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상 제33강
삼상 14장 36-52절
사울목사와 요나단부목사의 갈등(삼상강해 33)
사무엘상 14장 후반부에서 들어서면서부터는 사울과 그의 아들 요나단 사이에 신앙관이 달라 갈등하는 모습이 그려져 있습니다. 비록 아버지와 아들 사이이지만 둘 다 이스라엘의 지도자인데, 이 두 지도자에게 갈등이 생겨난 것입니다. 권력이란 것이 이처럼 무서운 것입니다. 권력이란 것은 아버지와 아들 사이도 이렇게 만듭니다.
* 지도자의 갈등
대개 지도자의 갈등은 어디에서 옵니까. 가장 근원적인 이유는 인간이 죄인이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실제적인 이유는 인간의 질투에서 비롯되는 경우가 많습니다.
조선을 개국한 태조 이성계는 다섯째 아들 이방원을 처음에는 대견하게 생각했을 것입니다. 이성계가 왕위에 오르기까지는 사실상 이방원의 역할이 대단히 컸습니다. 그러나 이방원의 세력이 커지면서 따르는 무리들이 많아지자 아들임에도 불구하고 이성계는 이방원을 질투하게 됩니다. 그래서 정도전이라는 인물을 내세워 아들을 견제합니다.
그래서 이방원은 1차 왕자의 난을 일으켰습니다. 그 난은 명목상으로는 정도전을 제거한 것이었지만 실질적으로는 아버지 이성계와의 싸움을 벌여 이긴 것이었습니다. 한 사람과 그를 따르는 무리들을 중심으로 형성되는 권력욕구란 것이 부자간에도 질투를 하게 만들 정도로 무서운 것입니다.
그러므로 권력을 지향하는 공동체의 수장에게 \"정계를 은퇴하라! 후보를 사퇴하라!\"고 말하는 것은 그런 자리에 올라본 적이 없는 보통 인간에게는 아무 것도 아닌 것 같아도 인간의 원래 속성상 이루어지기 힘든 지나친 요구입니다. 위대한 성인 도덕군자가 아니면 할 수 없는 일을 요구하는 것입니다.
그래도 멋있게 정계은퇴를 하는 사람들이 많이 있습니다. 그런데 그런 사람들은 대개 따르는 무리들이 별로 없는 사람들입니다. 구름 떼와 같은 사람들이 적극적으로 뒷받침하고 있으면 퇴장하기가 쉽지 않습니다. 본인이 정말 그렇게 하고 싶어도 따르는 무리들이 가만히 놔두지 않습니다. 따르는 무리들은 어떻든지 그 사람을 부추기고 전면에 내세워야 권력으로 다가갈 수 있는 기회가 자기에게 그만큼 많아지기 때문입니다.
자기 혼자 무엇을 하겠습니까. 그래서 따르는 무리들이 그 지도자를 충동질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 따르는 무리들이 나쁜 사람이라고 정죄하려는 것이 아닙니다. 그런 성향이 인간의 본능이라는 것입니다.
부목사가 일부 무리들과 함께 새로 개척하는 교회들이 있습니다. 그런 경우를 자세를 살펴 보십시오. 그렇게 되기 전에 이미 부목사를 따르는 무리들이 상당히 많이 있었습니다. 그런 모습을 보면 대개 담임목사의 심기가 편치 않습니다. 그러면 웬만한 담임목사는 다 질투하는 마음을 가지게 되고, 그래서 담임목사와 부목사간에 어쩔 수 없는 갈등이 생겨나 결국 그러한 불미스런 일들이 벌어지게 되는 것입니다.
이런 현상은 크고 작은 공동체에서 너무 많이 일어나는 일입니다. 지도자들과 그들을 따르는 무리들이 정말 십자가의 원리를 따를 수만 있다면, 더 나아가서 다른 사람의 승진을 나의 승진으로 여기는 자세가 있다면 이 땅이 참으로 천국이 되지 않겠습니까.
* 사울과 요나단의 갈등
사무엘상 14장에서도 자세히 들여다보면 이와 비슷한 장면이 펼쳐지고 있습니다. 14장 초반부에서 요나단이 병기든 소년과 함께 맹활약을 함으로 믹마스 전투에서 이스라엘이 극적으로 블레셋을 물리치게 되었습니다.
바로 그 순간 소극적인 태도로 방어에 급급하던 사울이 뒤늦게 나섭니다. \"모두 다 금식하자! 그리고 적들에게 복수를 할 때까지 이 명령을 어기면 저주를 받게 될 것이다(24절).\"
이 사울의 명령을 보면 다 이루어진 일에 뒤늦게 나서서 생색내려는 태도가 역력하지 않습니까. 마치 내가 이처럼 \"금식을 선포하는 신앙\"을 가지고 있으니 하나님이 도우셨다는 듯한 외식적인 행동을 펼치려다 보니까 전쟁 중에 금식을 선포해 버리는 잘못을 저질렀습니다.
그런데 요나단이 그 금식선포도 모르고 꿀을 먹게 되었습니다(27절). 그러자 한 사람이 와서 말했다. \"당신의 아버지 왕께서 금식을 선포하고 어기는 사람은 저주받는다고 했습니다.\" 그러자 요나단은 아무 생각없이 다음과 같이 말했을 것입니다. \"아버지께서 잘못하신 것 같아. 내가 이렇게 꿀을 조금 먹어도 힘이 생기고 눈이 밝아졌는데. 그러므로 이런 때는 금식을 선포하지 않아야 더 큰 승리를 얻을 수 있을텐데(29-30절).\"
이것은 신앙관의 차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어느 쪽이 더 옳은 의견이라고 딱 잘라 말할 수는 없지만 그저 신앙관의 차이겠지 라고 생각하면 큰 문제가 발생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사람 사이의 관점 차이를 인정하지 않으면 문제가 생길 수밖에 없습니다.
그 요나단의 말이 사울 왕에게 들렸다는 말은 성경에 나와있지 않습니다. 그러나 아부를 좋아하는 사람이 많은 이 땅에서 그 말이 사울 왕에게 들리지 않았겠습니까. 아마 그런 말은 순식간에 사울 왕의 귀에 들어갔을 것입니다. 아마 누군가가 이런 식으로 말했을 것입니다. \"왕이여! 당신의 아들이 이러이러한 얘기를 했는데... 이해는 되죠. 이해하는 마음으로 들어주세요. 그리고 이 말은 절대로 비밀로 해 주십시오.\"
아주 교양있게 말을 하고 있는 것이지만, 이 말을 자세히 들여다 보면 이 말은 사울과 요나단을 싸움붙이는 말입니다. 그 사람이 억지로 싸움붙이려고 한 말은 아닐 것입니다. 그러나 종국적으로는 그 말이 사울과 요나단의 사이를 벌어지게 만듭니다.
그 말이 사울에게 들렸을 때 사울의 마음이 괜찮았겠습니까. 상당히 불편한 마음이었을 것입니다. 게다가 자기가 아무리 생색을 내려고 해도, 이번 전쟁의 최대 공적은 요나단에게 있는 것을 백성들이 다 알고 지금 \"요나단! 요나단!\"이라고 하고 있는 판국에 그런 이야기까지 들리니 마음이 불편하지 않겠습니까.
아무리 부자간일지라도 권력의 세계에서 백성들이 \"사울! 사울!\"이라고 하지 않고 \"요나단! 요나단!\"이라고 하면 일반적으로 질투하는 마음이 생길 수밖에 없습니다. 그 질투가 사람을 죽이려는 본성을 자극하게 됩니다.
그래서 본문을 보면 사울이 \"블레셋 사람을 추적할까요?\"하고 하나님께 물었을 때 하나님의 응답이 없었는데, 그렇게 하나님의 응답이 없었던 것이 요나단의 죄 때문이라는 식으로 상황에 전개되어 요나단이 죄를 뒤집어 쓰고 하마터면 죽을 뻔했습니다.
그런데 백성들이 다 들고 일어나서 요나단은 죽음을 면할 수 있었습니다(45절). 비록 죽음을 면했지만 사울의 마음에는 그 질투의 불꽃이 여전히 살아있었을 것입니다. 그런 상황에서 어찌 이스라엘이 반석 위에 굳게 선 튼튼한 나라가 될 수 있겠습니까.
* 갈등 구조를 최소화하는 법
이런 안타까운 모습들이 오늘날 교회에서도 흔히 발견되고 있습니다. 그래서 얼마나 많은 교회들이 깨지고 아픔을 겪고 있습니까. 그 와중에 성도들은 천국 소망과 위로는커녕 시험만 당하고 있습니다. 이런 상황을 목격하면서 무엇이 필요하다고 생각하십니까.
두 가지가 필요합니다. 먼저 목사들이 책임감을 느끼고, 목사들은 서로 질투하는 마음을 버려야 합니다. 그리고 성도들도 책임감을 느끼고, \"우리 목사님!\"을 남발하면서 목사들의 싸움을 붙이지 말아야 합니다.
얼마 전 미국에서 목회하시는 김 아무개 목사님으로부터 전화가 왔습니다. 그분은 뉴저지에서 최근에 나 아무개 목사님과 공동목회를 시작했습니다. 나 아무개 목사님은 한인 중심, 김 아무개 목사님은 미국인 중심으로 목회 영역을 잡았습니다. 두분 모두 훌륭한 인격자이기 때문에 공동목회를 시작할 때에는 서로를 존중하며 참으로 잘 시작했습니다.
얼마 전 전화로 그 공동목회가 어떻게 되어 가는지 물어보았습니다. 그런데 실망스런 어투가 들려왔습니다. 서로 존중하며 공동목회를 하려고 하지만 성도들이 갈등을 부추겨서 어려움을 당하고 있다는 것이었습니다.
여러분! 인간사회에 갈등이 없을 수야 없지만 우리가 최선을 다해 노력만 하면 정말 아름다운 공동체를 이룰 수 있습니다. 어떻게 해야 할까요.
먼저 목사와 성도가 다같이 권력 지향적 욕구를 없애야 할 것입니다. 목사는 성도를 이용해 자신의 명예와 지위를 높이려고 하지 말아야 하고, 성도들은 목사를 권력으로 가기 위해 타는 말로 여기지 말아야 합니다.
그리고 언행을 조심해야 할 것입니다. 왜냐하면 문서로 쓰지 않고 입에서 나오는 말은 대부분 변질될 수 있기 때문입니다. 특히 신상에 관한 말은 더욱 변질되기 쉽습니다. 그리고 나서 상대방의 신앙관을 인정해야 할 것입니다. 이런 원리들을 실천하며 살면 갈등이 많은 사회에서도 아름다운 공동체를 만드는 일이 별로 어렵지 않을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