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에 빛진자

사랑에 빚진 자

 

‘예수님의 십자가 보혈로 세워진 우리 기독교의 특징을 한 가지 들어 봐라!’ 또는 ‘기독교의 행동 강령을 한 마디로 요약해 봐라!’한다면 그것은 말할 것도 없이 ‘사랑(Agape)\'일 거예요.

예수님께서 우리들에게 가르쳐 주신 이 ‘사랑’은 우리 성도들의 행동을 지배하는 절대적인 원칙이요, 또 가장 핵심이 되는 성도들의 의무입니다.

이 ‘사랑’은 모든 선행이나 모든 도덕성을 완성시켜주는 가장 완전하고도 가장 가치가 있는 힘이 되는 것입니다.

사랑이 없는 선행이나 사랑이 없는 봉사가 무슨 소용이 있겠습니까?

 

“내가 사람의 방언과 천사의 말을 할지라도 사랑이 없으면 소리 나는 구리와 울리는 꽹가리가 되고, 내가 예언하는 능이 있어 모든 비밀과 모든 지식을 알고 또 산을 옮길 만한 모든 믿음이 있을지라도 사랑이 없으면 내가 아무 것도 아니요, 내가 내게 있는 모든 것으로 구제하고 또 내 몸을 불사르게 내어 줄지라도 사랑이 없으면 내게 아무 유익이 없느니라… 그런즉 믿음 소망 사랑 이 세 가지는 항상 있을 것인데, 그 중에 제일은? (뭐라고요?) 그 중에 제일은 사랑이라.”(고전13:1-3)

 

로마서 1장부터 11장까지를 교리부분이라고 하고 로마서 12장부터는 실천 부분이 되는데, 사도바울 선생이 로마서 1장부터 11장까지에서 계속 논박해왔던 율법의 약점이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율법은 우리 인간들에게 수많은 의무와 짐을 지게 했어요.

하나님의 말씀대로 살기는 살아야 되겠는데 도저히 우리 인간의 힘으로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면서 살 수가 없는 거예요.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어려운 율법을 거뜬하게 지켜낼 수 있도록 우리들에게 사랑의 법을 주신 줄 믿습니다.

“새 계명을 너희에게 주노니 서로 사랑하라!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 같이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요13:34)

오늘 주님께서는 사도 바울 선생을 통해서 우리들에게 아주 귀한 말씀을 하고 계십니다.

 

첫 번째는 피차 사랑의 빚 외에는 아무 빚도 지지 말라고 하셨어요.

사랑의 빚이라는 것은 우리 성도들이 주님 앞에서 늘 지고 사는 빚이 아니겠습니까?

우리가 받은 사랑의 빚은 갚아도, 갚아도 아무리 갚아도 그 빚을 다 갚을 길이 없는 겁니다.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에게 이렇게 나타난바 되었으니 하나님이 자기의 독생자를 세상에 보내심은 저로 말미암아 우리를 살리려 하심이라.”(요일 4:9)

우리 주님께서 십자가에 달려 죽으시는 순간 우리들은 이 엄청난 사랑의 빚을 지게 되었습니다.

우리 주님이 아니셨더라면 우리들은 우리들의 죄로 말미암아서 영원히 지옥 형벌을 받을 수밖에 없었을 것인데, 우리 주님께서 우리들을 위해서 대신 죽어 주시고 누구든지 예수 믿으면 멸망하지 않고 영생을 얻게 하신 줄 믿습니다.

 

141장 찬송을 다 같이 드립시다.

웬 말인가? 날 위하여 주 돌아가셨나? 이 벌레같은 날 위해 큰 해 받으셨나

내 지은 죄 다 지시고 못 박히셨으니 웬 일인가? 웬 은혠가 그 사랑 크셔라.

주 십자가 못 박힐 때 그 해도 빛 잃고 그 밝은 빛 가리워서 캄캄케 되었네

나 십자가 대할 때에 그 일이 고마워 내 얼굴 감히 못 들고 눈물 흘리도다.

늘 울어도 눈물로써 못 갚을 줄 알아 몸 밖에 드릴 것 없어 이 몸 바칩니다.

 

우리들은 주님 앞에서 영원히 갚을 수 없는 사랑의 빚을 진 사람들입니다.

그 빚을 갚을 길이 없어서 오늘도 그저 주님 앞에 나와서 주님을 예배하고 찬송하고 주님 앞에 엎드려서 기도하고…(할렐루야!)

그것 밖에는 우리들이 할 것이 없는 거예요.

혹시라도 주님 앞에서 이 빚을 다 갚았다고 생각하는 사람이 있다면 그 사람은 거짓된 사람일 뿐 아니라 교만하기 그지없는 사람일 거예요.

주님의 십자가의 사랑을 우리가 어찌 다 갚겠습니까?

무슨 수로 하나님의 사랑을 우리가 다 갚을 수가 있겠어요?

부모님의 사랑도 만에 하나, 천에 하나도 갚을 수 없다고 하는데 감히 하나님의 사랑을 우리가 어찌 다 갚을 수가 있겠어요?

도저히 갚을 수가 없는 겁니다.

그래서 우리들은 모두가 다 뭐예요? - ‘사랑에 빚진 자’들입니다.

 

그러면 이 빚을 벗어 버려야 시원한 것이냐? 그렇지 않아요.

세상의 빚은 지고 있으면 부담이 되고 괴로워서 못 삽니다.

심지어는 빚 독촉에 못 이겨서 목숨을 끊는 사람들도 있잖아요?

남의 빚을 지게 되면 얼마나 괴로운 일이 많은지 몰라요.

그러나 주님께 진 사랑의 빚은 생각하면 생각할수록 고맙고 감사한 것 밖에는 없습니다.(할렐루야!)

그래서 어떤 분들은 자다가도 벌떡 일어나서 감사의 기도를 드리고 눈물을 흘리며 밤새도록 찬송을 하고 그랬다는 거 아니겠어요?

 

예수님을 처음 믿고 은혜를 받으면 누구나 다 그렇게 됩니다.

내가 예수님을 믿고 구원받은 하나님의 백성이 되었다는 것을 생각하면 정말 생각할수록 기적 같은 일이예요.

너무나 감사하고 감사해서 믿어지지 않을 정도로 기쁜 겁니다.

예수님께서 베드로에게 발을 씻겨 주시겠다고 했을 때 베드로는 처음에 거절을 했었잖아요?

예수님의 사랑을 감히 인간이 어떻게 거절할 수가 있겠어요?

나중에 예수님의 마음을 알고 나서는 목욕까지 시켜달라고 하지 않았어요?

한번 예수님의 사랑을 깨닫고 나면 그 사랑 속에 빠져서 영원한 행복을 누리고 싶은 것이 바로 주님의 사랑입니다.

 

그렇다고 한다면 이 큰 사랑을 갚을 길이 아주 없는 것일까요?

예수님께서는 이 사랑의 빚을 갚는 방법을 알려주셨습니다.

어떻게 하면 하나님께 받은 이 큰 사랑의 빚을 갚을 수가 있을까요?

한 마디로 서로 사랑하라는 거예요.

8절, 9절, 10절 말씀을 보면 남을 사랑하는 사람은 율법을 다 이루었느니라고 하셨습니다.

율법이 이것저것 많이 있지만, ‘네 이웃을 네 자신과 같이 사랑하라!’고 하신 그 말씀 속에 다 들어 있다는 거예요.

사랑한다고 하면서 이웃에게 악을 행할 수가 없습니다.

그러므로 사랑은 율법의 완성이니라.(할렐루야!)

 

그런 걸 보면 개인도 그렇지만 국가 간에도 정말 사랑이 있어야 하는데 그렇지 못한 것 같아요.

각 나라별로 쥐잡기 대회가 벌어졌답니다.미리 표시를 해둔 쥐 세 마리를 먼저 잡는 쪽이 이기는 건데요.먼저 중국 대표가 나섰습니다. 중국 선수들은 인해전술 전략을 써서 일주일 만에 쥐 세 마리를 다 잡았대요.그 다음엔 러시아 대표 선수들이 들어왔습니다. 러시아 대표 선수들은 일단 쥐 한 마리를 잡은 후에 그 쥐에게 사상 교육을 시켜서 철저하게 세뇌를 시켜가지고 도망간 쥐들의 서식지를 불게 만들어서 5일 만에 쥐 세 마리를 모두 잡았답니다.미국 대표들은 아주 간단하게 최첨단 과학 기술로 3일 만에 다 잡았대요.그런데 한국 대표는 불과 한 시간만에 쥐 세 마리를 모두 다 잡아 왔더래요.

그래서 어떻게 그렇게 빨리 쥐를 잡았느냐고 물어봤더니 아주 간단해요.

우선 지나가던 곰 세 마리를 때려잡아서는 \'너는 쥐다. 알았냐?\'라고 협박을 했다는 겁니다. 이렇게 해서 금메달은 한국에게로 가는 듯 했는데, 일본 선수들이 들어오더니 단 10분 만에 쥐를 잡아 오더랍니다.

세계가 다 깜짝 놀랐죠.

그런데 나중에 알고 보니까 이 일본 선수들이, 한국 선수들이 잡아 온 곰을 훔쳐다가 무조건 자기 거라고 우겼다는 거예요.

 

서로 사랑하라고 하신 주님의 말씀은 내 것이 소중한 줄 알면 남의 것도 귀한 줄 알아야 한다는 말씀이 아니겠습니까?성도들 사이에서도 마찬가지예요.

혹시라도 나 때문에 다른 사람들에게 피해는 가지 않는지?

나의 사소한 행동이 다른 사람들에게 누가 되지는 않는지 늘 조심하고 남을 배려해 주어야 되는 거예요.

이런 마음은 많이 배웠다고 해서 저절로 되는 게 아닙니다.

교양이 있다고 해서, 매너가 좋다고 해서 되는 얘기가 아니에요.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말씀으로 변화를 받아 새 사람이 된 사람들만이 할 수 있는 일인 줄 믿습니다.

 

사도 바울 선생도 그랬거든요.

빌립보서 3장 말씀에 보면 사도 바울 선생이 얼마나 잘나고 똑똑한 사람이었는지 모릅니다.

누구보다도 육체를 신뢰할 만한 사람이었다고 스스로 고백을 하고 있습니다.

그는 유대인으로 태어나서 8일 만에 할례를 받았습니다.

이스라엘 족속으로 이스라엘의 초대 왕인 사울 왕의 후손, 베냐민 지파 사람이었어요.

히브리인 중에 히브리인이었고, 율법으로는 흠이 없다고 하는 바리새인이었습니다.

그러던 그가 뭐라고 고백을 했습니까?

“그러나 무엇이든지 내게 유익하던 것을 내가 그리스도를 위하여 다 해로 여길뿐더러 또한 모든 것을 해로 여김은 내 주 그리스도 예수를 아는 지식이 가장 고상함을 인함이라. 내가 그를 위하여 모든 것을 잃어버리고 배설물로 여김은 그리스도를 얻고 그 안에서 발견되려 함이니…”(빌3:7,8)

 

사도 바울의 눈을 덮고 있던 죄악과 교만의 비늘이 벗겨져 버릴 때에 그렇게나 잘나고 그렇게나 똑똑했던 사람이 예수님을 만나고 나니까 한 순간에 ‘내가 죄인 중에 괴수’라고 고백을 할 수 밖에 없었던 거예요.(딤전1:15)

그는 믿음의 주요, 또 온전케 하시는 이인 예수님(히12:2)을 바라 볼 때에 오직 주님께서 보여주신 ‘사랑’을 통해서만 율법의 모든 요구를 완성시킬 수 있다는 것을 깨닫게 되었던 겁니다.

 

아마 율법을 다 지켜서 구원을 받으려고 한다면 이 세상에서 단 한 사람도 구원을 받을 사람이 없을 거예요.

유대인들은 구약 율법을 잘 지켜보려고 율법을 613개 조항으로 더 세분화시켜서 아침, 저녁으로 그 율법을 줄줄 외었거든요.

하라는 것 365가지, 하지 말라는 것 248가지…

그러나 결국 신명기 6장 5절 말씀, “너는 마음을 다하고 성품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네 하나님 여호와를 사랑하라!”는 말씀과 레위기 19장 18절 말씀, “원수를 갚지 말며, 동포를 원망하지 말며, 이웃 사랑하기를 네 몸과 같이 하라!”고 하신 이 두 말씀이거든요.

십계명이 바로 그거잖아요?

1계명부터 4계명까지는 하나님 사랑하라는 계명이고, 5계명부터 10계명까지는 이웃 사랑하라는 계명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이 두 계명을 하나로 묶어 주셨어요.

“예수께서 가라사대 네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라 하셨으니 이것이 크고 첫째 되는 계명이요, 둘째는 그와 같으니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 하셨으니 이 두 계명이 온 율법과 선지자의 강령이니라.”

 

그런데 우리들이 살고 있는 지금 이 시기가 어떤 시기입니까?

사도 바울은 말하기를 지금 이 시기는 ‘자다가 깰 때’라고 말씀하고 있어요.

군대에 가면 5분 대기조라는 것이 있습니다.

완전군장을 꾸리고서 언제든지 출동명령이 떨어지기만을 기다리고 있다가 사이렌 소리가 나면 즉각 출동을 하는 거예요.

이 사람들은 웬만하면 군화도 벗지 않습니다.

잠을 자도 잠깐 앉아서 졸듯 하지 옷을 다 벗고 이불 덮고 그렇게 편하게 자질 않아요.

항상 긴장, 긴장 초긴장으로 있다가 일단 유사시에 출동 명령이 떨어지면 재빨리 달려가는 거예요.

 

사도 바울 선생은 지금 우리들이 살고 있는 이 시기가 ‘자다가 깰 때’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혹시 지금 이 절박한 시점에서도 졸음이 오는 사람이 있어요?

정신 바짝 차리고 하나님의 말씀에 집중하시기 바랍니다.

언제 주님께서 다시 오실는지 우리들은 알 수 없기 때문에 늘 깨어서 기도해야 되요.

밤이 깊으면 깊을수록 새벽이 가까워오는 것처럼 오늘날 부패와 절망과 불신앙의 밤이 얼마나 깊어만 가는지 모릅니다.

이제 우리 주님께서 재림하실 ‘그 날’이 점점 가까이 우리들 곁으로 다가오고 있습니다.

이 어두운 영적인 밤 시간, 짙은 죄악의 어두움이 우리들을 잔뜩 사로잡고 있는 이때에 마냥 단잠에 취해있다가는 주님 재림하실 때 어리석은 다섯 처녀꼴이 되고 말 거예요.

 

그러므로 우리는 어둠의 일을 벗어 버리고 빛의 갑옷을 입어야 합니다.

어둠에 일이라는 것은 마치 우리들이 입는 잠옷과 같은 거예요.

학교에 가는 학생이 마땅히 아침이면 교복을 갈아입고 학교에 가야죠.

회사에 출근하는 사람이 깔끔하게 면도를 하고 하얀 와이셔츠에 단정하게 넥타이를 매고 양복을 입고 그렇게 출근을 해야죠.

선보러 나가는 여자가 열한 시, 열두 시까지 누워 자다가 눈곱도 떼지 않고 까치 머리를 해 가지고는 잠옷 바람으로 신랑 될 사람을 만나러 나가는 거 봤어요?

지금이 어느 때예요? - 자다가 깰 때잖아요.

그러면 이제 어둠의 일은 벗어 버리고 빛의 갑옷을 입어야 합니다.

우리가 벗어 버려야 할 어둠의 일이 뭐예요?

13절에 있는 대로, ‘방탕과 술 취하지 말며 음란과 호색하지 말며 쟁투와 시기하지 말고…’

방탕, 술 취함, 음란, 호색, 쟁투, 시기, 기타 등등…

 

기독교의 성자라고 불리우는 어거스틴(Augustine)은 북아프리카의 타가스테에서 로마제국의 한 관리의 아들로 태어났습니다.

그런데 어거스틴은 청소년 시절을 아주 방탕하게 보냈어요.

나이도 어린놈이 어디 가서 창녀 같은 여자랑 불장난을 쳐서 애를 낳아 오질 않나 마니교라는 이상한 종교에 빠져서 헤매질 않나 아무튼 아머니 모니카의 속을 얼마나 태웠는지 모릅니다.

그러나다 나중에 공부를 해서 밀라노 대학의 교수가 되었는데 어느 날 정원을 걸으며 깊은 묵상 속에 빠져 있는데 이웃집에 아이들이 노래를 하면서 놀고 있었대요.

그런데 그 노래 가사가 ‘tolle lege! tolle lege! 집어 들고 읽어라! 집어 들고 읽어라!’ 그러더래요.

깊은 묵상에 빠져있던 어거스틴이 그 노래 소리에 정신이 번쩍 들어서 도대체 뭘 집어 들고 읽으라는 건가 싶어서 재빨리 서재로 뛰어 들어가서 성경을 펼쳐서 읽게 되었는데 바로 그 때 어거스틴이 읽은 구절이 바로 오늘의 본문 말씀 가운데 13절과 14절 말씀이었답니다.

 

“낮에와 같이 단정히 행하고 방탕과 술 취하지 말며, 음란과 호색하지 말며, 쟁투와 시기하지 말고, 오직 주 예수 그리스도로 옷 입고 정욕을 위하여 육신의 일을 도모하지 말라!”

 

오늘날 우리가 사는 이 시대를 보세요!

얼마나 험한 세상인지 모릅니다.

영적으로 어둠의 세력들이 우리들을 잔뜩 둘러싸고서 우리들의 생명을 위협을 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러면 그럴수록 예수님께서 다시 오실 재림의 그날은 점점 더 가까워 오고 있는 것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우리들은 모두 다 주님 앞에서 사랑에 빚진 자들이에요.

우리들이 주님께 입은 사랑의 빚을 생각하면서 서로 사랑하시기 바랍니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에게 가장 잘 어울리는 빛의 갑옷을 입으시기 바랍니다.

 

“또한 너희가 이 시기를 알거니와 자다가 깰 때가 벌써 되었으니 이는 이제 우리의 구원이 처음 믿을 때보다 가까웠음이니라.”(11절)

기도하시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