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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5. 성령과 종말론에 관하여
후크마 교수는 그동안 학계에서는 종말론에 있어서의 성령의 역할에 대한 관심과 연구가 미진했음을 지적한다. 종말론에 있어서의 성령의 역할을 살펴보는 일이 중요한 이유는 구약의 선지자들이 예언했던 새 시대 속에 살고 있는 신자들이 새 시대의 특권들과 축복들을 즐기며 살고 있지만, 그러나 신자들이 현재 갖고 있는 것과 앞으로를 기대하는 것과의 시기의 긴장관계를 좀 더 잘 이해하기 위해서이다. 후크마 교수는 종말론에 있어서의 성령의 역할에 대하여 구약과 신약의 증거를 통하여 다음과 같이 설명하고 있다.
* 구약의 증거 1)구약은 말하기를 성령은 어떤 예언적 징표들을 수반하는 최종적 종말론적 세대가 도래할 것에 대한 길을 예비할 것이라고 한다.
/요엘 선지자의 성령강림 사건 예언에서 “이후에”가 행 2:17에서 베드로는 “이 마지막 날들에”라고 부르고 있다. /베드로가 행2:17-36에서 성령의 강림사건에 부여한 중요성은 성령강림 사건이 말세의 도래를 알리는 위대한 사건 중의 하나라는 것이다.
2)성령은 장차 오실 구속자 뒤에 강림하며, 그에게 필요한 은사들을 채워주실 분으로 말하고 있다.
/사11:1-2 / 사6:1-2
3)성령은 물질적 축복들과 윤리적 재생을 포함한 이스라엘의 미래적 새 생활의 근원이 된다는 것이 구약의 가르침이다.
/ 사44:2-4
“나의 종 야곱, 나의 택한 여수룬아, 두려워 말라. 대저 내가 갈한 자에게 물을 주며 마른 땅에 시내가 흐르게 하며 나의 신을 네 자손에게, 나의 복을 네 후손에게 내리리니 그들이 풀 가운데서 솟아나기를 시냇가의 버들같이 할 것이라.“ (참고 사32:15-17)
/비슷한 내용의 구절이 에스겔 37:14과 39:24에도 있다.
/에스겔 선지자는 국가적 축복들에 관해서 말하는 것이 아니라 그 국가의 개개인들이 새롭게 재생될 것도 예언하고 있다.
/겔36:25-27
“내가 맑은 물로 너희에게 뿌려서 너희로 정결케 하되 곧 너희 모든 더러운 것에서와 모든 우상을 섬김에서 너희를 정결케 할 것이며 또 새영을 너희 속에 두고 새 마음을 너희에게 주되 너희 육신에서 굳은 마음을 제하고 부드러운 마음을 줄 것이며 또 내 신을 너희 속에 두어 너희로 내 율례를 행하게 하리니 너희가 내 규례를 지켜 행할지라”
* 신약의 증거 복음서들에서 예수님은 성령이 구약의 예언을 성취하는 일에 여러모로 연관이 되어 있음을 말씀하고 있다.
1) 눅4:17-19에서 예수님은 이사야 61장의 구절을 인용하면서 그 구절의 내용이 자기 자신에게 적용된다고 말씀하고 있다.
“이 글이 오늘날 너희 귀에 응하였느니라”(눅4:21)
여기서 그리스도는 자기가 주의 영이 임할 바로 그 메시야이며, 이사야의 예언을 성취시킨 분이라고 말씀하신다.
2) 마12:28에서 예수님은 하나님의 영으로 귀신들을 쫓아내는 일이 바로 하나님의 왕국이 예수님의 말씀을 듣는 청중들에게 임했다는 증거라고 말씀하신다.
여기서도 역시 성령께서 그리스도에게 능력을 부어 주시는 일이 바로 새 시대가 도래했다는 증거로 나타나고 있다.
3) 행전 2장에 기록된 오순절에 발생한 “성령의 쏟아부으심”의 사건은 성령께서 그 충만한 가운데 임재하게 되었다는 종말론적 “새 시대”의 막을 올리는 위대한 종말론적 중요성을 지니고 있다.
바울도 구약예언과 조화를 이루면서 성령을 특별히 종말론적 선물이며, 새 세대의 계시자로 보고 있다. 게할더스 보스는 바울에게 있어서 성령과 종말론의 관계성에 관하여 다음과 같이 말한다.
“pneuma(성령)는 종말론적 혹은 천상의 영역이 모든 요소들 속에 있기 전 이미 사도 바울의 마음 속에 있었다. 바로 이러한 성령의 내주는 장차 올 세상 속에서 어떠한 존재로 어떠한 삶을 영위할 것인가 하는 양식을 특징지워주고 있다. 따라서 이렇게 기대하고 예기하는 형식으로 장차 올 세계는 지금 실현되고 있는 것이다.”
이상의 말을 달리 표현하자면, 바울에게 있어서 성령이란 미래가 현재속으로 돌파하여 들어오는 것을 의미하며, 따라서 미래 세대의 능력들과 특권들, 그리고 축복들이 이미 성령을 통하여 우리에게 와 있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바울에게 있어서 성령을 받는다는 것은 미래의 세대와 연관이 있는 새 존재 양식 속에 참여자가 된다는 것이며, 또한 “장차 올 세대의 능력들”을 갖게 된다는 뜻이다. 그러나, 아마 바울은 주장하기를 성령이 지금 주시는 것은 더욱 더 큰 축복들을 우선적으로 약간 맛을 보는 경우에 해당한다고 한다. 바로 이런 이유때문에 바울은 성령을 현세의 축복들보다 훨씬 능가할 미래의 축복들에 대한 “첫 열매들”, 혹은 “증표”라고 부르고 있다. 그러므로 우리는 바울에게 있어서 성령의 시대(오순절로부터 재림때까지)란 일종의 중간적 새대라고 할 수 있다. 바로 이 세대에 신자들은 이미 장차 올 세대의 축복들을 향유하고 있다고 할 수 있으나 동시에 그들은 아직 그 축복들을 충만히 소유했다고는 할 수 없는 것이다.
후크마 교수는 성령의 종말론적 역할과 연관이 있는 성경의 개념들을 제시하고 있다.
1) 신자들의 양자됨이다.
바울은 신자들의 양자됨이 그리스도의 사역에 근거를 두고 있음을 말하면서도 성령의 사역과도 밀접한 관계를 맺혀놓고 있다.
/ 갈라디아서4:4 ; 로마서8:14-16
따라서 양자됨과 관련하여 성령이 하시는 역할이란 우리가 참으로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의 아들들이며, 그리스도와 함께 하나님의 후사들인 것을 우리에게 확신시켜 주는 일이며, 동시에 이러한 양자됨의 풍성한 부가 예수님의 재림 전에서 나타낸 바가 되지 아니할 것도 우리에게 주지시킨다.
2) 첫열매(aparche, firstfruits)이다.
이 단어는 고린도전서 15:20과 23에서(“잠자는 자들의 첫 열매”) 그리스도에게 적용되고 있다. 그러나, 이 단어가 성령께 적용된 예가 한 군데 있는데 위에서 인용된 바 있는 로마서 8:23이다.
“피조물 뿐 아니라 또한 우리 곧 성령의 처음 익은 열매를 받은 우리까지도 속으로 탄식하여 양자될 것 곧 우리 몸의 구속을 기다리느니라.”
첫 열매란 무엇을 의미하는 것일까? 구약의 배경을 살펴보면 첫 열매들이란 들판의 첫 소작물들이나 가축의 첫 것들로서 하나님께 바쳐지는 것들이었다.(신18:4; 26:2, 느10:35-37) 그러므로 첫 열매란 추수 때의 시작을 상징한다. 로마서 8:23에서 성령은 첫 열매라고 불리고 있다. 따라서 구약 시대에 첫 열매들이란 장차 올 대추수의 첫 시작을 암시했듯이 신자들이 성령을 받는다는 것은 장차 다가올 더 좋은 것들의 첫 맛을 보는 것과 같은 것이다.
3) 육체적 부활사건이다.
성경은 성령께서 그리스도의 부활사건과 신자들의 부활사건에 능동적으로 활동하신다는 것을 증언하고 있다.
/ 그리스도의 부활사건 : 롬 1:3-4 ; 8:11 / 신자들의 부활사건 : 고전 15:42-44
그러므로 결론적으로 성령을 소유함을 통하여 그리스도 안에 있는 우리들은 장차 올 세대의 축복들을 우선적으로 맛보고 있는 것이다. 동시에 육체의 부활에 대한 담보와 보증은 성령을 소유함으로써 갖게 되는 것이다. 그러나, 우리는 첫 열매를 가진 것에 불과하다는 것도 기억해야 한다. 우리는 이러한 축복들을 풍성히 향유하는 그때, 곧 하나님의 왕국의 최종적 완성의 때를 갈망하고 바라다 보고 있는 것이다.
6. “이미”와 “아직”사이의 긴장에 관하여
“이미”와 “아직”은 신약의 종말론의 특징이며, 신자는 구약의 선지자들에 의해 예언되었던 종말론적 시대에 살고 있으며, 그러면서도 신자들은 아직 최종적 상태에 다다른 것이 아니라 아직 부활될 육체를 기다리고 있는 것이다. 후크마 교수는 이러한 긴장은, 신약에서 두세대(two ages)에 관한 교리 즉, 현 세대와 장차 올 세대를 통해 설명하고 있으며, 또한 신약을 가로지르고 있는 역사의 이해, 즉 하나님의 왕국과 사단의 왕국이 역사 속에서 계속적으로 발전하는 두 개의 줄기로서 이 긴장이 존재하고 있음을 암시하고 있다고 말한다.
후크마 교수는 이러한 논리를 다음 몇가지의 성경적 근거로 진술하고 있다.
1)“이미”와 “아직”사이의 긴장 상태는 예수님의 가르침 속에 명백히 제시되어져 있다.
이것은 예수님의 하나님의 왕국에 대한 교훈이 현재적인 동시에 미래적인 소망이라는 가르침에 근거하고 있다.
2)바울의 가르침 속에서도 나타나 있다.
바울에게 있어서 예수님의 생명을 현재 우리의 죽을 육체 속에 나타내신바 되었으나(고후4:10,11) 이 새 생명이 현재적으로 나타난 것은 잠정적이요 미완성된 상태이기 때문에, 사람들은 그것이 나타내진바 된 동시에 감추어져 있다고 말하게 되었다는 것이다.(골3:3; 롬8:19,23) 그러므로 바울은 종종 기쁘고 승리에 찬 말로 성령의 현재적 내주하심에 관해 쓰고 있는 것이다.(롬8:9, 고후3:18) 반면에, 바울은 또 다른 곳에서 신자들은 지금 탄식하며 더 좋은 것이 나타나기를 기다리고 있다고 말하기도 한다.(롬8:23, 고후5:2)
3)히브리서 저자는 그리스도의 초림과 재림을 비교하면서 대조하고 있다.
즉, “그리스도가 많은 사람의 죄를 담당하시려고 단번에 드려지신바 되었고, 그를 기다리는 자들을 구원하시기 위하여 두번째 나타나실 것인데 이때는 죄와는 관계하시지 않는다”(히9:28)는 것이다.
4)베드로는 그리스도의 부활과 우리 신자들의 미래적 소망을 연결짓고 있다.
“예수 그리스도의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하심으로 말미암아 우리를 거듭나게 하사 산 소망이 있게 하시며, 썩지않고 더럽지 않고 쇠하지 아니하는 기업을 잇게 하시나니 곧 너희를 위하여 하늘에 간직하신 것이라.”(벧전1:3-4)
5)요한은 현재의 우리와 미래의 우리 사이의 대조를 조명해 주고 있다.
“사랑하는 자들아 우리가 지금은 하나님의 자녀라. 장래에 어떻게 될 것을 아직 나타나지 아니하였으나 그가 나타내심이 되면 우리가 그와 같을 줄을 아는 것은 그의 계신 그대로 볼 것을 인함이니라.”(요한일서3:2)
6)요한 계시록에도 “이미”와 “아직”사이의 긴장이 표현되고 있음을 말한다.
후크마 교수는 요한 계시록의 해석에 있어서, 두가지의 잘못된 해석법을 배격하고 있다. 그것은 요한 계시록이 단지 과거에 성취된 것으로만 해석하는 과거주의적 해석법과 또 하나는 전적으로 미래에 성취될 것을 기록하고 있다고 보는 미래적 해석법인데, 이런 해석법은 요한 계시록 전체를 통해 보여주고 있는 “이미”와 “아직”사이의 긴장을 전혀 고려하지 않은 데서 비롯된 것이라고 말한다. 그러면서 이 요한 계시록은 과거의 일들과 함께 미래의 일들을 가르치고 있으며, 특히 그리스도께서 과거에 행하셨던 사역 위에 미래에 대한 기대들을 구축하고 있음을 강조한다. 그리스도께서 과거에 얻으신 승리에 관한 구절은 계1:18; 5:5-7, 9-10; 12:1-5, 11이며, 그리스도의 재림에 관한 구절은 계1:7; 19:11-16; 22:7, 12, 20이다.
후크마 교수는 이러한 “이미”와 “아직”사이의 긴장이 오늘날 우리 신자들의 삶과 생각에 미치는 특성들에 대하여 몇가지 견해를 제시하고 있다.
1)이러한 “이미”와 “아직”의 긴장은 우리가 흔히 “시대의 징조들”이라고 부르는 것이 무엇인가를 특징지워준다.
“시대의 징조들”이라 할때, 여기서 의미하는 바는 교회의 선교적 전파사역, 이스라엘의 개종, 배도하는 일이 크게 일어나게 됨, 대환난, 적 그리스도의 출현등과 같은 일을 포함한, 그리스도 재림 전에 발생하게 될 모든 사건들을 말하고 있다.
2)교회는 이 긴장속에 들어 있다.
3)이러한 긴장은 책임있는 그리스도인의 삶에 대한 자극제가 된다.(롬8:13; 고전1:30; 갈6:8)
4)우리의 자화상(self - image)은 이러한 긴장을 반영해야 한다.(골3:9-10)
5)이런 긴장은 신자들이 당하는 고난의 역할을 잘 이해할 수 있도록 도움을 주고 있다. (롬8:17-18; 벧전4:12-13; 계21:4)
6)문화에 대한 태도는 이 긴장과 관련이 있다.
후크마 교수는 현 세상과 장차 올 세상에 대하여 불연속성과 연속성이 있음을 말하면서 현 세상의 문화적 산물은 다음 세상으로 연결된다는 연속성을 주장한다. 이에 대한 근거 구절로 고전3:10-15의 공력에 대한 비유와 마25:21,23을 제시하고 있다. 따라서 비그리스도인들이 만든 문화적 산물들을 우리가 경시해서는 안되며, 하나님의 말씀에 비추어 분별하여 그것을 사용해야 할 것을 말하고 있다.
B. 미래 종말론
미래 종말론은 미래에 있게 될 종말론적 사건들을 다루는 것인데, 일반적으로 알려진 종말론의 구조인 개인적 종말론과 일반적(우주적) 종말론으로 구성되어 있다. 개인적 종말론은 육체의 죽음, 영혼 불멸론, 죽음과 부활사이 기간동안의 인간의 상태등과 같은 주제를 다루며, 일반적 종말론은 재림의 기대, 시대의 징조들, 그리스도의 재림, 천년기, 육체의 부활, 최후의 심판, 신천신지 등과 같은 주제를 다룬다.
1. 육체의 죽음에 관하여
여기서 다루게 되는 육체의 죽음에 관한 문제는 특별히 인간에 대한 죄와 죽음과의 관계성이다. 다시 말하면, 인간의 죽음은 죄의 결과인가라는 문제이다. 일반적으로, 로마 천주교나 신교의 신학자들은 인간의 죽음이 죄의 결과의 하나라고 가르쳐 왔음에도 불구하고 몇몇 기독교의 선생들은 다르게 가르쳤다. A. D 5세기경, 로마에서 가르쳤던 영국의 수도승인 펠라기우스(Pelagius)의 제자 셀레티우스(Celestius)는 아담은 유한적으로 창조되었고 그가 죄를 짓든, 안 짓든간에 죽음을 맛보게 되었다고 가르쳤다. 또한, 종교 개혁 시대의 소시니안 주의자들(Socinians)이 이와 비슷한 견해를 주장했으며, 칼바르트는 인간의 죽음은 인간이 죄에 떨어진 결과가 아니라 하나님의 선한 창조의 한 면이며, 하나님은 태초로부터 땅 위의 인간의 생명은 끝을 갖도록 계획하셨다는 것이다. 그러나, 후크마 교수는 인간 역사에 있어서 죽음은 하나님의 선한 창조의 한 부분이 아니라 인간의 타락의 결과 중의 하나라고 말하면서, 창세기 2:16-17의 주해를 제시하고 있다.
“동산 각종 나무의 실과는 네가 임의로 먹되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실과는 먹지말라 네가 먹는 날에는 정녕 죽으리라”(창2:16-17)
성경 중에서 죽음에 관해 최초로 언급하고 있는 이 구절은 분명히 죄와 죽음과의 관계를 가르쳐 주고 있다. 죽음은 금단의 열매를 먹는데 대한 징벌로서 하나님에 의해 주어졌다. 그런데 중요한 것은 “그 날”과 “죽으리라”에 대한 해석이 여러갈래로 나누어진다는 사실이다. 먼저 “네가 그것을 먹는 그 날에”라는 문구에서 “그 날”에 관한 해석은 보수적인 견해에서는 두 가지로 나누어 진다. 첫번째 해석에 있어서 “그 날”은 아담이 금단의 열매를 따먹은 바로 그 날이다. 그런데, 아담이 바로 그 날 죽지 않은 이유는 하나님의 일반은총 때문에 사형선고의 즉각적 집행이 연기되었다고 하는 견해이다. 두번째 해석은 게할더스 보스의 견해로, “네가 그것을 먹는 날에는”이란 표현은 히브리어의 관용구로서 단순히 “네가 먹은 만큼 확실히”라는 뜻을 의미한다는 견해이다. 성경에서 이러한 관용구의 또 다른 표현이 있는데, 그것은 열왕기상2:37에 있는 “네가 나아가서 기드론 시내를 건너는 날에는 정녕히 죽임을 당하리라”와 출애굽기10:28에 기록된 “내 얼굴을 결코 다시 보지 말라 내 얼굴을 보는 날에는 정녕 죽으리라”이다. 여기서 “그 날에”라는 표현은 단순히 “정녕히, 확실히”라는 뜻으로 이해한다. 그러므로 이와 동일한 의미인 창세기2:17의 표현은 “네가 이 과일을 먹는 바로 그 날에 네가 죽으리라”는 뜻을 나타낸다기 보다는, 오히려 “네가 이 과일을 먹는 만큼이나 확실히 너는 죽으리라”는 의미로 이해되어지는 것이 더 바람직한 해석이라고 후크마 교수는 말한다. 또 하나의 논쟁의 대상이 되고 있는 해석은 “네가 정녕 죽으리라”라는 표현은 무엇을 의미하는 가하는 것이다. 우선, 히브리어 동사 muth는 일차적이고도 분명한 의미는 육체의 죽음이다. 창3:19은 육체의 죽음이 인간의 죄의 결과인 저주와 연관되어 언급되고 있다. 그렇다면, 창2:17에서 죽음이 무엇을 의미하든지 간에 분명한 것은 인간의 세상에 일어나고 있는 육체의 죽음은 인간의 죄의 결과라는 사실이다. 그러나, 후크마 교수는 창2:17에 선언된 죽음은 우리가 일반적으로 영적 죽음이라고 부르고 있는 것을 포함하고 있다고 한다. 왜냐하면, 죽음의 가장 깊은 의미는 하나님으로부터의 분리이며, 따라서 하나님과 분리상태에 있는 모든 인간은 본질적으로 영적 죽음의 상태에 놓여 있다는 것을 강조하고 있다. 또한, 우리는 신약에서도 죄와 죽음과의 관계를 분명히 확인하는 성경구절이 있음을 보게 된다.
“이러므로 한 사람으로 말미암아 죄가 세상에 들어오고 죄로 말미암아 사망이 왔으니 이와 같이 모든 사람이 죄를 지었으므로 사망이 모든 사람에게 이르렀느니라”(롬 5:12)
육체의 죽음과 관련하여 우리 신자들에게는 한가지 질문이 생기게 될 것이다. 그것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의 죄 값으로 십자가의 죽음을 대신하셨는데, 죄 용서함을 받은 우리 신자에게 왜 아직도 죽음을 맛보아야 하는가 하는 것이다. 그에 해답은 하이델베르그 교리문답 42번에 잘 나타나 있다.
문 : 그리스도가 우리를 위하여 죽으셨다면, 우리가 또 죽어야 할 이유는 무엇인가? 답 : 우리의 죽음은 우리의 죄를 위한 보상이 아니라 다만 죄에 대하여 죽고 영생에 들 어간다는 것이다.
다시 말하면, 신자들에게 있어서 죽음의 의미란, 여전히 죄에 대한 결과로서가 아니라 죄에 대하여 죽고, 죄로부터 벗어나는 영생의 시작을 의미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사도 바울의 고백과 같이 빌립보서 1:21에서 “내게 사는 것이 그리스도니 죽는 것도 유익함이니라”고 말 할 수 있으며, 고린도 후서 5:8에서도, “우리가 차라리 몸을 떠나 주와 함께 거하기를 원하노라”고 말 할 수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가 가장 두려워하는 대적자(죽음)가 우리를 위하여 하늘의 복락에 들어가는 문을 열어 주는 하인이 된 것을 잊지 말아야 할 것이다. 또한 그리스도인들에게 있어서 죽음이란 끝이 아니라 영광스러운 새로운 시작임을 기억해야 할 것이다.
2. 영혼 불멸론에 관하여
영혼 불멸의 개념은 고대 헬라의 신비 종교들 속에서 발전되었으며, 플라톤(plato, B. C. 427-347)의 저서들을 통해 철학적인 옷을 입었다. 플라톤은 그의 다양한 대화록에서, 특별히 phaedo에서 육체와 영혼은 두 개의 구별되는 특징적인 본체라는 견해를 제시했다. 즉 사고하는 영혼은 신성한 반면, 질료로 구성되어 있는 열등한 본체인 육체는 영혼보다는 가치가 없다는 견해이다. 다시 말하면, 이성적 영혼(nous)은 “하늘들”에서 내려온 인간의 죽지 않는 부분인데, 영혼은 이 하늘들 속에서 지옥의 선재를 향유하고 있었다는 것이다. 이 선재 상태 속에서 영혼은 그 날개들을 상실했기 때문에 육체 속으로 들어와 머리 속에 거주하고 있다고 생각되어졌다. 사망 시에 육체는 단지 분해되어 버리고 말지만, 정당하고 존경받을 만한 활동과정을 거친 이성적 영혼(nous)은 하늘들 속으로 되돌아가고, 그렇지 못했던 영혼들은 다른 사람이나 동물의 형태로 다시 나타나게 된다는 것으로서, 영혼 그 자체는 파괴될 수 없는 불멸의 것이라는 것이다. 그렇다면, 성경은 “영혼의 불멸”이란 표현을 사용하고 있는가? 또한, 인간의 영혼에 대해서도 불멸의 개념을 사용하고 있는가?하는 것이다. 먼저, 영혼 불멸의 개념에 대하여 개혁주의 신학자들은 어떻게 생각하였는가 하는 것이다. 죤 칼빈(John Calvin)은 아담이 불멸의 영혼을 가졌었다고 가르치면서, 영혼의 불멸성을 우리가 받아들일 수 있는 교리라고 말하고 있다. 윌리암 쉐드(William G.T. Shedd)는 “영혼불멸과 죽음 후에 영혼이 육체로부터 분리된다는 것을 믿는다는 것은 신약과 아울러 구약의 핵심사상 중의 특성”이라고 말하고 있다. 또한, 알키발드 알렉산더 핫지(Archibald Alexander Hodge)라든지 루이스 벌코프(Louis Berkhof)같은 신학자는 영혼불멸의 교리에 대하여 긍정적인 입장을 표명하였으며, 헤르만 바빙크(Herman Bavinck)라든지 벌카우워(G.C. Berkouwer)같은 신학자들은 이 영혼불멸의 개념에 대하여 상당히 신중한 입장을 취하였다. 헤르만 바빙크는 말하기를, “성경은 많은 말로 영혼불멸에 관해 말하고 있지 않다. 즉, 성경은 이 개념을 신의 계시로서 선언하고 있지 않으며, 또한 성경 어느 곳에서도 이 교리는 전면에 부각되어 있지 않다.”라고 말하고 있다. 이렇듯, 영혼불멸에 대한 개념은 개혁주의 안에서도 서로 상반된 견해를 갖고 있다. 이에 대하여 후크마 교수는 영혼불멸의 교리에 관하여 성경의 주해를 통하여 자신의 견해를 밝히고 있다. 성경은 두 개의 헬라어 단어, 즉 athanasia와 aphtharsia가 일반적으로 immortality(영혼 불멸)로 번역되어지고 있다. 신약에서 athanasia란 단어가 세번 사용되고 있는데, 그것은 다음과 같다. / 디모데전서 6:16(1번) / 고린도전서 15:53-54(2번) 디모데전서6:16에서는 “오직 죽지 아니함을 갖고 있으며 가까이 가지 못할 빛에 거하시고 아무 사람도 보지 못하였고 또 볼 수도 없는 분인” 하나님을 묘사하기 위하여 athanasia란 단어가 사용되고 있다. 이 구절에서 “죽지 아니함”이란 뜻은 단순히 끝없는 존재를 의미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 그 이상을 의미하고 있다. 그것은 부여된(endowed) 불멸성이 아니라 본래적(original) 불멸성을 의미하고 있다. 이 구절에서 바울은 생명의 원천으로서의 하나님은 모든 불멸의 원천이 되고 있다는 점을 가르치고 있다. athanasia가 두 번 사용되고 있는 고전15:53-54은 “이 썩을 것이 불가불 썩지 아니할 것을 입겠고 이 죽을 것이 죽지 아니함을 입으리로다. 이 썩은 것이 썩지 아니함을 입고 이 죽을 것이 죽지 아니함을 입을 때, ‘사망이 이김의 삼킨바 되리라’고 기록된 말씀이 응하리라”(참고, NIV)라고 기록하고 있다. 바울은 여기서 그리스도 재림시 일어날 것들에 관해 말하고 있는데, 여기서 말하고 있는 불멸의 개념은 3가지의 특성이 있다. 첫째는, 여기서 말하고 있는 불멸은 신자들에 관한 것이며, 둘째는, 이 불멸은 장차 우리가 받게 될 선물이며, 셋째는, 이 구절에서 묘사되고 있는 불멸은 단지 영혼만이 갖는 특성이 아니라 전인으로서의 인간이 갖는 특성이라고 할 수 있다. 불멸이라고 번역되는 또 다른 헬라어는 aphtharsia인데 신약에서 7번 사용되고 있다. 로마서2:7에서는 참 신자가 추구하는 목표를 가리키기 위해서, 디모데후서1:10에서는 그리스도께서 밝히 드러내신 것을 가리키기 위해서 사용되고 있다. 또한 바울의 위대한 부활의 장인 고린도전서 15장에서도 4번 사용되고 있다. 50절에서, 부패하여 썩어질 것이 결코 유업으로 얻을 수 없는 것이 무엇인지를 나타내고자 이 단어가 사용되었으며, 42절에서는 비록 육체가 썩어질 것에 심기워 졌으나, 썩지 아니할 것으로 다시 일어날 것이라는 사실을 보여주고자 이 단어가 사용되었다. 53절과 54절에서는 현재의 몸, 즉 썩어질 것으로 불리워지는 육체가 부활로 인해 옷 입혀지게 될, 부패되지 않고 썩지 않게 될 것을 묘사하기 위해서 이 단어가 사용되고 있다. 즉, 이 구절 중 어느 곳에서도 “영혼”이란 단어가 사용되지 않았다는 사실이다. 이와 관련된 형용사인 aphthartos(썩지 아니할)가 신약에 7번 사용되고 있는데, 이 형용사는 하나님(롬1:23; 딤전1:17), 부활된 육체, 즉 “죽은 자들은 썩지 아니할 것으로 일어날 것이요”(고전15:52), 바울이 얻고자 분투하는 면류관(고전9:25), 온유하고 조용한 심령의 썩지 아니할 보배(벧전3:4), 우리가 다시 태어날 썩지 아니할 씨(벧전1:23), 우리를 위해 하늘나라에 준비된 썩지 아니할 기업(벧전1:4)등을 묘사하기 위하여 사용되고 있다. 이상의 경우를 통하여 후크마 교수는 “영혼”을 수식하기 위하여 “불멸”이라는 개념이 사용된 적은 한번도 없다는 것을 지적하고 있다. 따라서, 후크마 교수는 다음과 같은 결론으로 영혼 불멸에 관한 이해를 제시하고 있다.
첫째, 성경은 “영혼불멸”이란 표현을 사용하고 있지 않다.
불멸이란 단어는 하나님께 대하여, 부활시의 인간의 완전한 존재상태에 대하여, 썩지 아니할 면류관에 대하여, 썩지 아니할 말씀의 씨앗 등에 대하여 사용된 단어이지, 결코 인간의 영혼에 대하여 사용된 적은 없다.
둘째, 성경은 영혼이 본래적으로 파괴할 수 없는 본체이기 때문에 영혼의 계속적 존재를 가르치고 있는 것이 아니다.
다시 말하면, 성경은 영혼은 피조되지 않고, 본래적으로 영원한 불파괴성이라는 철학적 논리를 배제하여, 인간은 하나님에 의해 창조되었으며 계속적으로 하나님께 의존해야만이 존재를 영위할 수 있다는 것으로서, 우리 인간 속에는 어떠한 류의 본래적인 것도 있지 않다는 것이다.
셋째, 성경은 죽음 후에 단순히 계속되는 존재가 가장 바람직한 것이라고 가르치고 있으며, 오히려 하나님과의 교제의 삶이 인간에게 있어서 최대의 선이라고 말하고 있다.
넷째, 인간의 미래에 관해 성경이 선포하고 있는 중심적 메시지는 육체의 부활이다. 육체의 부활교리는 기독교의 특유의 교리이며, 종말론에서 중심적 위치를 차지하고 있다. 따라서 후크마 교수는 결론적으로 영혼불멸의 개념에 대하여 말하기를, 우리가 인간에 대하여 불멸이라는 단어를 사용하기 원한다면, 영혼이 불멸하다고 하기 보다는 인간이 불멸하다고 하여야 할 것이라고 말이다.
3. 중간상태에 관하여
중간상태란 죽음과 부활 사이의 기간 동안에 죽은 자들이 처해 있는 상태를 말한다. 중간상태에 관하여 기독교(개신교)는 죽음과 부활 사이의 기간 동안에 신자의 영혼은 구원의 완성을 기다리며 안식을 취하고 있고, 불신자의 영혼은 파멸을 기다리며 고통을 겪고 있다고 가르쳐 왔다. 그러나 종교개혁 시대의 재세례파 교인들(Anabaptists)은 영혼들은 단순히 죽음과 부활 사이의 기간 동안에 잠자고 있다고 주장했으며, 반데 리유(G. Van der Leeuw, 1890-1950)같은 사람은 육체, 곧 몸이 없으면 영혼도 없어진다는 것을 주장하였다. 그렇다면, 성경은 이 영혼의 중간상태에 대하여 무엇이라고 말하고 있는가? 우선, 우리는 몸 즉, 육체와 구별된 의미로 사용하는 영혼에 대해서 성경이 어떻게 사용하고 있는가를 살펴보자. 신약성경에서 사용하고 있는 영혼이라는 단어는 psyche이다. psyche는 신약성경에서 사후에도 계속 존재하게 되는 인간의 단면을 지칭하기 위하여 사용되고 있는 예가 세 번 있는데 그 용례는 다음과 같다.
①마태복음 10:28 “몸은 죽여도 영혼은 능히 죽이지 못하는 자들을 두려워하지 말고 오직 몸과 영혼을 능히 지옥에 멸하시는 자를 두려워하라”
여기서 하시는 예수님의 말씀 속에서 영혼에 관한 가르침은, 영혼은 몸이 죽은 후에도 계속 존재하는 인간의 한 단면임을 보여 주고 있는 것이다.
②요한계시록 6:9 “다섯째 인을 떼실 때에 내가 보니 하나님의 말씀과 저희의 가진 증거를 인하여 죽임을 당한 영혼들이 제단 아래 있더라”
③요한계시록 20:4 “또 내가 보니 예수의 증거와 하나님의 말씀을 인하여 목 베임을 받은 자의 영혼들과 또 짐승들과 그의 우상에게 경배하지도 아니하고 이마와 손에 그의 표를 받지도 아니한 자들이 살아서 그리스도와 더불어 천년 동안 왕 노릇하고”
위의 두 구절에 나타난 영혼에 관한 가르침은 순교자들의 몸이 참혹하게 처형당한 후에도 계속해서 영혼은 존재하게 된다는 것으로서 영혼은 사후에도 존재하는 인간의 한 단면임을 보여주고 있는 것이다. 이러한 용례로 보아 우리는, 영혼은 사후에도 계속해서 존재하는 인간의 한 단면임을 확인하게 되는 것이다. 그러나 우리는 분명히 확인하고 넘어가야 할 것은, 인간은 영과 육이 하나의 통일체로서 “몸과 영혼”(마10:28), 또는 “몸과 영”(고전7:34, 약2:26)이 하나일때 인간은 완전한 것임을 잊지 말아야 할 것이다. 따라서 죽음이 몸과 영혼의 일시적 분리를 가져올지라도 이런 존재 상태는 잠정적이며 일시적이고 불완전하다는 것을 기억해야 할 것이다. 그러면, 우리에게 또 다른 질문이 하나 생기는데, 그것은 죽음과 부활 사이 기간 동안 인간의 영혼이 존재한다면 어디서 어떤 상태로 존재하는가 하는 문제이다. 성경은 이 문제에 관하여 무엇이라고 말하고 있는지 살펴보도록 하자. 먼저, 구약성경에서는 인간은 죽음 이후에도 ‘스올’이라는 곳에서 계속 존재하고 있음을 말하고 있다.
①창세기 37:35 “내가(야곱) 슬퍼하며 음부(스올)에 내려가 아들에게로 가리라”
이 말씀은 야곱이 요셉을 잃은 슬픔을 표현하고 있는 것이다. 여기서 음부, 곧 스올의 의미는 지옥을 가리키는 것이 아니라 죽은 자들의 영역을 의미하는 것이다.
②창세기 42:38 “만일 재난이 그 몸(베냐민)에 미치면 ······· 너희가 나의 흰 머리로 슬피 음부(스올)로 내려가게 함이 됨이라”
이 말씀은 요셉의 형제들이 애굽으로 내려와서 양식을 얻어 가려고 할때, 요셉이 베냐민을 볼모로 잡아 두고 그 형제들은 돌려 보내게 되는데, 그때 집에 있던 야곱이 이 소식을 듣고 볼모로 잡혀 있는 베냐민을 사랑하는 안타까운 마음을 표현하는 것이다. 여기서도 음부(스올)는 지옥을 의미하기 보다는 죽음의 장소, 곧 죽은 자의 영역을 의미하는 것으로 보는 것이 더 타당하다.
③사무엘상 2:6 “여호와는 죽이기도 하시고 살리시기도 하시며 음부(스올)에 내려가게도 하시고 올리기도 하시는도다”
이 말씀은 히브리시의 문체적 특성인 평행법을 사용한 것을 이해한다면, 여기서도 음부(스올)는 앞선 구절의 뜻을 반복하는 죽음의 상태, 곧 죽은 자의 영역임을 알 수 있다. 따라서 스올이 갖는 의미 중 하나는 죽은 자의 영역, 곧 죽음의 영역을 의미하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3. 시대의 징조들에 관하여
“시대의 징조들”이란 표현은 그리스도의 재림을 가리키거나 재림을 선행하는 사건들이나 상황들을 묘사하기 위하여 사용되어진다. 이러한 관점에서 이러한 징조들의 향방은 미래 지향적이며, 특별히 재림사건을 둘러싼 사건들을 가리키고 있다. 후크마 교수는 시대의 징조들에 대한 잘못된 이해들을 몇가지 제시하고 있다.
1)시대의 징조들을 전적으로 세상 끝날만을 가리키는 것으로 생각하려는 것이다.
/ 마16:3 - 시대의 징조들이란 분명히 미래를 가리키고 있다기 보다는 과거와 현재를 가리키고 있다고 보아야 한다.
2)그 징조들을 비정상적인, 극적인, 혹은 큰 재앙의 사건들로만 생각하려는 것이다.
/ 눅17:20 -21
3)그것들을 그리스도의 재림의 정확한 때를 계수하는 방법으로써 사용하려는 시도이다.
/ 기독교 역사를 통하여 이런 일이 비일비재함을 볼 수 있다. 예) 1818년, 윌리암 밀러(William Miller) / 2년동안 성경을 연구한 후에 그리스도께서 1843년 3월 21일과 1884년 3월 21일 사이에 재림하실 것이라고 주장. / 막13:32, 마24:36 - 예수님 자신은 그가 우리에게 어느 누구도, 심지어는 인자도 그의 재림의 날과 시를 알지 못한다고 말씀하심.
4)이런 징조들을 통해서 미래 사건들의 정확한 시간표를 작성하려는 시도이다.
/ 이런 시도는 종말론적 경향이 짙은 많은 종파주의 운동들의 특징이 되어 왔다.(세대주의)
후크마 교수는 이러한 시대적 징조들에 대한 바른 이해를 몇가지로 설명하고 있다.
1)비록 우리가 일반적으로 시대의 징조들이 미래를 가리키는 것으로 생각하지만, 이런 징조들은 무엇보다도 먼저 하나님이 과거에 행하셨던 것을 가리키고 있는 것이다. / 마16:3
시대의 징조들이란 그리스도께서는 이미 크나큰 승리를 쟁취하셨으며, 그러므로 역사에 있어서 결정적인 변화가 이미 일어났다는 것을 나타낸다. 또한 그것들은 하나님이 역사 속에서 일하고 있으며 그의 약속들을 성취하고 계시며 구속의 최후 절정을 우리로 하여금 깨닫게 하도록 힘쓰신다는 것을 나타낸다.
2)시대의 징조들이란 앞으로의 역사의 종말, 특히 그리스도의 재림을 가리킨다.
/ 마24:14,29,30 / 살후2:3
3)시대의 징조들은 역사 가운데서 하나님의 왕국과 악의 세력들 사이에 끝없는 대립을 나타내는 것이다.
예수님의 비유에 의하면 알곡과 가라지는 세상 마지막 날에 있게 될 추수 때까지 서로 자라는데, 이것이 의미하는 바는 하나님의 능력과 사단의 세력사이의 분쟁이 역사 전체를 통해서 끊임없이 계속되리라는 것을 우리가 기대할 수 있음을 뜻한다.
4)시대의 징조들은 결단을 촉구한다.
예수님께서는 시대의 징조들을 잘 분별하지 못하는 그 당시의 사람들을 질책하셨다. 이런 징조들을 통해서 하나님은 계속해서 사람들로 하여금 그의 아들을 믿고 구원받을 것을 권고하신다.
5)시대의 징조들은 우리에게 계속적으로 깨어 경성할 것을 요구한다.
4. 특별한 징조들에 관하여
이 장에서 후크마 교수는 성경에 진술된 대로 시대의 징조들을 구체적으로 다루어 나간다.
※징조들에 대한 조직적인 분류
1.하나님의 은총을 증거하는 징조들. ①모든 나라에 복음이 선포됨 ②이스라엘의 충만한 숫자의 구원
2.하나님께 반역하는 징조들. ①환난 ②배도 ③적그리스도
3.하나님의 심판을 가리키는 징조들. ①전쟁들 ②지진들 ③기근들 시대의 징조들은 근본적으로 하나님의 은총과 하나님의 심판을 동시에 나타내고 있다. 후크마 교수는 하나님의 은총을 증거하는 징조들에 관하여 다음과 같이 성경적 논리를 펴고 있다.
1)복음이 선포됨.
*구약의 증거 ㈀욜2:28 - 구약의 예언자들은 말일이 곧 시작될 것이며 그때에 성령이 모든 육체위에 부어질 것이라고 예언. ㈁사52:10 - 땅의 모든 끝들이 하나님의 구원을 볼 것이라고 예언. ㈂사42:6 - 하나님께서 자기의 종을 백성들에게 언약으로서 주실 뿐만 아니라 열방의 빛으로 삼으신다고 예언. ㈃사40:5 - 모든 육체가 주의 영광을 볼 것이라고 예언.
*신약의 증거 ㈀마24:14, 막13:10 - 그리스도의 재림이 일어나기 전에 모든 나라에 복음이 전파되어야 할 것을 가리치심. ㈁마28:19,20 - 선교 사명의 위임령.
2)이스라엘의 충만한 구원
롬9-11장에서 바울은 이스라엘의 구원문제에 관해 매우 특별히 다루고 있기 때문에 이스라엘의 충만한 구원을 시대의 또 다른 특수한 징조로 살펴보게 된다. / 롬11:25-26
“너희가 스스로 지혜 있다 함을 면키 위하여 이 비밀을 너희가 모르기를 내가 원치 아니하노니 이 비밀은 이방인의 충만한 수가 들어오기까지 이스라엘의 더러는 완악하게 된 것이라 그리하여 온 이스라엘이 구원을 얻으리라 ..........”
그런데 “그리하여 온 이스라엘이 구원을 얻으리라”는 구절은 크게 세 종류의 해석으로 분류되고 있다. 첫번째 해석은 이방인들이 하나님의 왕국에 그 충분한 수가 들어온 후에 이스라엘 국가가 전체적 단위로서 개종하게 될 것이라는 견해이다. 그리고 두번째 해석은 “그리하여 온 이스라엘이 구원을 얻으리라”는 모든 선택받은 자들의 구원을 가리키는 것으로 보는 견해이다. 여기서 “이스라엘”의 의미는 단지 육체적 유대인들에게 국한된 것이 아니라 이방인들을 포함한 전 인류를 통한 선택받은 자들을 의미한다. 세번째 해석은 유대인들 중 선택받은 자들의 전체 숫자가 인류 전 역사를 통해서 구원에 이르게 된다는 견해이다. 세번째 견해가 두번째 견해와 다른 점은 “이스라엘”의 의미를 유대인으로 국한한 점이다. 안토니오 후크마는 세번째 견해를 따르고 있다.
5. 재림의 본질에 관하여
후크마 교수는 전환난기 세대주의의 견해인 그리스도의 이중적 재림을 반박하는데 이 지면을 할애하고 있다. 후크마 교수는 다음과 같은 성경 주해를 통하여 그리스도의 이중적 재림을 반박하고 있다.
1) 그리스도의 다시 오심을 나타내기 위하여 신약이 사용하고 있는 단어들로부터 두 단계의 재림 이론을 세울 수 없다는 것이다.
그리스도의 재림을 나타내고 있는 신약의 용어들로서는 parousia(현존), apokalypsis(계시), epiphaneia(출현) 등이다. parousia는 데살로니가전서4:5절에서, apokalypsis는 고린도전서1:7절에서 epiphaneia는 디모데전서6:14절에서 사용되고 있다. 전환난기론자들에 의하면, 이것은 모두 그리스도의 재림의 두번째 단계를 가리킨다고 말한다. 그러나, 이상의 세 단어들은 그리스도의 재림이 두번에 걸쳐 일어난다고 하는 주장에 어떠한 근거도 제공해 주지 않고 있다.
2) 대환란을 묘사하고 있는 신약의 구절들은 교회가 환난이 시작되기 전에 땅에서부터 들림을 받을 것이라는 것을 가리키지 않는다.
마태복음24장에 기록된 대환란에 대한 예수님의 말씀에도 환난 전에 휴거가 있을 것이라는 흰트가 전혀 나타나 있지 않으며, 오히려 교회의 휴거는 대환난 이후에 오는 것으로 묘사하고 있다.
3) 휴거를 묘사하고 있는 중요한 신약 구절(데살4:16-17)도 전환난기 휴거를 가르치고 있지 않다는 것이다.
4) 그리스도의 재림은 그의 백성과 함께 오심과 그의 백성들을 위한 오심을 동시에 포함하고 있다는 것이다.(살전4:13-18)
5) 두 단계 재림설을 주장한 어떠한 학설도 대환란은 세상에 대한 하나님의 진노의 쏟아짐이 될 것이라는 가르침으로부터 추론되어질 수 없다는 것이다.
다시 말하면, 하나님의 진노로 쏟아지는 대환란으로부터 면하기 위하여 교회가 공중재림된다는, 이른바 이중재림 논리는 성경 어디에서도 지지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그리스도의 재림의 양식은 어떠한 것인가?
1) 그리스도의 오심은 인격적 오심이다.
재림하시는 예수님은 승천시 인격 그대로 가지고 오신다.(행 1:11)
2) 그리스도의 오심은 형태적 오심이다.
예수님의 재림은 육체적으로 오신다.(행1:11)
3) 그리스도의 오심은 가견적 오심이다.
모든 사람이 눈으로 볼 수 있도록 오신다.(계1:7)
4) 그리스도의 오심은 돌발적 오심이다.
성경은 그리스도의 재림에 앞서 여러가지 징조가 있을 것이지만, 주의 재림은 어디까지나 돌변적이요, 불시적인 것임을 가르쳐주고 있다.(살전 5:2-3, 계 3:3, 살후 5:2, 막 13:32-33))
5) 그리스도의 오심은 영광스러운 승리의 오심이다.
예수의 초림은 가난하고 겸비한 오심이었으나, 예수의 재림은 승리와 영광의 몸으로 오시는 것이다.(마24:30)
6. 육체의 부활에 관하여
육체의 부활은 성경의 종말론적 메시지의 중심을 이루고 있다. 그리스도 안에서 죽었던 자들이 중간기 상태 동안 잠정적 행복을 누리고 있긴 하지만, 그들의 이러한 행복은 그들의 육체가 죽은 자들 가운데서 일으킴을 받게 될 때에 비로소 완전해질 것이다. 그러므로 육체의 부활은 독특한 기독교 교리인 것이다. 후크마 교수는 신자들의 부활과 불신자들의 부활 사이에 천년 간의 시간적 공백이 있다고 하는 전천년주의의 견해에 대하여 반대 의견을 제시하고 있다.
1) 성경은 불신자의 부활과 신자의 부활이 동시에 일어난다고 가르친다는 사실이다.
죽은자들의 부활을 다루고 있는 유명한 구약의 구절들 중의 하나인 다니엘12:2절과 요한복음5:28-29은 신자와 불신자들 사이의 부활이 긴 시간적 간격으로 분리될 것이 아니라 함께 일어날 것을 언급하고 있다. 또한 후크마 교수는 역사적 형태든지 세대주의적 형태든지간에 모든 전천년론자들이 불신자들만의 부활이라고 주장하는 요한 계시록20:11-15의 말씀은 논리적으로 전혀 설득력이 없다고 주장한다. 계시록20:11-15절에 대한 그의 주해를 살펴보면, 12절에 기록된 “무론대소하고 그 보좌 앞에 서 있는 죽은 자들”이란 문장이 불신자들에게 묘사되고 있는 것이 아니라, 이것은 죽은 자들인 그 어떤 무리도 여기서 제외될 수 없다는 것이다. 또한 13절 “바다가 그 가운데 죽은 자들을 내어주었다”는 문장이 바다 속에는 오직 불신자들만 있는가라고 반문하고 있다. 또한 “사망과 음부도 그 가운데서 죽은 자들을 내어주고”란 문장에서도 죽은 자들의 영역인 음부는 불신자로서 죽은 자들만이 아닌, 모든 죽은 자를 포함하고 있다고 후크마 교수는 말한다.
2) 성경은 신자들이 “마지막”이라고 불리우는 그리스도 재림의 때에 일으킴을 받으리라고 가르친다는 것이다.(살전4:16; 빌3:20-21; 고전15:23)
후크마 교수는 “내 아버지의 뜻은 아들을 보고 믿는 자마다 영생을 얻는 이것이니 마지막 날에 내가 이를 다시 살리리라”(요6:40)는 말씀은 종말전 천년의 한 때를 어찌 ‘마지막 날’이라고 할 수 있겠느냐며 전천년주의자들의 견해인 재림전 전천년설에 대하여 반문하고 있다.
3) 데살로니가전서4:16과 고린도전서15:23-24에 근거하여 두 단계 부활을 주장하는 것은 결정적인 요소가 될 수 없다는 것이다.
후크마 교수는 여기서 바울이 불신자의 부활을 언급하고 있지 않고 있는 이유는 신자들의 부활이 원리상 불신자들의 부활과는 다르기 때문이라고 한다. 다시 말하면, 불신자들까지 취급해야 할 이유가 없다는 것이다. 그런데 여기서 바울이 불신자들에 관하여 언급하지 않는다고 해서 이것을 신자와 불신자 사이의 부활이 동시에 일어나지 않는다는 것으로 해석하는 것은 적절하지 못하다고 말한다. 이제 마지막으로 후크마 교수가 말하는 부활의 본질에 관하여 살펴보면, 신자에게 있어서나 불신자에게 있어서 육체의 부활은 영원한 것임을 설명하고 있다. 그것은 신자와 불신자 모두의 부활에 대해 말하고 있는 다니엘12:2에서 히브리어 olam(영원)이란 단어가 경건한 자들의 축복상태나 불경건한 자들의 불행한 상태를 동일하게 수식하고 있음을 근거로 한다. 또한 그리스도의 부활이 신자들의 미래적 부활에 대한 증표와 보증이라는 사실을 강조한다.그것은 고린도전서15:20절에 나타난 “첫 열매”란 단어와 골로새서1:18에 기록된 “먼저 나신 자”라는 단어를 통하여 논리적 근거를 제시하고 있다. 마지막으로 후크마 교수는 신자에게 있어서 미래에 있을 부활의 육체와 현재의 육체와의 관계를 고린도전서15장의 주해를 통하여 설명하고 있다. 여기서 주목할 만한 것은 미래에 있을 부활의 육체와 현재의 육체와의 연속성과 불연속성을 말하면서 불연속성의 특징인 ‘신령한’(pneumatikos, spiritual)에 대하여 주해하기를, ‘신령한’이란 비육체적, 비신체적인 의미를 갖고 있지 않음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전적으로 성령의 인도와 지배를 받고 있는 존재를 대변해 주는 용어라고 말하고 있다.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