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순절 성령 신운동 체험론

오순절성령신운동체험론
성령에 대한 구속사적인 이해
들어가면서
성령에 대한 분분한 논의의 장은 아브라함 카이퍼의 견해를 대체로 따르던 한국교회에 오순절
주의의 영향으로 교의신학적인 면에서 주로 토론의 장이 마련되고 있다고 볼 수 있다. 방언현상
과 같은 체험, 특히 근자에 이르러서는 빈야드운동의 현상 등이 여러 가지 반향을 불러일으키고
있다고 보여진다. 체험을 강조하는 오순절적인 성령론이나 빈야드운동의 흐름에 대하여 논란이
많은 것은 이들이 주관적인 체험들을 보편적인 원리로 삼으려고 하는 경향과, 그 신비한 체험이
없는 자들은 신앙이 없거나 그보다 못한 것으로 여기는 경향에 대한 반작용이라고 여겨진다. 우
리의 고민은 성령의 다양한 체험들을 개별적으로 판단하기가 쉽지 아니하다는 사실이다. 그렇다
고 체험들을 전부 긍정할 수도 없고 부정을 하려고 해도 뭔가 몰라서 그렇거나, 체험에서 한수
아래이기 때문이라는 것을 염두에 두다보니 이래저래 당황을 하게 된다. 성령의 열매에 대한 성
경학교 주제를 다루는 마당에서 성령론이라는 장을 다루면서 진리 외에 것으로 씨름하지 말고 진
리 그 자체에 대한 고민을 함께 하고자 한다.

문제를 보는 시각을 바꾸어 접근하기
가.성경신학적으로 다가가 보도록 하자. 성령론을 다룰 때 교의학적인 관점에서만 주로 다루다
가 보니 어떤 문제가 발생하는가 하면 변호하며 방어적인 면이 강하다. 그 변호나 방어적인 태도
는 성경의 흐름에 따르기보다는 성경을 동원하여 자기 주장을 펴나가게 되고, 이런 방식이 성경
의 흐름에서 벗어나도록 만들기도 한다. 어떤 주장이 왜 정통교리인가 아닌가를 성경적으로 접근
을 하기보다는, 성경 속으로 들어가는 것이 아니라 성경을 도구화하여 이성적으로 납득이 가도록
설명을 하는 쪽이다. 그러다 보니 성경의 흐름 자체에 귀를 기울이기보다는 나하고(정통교리나
교회)얼마나 비슷하냐를 가지고 비교하다가 보니 나도 성경적으로 잘 모르고, 자신이 없는데 비슷
하거나 우월해 보이니 그냥 체험에 손을 들어주고 마는 것이 아닌가 생각된다. 또한 체험을 가진
자들이 열심이 특출하다든지, 이상한 체험을 했다는 자부심에서 오는 헌신, 신선한 느낌으로 활력
을 준다든가 하는 현실적 이유(기존의 이익 지키기 내지 증대를 도모하고자 함)를 중시하는 경향
이 있다. 성령께서 누구냐? 왜 오셨는가? 어떻게 역사를 하시는가?라고 하는 점을 성경의 흐름을
따라서 살펴보도록 하자는 것이다. 평면에 펼쳐 놓고 토막토막 살피는게 아니라 소위 계시의 진
정성 에 의존을 하자는 것이다. 이 때 뒤에 나타나는 계시는 먼저 나타난 계시에서 보다 발전하
는 모습(구체성)을 띠고 있다.
나.성경을 볼 때 나타난 계시의 결과만 놓고 말하지 말고 그 게시가 주어질 수 밖에 없는 원인
을 살펴보자는 것이다. 이 말을 성령론에 접근을 시켜 보자면 이런 얘기가 된다. 성경은 하나님의
계시이다. 하나님의 나타난 계시가 성경에 고스란히 담겨져 있다. 계시가 종결되었다고 믿는다.
그러면 성경에 담겨 있는 내용은 게시의 결과를 담고 있다. 성경에 성령에 대하여 말하고 있는
부분은 게시의 결과이다. 성령에 관하여 말하고있는 모든 부분을 전부 평면으로(결과로만 다룸)펼
쳐 놓고 성령은 이런 분이다라고 접근을 하다 보니까 마치 성경의 주제가 성령인 것처럼 보여 주
제를 젖혀놓은 토론에 빠지거나, 곁가지들을 붙들거나, 엉뚱한 방향으로 들어서는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성경의 중심 주제가 성령은 아니시다. 성령은 구속사역의 중심주제를 위해 등장을 하시는
분이시다. 성경의 중심 주제를 위해 왜 성령께서 등장을 하셨을까 이를 위해 무엇을 하셨을까를
우리가 찾아보고 이해하는 방향이 더 옳다고 보아진다.(물론 쉽지는 않을 것이다. 정말로)

본론으로 들어가기

성경의 중심 주제를 언약 에 두고 계속 얘기를 해 가기로 한다. 언약 의 핵이 예수 그리스도이
심은 말할 나위가 없다.
1)언약시대 이전(창6:18)의 성령의 의의
성경은 최초의 성령사역 - 창1:2에서 창조사약에 나타난 성령의 역할은 무질서를 질서로 나아
가게 하는데 주도적으로 참여하고 있다. 그 결과가 하나님을 기쁘게 하였다.(구속사적인 성령론에
서 성령사역을 규정하는 선임에 주목) 이 성령은 창2:7절에 보면 사람을 생령으로 만드시는데 참
여함을 알 수 있다. (사람에게 호흡을 불어넣는 작업을 성령이 했다고 보여짐: 시104:29-30 참조)
사람이 생령이라는 것은 하나님의 형상을 지닌 존재라는 의미이다. 이 사람이 하나님의 형상을
잃어버린 자가 되자 창6:3절에 보면 사람들이 죄로 말미암아 육체가 되었기에 하나님의 신이 영
원히 사람과 함께 하지 아니하신다 고 하셨다. 성령께서 다시는 사람과 상대를 하지 않겠다 는
선언으로 인간은 구원받을 길이 사라져 버렸다. 홍수심판으로 인간은 구원받을 수 없는 존재요,
심판외에 다른 길이 없음을 보여준다. 하나님의 약속이 취소될 수 없기 때문이다.
인간이 구원받을 수 없는 상태에서 인간을 구원하는 길을 열어 놓은 게 언약 이다. 창6:3에서
심판을 선언하였는데 이 심판을 경험하는 자에게 재창조를 선언하는 말씀이 창6;18에 나온다. 하
나님의 멸망 선언과 재창조 선언을 합법적으로 만들어 주는 게 언약이다. 성령은 이 하나님의 언
약에 기대를 걸고 있는 것이다. 하나님의 신이 함께 할 수 없게 된 육체에 그 원인을 제거하고
하나님의 형상을 소유하는 길이 열리는 것을 성령은 언약에서 내다보고 있는 것이다. 하나님의
심판에서 살아남은 자들이 이루는 세계가 언약의 공동체이다. 이들이 무질서의 세계를 질서의 세
계로 만들 수 있다.

2)언약시대의 성령의 사역
홍수심판에서 보면 육체가 된 자들과는 영원히 함께 할 수 없다는 것이 성령의 뜻이었다. 그러
면 이제 성령 즉, 하나님의 형상을 완전하게 가지는 자를 어떻게 만들어 가느냐가 우리의 관심이
된다. 이게 구원이다. 성경을 따라가면 성령께서 족장시대에는 기록상 등장하지 아니하신다. 그러
다가 이스라엘의 광야 여정시에 등장을 하신다. <성령께서 종말에 개입을 하시기 때문이다.> 아
브라함의 자손들이 거룩하신 하나님을 뵙게 되는 순간은 죽음이다.(출19장) 이 때가 종말이다. 하
나님과 사람이 만나기 위해서는 하나님께서 인간에게 오셔야 한다. 인간에게 하나님이 오시면 사
람들은 모두 죽음이다. 바로 여기서 사람들을 살리기 위해 성령께서 개입을 하시는 것이다. 성막
제조가 사람들을 살리는 방법이요 이 제조에 성령께서 개입하신 성령의 뜻이 담겨있다. 나아가서
성령은 선지자를 이스라엘 속에 남기셨다.(민11:17,25,26,29)이제 이스라엘은 이 세상에 있는 모든
나라에 종말론적인 국가로 서 있다. 누가 복을 받고 누가 심판을 받는가를 이스라엘의 모습 속에
담아둠으로서 이 세상을 고발하고 정죄하고 회개하도록 하는 기능을 가지고 있다는 뜻이다. 하나
님은 이스라엘에게 율법이라는 하나님의 법을 주셨으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성령충만자를 그들에
게 두셨다. 이는 이스라엘이라는 민족에 대한 기대를 걸 수 없다는 것이다. 성령께서 충만히 임한
자를 따로 세워서 이스라엘 스스로가 자기를 알게 하시는 것이다. 이것이 성령을 받지 아니한 자
들에게는 종말의 상태이다.(삿2:10, 6:34, 11:29, 13:25, 14:6,9, 15:14,19, 삼상10:6,10, 16:13 참조)

하나님의 신이 자주 등장을 한다는 것은 인간이 자기 마음대로 살았다는 것이고, 그 중에서도
왕을 달라는 것은 성령의 의사를 정면으로 거스리는 것이었다. (삼하8장) 이스라엘이 선택한 초대
왕 사울을 통해 인간왕 제도를 고발하고 있다. 나아가서 하나님이 택하신 다윗을 세우셨다고 해
도 그도 하나님을 의지하지 아니하는 한 죄에 쉽게 물드는 자임을 보여주셨다.

삼하7장12이하에서 다윗 가문의 후손이 왕으로 오되 하나님의 양자의 자격으로 온다고 하였다.
다윗은 삼하 12장에서의 범죄 이후에 그 양자가 자기가 아니라 자기의 후손으로 오실 하나님이라
는 것을 안다. 다윗언약에 담겨 있는 축복은 자기가 아니라 자기의 후손으로 올 그 주님과 맺어
지게 될 것임을 내다보고 있다. 삼하 22장(51절 주목), 시110편을 보면 다윗은 이제 자신이 선지
자가 되어 그 주님이 오실 종말을 내다보고 있다. 성령이 다윗에게 그런 깨달음을 주신 것이다.
다윗언약은 성전 언약으로 보다 구체화되었는데 이는 그 언약이 하나님께서 영원한 안식을 위해
일정한 곳에 거하시겠다 는 것을 보여준다. 선지자들은 하나님께서는 늘 함께 머물러 계시는 자
들은 현 이스라엘 전부가 아니라 하나님의 은혜를 바로 알고 살아가는 자들인 남은 자들만이 참
된 다윗언약의 복을 받고 그들이 참된 성전이라고 선언하셨다. 이 말은 이스라엘의 현재에 대한
전면 부정이요 고발인 것이다.

성령은 이제 다윗언약대로 성전을 회복할 것이요, 첫 열매(렘2:3)가 될 새 이스라엘을 만들어
낼 것을 말하고 있다. 그 성전에서 하나님은 영원히 함께 하실 것이다.(겔 11장, 43장과 48:35을
비교할 것)이를 이루실 성령께서는 어떤 방해나 장애라고 돌파할 수 있는 능력과 재능과 융통성
이 있는 분이시다. 관련 있는 본문은 다음과 같다. 슥4:1-6절에 나오는 다시 지어질 성전의 성소
에 7개의 가지를 가진 촛대가 나오는데 이 촛대가 성령을 말하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이는
사11:1-2에서 말하고 있는 여호와의 신 의 다양성을 말한다. 에스겔이 예언한대로 첫열매에 대한
생산은 성령의 개입으로 이루어질 것인데 그 날이 종말이요 이 시대가 신약이다.(욜3:30-32 행
2:16-21)

3)신약시대의 성령사역
다윗언약에 의해 마지막에 오실 메시야는 성령의 도움이 아니면 메시야의 활동을 할 수 없는
분이시다.(사11:1,2, 61:1-3) 성령에 의존적이신 분이 메시야이다. 주의 성신을 내게서 거두지 마
소서 (시51:11)라고 하는 분이어야 한다. 예수께서 바로 이 분이셨다고 성경은 말하고 있다. 예
수께서 세례를 받으실 때 하늘에서 음성이 나서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요 내 기뻐하는 자
라고 하였다. 내 사랑하는 아들 이라는 것은 다윗언약에서 말하고 있는 하나님의 그 아들이다. 성
령에 의해 예언된 그 마지막 인물로 예수님을 제대로 지적했다.(눅1:41-45) 이제 예수님의 지상
사역은 성령께서 주도하시는 것으로 나타난다. 잉태(눅1:35, 마1:18,20) 세례시(막1:10), 각종 사역
을 성령의 힘으로 하심(막1:1,2, 12:28, 눅4;14,18 등) 십자가 위에서 자신을 성령안에서 비침(히
9:14) 성령의 힘으로 부활(롬1:4, 8:11) 승천 후 자신의 활동을 성령과 같이 생명을 주시는 영 (고
전15:45)으로 지상에 존재하신다. 이제 세상은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심판과 구원을 보게 되었다.
성령은 이 예수님을 통해 종말을 실현하신다. 그리고 예수의 영으로 자발적으로 오신 것이다.(요
14:16,26, 26:15, 16:7-15)왜냐하면 예수께서 유일하게 무질서를 질서로 바꿀 수 있는 근거를 제공
하신 분이기 때문이다. 예수님이 구약의 언약이 담고 있는 내용을 모두 완성했기 때문이다. 성령
을 모든 성도들은 주님의 오심을 고대하며, 성령께서 말할 수 없는 탄식으로 간구하는 것도 구원
하시기로 작정된 자들이 그 아들의 형상 만을 가지기를 소원하고 있다. (롬8:29, 갈4;19) 그 아들
의 형상이 아니면 메시야 왕국의 백성들이 그 나라를 받지 못한다.(다윗언약에서 말하는 그 아들
만이 아브라함에게 약속하신 모든 복이 주어지기 때문)

예수님 승천 후에 성령은 예수의 영(행6:7(이 되셔서 이 땅에 메시야적인 사명을 수행하고 계신
다. 그 내용을 보면 다음과 같다.
택자를 불러모음(시139:7, 행16:6이하), 그들을 감동 감화(미3:8), 기쁨을 줌(시51:12), 회개케 함
(사63:10-14, 사4:4), 바른 길로 인도(느9:20), 부활케 함(시104;30, 욥33;4), 그리스도의 몸을 위해
은사를 주심(욜2;28, 사11:2)과 언제나 흔들림 없는 보증으로(고후1:22), 교회를 온전케 하는 7영으
로서 종말가운데 성도를 맞이하고 있다.(계1:4,20)또한 이 역사를 고발하고 있다.(요16:7-11)동시에
우리 옛사람을 정죄하여 나사렛 예수님의 사건을 우리 안에서 계속되게 하신다(고후4:10) 우리가
육체의 정욕을 죽일 때 성령의 열매가 맺힌다.(갈5:16-18)더 나아가서 우리도 성령안에서 예수님
과 같은 길을 걷게 하신다.(벧전4:14, 2:21)
마무리를 하면서
성령께서 오심으로, 혹은 역사하심으로 나타나는 현상을 체험한 문제로 세월을 보내거나 이를
우쭐하거나 이를 장려해서 이익을 보려는 것은 예수의 영을 몰라서하는 어리석음이요, 무지의 결
과이다. 고난 없는 영광을 바라거나, 자기 의에 대한 신뢰로 계속 살아가려는 태도는 성령의 의도
와는 전혀 다르다. 성령께서 혼돈 위에서 새 창조의 질서를 바랐고, 그런 바램을 하나님의 형상
(요12:45, 14:9,10)을 통해 이루시려고 하셨다. 그러나 인간의 죄로 이 세상은 무질서 속에 있다.
성령은 지금 말할 수 없는 탄식으로 사람들에게 다가오고 있다. 성령님의 소원은 우리가 하나님
의 아들의 형상을 닮는 것이고 그 형상에는 예수님의 고난도 함께 수용하는 운명을 사랑하는 자
로 사는 것이다. 예수님의 고난의 심정을 읽고 거기에 함께 동참하는 자가 진정으로 성령의 사람
이다. 그런 자만이 종말을 알고, 그 종말을 제대로 살아가는 자이다. 주 예수여 오시옵소서 (나
도, 이 세상에도 소망이 없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