 심술이 나서 교회를 등지지는 않는가?
고린도교회가 그런 문제로 많은 골치를 앓았다고 사도 바울은 지적한다.
유식한 자들도 많고, 세상 문화가 화려한데도 불구하고,
신앙적으로는 젖이나 먹고 단단한 음식은 먹을 수 없는 자들이라고 안타까와하 것이다.
어느 성도가 자기 교회의 목사를 위하여 쓴 기도문을 읽고 가슴이 뜨거워진 적이 있다.
성숙한 성도의 기도문이어서 여기 소개한다.
\"목사님을 위한 나의 기도.
하나님 아버지, 저로 하여금 목사님을 돕는 든든한 기둥이 되게 할지언정,
그의 힘을 빼는 육체의 가시같은 존재나,
그의 어깨를 짓누르는 짐이 되지 말게 하옵소서.
그를 내 생각으로 주장하고 무거운 부담을 갖게 하기보다는
그의 손을 높이 들어 주는 자가 되게 하옵소서.
다른 사람들의 영혼을 위하여 더 많은 시간을 사용할 수 있을지언정
나의 허망한 욕심을 충족시켜 주려고 아까운 시간을 낭비하지 않게 하소서.
모든 성도의 영혼을 책임진 목회자로서 충성하게 하옵소서.
그가 나의 비위를 맞추기 위해서 귀한 시간을 쏟지 않게 하옵소서.
그가 나를 위해서 무슨 일을 해 줄 것인지 나의 이기적인 마음을 제하시고,
내가 그를 위해서 무엇을 해 줄 수 있을까를 생각하게 하옵소서.
주님, 저로 하여금 교회와 목사님을 더 섬기고 사랑하게 하시되,
그가 나보다는 교회와 다른 성도들을 더 사랑하는 것이 나의 기쁨이 되게 하옵소서!\"
이제는 자신을 위한 기도에 그치지 말고, 남을 위해 기도로 지원하는 성도가 되자.
이제는 자기 가족과 직장과 내 교회만이 아니라 이웃 민족과 나라를 위해서도 기도하자.
이제는 내 요구 사항을 제시하기보다는 하나님의 뜻이 이뤄지기를 더 소원하자.
이제 예수믿는 신앙의 목표점을 향하여 달리는 자에게 필요한 자세는 무엇인가?
\"오직 사랑 안에서 참된 것을 하여 범사에 그에게까지 자랄지라. 그는 머리니 곧
그리스도라\"(4:15).
첫째로, 사랑 안에서 진실하고 예수님을 닮아간다는 목표에서 벗어나지 않아야 한다.
여기서 의미하는 진실한 사랑은 사람들을 좋아하거나 애정을 갖는 뜻이 아니다.
상대방을 이해하고 용납하고 있는 그대로 받아 들이되, 거기 진실함이 있을 때에
범사에 예수님을 닮을 수 있다는 것이다.
범사에 예수님 만큼 자란다는 것은 무슨 말인가?
사람을 사랑하는 데 있어서 예수님을 닮아간다.
불쌍한 사람들을 돕는 일에 있어서 예수님을 닮아간다.
복음에 대한 열정에 있어서도 예수님을 닮아간다.
하나님께 대한 철저한 순종에 있어서 예수님을 닮아간다.
하나님께로부터 위탁받은 것은 끝까지 완성하는 것에도 예수님을 닮아간다.
무엇보다도 그 인격에 있어서 예수님을 닮아가는 것이 곧 그에게까지 자라는 것이다.
그리고 그렇게 믿음이 성숙해 가기 위해서 혼자서는 불가능하다.
자기 혼자서만 의롭고, 혼자서만 경건하고, 혼자서만 깨끗한 것으로는 안된다는 것이다.
그래서 서로 격려하고 밀고 당기는 협력과 사귐과 한 마음이 필요한 것이다.
신앙을 목표를 향해 달리는 자에게 필요한 다른 요소는 무엇인가?
\"그에게서 온 몸이 각 마디를 통하여 도움을 입음으로 연락하고 상합하여 각 지체의
분량대로 역사하여 그 몸을 자라게 하여 사랑 안에서 스스로 세우느니라\"(4:16).
둘째로, 몸된 교회 성장의 근원은 예수 그리스도라는 사실이다.
생명이 없는 돌맹이나 흙더미에서는 생물이 자랄 수가 없다.
거기 생명의 씨앗이 심겨져 있어야 비로소 자랄 수 있는 근거가 된다.
예수 그리스도를 생명의 구주로 믿고 받아 들였는가?
그렇다면 이제 자라 갈 수 있는 확실한 근거가 생긴 것이다.
생명이 그 속에 들어 간 것이며, 생명의 씨가 뿌려진 것이다.
\"이 복음이 이미 너희에게 이르매 너희가 듣고 참으로 하나님의 은혜를 깨달은 날부터
너희 중에서와 같이 또한 온 천하에서도 열매를 맺어 자라는도다\"(골 1:6).
즉 우리 신앙의 뿌리는 신학이나 체험이나 지식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인 것이다.
셋째로, 온 몸이 각 지체를 통해서 서로 도움을 입는다.
어느 나무든지 우선 뿌리가 박힌 후에는 줄기를 따라 가지가 뻗어 나가게 된다.
예수님도 \"나는 포도나무요 너희는 가지니 저가 내 안에 내가 저 안에 있으면 이 사람은
과실을 많이 맺나니, 나를 떠나서는 너희가 아무 것도 할 수 없음이라\"(요 15:5)고 하셨다.
가정과 교회에서 서로 돕고 지낸다는 것은 너무도 중요하다.
주일 마다 예배에 참석한 이들을 위해서 자원하여 자기 시간과 물질을 들여서
따뜻한 음식을 준비하는 이들이 없으면 우리 교회는 상당히 삭막해 질 것이다.
이른 아침에 먼저 나와서 예배실을 준비하는 일꾼들이 없다면 아마 크게 곤란할 것이다.
막무가내의 어린 아이들을 돌보는 손길이 없다면 엄마들이 어떻게 마음놓고 예배드릴까?
그런데 이 모든 섬김에는 커다란 줄기가 하나 있는데, 즉 예수를 사랑하는 믿음의 마음이다.
예수님께 대한 그러한 믿음과 순종의 마음이 없으면, 아마 돈을 줘도 안 할 것이다.
넷째로, 각 지체가 서로 연결되고 서로 협력하는 것이다.
우리의 몸은 결코 따로 따로 각자의 행동이 허용되지 않는다.
어느 날 피곤에 지친 두 발이 불평을 털어 놓기 시작했다.
손톱에는 예쁜 물감을 들이기도 하고, 멋진 장갑을 끼기도 하며,
또 그 손으로 유명한 사람들과 악수를 하는가 하면, 아름다운 것들을 만지기도 한다.
그리고 여성들의 손에는 신사가 입을 맞추기도 하는 것이 아닌가?
그런데 발은 무얼 하는가? 항상 냄새나는 구두 속에 갇혀 있어서 아무도 봐 주지 않고,
온 몸을 다 지탱하느라 항상 가장 피곤한 일만 하는데, 쓰다듬어 주는 사람이 없다는 것이다.
그래서 화가 난 발이 그날부터 움직이기를 거부하기 시작했다.
몸이 멋진 식당에 가고 싶어도 발이 전혀 움직여 주질 않고,
심지어 목이 말라서 물을 마시러 가려고 해도 발이 땅바닥에서 꼼짝을 안하는 것이다.
도무지 발이 조금도 움직이려 하지 않으니 앉은 채로 굶어 죽게 된 것이다.
힘이 다 빠진 온 몸은 서 있을 수도 없어서, 주저 앉다가 급기야는 누워버리고 말았다.
그런데 놀란 것은 몸의 다른 부분을 골탕먹이려다 보니 자기 자신도 힘이 다 빠진 것이다.
음식을 먹지 않아서 온 몸에 힘이 없으니, 자기만 힘을 낼 도리가 없는 것이다.
막상 급한 일로 자리에서 일어서려고 하다가 힘이 없어 푹 쓰러지고 말았다.
그래도 혼자서 해 보려고 안간힘을 쓰지만, 도무지 몸 전체가 말을 들어 주지 않는 것이다.
그렇게 계속 고집을 피우다가는, 손은 고사하고 자기도 함께 굶어 죽고 말 것이 분명했다.
그제서야 비로소 발은 비록 자기가 아무의 눈에도 띄지 않는 숨겨진 곳에 있고,
아무도 자주 쓰다듬어 주지 않지만, 자기의 역할이 얼마나 중요한지를 깨닫고 회개했다.
이것이 바로 서로 연결된 자들의 협력이요 조화다.
다섯째로, 각 지체는 주어진 분량대로 그 역할에 충실해야 한다.
우리의 믿음은 한 종류이다. 즉 예수 그리스도를 구세주와 주님으로 믿는 것이 같다.
그러나 그 믿음 뿌리의 깊이가 조금씩 다르고, 그 높이도 다양하다.
이제 처음으로 작은 뿌리를 내리기 시작한 믿음의 사람이 있는가 하면,
신실한 믿음으로 뿌리를 깊게 내려서, 찬 바람의 환난이 와도 끄떡도 하지 않는 이가 있다.
그래서 이제 막 신앙 생활을 시작한 이들은 교회에서도 봉사하고 일하려고 하기보다는
차근 차근 하나님의 말씀의 기초부터 다져 가면서 배우는 것이 중요하고,
오래 믿고 견고한 이들은 밖에 드러나기보다 뿌리처럼 보이지 않는 곳에서 섬겨야 한다.
어느 교회나 뿌리가 견고해야 그 위에서 작은 가지들이 힘있게 자란다.
그리고 꽃을 피우는 것은 뿌리가 아니라 새 가지들인 것을 기억하라.
사람들은 밖에 보이는 가지와 꽃과 열매를 좋아하지만 사실 그것은 뿌리에 의존한 것이다.
뿌리는 깊을 수록 나무가 견고하고 높이 자랄 수 있고,
신앙은 깊을 수록 더욱 풍성하고 실속있는 영적인 열매를 맺을 수 있다.
이렇게 아름다운 조화와 협력이 이뤄질 때에 그 몸은 자연스럽게 성장하고,
우리의 신앙은 더 높은 곳을 향해서 성숙해 간다.
키를 크게 하려고 약을 먹거나 무리한 운동을 하는 것은 위험하다.
식생활과 운동과 일과 정신 건강 등 생활 전반에 걸쳐서 아름다운 조화를 이룰 때에,
우리의 몸이 건강하고 균형있게 자라는 것처럼,
우리의 믿음에는 강력한 생명력이 있어서 잘 관리하면 멋지게 자라게 된다.
마치 늘 보채기만 하고, 부모의 마음을 불안하게 하고 애태우던 아이가,
언제부터인가 어른처럼 말과 행동이 점잖아지고 의젓해 진 것을 보면 참으로 대견하다.
61세의 \"플래니 휭고\"(Plennie Fingo)라는 사람은 뒤로 걷는 선수다.
안경에 백미러를 달아서 뒤를 보면서 걷는데, 샌프란시스코에서 산타 모니카까지
걸은 적이 있다. 속도도 빠르고 많은 사람들에게 박수를 받기도 하였다.
그런 것은 혹 신문 기사 거리가 되고, 혹 기네스북에 실릴 수는 있다.
그러나 신앙이 뒤로 쳐지는 것은 절대로 금물이다.
신앙이 성숙하려면 많은 수고와 노력과 시간이 필요하다.
신앙을 지키기 위해서 시련도 겪고, 경제적인 손해를 보기도 한다.
그런데 신앙이 타락하거나 더럽혀지기는 순간적일 수도 있다.
잠간의 실수로 그 동안의 모든 수고가 허사로 돌아갈 수도 있다는 것이다.
마치 시계의 태엽을 감을 때에는 힘이 들어도,
가닥이 끊어져서 태엽이 풀어지는 것은 순간적인 것과도 흡사하다.
파사데나의 Lake Avenue Congregational Church에 래이몬드 오트랜드 목사가
담임 목사로 부임한 이래, 그는 고인물과 같은 교회 상태에서 변화하고 싶었다.
그래서 그는 평범한 교회로 머물기를 원치 않는다고 교인들에게 외쳤다.
그리고 모든 교인들이 교인 명부를 새로 만들기로 하고,
그는 전 교인들에게 새롭게 세 가지의 헌신을 요청하였다.
첫째는 하나님께 다시 한번 헌신하는 것이고,
둘째는 교회에 자신을 헌신하는 것이며,
셋째는 그리스도인으로서 자기 직업에 헌신하자는 것이었다.
진정으로 그렇게 헌신할 사람은 헌신 카드에 서명하도록 하고,
만일 500명 이상이 서명하지 않으면 교회를 사임할 작정을 했다.
그는 편치 않은 마음으로 잠자리에 들었고, 마음 한 구석에 걱정도 생겼다.
\"정말 그 많은 교인들이 그렇게 새롭게 헌신할까?\"
그런데 그 다음 날 교회에 제출된 헌신자 카드의 숫자는 600명이었다.
이것이 계기가 되어 교회는 새로운 단계로 올라서게 되었다.
지금도 그 교회는 담임목사가 바뀌었어도 훌륭한 교회로 성장하고 있는데,
그 이유는 그렇게 한 단계 더 높은 차원으로 헌신한 사람들이 계속해서 생기기 때문이다.
이제는 우리도 낮고 허술하고 편안한 곳에만 머물지 말자.
좀 숨이 차고 힘이 들어도 더 높은 곳으로 올라가자.
더 높은 곳에서 더 멀리 보며, 하나님과의 관계를 더 긴밀하게 하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