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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터지(Liturgy)의 의미에 대한 예배학적 고찰: 예배의 새로운 이해를 위하여 이 호 형 <계명대 신학과> 시작하는 말: 한국 개신교회에서의 예배와 예배학 교회 공동체의 성격을 규정할 때 필수적으로 등장하는 표현이 \'교회는 예배하는 공동체이다\' 라는 말이다. 이는 곧 이 땅에 교회가 존재하는 근본 이유 중의 하나는 예배를 위함이라고 할 수 있을 만큼 예배가 교회에서 차지하는 역할이 중대함을 나타내는 표현이다. 사실 교회에서 예배가 차지하는 중요성은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는데 이는 예배없는 교회는 더 이상 교회가 아니기 때문이다. 우리 한국의 개신교회도 이런 예배의 중요성을 알고 어느 다른 나라의 교회 보다도 더 예배를 강조하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 개신교에서는 예배의 본질을 이해하고 예배의 경험을 연구해서 온전한 예배를 드리려는 학문적인 노력이 결여되었음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다. 다른 말로 하면 신학의 여러 분야 가운데 예배학의 분야가 가장 뒤떨어져 있다는 말이요, 심하게 말하면 학문으로서의 예배학은 아직 제대로 소개조차 되어 있지 않다고 할 수 있다. 이렇게 예배에 대한 학문적인 이해와 예배를 연구하려는 신학적인 노력이 미흡한 원인은 말씀을 중시하는 개혁교회 전통에서는 예배학이 학문의 한 분야로 인정받지 못했기 때문이었다. 개혁교회의 신학 전통에서는 설교학이 있었지 예배학은 없었던 것이다. 비록 예배학을 가르쳤다고 하나 신학의 필수과목이 아니라 실천 신학의 한 선택과목으로 교회 현장에서 어떻게 예배를 인도할 것인지에 대해 실제적인 측면을 가르치는데 그치고 말았다. 이와 같이 말씀을 중시하는 개혁교회의 실천신학과 예배 전통 때문에 예배가 벌어지는 교회 현장에서는 주객이 전도되는 현상이 일어났다. 즉, 예배란 설교를 위한 배경을 제공해 주는 이차적인 요소로 전락하고 말았다. 그리하여 예배란 설교를 비롯한 여러 예배적인 행동으로 이루어진 총체적인 행위가 아니라 설교를 위한 무대를 제공하는 역할을 하는 것으로 인식되고 있다. 그대신 설교는 예배의 꽃 (?)이 되어 예배의 존재 이유를 제공하는 특별한 행위로 군림하고 있다. 이는 중세의 교회가 성찬의식을 너무 중시한 나머지 성찬 행위가, 더 구체적으로는 성만찬의 떡과 잔을 높이 드는 순간이 예배의 결정체로 인정되던 현상과 유사하다고 할 수 있다. 말씀을 중시하여 설교학을 발전시킨 개혁교회와 달리 카톨릭, 성공회, 루터란, 그리고 그리스 정교회 계통의 교회에서는 전통적인 예배 의식을 중시하여 그 의식의 역사적 기원과 변천, 그 성서적 신학적 예배학적인 의미를 연구하는 예배학을 발달시켰다. 이들 교회의 전통에서 예배학은 처음부터 예배학이었지 한번도 실천신학의 한 분야로 취급되지 않았다. 왜냐하면 예배는 비록 신앙의 실천이기는 해도 실천이라고 표현할 수 없는 요소를 가지고 있기 때문에 실천이라는 개념 속에 결코 포함시킬 수 없고 오히려 실천을 그 안에 포함하는 더 큰 행위요 개념이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설교학을 중시하는 개혁교회 계통의 신학교와 달리 이들 계통의 신학교에서는 예배학을 신학의 가장 첫번째 가는 필수과목으로 가르치고 있다. 근자에는 교회연합운동에 힘입어 서구의 개혁교회에서는 예배학의 필요성과 중요성을 인정하여 예배학을 연구하기 시작했고 이 연구의 결과를 예배에 반영하여 예배를 갱신하려는 움직임이 크게 일고 있다. 한편, 말씀을 상대적으로 경시했던 카톨릭 교회에서는 성서와 설교에 대한 중요성을 인식하고 제 2 바티칸 공의회를 계기로 말씀의 리터지 (the liturgy of the word)를 예배 순서에 다시 회복함으로 초대 교회의 예배 전통을 다시 찾았다. 꼭 이런 세계적인 추세 때문만이 아니라 신앙생활에 가장 중요한 역활을 하는 예배를 바로 이해하고 지나치게 말씀만이 강조되는 현 한국교회의 실정을 바로 잡아 옳바른 예배를 드림으로 우리 교회의 사명을 감당하기 위해서 우리에게 무엇보다도 가장 절실히 요청되는 학문 활동이 바로 예배학인 것이다. 예배학의 연구를 위해 무엇보다도 먼저 이루어져야 할 일은 우리가 가지고 있는 예배에 대한 개념을 검토하고 그 개념을 새롭게 하는 일이다. 이를 위해 이 소고에서는 먼저 우리가 사용하고 있는 예배의 의미를 우리가 쓰고 있는 용어를 중심으로 살펴보도록 한다. 그리고 예배의 이해를 새롭게 하기 위하여 전통적으로 예배를 가르키는 말로 사용되어 온 리터지의 의미와 리터지로서의 예배의 의미를 고찰하기로 한다. 이를 근거로 우리 말 예배의 의미가 예배의 이해에 미칠 수 있는 문제점을 지적하고 리터지로서의 예배 이해가 어떻게 그 문제점을 보완해 주는 지를 결론으로 언급하고자 한다. \'예배\'라는 말의 의미적 고찰 우리 개신교회가 사용하고 있는 \'예배\'라는 말은 개신교회가 그 종교 의식을 다른 종교의 의식과 구별하기 위하여 사용하기 시작한 특별한 교회 용어이다. 즉, 개신교회의 선교사가 처음 들어와서 이 말을 사용하기까지 이 \'예배\'라는 말은 존재하지 않았거나 있었다고 하더라도 종교 의식을 표현하는 보편적인 말로 거의 사용되지 않았다고 해도 크게 틀리지 않는다. 예배란 말이 등장하기까지 모든 의식을 나타내는 대표적인 말은 그냥 \'예\'이었다. 이 \'예\'라는 말이 홀로 의식을 나타내기도 했고 다른 말과 결합하여 여러 가지 의식을 나타내는데 사용되었다. \'예배\'라는 단어는 \'절하다\' 또는 \'예\'를 의미하는 \'禮\'와 구부리다 또는 \'절하다\'를 의미하는 \'拜\' 의 한자어로 구성되어 있다. \'예\'는 전통적으로 종교적 의미와 윤리적인 의미를 나타내는 말로 사용되어 종교적으로는 제사와 관련되어 사용되었고 윤리적으로는 인간이 인간으로 해야할 도리를 나타내는 말로 사용되었다. \'배\'는 \'예\'를 표하는 수단으로 사용되어 구체적으로 절하는 것을 의미하고 나아가 경의를 표하는 말로 사용되었다. 이 두 글자가 합쳐진 \'배례\'라는 말이 사용되어 왔는데 그 의미는 \'절하는 예\' 또는 \'절을 하여 예를 함\'이라는 의미를 나타낸다. 우리 개신교에서 이 두 글자를 합쳐서 \'예배\'라는 말을 쓰기 시작했을 때 그 문자적인 뜻은 배례라는 말과 같은 의미로 \'예를 갖추어 절한다\' 또는 \'예를 나타내기 위해 절한다\'가 된다. 이와 같은 어의적인 의미 위에 신학적인 의미를 부여하여 기독교에서의 \'예배\'는 \'그 믿고 의지하는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기위해 경배하는 행위와 그 의식\'을 나타내는 말로 쓰이게 되었다. 그리하여 \'예배\'라는 구체적인 교회 의식은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행위\'를 의미하게 되었다. 여기서 지적하고 싶은 점은 예배라는 말의 일차적 문자적인 의미는 예배를 드리는 이의 마음의 태도를 나타내는 것이지 예배드리는 행위나 의식을 가르키지 않는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우리 개신교회의 현 예배의식에서는 한번도 문자적으로 몸을 굽혀 절하는 의식을 행하고 있지 않기 때문이다. 이와같은 우리 말 예배에서는 예배드리는 이의 마음의 태도와 예배의 대상이 강조되고 있다. 그러니 이와같은 우리 말 예배는 예배드리는 행위가 무엇을 의미하는지 또 그 행위들이 예배드리는 이에게 어떤 의미를 갖는지 또는 무슨 역활을 하는지 설명하기 어려운 약점이 있다. 이와같은 현상은 성서에 나오는 단어로 예배를 표현하는 단어와 우리 말로 예배라고 번역되고 있는 영어의 워쉽에서도 발견할 수 있다. 히브리 성서에서 예배를 나타내는 말로 가장 보편적으로 사용되고 있는 말이 \'히쉬타하봐\' (히브리어로는 이고 원형은 가 아니라 이다)인데, 이 단어는 그릭어로 \'프로스쿠네인\' ( )으로 번역되어 있다. 이 두 단어의 문자적인 의미는 모두 절하는 모습을 표현하는 것으로 \'절하다\'라는 의미를 가지고 있다. 그릭어 \'프로스쿠네인\'은 무릎을 굽혀 절하는 또는 땅에 엎드리는 외적인 행위와 더불어 그런 자세를 통해 표현되는 마음의 존경심을 의미한다. 히브리어 \'히쉬타하봐\'는 허리를 굽혀 절하는 히브리인들의 태도를 나타내는 말인데 이 말이 하나님에게 복종과 경외를 나타내는 예배 용어로 쓰였다. 우리 말 예배와 마찬가지로 이 두 원어 역시 예배드리는 이의 마음의 태도를 강조하여 표현하고 또 예배의 대상인 하나님에 대한 경외심을 강조하는 의미를 가지고 있다. 이런 점에서 우리 말 예배는 이 두 원어에 대한 적합한 번역이라고 할 수 있겠다. 그러나 이 두 원어가 우리 말 예배와 같은 의미를 가지고 있다는 말은 곧 이 단어들도 우리 말 예배가 가지고 있는 단점을 그대로 가지고 있음을 의미하게 된다. 우리 말 예배에 해당하는 영어는 \'워쉽\'(worship)이다. 이 영어 단어는 앵글로-색슨어 (Anglo-Saxon)라고도 불리는 고대 영어 (Old English--A.D. c450-c1150 사이에 사용된 영어를 일컫는 말)의 weorthscipe (weorth = worth, -scipe = -ship)에서 유래하였다. \'가치\'를 의미하는 \'워스\' (worth )와 \'직\'이나 \'상태\'를 나타내는 \'쉽\' (ship )이 합쳐져서 만들어진 이 단어는 처음부터 종교적인 의미로 사용된 말이 아니었다. 워쉽은 오늘날에도 몇 가지 다른 용법으로 쓰이고 있는데 가장 보편적인 의미는 \'가치 또는 존경을 어떤 사람에게 표하는 것\'이다. 그 다음으로 이 \'워쉽\'의 영국적 용법 중에 하나는 과거에서부터 관직에 있는 사람을 부르는 존칭으로 사용되어 왔다는 것이다. 또 다른 용법으로는 영국 국교회의 결혼 예식에 나오는 것으로 그 예식에서 \'나는 나의 몸으로 당신을 워쉽합니다\' (with my body I thee worship)라는 맹서의 말을 사용하게 되어 있다. 이 때의 \'워쉽\'은 \'자신의 몸으로 다른 사람을 존경하거나 또는 귀하게 여긴다\'는 의미이다. 이와같은 \'워쉽\'이 기독교적인 용법으로는 \'하나님에게 존경과 영광을 돌리는 것\' 또는 \'그러한 의식에 참여하는 것\'을 의미하게 되었다. 우리는 여기서 영어의 \'워쉽\' 역시 우리 말 예배와 마찬가지로 예배드리는 사람의 구체적인 행위와 그것이 뜻하는 의미보다는 예배드리는 대상과 또 예배드리는 이의 마음의 태도를 더 강조하는 말임을 알 수 있다. 이상 살펴 본 \'예배\'라는 말은 모두 그 관심을 예배드리는 사람의 내적 태도와 그 예배의 대상에게 돌리고 있있음을 알 수 있다. 예배를 말하고 이해함에 있어서 이 두 요소는 없어서 안될 중요한 요소임에는 틀림없다. 그러나 이와같은 예배의 이해에서는 예배의 대상과 예배드리는 이의 마음의 태도만 너무 강조한 나머지 예배 행위가 예배하는 사람에게 미치는 영향에 대하여 전혀 고려되지 않을 수 있다. 즉 이러한 예배 이해에서는 예배드리는 인간이 소홀하게 취급될 수가 있다는 말이다. 실제로 오늘날 우리 개신교는 이런 의미의 예배를 강조한 나머지 하나님에게 예배드리는 그 자체가 아주 중요한 것으로 강조되고 있고 그 예배가 신도들에게 미치는 영향에 대해서 예배학적으로 이해하려는 노력을 하지 않고 있는 실정이다. 이와같은 예배 이해에 필수적으로 덧붙여져야 할 요소는 예배에 있어서 예배드리는 자의 역활과 그 예배의 결과와 그 예배 행위가 예배자들에게 미치는 영향에 대한 인간학적인 이해이다. 왜냐하면 예배는 비록 하나님에게 영광을 돌리는 의식이기는 해도 행위적인 관점에서 보면 그 행위를 하는 주체는 어디까지나 인간이요 예배 행위의 주체인 인간은 어떤 형태로든 그 예배 행위에 영향을 받고 있기 때문이다. 우리 말 \'예배\'가 가지고 있는 이런 약점을 보완하고 예배의 의미를 더 온전하게 이해하기 위해 우리는 \'예배\'외에 새로운 낱말을 필요로 하는데 우리의 이 필요를 \'리터지\' (Liturgy)라는 말이 충족시켜 준다. 이제 이 \'리터지\'의 의미와 그 말이 뜻하는 예배의 개념을 살펴 보기로 한다. \'리터지\'의 의미와 \'리터지\'로서의 \'예배\' 한국 개신교에서 예배를 표현하는 용어는 \'예배\'라는 단어 하나 뿐이다. 그러나 서구의 교회에서는 예배를 표현하는데 두 단어가 주로 쓰이고 있는데 영어의 표현으로는 워쉽과 \'리터지\' (Liturgy)이다. 이 두 단어 중에서 워쉽은 주로 개혁 교회에서 예배를 표현하는 말로 쓰이고 리터지는 예배 의식을 표현하는 전통적인 용어로 로마 카톨릭, 성공회등 예배를 중시하는 전통에서 가장 보편적인 말로 쓰이고 있다. 이미 언급한대로 우리말 예배에 해당하는 영어는 워쉽이지 리터지가 아니다. 우리 개신교에서는 구별없이 예배라고 쓰여지는 이 두 단어는 예배의 서로 다른 면을 강조하는 말로 결코 같은 의미로 쓰여서는 안되는 말이다. 이제 우리는 이 리터지라는 말의 의미를 살펴보도록 한다. 리터지에 해당하는 성서적 표현으로는 두 가지 단어가 사용되고 있는데 \'라트레이아\' (헬라로는 이며 그 동사형 ) 와 \'레이투르기아\' (헬라어로는 이며 그 동사형은 ) 이다. 라트류오는 \'섬기다\'라는 뜻으로 하나님이나 그 밖의 신들을 섬기는 것, 특별히 제사나 다른 의식을 통하여 섬기는 것을 나타내는 말로 쓰였다. 이 말에 해당하는 히브리어의 명사형은 \'아보다\' ( 이며 원형은 )로 역시 봉사를 의미하고 있다. \'레이투르게오\' 역시 \'봉사하다\'를 의미하는데 성막이나 성전에서 제사장들이 하나님을 섬기는 것을 표현하는 말로 주로 사용되었다. 이 말은 \'섬기다\'를 뜻하는 히브리어 쉐레트 ( )에 해당하는 헬라어이지만 비슷한 의미를 지닌 히브리어 \'아보다\'를 나타내기 위해서도 사용되었다. 이 \'레이투르기아\'라는 말에서 리터지라는 말이 파생되어 나왔는데 이 말이 지니고 있는 어의적인 의미와 세속적인 용법을 살펴 보도록 하겠다. \'레이투르기아\'는 사람 혹은 백성을 뜻하는 헬라어 \'레오스\' ( ) 또는 \'라오스\' ( )와 일을 뜻하는 헬라어 \'에르곤\' ( )의 합성어로 그 문자적인 의미는 \'사람의 일\'이다. 이 사람의 일이란 무엇보다도 인간이 살기 위해 행하는 생산을 위한 노동을 의미했다. 더 나아가 사람의 일로서 \'레이투르기아\'는 부역에 동원되어 또는 자발적으로 국가 단체를 위해 하는 노동이나 수고를 의미했다. 이것이 보편적인 용어로 사용되면서 사회단체를 위한 모든 일과 종이 주인을 위한 일과 또 친구가 다른 친구를 위한 일을 의미했다. 뿐만 아니라 이 말은 그리스 사회에서 종교적인 의식과 축제의 여러 행위들을 나타내는 말로 사용되었다. 즉, 축제에서 춤추고 노래하는 일 뿐만 아니라 종교의식 중에서 희생 제사를 드리는 모든 일들이 신이 인간에게 명한 신을 섬기는 인간들의 일이었다. 여기서 우리가 알 수 있는 것은 사람의 일로서 \'레이투르기아\'는 사람이 살면서 행하는 모든 중요한 행위를 다 포함하는 포괄적인 의미로 사용된 것을 알 수 있다. 즉 사람의 생존을 위해 필요한 생산 활동만이 일이 아니라 사회적인 봉사활동과 종교적인 행위 역시 레이투르기아인 것이다. 이처럼 생산 활동과 종교적인 행위를 별개의 것으로 구별하지 않고 모두 사람의 일이라고 부른 것은 사람이 살기 위해서는 생산을 위한 노동만 필요한 것이 아니라 종교적인 행위도 필요한 것임을 의미한다고 할 수 있겠다. 이와같이 \'레이투르기아\'가 생산을 위한 노동과 종교적인 행위를 모두 가르키는 말로 쓰게 된 까닭은 이 말이 쓰이던 당시의 사회적인 상황에서 찾아 볼 수 있겠다. 기독교가 발생하기 전의 그리스 사회는 오늘날에 비해 매우 단순한 산업 구조를 가진 전 근대적인 부족 국가 사회로 사람들의 삶은 부족이나 작은 마을 공동체를 중심으로 이루어졌다. 이러한 부족 공동체에서는 오늘날 볼 수 있는 개인주의를 찾아 볼 수 없고 모든 일들이 집단적으로 이루어졌다. 생산을 위한 노동 뿐만아니라 공동체에서 행하는 절기 축제나 종교 의식은 모든 구성원의 협력과 참여를 요구하는 공동체의 일이었다. 이와같은 사회 생활에서 생산 활동 뿐만아리라 종교 축제나 의식 모두는 모든 구성원의 일이었지 몇몇 관심을 가진 사람의 개인적인 신앙 행위가 아니었다. 즉, 그들은 살기 위해 서로 돕고 일했듯이 그 노동에 신성한 의미를 부여해 주고 나아가 공동체의 삶을 보장해 주는 제의 행사를 공동체의 일로 함께 거행했던 것이다. 이러한 그들에게는 생산 활동이던 종교 의식이던 모두 그들이 살기 위해 해야 할 \'레이투르기아\'이었던 것이다. 이러한 그들에게는 오늘날의 현대 산업사회에서 볼 수 있는 일과 종교 생활의 분화 현상을 발견할 수 없다. 즉 일하는 생활과 예배드리는 생활이 서로 별개의 것으로 구별되지 않았다는 말이다. 이와같은 현상은 비단 고대 그리스인들에게만 해당되는 것이 아니라 근대 산업 사회가 등장하기까지 모든 고대사회에 해당하는 보편적인 현상이었다. 그들 고대인들에게는 일과 종교의식이 하나로 유기적인 삶의 세계를 형성하고 있었는데 이 하나의 유기적인 일의 세계를 그들은 그 일의 성격에 따라 세속적인 (profane)일과 거룩한 (sacred)일로 구별하였다. 그래서 생산을 위한 노동과 그 밖에 사회 생활에 필요한 일은 세속적인 \'레이투르기아\'요 그 세속적인 삶에 의미를 주고 그 삶을 보장해 주는 여러 종교 제의와 축제는 거룩한 \'레이투르기아\'이었다. 이와같이 사람의 일을 의미하는 \'레이투르기아\'가 사회 공동체나 국가 단체를 위하거나 종교 의식에서 신을 위한 것이 되면 \'섬김\' 또는 \'봉사\'라는 말로 표현되었다. 우리는 여기서 신을 섬기는 일로서 \'레이투르기아\'는 거룩한 봉사 또는 거룩한 섬김으로서 \'성사\' (聖事)임을 알 게 된다. 이러한 \'레이투르기아\'에서 파생된 리터지의 문자적인 의미는 \'사람의 일\'임을 알 수 있고 사람의 일로서 \'리터지\'는 삶에 필요한 다른 일과 마찬가지로 인간의 삶을 위해 필요한 일임을 알 수 있다. 이와같은 사람의 일로서 리터지의 예배학적인 의미는 하나님을 섬기는 거룩한 일 곧 성사인 것이다. 비록 하나님을 섬기는 것으로서의 리터지는 성사이지만 그 일차적인 의미는 어디까지나 삶의 의미를 얻고 삶을 보장받는 의미에서의 거룩한 사람의 일인 것이다. 성사로서 예배는 구체적으로 하나님과 대화하는 일이다. 즉 예배드리러 모여서 하는 모든 그리스도인들의 상징적 의식적인 행위인 성사는 하나님과의 대화이다는 말이다. 이런 의미에서 예배학에서는 리터지 곧 성사를 \'제일의 신학\' (theologia prima)라고 부른다. 신학 (theo-logia)이란 \'하나님과 대화\' (God-talk)를 뜻하는데 \'제일의 신학\'으로서 성사는 교회 공동체가 하나님과 대화하는 언어이기 때문이다. 여기서 언어란 예배에서 사용하는 말 만을 가르키는 것이 아니라 예배에서 행해지는 모든 행위를 가리키는 것임을 거듭 강조할 필요가 있다. 이렇게 하나님과 대화로서 리터지가 거룩한 일인 까닭은 그것이 무엇보다도 거룩한 하나님과의 대화이기 때문이요, 또 대화의 결과 대화하는 인간들 역시 거룩한 존재로 변하기 때문이다. 여기서 우리는 하나님과의 대화로서 성사는 하나님에게 영광을 돌린다는 의미의 워쉽과 그 강조점에 차이가 있음을 알 수 있다. 성사로서의 예배에서는 예배드리는 인간의 행위가 하나님과의 대화 행위로서 언제나 강조되고 있는 것이다. 예배를 성사로 이렇게 이해하게 되면 우리는 이제 성사에서 사용하는 모든 말 하나 하나에, 행동 하나 하나에 관심을 기울이고 그것의 의미와 그 성사적 행위가 성사에 참여하는 자들에게 미치는 영향에 관심을 가져야 할 당위성을 이해하게 된다. 즉 하나님과 대화의 장으로서의 성사의 의미와 그 성사를 행하는 인간과 그 성사를 구성하는 구체적인 행동과 그것이 예배드리는 자들에게 미치는 영향 등의 이해를 위한 학문적 노력을 해야 한다는 말이다. 예배학은 바로 이와같은 과제를 그 주된 관심사의 하나로 삼아 연구하는 신학의 가장 중요한 한 분야이다. 마치는 말 한국의 개신교회가 그 종교 의식을 가르키는 말로 사용하고 있는 \'예배\'라는 단어는 이미 지적한대로 예배드리는 사람의 마음의 태도와 그 예배를 받는 하나님의 거룩함을 강조하는 표현이다. 이와같은 예배 이해가 가져 올 수 있는 첫번째 문제점은 자칫 거룩한 하나님에게 예배드리는 그 시간만을 거룩한 시간으로 인식하도록 하고 더 나아가서 하나님 앞에서 예배드리는 한 시간만 경건한 마음으로 예배를 잘 드리면 예배의 목적을 달성한 것으로 생각하게 할 경향이 있다는 것이다. 그 결과 예배와 일상생활과는 아무 관련이 없는 것으로 간주하도록 하여 예배와 매일의 삶과의 단절이 일어 나기 쉽다. 두번째로 지적할 수 있는 문제점은 거룩한 하나님에게 예배를 드리는 인간의 정성과 마음이 너무 강조됨으로 자칫 하면 하나님의 거룩한 은총을 경험하는 것으로의 예배가 아니라 거룩한 하나님 앞에 나아가는 인간의 노력을 중시하는 율법적인 예배 이해가 되기 쉽다는 점이다. 비록 그리스도인들은 하나님의 은총으로 부름을 받았기 때문에 예배드리러 모이지만 그렇게 모이는 궁극적인 목적은 그리스도로 말미암은 하나님의 은총을 더욱 깊이 체험하여 하나님의 거룩에 참여하기 위하여 나오는 것이다. 그러기 때문에 예배의 중심과 강조점은 인간을 변화시키고 성화시키는 하나님을 만나는 사건으로서의 예배의 행위 그 자체에 두어야 하지 하나님 앞에 나아가기 위한 인간의 노력에 중점을 두어서는 복음적인 예배 이해라 할 수 없게 된다. 이러한 예배 이해가 가지고 있는 문제점은 결국 창조주로서 예배받는 하나님을 예배드리는 인간과 철저히 구별된 존재로 강조하는데 그 원인이 있다고 하겠다. 비록 하나님은 모든 피조물과는 구별되는 전적으로 거룩한 초월적인 존재이기는 하나 한편 하나님은 그 만든 피조물과 함께 하는 임마누엘의 하나님이다. 다시 말하면 창조주 하나님은 예배를 받는 거룩한 분일 뿐만아니라 예배 행위 속에 그리고 예배드리는 인간들의 삶 속에 언제나 함께 하는 내재적 존재이기도 하다. 그러기 때문에 온전한 예배의 이해에서는 예배받는 하나님의 초월적인 거룩과 예배하는 인간과 함께 하는 하나님의 내재적인 은총이 모두 포함되어야 하는 것이다. 예배라는 우리 말이 가져 올 수 있는 이런 문제점을 보완해 줄 수 있는 용어인 리터지 곧 성사는 홀로 거룩하면서도 동시에 인간과 함께 하는 하나님 이해를 그 신학적인 근거로 가지고 있다. 즉 리터지로서의 예배에서는 거룩한 하나님의 초월성만이 강조되는 것이 아니라 임마누엘 하나님의 내재적인 은총이 함께 강조된다. 이러한 하나님 이해의 근거위에서 예배를 거룩한 행위 곧 성사라고 하게 될 때 그것이 거룩한 하나님 앞에서 인간들이 그 정성을 모아 거룩하게 행하는 일이기 때문에 거룩한 일이라 하지 않는다. 그대신 거룩한 하나님과의 대화이기 때문에 거룩한 일이다라고 한다. 성사로서의 예배 역시 사람들의 정성과 마음을 모으는 일을 중요하게 여기지만 가장 우선적인 강조점은 성사에서 일어나는 하나님의 은총의 체험에 두고 있다. 즉 성사로서의 예배에서는 거룩한 하나님 앞에 나아오기 위해 정성을 다하여야 한다고 강조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하나님 앞에 나아올 수 있는 것은 우리의 정성 때문이 아니라 하나님의 부르는 은총에 대한 응답으로 가능하기 때문이다. 이러한 리터지로서의 예배에서는 예배드리는 시간을 거룩한 하나님 앞에서 예배드린다는 그 이유 때문에 특별히 거룩한 시간으로 여기지 않는다. 그대신 예배드리는 그 시간이 중요한 것은 단지 하나님에게 거룩한 예배를 드리기 때문이 아니라 하나님과의 대화로 하나님의 은총을 체험하는 거룩한 사건이 일어나기 때문에 거룩한 일이라고 한다. 리터지로서의 예배에서는 예배 시간이 아니라 예배에서 일어나는 체험이 중요한 것이기 때문에 하나님에게 예배드리는 것으로 믿는 사람들의 의무를 다한다는 생각이 들어설 자리를 주지 않는다. 또 그 예배 시간 자체를 다른 일상의 삶과 관계없는 특별한 시간으로 여기지 않게 된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은총을 체험하는 시간은 예배시간에만 국한되지 않고 일상의 삶에서도 가능하기 때문에 하나님의 은총의 체험이 일어나는 모든 순간을 귀한 것으로 여기도록 한다. 이렇게 성사로서의 예배에서는 하나님과 대화로서 예배 행위을 중시하게 되니 자연히 예배 행위 속에서 자신을 나타내는 분으로서의 하나님에게 눈을 돌리게 되고 그런 하나님을 만나기 위해 마음을 여는 일에 강조점을 두게 된다. 또 하나님을 만나는 일은 예배에만 국한된 것이 아니라 마음을 열어 놓고 살아 가는 모든 순간이 하나님을 만나는 시간이 될 수 있다는 면을 강조하게 된다. 이러한 강조는 성사에 참여하는 자들로 하여금 예배 때에 가진 하나님을 향하여 열린 마음으로 살아 가도록 하고 그래서 언제든지 찾아 와서 만나 주는 하나님을 성사 밖에서도 경험할 수 있도록 해 준다. 즉 삶의 매 순간을 열린 마음으로 살아 가도록하여 하나님을 만나는 삶이 되게 함으로 삶과 예배를 근본적으로 틀리는 것으로 구별할 필요가 없도록 하고 나아가서 하나님의 은총을 체험하면서 사는 모든 삶이 곧 성사가 되도록 한다. 성사로서의 예배에서 열린 마음을 강조하는 것은 분명히 거룩한 하나님이 기뻐받는 예배를 드리기 위해 인간의 정성을 모아야 한다는 예배 이해와는 차이가 난다. 왜냐하면 여기서는 하나님 앞에 나오려는 인간의 노력이 아니라 우리 가운데서 그 모습을 드러내시는 하나님의 은총을 강조하고 그 은총을 체험할 수 있는 마음의 준비를 강조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와같은 하나님 은총의 체험으로서의 성사는 구체적으로 인간을 변화시키는 원천이 되고 성사에 참여하는 사람들에게 삶의 원동력을 제공하는 생명의 샘과 같은 역활을 한다. 성사를 통해 하나님의 은총으로 말미암아 새롭게 된 성도들은 이제 그들의 일상의 삶 속에서 새로운 모습으로 살게 되며 그 결과 일상의 삶이 거룩한 예배로 바뀌게 되는 것이다. 이것이 성사로서의 예배에 참여하는 자들이 누릴 수 있는 하나님의 은총이요, 예배를 성사라고 하는 소이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