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상 제9강
삼상 4장 1-22절
영광을 회복하십시오(삼상강해 9)
한가지 질문이 있습니다. \"기도하면 모든 문제가 잘 풀립니까?\" 이 질문에는 그렇다고 말할 수도 있고, 그렇지 않다고 말할 수도 있습니다. 전체적인 측면에서는 기도하면 문제가 잘 풀리지만, 때로 한 사건 사건 속에서는 기도해도 문제가 안 풀리는 경우가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엄밀히 얘기해서 \'기도하면 된다!\'는 무조건적인 말은 진리도 아니고 사실도 아닙니다. 그것은 기도를 맹신하는 것으로 잘못 흐를 수 있습니다. 기도는 그저 하는 것이지 믿음의 대상은 아닙니다. 오직 하나님만이 믿음의 대상입니다. 믿음의 대상을 잘못 잡아 믿는 도끼에 발등 찍힌 경우가 얼마나 많이 있습니까.
* 믿음의 대상 바로 잡기
오늘날 신앙생활에서 가장 큰 문제는 무엇입니까. 믿어야 할 분을 믿지 않고 믿지 말아야 할 것을 믿는 것입니다. 기도는 참으로 소중한 행위이지만 기도를 믿지 마십시오. 예배도 참으로 소중하지만 예배를 믿지 마십시오. 전도가 소중하지만 전도를 믿지 마십시오. 금식기도, 철야기도, 서원기도 등도 다 소중한 신앙행위지만 그것들을 믿지 마십시오. 오직 하나님만 믿으시길 바랍니다.
기도는 하는 것이지 믿는 대상이 아닙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어떤 사람은 기도를 지나치게 믿습니다. 그래서 분명히 기도하는 것인데 하나님이 빠진 기도도 있습니다. 이런 식으로 기도 자체를 믿는 것도 하나의 미신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물론 우리가 기도하면 놀라운 초자연적인 역사가 많이 일어납니다. 길이 다 막힌 것 같았을 때 기도하면 길이 극적으로 열리는 경험! 우리들은 다 이런 경험이 있습니다. 그러나 한편으로 생각해 보면 기도한다고 해서 다 문제가 좋게 풀리는 것이 아닙니다. 무조건 \"기도하면 된다!\"라고 말하는 것은 미신입니다. 무속인들도 그렇게 말한다. \"기도하면 된다!\" 기독교 이단에 빠진 사람들도 동일하게 말합니다. \"기도하면 된다!\"
우리가 믿는 기독교는 그런 미신이 아닙니다. 기도에 대해서 좀더 정확한 개념을 가지고 있어야 합니다. 무조건 \'기도하면 된다\'라고 말하는 것은 잘못입니다. 진실이 없이 기도하면 안됩니다. 예수님이 빠진 상태에서 기도하면 안됩니다. 하나님이 빠진 상태에서 기도하면 안됩니다. 죄악되고 이기적인 모습을 그대로 간직한 채 기도하면 안됩니다. 내용은 없이 기도라는 포장만 있으면 안됩니다.
왜 기도하면 하나님의 역사가 일어납니까. 하나님 앞에 나의 죄를 고백하고 변함없는 신뢰를 가지고 하나님 앞에 기도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그 기도에 하나님이 있느냐 없느냐 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하나님이 있는 진실된 믿음의 기도여야 합니다. 포장된 믿음은 미신에 불과할 따름입니다. 이 원리를 잘 가르쳐 주는 것이 본문의 내용입니다.
* 전쟁의 패배가 의미하는 것
이스라엘과 블레셋(팔레스타인)은 이스라엘이 가나안 땅에 들어가면서 대대로 원수였습니다. 그래서 둘 사이에는 전쟁이 자주 일어났는데 그 전쟁에서 이스라엘이 때로는 이기고 때로는 졌습니다. 그러나 대체로 그 전쟁의 공식이 있습니다. 이스라엘이 하나님 앞에 바로 섰을 때에는 이기게 하시고 이스라엘이 하나님을 멀리 하고 타락했을 때는 지게 하신다는 것입니다.
본문에서는 이스라엘이 블레셋과의 전쟁에서 졌습니다. 어떻게 보면 당연한 일입니다. 그 이유는 사무엘상 3장에 이미 언급되어 있습니다. 당시에 여호와의 말씀이 희귀하였다(3:1)는 것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 앞에 바로 서지 못했다는 결정적인 증거가 됩니다. 그러한 타락한 백성에게 하나님의 승리가 주어질 수 없는 것은 당연한 일입니다.
본문에는 블레셋과의 전쟁에서 이스라엘이 패배하고 4천명이 죽었다는 말씀이 있습니다(2절). 이 패배의 원인은 무엇이었을까요. 근본적인 원인은 이스라엘의 죄악 때문이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패배의 원인을 하나님께 돌렸습니다. \"여호와께서 어찌하여 우리로 오늘 블레셋 사람 앞에 패하게 하셨는고(3절).\"
문맥과 어조를 보면 원인을 분석하는 것이 아니라 불평을 토로하는 것입니다. 얼마나 안타까운 일입니까. 사람이 미련함으로 자기 길을 굽게 하고도 마음으로는 여호와를 원망하는 사람이 너무나 많이 있습니다(잠 19:3). 그리고 나서 이스라엘 백성은 잘못된 결정을 내립니다. \"언약궤를 전쟁터로 가지고 오자!\"
언약궤는 하나님의 임재를 상징합니다. 언약궤에는 십계명, 만나, 아론의 싹난 지팡이가 들어 있습니다. 십계명은 율법을 주신 하나님을 상징하고, 만나는 생명의 떡인 예수님을 상징하며, 아론의 싹난 지팡이는 생명력을 상실한 지팡이에라도 생명력을 주시는 성령님을 상징합니다. 그리고 언약궤의 뚜껑은 속죄소라고하여 그곳에 속죄의 피를 뿌림으로 은혜의 길이 새롭게 정립될 수 있는 놀라운 성물입니다.
그래서 언약궤가 이동하는 데에 따라 하나님의 영광이 뒤따랐고, 밤에는 춥고 어두우니까 불기둥으로, 낮에는 덥고 눈이 부시니까 구름기둥으로 이스라엘 백성들을 돕는 역사가 있었습니다. 그리고 요단강을 건널 때에는 제사장들의 발이 요단강에 닿자 마자 강물이 엄청난 영광의 압력으로 말미암아 끊어지는 역사가 나타나기도 했습니다. 왜 그런 역사가 일어났습니까. 언약궤에 하나님의 영광이 함께 했기 때문입니다. 그 사실을 이스라엘 모든 백성들이 잘 알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그 언약궤만 가지고 오면 하나님의 영광이 나타나 블레셋을 전멸시킬 수 있으리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언약궤를 전쟁터로 가지고 나갔던 것입니다.
누가 언약궤를 전쟁터에 가지고 나갔겠습니까. 홉니와 비느하스가 중심이 되어 언약궤를 가지고 나갔을 것입니다. 홉니와 비느하스는 누구입니까. 강간과 도둑질로 비난받는 사람들이 아닙니까.
홉니와 비느하스로부터 풍기는 죄의 냄새들에 대해 생각해 보십시오! 그리고 그 냄새들이 진동되는 가운데 움직이는 언약궤의 처지를 생각해 보십시오. 과연 이스라엘 백성들이 언약궤를 소중히 여기고 있는 것입니까. 아닙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언약궤를 중시하기는 했지만 언약궤의 임자이신 하나님은 멸시하고 있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원망스런 시각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하나님이 그들의 전쟁을 외면하시고 피하신 것 같은 느낌을 가졌을 것입니다. 그래서 전쟁터에서 피하신 하나님을 붙잡고 강제로라도 전쟁터로 끌고 와야겠다는 못된 심리가 그들의 마음 속에 있었습니다. 강제로라도 내가 복을 받는 수단으로 하나님을 이용해 먹겠다는 그 상상할 수 없는 신성모독적 자세가 언약궤를 전쟁터에 가지고 오는 자세 속에 내포되어 있습니다.
그런 상황에서 하나님이 그들을 위해 일어나시겠습니까. 그런 상황에서 하나님의 영광이 그들과 함께 하시겠습니까. 절대자 하나님은 절대로 자신의 주권을 그렇게 농락당하지 않을 것입니다. 하나님은 인간의 진실에는 감동하시고 움직이시지만 인간의 거짓된 장단에는 절대로 춤추시지 않을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스라엘 백성들은 언약궤가 전쟁터에 들어오자 이스라엘 군사들은 마음이 붕 떠서 큰 소리로 외쳤습니다. \"이제 게임은 끝났다! 분명히 이긴다!\"
언약궤라는 포장에 대한 잘못된 확신은 자신의 할 일을 제대로 파악하지 못하는 게으른 사람을 만들게 됩니다. 그래서 그런 인생은 해야 할 일도 하지 않은 채 지나친 자아확신을 가지고 있는 경향이 많습니다. 이런 행위들은 하나님을 참으로 불쾌하게 만듭니다. 아무리 적극적인 확신을 가지고 있다고 해도 순종과 믿음이 없는 적극성은 소용이 없습니다.
반면에 블레셋 사람들은 언약궤가 도착했다는 소리를 듣고 서로를 격려합니다. \"블레셋 군사들아! 대장부가 되어라!\" 얼마나 묘한 대조입니까! 누가 하나님의 백성인지 혼동될 지경입니다.
* 빼앗긴 언약궤의 교훈
결국 이스라엘은 대패하게 됩니다. 언약궤를 가지지 않았을 때 4천명 죽었지만 이제는 언약궤를 가지고 3만명이 죽게 되었습니다(10절). 그리고 하나님의 임재를 상징하는 언약궤를 블레셋 사람에게 뺏기고야 맙니다. 홉니와 비느하스도 죽임을 당하고 그 모든 소식을 들은 엘리는 놀라 자빠져 문 옆에서 목이 부러저 죽고 엘리의 며느리는 아이를 낳고 죽어가면서 소리쳤다. \"영광이 이스라엘에게서 떠났다! 이가봇!\"
이 슬픔! 이 비극! 이 고통! 이 파멸! 이가봇! 오늘날 우리가 이 길을 따라가고 있는 것은 아닌지 신중히 자신을 돌아보아야 합니다. 이 장면을 무엇을 교훈하고 있습니까.
1. 내면이 없는 상징은 소용없습니다
언약궤는 이스라엘의 위대한 상징입니다. 그것은 이스라엘 백성이 40년 동안 광야에서 방황할 때 광야생활의 위대한 정신적 지주였고 광야에서 그들을 지켜준 놀라운 은혜의 상징물이었습니다. 그러나 아무리 위대한 상징을 가지고 있을지라도 상징을 내세우며 내면을 가꾸지 않으면 무슨 의미가 있겠습니까.
2. 언약궤 대신에 회개를 앞세워야 합니다.
과거의 승리가 현재에도 무조건적으로 적용되리라는 관성에 사로잡히면 안됩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과거의 관성에 사로잡혀서 언약궤를 앞세우기보다는 회개하는 마음과 믿음을 그들이 가지고 있었는지 먼저 진단했어야 합니다.
이스라엘의 전쟁 패배의 원인은 무엇이었습니까. 그들의 죄악 때문이었습니다. 그 사실을 직면하지 않고 다른 수단으로 승리를 쟁취하려면 더욱 비참한 재난을 맞이할 것입니다. 모래 위에 집을 짓고 집이 흔들린다고 비바람만 탓하면 되겠습니까.
이스라엘 백성들은 언약궤를 앞세우기 전에 회개를 앞세웠어야 했습니다. 회개를 앞세우고 언약궤가 나아갔으면 전쟁의 승리는 틀림없이 이스라엘의 손에 주어졌을 것입니다. 언약궤는 회개가 수반되지 않는 자에게 능력을 베푸는 마술적 도구가 아닙니다.
3. 하나님의 영광을 중시해야 합니다
언약궤는 드랴큘라를 쫓아내는 십자가가 아닙니다. 언약궤라는 상징을 신봉하는 것은 매사에 어떤 수단을 써서라고 하나님의 복을 받아내고야 말겠다는 자세이지 하나님의 영광을 소중히 여기는 자세와는 거리가 먼 태도입니다.
하나님 입장이 되어 하나님의 영광을 찾지는 않고 하나님을 내 입장에 두고 자기 이익을 도모하는 그 모습! 그 영적 이기주의! 그것을 아시는 하나님이 어찌 그런 사람들을 위해 일어나시겠습니까. 경건의 정신이 없는 종교! 이 얼마나 허무한 것입니까.
4. 하나님을 기쁘게 해야 합니다
하나님께로 나아가는 것은 찬 신앙으로 나아가는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빠진 상태에서 언약궤로 나아가는 것은 미신으로 나아가는 것입니다. 언약궤가 있기에 하나님이 도와주시는 것입니까. 아닙니다. 언약궤가 없어도 하나님은 도와주십니다. 다만 하나님이 그를 기뻐하시면 됩니다.
아무리 소중한 상징도 불의한 자에게 피난처를 제공하는 것이 아닙니다. 자세가 준비되지 않은 자에게 있어서 상징(언약궤)은 오직 미신적인 대상이 될 뿐입니다.
오늘날 우리가 사는 세상은 내용은 없는 상태에서 상징이 판을 치는 세상입니다. 상징이 판치고 상징조작이 있는 나라와 공동체는 결국 망합니다. 이미지 메이킹도 중요하지만, 진실이 더욱 중요합니다.
내용이 없이 이미지 메이킹을 추진하면 반작용이 많을 수밖에 없습니다. 왜냐하면 이미지는 항상 조작될 수 있고, 조작된 이미지는 편견을 수반해 공동체의 통합을 깨뜨리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결국 그 위선이 언젠가는 드러나게 될 것입니다.
그래서 모든 사람들은 위선과 가식을 싫어합니다. 진실이 없는 포장을 좋아하는 사람이 어디에 있습니까. 그러나 인간은 포장 속의 내용을 볼 수 없을 때가 많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내용을 훤히 잘 아십니다. 그래서 관성적 신앙행위를 앞세우지 말고 진실로 내가 하나님을 어떻게 기쁘게 할 것인가를 생각하고 실천해야 합니다.
하나님이 없는 모든 신앙적 행위! 그것은 미신입니다. 미신에는 하나님의 영광이 자리할 수 없습니다. 우리의 믿음의 대상은 오직 하나님입니다. 금식기도가 아무리 소중한 행위라도 할지라도 금식을 믿지 마십시오. 예배가 아무리 소중해도 예배 자체를 믿지 마십시오. 전도가 아무리 귀한 사명이라도 전도 자체를 믿지 마십시오. 하나님이 없는 그런 행위는 결코 진정한 역사를 만들어내지 못합니다.
오늘날 우리의 신앙은 진정 어떤 모습입니까. 하나님 앞에 진정 진실되게 행동하고 있습니까. 정말 한 점 부끄러움이 없이 살고 있습니까. 신앙이라는 포장으로만 나를 감싸고 있는 것은 아닙니까. 첫 사랑을 버리고 관성으로 신앙생활하고 있는 것은 아닙니까. 상징도 중요하지만 내용이 더욱 중요하다는 사실을 잊지 마십시오. 신앙생활에 하나님 보시기에 바른 내용을 채워서 하나님의 영광을 회복하시기를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