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상 제23강

삼상 11장 1-15절


한 발 후퇴, 열 발 전진(삼상강해 24)


이스라엘 백성들이 왕을 뽑는 제비뽑기에 들어가 사울이 왕으로 뽑혔을 때 많은 백성들은 \"왕 만세!\"를 외쳤으며, 마음이 감동된 유력한 자들은 사울이 기브아 자기 집으로 갈 때 그와 함께 동행했습니다. 반면에 어떤 비류(불량배)들은 \"저런 젊은 친구가 어떻게 우리를 구원할 수 있어!\"라고 비웃었습니다.

그때 사울은 그들의 말을 듣고도 아무 말 하지 않고 잠잠했습니다. 만약 사울이 감정대로 대응했다면 갈등의 골만 커졌을 것입니다. 그러면 모두 상처투성이가 되고 맙니다. 기다림의 지혜! 이것이 우리들에게 필요합니다. 왜 우리는 기다릴 수 있습니까. 하나님이 함께 하심을 믿기 때문입니다.

내 감정대로 일하면 하나님이 일하시지 않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을 의지하고 잠잠하여 참아 기다릴 때 하나님은 바삐 움직이시며 그를 위해서 일하실 것입니다. 그러면 자신이 비류들을 제거하려고 노력하지 않아도 하나님은 생각지 못한 방법으로 신비하게 그 문제를 해결해 주십니다.

본문 11장은 바로 그러한 하나님의 방법이 잘 그려진 장입니다. 그래서 사울의 왕권이 견고하게 공인되는 장입니다. 그것을 위해서 하나님은 생각지도 않게 \"나하스\"라는 인물을 사용합니다.

* 나하스를 물리친 사울

어느 날 암몬 사람 나하스가 길르앗 야베스를 공격했습니다. 야베스 사람은 전세가 불리함을 깨닫고 그들에게 화친을 청했습니다. \"우리와 언약하자. 그리하면 우리가 너를 섬기리라.\"(1절) 그러나 나하스는 막무가내였습니다. \"너희 오른눈을 다 빼라. 그러면 언약하겠다. 그리고 모든 이스라엘 사람들도 다 그렇게 모욕을 주겠다!\"

그 소식을 길르앗 야베스의 사자가 사울이 사는 기브아에 전달했습니다. 그러자 모든 백성들이 소리 높여 울기 시작했습니다. 바로 그 순간 사울이 소를 몰고 오다가 백성들이 우는 것을 보고 자초지종을 묻다가 나하스의 얘기를 듣게 되었습니다.

그 순간 사울에게 성령이 충만하여 거룩한 분노가 일어났습니다. 그리고 한 겨리(두마리)의 소를 취하여 각을 떠서 이스라엘 전역에 사자를 보내며 말했습니다. \"나와 사무엘을 따르라. 그렇지 않으면 너희 소들도 이렇게 될 것이다.\"

그러자 온 백성은 두려운 마음으로 하나같이 모였습니다. 사울은 그 백성들을 이끌고 다음날 새벽 암몬을 철저하게 무너뜨렸습니다. 그 다음에 어떤 일이 일어났는가 보십시오. 백성들이 일어나서 사울을 비웃었던 비류들을 향해 소리쳤습니다. \"그 비류들을 끌어내라! 죽여버리자!\"

그때 그들의 들끓는 분노를 누가 막아 주었습니까. 사울이 막아 주었습니다. 그리고 비로소 사울의 왕권이 확고하게 확립되었습니다. 얼마나 자연스러운 방법인가. 만약 사울이 스스로 왕권을 공고히 하기 위해서 무리수를 썼다면 부작용이 많이 생겼을 것입니다. 그러나 잠잠하게 참아 기다리니 하나님께서 역사하심으로 공동체가 감동 가운데 하나가 된 것입니다.

여러분! 반대하는 사람과 직접 싸움을 하지 마십시오. 오늘날 많은 교회들이 갈등 상황을 슬기롭게 극복하지 못함으로 인해서 아픔을 겪고 있습니다. 반대하는 사람과 한 공동체의 일원이라면 직접 싸우려 들지 마십시오. 그저 잠잠하여 참아 기다리십시오. 그러면 하나님이 역사하십니다. 그러면 모든 일이 순리대로 풀리게 됩니다. 부작용도 일어나지 않은 상태에서 더욱 확고한 지도력을 담보 받을 수 있습니다.

그 전쟁이 끝나고 사무엘이 말한다. \"길갈로 가서 나라를 새롭게 하자!\" 그러자 모든 백성이 길갈로 가서 거기서 여호와 앞에 사울로 왕을 삼았습니다. 이제서야 비로소 사울이 정식으로 백성들의 왕으로 인정받게 된 것입니다. 만약 그가 감정대로 일을 처리했다면 그에게 이런 감동적 상황은 일어나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러므로 잠잠하여 참아 기다리는 것이 얼마나 소중한 일입니까.

* 신앙생활의 36계

손자병법에는 전쟁에 이기는 36개의 계책이 있는데 그 중에서 가장 위대한 계책 중의 하나가 마지막 36계인 \"도망치는 것\"입니다. 도망치고 끝나 버리면 무슨 병법이라고 할 수 있습니까. 도망치고 끝나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도망치는 것\"도 병법 중의 하나가 될 수 있는 것입니다. 최종적으로 이기기 위해서 도망치는 것입니다.

신앙 생활에서도 36계가 있어야 합니다. 때로 퇴각할 때가 필요합니다. 퇴각하지만 달아나는 것이 아닙니다. 퇴각하면서 끝까지 싸우는 것입니다. 퇴각할 줄 아는 용감성이 무턱대고 싸움을 끌고만 있는 것보다 더 고귀한 성품입니다.

\"겂이 없다\"는 말과 \"용기가 있다\"는 말은 문법상으로는 같은 말인 것 같지만 엄청난 차이가 있는 말이다. \"겂이 없다\"는 말은 적을 모르는 상태에서 나가는 것이고 \"용기가 있다\"는 말은 적을 아는 상태에서 나가는 것입니다.

겁이 없이 나가도 일시적인 성과는 있는 것처럼 보입니다. 예를 들어 고스톱을 쳐도 초보자가 겁이 없이 치기 때문에 처음에는 따는 경우가 많습니다. 고스톱 판에 초보자가 끼면 치는 사람들 사이에 비상이 걸립니다. \"고\"를 할 때와 \"스톱\"을 할 때를 모르고 좌충우돌하며 도저히 감을 잡을 수 없게 치기 때문입니다. 그런 모습에 당황해서 잘 치는 사람도 처음에는 잃는 경우가 생깁니다. 그런데 그런 상황이 오래 갑니까. 얼마 지나지 않아 곧 역전이 됩니다.

영적인 원리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모르면서 법칙도 없이 밀고 나가니까 처음에는 당황하여 마귀도 잠시 물러섭니다. 겁 없이 믿음의 지팡이를 가지고 무작정 쳐대니 피할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그런데 마귀가 보니까 곧 그 사람의 믿음이 기초가 하나도 없다는 사실을 발견하게 됩니다. 말씀은 모르고 그저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만 가지고 마구 지팡이를 휘두르는 것임을 알고, 작전을 세우고 즉시 반격을 가하기 시작합니다. 그러면 어느새 마귀의 전략에 넘어지고 심하면 마귀의 도구가 되기까지 합니다.

* 퇴각할 줄도 알아야 합니다

그러므로 말씀에 굳건히 서서 \"고\"를 할 때와 \"스톱\"을 할 때를 분별할 줄 알어야 합니다. 못 먹어도 고! 이것은 용기가 아닙니다. 때로 퇴각할 줄도 알아야 합니다. 퇴각하는 그 순간은 비참하지만 그것이야말로 진정한 용기입니다.

창세기 13장의 아브라함과 롯을 보십시오. 그 두 목자들이 다투니까 삼촌 아브라함이 조카 롯에게 한 발 물러섭니다. \"다투지 말고 서로 헤어지자. 네가 먼저 선택하라. 네가 좌하면 나는 우하고 네가 우하면 나는 좌하겠다.\" 대인의 풍도 여기에서 엿볼 수 있습니다.

그러나 롯은 주책스럽게 보기에 좋은 곳을 덥석 선택했습니다. 그리고 소돔과 고모라를 향해 떠났습니다. 롯은 한발 전진한 것 같았고 아브라함은 한 발 후퇴한 것 같았습니다. 그러나 롯이 떠나자마자 하나님이 바로 아브라함에게 나타나 엄청난 축복을 약속하셨습니다. \"눈을 들어 동서남북 바라보라! 네 자손에게 다 주고 영원히 이르리라! 네 자손을 티끌처럼 많게 하겠다.\"

내가 한 발 후퇴하지만 하나님은 열 발 전진시키십니다. 그러므로 양보해 보십시오. \"아주 못됐어. 조카가 너무 버릇없어!\"라고 말하지 말고 눈에 보이는 것을 다 주어 보십시오. 그렇게 하면 하나님께서 땅과 자손의 축복을 주십니다.

눈에 보이는 것을 그리스도의 사랑으로 포기하면, 눈에 보이지 않는 하나님의 축복이 몇천 배로 다가옵니다. 퇴각해도 하나님의 역사는 진행됩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역사는 변함없이 놀라운 모습으로 진행될 것입니다. 가만히 서 있어도 이기는 경우가 많습니다. 다만 우리가 그리스도인으로서 서 있어야 할 자리에 그대로 서 있다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