칼빈의설교관과 수행어로서의 언어이해

I. 들어가면서

이 글은 크게 두 가지 목적을 가지고 있다. 하나는 칼빈의 설교관에 나타나고 있는 隧行語(performative)적 언어 이해를 살펴보고자 하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隧行語로서의 언어적 특성에 주목하는 현대의 언어이론에 비추어 말씀의 선포가 가지는 신학적, 해석학적 지위와 특성이 어떠한 것인지를 반성해보고자 하는 것이다. 이를 통해 우리는 오늘날의 차별화, 다양화의 사상적 추세 속에서 소비자, 수용자 중심의 문화가 보편화되고 있는 상황을 감안하며 말씀의 선포가 잡아가야 할 자리가 무엇인지를 되짚어 볼 수 있기를 희망한다.
\'설교의 위기\'라는 말을 많이 듣는다. 이는 어느 시대에나 있었던 일이겠지만, 오늘날에 있어서는 설교자들이 이전보다 더 깊이 설교의 청중들을 이해하기 위해 많은 노력을 기울여야 하는 과제에 직면하고 있는데 비해, 설교의 청중들은 그들 나름대로 설교에서 그다지 큰 것을 기대하지 않는 상황을 맞고 있다. 이런 틈바구니 속에서 설교에 대한 \'낮은 견해\'가 증폭되고 있다. 이런 상황은 우리에게 하나의 긴박한 문제의식을 던져준다. 설교가 단순히 청중들의 구미를 맞추어가기 위해 노력해야 할 것인가? 아니면 청중의 형편을 잘 고려하면서도 하나님의 말씀이 청중을 변화시키는 방향으로 어떻게 설교할 수 있을 것인가? 우리는 오늘날에도 칼빈이 가졌던 것과 같은 설교에 대한 하나의 \'높은 견해\'를 견지할 수 있을 것인가? 이런 문제의식 자체는 신학의 제 분과들이 각기 다른 방식으로 인식하고 있겠지만, 우리는 여기서 이 문제를 설교학의 측면에서보다는 언어 이해를 중심한 해석학적 측면에서 검토해보고자 한다.


II. 칼빈의 설교관

1. 믿음에 앞서는 하나님의 말씀의 지위

현대의 문화 전반이 소비자 또는 수용자 중심의 문화로 변화되고 있는 추세는 우리 주변에서 어렵지 않게 감지되고 있다. 이런 현상이 신학에 반영될 때 그 나타나는 결과가 어떤 것이 될 수 있을지에 대해 생각해보자면, 다소 도식적일 수는 있겠지만, 독일의 신학자 헬무트 틸리케(Helmut Thielicke)가 \'사고하는 자아\' 또는 \'성인이 된 자아\'(adult I) 중심의 데카르트적 신학(Cartesian \'Theology A\')과 하나님의 주권적 은혜에 교응하는 형태의 신학으로서의 비데카르트적 신학(non-Cartesian \'Theology B\')을 구분하고 있는 것이 우리의 논의를 위해 도움이 되리라고 본다. 데카르트적 \'Theology A\'의 특징을 틸리케는 \"메시지의 수신자(addressee)에 대한 주도적 관심\"이라고 지적한다. 이런 형태의 신학에는 여러 가지 유형들이 있겠지만, 그 공통적인 요소는 그들이 한결 같이 \"메시지를 자기중심적으로 보고자 하는 어른이 된 자아의 자체적 조건에 치중하고 있다는 것, 그래서 이해의 문제가 점점 더 중심적인 요소가 되고 있고 마침내는 해석학이 그 자체를 위해 존재하는 하나의 신학적 분과가 되고 만다는 것이다. 말하자면 오직 내가 이해할 수 있고 꿰뚫을 수 있는 것만을 취할 수 있다는 태도이다.\" 틸리케는 이 수용자 중심, 또는 수용자 자력 중심의 태도가 현대 신학에 있어서 \'믿음\'의 역할에 대한 과도한 강조와 관련이 있다고 관찰한다. 곧 믿음이 자신을 위한 어떤 의미를 부여해주지 않는 한 구속사의 사실 그 자체만으로는 아무런 의미가 없다는 입장이다. 이와 관련해서 틸리케는 칼빈의 말을 인용한다. 곧, \"말씀을 빼고나면 믿음이 남지 못한다\"(Take the word away and no faith is left)는 칼빈의 말이 \"믿음을 빼고나면 말씀이 남지 못한다\"(Take faith away, and no word is left)로 바뀌고 있다는 지적이다. 틸리케는 이렇게 주장한다. \"만일 구속사가 신앙을 위한 자료(a datum for faith)가 아니라 신앙의 산물(the product of faith)이라면, ... 우리는 여기서 다시금 데카르트적 주체성 중심사상에 빠지게 된다. 여기에서는 무언가를 설명하고자 할 때 ... 주체 자신의 분별력, 그 자체의 해석하는 능력, 의미를 부여할 수 있는 그 자체의 카리스마의 관점에서만(only in terms of its own divinatory faculty, its interpretative power, or its charisma of investing with meaning) 설명할 수 있다고 강조한다.\"
이에 반해서 \'Theology B\'에 있어서 믿음은 인간의 자력이 아니라 은혜의 선물로 주어진 것이요, 그것이 가능하게 되는 기반은 하나님의 말씀이 \'해석적\'이 아니라 \'창조적\'(God\'s Word is not interpretative; it is creative)이라는 사실 때문이다. 수신자(addressee) 중심에서 하나님을 보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우리를 불러주심(address)에 근거해서 우리는 부름받은 자(the addressed)의 믿음을 가지는 것이다. 틸리케의 표현을 빌리자면,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을 나를 위한 약속(Zuspruch)과 주장(Anspruch)으로 받아 들일 수 있는 것은 하나님이 우리를 향해 먼저 말씀하셨다(gesprochen)는 사실에 근거하는 것이다. 하나님이 그의 말씀의 대상으로 우리를 인정(recognize)하여 주셨다는 사실, 그가 사랑 가운데서 스스로를 넘어 우리를 향하여 움직여 오셨다는 사실, 이것이 우리에게 있어서는 하나님의 의가 항상 수동태로 말하여질 수밖에 없는 이유가 된다. 우리가 어떤 행위의 의를 이룸으로써가 아니라 하나님이 우리를 의롭다 인정하여 주신 그 행위 안에서 우리는 하나님을 향하여 사는 자로 존재할 수 있게 되는 것이다.
이 분류를 통해 틸리케는 형식적 편가르기를 시도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신학적 자유주의, 보수주의 등의 용어를 그는 부적절한 것으로 보고 있다), 오히려 신학이 어떤 방식으로 현대적 사유의 유형들에 반응하고 있는지를 보여주고자 하며, 이 큰 그림의 바탕 위에서 그 자신의 신학적 구도를 \'Theology B\'의 기본적 입장에 보조를 맞추면서 펼쳐나가고 있다. 이런 작업 가운데서 그는 칼빈이 강조했던 것과 같은 말씀의 우선적 지위를 현대적 맥락 가운데서 잘 견지해 가고 있다. 칼빈은 Institutes, III. ii. 6 이하에서 하나님의 말씀과 믿음의 상관관계에 대해 상세히 잘 말해주고 있다. 칼빈의 말을 잠시 인용해보자.

첫째로 우리가 상기해야 할 것은 믿음과 말씀 사이에는 항구적인 상관성이 있다는 사실이다. 우리가 태양빛을 그 근원인 태양에서 분리할 수 없는 것과 마찬가지로 믿음을 말씀에서 분리시킬 수 없다.... 그러므로 만일 믿음이 매우 조금만이라도 그 지향해야 할 목표로부터 벗어난다면 믿음은 그 자체의 본질을 지켜가지 못하고, 다만 불확실한 가벼운 믿음이 되든지 애매한 정신의 오류가 되고 만다. 다름 아닌 이 말씀이 믿음을 지탱하고 유지시켜 주는 기초인 것이다. 만일 믿음이 말씀을 떠나면 그것은 넘어지고 만다. 그러므로 말씀을 빼고 나면 믿음이 남지 못한다(III. ii. 6).

이렇게 말씀에 근거할 때 믿음은 스콜라주의나 로마교에서 교회의 권위나 전통에 근거하는 것으로 가르치는 \'암묵리의 신앙\'(implicit faith)의 \'경건한 무지\'(pious ignorance)를 벗어버릴 수 있다(III. ii. 2-3). 칼빈이 강조하고 있는 지식 있는 믿음이란 막연한 하나님의 존재에 대한 지적 동의만이 아니라 그의 뜻, 곧 우리가 구원받기를 바라고 말씀의 약속에 참여하는 자가 되기를 원하는 하나님의 뜻을 아는 데까지 나아가는 믿음(\'knowledge not only of God but of the divine will\', III. ii. 2)을 말한다. 이것은 결코 인간의 경건성에 의존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 가운데 주어진 내용이기 때문에 참 믿음은 더더욱 말씀에의 의존성으로 정의될 수밖에 없는 것이다. 칼빈은 이와 같이 정리하고 있다.

이제 우리가 하나님의 선하심에 대해 아는 것이 우리로 하여금 그 선하심을 의지하도록 만들지 못한다면 이것은 그다지 중요한 것이 되지 못할 것이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말씀이 우리 안에서 온전한 믿음을 획득할 수 있도록 다른 방식으로 우리의 정신이 조명되고 우리의 마음이 강하게 되어져야 한다. 이제 우리는 믿음에 대해 다음과 같은 올바른 정의를 가질 수 있게 되었다. 곧 믿음은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자애를 아는 굳고 확실한 지식인데, 이는 그리스도 안에서 그저 주신 약속의 진리 위에 기초하고 있으며, 성령을 통하여 우리의 정신에 밝혀졌고 동시에 우리의 마음에 인친 바 된 것이다(III. ii. 7).

우리는 여기에서 칼빈이 믿음을 인간의 경건성과 결부시키지 않고 하나님의 말씀과 결부시키고 있다는 것, 그런 점에서 말씀이 믿음보다 우선한다는 것, 그리고 이 말씀은 하나님의 존재에 대한 계시만이 아니라 그의 \'뜻\'에 대한 계시를 그 핵심으로 삼고 있다는 것을 보았다. 이제 더 나아가서 이것이 \'하나님의 뜻\'을 전하는 인간의 설교행위와 어떻게 연관되는지 살펴보도록 하자.

2. 대리적 행위로서의 설교

칼빈은 설교사역을 하나님으로부터 위임된 하나님의 대리적 사역으로 이해함으로써 설교에 대한 \'높은 견해\'를 견지하고 있다. 엡4:10-13에 근거해서 칼빈은 \"하늘의 가르침을 설교하는 일이 목사들에게 요청되고 있다\"(IV. i. 5)고 말한다. 하나님께서는 성도를 온전케 하는 일을 단순간에 그 자신이 직접 하실 수도 있지만, 교회의 직분인 인간 대리자의 사역을 통하여 성도들로 하여금 자라게 하시기를 기뻐하신다. 칼빈은 말한다.

하나님께서 믿음을 우리에게 불어넣어 주실 때 그는 오직 그의 복음의 도구를 통해서 그와 같이 하신다. 이는 바울이 \'믿음은 들음에서 난다\'[롬10:17]고 말하는 것과 같다. 마찬가지로 구원하는 능력은 오직 하나님께 속하지만[롬1:16], (바울이 증거하고 있는 것과 같이) 그는 이를 복음의 설교 가운데서 나타내시고 펼쳐 주신다(IV. i. 5).

여기서 보는 것과 같이 구원하는 능력은 본질적으로 하나님께 속한 일이지만 하나님은 이를 그 자신의 직접적인 개입이나 천사를 사용하여서가 아니라 그의 인간적 대리자를 통해서 행사하신다는 것을 칼빈은 강조하고 있다. 왜 하나님이 이런 방식을 택하시느냐 하는 데 대해 칼빈은 두 가지의 유익을 제시하고 있다. 하나는 우리의 순종을 증거해 보이는 계기가 되게하기 위함이고, 또 하나는 우리의 연약함에 대한 배려 때문이다. 칼빈은 이렇게 말한다.

이것이 이중적으로 유익하다. 한 면에서 하나님은 그의 사역자들이 말하는 것을 그분 자신이 말하는 것으로 우리가 듣고 있는지의 시험을 통해 우리의 순종을 입증코자 하신다. 또 다른 한 면에서, 하나님은 우리의 연약함 때문에 우리를 당신께로 이끌고자 하실 때 우리에게 벼락을 쳐서 좇아내는 방식으로보다는 해석자들을 통하여 인간적 방식으로 우리를 대하여 주시기를 선호하신다(IV. i. 5).

하나님의 이런 제정에 대해서 불만을 가진 사람들도 있다. 왜 직접 하나님께 듣지 않고 인간 대리자의 설교를 통해서 들어야 하는가 하고 항변하는 사람들이다. 이런 자들을 염두에 두고 칼빈은 자신의 설교관을 다음과 같이 분명하게 피력하고 있다.

하나님께서 인류를 위해 마련해 주신 많은 뛰어난 은사들 가운데서도, 사람의 입과 혀를 그분 자신을 위해 특별히 구별하여 주시고 이것들을 통해 그의 음성이 들려지게 하신 것은 비길 데 없는 특권이다.... 비록 하나님의 능력은 외적 수단들에 속박되는 것은 아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은 우리를 이 일상적 가르침의 방식에 묶어 놓으셨다.... 그러므로 믿음의 순수한 단순성이 우리 가운데 차고 넘치도록, 하나님이 제정하여 주심으로 우리에게 꼭 필요한 것으로 그리고 높이 승인해야 할 것으로 보여주신 이 종교적 행사를 사용하는데 조금도 주저함이 없도록 하자(IV. i. 5).

하나님을 위한 인간의 대리적 사역이 사람에게 \'위탁된\'(entrusted) 일임을 칼빈은 기독교강요 IV. iii. 1-3 사이에서 여러 차례 강조하고 있다. 주님의 교회 안에서 오직 그리스도만이 그의 말씀을 통해 다스리실 권세를 가지고 있지만, 그가 우리 가운데 보이는 모습으로 거하시지 않기 때문에 그를 대리할 사람의 사역을 필요로 한다는 것이다.

그는 자신의 뜻을 입을 통하여 우리에게 밝히 선포하시기 위해 인간의 사역을 사용하시는 것인데, 이는 일종의 대리적 사역이며, 결코 사람에게 그의 권리와 영예를 이양하는 것은 아니다(IV. iii. 1).

이때 사람의 역할은 그리스도의 대사로서(고후 5:20), 그의 숨은 뜻의 해석자로서, 그의 인격의 대변자로서 일하는 것이다. 이 \'위탁된\' 대리적 사역의 효과에 대해 칼빈은 두 가지의 오해를 물리치고 있다. 하나는 인간의 일은 인간의 일일 뿐, 성령의 일을 인간에게 돌리는 것은 잘못이라고 보는 견해이고, 다른 하나는 인간의 일을 하나님의 일과 본질적으로 동등한 것으로 지나치게 과장하는 견해이다(IV. i. 6). 칼빈은 첫 번째의 견해에 대해서는 인간의 대리적 사역은 하나님이 행하시는 일과 동등한 효력을 가진다고 논박한다. 이는 설교라는 수단이 하나님이 자신의 뜻을 전달하기 위해 친히 제정하신 수단이요 이를 위해 설교자들에게 그의 대리자로서의 위임된 권한을 가지도록 하시기 때문이다. 하나님은 이를 증거하시기 위해 그의 성령을 설교사역에 참여시켜 주셔서 하나님이 우리를 위해 마련하신 영원한 유익들이 실제로 우리에게 적용되도록, 그래서 우리가 그 유익들의 수혜자가 될 수 있도록 해 주시는 것이다. 이런 점에서 칼빈은 설교의 강단을 하나님의 통치가 이루어지는 \'하나님의 보좌\'라고 부르기를 주저하지 않는다. 그는 딤전5:20의 설교에서 \'하나님의 보좌\'로서의 강단을 재판관의 말이 효력 있게 시행되는 \'정의의 보좌\'와 비교하는 가운데서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보라 하나님의 보좌(le siege)인 강단은 하나님이 우리의 영혼을 다스리기를 원하시는 곳이다. 정의의 보좌(le siege de justice)가 분명 존귀로운 곳이지만, 이 영적 통치로 말할 것 같으면 여기는 하나님이 우리를 하늘나라로 이끌고자 하시는 곳이다.

칼빈이 강단을 재판관의 자리와 비교하고 있는 것은 매우 의미가 깊다. 칼빈은 그 두 영역 모두에 깊은 이해를 가진 사람이다. 재판관의 판결의 말이 그 기구적(inatitutional) 조건 위에서 정당한 隧行力(performative force)을 가지는 것과 마찬가지로, 강단에서 선포되는 하나님의 말씀은 성령의 역사 가운데서 그 즉각적인 시행력과 효력을 가지는 것이다. 그러므로 설교를 단순히 인간의 말로만, 또는 사람을 만족케 하기 위한 담화행위로만 이해하는 것은 매우 저급하고 적절하지 못한 설교관이다.
다른 한편, 칼빈은 설교를 지나치게 과장되이 이해하는 견해에 대한 경고를 잊지 않는다. 하나님과 그 대리자로서의 인간 사이의 본질적 차이를 망각해서는 안된다는 것이다. 그래서 칼빈은 끊임없이 구원하는 능력이 오직 하나님께만 있음을 강조하고 있고, 또 하나님께서 사람들에게 그의 일을 \'위탁\'(entrust)하시는 가운데서도 결코 그들에게 그의 권리와 영예를 \'이양\'(transfer)하는 것은 아니라고 덧붙이고 있다. 사람이 심고 물을 주지만 자라게 하시는 이는 오직 하나님뿐이시다(고전3:7). 그래서 우리는 칼빈을 따라 이 양자 사이의 균형을 잘 유지할 수 있어야 한다. 하나님이 위임하신 일로서 설교는 하나님이 뜻하시는 그 동등한 효력을 사람들 가운데 나타낼 수 있지만, 그렇다고 하나님 자신의 권한이 사람에게 주어진 것은 아니다. 이는 축도에 있어서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축도를 통해 하나님의 축복이 \'효력있게\' 선포되지만, 복을 줄 수 있는 권리는 오직 하나님께만 속함을 기억해야 할 것이다. 그러므로 설교자는 한 면에서 무한한 자부심을 가지면서 또 다른 한 면에서 무한한 겸손을 가지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칼빈이 하나님의 말씀과 그 선포의 행위를 소정의 隧行力을 동반하는 말의 행위로 이해하고 있다는 증거는 <기독교강요> 외에도 그의 주석적 저술들 가운데 다양한 방식으로 표현되고 있다. 이에 대해서는 월레이스(Ronald S. Wallace)가 잘 정리해주고 있는데, 몇 가지 대표적인 예들을 들어보자면, 롬 3:4과 관련하여 칼빈은 \"그[하나님]가 명하신 말씀은 바로 행하심이 되는 것이다\"라고 말하며, 고후 3:6과 관련하여 \"그리스도는 말씀 전파자를 통하여 인간의 마음을 비추고, 그들의 정신을 새롭게 하며, 즉시 그들을 온전히 거듭나게 하신다\"고 말한다. 살전 1:4과 관련하여 그는 \"하나님의 음성은 ... 살아 있는 것이며, 바로 효력과 연결된 것\"이라고 말하며, 또 사 34:16과 관련하여 \"주님의 신성한 입서 나온 모든 말씀이 온전히 효력을 발휘하리로다\"고 말한다. 시 85:9과 관련해서는 시편기자들이 하나님의 은총에 대해 그 구체적 실행에 주목하고 있음을 언급하면서 그들이 \'나는 하나님의 행하시는 바를 본다\'라는 방식으로 표현하고 있는 것은 하나님의 은총이 하나님의 손보다는 그의 입에 의한 신적 약속으로 이루어지는 것을 나타내는 것이라고 강조하고 있다.
앞에서 살펴본 것처럼 사람의 설교가 그 자체로서 위와 같은 효력들을 가져오는 것은 아니며, 또 \"하나님께서 그의 목회자들을 당신으로부터 떼어놓으시면 그들은 아무것도 아닌\"(말 4:6) 사실을 인정해야 하겠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설교의 효력에 대해서 하나의 \'높은 견해\'를 견지할 수 있는 것은 \"하나님의 말씀이 선지자의 말과 구별될 수 없으며\"(학 1:12), \"하나님은 또 목회자와 분리되지 않으며\"(고전 3:7), \"하나님은 도구와 결합하시며, 영의 감화력은 인간의 힘씀과 함께 하신다\"(고전 9:1)는 사실 때문이다.
이상을 통해서 우리는 칼빈이 설교를 하나님을 대리하는 인간적 사역으로 이해하고 있는 것을 보았다. 복음과 하나님의 뜻의 선포가 인간적 대리자를 통하여 이루어지도록 정하신 분이 하나님 자신임을 강조하고 있는 것을 보았고, 따라서 인간 설교자의 대리적 행위 가운데 그 효력을 보장하시는 분이 하나님 자신임을 강조하는 것을 보았다. 그러므로 설교는 하나님이 정하신 교회라는 기구적 범주 가운데서 그 \'화수력\'(話隨力, illocutionary force)을 동반하는 선포적 \'말의 행위\'(話行, speech-act)가 되고 있음을 발견한다. 설교에 대한 칼빈의 이런 \'높은 견해\'에 비해볼 때 오늘날의 \'낮은 견해\'의 증폭은 여러 가지 면에서 그 이유가 설명될 수 있겠지만, 무엇보다 먼저 말과 그 효력에 대한 오늘날의 오도된 인식과 무관하지 않은 것으로 보인다. 물론 설교에 있어서 성령의 역사와 이를 통한 구원적 효력이라는 측면을 언어 현상 자체의 수행력과 동일한 차원에서 논의할 수는 없겠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설교가 말을 떠나서 이루어질 수 없다는 것과, 또 \'말의 행위\'가 그 효력을 잃어 가는 맥락과 설교가 말로서의 그 효력을 잃어가고 있는 맥락이 많은 면에서 공통적인 측면을 가진다는 점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다. 따라서 우리는 이런 점을 비판적으로 고찰하는 현대의 언어이론을 좀 더 자세히 살펴보는 가운데서 말씀의 선포가 가지는 그 본래의 고귀한 지위에 보다 잘 부합할 수 있는 말에 대한 우리의 이해를 정립해보고자 한다.


III. 현대의 언어-행위 이론

1. 왜 \'말의 행위\'가 그 효력을 상실하고 있는가?

근래에 우리는 우리 사회에서 일어나고 있는 많은 문제들의 배후에 신뢰의 와해라는 심각한 문제가 자리잡고 있는 것을 본다. 경제 위기론이 거론될 때마다 실질적인 문제는 실물 경제 자체의 문제보다도 \'말\'이 먹혀들지를 않는다는 문제가 더 심각하다는 것을 보았고, 의약분업사태 같은 각종 분쟁의 배후에도 서로의 말을 믿을 수 없는데서 오는 심각한 신뢰 상실의 문제가 있는 것을 보았다. 아무리 약속을 하고 믿어 달라고 호소를 해도 말이 그 효력을 잃어버리고 말이 사람을 \'낚지\' 못하는 현상, 이것은 우리 사회의 가장 심각한 문제 중의 하나라고 볼 수 있을 것이다. 그러면 어떻게 해서 말이 그 효력을 잃어버리고 죽은 말이 되고 있는가? 어떻게 해서 말이 상호간의 이해 및 신뢰의 증진을 위해 사용되지 않고 오히려 기만과 술책의 도구로 전락하고 있는가? 이런 문제를 깊이 있게 다루고 있는 사상가들 가운데 한 사람으로 위르겐 하버마스(J rgen Habermas)가 있다.
하버마스의 사회비판 이론은 1970년대에 호르크하이머, 아도르노 등으로 대표되는 \'프랑크푸르트 학파\'와 연관해서 한국에 소개되기 시작하였지만, 90년대에 들어서는 맑스의 그늘을 벗어나 그 자신의 독특한 목소리를 가진 한 사람의 사상가로 본격적인 재검토가 되기 시작하였다. 특히 그가 체계화시키고 있는 것과 같이 \'의사 소통적 행위\'(communicative action)로서의 언어적 모델을 통한 사회 비판에의 접근은 언어철학, 해석학, 사회학, 정치경제학, 신학 등의 제반 분야에 걸쳐서 하나의 학제간 대화의 화두를 던져주고 있다. 해석학과 관련해서 하버마스는 가다머(Hans-Georg Gadamer)와 더불어서 소위 말하는 \'언어적 전환\'(linguistic turn)을 본격적으로 이루어 낸 사상가로 평가될 수 있겠지만, 그러나 해석과 이해의 과정에 있어서 가다머의 다분히 존재론적 성향에 대해서는 비판적 태도를 취하고 있다. 곧 이해는 우리에게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습관적 교류행위\'나 삶의 세계 속에서의 제반 조건, 경험 등에 의해 이미 상당 부분 일정한 색채를 띠고 있다는 것이다. 문화적 전통들을 매개하는 언어에 대한 이해에 있어서도 하버마스는 가다머의 다분히 \'언어 내적\'(intra-linguistic) 제한성에 반대해서 \'언어 게임\'이 통용되고 있는 \'비언어적\' 사회적 조건들의 중요성에 대해 관심을 주목시키고 있다. 이런 맥락 속에서 하버마스는 \"언어는 또한 통제와 사회적 힘의 수단이기도 하다. 이는 조직된 힘의 역학관계를 정당화하는데 이용된다\"고 역설한다. 이와 같이 언어가 이데올로기적 목적으로 또는 자기정당화의 도구로 사용될 수도 있는 가능성 때문에 하버마스는 의사소통에 있어서의 조직적 오류 또는 왜곡을 진단하고 바로잡기 위해 사회병리학적 현상들에 대한 정신분석학적 유형의 접근이 필요하다는 것을 강조하고 있다. 이런 관심은 또 다른 그의 초기의 책 Knowledge and Human Interests(독일어판, 1968)에 잘 나타난다. 이런 관점에 근거해서 그는 \'해방\'(emancipation)을 목적으로 하는 사회과학적 이론이 행동주의(behaviourism)나 언어이상주의(idealism of linguisticality) 각각의 일방성을 극복하고 \'해석학적 이해\'와 \'사회비판\' 양자의 조화를 이루는 \'비판적 해석학\'이 되어야 한다고 제시하고 있다. 이를 통해 하버마스는 인간의 지식, 또는 이성의 활동과 그 사회적 조건의 상호관계 속에서 어떻게 비권위적이고 강요되지 않은 의사소통 또는 합의의 이상을 추구해 갈 수 있을 것인지를 그의 주된 문제의식으로 제기하고 있다.
이와 같은 \'해방적 의사소통\'(emancipatory communication)의 이상이 구체적으로 어떻게 추구되어질 수 있을 것인지의 문제를 하버마스는 그의 주저 The Theory of Communicative Action 속에서 상세하게 다루고 있다. 먼저 하버마스가 말하는 \'의사 소통적 행위\'는 언어를 매개로 하여 상호이해 또는 합의에 이르는 과정을 말하는데, 이는 목적 지향적, 전략적 합리성의 자아 중심적 성공 또는 효율성의 추구와는 그 목적을 달리한다. 이 후자의 목적 지향적 담화행위가 이루어지는 범위가 개별적이냐 사회적이냐에 따라 하버마스는 \'도구적\' 행위와 \'전략적\' 행위를 보다 엄밀히 구분하고 있지만, 크게 보면 두 가지 모두가 동전의 앞뒷면을 이룬다. 이런 도구적, 전략적 행위와 의사 소통적 행위의 차이에 대해서 하버마스는 이렇게 말한다.

성공 지향적인 어떤 행위를 우리가 도구적(instrumental) 행위라 지칭할 때는 우리가 이를 행위의 기술적 규칙의 측면에서 고려할 때 그리고 그 평가의 측도를 이 행위가 일련의 상황과 사건 속에 얼마나 효율적으로 개입될 수 있느냐에 두는 경우이다. 역시 성공 지향적인 어떤 행위를 우리가 전략적(strategic)이라 부를 때는 우리가 그 행위를 합리적 선택의 측면에서 고려할 때, 그리고 그 평가의 척도를 합리적인 상대방의 의사결정에 얼마나 효율적으로 영향을 미쳤느냐에 두는 경우이다.... 반면에 내가 어떤 행위를 의사 소통적(communicative) 행위라고 할 때는 관련된 행위 주체자들이 자기중심적인 성공의 계산에 따라 조율되는 것이 아니라 상호이해에 이름으로써 서로 조율되어지는 모든 경우를 두고 이르는 것이다.

하버마스는 그의 \'의사소통행위론\'의 뿌리를 옥스퍼드의 철학자 존 오스틴(J.L. Austin)의 \'화행론\'(speech-act theory)에 두고 있다. 이 이론은 말을 하나의 기계적 법칙이나 도구로 보는 행동주의적 관점이나 또는 사물, 사상, 감정 등의 표현 수단으로 보는 기능주의적 이해와는 달리, 말을 인간의 여타 행위와 같이 하나의 행위로 이해하는 것이 그 특징이다. 오스틴의 책 How to Do Things with Words에서 밝히고 있는 것처럼 우리는 말을 통해 \'판정\'을 행하기도 하고 \'시행\'을 하기도 하며 \'약속\'을 만들기도 하고 \'주장\'을 행하기도 하며 \'표현\'을 행하기도 한다. 하버마스가 말의 문자적 의미(Bedeutung)와 의도된 의미(Meinung)를 구분하고 있는 것처럼, 우리의 말은 전자의 내용적 의미를 전달하는 것으로 그 기능을 다하는 것이 아니라 내용적 요소와 함께 수반되는 \'화수력\'(illocutionary force)과 더불어서 하나의 행위로 작용한다. 이 화수력의 카테고리에는 위에서 열거한 \'판정\', \'시행\', \'약속\', \'주장\', \'표현\' 등이 있는데, 이를 고려할 때 우리는 어떤 발화된 말이(가령, \"비가 옵니다\") 단순한 사실의 주장인지, 외출의 기대를 망친데 대한 실망의 표현인지, 우산을 챙기라는 경고인지, 아니면 그 외의 다른 뜻인지, 그 말이 이루어진 상황을 따라서 바르게 이해할 필요가 있다. 뿐만 아니라 우리가 어떤 약속의 말을 하는 경우에는 여기에는 상대방과의 관계에 있어서 자아를 그 말에 위탁함으로써 쌍방간의 의무와 책임이 형성되는 사건이 발생한다. 단순히 발음 연습이나 문장 연습을 위해 이런 말을 하는 것이 아니라면 상대방도 여기에 말한 것을 지키고자 하는 의도가 담긴 것으로 여기고 이 말대로 지켜지기를 기대하는 것이다. 만일 어떤 사람이 자신의 약속에 따르는 책임을 빈번히 수행치 않는다면 우리는 그런 사람의 약속을 \'약속\'으로 받을 수 없는 것이며 허공에 뜬소리나 \'빈 말\' 정도로 간주해버릴 수밖에 없을 것인데, 이런 사람은 그 말의 효력을 잃어버림으로 말미암아 말이 남을 \'낚지\' 못하게 되고 따라서 계속적으로 사회생활을 해 나는데 어려움을 겪을 수밖에 없다.
이와 같은 \'화수 행위\'(\'發話隨伴행위\'를 줄여서, illocutionary act)는 어떤 발화된 말(locution 또는 utterance)을 \'약속\'이나 \'요청\', \'판정\' 등으로 받게 하는, 다시 말해서 책임과 의무를 발생시키는 의도나 진정이 담긴 행위로 여기게 하는 사회적 관습이 그 밑바닥에 깔려 있다. 이런 \'화수 행위\'의 효력은 적법한 조건들이 갖추어져 있을 때 말 그 가운데서(in) 자연스럽게 따라온다. 이에 반해서 \'화효 행위\'(\'發話效果행위\'를 줄여서, perlocutionary act)라는 것은 말을 통해(through), 또는 말을 수단으로 삼아 어떤 소기의 효과를 이루어내고자 하는 목적 아래에서 행해지는 말의 행위를 지칭한다. 협박이나 우격다짐, 욕설, 상벌을 내세운 설득행위, 상업적, 정치적 목적을 위한 선전 등이 이 부류에 속할 것이다. 하버마스는 자신의 \'의사 소통 행위\'를 \'화수 행위\'의 부류에 위치시키고 있다. 반면 그가 반대하고 있는 이기적, 전략적, 목적 지향적 행위를 \'화효 행위\'와 결부시키고 있다. 그는 이렇게 말한다.

따라서 나는 모든 대화 참여자가 의사소통이라는 중재적 행위 가운데서 화수적 목적(illocutionary aims), 그것도 오직 화수적 목적만을 추구할 때 이와 같은 형식으로 언어를 통해 매개되는 상호행위들을 의사 소통적 행위(communicative action)로 간주한다. 반면에 대화 참여자 가운데 적어도 한 편이 그 말의 행위를 통해 그 상대방에게 화효적 결과(perlocutionary effects)를 산출하고자 원할 때 나는 이를 언어적으로 매개된 전략적 행위(strategic action)로 간주한다.

이렇게 하버마스가 구분하고 있는 것처럼, 상대를 무시한 일방적 \'화효 행위\'는 그 \'효과\'를 장담하고 \'성공\'을 셈할 수 있겠지만, 상대방과의 특정한 관계를 발생시키고 상대방을 나와 동등한 인격적 주체로 받아들이지 않고는 성립될 수가 없는 \'화수 행위\'에 있어서는 이런 \'성공\'이 그 잣대가 될 수 없는 것이다. 우리 사회가 성공 지향적 사회가 되면서 그 말에 있어서도 illocution으로서의 대화(dialogue)보다는 perlocution 위주의 일방적 독백(monologue)이 주도적 현상이 되고 있다. 이는 언어 속에서 자신의 목적 달성을 위해 상대를 대상화시키는 타락의 길을 가는 것과 다를 바 없다. 그리고 자신의 말이 먹혀드는 것을 보다 확실하게 보장할 수 있는 길은 권력과 돈을 내세우는 길이므로 사람들은 이런 수단 확보를 그 본래 목적과 뒤바꾸어 버리는 것이다. 여기에 비인간적 사회의 골은 더 깊어져 간다. 하버마스가 언어적 모델을 통해 사회비판에 접근하는 것은 언어의 타락과 사회의 타락이 같은 길을 걸을 수밖에 없다는 것을 명시적으로 보여주고자 하는 것이다.
왜 이런 관계가 성립되는가? 언어와 사회비판이 무슨 연관성을 가지는가? 물론 언어라는 것이 인간을 특정 전통의 맥과 닿아 있는 사회적 존재가 되게 하는 핵심적 통로이기 때문에 서로간에는 연관성이 생길 수밖에 없는 이유도 있겠지만, 보다 심층적 측면에서 언어가 그 사용 또는 유통을 위하여 \'삶의 세계\'에서의 뿌리를 필요로 하는 것이 사회비판에 있어서도 사회적 제도들의 기능에 대한 평가가 \'삶의 세계\' 속에서의 경험을 바탕으로 하지 않을 수 없다는 당위와 서로간에 유비성을 가지는 데서도 그 이유를 찾을 수 있을 것이다. 그런데 이런 \'삶의 세계\' 속에서의 \'의사 소통 행위\'가 대체로 언어를 통하여 합리적 합의에 이르렀던 것이 전통사회의 보편적 방식이었는데, 근대화의 과정 속에서 이 \'의사 소통 행위\'의 근저를 이루는 \'삶의 세계\'가 해체되어감으로써 사람들 간의 상호 합의에 이르는 과정이 점차 \'탈언어화\'되어지고(delinguistified) 대신에 돈이나 권력과 같은 일반적 가치들의 수단에 의해 조종되어지는(media-steered) 목적 지향적 합리성으로 대체되기 시작했다고 하버마스는 관찰하고 있다. 돈과 권력의 가치들에 의해 조종되는 합리성은 그 자체의 \'하부 조직\'(subsystem)을 형성하고 이런 하부조직들은 기존의 의사 소통 행위의 뿌리가 되던 \'삶의 세계\'와 분리되어서 그 자체의 독립 영역을 구축할 뿐만 아니라 \'삶의 세계\' 자체를 침식하게 된다. 이렇게 되면 일상의 의사 소통적 자질과 자유는 점차 빈약하게 되어가고 경제적, 행정적 조직체의 지배력은 더 확장되어 간다. 이것이 오늘날 효율성을 극대화하기 위해 사회의 모든 부분들을 규격화, 획일화하려 드는 기술관료사회를 낳게 되는 과정이라고 보는 것이다. 하버마스는 물론 \'하부조직체\' 그 자체를 부정하고 비판하는 것은 아니지만, 이런 조직체들이 인간의 문화적 전통 속에서의 삶의 뿌리를 떠나서 그 자체 목적에 따라 인간을 통제하려는 경향과 현상을 비판하고 있는 것이다. 미디아에 의해 조종되는 목적 지향적 통제사회를 떠나 언어적 의사소통의 합의에 이르는 것을 목적으로 삼는 하버마스의 사회비판(socio-critical) 이론은 하나의 건설적 희망을 포기하지 않는다는 면에서 보다 상대주의적 접근을 시도하고 있는 리차드 로티(Richard Rorty) 등의 \'사회-실용적\'(socio-pragmatic) 접근과는 차이를 가지는 것이다.
우리는 하버마스가 제시하고 있는 비판적 안목들이 \'세상 속의 교회\'로서의 구별된 정체성을 가지면서도 또한 \'교회 안의 세상\'의 요소들을 다 벗어버리지 못하고 있는(때로는 \'진리\'의 이름으로 더 은밀하게 위장되어 있는) 현실 교회의 자화상을 진단하는데 적지 않은 도움이 된다는 것을 발견한다. 교회 안에서도 언제나 올무가 되고 있는 돈과 권력, 명성과 인기의 가치들이 하나의 숨겨진(때로는 드러난) 욕구와 결부되어 표출될 때, 가령 설교에서 사람들이 듣기를 기대하는 \'하나님의 말씀\' 대신 설교자의 이익 대변이나 권력 행사의 정당화 이상의 것을 듣지 못하게 될 때 교인들이 교회에 대해 가지는 배신감과 혼란, 절망 등이 증폭되어 갈 것이고 그 영향은 더 넓은 사회 속으로 퍼져 가게 될 것이다. 비록 우리가 하버마스의 합리적 합의에 근거한 진리 개념(truth as consensus)이 성경적 진리 개념을 다 말해줄 수 있다고 보지는 않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어느 때보다 더 심각하게 경험하고 있는 \'교회 안의 세상\' 또는 현실 교회의 세속화 현상을 진단하는 면에 있어서 그 충분한 유용성과 가치를 가진다고 보는 것이다.

2. 인격과 삶으로부터 분리된 말, 혹은 말의 코드화

진정한 언어사용에 있어서 기초가 되는 것은 말을 통한 목적의 달성, 지식이나 내면 세계의 전달 등의 기능적 요소만이 아니라 말 가운데 자리잡고 있는 인격적 주체, 또 말 가운데서 이루어지는 인격 상호간(inter-personal)의 관계의 발생과 상호 교류 등과 같은 요소이다. 이런 점은 비트겐시타인(L. Wittgenstein)의 언어이론을 신앙언어의 특성과 연결해서 해석하고 있는 달라스 하이(Dallas M. High)에게서 일찍 강조되고 있는 점이기도 하다. 근래에 와서 니콜라스 월터스토프(Nicholas Wolterstorff)는 화행론에 근거하여 다시 한 번 이런 점의 중요성을 잘 부각시키고 있다.
월터스토프는 칼빈 대학(Calvin College)의 철학 교수를 거쳐 지금은 예일 대학의 석좌 교수(Noah Porter Professor of Philosophical Theology)로 재직하고 있다. 1980년에 나란히 출판된 그의 초기 저작들은 미학적 관심을 주로 드러내고 있다. 특히 Art in Action에서는 기독교적 미학의 실제적 틀을 제시하고자 노력하고 있고, Works and Worlds of Art에서는 보다 일반적 미학의 이론을 취급하고 있다. 이 저작들에서 보여주고 있는 그의 특징적 관심은 예술이나 문학 작품을 그 자체의 목적을 위한 추상물로서나 미학적 명상의 대상물로만 보지 않고, 작가와 해석자의 삶의 자리 속에서의 행위의 산물로 이해하고 있다는 점이다. 이런 점에서 예술의 일상성을 그는 강하게 옹호하고 있다. 또한 예술 작품이 수행하는 행위의 다양성을 그는 강조하고 있다. 예술 작품을 통해 사람을 칭송하기도 하고, 슬픔을 표현하기도 하고, 감정을 고무시키기도 하고, 지식을 전달하기도 한다. 월터스토프의 정의에 따르면 예술은 세상으로부터 이탈하는 행위가 아니라 \"세상 속에서의 사람의 행위 방식이다. 예술적으로 사람은 행위한다\".
예술의 일상성과 예술 작품의 다양한 행위적 도구성에 대한 그의 인식은 그의 이후의 저작들 가운데 나타나고 있는 언어에 대한 관심 속에 그대로 반영되고 있다. 특히 1993년도 옥스퍼드 대학에서의 강연(Wilde Lectures)에 기초한 그의 주저 Divine Discourse에서는 오스틴(John L. Austin)의 話行論(speech-act theory)의 바탕 위에서 \'하나님이 말씀하신다\'는 주장과 관련된 종교적 언어의 특성을 설명하려 하고 있다. 언어와 그 의미에 대한 다양한 철학적 이해가 가능하겠지만, 화행론은 언어를 논리적, 수학적 분석의 대상인 상징체계의 집합으로나 아니면 인간의 내적 상태의 표현과 관련된 인식론적 통로의 하나로 보는 견해들과 달리, 언어가 사용되는 사회적, 관습적 상황과 그 위에서의 행위 주체 상호간의 언어적 매개에 의한 행위의 수행으로 보는 특성을 가진다.
이와 관련해서 월터스토프가 주목하고 있는 특징적인 점은 말이라는 것이 스위치를 누르면 불이 들어오고 나가는 것과 같은 기계적이고 인과적(causal) 관계 속에서 그 효력이 발생되는 것이 아니라, 말 행위의 주체 쌍방이 서로의 말을 권리와 책임이 걸린 인격적 행위로 간주(count as)함으로써 그 효력을 발생시키는 과정인 것으로 이해하고 있다는 점이다. \'인과적 발생\'(causal generation)을 우리가 오스틴의 \'화효행 위\'(perlocutionary act)와 일치하는 것으로 본다면 \'간주 발생\'(count-generation)은 \'화수 행위\'(illocutionary act)와 일치하는 것으로 볼 수 있다.
월터스토프 역시 \'화수 행위\'를 진정한 \'화행\'의 카테고리로 보고, 그 \'화수력\'(illocutionary force)의 효력이 어떤 방식으로 이루어지는지에 대해 관찰하고 있다. 예를 들어 우리가 \'문 좀 열어주시겠습니까?\'하고 말할 때, 이 말이 효력을 일으키기까지는 구별되는 두 행위가 복합적으로 작용한다. 곧 그 말을 입으로 발화하는 행위가 있고 또 그 발화된 말을 \'요청\'으로 간주하는 행위가 수반된다. 이 발화된 말이 하나의 \'요청\'으로 받아들여지는 데에는 그 배후에 이런 형태의 표현을 요청으로 간주하는 사회적 관습이 자리잡고 있다. 이런 관습의 차이가 때로 외국인들에게는 빈번한 어려움을 야기시키기도 할 것이다. 쉬운 예로 우리가 영어로 길을 물을 때 \'여기가 어딥니까?\' 하는 말을 한국식 표현에 맞추어서 \'Where is this?\' 하면 상대는 뭘 찾느냐면서 함께 두리번거릴 것이다. 그들은 \'Where am I?\'라고 해야 비로소 그곳의 지리를 가르쳐 줄 것이다.
월터스토프는 그러나 언어와 관련한 이런 사회적 관습이 하나의 법칙처럼 이해되고 분석되는 것을 원치는 않는다. 이런 점에서 그는 자신의 \'간주 발생\'(count-generation)을 골드만(Alvin Goldman)의 \'관습적\' 발생(conventional generation)이나 존 설(John Searle)의 기구적 \'사실들\'(institutional facts)과 구분하고 있다. 예를 들어 야구장에서 공을 펜스 너머로 멀리 쳐넘기면 이런 행위를 \'홈런\'으로 간주하는 제도화가 규칙 위주의 게임 내부적(internal)으로는 잘 통용이 되겠지만, 사람의 말-행위 속에서의 \'간주\'의 행위는 규칙 내부적 통용성에 국한되는 것은 아니다. 가령 토론을 할 때 \'이렇게 해야 되는 것입니까?\' 하고 말하는 것이 \'질문\'이 아니라 강한 \'반박\' 또는 \'주장\'이 될 수도 있는 것이다. 심지어 이미 사회적 코드(code)화된 표시들의 배후에도 \'인격적\' 요소가 자리잡고 있다고 보아야 한다. 예를 들어 철도건널목에서 빨간 불이 깜박거리면 건너지 말고 서서 기다려야 한다. 이것은 이미 사회적 기호화되어 있는 일이지만 그 오랜 이면에는 건널목지기가 나와서 열차가 오고 있으므로 건너면 위험하다는 \'경고\'나 지금 건너지 말라는 \'명령\'을 발하고 있는 것과 연관된 것으로 보아야 할 것이다. 이런 요소가 배제되고 코드에 의한 경직된 사회운영을 하는 것이 사람을 짜증나게 하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예를 들어 교통순경이 단속지역에 숨어 있다가 불쑥 나와서 신호 위반했으니 벌금을 내시오 하는 경우이다. 코드의 이면에 있는 \'경고\'나 \'계도\' 등의 기능은 상실되고 마치 코드가 절대적인 것처럼 내세우는 사회는 유치하기 그지없다. 일상적인 한 예를 든다면, 초등학생에서 폐휴지 수거를 하는데 이를 비닐 봉지에 담아오면 봉지 자체가 또 하나의 처리물이 되니까 학교에서는 봉지에 담지 말고 끈으로 묶어서 가져오라는 \'권고\'를 아이들에게 주었다. 그런데 아이는 집에 와서 버리는 종이 봉지에 폐휴지를 담아가라는 부모의 말에 극구 반대하고 비닐 끈으로 묶어서 가겠다고 우긴다. 그래야만 학교에서 선생님에게 혼나지 않는다는 것이다. 아이에게는 선생님의 말이 왜 그렇게 해야 하는지에 대한 대화적 설득으로 주어지지 않고 하나의 \'명령\'으로 주어져 있는 것이다. 이때에 그것을 지킬 수 있는 다양한 자율적 가능성들은 상실되고 획일적 \'준수\'만이 유일한 반응방식으로 남아 있게 된다. 이런 식으로 효율성을 앞세운 사회의 운영 시스템이 보다 나은 공동체적 삶의 유지라는 본래적 목적과 단절되어서 \'코드\' 유지 자체를 목적으로 삼게 된다면 이는 매우 불편하고 우스꽝스러운 일이 될 것이다.
우리가 A라고 말한 것이 , , 등으로 간주되는 데에는 이 말-행위 당사자 상호간에 발생하는 책임과 권리, 의무의 관계가 수반되기 때문이라고 월터스토프는 잘 지적하고 있다. 누군가가 우리에게 \'내일 차를 가지고 모시러 가겠습니다\'하고 말할 때, 그 주어진 상황 가운데서 우리는 그 말을 \'약속\'으로 간주한다. 이 말이 그저 문법연습용으로나 마이크 테스트용으로 한 말이 아닌 이상 그 말을 한 당사자는 그 말대로 해야 할 책임을 지게 되는 것이며, 상대방 또한 그 말을 약속으로 간주하고 받아들임으로써 그 말에 따라 그 다음날 다른 일 보고 싶은 생각이 있어도 자리를 비우지 않고 그 말에 자신의 계획을 맞추고 기다리게 될 것이다. 이와 같이 말은 기존의 관계에 근거해서 이루어지기도 하고 또한 새로운 관계를 발생시키기도 한다.
그런데 이런 일반적 현상이 하나님에 대해 적용될 때 여기에 매우 민감하고 어려운 문제가 따른다는 것을 월터스토프는 지적한다. 말하자면 하나님께서 어떤 \'약속\'의 말씀을 하실 때 우리는 하나님에게 대해서도 사람들 사이에서와 같은 책임과 의무를 지울 수 있을 것인가, 그래서 우리가 그에게 어떤 것을 해달라고 요구할 수 있을 것인가 하는 문제이다. 이런 문제와 관련하여 알스톤(William P. Alston) 같은 사람은 부정적 입장을 표시한다. 말하자면 책임과 의무라는 것은 어떤 규칙을 어길 수 있는 가능성이 전제될 때 성립될 수 있는 개념이며, 또 우리가 남에게서 뭔가 좋은 일을 요구한다는 것은 남이 우리에게 해가 되는 일을 할 수도 있다는 것을 전제할 때 가능한 일인데, 하나님은 본질적으로 완전무결하신 분이고 또 남에게 해가 되는 일을 하실 수 없는 분이기 때문에 그에게는 권리는 모르겠지만 의무라는 개념을 적용하는 것이 합당치 않다는 것이며, 그런 점에서 그는 인간의 대화의 대상으로의 자격을 갖지 못한다는 것이다. 이에 반해서 월터스토프는 \'성품에 부합하려는\'(character-required) 행위와 \'성품에서 비롯되는\'(character-supererogatory) 행위를 구분해야 한다고 주장하고 있다. 다시 말해서 어떤 좋은 덕스러운 행위라도 이렇게 하면 내가 덕스러운 사람이 되겠다 하는 동기에서 나온 덕과 본래 덕스러운 사람이기에 덕을 행하지 않을 수 없어서 행하여진 덕은 차이를 가지는 것이다. 요구되기 때문에 나타나는 행동과 요구됨이 없이도 그 성품으로 인하여(in character) 나타내는 행동은 구분되어야 한다는 말이다. 하나님의 사랑은 밖으로부터의 어떤 요구 때문에 나오는 것이 아니라 그 자신이 사랑이심에서부터 흘러나오는 것이다.
알스톤의 칸트적, 형이상학적 신이해와 달리 월터스토프의 성경적 신이해의 바탕 위에서 볼 때 하나님은 우리와 더불어 대화의 상대자로 우리의 말 속에 개입하실 수 있으며, 따라서 하나님은 우리에게 \'약속\', \'명령\', \'위로\', \'경고\', \'심판\' 등의 말씀을 하시고 우리 또한 그에게 \'인정\', \'고백\', \'기도\', \'탄원\', \'감사\', \'찬양\' 등의 형식으로 말할 수 있게 되는 것이다. 성경은 우리에게 이와 같은 풍성한 하나님의 말씀과 사람의 고백적, 선포적 말의 예들을 보여주고 있다. 이는 가장 순수하고 가장 본질적인 말-행위의 모습들이다. 우리가 이런 가장 진정한 형태의 말의 뿌리를 회복할 때 말씀 앞에서의 우리 개개인의 진정한 변화가 이루어질 뿐만 아니라, 나아가서 이 사회 속에서 말과 인격과 신뢰의 회복이라는 가장 근본적인 변화를 추구해갈 수 있을 것이다. 이런 점에서 말씀은 우리에게 말을 가르친다.
더 나아가서 월터스토프의 언어이론은 우리가 칼빈에게서 배웠던 논제, 곧, 설교에 있어서 하나님은 그의 인간적 대리자와 함께 일하시며, 우리가 인간적 설교자의 설교 속에서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그 효력을 체험하게 되는 일이 구체적으로 어떤 방식으로 이루어지는지를 잘 보여주고 있다. 월터스토프는 말에 있어서 화자의 지위(stance)와 인격성, 그리고 의도에 강조를 두는 \'저자 의도\'(authoral intention) 중심의 해석을 주창하고 있음을 보았고, 이것이 작용하는 과정은 한 행동을 통한 다른 행동의 발생, 한 행위주체의 담화를 통한 다른 행위주체의 담화의 수행을 말하는 \'이중 행위주체\'(double agent) 또는 \'이중 담화\'(double discourse) 이론으로 설명되고 있다. 이 \'이중 담화\' 이론을 지탱하는 두 축은, 하나는 말의 효력이 담화의 당사자뿐만 아니라 자신의 정당한 대리자를 통해서도 동일하게 이루어질 수 있다는 것을 말하는 \'대리적 담화\'(deputized discourse) 이론과, 또 하나는 한 담화자가 다른 담화자의 말을 자기의 것으로 용인(approve)함으로써 타인의 말을 통해 자신의 말을 할 수 있다는 \'채택된 담화\'(appropriated discourse) 이론이다. 이 양자의 복합성 속에서 성경해석학적 의의를 찾고자 하는 것이 월터스토프가 제시하는 \'이중 담화\' 이론인 것이다. 이런 관점에서 볼 때 하나님의 말씀과 인간의 말은 배타적 관계에 놓인 것이 아니라, 하나님은 인간을 자신을 대리하도록 \'위임\'(commission)하는 일 가운데서, 또는 인간의 말을 자신의 것으로 \'채택\'(appropriation)하는 일 가운데서 사람을 통해 말씀하실 수 있고, 또 사람은 위임받은 일에 신실함으로써 하나님의 이름으로 말함을 통해 하나님의 말씀을 전할 수 있는 것이다.
이와 같은 월터스토프의 설명에는 유용한 점이 많이 있지만, 한 가지 위험의 소지를 가지는 것은, 우리가 무엇을 하나님의 말씀으로 여길(count as) 것인가 하는 점에 있어서 주관적 판단이 개입될 가능성이 있다는 점이다. 월터스토프가 예로 제시하고 있는 것과 같이 어거스틴이 어린아이들의 노랫말 \'Tole lege!\'를 통해 하나님의 말씀을 들었다는 것, 또는 그 말을 하나님의 말씀으로 여겼다는 것을 일반화시키게 될 때,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으로 여기는 모든 것이 다 하나님의 말씀이 되지는 않는다는 사실을 간과할 위험이 생기는 것이다. 이런 점이 우리를 더욱 하나님의 말씀으로 받아들여진(받아들이는 행위뿐만 아니라) 성경 텍스트에 근거한 설교자가 되어야 할 필요성을 일깨워주고 있다.


IV. 현대의 문화적 조류와 개혁주의적 원리들

1. 설교의 \'사용자 정의\'식 이해?

우리는 위의 논의들을 오늘날의 교회적, 문화적 상황과 결부시켜서 좀 더 실제적인 측면에서 반추해볼 기회를 가지고자 한다. 앞서 우리가 보았던 것처럼 데카르트적 신학(\'Theology A\')의 핵심적인 특성이 수용자(addressee) 중심이라는 것을 틸리케가 잘 지적한 바 있지만, 이런 태도가 오늘날에 있어서는 학문적 영역에서만 아니라 모든 생활의 영역에서 하나의 일반화된 흐름이 되고 있다. 우리는 이런 \'사용자 정의\'식 이해의 도전에 직면해서 어떻게 칼빈과 개혁주의적 전통이 강조하는 것과 같은 하나님의 주권과 위엄에 대해 말할 수 있을지 생각해보지 않을 수 없다. 이미 교회 안에도 꿩잡는 것이 매라는 실용주의적 인식이 널리 퍼져 있다. 예를 들어 부흥에 대한 인식에 있어서도 그 강조점은 하나님의 영광의 돌발적(하나님의 때에 따른) 임재와 역사보다는 우리의 노력이 끌어 올 수 있는 어떤 것으로 생각하는 데 머물고 있다. 이 속에서 중심이 되는 것은 \'내가 드러내는\' 또는 \'나를 통해 역사하고 보여지는\' 하나님의 영광이다. 하나님 자신의 말할 수 없이 큰 영광이 내가 조종할 수 있는 범위 속에 축소되고 있는 것이다. 신약신학자 톰 라이트(N.T. Wright)는 한 책에서 하나님에 대한 참 예배가 어떤 것이어야 하는지를 다루고 있는데, 그의 정의에 따르면 참 예배(worship)는 \'worth-ship\' 곧, 하나님께 합당한 그것을 돌려 드리는 것이라고 말한다. 이에 반해 이사야 40장에 나타나는 것처럼 하나님을 인간의 축척도 속으로 끌어 내려서 거기에 하나님을 맞추려고 하는 것이 우상숭배의 본질이라고 잘 지적하고 있다.
수용자 중심의 실용주의적 문화, 우리는 그 자체를 나쁘다고 말할 수는 없을 것이다. 문제는 이것이 많은 경우에 더 좋은 결과를 낳는 방향에서 수용되지 않고 오히려 더 나쁜 방향에서 수용되고 있다는 점이다. 진정으로 소비자가 중심이 된다면 보다 생산적 가치를 추구하는 소비자의 결정이 생산자의 생산 형태를 결정할 수 있어야 할 것이다. 환경 친화적 제품을 소비자가 더 많이 찾는다면 생산자가 환경 친화적 제품을 만들지 않을 수 없도록 되어져야 한다. 현명하고 조직된 소비자가 되지 못하면 생산자의 이윤 추구적 논리와 선전독점(왜 소비자 계몽과 권리 보호를 위한 광고는 그렇게도 찾아보기 어려운가?)을 통한 구매충동 부채질 및 소비자 조작에 항상 끌려 다닐 수밖에 없을 것이다. 기업이 보다 윤리적 이윤추구를 할 수 있도록 견제하고 주도하는 소비자 운동이 엮어질 수 있을 때 사용자 중심의 체계가 의미가 있는 것 아닌가?
설교의 \'사용자정의\'식, 실용주의적 접근도 같은 맥락에서 생각해 볼 수 있다. 이것이 내 귀에 맞는 말, 내 구미에 당기는 말만 골라 먹겠다는 것으로 인식된다면 이는 저급한 문화의 반영일 뿐이다. 이는 칼빈이 이해하는 설교의 개념과는 정반대의 인식이다. 이런 문화가 교회 안에 지배적이라면 설교자도 인기 있는 설교자가 되기 위해 청중의 귀에 맞는 말 만들어 내기에 급급할 것이다. 복음에 물타기가 불가피하다. 그런데 진정으로 \'사용자정의\'라고 한다면 \'그들이 들어야 할 말이 무엇인가\'에 대한 깨어 있는 살핌이 동반되어야 한다. 보통 개혁주의 교회에서는 장로들에게 부여되는 역할이다. 무엇이 진정으로 유익한 것인가? 목사가 인기에 영합하여 복음에 물타기를 하는 것이 좋은 것인가, 아니면 귀에 거슬리더라도 진정한 약이 되기 위해서는 하나님의 말씀을 하나님의 편에서 전하는 것이 좋은가, 무엇이 궁극적으로 유익한지를 생각할 수 있는 시각이 있어야 한다. \'교인들이 깨어나도록 더 강한 말씀, 더 따끔한 꾸지람을 해 주십시오\' 하고 자주 요청해야지 \'그 귀나 간질러 주십시오\' 하면 이는 분명 오도된 \'사용자정의\'의 이해일 것이다. 깨어 있지 못한 소비자들이 소비자를 무시하는 나쁜 생산자를 만들어 내듯이 깨어 있지 못한 교인들이 쉽게 타협하는 목사를 만들어 낼 것이다. 칼빈이 강조하고 있는 것처럼 목사는 하나님의 위임을 받은 자이며, 사람 앞에서의 부름보다 하나님 앞에서의 부름이 우선임을 기억한다면, 하나님의 크심과 위엄을 더 잘 나타내지 못해서 가슴 아파하는 설교자가 인기를 등에 업고 스스로 만족하는 설교자보다 훨씬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수 있음을 기억해야 할 것이다.

2. 복음의 \'사용자 정의\'식 이해?

다음으로 복음 자체에 대한 \'사용자정의\'식 이해에 견제의 역할을 할 수 있는 것은 복음에 대한 언약적 이해이다. 언약의 요소는 칼빈과 개혁주의적 신학 전통에 있어서 매우 중심적이고 특색있는 요소 중의 하나이다. 이는 한 면에서는 우리의 신앙이 경험 위주의 확실성 추구로 흐르는 것을 막아주고, 또 다른 한 면에서는 위에서 말한 크고 자비로우신 하나님과의 교제 가운데 머묾을 통해 냉냉한 교조적 형식주의나 율법주의의 경향을 탈피할 수 있게 하는 중요한 원칙이 된다.
한편 이는 복음 선포의 \'화수력\'(illocutionary force)을 무엇으로 볼 것이냐 하는 문제와도 관련이 있다. 우리는 앞서 칼빈이 \'하나님의 선하심에 대해 아는 것\'과 \'그 선하심에 자신을 의탁하도록 아는 것\'을 구분하고 있는 것을 보았다(III. ii. 7). 이 둘의 차이는 그 내용에 있어서 보다 그 화수력에 있어서의 차이로 나타난다. 쉬운 예를 들어서 설명하자면, \'예수를 믿으면 구원을 받는다\'라는 말과 \'예수 믿으면 구원받는다는 것을 믿는다\'라는 말이 그 화수력에 있어서 분명한 차이를 가지고 있다. 앞의 경우는 예수를 믿으면 구원을 주시겠다는 하나님의 \'약속\'과 그에 따른 믿음의 \'고백\'에 그 화수력이 있다. 이때의 \'약속\'과 \'고백\'은 모두 \'언약행위\'(commissive)에 해당한다. 그러나 후자의 경우 (뒤의) \'믿는다\'라는 표현은 \'예수 믿으면 구원받는다는 것\'이라는 제3자적 서술에 대한 \'동의\'로서 그 화수력은 \'단언행위\'(assertive)에 속한다. 1인칭의 고백과 3인칭의 서술은 그 명제적 내용(propositional content)은 동일하게 보이지만 그 화수력에 있어서는 뚜렷한 차이가 있다. 하나님의 \'약속\'에 대한 우리의 \'고백\'은 하나님의 말씀, 나아가서 말씀하시는 하나님 자신에 \'맞춤의 방향\'(direction of fit)이 향한다. 그러나 제3자적 서술에 있어서는 그 서술의 진위, 해당 사태의 형편 등에 \'맞춤의 방향\'이 향한다. 또 여기에서는 당사자의 주장에 대한 확신의 유무가 중요한 요소가 되기도 한다. 전자의 경우 믿음(pistis)은 하나님께, 또 그분이 열어주시는 관계 속에 들어감을 의미하지만, 후자의 경우 하나님과 상관없이 자신의 확신(belief) 강도에 믿음이 의존될 수 있다.
더 실제적으로 이런 차이를 보자면 우리는 존 오웬(John Owen, 1616-1683)이 말하는 것을 한 예로 들 수 있다. 1656년에 오웬이 Oxford 대학의 총장으로 있으면서 롬8:13에 근거해서 \'죄를 죽임\'(mortification)이라는 주제로 일련의 설교를 행하였다. 여기서 그는 죄를 인하여 괴로워하는 사람에게 하나님이 주시는 평화와 사람이 스스로 얻는 평화 사이에는 큰 차이가 있다는 것을 강조한다. 사람이 스스로의 논리적, 이성적 결론을 통해 얻는 평화는 이런 식이다. \'나의 죄는 이런 이런 것이고, 여기에 대한 하나님의 약속은 이런저런 것이니, 이 약속에 따라 나는 이제 나았다\'고 적용하는 것이다. 여기에는 죄를 깨닫게 하는 성령의 역사나 참 평화와 치유를 주시는 하나님의 인정이 결여되고, 단지 자신의 불안에서 벗어나고자 하는 한 사람이 복음을 일종의 약 처방처럼 사용하는 경우일 수가 있다. 이런 결과는 오웬이 인식하는 하나님의 말씀의 話行論적 이해와 큰 차이를 가진다. 오웬은 이런 인식을 뚜렷하게 가지고 있다. \"하나님께서 말씀하실 때는, 그의 말씀이 우리의 지성을 확신시키는 진리가 될 뿐만 아니라, 그의 말씀은 또한 선한 결과를 낳도록 행동한다. 곧, 우리의 의지와 감성에 달고 선하고 흠모할만한 결과들을 가져오며, 그로 인해 우리의 영혼이 \'그 평안함에 돌아가게\' 된다(시116:7).\" 이런 이해는 칼빈이 구분하는 것과 같이 하나님에 \'대해\' 아는 지식과 \'하나님의 뜻\'을 아는 지식의 차이와 일치한다. 화행론의 관점에서 볼 때도, 결과 자체를 목적으로 하는 무인격적, 인과적 언어행위는 인격적, 본연적 언어행위와 구분되어야 하는데, 오웬의 지적처럼 양심의 평화를 얻기 위한 목적으로 하나님의 말씀을 그 말씀하시는 하나님과 상관없이 사용하는 것은 부적절하며 유효한 것이 되지 못한다. 이런 부적절한 복음의 이해가 오늘날에도 결과 중심적이며 인위적이고 조작적인 형태의 부흥회나 일부 복음주의적 설교 등에서 많이 행해지고 있다. 인간 스스로의 자가 치료식 구원의 선포는 신앙과 삶이 분리되는 결과를 낳지만, 하나님의 말씀은 반드시 그 약속을 이루며 우리의 마음과 삶 속에 선한 결과들을 낳는다. 그 말씀이 우리의 심령으로 하여금 겸비케 하며, 정결케 하며, 사랑하게 하며, 녹게 하며, 순종과 자기부인에 매이게 할 때, 우리는 하나님이 우리에게 평화를 말씀하셨음을 알 수 있는 것이다.


V. 맺으면서

말씀과 말은 맞닥뜨려져야 한다. 오늘날의 설교자는 이런 일에 부름을 받고 있다. 말씀이 어떻게 말을 변화시키는 방식으로 오늘날 선포되어질 수 있을 것인가? 하버마스나 월터스토프가 예리한 눈길로 살피고 있는 것과 같이 말의 타락이 사회의 타락과 불가불 한 길을 걷는 것이라면 역으로 우리는 말이 회복되는 곳에 사회의 회복이 있다고 볼 수 있다. 보다 정상적이고 인간적인 사회의 회복이라는 \'누구에게나\' 거창하고 힘겨워 보이는 이 일은 말의 회복이라는 \'누구라도\' 할 수 있는 일에서 그 시발점을 찾아가야 한다.
더군다나 하나님이 \'말씀하신/시는\' 사실을 그 생명으로 붙드는 하나님의 말씀의 공동체로서의 교회는 가장 먼저 그 말의 회복을 서둘러야 할 책임이 있다. 교인들의 말도 믿을 수 없고 교회의 말도 기대할 것이 없다는 인식이 지속되는 한 말씀과 말은 항상 겉돌 수밖에 없다. 특히 칼빈이 강조하고 있는 것과 같이 말씀을 통한 하나님의 통치의 자리로서의 강단의 권위가 온전하게 회복되는 곳에 교회는 \'교회 속의 세상\'을 극복하고 \'세상 속의 교회\'로서의 구별된 섬김과 사랑을 베풀 수 있는 길을 찾게 될 것이다. 여기에서 교회는 이 사회를 위한 가장 근본적이고 가장 필요한 기여를 할 수 있는 것이 아닐까? 곧 \'하나님의 말씀\'이 그 \'약속\'의 효력으로 말미암아 우리를 말씀에 따라 세상을 변화시키는 사람으로(\'world-to-word fit\') 사회를 향해 말할 수 있는 사람 되게 할 것이다. 그때에 우리는 세상에 우리의 말을 맞추어 가는(\'word-to-world fit\') 제2군의 세상, 또는 일종의 \'이익집단\'으로서의 교회라는 잘못된 인식을 벗어버릴 수 있게 될 것이다. 이것이 더 넓은 사회를 향해서는 말에 목숨을 거는 사람들이 있다는 것을 보여줌으로써 하나님의 말씀이 \'선포\'될 수 있는 기틀을 닦아 가는 일이 될 것이고, 나아가서 사회를 보다 인격적이고 신의와 책임에 바탕한 사회로 만들어가기 위한 구체적 제안들에 사람들이 귀를 기울이게 할 수 있는 지름길이 될 것이다. 그 말한 것을 행하며 또한 능히 이루는 \'살았고 운동력이 있는\' 하나님의 말씀은(히4:12) 우리에게 말을 가르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