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상 제12강

삼상 6장 13-21절


분수를 아는 성도(삼상강해 12)


블레셋 지역에서 큰 역사를 일으키면서 하나님의 영광을 스스로 지키던 언약궤가 드디어 이스라엘 지경으로 돌아오게 되었습니다. 그러자 돌아오는 언약궤를 보고 벧세메스 사람들이 기뻐했습니다. 그리고 예배를 드렸습니다. 본문 15절은 이렇게 전하고 있습니다. \"레위인은 여호와의 궤와 그 궤와 함께 있는 금 보물 담긴 상자를 내려다가 큰 돌 위에 두매 그 날에 벧세메스 사람들이 여호와께 번제와 다른 제를 드리니라.\"

예배란 무엇입니까. 하나님을 하나님으로 인정하는 것이 예배입니다. 하나님께서 스스로 \"나는 여호와로라!\"고 말씀하실 때 그 말씀의 의미를 깊이 인식하는 것이 예배입니다. 또한 하나님께서 \"나는 스스로 있는 자니라!\"고 말씀하실 때 그 말씀의 의미를 깨닫고 엎드리는 것이 예배입니다. 그러므로 예배란 참으로 소중한 행위입니다.

그런데 벧세메스 사람들이 드린 예배는 하나님의 거룩성에 대해서는 전혀 생각하지 않는 피상적이고 전통적인 예배였습니다. 그런 상황은 벧세메스 사람들이 언약궤를 호기심으로 들여다보는 장면을 통해 느낄 수 있습니다. 결국 그 일 때문에 (오만) 70명이 죽는 일이 일어나게 되었습니다.

인간의 영역밖에 있는 것을 알려고 하는 지나친 호기심은 하나님을 모욕하는 행위로 흐를 수 있는 가능성이 많습니다. 신명기 29장 29절에는 이런 말씀이 있습니다. \"오묘한 일은 우리 하나님 여호와께 속하였거니와 나타난 일은 영구히 우리와 우리 자손에게 속하였나니.\" 오묘하고 은밀한 일을 너무 알려고 하는 것은 잘못된 신앙으로 변질될 수 있습니다.

* 시한부 종말론의 폐해

1992년은 시한부 종말론이 우리나라에 큰 문제를 일으키고 있던 해였습니다. 당시 시한부 종말론을 주장하는 교회는 우리나라에 대략 400교회나 되었습니다. 당시 시한부 종말론을 주장하는 사람들의 열심은 대단했습니다. 그러나 사회에 대한 그 열심의 역작용이 너무나 컸기 때문에 많은 목회자들이 시한부 종말론에 반대를 했습니다.

당시 시한부 종말론을 주장하던 사람들은 종말론 분야에 대해서 비교적 많은 지식을 가지고 있었던 사람들입니다. 그래서 그들과 함께 종말론에 관한 논쟁을 벌였던 한 신학교 교수가 나에게 이렇게 말한 것이 생각납니다. \"알아서 탈입니다!\"

당시 시한부 종말론이 미쳤던 사회적 파장은 대단했습니다. 많은 가정들이 깨졌고 수많은 부작용이 도처에서 나타났습니다. 나는 시한부 종말론을 주장하는 사람을 만나면 참된 진리를 붙잡으라고 말했고 그래도 듣지 않는 사람들에게는 다음과 같은 제안을 했습니다. \"정말로 주님이 1992년 10월 28일 0시에 재림하신다고 믿는다면 내가 제안을 하나 하겠습니다. 주님이 오신다면 이 땅의 재산이 무슨 소용이 있습니까. 만약 그때 주님이 오시지 않으면 당신이 가지고 있는 모든 재산을 전부 헌금하겠다는 약정을 하고 서류를 만듭시다.\"

그 제의에 시한부 종말론을 주장하는 사람 중에 한 사람도 응한 사람이 없었고 시한부 종말론을 주장하는 대부분의 사람들의 마음이 흔들렸습니다. 내가 무슨 의도로 그런 제의를 했겠습니까. 시한부 종말론을 주장하는 사람들이 입으로는 그 날짜를 믿는다고 하지만 영으로는 믿지 않는다는 사실을 밝혀내기 위해서였습니다. 즉 그들은 1992년 10월 28일 0시에 주님이 오신다고 주장을 하지만 마음 깊은 곳에서는 회의를 하고 있는 것입니다.

여러분! 하나님은 인간의 시간에 묶을 수 없습니다. 그렇게 때문에 하나님은 마지막 날에 대한 인간의 지나친 호기심을 기뻐하지 않습니다.

* 은밀한 것은 하나님께 속했습니다

나타난 것은 우리에게 속했고 은밀한 것은 하나님에게 속했다는 것이 성경이 말하는 원리입니다. 그러면 우리의 죽을 날짜는 누구에게 속한 것입니까. 오직 하나님에게 속한 것입니다. 만약 죽을 날짜를 사람들이 안다면 이 세상은 난리가 날 것입니다. 어린 아이들에게 장차 결혼할 상대자는 누구라고 가르쳐 준다면 사춘기의 설레임은 사라질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그런 은밀한 것들을 감추어 두셨습니다. 하나님께서 전능자의 신비를 더욱 뽐내기 위해서 은밀한 것을 비밀에 두시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행복한 삶을 위해서 그렇게 하시는 것입니다.

재림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를 사랑하시기 때문에 하나님은 재림 날짜를 오직 하나님의 주관 하에 두신 것입니다. 그래서 초대교회의 교인들도 오늘날의 교인들 이상으로 주님의 재림을 사모하며 신앙생활을 할 수 있었습니다.

결론적으로 말하면 하나님 앞에서는 인간적인 시간을 의미가 없습니다. 하나님은 시계가 없습니다. 오직 영원한 현재 속에 계십니다. 우리 주님은 영원한 현재적 존재이며 시작도 끝도 없는 분입니다.

우리 피조물이 시간이라는 한계 속에 있는 것이지 하나님을 인간의 시간에 묶을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우리의 신앙생활에서 중심은 어디에 있어야 합니까. 현재 우리 안에 계신 주님을 믿는 것, 이것이 우리의 신앙생활의 중심이 되어야 합니다. 그렇게 현재 주님과 동행하는 사람이 주님이 오시는 날 주님과 함께 사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날짜를 전할 시간이 있으면 그 시간에 복음을 전해야 합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전하지 않고 날짜를 전하면서 그 날짜를 믿으라고 한다면 얼마나 부끄러운 일입니까. 사실상 시한부 종말론에 빠진 사람이 열심히 복음을 전하는 것 같지만 사실상 복음을 전하는 것이 아니라 날짜를 전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날짜를 기다리는 사람들이 아닙니다. 다만 주님을 예배하는 자가 되어야 합니다. 그런 자세를 가지고 있는 사람이 진정 재림의 때에 들림받게 될 것이며 주님과 함께 영원히 살게 될 것입니다.

지나친 호기심은 사단의 궤휼에 빠질 수 있습니다. 묵묵히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허락하신 그 분량대로 분수를 알아가면서 신앙생활을 하도록 합시다. 하나님께 맡길 것은 하나님께 온전히 맡겨야지 신앙의 묘미가 있는 것이 아닙니까. 하나님에게 속한 것까지 다 알고자 한다면 우리는 결코 하나님을 하나님답게 모시는 자세, 즉 참 예배의 자세로 들어갈 수 없게 될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알려주시는 만큼만 알려고 하는 성도가 되십시오. 분수를 아는 성도가 되기에 힘쓰시기를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