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회갱신을 위한 예배관에 관한소고

교회갱신을 위한 예배관에 관한 소고/장 성 민 (총신대학교)

 

I. 머리말

 

그 동안 교회갱신과 관련하여 자주 회자되었던 주제가 바로 예배일 것이다. 이처럼 예배의 문제가 거듭 논의되는 이유로 첫째는 교회의 본질은 예배에 있고 교회갱신은 곧 예배갱신과 직결된다고 보기 때문이고, 둘째는 오늘날 거대한 파도처럼 밀려오는 급변하는 문화의 흐름이 전통적 교회와 예배에 대한 변화를 요구하기 때문이며, 셋째는 오늘날 교인들이 예배의 본질에서 벗어나서 형식주의에 매이든지, 아니면 하나님의 백성으로서 마땅히 드려야할 예배의 의무를 저버리는 현상 등에 대한 목회자들의 고민 때문인 것으로 보인다. 실제로 한미준과 한국갤럽이 공동 조사한 바에 따르면, 교인들이 매주일 대예배를 드리는 비율은 65.2%이며, 교인들의 출석률이 88.3%라는 것을 감안하면 매주일 출석자는 실제 교인의 57%정도에 불과하다. 이 수치는 한국교인들이 예배에 대한 중요성을 절감하고 있지 못하다는 것을 반영할 뿐만이 아니라, 교회가 교인들의 예배에 대한 기대감을 채워주지 못하고 있기 때문이라고 분석된다. 이런 현상은 교인수의 감소로 이어질 수밖에 없다. 위의 조사에 따르면 다른 종교에 비해서 개신교가 가장 높은 이탈율(46.1%)을 보이고 있다. 이것은 교회의 자기역할에 대한 검증과 비판이 요구되고 있는 부분이다.

사실 그 동안 급성장을 자랑하던 한국교회는 성장이 정체된 채 급격한 둔화 내지 감소현상을 보인지 이미 오래다. 그 대표적 원인으로 하나는 교회의 세속화이며, 또 하나는 급변하는 문화적 변화에 대한 교회의 미온적인 대처자세를 꼽을 수 있을 것이다. 즉 교회의 세속화는 본질적인 요소의 상실을, 문화의 문제는 이원론적 태도를 의미한다. 그런데 이것은 예배의 문제와 직결된다. 예배가 세속적 문화에 의해 지배되어 그 본질을 상실하는 경우와 하나님의 주권아래 자연과 은총의 통일성을 추구하지 못하고 교회 안과 밖을 이원론적으로 구별함으로써 형식을 문화적 상황에 맞게 개혁하지 못하고 의식주의에 매여 예배회복에 장애를 가져오는 경우이다.

부흥주의(revivalism)와 부흥은 구별되어야 한다. 하지만 위기감을 느낀 교회들은 예배자체보다는 어떻게 하면 교인들로 하여금 더 많이 예배에 참석하게 할 수 있는가에 관심을 기울이게 되고, 그 일환으로 교회 안에 다양한 방법과 프로그램들을 도입하는데 힘을 쏟고 있는 실정이다. 이와 같은 부흥주의는 진정한 부흥은 아니다. 예배의 부흥은 그 본질로 돌아가는데 있다. 그리고 그 본질을 벗어나지 않는 범위 내에서 매력적인 예배가 되도록 문화적 형식에 대한 개혁을 시도하는 것이다. 이것은 현대문화의 틀 속에 예배의 내용을 어떻게 담을 것인가에 대한 진지한 노력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이렇게 전통과 현대를 불연속으로 보지 않고 전통이 갖는 예배의 본질적 요소와 현대적 문화가 주는 역동성을 ‘통합적’ 관점에서 바라보는 것이 본고의 방향이다. 전통에서 벗어나지 못할 때 의식주의에 빠져 예배가 화석화될 수 있고, 현대에만 집착하면 예배의 본질적 생명력을 잃어버리는 우를 범할 수 있다고 보기 때문이다.

 

II. 예배의 본질적 요소

 

1. 예배의 원리와 근거

 

교회의 존재의의는 예배에 있다고 말할 수 있다. 하나님이 그의 백성들로부터 예배를 통해서 영광을 받으시는 것은 마땅한 것이기 때문이다(시147:1, 시22:23, 시29:1, 시96:7, 계4:11, 계5:12). 존 프레임(John Frame)에 의하면 “예배는 모든 것들의 목표이며, 그것은 역사의 목적이고 전 기독교 이야기의 목표가 된다.” 그래서 교회가 지향하는 목표도 결국 예배에 있고,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 앞에 합당하고 온전한 예배가 드려질 때 교회의 갱신과 부흥은 가능하다. 종교개혁도 이런 의미에서 비성경적 예배에 대한 비판과 참된 예배의 회복이었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오늘날 교회의 위기를 예배와 관련짓는 이유도 바로 여기에 있다. 예배갱신이 없이는 교회갱신은 불가능하다고 판단하기 때문이다.

예배를 문자적으로 정의하기는 쉽지 않다. 성경은 예배를 정의하지 않고 단지 묘사하고 있기 때문이다. 신약 가운데 예배정신을 가장 함축적으로 제시하고 있는 것은 “하나님은 영이시니 예배하는 자가 신령과 진정으로 예배할지니라”(요4:24)라는 말씀이다. 예수 그리스도는 예배가 ‘영과 진리 가운데’(ἐγ πνεύματι καί ἀληθεία) 드려져야 할 것을 말씀한다. 이것이 예배의 원리요, 본질이다. 여기서 신령과 진정은 예배자의 정성 된 행동이나 태도를 의미하는 것이 아니다. 그렇게 되면 예배가 인간 중심적 예배가 될 위험성이 있다. 하나님이 영이시므로 예배자도 마땅히 영적으로 예배를 드리되, 마음과 뜻과 정성을 다해야 하는 것은 당연하지만 예배가 인간의 어떤 공로나 정성이 아니라는 것을 분명히 할 필요가 있다. 죄로 타락한 인간의 마음으로 하나님에게 나아가는 것 자체가 존재론적으로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예배는 하나님의 은혜 안에서 오직 믿음으로 드려질 뿐이다. 한국 교회 성도들의 의식 속에는 아직도 예배와 관련된 이런 사마니즘적인 요소가 적지 않게 자리잡고 있다. 예배에 대한 이런 그릇된 생각은 반드시 교정되어야 한다. 하나님을 경배하려면 성령(요 14:17, 15:26, 16:13)과 진리(요 1:17, 14:6) 안에서 하나님께 나아가야 한다는 것이다. 다시 말해 신령과 진정의 예배란 예배하는 자가 진리이신 그리스도와 또한 그 안에 있는 복음의 진리 및 새롭게 하시는 성령을 의존하여 예배해야 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또한 이 구절은 예배구조가 성부, 성자, 성령의 삼위일체 되신 하나님에게 전적으로 의존되어 있다는 것과, 그리고 예배는 하나님의 구원계획과 구원계시에 근거해 있다는 것을 보여준다. 사도 바울도 에베소서 1:1-14에서 하나님의 주권적 구원사역이 삼위일체의 구도에 근거해 있으며, 그 최종 목적이 예배에 있다는 것을 말한다. 이렇게 예배는 삼위일체의 구도를 떠나서는 생각할 수 없다. 요컨대 하나님은 경배의 대상이시며 예배의 주인이시고, 예수 그리스도는 하나님에게 나아가 경배를 드리게 하는 중보자이시며, 성령은 예배에 하나님의 임재를 나타내시고 보혜사로서 그리스도를 통해 행하신 구원의 은총을 깨닫도록 도우신다. 이렇듯 삼위일체이신 하나님에 대한 인식은 예수 그리스도와 성령에 의존된 예배라는 것을 의미한다. 히브리서 9:14에서도 이 사실을 증거한다. “하물며 영원하신 성령으로 말미암아 흠 없는 자기를 하나님께 드린 그리스도의 피가 어찌 너희 양심으로 죽은 행실에서 깨끗하게 하고 살아 계신 하나님을 섬기게 못하겠느뇨.” 예수 그리스도는 하나님에게 나아가는 자의 중보자가, 성령은 그 일의 보증자가 되신다. 따라서 예배에는 이 두 가지 본질적인 요소가 강조되어야 한다.

첫째, 예배의 중심은 예수 그리스도이다. 존 오웬(John Owen)은 다음과 같이 말한다. “복음이 계시하고 규정하는 바는, 성도가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에 대한 놀랍고 영광스런 영적 예배를 누리는 것은 그리스도의 보혈에 의한 우리자신들 가운데 있는 하나님과의 화목의 두드러진 효과이며 열매이다.” 예수 그리스도를 통한 화목케 하심이 없이는 예배자체가 불가능하다는 것이다. 그래서 개혁교회 예배의 근거는 예수 그리스도의 의롭다하심과 죄사함의 복음이다. 십자가의 은혜를 깨닫는 자만이 예배의 영광을 맛볼 수 있기 때문이다. 십자가의 죽으심과 부활에 대한 영적 경험이 따를 때만이 예배는 감격적 예배의 현장이 될 수 있다. 이것이 차갑고 형식적 예배를 역동적인 예배로 전환하는 본질적 요소이다. 오늘날 교회 안에는 예배를 축제의 분위기로 만들어야 한다는 주장이 많다. 물론 예배가 축제가 되어야 하지만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가 약화된 축제적 분위기는 인간 중심적이고 천박한 예배가 될 수밖에 없다. 초대교회 당시 갑바도기아의 지하동굴 속에서 드려졌던 예배는 오늘날 교회의 예배에서 말하는 축제의 분위기와는 달리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통한 기쁨이 있는 축제의 예배였음에 틀림이 없다(벧전 1:8). 축제적 예배는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통한 하나님의 은혜가 예배자의 마음에 들어오면서 이루어진다. 오늘도 교회의 힘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능력을 회복하는데 있다(롬 1:16, 고전 1:18). 그리고 그 십자가의 은혜가 예배자의 마음을 지배할 때 예배의 회복과 부흥은 가능할 것이다.

이렇게 예배의 중심이 예수 그리스도인 까닭에 초대교회 안에서 행해졌던 예배에는 그리스도의 몸과 피로 상징되는 성찬이 포함되어 있었다. 그것은 예수 그리스도의 죽으심과 부활이 교회의 존재 근거요, 그리스도의 재림 때까지 증거하는 선포적 행위요 명령이었기 때문이다(고전 11:17-26). 오늘도 성찬의 중요성은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는다. 성찬을 통해 예수 그리스도의 희생의 공덕과 효과가 성령의 능력에 의해서 신자들에게 임하며 실제로 전달되기 때문이다. 따라서 설교가 중요하지만 성찬 또한 예배에 중요한 요소이다. 그런 의미에서 말씀과 성례를 분리해서 생각하지 말고 하나로 이해할 필요가 있다. 칼빈은 다음과 같이 말한다. “성례전을 거룩하게 하는 말씀은 듣는 사람을 교화시키는 살아있는 설교로서 그들의 정신에 들어오며 마음에 각인되고 그것이 약속하는 바를 성취함으로써 그 효과를 드러내는 것으로 이해해야 한다.” 한국선교 초기부터 지금까지 한국교회 예배 가운데 성찬에 대한 위치가 약화되어 있는 것은 반드시 회복될 필요가 있다. 칼빈은 성찬은 자주 기념되어야 할 것을 말하면서 1년에 한번 만 행하는 것은 ‘악마가 발명한 것’이라고까지 말한다. 그는 최소한 1주일에 한번은 시행되어야 할 것을 역설한다. 물론 자주 시행되는 성찬의 습관적 횟수보다 의미가 더 중요할 수 있다. 무엇보다 칼빈이 예배에 성찬의 중요성을 그토록 강조한 이유는 그것이 효과적 은혜의 수단이기 때문일 뿐만이 아니라 그리스도를 충만히 계시함으로써 예배의 근거와 중심이 오직 예수 그리스도와 그의 은혜임을 보이고자 했기 때문이다.

둘째, 예배의 참 인도자는 성령이시다. 한마디로 하나님은 영이시기 때문에 예배는 성령의 역사가 없이는 불가능하다. 예배 안에 하나님과의 영적 교통은 믿는 자의 마음속에 나타나는 성령의 역사이다. 따라서 거룩한 영이신 하나님이 받으시는 예배는 반드시 성령이 주도하는 예배가 되어야 한다. 예배의 어떤 형식의 변화도 예배의 본질인 성령의 사역을 대신할 수 없다. 예배 중에 행해지는 성경봉독, 설교, 기도, 성례, 찬양, 헌금, 교제의 표현들 등 이런 예배의 모든 요소들을 살아나게 하는 능력의 원천은 오직 예배 중에 임하시는 성령이다. 하지만 개혁교회가 지향해 온 예배전통을 따르는 것이 마치 문화적 상황을 도외시한 예배로 간주하여 최근 일부 교회 안에 나타나는 탈 신학적, 탈 형식적 무분별한 예배 형태는 마땅히 비판받을 수밖에 없다. 오늘날 교회의 문제는 전통예배 가운데 있었던 성령을 통한 생명력과 거룩한 능력을 보지 못하고 단지 예배형식만을 바꾸고자 하는데 있다. 이것은 마치 더러운 얼굴과 몸에 비싸고 화려한 옷을 걸치는 것과 같다. 예배갱신이란 한마디로 성령의 주도하에 드려지는 예배이다. 교회는 예배하기 위하여 존재하는 기관이라고 할 때 교회와 세상집단과의 차이는 이러한 영적 예배에 있다고 말할 수 있다. 예배 가운데 함께 하시는 성령은 죄를 깨닫게 하고 회심케 하고 위로를 얻게 하며 전인격이 성화 되도록 이끈다. 이것을 가능하게 하는 것은 교회의 장식이나, 시설, 성가대의 음악적 수준, 예배순서, 설교자의 지식 등이 아니다. 예배의 거룩함과 영광은 오직 성령의 역사로만 가능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많은 교회들은 부흥의 장애물로 어떤 외적, 문화적 조건을 거론하기도 한다. 물론 이런 외형적인 것들이 불필요하다는 것은 아니다. 그것들은 분명히 부흥에 도움이 될 수 있고, 이 요소들을 충분히 고려하지 않을 때 부흥에 장애가 될 수 있는 것도 부인할 수는 없다. 그래서 교회는 최대한 분위기를 그 시대 문화에 맞게 아름답게 꾸며야 한다. 하지만 참된 부흥은 외적, 문화적 상황이 충족되었다고 일어나는 것은 아니다. 세상사람들이 교회에 나오는 이유는 ‘세상적인 것’을 보기 위한 것이 아니다. 그들에게 필요한 것은 세상이 줄 수 없는 ‘영적 신비’이다. 오늘날 서구의 교회들이 건물이나 시설의 부족 때문에 쇠퇴한 것이 결코 아니다. 과거에 그 화려했던 부흥은 어디로 사라져버렸는가? 그 대답은 간단하다. 교회가 형식만 붙들고 교회의 본질을 외면해 버린, 즉 성령의 임재가 없는 예배를 지속시켰기 때문이다.

그러나 오늘날 교회의 문제는 예배의 본질이 성령의 사역이라는 것을 잘 알고는 있지만 그것을 예배 가운데 인정하고 기대하고 열망하는데 있어서 부족하다는데 있다. 윌리암 스프레이그(William B. Sprague)가 말한 것처럼 지금도 성령을 온전히 의지하고 하나님 앞에 진정으로 겸손하며 자신의 무능을 깊이 느끼는 곳마다, 그리고 모든 영광을 하나님께 돌리고자 하는 마음을 가진 곳마다 참된 부흥을 경험하는 것을 보게 된다. 예배갱신은 단순한 문화적 환경의 변화로만 되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단지 동기부여는 될 수 있을지 몰라도 예배자체를 새롭게 하지는 못한다. 지금 유럽의 교회들이 거의 쇠퇴해 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성령의 역사를 예배 가운데 실현하고자 하는 강한 열망을 가진 교회들은 부흥을 경험하고 있는 것이 그 예가 될 수 있을 것이다.

2. 성령과 설교

 

예배 중에 함께 하시는 성령의 사역은 설교에서 절정에 이른다. 성령은 스스로 역사하지만 (요일 2:27), 말씀을 전하는 설교자를 통해도 역사한다(행 10:43-44). 성령의 감동은 다양한 상황 속에서도 가능하지만, 특히 말씀과 더불어 영혼을 변화시키기 때문에 예배의 요소 가운데 설교의 중요성이 대두될 수밖에 없다. 이것이 종교개혁 이후로 개혁교회가 견지해오는 입장이다. 의전(儀典)에 모든 것을 집중함으로써 말씀의 진리에서 벗어났던 중세교회에 대한 강한 거부감 때문에 종교개혁자들이 말씀의 중요성을 상대적으로 부각시킨 면이 없는 것은 아니지만, 이것이 예배에 있어서 말씀이 덜 중요하다는 것을 의미하지 않는다. 개혁교회의 특성은 강단 중심적 예배에 있다. 피터 루이스(Peter Lewis)에 의하면, 청교도목사들은 하나님의 말씀을 증거하는 것보다 더 중한 목사의 직무가 있다는 것을 상상할 수 없었다고 한다. 시대의 변화를 말하는 사람들이 있을지 모른다. 하지만 시대적 상황이 바뀌고 오늘날처럼 급변하는 문화의 한 복판에 있는 교회라고 하더라도 설교의 중요성이 약화된 것은 아니다. 그런데 현대 개혁주의 예배신학에서 말하는 말씀중심의 예배라는 것이 전통적인 설교중심의 예배를 말하는 것이 아니라 예배자체가 말씀에 근거해야 한다는 의미로 이해되기도 한다. 물론 예배전체가 말씀에 근거해야 하는 것은 사실이지만 예배에서 강단의 중요성이 사라졌다는 것은 아니다. 어느 시대나 막론하고 예배 가운데 살아있는 하나님의 말씀은 들려져야 한다. 인간의 실존적 특성은 시대를 뛰어넘기 때문이다. 파스칼이 말한 것처럼 인간은 과거나 지금이나 세상의 어떤 것으로도 채워질 수 없는 영적 갈망을 실존적으로 갖고 있다. 그 갈망은 예배를 통해서, 구체적으로는 예배 중에 전해지는 진리의 말씀을 통해서 채워질 수 있다. 오늘도 대부분 능력 있는 말씀이 선포되는 교회에 사람들이 모이는 것도 바로 이 때문이다. 단순히 듣기 좋은 설교를 따라 교인들이 철새처럼 수평이동을 한다고 비판하기도 하지만, 그만큼 사람들에게 영적인 갈증이 크다는 것을 반증하는 것이기도 하다. 그래서 목회자의 가장 중요한 직무는 능력 있는 말씀을 전함으로써 성도들로 하여금 그 말씀을 듣고 영적인 소생함을 얻도록 하는데 있다. 바꿔 말해 설교와 가르침에 모든 것을 집중하는 것이 목회자의 직무라고 할 수 있다. 그래서 가능하면 목회자는 말씀에 집중할 수 있도록 그 이외의 다른 요소들을 최소화할 필요가 있다. 마틴 로이드 존스(D. Martyn Lloyd-Jones)는 면밀한 설교준비와 성령의 감동은 서로 상충되지 않고 보완되는 것이므로 설교자의 편에서는 엘리야가 갈멜산에서 단을 쌓은 후 송아지의 각을 떠서 그것을 나무 위에 올려놓고 불이 임하기를 기다린 것처럼 최선을 다해 설교를 준비해야 할 것을 역설한다. 성령 충만했던 초대교회 사도들도 말씀과 기도에 전무하고자 집사들을 선택하여 그 외의 일들을 위임하고자 했던 것이 좋은 예가 될 수 있을 것이다(행 6:1-6). 예배는 창조주 하나님의 존재를 인정하고, 그에게 최고의 가치와 합당한 경배를 드리는 것이지만 또한 예배자는 은혜 베푸시는 하나님을 만난다. 즉 예배는 은혜의 수단이다. 그리고 하나님과의 만남은 예배에서 행해지는 설교 가운데 이루어지는 경우가 많다. 이것이 예배의 신비이다. 제임스 패커(James I. Packer)는 “교회에서의 설교는 절대적으로 성령의 사역이므로 은혜의 절대적 수단이다”라고까지 말한다. 참된 예배는 성령의 역사를 통해 영혼을 살아나게 하고, 죄를 깨닫고 회개하게 하며 회복과 치유를 경험하게 하게 한다. 이것이 예배의 부흥이다. 그래서 예배는 세미나나 교육과 구별된다. 그래서 목사는 예배 인도자로서 성도들로 하여금 하나님을 만날 수 있도록 도와야 한다. 다만 설교가 모든 예배 때마다 모든 예배자들에게 동일하게 감동을 주는 것은 아니다. 은혜는 하나님의 뜻과 때에 따라 베푸시는 주권적 역사이기 때문이다. 이 사실을 인정해야만 설교자는 자신의 직무에서 자유로울 수 있다. 하지만 설교자는 예배자들로 하여금 은혜를 맛볼 수 있도록 최선의 노력을 다해야 한다.

이런 맥락에서 볼 때 예배의 실패 원인은 강단의 약화에 있다고 할 수 있다. 물론 설교중심의 예배가 문제점이 전혀 없는 것은 아니다. 설교가 단순히 교육적이거나 윤리적 설교로 나갈 때 예배의 근본적인 목적에서 벗나날 가능성이 있다. 더구나 예배자들이 설교가 예배의 전부인 것처럼 생각함으로써 그것이 설교자와 예배자들의 부담으로 작용하여 참된 예배로 이어지지 못할 수도 있다. 이런 의미에서는 예배에 대한 의식의 전환이 반드시 필요하다. 하지만 대부분 부흥은 말씀을 통한 예배의 감격을 통해서 온다. 문제는 설교가 성령의 역사에 얼마만큼 의존되어 있느냐에 있다. 로이드 존스가 말했듯이 어제나 오늘이나 마찬가지로 하나님과 사람은 변하지 않았기 때문에 참된 설교가 전해질 때 사람들은 몰려와서 말씀에 귀를 기울일 것이다. 성령의 역사로 말미암아 설교가 살아있으면 하나님의 임재를 경험하게 되고, 하나님의 임재가 있는 곳에 부흥은 반드시 일어나게 된다는 것이다. 오늘날 문화적 환경이 아무리 변했다고 하더라도 교회와 예배 문제의 책임은 설교에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설교자는 하나님과 그리스도의 대변자로서, 선포되는 말씀의 능력이 있는 곳에는 언제나 영적 변화를 가져왔기 때문이다. 그래서 설교자에게 필요한 것은 사람들의 영혼에 침투하여 그 영혼을 깨뜨리고 낮추고 새롭게 만드는 능력이다. 이 능력은 사람이 아니라 성령으로부터 나온다. 박윤선은 다음과 같이 말한다. “뼈 속에 말씀을 전할 불이 없거나 영혼을 구원할 불이 없이는 목사가 되지 말아야 한다. 그 귀한 일을 사명감 없이 한다면 평생 헛수고를 하게 된다.” 말씀증거를 통하여 영혼을 살리고자 하는 성령이 주시는 열정에서 목사의 소명을 찾을 수 있다는 것이다. 설교자가 설교를 만드는 것이기 때문이다. 모든 것은 설교자의 영성에 달려있으므로 설교자는 성령을 통해서 영혼을 구원하기 위하여 자신을 불태우는 열정과 자기 부정의 믿음 속에 자신을 던져야 한다.

3. 삶으로서의 예배

예배는 좁은 의미의 공적인 예배와 넓은 의미에서 삶의 예배로 나눌 수 있다. 이 둘은 서로 분리되지 않는다. 조지 스윈녹(George Swinnock)은 다음과 같이 말한다. “경건은 하나님의 계시된 뜻을 따라 마음과 삶을 다해 하나님을 예배하는 것이다. 경건이라는 말을 설명함에 있어서 나는 네 가지를 주목하고자 한다. 첫째는 행동이 곧 예배라는 사실과, 둘째는 이 예배의 대상이 하나님이시라는 사실이고, 셋째는 예배의 범위가 마음과 삶 전체라는 사실이며, 넷째는 예배가 하나님의 계시된 뜻을 따르는 것이어야 한다는 것이다.” 바울은 로마서에서 구원의 교리를 설명한 후 구원받은 자의 삶을 예배와 관련지어 말씀한다. 즉 우리 몸을 하나님께 산 제사로 드리는 예배가 영적 예배가 된다는 것이다(롬 12:1). 구약의 하나님은 예배 가운데 의식을 명령하였지만 형식적 예배를 정죄하신다(사 1:10-17, 미 6:6-8). 외형적으로 아무리 구색을 갖춘 예배라고 하더라도 순종의 삶이 결여된 자의 예배는 하나님 앞에 합당하지 않다는 것이다. 그래서 다윗은 시편 24:3-4에서 “여호와의 산에 오를 자 누구며 그 거룩한 곳에 설 자가 누군고 곧 손이 깨끗하며 마음이 청결하며 뜻을 허탄한 데 두지 아니하며 거짓 맹세치 아니하는 자로다”라고 고백한다. 하나님은 공적인 예배를 원하지만 예배자의 삶을 또한 비중 있게 보신다. 그런 의미에서 성도의 삶 전체가 예배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이렇듯 공적인 예배와 예배자의 삶은 상호 관련을 맺고 있다. 예배를 수직적 예배와 수평적 예배로 구분할 때 전자는 후자의 전제가 있어야 가능하다(마 5:23-24, 빌 4:18, 약 1:27). 즉 개인의 삶이 전제되지 않는 예배는 살아있는 예배가 아니며, 참된 예배가 될 수 없다. 종교개혁자들이 예배 가운데 참회를 강조한 것도 바로 그런 이유 때문이다. 그런가 하면 성령의 임재가 있는 참된 예배는 예배자의 마음을 변화시킬 뿐만 아니라 예배자의 삶을 바꾸어 성화의 자리로 인도한다. 즉 공적인 예배가 회복되면 삶의 예배가 회복된다. 오순절 성령강림은 예배공동체를 만들었을 뿐만이 아니라 삶의 변화를 가져왔다(행 2:43~47). 하나님의 임재를 예배 가운데 경험한 자들은 삶으로 예배를 드리고자 한다. 따라서 순종의 삶은 공적인 예배의 연장이다. 하나님 앞에 아벨의 제사가 열납된 이유는 제물 자체보다도 그가 드린 제사가 ‘믿음의 행위’, 즉 신앙적 삶의 연장에서 드려진 제사였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임재와 성품을 깨달으면서 오는 변화된 삶의 능력을 알지 못하고 예배의 방법, 기술, 형식만을 추구한다면 그 예배는 공허한 예배가 될 수밖에 없다. 공적인 예배의 경건성은 개인적인 삶의 경건과 밀접한 관련을 맺고 있기 때문이다. 랑게(E. Lange)는 예배의 본질을 공적인 예배의 수준을 넘어서 그리스도인의 삶과 관련된 것으로 말한다. 즉 예배의 기능이 예배자로 하여금 삶의 실제를 올바르게 파악하도록 한다는 것이다. 예배 가운데 임한 성령은 예배자 자신을 순종의 사람으로 변화시키고자 한다. 그래서 예배 가운데 영적 자유함을 경험한 자들은 주안에서 강한 영적 군사가 되어 죄악으로 가득 찬 세상 가운데 거룩한 하나님의 일꾼으로 쓰임 받게 된다. 영적 대각성 시대에 일어났던 부흥이 사회변혁을 가져온 것이 바로 그 실례이다. 따라서 오늘날 한국교회의 예배회복은 단순히 교회의 수적인 부흥이나 교회 안에서의 개인적 경건의 차원에 머물지 말고, 썩어져 가는 이 세상에 빛과 소금이 될 수 있는 참 부흥으로 이어질 수 있어야 한다. 목회의 비전도 여기에 맞출 필요가 있다. 교회 안에서 시행하는 제자훈련, 성경공부, 큐티, 전도, 기도 등 어떤 프로그램이든지 성도들의 삶을 통해서 참 예배의 부흥이 일어나도록 하는데 그 목표를 두어야 할 것이다.

II. 예배와 문화수용의 문제

 

1. 예배와 문화양식

예배는 문화의 영향을 받지 않을 수 없다. 즉 교회는 그 시대의 문화적 요소를 예배에서 배제할 수 없다. 예배의 현대화는 필연적이다. 이런 의미에서 전통적인 예배와 현대적인 예배의 구별은 문화의 차이라고 말할 수 있다. 그래서 교회가 오히려 적극적으로 예배 가운데 현대문화를 주도하도록 하는 것이 바람직하다고 말하는 사람들도 있다. 예배는 시대에 따라 문화의 옷을 입는다. 옷을 갈아입듯이 예배의 형식은 그래서 얼마든지 바뀔 수 있다. 형식은 어디까지나 형식일 뿐이기 때문이다. 예배의 형식을 바꾼다는 것은 분위기의 변화를 의미한다. 현대교회가 예배의 분위기까지 전통적인 것을 따라야 할 필요가 없는 것은 당연한 것이다. 그렇다면 왜 본질적이 아닌 형식의 문제 때문에 논쟁이 생기는가? 여기에서 우선 문화 신학적 입장을 검토해볼 필요가 있을 것이다.

리차드 니버(Richard Niebuhr)가 분류한 문화유형 가운데 교회에서 환영받을 가능성이 가장 큰 것이 복음과 문화를 종합하는 방식이다. 이 입장은 세상 문화가 교회의 지도하에 들어오기만 하면 기독교적이 될 수 있다는 입장이다. 이것은 마치 술집에서 사용하던 악기라도 교회로 들어오기만 하면 거룩한 성구가 될 수 있다는 논리이다. 이런 종합의 방식은 어느 정도 문화의 자율성을 인정함으로써, 결과적으로 문화를 신앙의 명목아래 수용하는 것이다. 그러면 이와 같은 입장은 어떤 문제를 담고 있는가?

첫째는 실용주의적 태도이다. 그 동안 교회가 대중문화를 비판하면서도 실제로는 소위 고급문화보다는 대중문화에 더 가까이 하고 수용하는 태도를 보인 것이 사실이다. 이런 입장은 단순히 대중 예술에 기독교적인 가사나 상징을 가미하여 전도나 예배에 이용하면 족하다고 본다. 물론 대중을 상대로 복음을 전해야 하기 때문에 그렇게 한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그것은 다분히 실용주의적 사고에 근거해 있다. 예술의 질이나 방식이야 어떠하든지 결과적으로 복음이 전해지고 소위 감동적 예배만 구현할 수 있다면 대중문화를 무조건 채용할 수 있다는 것이다. 하지만 이런 실용주의는 기독교의 가르침과 근본적으로 조화될 수 없는 요소를 지니고 있다. 물론 기독교진리에는 현실적이고 실천적이고 실용적인 측면이 다분히 있지만, 성경이 가르치는 진리는 실용적인 표준에 따라서 좌우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더구나 현재 실용적이라고 믿으나 그렇다고 하여 후에도 그것이 실용적으로 나타난다는 보장은 없다. 반대로 지금의 비실용적인 것이 후에 실용적인 것으로 나타나는 경우도 얼마든지 있다. 기독교신앙은 현재 유익한 것만을 추구하지 않는다. 실용적인 선택을 무조건 부정하는 것은 아니지만 기독교적 관점은 실용주의와는 근본적으로 다른 정신에 입각해 있다는 것을 잊어서는 안 된다. 그렇지 않으면 세속 문화를 무분별하게 채용하여 교회의 본질을 흐리게 할 우를 범할 가능성이 있기 때문이다.

둘째는 문화의 오락성이다. 대중문화의 특성은 사람들에게 흥미를 주는데 초점을 맞추고 있다. 그런데 흥미위주의 오락적 문화는 인격적, 교육적, 심미적 가치를 결여할 가능성이 매우 크다. 즉 이런 감각 중심적 문화(sensate culture)는 이성적, 인격적 감동보다는 자극적이고, 본능적이고, 피상적인 것을 추구하는 으로 기울고 있다. 이런 오락적 문화의 특성이 예배에도 여과 없이 그대로 접목된다면 문제가 될 수 있을 것이다. 실제로 교회 안에도 이런 재미의 문화가 은근히 자리잡고 있다. 물론 예배가 엄숙해야 된다는 뜻은 아니다. 분명히 엄숙주의는 배격되어야 한다. 예배는 하나님에게 찬송과 영광을 돌리는 것이지만 예배자 자신에게도 즐거움을 준다. 예배는 기쁨이 있는 축제가 되어야 한다. 특히 즐거운 예배분위기는 선교적 차원에서 반드시 필요하다. 좋은 분위기는 새로운 사람들로 하여금 교회를 친숙하게 만드는데 요긴할 수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참 예배의 즐거움은 문화자체의 오락성과는 그 성질이 다르다. 세속적 오락은 감각적 즐거움자체를 끊임없이 추구하도록 되어있다. 즉 즐거움이 결과가 아니라 목적이 되어있다는 것이다. 예배의 즐거움이 문화적 조건들과 무관한 것은 아니지만 그것들과는 분명히 구별된다. 초대교회 성도들의 신앙적 삶이 ‘기쁨과 순전한 마음으로 음식을 먹고’(행2:46-47), ‘큰 기쁨으로 늘 성전에 있어 하나님을 찬송하는 것’(눅 24:52-53)이었다고 한다면, 그것은 외부로부터 주어지는 기쁨이 아니라 성령을 통한 내적 기쁨이다. 따라서 예배분위기는 엄숙함이 아니라 기쁨을 느끼고 또한 표현할 수 있는 것이어야 하지만, 결국 성령에 의해서 주도되지 않는 분위기 조성은 참된 기쁨의 동인이 될 수 없다. 영적 희열은 예수 그리스도의 죽으심과 부활에 대한 예배자의 신앙에 의존되어 있기 때문이다. 참 예배는 성령 안에서 복음을 통해서 예배자에게 신비로운 기쁨을 제공한다. 예배의 부흥은 세상이 줄 수 없는 이런 ‘신비로움’을 경험할 때 오는 것이다.

문화수용론자들은 예배도 그 시대의 문화라는 옷을 입을 수밖에 없으며, 따라서 본질만 훼손되지 않으면 어떤 문화의 옷도 입을 수 있다는 정당성을 내세우고 있다. 하지만 옷도 아무렇게나 되는대로 입지 않는 것처럼 문화의 수용도 선별, 비판, 해석되는 가운데 이루어져야 한다. 특히 예배는 인간보다는 그 대상이 거룩하신 하나님이다. 아무리 예배가 문화의 형식을 갖고 있다고 하더라도 형식도 예배자의 신앙고백과 무관한 것은 아니다. 예배에 문화의 오락성이 그대로 접목되어 거룩함을 해치게 된다면 그것은 분명 잘못된 선택일 수밖에 없을 것이다.

셋째는 세속문화 속에 내재되어 있는 죄성이다. 아브라함 카이퍼(Abraham Kuyper)는 일반은총이 특별은총과 밀접한 관계를 맺고 있지만 일반은총을 더 강조한 측면이 강하다. 그래서 그는 일반은총의 중립지대를 설정하여, 결국 문화적 낙관주의로 기울어질 수밖에 없었다. 반틸(Henry R. Van Til)이 이와 같은 일반은총론을 비판하는 이유는 예수 그리스도의 구원 역사와 관계된 특별은총의 약화 때문이다. 요컨대 일반은총이 문화활동을 가능케 한다고 하더라도 세상문화는 타락한 인간이 인간을 위해 만든 문화임에 틀림없다. 예를 들어 죄로 말미암아 쫓겨난 가인의 자손인 유발은 수금과 퉁소 부는 자의 조상이 된다. 이것은 어디까지나 하나님을 찬양하기 위한 것이 아니라 자신을 즐기기 위한 것이다. 물론 악기라는 도구 하나만을 떼어놓고 볼 경우에는 문화의 중립적 성격이 들어있다. 다윗이 동일한 악기들을 사용해서 하나님을 찬양한 것이 그 예가 될 수 있다. 하지만 세속문화 속에는 타락한 인간의 죄성이 그대로 녹아있다. “이러므로 한 사람으로 말미암아 죄가 세상에 들어오고 죄로 말미암아 사망이 왔나니 이와 같이 모든 사람이 죄를 지었으므로 사망이 모든 사람에게 이르렀느니라”(롬 5:12) 라는 말씀은 예를 들어 죄가 음악가는 물론 음악자체 안에도 들어왔다는 것을 보여준다. 사람들이 판단하기에 예술적 가치가 높은 음악이라고 하더라도 죄의 오염으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다. 팝 그룹 주다스 프리스트(Judas Priest)의 노래들처럼 예술성이 뛰어나고 대중에게 인정받는 작품이라고 하더라도 신학적 안목으로 볼 때 도저히 수용하기 어려운 것들이 많다. 대중음악 속에 은근히 들어와서 자리잡고 있는 뉴에이지 음악도 마찬가지다. 오늘날 교회의 젊은이들이 세속문화의 실상을 올바로 파악하지 못하고 그것들을 무조건적으로 따라가는 경우가 많다. 당연히 이런 죄로 오염된 문화현상이 교회 안에도 분명히 영향을 줄 수 있기 때문에 대중문화 수용에 주의가 필요하다는 것이다.

이처럼 대중문화에 대해서 비판적 안목을 가져야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모든 세속문화를 엄격한 신학적 잣대를 가지고 절대적 평가를 내려서 제거한다면 그리스도인 혹은 교회로서 어떤 문화활동이나 작품도 수용하기는 어려울 것이다. 더욱이 아무리 훌륭한 종교적 예술이라고 하더라도 그것이 신학적 교리를 다 표현하고 있는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사실 성경자체도 각각의 구절들만으로는 교리들을 충족시키지 못한다. 이 말은 일단 죄악으로 오염된 문화라는 전제하에 문화에 대해서 상대적 평가를 내려야 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렇지 않으면 교회는 문화와 단절되어 점점 사람들의 접근이 어려운 교회로 전락할 가능성이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교회는 문화형식을 예배에 접목함에 있어서 지혜로운 판단이 필요할 것이다. 사실 문화와 상징들은 말씀을 통해서 새롭게 되어 하나님의 도구로 쓰여질 수 있다. 저주의 상징이었던 십자가가 성육신의 말씀으로 말미암아 축복의 상징으로 거듭난 것처럼 상징은 얼마든지 새로운 의미를 담을 수 있다는 논리다. 그래서 오늘날의 예배가 더욱 많은 현대적 상징들을 가지고 예배의 풍성함을 꾀할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예배의 내용을 세상 문화와 상징들에 무조건 담아내기에는 그것들이 갖는 분명한 한계가 존재한다. 특히 그것이 가능하다고 할 때도 상징들이 내용을 충분히 담아내려면 시간과 과정이 필요할 것이다. 지금까지 교회의 상징들이 그래왔다. 단순히 도구적인 것일 때는 문제가 안되지만 그 외의 문화적 산물들을 예배에 적용하는 문제에 대해서는 그래서 좀더 세심한 주의가 요구된다.

개혁주의는 문화를 무조건적인 배격이나 수용, 지배, 대립으로 볼 수 없고, 초월적 문화 비판, 즉 문화의 영성과 내용을 파악하고 선별, 비판하고 수용하되 변혁한다는 자세를 문화에 대한 올바른 접근방법으로 삼는다. 따라서 교회의 공적인 예배에 있어서 문화수용의 문제는 이런 초월적 비판의 태도가 전제되어야 한다. 아무리 형식이라고 하지만 세속문화의 형태를 무조건 받아들이는 것은 위험의 요소를 갖고 있기 때문이다. 개혁주의는 복음과 문화의 관계를 본질과 형식의 관계로 이해한다. 복음은 자유주의에서처럼 문화와 동일시될 수 없으며 동시에 문화에 초연할 수도 없다. 문화는 복음이 표현되는 형식일 뿐이다. 그래서 그 형식에 너무 큰 비중을 두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보석이 아름다운 그릇에 담겨 있을 때 더욱 빛을 발하는 것처럼 문화의 질을 선별하는 지혜가 필요할 것이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좀더 적극적으로 세속 문화를 변혁하고 새로운 기독교적 문화를 창조하여 이 땅에 하나님의 나라가 온전히 설 수 있도록 해야 한다. 이런 관점에서 교회는 끊임없이 현대화되어야 한다. 교회가 주도적으로 예배를 통해서 시대의 문화를 비판하고 검증하고 방향 지워주는 궁극적 권위를 가지고 변혁해 나가는 것이 교회의 시대적 사명일 것이다.

 

2. 예배와 음악의 문제

 

오늘날 예배갱신과 관련된 논쟁의 주제는 당연히 현대 음악의 수용문제이다. 음악의 문제는 비단 오늘날에만 대두된 것이 아니라 교회사 속에서 끊임없는 논쟁거리가 되어 왔다. 실제로 음악이 예배에 차지하는 비중은 작지 않다. 음악이 예배에서 중요한 이유는 첫째로 음악은 언어처럼 소통의 성격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 그것은 하나님과 인간 사이의 소통매체라고 할 수 있다. 예를 들어 시편의 말씀은 본래 불려지기 위해 기록된 것들이다. 둘째로 하나님은 고백과 찬양을 노래하며 악기로 표현하라고 명령하시고 또 그렇게 하는 것을 기뻐하시기 때문이다. 셋째로 음악적 형태들은 하나님의 말씀에 생생함과 기억을 증대시켜주기 때문이다. 그래서 음악은 말씀을 마음에 담게 하고, 찬양과 순종으로 인도한다. 더욱이 음악은 우리의 감성과 상상력을 자극하여 단순한 말로 표현할 수 없는 마음 속 깊은 곳에 있는 것들을 표출하기 때문에 예배를 더욱 풍성하게 할 수 있다. 실제로 한 설문조사에 의하면 예배 중 하나님의 임재를 경험하는 시간으로는 ‘찬양’(35%)을 첫째로 꼽았으며, 역동적 예배를 결정짓는 가장 중요한 요소로서는 ‘뜨거운 찬양과 음악’이라고 응답한 비율이 54.2%로 높게 나타났다.

그렇다면 오늘날 왜 음악이 자주 논쟁의 주제가 되고 있는가? 그것은 그만큼 비중이 있는 음악이 예배에 큰 영향을 미칠 수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특히 현대 음악에 대해 부정적 입장을 갖는 사람들은 음악이 잘못되면 하나님과 예배자의 관계를 증진시키기 보다 관계를 혼란케 만들지도 모른다는 염려를 갖고 있는 것 같다. 그러나 이런 염려 때문에 그 시대 문화에 맞는 음악의 사용을 거부할 수는 없다. 그 동안 한국교회 안에서는 주로 새로운 음악을 저지하는 방향에서 많이 논의된 것이 사실이다. 어느 시대나 예배음악은 문화의 옷을 갈아입어 왔다. 특히 19세기의 부흥운동이 현재 많이 불려지는 찬송가들을 만들어낸 것이 그 대표적인 예가 될 수 있다. 예배가 분명히 대중적 성격을 지니고 있다면(고전 14장) 음악적 형태에 있어서도 그 세대들과의 소통을 위해서 거기에 걸맞게 바꾸는 것은 당연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좀더 구체적으로 CCM(Contemporary Christian Music) 음악을 예배에 사용할 수 있는가 라는 문제가 대두된다. 그런데 실제로 오늘날 부분적이긴 하지만 CCM 음악을 예배에 사용하는 교회가 점차 늘어가고 있다. 이것은 대중문화를 외면할 수 없는 시대적 상황과 또한 젊은 세대들을 염두에 둔 선교적 의도가 깔려있기 때문인 것으로 보인다. 사실 예배찬양이 항상 전통적인 것이어야만 한다는 것은 편협 된 생각일 수 있다. 고전음악이 현대음악보다 더 경건하다고 이분법적으로 구별하는 것도 올바른 시각은 아니다. 이것은 신학적인 측면보다는 각 사람의 문화적 배경이나 취향에 따라 다르게 판단된 것일 가능성이 크다. 그래서 올바른 예배의 형태를 취하기 위해서는 개인적인 취향이나 편견들에 매여서는 안 된다. 예배란 개인만을 위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위한 것이며 다른 지체들과 예배에 참석한 불신자들을 위한 것이기 때문이다(고전 14:22-25). CCM 음악의 옹호자들은 시대적 문화적 상황이 충분히 고려된 현대음악도 사용하는 태도와 목적에 따라서 예배에 얼마든지 사용될 수 있다고 주장한다. 이것은 음악자체에 대한 신학적 판단에 기인한 것이 아니라 상황과 적합성의 문제 때문으로 보인다.

여기서 전통적 찬송가가 아닌 새로운 형태의 예배음악을 시도함에 있어서 몇 가지 염두에 두어야 할 것이 있다. 첫째는 예배참여자들 간의 공동체의식이 필요하다. 교회 안에는 기성세대와 신세대가 공존하고 있다. 기성세대는 변화에 대한 거부감이 강하다. 앞서 말한 대로 음악이 언어적 특성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그들의 신앙고백과 기도가 찬송으로 표현되기도 한다. 정서적으로 친숙해진 찬송을 버리고, 음악적 감각에 있어서도 따라갈 수 없는 새로운 형태의 찬양을 부르는 것은 결코 쉽지 않다. 적어도 기성세대들에게는 이런 것들은 커다란 상실감과 소외감으로 다가올 수 있다. 반대로 기성세대가 선호하는 찬송을 그대로 따라가는 것은 신세대들에게는 또 다른 언어의 상실로 다가올 수밖에 없다. 따라서 이들에게 축제적 예배를 기대하기는 어렵다. 어느 이든 예배에서의 ‘친숙함’은 회중이 하나님을 만나는 경험을 위해서는 반드시 필요하다. 따라서 교회 안에서 필요한 것은 상호 이해할 수 있는 공동체의식이다. 만약 전통적인 예배 곡들을 완전히 배제한다면 교인들을 잃을 수도 있을 것이다. 반대로 교회가 전통적인 것만을 고집한다면 그 결과는 마찬가지이다. 세대간 서로의 ‘차이’를 이해하고 극복할 수 있을 때 진정한 예배공동체로서의 교회모습을 갖게 될 것이다. 교회는 그리스도의 몸이요 우리는 그의 지체이기 때문이다. 바울의 다음과 같은 사역의 원리를 상기할 필요가 있을 것이다. “내가 모든 사람에게 자유하였으나 스스로 모든 사람에게 종이 된 것은 더 많은 사람을 얻고자 함이라 유대인들에게는 내가 유대인과 같이 된 것은 유대인들을 얻고자 함이요 (...) 여러 사람에게 내가 여러 모양이 된 것은 아무쪼록 몇몇 사람들을 구원코자 함이니 내가 복음을 위하여 모든 것을 행함은 복음에 참예하고자 함이라”(고전 9:19-23)

둘째는 현대음악의 무조건적이고 무분별한 수용은 바람직하지 않다. 물론 음악의 질을 가지고 판단하는 것은 쉽지 않다. 실제로 세속음악 가운데는 현재 찬송가에 들어있는 곡보다 질적으로 우수한 곡들이 얼마든지 있다. 하지만 그것이 음악의 수준이나 질을 무시하라는 것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다만 본문과 곡과의 관계, 그리고 예배자들에게 이해될 수 있는 음악적 언어들에 대한 충분한 검토가 필요하다는 것이다. 가령 아무리 가사가 경건하다고 하더라도 음악자체의 리듬이 정서적으로 강한 경우에는 영적으로 부정적 영향을 미칠 가능성이 크다. 이런 음악들이 예배에 도입되면 예배 정신에 영향을 줄 수 있다는 것이다. 더구나 이것이 예배음악으로서 사용하기에 적합치 않은 이유는 예배의 주체이신 하나님에게 집중하기보다는 음악자체가 주는 감정적 자극에 치우쳐서 자기만족감이나 혹은 열광주의(fanaticism)에 빠질 수 있기 때문이다. 악기와는 달리 대중 음악자체는 가사만 기독교적으로 바꾸면 거룩해 질만큼 중립적이지도 순수하지도 않다. 앞서 언급한 것처럼 음악을 비롯해서 타락한 인간이 만들어 낸 모든 문화 속에는 죄로 오염된 것들이 수두룩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예배음악은 시대의 문화에 걸맞고 서로가 공감할 수 있는 수준의 음악을 선별하되, 무엇보다도 가사에 잘 집중할 수 있고 하나님을 향해 마음이 열리는 곡조가 될 수 있도록 선택, 창작하는 노력이 필요할 것이다. 이를 위해서는 교회 및 교계의 공감대와 관심, 지원이 반드시 필요하다.

셋째는 예배음악도 본질로 돌아가야 한다. 문화의 옷을 입은 예배음악이 그 본연의 역할을 다하기 위해서는 항상 본질과의 연결 끈을 놓지 않아야 한다는 것이다. “내가 영으로 찬미하고 또 마음으로 찬미하리라”(고전 14:15)라는 구절은 예배음악에 대한 모든 형식적 논의를 일축한다. 형식과 양식의 논의에서 내용과 본질에 대한 얘기를 빼버리면 예배와 예배음악은 단지 껍데기에 불과하다. 영성이 결여된 찬양은 높은 수준의 그럴듯한 외양을 지니고 있다고 할지라도 무가치한 것이 되고 만다. 모든 문화적 양식은 본질에 충실하다는 전제아래서만 의미가 있다. 다시 말해 어떤 형태의 예배음악이건 성령의 임재가 없이는 단순한 노래의 유희에 불과하다. 혹자는 젊은이들의 기호에 맞추어 음악을 선택해야한다고 말하기도 한다. 하지만 그들은 세상곡조를 듣기 위해서 교회에 나오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세상이 줄 수 없는 ‘신비로운 것’, 즉 하나님과의 만남을 기대한다. 그런데 찬양이 하나님과의 만남을 통해 하나님의 하나님 되심을 인정하고 그를 온전히 바라보며 영광을 돌리는 것이라면 성령의 역사가 없이 어떻게 그것이 가능할 수 있겠는가? 그래서 성령이 온전히 찬양가운데 임재할 수 있도록 준비되어야 한다. 대부분 이것을 너무나 당연한 것으로 여기지만 실제로는 찬양자체에 훨씬 더 큰 비중을 두고 관심을 기울인다. 예배인도자, 찬양인도자, 예배참여자들 모두는 무엇보다도 찬양 가운데 성령의 임재가 있도록 하나님의 도우심을 구해야 한다. 특히 찬양의 형식은 다 갖추었다고 하더라도 그 속에 있는 능력을 알지 못하는 사람이 찬양을 인도하는 일이 없도록 해야 한다. 오직 성령이 함께 하시는 찬양만이 피조물과는 완전히 다른 타자로서의 초월적 하나님의 존재와 능력을 온전히 드러내며, 감히 그 앞에 설 수 없는 인간의 실존을 보게 하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중보자를 통하여 구원을 베푸시는 하나님의 무한한 사랑을 마음 속 깊이 느끼게 함으로써 우리로 하여금 더욱 풍성한 기쁨가운데 거하도록 인도하는 것이다.

 

IV. 맺음말: 예배의 부흥을 위한 노력

 

오늘날과 같은 포스트모더니즘과 급변하는 문화의 소용돌이 속에 있는 현대교회에서 진정한 예배의 부흥은 가능한가? 이 물음에 대한 답은 매우 간단하다. 한마디로 성령의 능력을 믿고 의지한다는 전제하에서 가능하다. 세상 문화가 다양해지고 고도로 발달할수록 믿음은 식어지고, 식어진 믿음을 다스리는 방법으로 의식이 강조될 가능성이 크다. 그러나 예배는 의식으로 강화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과 그의 백성들의 진정한 교제가 이루어질 때 참된 예배가 된다. 하나님과의 교제는 바로 성령의 사역이다. 토저(A. W. Tozer)는 오늘날 교회의 비극은 하나님이 주시는 성령의 선물을 놓치는데 있다고 한다. 교회의 교회 됨은 바로 성령의 역사에 있다는 것이다. 이것은 초대교회로부터 지금까지 시대가 아무리 변한다고 하더라도 결코 변할 수 없는 진리이다. 예배의 인도자는 성령이시다. 성령만이 예배 가운데 성도들로 하여금 하나님의 임재를 경험하게 하고 그 앞에 굴복하여 경배하게 한다. 성령은 설교의 부흥을 일으켜서 성도들의 마음을 치유하고 회복하고 죄사함의 확신을 주고 그들의 심령을 새롭게 하고 하나님의 만져주시는 은혜의 손길을 경험하게 하여 감격과 기쁨을 가지고 하나님 나라의 군사로서 이 세상에서 승리의 예배자로 살아가게 한다. 그러므로 이를 위해 교회는 믿음을 가지고 성령의 도우심을 구해야 한다. 교회에서 기도가 필요한 것은 단순히 성도들의 세상적 필요를 채워주기 위한 것이 아니라 참된 예배의 부흥을 위해서이다. 예배의 부흥은 성도로 하여금 감격과 기쁨 속에서 하나님 앞에 값진 인생을 살아가게 하기 때문이다.

이렇게 예배의 본질을 회복하는 것이 예배의 부흥을 가져오는 우선 과제라면, 그 다음은 전통과 현대의 문화적 특성을 조화․통합하는 과정이 필요하다. 즉 이것은 전통이 갖고 있는 신학적이고 본질적인 것과 현대의 문화적 요소들을 통합, 성경적 예배의 참 의미를 조금도 손상하지 않으면서도 문화의 옷으로 잘 단장하여 아름답고 역동적 예배를 드림으로써 하나님을 영화롭게 할 수 있는 최선의 노력을 말한다.

여기서 예배갱신을 위한 몇 가지 실천사항을 제안고자 한다.

⑴ 목회자의 자아성찰: 목사는 예배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책임자이다. 오트(W. E. Oates)는 목회사역에 목사의 위치를 기능적 측면에서 예배인도자 (leader of worship), 설교자(preacher), 종교교육자(religious educator)로 구분하고 이들 상호간에는 종합적 사역의 관계가 있다고 말한다. 목사는 연출자와 같다. 영화나 연극이 연출자에 따라서 성패가 좌우되는 것처럼 목사는 예배에서 가장 중요한 위치를 차지한다. 목사는 하나님 앞에 아름답고 감동적 예배가 드려질 수 있도록 탁월한 연출자가 되어야 한다. 하나님이 원하시는 교회와 생명력 있는 예배가 구현되기 위하여 끊임없는 갱신의 노력을 다해야 하는 것이 목사의 역할이다. 따라서 타교회의 프로그램을 무조건 도입하는 것이 아니라 자기교회와 성도들의 상태를 분석하고 거기에 걸 맞는 예배환경을 조성함으로써 예배자들이 하나님과의 만남을 경험하는 영적 예배가 될 수 있도록 최선을 다해야 한다. 이를 위해 목회자는 하나님과 그의 말씀 앞에서 끊임없는 자기성찰을 해야하고, 성령의 인도하심을 받기 위해서 항상 영적 긴장감을 놓치지 말아야 하며, 또한 테크닉과 프로그램을 배우는데 급급할 것이 아니라 회중을 이해하기 위해서 현대 문화와 사회에 대하여도 꾸준히 공부하여야 한다.

⑵ 설교자의 준비: 오늘날도 한국교회 예배자들 대부분은 예배 중에 선포되는 설교에 대한 기대가 크다. 전통적으로 개혁자들은 예배의 부흥을 위해서 설교에 최선을 다해왔다. 그리고 실제로 예배의 부흥이 있었던 때는 설교의 능력이 따랐다. 이것이 설교자가 최선을 다해야 할 이유다. 또한 설교자는 철저히 성경을 설교해야 하고 복음적이어야 하고 그리스도 중심적이어야 한다. 이것을 벗어나서 예배의 부흥을 경험하는 교회는 일찍이 없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설교준비는 단순히 설교원고준비에 국한되지 않고 성령의 강력한 임재가 있도록 기도로 설교에 불을 지펴야 한다. 즉 영혼을 변화시키고 거듭나게 하는 하나님의 능력을 새롭게 인식하고 교회 가운데 그 능력이 나타날 것을 기대하며 간청해야 한다. 무엇보다도 기도는 설교자의 가장 큰 무기이다. 바운즈(Edwards M. Bounds)의 말처럼 “참된 설교는 골방에서 이루어진다.” 그래서 예배 가운데 들려지는 말씀을 통해 새로 온 자들이 거듭나고, 성도들이 하나님의 임재를 경험하며, 상한 영혼이 치유되고 회복되는 예배의 부흥과 감격을 맛본다면 목회자에게 이보다 더 큰 기쁨과 보람은 없을 것이다. 설교자라면 누구나 청교도의 거장 리차드 백스터(Richard Baxter)의 다음과 같은 명언을 상기해 볼 필요가 있다. “나는 절대로 다시 설교하지 못할 것을 확신하는 사람처럼, 그리고 죽어 가는 사람이 죽어 가는 사람들에게 하는 것처럼 설교한다.”

⑶ 예배자에 대한 교육: 예배갱신을 위해서는 예배자 교육이 필요하다. 우선 한국교회 성도들 안에 오랜 동안 깊이 뿌리 내려 있는 기복적이고 샤마니즘적 예배관을 고쳐야 하고, 삼위일체 중심의 예배관을 정립하도록 분명히 가르쳐야 한다. 그리고 공적인 예배가 삶의 예배로 이어질 수 있도록 해야 한다. 이것은 한두 번 설교에 반영하는 것으로는 충분하지 않고, 모든 프로그램을 통한 지속적인 교육과 훈련이 필요하다. 특히 공적인 예배를 위해서는 교회마다 예배위원회 혹은 예배부가 조직되어 있지만 유명무실한 경우가 많다. 따라서 실제로 예배자들과 예배봉사자들이 공감대를 갖고 예배를 철저히 준비할 수 있도록 교육해야 한다. 여기서 예배봉사자들을 위한 구체적인 사항을 담은 매뉴얼을 만드는 것도 바람직할 것이다. 그리고 주일예배를 위한 기도사역팀을 운영하는 것도 좋은 방안이 될 수 있을 것이다.

⑷ 성찬의 회복: 개혁교회가 전해준 좋은 전통이 성찬의 중요성이다. 현재 연중행사처럼 생각하고 있는 성찬의미를 새롭게 하여 예수 그리스도 중심의 예배가 되도록 하고 그 가운데 베풀어주시는 하나님의 풍성한 은혜와 축복을 누릴 수 있도록 해야 한다.

⑸ 문화의 수용: 문화수용에 대한 신중함이 필요하다. 상징을 기독교적으로 채용함으로써 예배를 축제의 분위기로 조성할 수는 있지만 상징의 무분별한 사용은 참된 예배에 장애가 될 수 있다. 문화적 상징들은 중립적이지 않은 경우가 많기 때문이다. 특히 요즘 선교적 목적에 따라 구도자 예배(seeker sensitive worship) 혹은 열린 예배를 시도하는 교회가 늘면서 대중문화 수용의 정당성이 점점 더 힘을 얻고 있다. 하지만 예배와 전도를 동일시해서는 안 될 것이다. 그 대상이 다르기 때문이다. 대상과 목적이 인간에게 있는 예배는 진정한 예배가 될 수 없다. 그러나 문화적 상징들은 역동적 예배를 드리는데 도움이 될 수 있기 때문에 무조건 거부해서는 안되고 수용하되, ‘모든 것을 적당하게 하고 질서에 따라’ 할 수 있는 지혜로움과 신중함이 필요하다(고전 14:40).

⑹ 예배음악의 문제: 음악적인 문제는 세대간의 양보와 이해를 통해서 공적인 예배에 도입하는 것이 바람직하다. 가령 드럼사용의 문제에 있어서도 거부감이 크다면 구성원들간에 어느 정도 공감대가 형성될 때까지 기다려보는 지혜가 필요하다. 바울은 다음과 같이 권면한다. “모든 것이 가하나 모든 것이 유익한 것이 아니요 모든 것이 가하나 모든 것이 덕을 세우는 것이 아니니 누구든지 자기의 유익을 구치 말고 남의 유익을 구하라”(고전 10:23-24). 그리고 현재 많은 교회들에서 시행하고 있는 것으로, 예배시간을 대상에 따라 구별하여 그 분위기에 맞는 찬양을 적용하는 것도 좋은 방안이 될 수 있을 것이다. 또 예배음악의 선택 시, 찬송가와 새로운 찬양을 섞어서 적절한 균형과 조화를 시도하는 것도 좋은 방안이 될 수 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