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독론(3)

기독론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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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의 십자가 죽음, 부활에서 나타난 인간의 실재성
예수의 고난, 죽음 그리고 부활은 인간의 자아가 본질적으로 “상대”로 인해 의로워지고 또한 의로워져야 한다는 사실을 보여준다. 인간의 자아는 스스로 자신을 정당하게 여기거나 의롭다고 생각할 수 있는 존재가 아니라 오로지 “상대”, 특히 절대적인 “상대”이신 하나님으로 인해 의로워질 수 있으며 그렇게 되어야 한다는 사실을 말하고 있다.

□1 신약성경에서 바울은 구원의 근거를 말하면서 그 근거는 예수 그리스도가 단순히 이 땅 위에 오신 것에 초점을 두고 있는 것이 아니라 고난과 죽음, 부활의 사건에 두고 있다. 예수의 죽음이 지금의 나에게 어떤 말이 되는가에 관심을 가진다. 역사적 예수(historischer Jesus)의 죽음이 선포되는 그리스도(kerygmatischer Christus)로 어떻게 나에게 나타나는가에 초점이 맞추어져 있다. 분명한 것은 전자의 사건은 분명한 역사성을 가지고 있다는 것이다. 다시 말해 역시적 예수의 죽음과 부활은 지금의 나의 실존적 존재 의미를 위해, 혹은 그 의미에 따라 해석되기 때문에 중요한 것이 아니라 하나의 객관적인 사실로서 보편적으로 인정되는, 되어야 하는 사건이라는 점이다. 동시에 이 역사적 사건은 단회적인 사건으로서 하나의 “지나간 사실(Fact)”로 인정되어 나와 무관할 수 있는 객관적인 사실이 아니라 반복적으로 끊임없이 나에게 말을 거는 선포의 근거로서 주관적인 사건도 된다는 사실이다. 선포의 핵심은 역사적 예수의 죽음과 부활이 지금의 나에게 “살아있는 하나님의 말씀”으로 나타내는데 그 의의가 있다.
□2 예수의 죽음과 부활은 서로 뗄 수 없는 관계에 놓여있다. 루터 신학은 십자가에 관한 말씀을 강조하는 선포를 가지면서 부활이 다소 밀려나는 면이 없지 않다. 십자가를 지나치게 강조하여 부활이 거기에 따르는 하나의 동의반복이 된다면 개혁주의적인 입장이 아닐 것이다. 특히 불트만에게는 이 부활 사건은 십자가의 의미를 표현하는 것 외에 다른 어떤 것이 아닌 것으로 나타난다. 말하자면 부활은 그 자체 의미를 가지는 어떤 사건이 아니라 십자가가 의미하는 것, 즉 죽음이 얼마나 무력하다는 것을 뜻하는 표현일 뿐이다. 부활이란 불트만에 의하면 오로지 십자가의 연관성 속에서만 이해될 수 있다. 십자가에서 이해한다는 것은 부활이 “십자가의 의미의 표현(Ausdruck der Bedeutsamkeit des Kreuzes)”에 불과하다. 즉 예수의 십자가 죽음은 인간의 죽음일 뿐 아니라 세상의 심판에 있어서 새로운 자기이해로 풀어주는 하나님의 거룩한 계시이다. 부활절 사건은 죽은 예수의 사건이 아니라 하나님의 행위로서 십자가의 말이 효과 있게 되도록 인간이 하나님의 심판 아래 자신을 세우고 그 하나님에게서 자신을 이해하는 자기 이해의 가능성을 파악하는 결단의 질문을 세우는 사건일 뿐이다. 부활절이란 그에 따르면 죽은 예수의 부활의 사건도 아니고 죽은 자의 부활도 아니라 다만 그것을 믿는 부활 신앙만이 역사적 사건이다. 말하자면 부활은 실제로 일어난 사건이라기 보다는 그것을 신앙하려는 신앙에서 주어진 것이고 이것은 십자가의 사건 속에서 이해되어야 하는데 하나님의 심판을 의식하면서 인간이 자신을 결단하고 자신을 이해하기 위해 필요한 수단이 되는 셈이다. 이에 반대하여 퀸네트(W. Künneth)는 부활을 십자가보다 더 강조하는 입장을 내 세운다. 그는 “십자가는 예수의 부활의 전제이다. 그러나 부활은 십자가의 의미의 근거이다. … 십자가의 말은 우선 부활의 말 외에는 다른 어떤 말도 아니다. 따라서 부활은 십자가 신학의 보충이 아니라 … 오히려 십자가 신학의 모든 말들이 부활의 전조 하에 있다”고 강조한다. 퀸네트에게는 부활이 없다면 십자가는 의미있는 신학적 말이 될 수 없다. 오로지 부활을 통해 십자가의 사건이 구원 사건이 되기 때문에 십자가의 사건 보다 우위에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3 부활과 십자가는 어느 한 개를 강조하거나 혹은 어느 한 개를 간과할 수 없는 역사적 사건들이다. 만약 어느 한 개라도 역사적인 사건이 아니라면 이것을 믿는 우리의 신앙은 바울이 말 한대로 아무 것도 아닐 것이다. 이 두 개는 한 때 일어났던 역사적 사건으로서 동시에 반복적으로 일어나는 “선포의 사건”이 된다. 말씀하시는 하나님은 죽은 하나님이 아니라 살아계신 하나님이시기 때문에 예수의 죽음과 부활이라는, 역사적 사건들을 가지고 지금도 우리에게 말을 거시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 사건들은 구별되어야 하는 사건이면서 결코 분리될 수 없는 사건이다. 분리하게 되면 불트만이나 퀸네트처럼 어느 한 개를 강조하게 되고 결국 이 사건들은 하나의 죽은 시건이 되어 더 이상 지금 우리의 신앙에 근거가 되는 “살아있는 하나님의 말씀”이 될 수 없게 된다.
□4 예수의 죽음과 부활이 단회적인 역사적 사실로서 보편적으로 인정할 수 있는 객관적인 역사일 뿐 아니라 동시에 이것은 지금의 나를 위한 사건이 된다면 어떤 근거로 이것이 가능할 수 있는가? 이를 위해 우선 예수와 하나님과의 관계를 생각해 보아야 한다. 예수의 자아와 하나님 자신과의 관계를 통해 우리 인간과 하나님과의 관계를 생각해야 하며 거기에서 예수의 죽음과 부활이 나를 위한 사건이 될 수 있다는 근거를 찾아야 한다. 왜냐하면 예수의 자아는 하나님 앞에서의 인간(homo coram Deo)의 실재성의 원형(archetype)이기 때문이다. 예수가 하나님 앞에서 가지는 자아는 인간의 모습이 원래 그러했으며 또한 그러해야 한다는 사실을 보여준다. 따라서 예수가 하나님 앞에서 어떤 자아였는지를 아는 것이 그의 죽음과 부활이 지금의 나에게 주는 의미를 결정한다.
□5 예수는 하나님의 일을 위해서 언제나 자기-부정의 존재 방식을 취하였다. 하나님이 예수 자신에게서, 그리고 예수 자신을 통해, 더 나아가서 예수 자신을 가지고 하나님 자신이 행하시는 것을 그는 아셨다. 그에게서 “하나님을 안다는 것”은 단순히 인식의 관계에서 주어지는 어떤 것을 파악했다는 것을 의미하지 않는다. 그에게는 “앎”이란 곧 “행함”으로 나타나는데 하나님이 예수 자신을 통해 나타내시고자 하는 것을 안다는 것은 곧 예수 자신이 하나님의 그 뜻을 위해 무엇을 행해야 하는지를 뜻한다. 그러니까 하나님의 의지는 예수 자신에게서 언제나 실현되었다. 즉 예수의 자아는 하나님의 의지가 구체화되고 실현되는 장소였다. 이것을 하나님 편에서 생각하지 말고 예수의 편에서 이해하자면, 예수가 무엇을 행하였는가는 곧 하나님이 무엇을 원하셨는가를 알게 한다. 그래서 당시의 사람들은 예수에게서 하나님의 일들을 직접 보았고 그를 통해 하나님의 살아계심을 체험하였다. 하나님은 예수에게는 단순히 주어였으며 동시에 술어였다. 하나님은 예수의 자아에게서 곧 “자신”이었고 예수의 자아는 곧 하나님 자신이었다. 예수의 자아야 말로 하나님 자신이 아무런 장애를 받지 않고 자유롭게 향하실 수 있는 장소였던 것이다. 하나님은 예수의 자아에서 하나님이 인간을 위한 사랑이심을 유감없이 나타내 보이셨다. 하나님은 예수에게서 언제나 순수한 자신이었으며 예수의 자아는 하나님이 언제나 순수한 자신으로 임하실 수 있는 장소였다. 우리는 이런 예수의 자아를 “하나님의 너(das Du Gottes)”라고 칭할 수 있겠다. 예수의 이런 자아는 마치 불순종하기 이전의 아담이 가졌던 것과 유사하다. 유사하다고 해서 예수의 자아가 아담의 그것을 닮았다고 해서는 안될 것이다. 오히려 아담의 자아가 예수의 그것과 닮았다고 해야 한다. 왜냐하면 예수는 사람의 원형, 즉 “참 인간”이기 때문이다. 이런 점에서 아담은 하나님과 예수의 관계와 유사하게 닮은 하나의 모형적 관계로 창조되었던 것이다. 즉 하나님과 예수가 서로 관계할 수 있는 방식과 유사하게 아담이 하나님과 관계할 수 있도록 창조되었던 것이다. 그래서 하나님과 인간의 관계의 실재성을 이해하기 위해서 우리는 하나님과 아담과의 관계에서 출발해야 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하나님과 예수의 관계에서 출발해야 한다. 예수가 하나님 앞에서 언제나 자기-부정의 관계 방식을 가지신 것은 인간이 하나님 앞에서 본래의 관계가 이러하기 때문이다(Indikativ der Beziehung). 관계가 이러하다는 것은 우리에게는 “우리가 이러해야 한다(Imperativ der Beziehung)”는 것을 뜻한다. 그러니까 예수와 하나님의 관계는 Indikativ이며 우리와 하나님의 관계는 Imperativ이다.
□6 보통 예수는 하나님 앞에서 십자가의 죽음을 당했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여기서 “당했다”는 표현은 상당히 인간적인 표현으로 보인다. 이 표현은 마치 원치 않았던 일이 원하지 않은 자신에게 주어졌을 때 ‘빼앗긴 자신’을 두고 표현하는 인간적인 정서를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십자가의 죽음을 예수는 원하지 않았으며 그것을 또한 예수가 억지로 겪은 일이 결코 아니었다는 점에서 “당했다”는 표현은 적절한 표현이 아니다. 오히려 그는 십자가의 죽음을 원하였다는 점에서 ‘예수는 하나님 앞에서 십자가의 죽음을 맞이했다’고 해야 한다. 죽음 앞에 예수는 수동적인 존재가 아니라 오히려 능동적인 존재였다. 따라서 그는 죽음을 당한 것이 아니라 오히려 죽음을 적극적으로 맞이했다. 더 정확한 표현으로는 그는 죽임을 당하였지, 죽음을 당한 것은 아니었다. 비록 십자가의 죽음 앞에서 갈등하는 모습이 있었지만 그는 그 죽음을 피하거나 거부하지 않았다. 오히려 맞이하였으며 자신의 내면으로 깊이 받아들였다. 그래서 그가 왜 죽음을 거부하지 않았는가의 의문은 곧 구원사적인 기독론의 과제로 넘어간다.
□7 예수가 죽음을 맞이한 것은 하나님이 그것을 원하셨다는 것을 알았기 때문이다. 하나님은 그가 인간들에 의해 죽임을 당하기를 원하셨다는 것을 그는 이미 알았다. 십자가의 죽음은 하나님의 뜻이었으며 의지였다. 그 의지의 실현은 곧 예수의 자아에서 이루어져야 하는 것이었다. 하나님은 그가 인간들에 의해 죽기를 원하셨고 그는 그것을 실현하기를 원하였다. 따라서 십자가의 죽음은 하나님의 의지가 예수의 자아에서 실현된 사건이다. 이렇게 본다면 하나님이 예수를 죽이셨고 예수는 그 죽임을 당하였다고 할 수 있다. 죽이는 자는 예수에게는 인간들이 아니라 하나님이셨다. 예수는 하나님 앞에서, 하나님에 의해 죽었다. 하나님은 예수 앞에서 ‘생명을 취하시는 분’이 되셨다. 만약 예수를 죽일 수 없는 하나님이라면 ‘생명을 주시는 분’만 되시지 ‘생명을 다시 가져가시는 분’은 되지 않으실 것이다. 하나님은 예수의 죽음을 가지고 ‘생명의 주인’이심을 계시하셨다. 생명은 인간에게 주어진, 인간에 의해 혹은 인간들이 처분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 오로지 하나님에게 있다는 것을 예수는 나타내었다.
□8 예수의 자아는 죽이는 하나님 자신에 대해 결코 강요나 억지로 처분되는 존재가 아니었다. 오히려 자발적으로 혹은 적극적으로 처분되는 존재였다. 하나님의 뜻이 예수 자신에게서 이루어지기를 기뻐한 것이다(참고. 주기도). 이렇게 본다면 하나님이 예수 자신이 죽기를 원하신 것을 예수는 기뻐하였다는 의미가 된다. 십자가의 죽음은 하나님과 예수가 기뻐한 사건이었다. 왜냐하면 예수의 자아는 하나님의 순수한 뜻을 자발적이고 능동적으로 실현할 수 있는 존재였기 때문이다. 달리 말하면 그의 자아는 하나님 자신이 세계적으로 활동하는 영혼이었기 때문이다. 이렇게 본다면, 하나님 자신과 예수의 자신은 공통적으로 예수의 몸을 죽이기를 기뻐하였던 것이다. 예수의 몸은 하나님 자신과 예수 자신에 의해 죽임을 당하였던 것이다. 더 정확하게 표현하자면, 그의 몸은 하나님 자신과 예수 자신에 의해 인간들로부터 죽임을 당하였던 것이다. 십자가의 죽음을 하나님과 예수의 관계에서만 보자면 하나님이 죽이는 자이고 예수는 죽는 자이다. 그러나 그것을 하나님과 인간 사이에 놓인 예수(Jesus zwischen Gott und Mensch)의 관점에서 보자면 하나님 자신과 예수 자신은 자신의 몸을 죽이는 자들이 된다. 하나님과 예수는 공통적으로 예수의 몸을 죽이는데 같이 했으며 빌라도는 무지한 채 그 뜻을 성취하였다. 빌라도와 예수 자신의 공통점은 이것이다. 그들은 동일하게 예수의 몸을 죽이기로 동의한 점에 있다. 그러나 차이가 있다면 전자는 하나님의 뜻에 무지한 자로서 남의 몸을 죽였으며 후자는 하나님의 뜻을 자신에게서 실현시킨 자로서 자신의 몸을 죽였던 것이다. 만약 이 죽임을 법률적인 용어로 표현하라 한다면 전자는 살인한 자이지만 후자는 자살한 자가 될 것이다. 예수를 성자 하나님으로 고백하는 교의학의 관점에서 보자면 십자가의 죽음은 인간이 하나님을 죽인 사건이면서 동시에 하나님이 자신을 죽인 사건이다. 이런 점에서 몰트만(J. Moltmann)이 십자가의 죽음을 “하나님이 하나님 자신을 죽이는 사건”으로 이해한 것은 일리가 있다.
□9 예수의 자아는 하나님 자신을 가지고 그 몸을 죽였다. 하나님 자신은 예수의 자아를 가지고 사람의 몸을 죽였다. 예수의 자아는 자신의 몸을 죽이려는 하나님 자신을 자발적으로 받아들였다. 하나님 자신은 그의 자아에 대해 죽이는 자로서 “말 거시는 자”였고 그의 자아는 죽는 자로서 “응답하는 자”였다. 예수와 하나님과의 관계는 “말”과 “응답’의 관계였다. 하나님은 예수에게는 언제나 “말하시는 자”였고 예수는 하나님에게는 언제나 “말 듣는 자”였다. 여기서 “말 듣는 자”라고 할 때 억지나 마지 못해 듣는 것을 뜻하지도 않고 또한 단순히 귀로 듣는 행위를 뜻하지도 않는다. 이것들은 “듣는 행위”이지 사실은 ‘듣는 것’을 의미하지 않는다. 사실 누구나 듣는 행위는 할 수 있다. 그러나 “듣는 것”은 반드시 “듣는 행위”를 뜻하지 않으며 또한 그 행위를 반드시 수반하지는 않는다. 듣는 행위란 사실 “상대”를 듣는 것이 아니라 “상대”의 어떤 것을 듣는 것을 의미한다. 예를 들어 아버지가 아들에게 심부름을 시켰을 때 아들이 심부름을 했다고 하자. 그러면 아들의 이 행위를 가리켜 ‘아버지의 말을 들었다’고 보통 생각한다. 그러나 엄밀히 말하자면, 그 아들은 아버지를 들은 것이 아니라 아버지의 말을 들었다. 즉 아버지 자신을 들은 것이 아니라 아버지가 말한 어떤 것을 들은 것이다. 이런 식의 들음은 항상 듣는 행위를 요구한다. 행위를 요구하기 때문에 듣는 자가 자발적으로 행할 수도 있고 억지로 행할 수도 있고 또한 하지 않을 수도 있다. 이런 행위들은 실재적으로 “듣는 것”이 아니다. “듣는 것”이란 “상대”가 말한 어떤 것을 듣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상대”를 듣는 것을 의미한다. 그러니까 “상대”는 행함의 상대가 아니라 들음의 상대인 것이다. “상대”라는 존재는 내가 어떻게 행해야 하는 존재가 아니라 오로지 들어야 하는 존재인 것이다. 예수에게서 독특한 것은 하나님을 항상 들음의 “상대”로 만났다는 것이다. 예수에게서 들음이란 곧 자신을 부정하는 것이었다. 자신을 가지고 “상대”를 듣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자신이 없이 “상대”를 듣는 것이었다. 유독 “상대” 앞에서, 유독 “상대”에게는 혹은 “상대”를 향해 예수는 자신이 없는 존재처럼 듣는 자가 되었다. 자신이 없는 자처럼, 아니, 자신이 없는 자로서 “상대”를 듣는 존재였다. 자신을 가지고, 혹은 자신으로서 “상대”를 듣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자신 없이, 혹은 자신을 부정하고 “상대”를 들었다. 이런 예수에게는 “상대”는 언제나 “말하는 자”가 될 수 있었고 “명령하는 자”가 될 수 있었고 “말을 거는 자”가 될 수 있었다. 예수에게는 하나님은 언제나 말하시고, 말 거시고, 명령하시는 “상대”였다. 예수는 하나님에 대해 언제나 “너”였고 동시에 하나님은 예수에게는 항상 “나”이셨다. 그는 하나님에 대해 언제나 “말 듣는 너”였고 하나님은 그에 대해 언제나 “말하시는 나”이셨다. 인간적으로 표현하자면, 유독 하나님은 예수에게서 말씀하시길 좋아하셨고, 말을 거시길 좋아하셨고 명령하시길 좋아하셨다. 예수의 자아는 유달리 하나님을 향해 자신이 없는 자처럼, 자신이 없는 자로서 자신이 부정되는 것이다.
□10 십자가의 죽음은 자아를 가진 자로서 예수가 유달리 하나님에 대해서는 자신이 없는 자로서, 하나님의 말씀을 들은 사건이고 그로 인해 스스로를 죽인 사건이다. 즉 말하시는 하나님과 그 말씀을 듣는 예수의 자신이 서로 연합하여 예수의 몸을 죽인 사건이다. 유달리 말 거시는 하나님에 대해 자신을 부정하고 말 듣기를 기뻐하여 자기의 몸을 죽였던 사건이다. 그의 죽음은 하나님에 대해서는, 하나님이 죽이셨다는 점에서 타살이지만 자신에 대해서는 자발적으로 자신을 죽였다는 점에서 자살인 셈이다. 즉 그는 하나님 앞에서 죽은 자로 자신을 죽였던 것이다. 더 적극적으로 말하자면, 그는 하나님 앞에서 자신을 죽였던 자로서 자신의 몸을 스스로 죽였던 것이다. 하나님은 예수를 죽였고 예수는 자신을 죽였다! 예수는 하나님에 대해 자신 없는 자로서 죽임을 당하였고 자기 몸에 대해서는 스스로 죽였다. 그는 하나님 앞에서 자신이 없는 자처럼 자신을 죽였고 자기 몸에 대해서는 자신이 죽였다. 강요나 억지가 아니라 자발적으로 기쁘게 자기 몸을 죽였다.
□11 예수의 자기-부정은 놀라운 역설이다. 그것은 하나님을 향하여는 자신이 없이 죽었고 자기 몸을 향하여는 자신이 죽인 역설이다. 그래서 예수의 십자가는 그 자체가 역설이다. 이러한 역설은 곧 자기-부정을 의미하는데 도대체 이것이 어떻게 일어날 수 있는가? 예수의 자기-부정은 오로지 하나님 앞에서 일어났다. 즉 하나님이 자기를 계시하실 때 예수의 자아는 스스로를 부정하였다. 예수가 자신을 부정하는 시간은 곧 하나님이 자신을 긍정하시는 시간이었다. 예수의 자기-부정은 곧 하나님의 자기-긍정이셨다. 예수의 ‘자신-없음’은 하나님의 ‘자신-있으심’이셨다. 하나님이 “자신” 이신 것은 예수의 자아에게서 나타난다. 하나님이 “나로 있는 자(야웨)”이신 것은 예수의 자아에게서 가장 선명하게 나타난다. 예수의 자아는 계시하시는 하나님 자신을 가로막는 존재가 아니라 오히려 온전히 드러내는 존재였다. 하나님 자신은 예수의 자아에게서 “나로 있는 자”이셨다. 그의 자아는 야웨(나로 있는 자)가 엘로힘(하나님)이신 곳이었다. 여기서 선지자의 자아와 예수의 자아와의 차이를 보게 된다. 엘리야가 바알과 아세라의 선지자 850명을 상대로 싸우면서 야웨의 이름으로 번제를 드리고 기도를 햇을 때 야웨의 불이 번제물과 나무와 돌과 흙을 태우고 도랑의 물을 핥았다. 그 때 이 광경을 보던 백성들이 말하길 “야웨 그는 하나님이시로다 야웨 그는 하나님이시로다 (왕상18:39)”고 외쳤다. 엘리야는 야웨가 엘로힘인 것을 증명하였다면 예수는 야웨가 엘로힘인 것을 증명할 필요가 없었다. 왜냐하면 그의 자아가 곧 ‘야웨가 엘로힘인 장소’였기 때문이다. 선지자가 “야웨-엘로힘”을 가리켰다면 예수는 곧 ‘야웨-엘로힘인 장소’였다. 선지자는 ‘야웨가 엘로힘인 곳을 가리키는 손가락’ 이었다면 예수는 ‘야웨가 엘로힘이었던 곳’이다. 선지자들은 여러 사건들을 통해 ‘야웨가 엘로힘인 것’을 가르치고 가리켰지만 예수는 자신에게서 ‘야웨가 엘로힘인 것’이다. 예수의 자아는 “나로 있는 자”가 “하나님”이신 곳이었다.
□12 야웨가 엘로힘이 되시는 이유를 신앙이라는 장소성의 문제와 관련하여 이해할 수 있다. 예수는 하나님을 신앙하는 사람이셨다. 그러나 하나의 사람(eine Person)이 아니라 바로 그 사람(die Person)이었다. 예수가 하나님을 신앙하는 그 사람이라고 했을 때 이것은 그가 우리와 같이 하나님을 믿거나 혹은 부정할 수 있는 존재를 의미하지 않는다. 사실 예수의 생애에서 그가 하나님을 부정했다는 기록은 찾아보기 힘들다. 오히려 자신의 혈연의 가족들보다 더 강하게 하나님을 사랑하였다. “누구든지 하나님의 뜻대로 하는 자는 내 형제요 자매요 모친이니라(막3:35)”는 그의 말은 이 사실을 강하게 비쳐준다. 그가 하나님을 단순히 신앙한 자로 이해할 수 없다. 왜냐하면 신앙을 가졌다는 것은 사실, 불신을 전제로 한 개념이기 때문이다. 믿는 자아란 믿지 않는 자아에 대해 믿기로 결단하는 자아를 의미하기 때문이다. 신앙이라는 개념이 불신앙이라는 상태에서의 전회를 의미한다면 예수의 경우는 불신앙이라는 상태를 전제할 수 없다. 오히려 그에게는 하나님과 사람과의 인격적인 관계가 무엇인지를 알게 한다. 바로 거기에서 신앙의 본질이 무엇인가를 알 수 있다. 말하자면 예수와 하나님의 관계는 신앙의 한 측면을 보여주는 관계가 아니라 신앙의 근원 혹은 신앙이 어디에서 기인하는가의 본원을 제시한다. 인간이 하나님을 믿는 신앙이 인간의 불순종에서 시작되었다면 그 불순종 이전에도 있었던 창조근원적인 관계는 인격적인 관계라고 할 수 있다. 인간의 창조가 하나님의 인격적인 관계에서 비롯되었듯이 불순종 이전의 아담과 하나님의 관계는 신앙적인 관계가 아니라 인격적인 관계(personale Beziehung)였다. 하나님은 아담에게 말을 주셨고 아담은 그 말씀을 들었다. 아담은 하나님의 “너”로서 하나님 자신을 받을 수 있는 존재였다. 그러나 불순종하고 그로 인해 하나님 자신을 잃어버리고 난 후 그리고 하나님의 은혜를 통해 아담은 비로소 잃어버린 하나님을 신앙하는 자로서 살아가야 하는 자가 되었다. 신앙은 인간의 불순종에서 하나님의 은혜로 주어진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예수의 경우는 불순종한 아담처럼 죄인으로서 하나님을 신앙하는 자가 아니다. 오히려 그에게서 발견해야 하는 것은 신앙이 어디에 뿌리를 두고 있는지 이다. 신앙은 불순종에서 기인하지만 원초적으로는 하나님의 인간을 향한 인격적인 관계에서 발원한다. 이것을 위해 보충 설명을 하자면, 불순종하기 이전이나 불순종 한 후에도 여전히 변함없었던 한 가지 사실은 하나님이 인간에게 말씀하셨고 또한 말씀하신다는 것을 눈 여겨 볼 필요가 있다. 말씀하신다는 것은 말씀하시는 자와 말을 듣는 자 사이의 인격을 전제한다. 말씀하시는 하나님은 인격으로서 말씀하시고 말을 듣는 자로서 인간은 인격이 되어 말을 듣는 것이다. 말하고 말을 듣는 관계는 엄밀히 말하면 신앙의 관계가 아니라 인격의 관계이다. 타락 후 인간이 하나님을 믿는 존재가 되었다고 해도 그 신앙의 뿌리는 하나님과의 인격적 관계에서 발원한다. 이런 점에서 예수는 하나님을 믿는 자가 아니라 하나님과 인격적 관계를 가졌던 참 인간, 즉 사람이었다. 그에게 나타나는 ‘하나님을 신앙하는 행위’는 단순히 믿는 것이 아니라 신앙의 근원인 인격적 행위였다. 그에게는 인격은 신앙의 뿌리인 것이다.
□13 예수의 십자가는 예수가 하나님을 신앙하면서 자신을 죽인 사건으로 이해할 수 없다. 이것은 신앙보다 더 근원적인 인격의 관계에서 이해해야 할 사건이다. 십자가의 사건은 하나님과 예수 사이의 인격적 관계의 사건이었다. 인격이란 터툴리안이 삼위일체의 관계를 설명할 때 사용한 것처럼 원래는 신학적인 용어이다. 그러나 철학적인 사상과 혼합되면서 그 의미가 많이 희석된 것도 사실이다. 인격의 의미를 부버(M. Buber)나 에브너(F. Ebner)가 새로운 차원으로 이해하였는데 그들의 이해에서 보면 인격이란 “상대의 실재성”에서 비롯되는 자신을 두고 말한다. 그러니까 나라는 존재는 “상대”가 결정하며 그에 의해 자신이 되는 존재를 가리킨다. 신학적 인격주의자(theologischer Personalismus)들의 인격 개념에 근거하여 십자가의 문제를 이해하기로 한다. 예수는 하나님의 인격이었고 하나님은 예수의 인격이셨다. 인격이란 본질적으로 “너 앞에서 나” 혹은 “너를 향해 나”인 것을 말한다. 이 관계에서는 언제나 “주체-주체의 관계 방식(Subjekt-Subjekt-Beziehung)” 이 일어난다. 말하는 자는 주체로서 듣는 자에게 말하고 듣는 자는 주체로서 듣는다. 말하는 자는 듣는 자에게 “어떤 것”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항상 “자신”을 말한다. 동시에 듣는 자도 말하는 자로부터 “어떤 것”을 듣는 것이 아니라 항상 “자신”을 듣는다. “자신”은 인격적인 관계에서는 항상 “주는 존재” 혹은 “받는 존재”가 된다. 더 나아가서 말하는 자는 자신을 주면서 상대를 듣고 듣는 자도 자신을 주면서 상대를 듣는다. 주면서 받고 동시에 받으면서 주는 관계가 성립된다. 이것을 ‘자신이 상호 교체되는 관계’로 이해할 수 있다. 예수가 “나와 아버지는 하나이니라(요10:30)”와 “내가 아버지 안에 있음을 깨달아 알리라(요10:38)”, “나는 아버지 안에 있고 아버지는 내 안에 계신 것을 네가 믿지 아니하느냐(요14:10)”의 말들은 이것을 강하게 뒷받침해 준다. 예수의 자아는 하나님 자신이 인격으로 거하는 장소였고 하나님 자신은 예수의 자신을 받는 인격이셨다. 주시는 인격으로서 하나님은 예수 자신을 받으셨고 받는 인격으로서 예수 자신은 하나님 자신에게 주었다. 이 관계는 얼핏 신앙의 관계로 보이지만 신앙의 관계로는 다 설명이 될 수 없는 인격적인 관계이다. 이 점에서 신앙을 통해서만 설명해야 하는 제한된 우리로서는 신앙을 통해 다 설명할 수 없는 많은 점들로 인해 예수의 자아를 우리와 같이 단순히 피조된 자아로 결코 단정할 수 없다. 우리는 신앙을 가지고 하나님과 인격적인 관계를 가지지만 예수는 인격으로서 하나님을 신앙한다는 점에서 결정적으로 우리와 차이를 가진다.
□14 십자가와 부활에 대해 예수가 가졌던 모습을 통해 인간이 어떠한 존재인가를 알게 된다.
빌2:5-11절 주석: 강의 중 설명

□15 예수의 십자가와 부활은 하나님의 말씀이다. 위의 이해에서 인간의 자아는 예수의 하나님에 대한 관계에서 보았듯이 전적으로 “받는 존재” 혹은 “듣는 존재”이다. 인간의 자아는 하나님을 “받는 존재”이며 하나님을 “듣는 존재”이다. 예수에게는 이것이 순수하게 나타나지만 우리에게는 자연스럽지 않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자신”은 우리의 신앙이라는 장소에서 “주는 존재”인 것을 알 수 있지만 우리는 그렇다고 신앙을 자연적으로 가지는 것이 아니라 결단을 통해 가지기 때문이다. 타락 전에는 하나님 자신을 받으며 우리 자신을 하나님에게 드리는 인격적인 관계가 지극히 자연스러웠으나 타락 후의 인간에게 이런 관계는 오히려 부자연스러운 상태가 되었다. 그는 신앙을 세상 속에서 얻어야 하기 때문이다. 우리는 세상 속에서 하나님을 신앙해야 하는 존재이다. 세상 속에서 하나님을 믿는 신앙을 얻어야 하기 때문에 우리의 신앙은 본질적으로 세상적인 신앙이다. 신앙의 대상은 하나님이지만 신앙은 세상적이다. 순수한 하나님을 세상적으로 신앙하는 것이 우리의 신앙이다.
□16 우리가 세상에서 하나님을 신앙하는 자이기 때문에 하나님의 말씀은 세상적인 방식으로 선포된다. 하나님의 말씀은 순수한 말씀이지만 세상에서 신앙해야 하는 우리를 위해서 세상적으로 선포된다. 순수한 말씀이 세상적으로 선포되는 것은 전적으로 순수한 하나님의 은혜로 이해할 수 있다.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요3:16)는 하나님이 세상을 얼마나 사랑하시는가를 가리킨다. 순수한 하나님이 세상을 사랑하시는 것은 그의 세속성에서 비롯된다. 세상을 사랑하시는 하나님의 사랑은 그의 세속성에서 구체화된다. 세속성이란 거룩한 존재가 본래의 자리를 떠나서 거룩하지 못한 곳으로 내려오는 형태를 말하는데 하나님은 세상을 위하여 그의 독생자를 주신 것은 그의 세속성을 잘 반영한다. 말하자면 예수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세속성인 셈이다.
□17 하나님의 세속성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죽음에서 잘 드러난다. 하나님은 예수를 세상 속에서, 세상과 함께, 세상적으로 죽이셨다. 동시에 예수는 이런 하나님을 믿으면서 수동적으로가 아니라 능동적으로 혹은 자발적으로 아버지가 원하시는 대로 세상 속에서, 세상과 함께, 세상적으로 또한 자신의 몸을 죽였다.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죽음이 이렇게 세상 안에서 일어난 것은 곧 “세상을 위하여”이다. 여기서 “세상을 위하여”라는 말은 단순히 “세상을 대신하여” 라는 의미가 전혀 없지는 않지만 보다 적극적인 의미는 “세상을 항하여”이다. 그리스도의 십자가 죽음은 하나님 앞에서 세상을 향한 죽음인 것이다. 여기서 세상이란 죄된 인간 세상의 총체를 뜻하며 구체적으로는 죄인이 가지는 자아에서 부단히 창조되는 정신적 활동의 총체를 가리킨다. 그러니까 십자가는 이런 죄인의 정신적 활동의 총체를 대신하여 하나님 앞에서 스스로 자신을 죽였다는 의미가 성립이 된다. 그러나 여기서 죄인이라고 할 때 죄인 의식을 가진 존재와 죄 된 행동을 하는 존재로 구분해서 이해해야 한다. 죄인이라고 할 때 전자를 의미하지 후자를 가리키는 것은 아니라고 할 수 있다. 왜냐하면 후자의 경우 비록 타인이 볼 때 죄된 행동을 하지만 자신은 그것을 죄 된 행동이라고 느끼지도 않을 수 있고 동시에 자신을 죄인이라고 생각하지 않는 경우도 있다. 기독교에서 가리키는 죄인이란 포괄적으로는 모두를 가리키지만 칭의과 관련하여는 특히 전자에 주목한다. 행위와 무관하게 죄된 의식을 가지는 것을 죄인이라고 간주할 수 있다. 이 죄의식은 사실 행위와 무관하게 일어날 수도 있다. 구체적으로 악한 행위를 하지 않았어도 그 죄의식은 일어날 수 있다. 기독교의 죄인이란 말하자면 행위 앞에서의 죄인, 즉 세상 앞에서의 죄인이 아니라 하나님 앞에서의 죄인(peccator coram Deo)이다. 이런 점에서 십자가의 죽음은 포괄적으로는 모든 사람, 즉 죄인을 위한 죽음이지만 구체적으로는 죄인 의식을 가지는 자들을 위한 죽음이다. 그리고 이들을 위한 죽음이라고 할 때 정확한 의미는 이들을 향한 죽음이다. 즉 십자가는 죄인 의식을 가지는 자들을 향해 스스로 자기의 몸을 죽인 예수의 하나님 앞에서의 죽음이다.
□18 그러면 죄인 의식을 가진 자들을 향해서 하나님 앞에서 자신의 몸을 스스로 죽인 예수의 행위는 어떤 의미를 가지는가? 이 죽음은 죄인 의식을 가진 자들을 향한 예수의 “자기-죽임”으로서 처음부터 죄인 의식을 가지는 자들을 향한 죽음이다. 그들을 향한 죽음은 곧 그들을 위한 죽음이 된다. 왜 그러한가를 위해 보다 깊게 이 문제를 생각해야 한다. 우선 몇 가지를 정리하고 시작하는 것이 좋겠다. ○1 십자가의 죽음은 세상 속에서, 세상과 함께, 세상적으로 일어났지만 세상에게 속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에게 속한 것이었다. ○2 십자가의 죽음과 부활은 하나님에 의해 의로워져야 한다는 진리를 가리킨다.
□19 먼저 ○1에 대해 생각해 본다. 예수의 죽음은 죄인으로서의 죽음이었다. 그러나 “인간 앞에서 죄인”이 아니라 오로지 “하나님 앞에서 죄인(peccator coram Deo)”처럼 죽었다. 자신이 인간들 앞에서 죄인이라고 의식해서 아니고 또한 인간들이 자신을 죄인이라고 명하니까 그것을 인정해서도 아니었다. 왜냐하면 예수는 자신이 말한 대로 인간들 앞에서 죄를 짓지 않았다고 밝혔듯이 본인은 인간들 앞에서 죄인이라고 의식하지 않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십자가의 죽음은 죄인에게 해당되는 형벌이었다. 본인이나 인간들에게 죄의식을 가지지 않은 예수 자신이 십자가의 죽음을 죽을 수 있는 것은 오로지 “하나님 앞에서 죄인”으로서였다. 이것은 비록 자신은 죄의식이나 양심의 가책을 가지지 않지만 하나님이 자신을 죄인으로 칭하니까 그 하나님을 믿기 때문에 스스로를 죄인으로 의식하는 것이다. 만약 하나님이 자신을 죄인으로 칭하지 않았다면 예수는 십자가를 질 수 없다. 엄밀히 말하면 예수는 죄인이 가지는 죄의식을 가지고 십자가의 죽음을 진 것이 아니라 의롭다 하시는 하나님을 믿기 때문에 그 죽음을 질 수 있었다. 그러니까 죄 없는 자신을 당당하게 나타내고 싶은 자신보다 의롭다 하시는 하나님을 믿는 것이 더 강한 셈이다. 의롭다 하시는 이는 자신 스스로가 아니라 오로지 하나님이었다. 의롭다 하시는 이를 하나님으로 믿는 자아가 자신을 행해 스스로 죄 없다고 당당하게 밝히고 싶은 자의식을 이긴 것이다. 예수에게는 자신이 스스로 의로움을 결정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결정하시는 분이었다. 비록 그가 자신에 대해, 그리고 세상에 대해 죄가 없었고 또한 죄의식도 없었지만 의롭다고 칭하시는 이는 예수 자신이나 인간들 혹은 세상이 아니라 오로지 하나님이셨다. 예수의 자아에게서 두드러지게 강하게 나타나는 것은 하나님으로 인해 의로워지려는 의식이었다. 비록 하나님 앞에서나 자기 자신과 다른 인간들에 대해서 죄의식이 없었지만 다만 하나님이 자신을 십자가의 죽음에 두기를 원하셨다는 사실을 알았고 자신을 거기로 두시는 그 하나님을 믿었기 때문에 예수는 십자가의 죽음을 당하였다. 예수는 자신이 하나님 앞에서 얼마나 죄 없는 존재인가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자신을 의롭다고 인정하시는 것이 중요하였다. 비록 하나님과 자신과 세상을 향하여 죄를 느낄만한 것이 없었지만 예수 자신이 “상대”를 향해 얼마나 결백하고 의로우냐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상대”, 즉 하나님이 자신을 의롭게 여기시느냐가 중요하였다. 내가 “상대”에 대해 의로운 존재인가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상대”가 나를 의로운 존재로 여기는가가 중요한 것이었다. 즉 의롭다고 여기는 존재는 내가 아니라 “상대”인 것이다. 예수에게는 하나님은 의롭다고 여기시는 유일한 “상대”이셨다. 하나님이 자신을 죄인으로서 죽기를 원하시는 것을 알았고 그는 그것을 순종으로 받아들였다. 그래서 십자가의 죽음은 예수에게는 의롭다 하시는 하나님이 죄인으로서 죽기를 원하시는 뜻을 알았기 때문에 죄인처럼, 죄인이 되어서 그리고 죄인으로서 자신의 몸을 무지한 자들에게 내어 주었다.
□20 비록 하나님과 자신 그리고 세상을 향하여 죄의식을 느끼지 않았지만 “상대”이신 하나님이 죄인으로서 죽기를 원하셨다는 사실 때문에 십자가에서 스스로 죽기를 결정한 예수에게는 의롭다 하시는 분이 오로지 하나님 뿐이시다는 것을 믿은 자만이 할 수 있는 자기-버림이다. 하나님과 자신 그리고 세상을 향한 자신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오히려 “상대”인 하나님이 자신을 어떻게 여기시는가가 중요하였다. 하나님이 죄인으로서 예수가 죽기를 원하셨다는 그 이유 하나 때문에 십자가의 죽음을 받아들이기로 결정한 것은 첫째로,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예수 자신의 자기-버림이다. 두 번째로, 또한 의롭다고 스스로 여기기를 거부하였기 때문에 자기 자신과의 관계에서도 자기-버림이다. 마지막으로, 세상과의 관계에서도 자기-버림이다. 세상을 향하여 죽을 죄를 지은 일이 없는 자신을 당당하게 알리고 싶은 그 자신을 버렸기 때문이다. 결국 예수의 십자가의 죽음은 전적으로 자기-버림의 사건이다. 그에게서 의롭다고 해야 하는 것은 나의 몫이 아니라 전적으로 “상대”의 몫인 것이다.
□21 자기를 버린다는 것은 무엇을 뜻하는가?
강의 중 설명

□22 예수의 자아에서 인간 자아의 실재성을 발견할 수 있다. 그것은 인간의 자아가 ‘어떤 그 무엇’을 가진 실체나 혹은 ‘스스로 무엇을 가진 어떤 존재자’가 아니라는 것이다. 능력이나 재능이나 성질이나 속성을 나타내는 존재가 아니고 또한 그것들을 발휘하는 존재도 아닌 것이다. 또한 이것 때문에 인간의 고유한 특성을 가지는 것도 아니고 이것으로 인해 동물보다 우월하다고 할 수 없다. 달리 말해 인간의 자아는 스스로 존재하거나 스스로 자신을 세울 수 있는 어떤 능력을 가리키지 않는다. 오히려 그것은 ‘상대와 마주하고 있는 나’와 ‘나와 마주하고 있는 상대’를 구분짓는 하나의 카테고리인 것이다. 나의 정신과 “상대” 사이에 존재하면서 이 둘을 구분지으면서 동시에 관계시키는 하나의 “사이적 존재(das Zwischen)”인 셈이다. 이것으로 인해 나와 상대가 나누어지며 또한 이것으로 인해 나와 상대가 관계하는 것이다. 이것이 없다면 나와 상대는 구분되지 않으며 또한 서로 인격적으로 관계할 수 없게 된다. 이것으로 인해 인간은 인격적 존재가 될 수 있으며 또한 그 반대가 될 수도 있다. 외계와 내계를 가로지르면서 스스로는 아무 능력이나 소질을 발휘하지 않고 다만 외계를 내계로 받아들이면서 동시에 내계에서 일어나는 역사를 외계에로 전달되는 하나의 “길”과 같은 것이다. 즉 인간의 자아는 “상대”가 나의 내면으로 직접 들어올 수 있고 동시에 내가 “상대”에게로 들어갈 수 있는 유일한 “길”인 것이다. 달리 말해 “상대”가 나의 내면으로 들어올 때 나에게서 일어나는 존재이며 반대로 나의 내면이 “상대”의 내면으로 들어가려고 할 때 일어나는 존재인 셈이다. “상대”를 의식하면서 스스로를 의식하는 존재이다.
□23 예수의 십자가 죽음과 부활이 지금의 나에게 어떤 의미를 가지는가? 단회적으로 역사 가운데 일어났던 사건이 지금의 나에게 어떤 의미를 주는가? 이 문제는 예수의 십자가 죽음과 부활을 하나의 객관적인 사건으로 가지는 것이 아니라 나를 위한 사건으로 받아드리게 하는 문제이다. 가장 중요한 점은 과거에 일어난 그 사건이 지금 여기서 “그 사건(das Geschehen)”으로 나에게 다시 어떻게 일어날 수 있는가 하는 것이다. 그래서 이 문제는 시간의 문제에 직결된 문제이다.
□24 하이데거(M. Heidegger), 그리제바흐(E. Griesebach) 그리고 불트만(R. Bultmann)과 하임(K. Heim), 프릭크(Heinrich Frick)와 같은 자들에 의해 시간은 신학을 위해 대단히 중요한 문제로 대두되었다. 예수 십자가의 죽음과 부활을 시간의 문제로 이해할 때 장애가 되는 시간관들을 우선 지적해야 한다. 첫째로, 형식론적인 시간관이 그것이다. 칸트에 의해 잘 설명되듯이 이 시간 개념은 공간 개념과 함께 세계를 이루는 하나의 선험적인 형식으로 이해되었다. 이 형식 속에서 인간의 생은 흘러가는 것이었다. 여기서는 시간은 ‘스스로 존재하면서 내용이 없는 형식’ 즉 다양한 세계의 내용들에 의해 채워져야 하는 하나의 주어진 형식으로 이해되었다. 인간은 시간이라는 공허한 형식 안으로 들어와서 자신의 현존을 구체적인 생으로 만드는 것이다. 현존으로서 인간은 내용에 해당되고 시간은 그것을 위한 형식에 해당된다. 시간은 처음부터 “확장된 길이(festgelegte Strecke)”이며 여기에서 인간이 나로서 과거, 현재 그리고 미래라는 다양한 상황들을 만들어 내는 것이다. 시간은 세계사가 진행되는, 처음도 없고 끝도 없는 무한한 연장선이 되고 인간이라는 현존은 시간이라는 침묵의 형식 안에서 부단히 움직이는 존재가 된다. 이런 정적이고 형식적인 시간의 개념에서는 십자가와 부활 사건이 지금의 나를 위한 사건이 되기에는 많은 한계를 가진다. 시간이 내용 없는 하나의 형식이라면 이런 공허한 카테고리 속에서 예수의 십자가 죽음과 부활과 지금의 나 사이를 인격적으로 관계짓는 것은 의미 없는 일일 것이다. 과거는 하나의 ‘이미 일어나서 완성된 사실’이 되기 때문에 더 이상 지금의 나에게 “의미”로 와 닿을 수 없게 된다. 장애가 되는 두 번째 시간관은 형이상학적인 시간관이다. 여기서는 시간을 형식적인 것이 아니라 내용을 결정하는 어떤 것으로 이해한다. 시간과 시간성은 같은 의미로 이해되기도 하는데 시간성은 내용의 덧없음, 그리고 생성과 소멸이라는 영속적인 변화의 형식 아래에 놓인 현존의 체험을 가리킨다. 시간은 형식과 내용에 따라 하나님의 영원성에 대립되는 것으로 이해된다. 시간성은 역사 이편에 해당되는 것이고 무가치하며 역사 저편에 속한 신적인 것에 대립하는 존재가 된다. 그 특성은 무시간적(zeitlosig)이거나 초시간적인(überzeitlich) 성격을 지니게 된다. 여기서는 시간과 영원은 서로 대립하게 되며 그들의 특성은 “정적인 존재”, 즉 조용히 침묵하는 상태가 된다. 플라톤이나 신비주의적인 시간관이 바로 여기에 해당된다고 보겠다. 이런 시간관에서도 영원한 하나님과 시간적인 존재인 인간을 인격적으로 관계시키는 것은 어려워진다. 십자가의 사건은 객관적인 하나의 신적인 혹은 초시간적인 구원사건이 되던지 아니면 무시간적인 사건이 된다. 하나님의 사역은 역사 이편에 있는 인간에게는 언제나 초시간적이든지 아니면 무시간적인 영원의 사건으로 나타나게 되어 결국 시간 속에서, 시간적인 존재로 살아가는 인간에게 인격적으로 관계할 수 없게 된다. 십자가의 사건이 초시간적이거나 무시간적인 사건이 될 때 역사 속에 사는 인간의 실존과 접촉할 수 없어서 나의 결단과 나의 책임을 불러내는 사건이 될 수 없게 된다. 위에서 진술된 시간관들은 당시의 십자가의 죽음이 지금의 나를 위한 사건이었다는 것을 말하기에는 불가능한 시간관으로 보인다. 십자가의 죽음과 부활의 사건이 당시의 사람들뿐 이니라 시대와 시간을 넘어서서 모든 인간들에게 해당되는 보편적인 사건이 되려면 시간에 대한 기독론적인 이해가 필요할 것이다. 이런 이해를 킨네트는 부활의 보편성에서 이해하는 시간, 즉 부활을 시간의 중심에 세우면서 이해하는 관점이라고 규정한다.
□25 하나님이 그리스도를 보내셨고 그를 죽였다면, 그리고 그리스도는 세상의 죄를 위해 하나님 앞에서 자신의 몸을 죽였다면 이 사건은 하나님과 인간 사이에서 일어난, 그리고 일어나야 하는 사건임에 틀임 없다. 이것은 우연히 일어난 사건이 아니라 일어나야 하는 사건으로서 역사의 한 부분에 해당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역사가 이것 때문에 역사다워질 수 있는 것이다. 우리가 이 사건을 구원의 사건으로 받아들인다면 이 사건은 단순히 역사의 한 부분에 해당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역사가 이 사건을 중심으로 이해되고 해석이 되어야 할 것이다. 구원은 많은 역사적 사건 가운데 어느 한 개로서 일어나야 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많은 역사적 사건들이 이 사건을 중심으로 이해되고 해석되어야 하는 생의 중심이기 때문이다. 이런 관점에서 십자가의 사건을 본다면 예수의 십자가와 부활의 사건은 처음부터 시간이 신학적인 이해에 달려있다는 것을 말해준다.
□26 성경적인 사상에서 유추해 보면 시간은 창조와 타락 사이에서 일어나는 존재인 것을 보게 된다. 그러나 일어난다고 해서 인간과 무관하게 단순히 어떤 것으로서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 처음부터 인간의 실존과 함께 일어난다. 시간은 인간의 실존과 무관하게 존재하는 세계의 형식이 아니라 창조와 타락을 통해 인간의 생을 지배하는 존재이기 때문에 실존을 일으키는 존재이다. 인간은 시간 속에서 실존이며 또한 실존할 수 있는 존재이다. 시간과 실존은 두 개의 별다른 존재들이 아니라 서로 밀접한 관계에 놓여있다. 전자 없이 후자를 생각할 수 없고 후자 없이 전자를 말할 수 없다. 동물은 실존이 될 수 없기 때문에 비록 시간에 의해 살고 있으나 시간을 가지지 못한다. 유독 인간만이 시간을 가지는데 그것은 인간이 자의식(Selbstbewutsein)이기 때문이다. 시간이 인간의 자의식에서 일어난다는 것은 곧 시간이라는 존재는 의식된 시간이라는 것을 의미한다. 인간의 의식이 자의식인데 그것은 곧 의식된 시간을 가진다는 것을 뜻한다. 여기서 자의식이란 “자신”을 의식하는 존재를 가리키는데 “자신”은 근원적으로 인간 스스로를 가리키는 것이 아니라 “상대”로 실재하는 하나님을 의미한다. 인간은 자아지만 “자신”은 인간이 만나야 실현되는 인격인 셈이다. 그러니까 인간은 “자기”로서 실재하는 하나님을 의식하는 존재인 자의식인 셈인데 이 자의식에서 시간이 일어나는 것이다. 자의식에서 일어나기 때문에 시간은 의식된 시간인 것이다. 인간의 의식이란 성경적으로 아담의 불순종에서 기인한다. 사람으로 창조된 아담은 불순종하면서 하나님을 의식하는 존재가 되었는데 아담의 “너”를 찾으시는 하나님에게 불순종한 아담은 수치심과 함께 자신을 부르시는 하나님을 향해 숨기는 존재가 되었다(참고. 창3:10). 아담이 하나님을 향해 불순종하고 난 후 비로서 자의식이 되었다는 것을 “말”과 관련하여 이해해 볼 수 있겠다. 아담이 하나님을 향해 최초로 말을 한 것은 불순종하고 난 후였다. 그 이전에는 그가 말을 하는 존재였지만 하나님을 향해 말을 했다는 기록은 없다. 구체적으로 하나님에게 아담 자기의 정신이 만든 문장으로 말을 한 것은 불순종 이후이다. “말”이란 말하는 자가 “상대”를 향해 자기 자신임을 내세우는 것을 의미하는데 이런 점에서 아담은 불순종하면서 하나님을 향해 자기 자신을 “말”로 내세운 것이다. 자의식이란 “나”로 실재하시는 하나님을 향해 인간이 자기 자신임을 내 세우는 존재가 되었다는 것을 뜻한다. 인간의 자의식이란 “나”로 실재하시는 하나님 앞에서 자기 자신임을 스스로 내세우는 존재인 것을 가리킨다. 이것을 다른 말로 표현하자면, 자의식이란 “나”로 실재하시는 하나님 앞에서 인간이 스스로 거리를 가지는 존재가 되었음을 의미한다. 시간이란 바로 이런 자의식에서 시작된다. 다시 말해 “나”로 실재하시는 하나님 앞에서 거리를 가지면서 스스로 자신을 내세우는 존재가 되면서 시간은 비로소 시작된다. 결국 시간은 사람의 상실에서 비롯되며 그로 인해 인간이 자의식이 되어 하나님을 의식하면서 거기에서 주어지는 의식된 시간에 의해 살아가는 존재가 되었음을 가리킨다. 인간은 의식된 시간을 가지면서 시간의 “끝”을 향해 살아가는 존재가 되었다.
□27 불순종한 인간은 자의식으로서 하나님 앞에서 살아간다. 의식된 시간을 가지면서 하나님을 만나야 하는 것이다. 의식된 시간이란 시간의 “끝”을 의식한다는 것인데 “성취된 시간” 혹은 “시간의 완성”을 의식하는 것을 의미한다. 그러니까 인간이 자의식이 되었다는 것은 시간의 완성을 의식하면서 살아가는 존재가 되었음을 의미한다. 여기서 시간의 완성이란 시간 자체가 불완전하기 때문에 완전한 시간이 도래한다는 것을 뜻하지 않는다. 시간이란 본질적으로 “어떤 것”이 아니기 때문에 불완전 혹은 완전이라는 개념으로 이해할 수 없다. 시간의 완성이란 시간이 완성되지 않았기 때문에 완성시키는 시간이 도래한다는 의미가 아니라 오히려 시간을 종결짓는다는 의미가 가깝다. 말하자면 하나님과의 만남은 시간이 종결되는 것을 의미한다.
□28 인간이 시간을 가진다는 것은 시간 속에서 하나님을 만나야 한다는 것을 가리키며 그 만남은 곧 시간의 종결을 의미한다면 그 종결되는 시간의 지점을 우리는 “의미”라는 말로 표현할 수 있을 것이다. 의미란 하나님과의 인격적인 만남에서 주어지며 그 만남은 시간의 종결이다. 인간은 타락 이후 의미를 가지고 살아야 하는 존재가 되었다. 그것은 그가 “나”로 실재하는 하나님을 의식하는 자의식이 되었기 때문이다. “나”로 실재하는 생명인 하나님을 의식하며 살아가는 존재이기 때문에 하나님을 만난다는 것은 참된 “나”의 만남이며 그 만남을 통해 비로소 생의 의미가 주어지기 때문이다. 생의 의미란 생명으로부터 주어지는 영적 혹은 인격적 관계이다. 인간이 살아가야 하는 이유가 있다면 바로 이 이유 때문일 것이다. 생명이신 하나님과의 만남은 인간에게는 곧 생의 의미로 나타나며 그 의미는 시간의 종결을 뜻한다. 생의 의미를 발견하기 전까지는 시간은 인간의 생을 파괴하는 힘일 뿐이다.
□28 의미는 주는 자인 하나님과 받는 자인 인간 사이의 인격적 관계에서 주어진다. 주는 자가 일방적으로 줄 수 있는 것도 아니며 또한 받는 자가 일방적으로 받는 데서 의미는 주어지지 않는다. 주는 자는 어떤 것을 줌으로, 받는 자 역시 어떤 것을 받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하나님과 인간의 주고 받는 관계는 사실, 어떤 것을 주고 받는 관계임을 의미하지 않는다. 오로지 자신을 주고 받는 관계이다. 하나님의 “자신”은 인간을 향해 “주는 자신”이며 인간의 자신은 하나님을 향해 “받는 자신”인 것이다. 여기서 인간의 자신이 “받는 자신”으로 묘사될 때 마치 어떤 것을 가진 자신이라는 느낌을 가지게 하는 오해를 불러일으킨다. 사실은 인간의 자신은 “자신”이라는 어떤 것을 가지고 있음을 뜻하지 않는다. 오히려 하나의 카테고리 혹은 형식으로서 내용으로 인해 채워져야 하는 존재이다. 그러니까 “자신”을 형식과 내용이라는 점에서 이해하자면 하나님은 내용에 해당되고 인간은 하나의 형식에 속한다고 해야 한다. 하나님의 자신은 채우는 존재이고 인간의 자신은 채워져야 하는 존재이다. 하나님은 유독 인간의 자신에게서 “채우는 자신”이시다. 하나님의 자신이 유독 “자신”이라는, 인간의 중심에서 일어나시길 원하시고 그렇게 되시는 것을 간과할 수 없다. 하나님의 자신이 “채우는 자신”으로 일어나는 장소를 우리는 “실존(Existenz)”이라는 개념으로 이해할 수 있다. 실존이란 “상대”를 “말 거는 주관”으로 만나면서 자신은 “부름을 받는 주관”이 되는 전재를 가리킨다. 하나님은 인간의 실존에서 “채우는 자신”이 되신다. 동시에 실존에서 이렇게 되시는 하나님을 가리켜 “인격(Person)”이라고 할 수 있다. 하나님은 인격으로서 실존에서 “채우는 자신”이 되시고 인간은 실존으로서 하나님의 인격을 만나게 된다. 실존이란 하나님이 인격으로 임하시는 존재이기 때문에 “인격적 존재”라는 용어로 이해해도 무방할 것이다.
□29 하나님이 인격으로 자신을 주시고 인간은 실존으로 하나님 자신을 받는 존재가 되는 것은 동시적이다. 이 동시성(Gleichzeitigkeit)은 항상 세계 내에서 일어난다. 시간과 함께 일어나기 때문에 그것은 곧 역사(Geschichte)이다. 인간은 하나님을 인격으로 체험한다는 것은 곧 참된 “나”의 발견이다. 잃어버린 나를 의식하려는 인간의 자의식이 참된 “나”를 발견할 때 거기서 비로소 시간의 종결이 이루어진다. 인간이 시간을 가지는 것은 바로 이 종결이 있기 때문이다. 시간의 종결은 말하자면 하나님을 인격으로 체험하는 실존에서 비로소 주어진다.
□30 시간의 종결을 다른 말로 “현재”라 부를 수 있다. 현재란 시간의 완성이며 종결이기도 하다. 하나님이 인격으로 “주시는 자신”이 되시고 인간은 실존으로 “받는 자신”이 되면서 이 관계가 동시적으로 일어날 때 현재는 실현된다. 현재는 공허한 “지금”이 아니며 과거와 미래 사이에 단순히 걸쳐있는 형이상학적인 “순간”도 아니다. 그것은 전적으로 영적이며 인격적인 관계에서 비로서 이해될 수 있다. 현재란 하나님의 자신을 인격으로 만나는 인간의 실존적인 지점이다. 현재란 덧없이 지나가는 일상적인 시간의 흐름이 결코 아니다. 또한 그것은 과거라는, 축적된 지나간 사건들과 알 수 없는 미래 사이에 걸려있는 “지금 여기서”가 아니다. 그리고 기억과 기대 사이에 놓여있는 순간적인 찰나도 아니다. 현재란 의식된 시간을 가지는 인간이 종결된 시간을 만나는 지점인데 그 이유는 영원한 하나님이 나를 위한 인격이 되심을 비로소 발견하면서 하나님의 영원에 의해 나의 시간이 삼켜버린 바 되기 때문이다. 나의 시간이 하나님의 영원에 의해 삼켜버린 바 되는 역사의 지점을 우리는 “현재(Gegenwart)”라고 말할 수 있다. 말하자면 그 어떤 형식으로 가둘 수 없는 영원이 순간 순간 분활되는 시간을 삼켜버리므로 인간이 더 이상 시간을 의식할 수 없는, 또는 의식할 필요가 없는 지점이다. 바로 이 현재가 역사의 핵이며 이것으로 인해 세상은 유지된다. 이 “현재”가 축적되면서 거대한 세계사가 형성되는 것이 아닌가?
□31 십자가의 죽음과 부활은 “현재”를 여는 열쇠가 된다. 하나님이 유독 죄인이라는 장소에서 자신을 주시기를 원하시고 그것을 구체적으로 실현시키신 하나님의 행하심이다. 예수는 자신을 버림으로 자기 몸을 죽였고 하나님은 예수를 죽임으로 자신을 버렸다. 예수는 하나님을 향해 자기를 버림으로 자기 몸을 스스로 죽였고 하나님은 예수를 향해 죽을 수 없는 자를 죽임으로 자신을 버렸다. 예수는 오로지 하나님을 믿는 믿음으로 죄 없는 자신을 버렸고 하나님은 죄 없는 예수를 죽임으로 죄 없는 자를 죽이기를 원치 않는 자신을 버렸다. 인간이 믿어야 하는 사실은 “의롭다 하시는 이는 오로지 하나님 뿐”이기 때문이다.
이런 하나님의 자기-부인에서 인간은 하나님의 인격을 체험하게 된다. 즉 하나님을 인격으로 체험하는 실존이 되는 것이다.

십자가의 죽음과 부활은 의미가 되어야 한다—의미가 되는 것은 “상대”를 실존으로 만나는 것 뿐이다==이것은 현재에서만 이루어진다==현재에서 만난다는 것은 구두로 선포되는 말에서 가능==케리그마의 문제로 이어진다
십자가와 부활은 자기-버림 속에 하나님의 자기-취함이 말의 사건으로 신앙에서 선포된다.

□32 예수의 죽음은 우선 타살이면서 동시에 자살이 된다. 죽을 죄를 짓지 않았지만 죄인처럼 세상에 의해 죽었기 때문에 타살이다. 죽음에 대한 죄의식도 없었고 그것을 인정할만한 정당한 이유도 자신에게서 찾을 수 없었다. 만약 죽을 이유가 없음에도 불구하고 죽음을 당해야 한다면 억울한 죽음이고 동시에 허무한 죽음이 된다. 타인에 의해, 타인의 의지로 인해 죽었기 때문에 타살이다.
그러나 동시에 그의 죽음은 자신에 대해서는 자살이 된다. 왜냐하면 하나님이 자신의 죽음을 원하셨다는 것을 아셨기 때문에 하나님의 뜻을 따르기로 하였고 그 뜻을 이루기 위해 순종하였다. 예수의 순종이란 정당하지 않는 죽음에 대해 당당하게 그 죽음이 정당하지 않다고 밝히고 싶은 자신의 뜻을 따르지 않았다는 점이다. 다만 하나님이 원하신다는 이유 하나 때문에 자신의 정당함을 나타내지 않고 오히려 부당함을 받아들여서 자신의 몸을 세상에게 내어주었다. 죽을 이유가 없는 자신과 그것을 정당하게 밝혀야 하는 자신을 부정하고 오히려 부당하게도 하나님이 원하신다는 이유 하나 때문에 자발적으로 그 죽음을 맞이했다는 점에서 예수의 죽음은 자살이다. 그러니까 하나님과 세상은 예수를 죽인 타살자이고 동시에 예수는 자신에 대해서는 자기 몸을 자발적으로 버렸다는 점에서 자살자이다. 하나님은 그가 세상에 의해 죽도록 이끄신 타살의 원인자이셨고 세상은 그를 직접적으로 죽인 타살자이다. 반면 예수는 하나님이 원하신다는 이유 하나 때문에 스스로 자신의 몸을 죽음에 내어주었다는 점에서 자살한 자이다. 그의 자살은 하나님이 원하신다는 이유 하나 때문에 이루어진 것이다.
□33 하나님은 세상을 향하여 예수를 죽이는 자이셨고 세상도 하나님을 향하여 예수를 죽이는 자였다. 반면 예수는 하나님을 향하여 세상 앞에서 자기 몸을 죽이는 자였고 역시 세상을 향하여 하나님 앞에서 자신을 죽이는 자였다. 예수에게서 타살과 자살은 하나로 나타난다. 죽어야 하는 이유가 없음에도 불구하고 남에 의해 죽었다는 점에서 타살이었고 또한 하나님이 원하신다는 이유 때문에 자발적으로 자신을 죽였다는 점에서 자살이었다. 하나님과 세상에 대해 억울하게 죽었다는 점에서 타살이었고 하나님이 그렇게 되길 원하신다는 이유 때문에 스스로 그렇게 내어주었다는 점에서 자살이다. 흥미롭게도 남에 의해 스스로 죽는다는 점에서 자살이면서 동시에 자신에 의해 남이 죽인다는 점에서 타살이기도 하다. 예수의 몸은 빌라도가 죽였지만 사실은 예수 자신이 죽였다. 동시에 예수 자신이 그것을 죽였지만 사실은 빌라도가 죽였다. 이런 점에서 예수의 몸은 하나님과 세상, 그리고 예수 자신에 의해 철저히 버림을 받은 하나의 희생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