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독론(2)
인간론의 근거로서 기독론
전제
예수의 말씀과 가르침은 인간의 실재성을 비추는 말씀이다. 나와 무관한 객관적인 진리의 가르침이 아니라 나의 참 모습을 밝혀주는 가르침이다. 즉 내가 누구인가를 가리키는 말씀이 된다. 이런 점에서 기독론은 성자 예수에 대한 객관적인 서술이나 신학적인 사유가 아니라 인간의 실재성을 가리키는 가르침이 된다. 말하자면 기독론은 인간론의 근거가 된다.
예수의 가르침에서 나타나는 인간의 실재성
1. 마16장22-28
내용소개
베드로가 예수께 신앙고백을 했고 그 고백 위에 예수는 교회를 세우겠다고 선언하셨다. 그 후로 예수께서 예루살렘에서 고난과 죽임을 당하고 셋째 날에 부활할 것을 가르치셨는데, 신앙고백을 했던 그 베드로가 예수를 붙들고 “그리 마옵소서 이 일이 결코 주에게 미치지 아니하리이다”고 말했다. 그러자 예수는 “사단아 물러가라”고 꾸짖으셨다. 베드로는 하나님의 일을 생각하지 않고 인간의 일을 생각하였기 때문이다. 그런 다음 우리가 읽었던 내용의 말씀을 하셨다. “누구든 나를 따라오려거든 자신을 부인하고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라와야 한다”고 하셨다. “자기 목숨을 구하는 자는 잃을 것이고 나를 위해 잃으면 찾으리라”고 하셨다.
정리
24절의 내용을 우선 나름대로 정리해 보면 다음과 같다.
자기를 부정하는 것과 자기의 십자가를 지는 것과 예수를 따르는 것은 아주 밀접한 관계가 있다는 것이다. 이것은 하나님의 일을 하는데 있어서 중요한 점이다. 즉, 하나님의 일을 위해서는 이렇게 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리고 이 행위들은 결국 25절에 내용과 같이 생명과 직결되는 일이다. 여기서 “목숨”이라고 하는 말은 “프지케”라는 헬라어로 사용되었다. 이 단어는 신약성경에서 103번 사용되었다. 바울은 이 용어를 별로 사용하지 않고 있지만 공관복음과 사도행전에서는 자주 사용된다. 마태가 의미했던 프지케와 바울이 의미했던 프지케가 반드시 같다고 할 수 없을 것이다. 그러나 공통적으로 그들이 이해하는 바는 프지케는 인간이 죽고 사는 생명의 문제를 가리키는 것이었다. 그리고 이것은 인간이 스스로 채울 때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 오로지 하나님으로부터 주어진다는 사실이다. 이 단어가 “목숨”으로 사용되기도 하지만 보통 영혼을 가리킨다. 영을 나타내는 프뉴마와 달리 구체적으로는 혼을 나타내기도 한다. 혼이란 육체를 살게 하는 “힘” 내지 “원리”이기 때문에 목숨이라고 이해해도 별로 하자가 없는 듯하다. 정리하자면 ○1 하나님의 일은 자기-부정과 자기 십자가를 지는 것, 그리고 예수를 따르는 것이다. ○2 그리고 이런 일은 생명과 관계하는 일인데 ○3 이렇게 살면 반드시 생명을 잃지 않고 찾는다는 가르침이다. 예수의 가르침에서 두드러지는 것은 인간의 일과 하나님의 일이 정면으로 대립된다는 것이다. 베드로가 만류한 것은 스승에 대한 사랑과 동정, 연민이 작용했는지 모른다.가장 큰 이유로는 다른 정치적 이유가 작용했는지 모른다. 예수를 정치적 메시아로 생각했는데 그가 죽으면 해방의 꿈이 실현될 수 없기 때문이었다. 그것은 분명히 인간의 사랑이었다. 인간의 일이란 주님의 가르침에 의하면 “자기를 긍정하는 것이고 자기 십자가를 지지 않는 것이고 그것은 예수를 따르는 것이 아닌 것이다”. 반대로 자기를 부인하는 것, 자기 십자가를 지는 것 그리고 예수를 따르는 것은 하나님의 일을 하는데 중요한 점들이다. 이것들은 서로 구분되는 것들 이지만 그러나 뗄 수 없는 관계에 놓여있다. 즉 자기를 부정하지 않고는 자신의 십자가를 질 수 없고 자신을 부정하지 않고는 예수를 따를 수 없다. 동시에 자신의 십자가를 지지 않고는 예수를 따를 수 없다는 것이다.
자기부정과 하나님의 일과의 관계
우리는 여기서 한 가지 간과할 수 없는 사실을 주목해야 한다. 그것은 “하나님의 일”과 “자기-부정”과의 관계이다. 하나님의 일 혹은 하나님의 역사는 인간의 자기-부정에서 일어난다는 것이다. 하나님의 역사는 인간이 자신을 부정할 때 시작되고 거기서 활발하게 일어나고 성취된다는 사실! 하나님의 일이란 예수에게는 고난 받고 죽으시는 것과 부활하시는 것이다. 이 일은 바로 자기가 부정되는 곳에서 시작되고 일어나며 거기에서 성취되는 것이다. 자기-부정이 없는 곳에는 하나님의 일도 없다고 하면 지나친 단정일까? 그런데 “하나님의 일” 또는 “하나님의 그것”이라고 할 때 그 때 “일”이라는 것이 문제인데 과연 자기를 부정하면 “일”이 가능할까? 일”이란 자기를 떠나서는 불가능하다고 철학자들은 말한다. 독일의 철학자 피히테라는 사람은 “인간의 자아는 본질적으로 활동하는 자아이고 부단히 자신을 세운다”고 주장했다. 이 말에 따르면 인간의 모든 행위는 활동하는 자아의 산물이다. 자신을 세우는 행위이고 자신을 나타내려는 행위이다. 기독교적인 칭의란 내가 나를 인정하는 것이 아니라 남이 나를 인정하는 것을 인정하는 것이다. 이런 점에서 기독교적인 칭의는 자기-긍정이 아니라 자기-부정에서 비롯된다. 내가 남에게 나 자신의 의를 입증하려고 하는 것이 아니라 남이 나의 의를 입증해 주는 것을 인정하는 것! 그런데 남이 나를 인정해 주는데 그 분이 하나님인 것을 믿는 것이다. 이것이 기독교적인 칭의이다. 나 스스로는 죄가 없지만 하나님이 죄인이라고 하시니까 그 하나님을 믿기 때문에 내가 죄인이라고 믿는 것! 그래서 기독교인은 이 사상에서 출발한다. 예수에게서 독특한 점이 바로 이 사상이다.
고난과 죽음은 죄인이 당하는 고통이다. 예수께서는 이 고통을 당할 죄를 가지고 있지 않다. 그런데도 하나님은 예수가 이것을 죄인처럼 당하길 원하시고 계신다.
그래서 예수는 이런 하나님을 믿기 때문에 그 고통을 당하기로 하셨다. 그런데 베드로는 그렇게 하지 말라고 만류했다. 그러나 베드로의 만류는 전형적인 자기-긍정이다. 죄 없는 자는 자신이 죄 없음을 자신 있게 당당하게 밝혀야 하는 것이다.
그러나 이런 자기-긍정의 행위에는 하나님이 일하시지 않으신다고 예수는 말씀하신다. 인간이 자기 스스로를 인정하고 내 세울 때 오히려 하나님은 일하지 못하신다는 것이다. 예수께서 보시는 생의 법칙은 이렇다. 누구든지 자기 스스로 생을 세우고자 하면 하나님은 일하시지 않으신다. 하나님이 일하시지 않으시는 것은 인간에게는 죽음이다. 그러나 하나님이 일하실 수 있는 존재, 즉 하나님이 나를 인정하시도록 내가나를 부정하면 오히려 생명을 찾게 된다는 것이다. 바울의 말대로 의롭다 하시는 이를 오로지 하나님으로 믿는 것이다. 베드로의 생각대로 의롭다 하는 이를 자신으로 믿지 않는 것이다. 나는 나를 의롭다고 항상 말한다.
이 자기-긍정 때문에 나를 부정하지 못한다. 즉 의롭다 하시는 이가 오로지 하나님 뿐인 것을 믿지 못하는 것이다.
해석
예수의 가르침에서 나타나는 사실은 이것이다.
1. 인간이 자신을 부정해야 하는 것은 당연한 요구이다. 예수의 이해에 따르면 인간은 하나님의 형상으로서 하나님 자신이 사역하시고 활동하시는 장소로 이해 하시고 계셨다. 예수에게는 인간의 자기-부정은 하나의 장소로서 하나님이 활동하시고 자신을 계시하시는 장소였다. 인간의 자기 부정은 곧 하나님의 자기 긍정의 장소가 된다.
2. 자기를 부정하는 것과 자기 십자가를 지는 것, 그리고 예수를 따르는 것은 사실 같은 일이었다. 즉 자기를 부정하는 자는 부정된 자신 속에서 하나님이 자신을 인정하기 때문에 하나님을 인정하는 믿음으로 사는 것이 곧 십자가를 지는 것이 된다. 하나님의 자기를 믿는 자만이 자기를 부정할 수 있다.
3. 인간의 자아는 어떤 무엇으로 채워진, 혹은 채울 수 있는, 또는 채우는 존재가 아니라 전적으로 하나의 “응답해야 하는 존재”로 나타난다. 즉 인간의 지아는 전적으로 하나님에 대해 반응하는 존재인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