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교회 예배와 통일
한국교회 예배와 통일
박성원 목사
D.Min. 샌프란시스코신학대학원
現 W.A.R.C. [협력과 증언]부 총무
역사 학자들은 이제 동서 냉전을 과거 시제로 기록하고 있다. 동, 중유럽의 사회주의 체제의 붕괴, 독일의 통일, 구 소련의 해체 등으로 반 세기 동안 세계를 양분했던 냉전 체제는 종식되었다. 그러나 지구의 한 모퉁이 한반도에서는 이 냉전 체제가 현재 시제 남아 있다. 세계는 한반도 분단이 얼마나 심각한지 상상하지 못한다. 오십년동안 남북간에는 전화나 편지는 물론, 공중파를 통한 텔레비전 시청도 불가능하였고 천만명 이상의 이산가족이 서로 다른 편에 있는 부모나 친척 형제자매의 생사 자체도 알지 못하고 다른 편의 체제에 대해 고무 찬양은 물론 그 쪽 사람들과의 접촉마저도 곧 국가보안법 위반이란 중죄에 해당하게 된다는 이야기를 하면 세계인들은 이해할 수 없다는 표정을 짓는다. 하물며 아프리카에서도 내전이 발생하면 이웃 나라로 피난 갈 수 있고 이웃나라는 유엔의 권고에 따라 인도주의 원칙에 의해 난민을 수용해 주는 등 유연성이 있지만 남북간에는 이런 가능성이 전혀 없는 비인도적 상황이 매일 전개되는 곳이다.
이 상황 속에서 사랑과 화해, 정의와 평화를 선포해 온 기독교의 메시지와 그 메시지를 영혼 깊은 곳과 역사 현실 속에 담는 기독교의 예배는 남북 분단 50년 동안에 어떤 기능을 해 왔으며 이 갈등과 모순에 대해 기독교의 예배는 어떻게 응답해야 하는가? 한반도의 평화와 통일을 위해 예배는 어떤 공헌을 할 수 있으며 이를 위해 어떤 예배신학을 가져야 하고 정치적, 군사적, 이념적 대결 속에서 예배는 무슨 메시지를 선포해야 하는가? 이 문제는 단순히 예배의식의 문제가 아닌 역사 상황속에서의 복음의 증언의 문제이며 민족 고통에 하나님의 은총과 해방을 선포하는 일이다.
1. 성찬 속에 만나는 남북의 교회
1986년 9월 5일 금요일 오후 스위스 글리온(Glion) 리기 보두와(Righi Vaudois) 호텔에서는 분단 40년만에 처음으로 남북 교회 대표들이 그리스도의 몸과 피를 나누는 성만찬에 참여하고 있었다. 당시 이 모임을 주도했던 WCC 국제위원회의 직원이었으며 현재 북한 식량 지원을 위해 평양에 상주하고 있는 카나다 루터교회 목사인 에릭 바인가르터너(Eric Weingartner)는 이 \"평화에 대한 기독교적 관심과 성서적, 신학적 기반\" 이란 남북 그리스도인의 4일간의 협의회의 절정은 바로 성만찬이었다고 회고했다.
가장 극적인 순간은 집례자가 회중으로 하여금 서로 화해와 평화의 인사를 나누 도록 했을 때 일어났다. 가벼운 악수로 시작된 평화의 인사는 이내 뜨거운 포옹 과 눈물로 이어졌으며 이는 모든 이들을 감격하게 했다. 이번 모임에서 후대에 물려줄 비중 있는 성명서가 통과되기를 기대한 이들은 실망했을 것이다. ... 그러 나 주요한 성과는 수사적인 말이나 선전이 아니라 성만찬의 나눔이었다. 성만찬 은 교회의 일치와 인류의 일치를 상징하는 표징으로서 화해와 평화가 예수 그리 스도의 살과 피를 통해 하나님의 선물로 주어졌다는 것을 상기시키는 것이다.
남북의 그리스도인들은 이 협의회를 위해 평양과 서울에서 각각 다른 시간에 제네바에 도착했다. WCC측은 남북 대결의 민감함을 의식하여 대표단들은 서로 다른 호텔에 각각 투숙시켰다. 9월2일 남북 교회 대표들이 제네바에서 약70킬로 떨어진 글리온으로 향할 때 각각 다른 차로 도착했다. 2일부터 5일까지 진행된 첫 번째 회의는 딱딱하고 공식적인 격식을 갖춘 긴장된 분위기 속에 진행되었다. 합의문을 작성할 때도 긴장과 의심과 거리감은 여전했다. 그러나 그 긴장과 경계는 그리스도의 피와 살을 나누는 성찬에서 완전히 녹아 내렸다. 성찬은 40년간의 세월과 이념의 거리를 순식간에 좁혀 버리고 그리스도안에서 민족의 하나 됨을 느끼게 하였다.
1988년 11월 남북 그리스도인들은 글리온 제 2차 협의회를 위해 다시 제네바에서 만났다. 북한 교회 대표들은 회의를 위해 글리온으로 가기에 앞서 제네바 한인 교회 창립 10주년 예배에 함께 참여하였다. 이것은 비록 외국이기는 했으나 북한 기독교인들이 남한 그리스도인들을 에큐메니칼 기구가 아닌 일반 교회에서 만나 함께 예배드린 최초의 경험이었다. 북한 대표들의 가슴에는 여전히 김일성 뱃지가 달려 있었다. 그러나 작고한 고 기준 목사를 비롯하여 고 김운봉 목사, 이성봉 목사, 기독교도연맹 국제부 엄영선 간사, 여성 대표 이문영 여사와 통역 김혜숙 씨등 예배에 참석한 그들의 자세는 진지했고 예배에 앞서 헌금도 준비했다.
예배의 부름에 이어 성시교독이 이어지고 사도신경을 하게 되었다. 고 기준 목사등 북한 기독인 형제자매들은 엄숙한 표정으로 사도신경으로 신앙고백을 하고 있었다. \"전능하사 천지를 만드신 하나님 아버지를 내가 믿사오며......\" 고 기준 목사는 예배후 \"많은 사람들이 북한 그리스도인들을 보고 공산주의와 기독교 신앙을 어떻게 함께 가질 수 있느냐는 의문을 갖는데 거기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는지\" 묻는 질문에 \"기독교나 공산주의가 평화와 평등, 해방과 정의를 위해 일하는 데는 같은 목표를 두고 있기 때문에 함께 일할 수 있다. 그러나 기독교와 공산주의는 근본적으로 다른 출발점을 갖고 있다. 공산주의는 만물의 근원이 물질에 있다고 믿고 있고 \'우리\' 기독교는 하나님이 만물의 근원이라고 고백하고 있다.\"고 대답했다. 고 기준 목사의 이러한 설명은 교회에서 그들이 고백하는 사도신경의 고백이 내용 없는 고백이 아님을 확인시켜 주었다.
조선기독교도연맹 대표중 현 평양 봉수교회 담임 목사인 이성봉 목사는 제네바 국제공항에서 평양으로 떠나기에 앞서 이런 아쉬움을 표현했다. 이번 글리온 2차 모임은 여러 가지 유익함이 많았는데 한 가지 아쉬움이 있었다면 제네바 한인 교회 교우들과 함께 약 2시간쯤 실컷 찬송을 불러 보았더라면 참 좋았을텐데라는 아쉬움을 표현했다. 해방전 감리교 신자였던 이성봉 목사는 찬송의 기쁨과 찬송을 통한 하나 됨의 의미를 알고 있었고 그 위력을 알고 있었다.
남북한 교회 대표의 만남은 이후 동경에서, 미국에서, 호주 캔베라에서, 헝가리 데브레첸에서 계속되었다. 함께 신앙고백을 하고 함께 기도하며 함께 떡을 나누고 함께 찬양했다. 이념과 체제가 다른 정도가 아닌 상대방의 이념과 체제는 자국의 체제에 반하는 반체제로, 상대방의 이념은 국가 전복의 위험을 지닌 불온 이념으로 규정하고 접촉을 위해서는 국가의 승인을 받아야 하는 조건 속에서 함께 사도신경을 고백하고 창조주 하나님을 찬양하고 예수 그리스도를 고백하고 성령의 역사를 구하고 그리스도의 살과 피를 함께 나눔으로서 그리스도의 한 몸된 공동체임을 확인하는 이 두 이율배반적인 행위에 대해 어떤 신학적 이해를 해야 하며 이 행위는 그리스도인의 증언 속에서 어떤 의미를 가지는가?
2. 예배의 성서적 이해
구약 학자들에 따르면 창세기 1장의 창조 기사는 소위 제사 문서(Priestly Code)로서 이스라엘 민족이 바벨론 포로 생활을 배경으로 작성된 문서이다. 바벨론 제국주의의 횡포에 의해 인간의 생명도 자연의 생명도 여지없이 침탈 당하는 현실 속에서 과연 인간의 생명과 세상의 피조물에 대한 소유권이 누구에게 있느냐에 대한 선언에서 창세기는 낮과 밤, 빛과 어두움에서 비롯하여 인간에 이르기까지 이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것의 존재의 근거는 인간도 아니고 바벨론 신화도 아닌 하나님임을 선포한다. 6일 동안의 천지창조 이야기는 창조의 과정이나 프로그램을 보고하려는 것이 아니라 바벨론 포로 시기의 영적 각성 운동의 하나인 안식일(Sabbath)의 구조 속에 하나님의 창조를 선언한 것이다. 따라서 창세기1장의 이야기는 예전적 시각에서 읽어야 하고 사실적으로 세상은 하나님의 창조물이며 하나님은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만물의 창조주이심을 예전적 감각으로 선언하는 것이 바로 창세기이다. 창세기 예배의 주요 메시지는 하나님은 만물의 창조주이시며 주권자이시라는 것이다.
곧이어 구약성서는 족장들의 개인적인 하나님의 경험을 열거하고 있다. 창세기 12장은 아브라함이 갈데아 우르를 떠난 것에 대한 배경 설명을 생략한 채 그것은 하나님의 부르심이었다는 신학적 해석을 하고 있으나 외경 유딧서 5:6-8은 아브라함과 그 일족이 조상들의 신을 섬기는 방법을 버리고 자신들의 방법대로 하나님을 섬기기로 한 대가로 고향에서 추방되기에 이르렀다는 야사(野史)를 밝히고 있다. 이로써 아브라함은 유랑의 길에 섰으며 자기들의 여정 속에 하나님이 늘 함께 하심을 경험했다. 이들은 한번의 여정을 마친 다음에는 반드시 돌로 재단을 쌓고 그늘의 여정에 함께 하신 하나님을 예배했다. 창세기 12장 이후에는 족장들이 움직이고 정류한 곳곳에 이렇듯 돌단을 쌓은 흔적이 나타나고 있는데 여기에서 예배의 기능은 역사의 저장소(Sanctuaries as Depositories of History)로서의 기능을 하고 있다. 돌단을 쌓은 곳은 단순한 기념비적인 장소가 아니라 족장들의 역사의 의미심장하고 영속적인 내용들이 축적된 곳이며 그들의 유랑과 종교적 경험과 신앙의 경험들을 보존하는 의미를 지니고 있다. 이스라엘 민족이 때대로 그들의 유랑에서 돌아오면 이곳을 순례하는 이유는 족장들의 역사의 실마리로 되돌아가기 위한 예전적 이유와 역사적 이유 둘을 동시에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출애굽은 구약의 모든 사건의 기원이듯이 예배에 있어서도 원천적인 의미를 가지고 있다. 애급의 노예의 삶에서 자주 민족으로의 해방인 출애굽은 이스라엘 민족이 그들의 모든 현실에 대한 인식을 구성케하는 중심적 사건이었다. 즉 출애굽은 이스라엘 역사와 영성의 지주가 되었다. 이스라엘 민족은 이 정치적 역사적 사건 속에서 하나님을 만났고 이로써 하나님은 역사 속에 현존하심을 경험했다. 이스라엘은 이 사건을 그냥 과거 역사의 한 사건으로 기억하지 않았다. 그 사건이 계속 현재적 의미를 갖고 현존화 되기를 바랐다. 그들은 출애굽의 역사적 사건을 유월절이란 제의에 담았다. 원래 가나안 농경 절이었던 축제에 그들이 경험한 역사적 해방과 자유의 경험을 담았다. 이것은 인간 역사가 자기들의 역사를 객관화하기 위해 제의를 사용한 최초의 사건이었다. 역사적 사건은 제의 적으로 객관화 되여 지속적으로 축연되지 않으면 과거의 사건으로만 남아 있게 된다. 이 사건이 항상 현재적 경험으로 재생되기 위해서는 제의에 담아야 한다. 이로써 역사적 경험은 바로 그것이 제의 속에서 축연될 때마다 현재화(Enactment)되는 것이다. 이런 의미에서 유월절은 곧 역사의 제의적 객관화(cultic objectification of history)였고 역사적 정치적 재생기(historical-political reactivators)가 되었다. 성만찬은 예수의 죽음이란 역사적 사건을 항상 현재화하는 이런 의미를 가지고 있다. 출애굽 예배인 유월절은 세 가지 큰 의미가 있다. 첫째 민족이 집단적으로 역사적 사건 속에서 하나님을 경험한 사건이며, 둘째 이 역사적 사건을 예배에 담는 역사의 제의적 객관화를 시도했고, 셋째 예배를 통하여 그 역사적 의미를 항상 현재화하였다.
이러한 예배의 전통은 이스라엘 종교가 국가 체제 속에 안주하면서 제도화되기 시작하였다. 다윗이 국가를 세우고 이스라엘 국가의 근본이념인 야웨신앙을 관장하도록 제사장을 임명하고 다양한 예배를 통해 이스라엘 민족의 영성을 지속시키려 했으나 이스라엘 종교는 정치적 권력에 예속화되어 버리고 가나안 제의와 대립하면서 점점 제도화되어 갔다. 결국 제의가 제 기능을 잃어버리고 국가권력의 횡포에 대해 침묵하거나 권력의 횡포에 일조 하게 되었을 때 예언자들은 신랄하게 이러한 제도화된 예배를 비판한다. 미가, 아모스, 이사야등 예언자들은 지속적으로 예배의 본질은 정의와 자비임을 상기시키며 당시 권력의 오만함과 부패, 이로 인한 사회 정의의 실종, 가난한 자들과 갇힌 자들이 겪는 참혹한 현실에 대해서는 전혀 관심이 없는 형식화되고 제도화되고 미화된 예배를 신랄하게 비판하며 이러한 예배는 하나님이 받지 않으신다고 단언한다.
그러나 이스라엘 민족은 이 비판을 겸허하게 받아들이지 않았으며 바벨론 포로의 경험을 하게 되고 작게나마 제사장들의 역사적 반성이 있었으나 그 본래적 의미는 곧 망각된 채 다시 종교화되고 제도화된다. 이런 상황 속에서 예수 그리스도가 오셨다.
예수 그리스도의 구원의 궁극적 목표는 모든 민족과 나라가 다 하나님의 백성임을 선언하는 것이었다. 여자와 아이들도 하나님의 백성의 범주에 속하며 종교적 도덕에 기초하여 사회적으로 소외되었던 죄인과 세리들도 하나님이 사랑하시는 자들로 선언되었으며 사마리아 사람도 나아가 이방인도 하나님의 백성의 범주에 포함시켰다. 이러한 하나님의 집(Household of God)과 그 광역화 작업은 에베소서 2장에 와서 절정을 이룬다. 이방인과 유대인의 구별이 없어지고 하나님의 선택의 인위적 조작이 허물어지고 이방인과 유대인이 같이 하나님의 백성이 된다. 그리스도는 우리의 평화로 선언된다.
예수 그리스도의 예배의 초점은 하나님의 은총이 미치는 영역을 유대인이라는 좁은 공간에서 우주적으로 확대하였으며 세계 만민을 하나님의 백성으로 끌어안는 것이었다.
3. 역사 속에서 예배의 증언
성서 이후 최초의 예배 문서로 밝혀진 디다케(Didache)는 성만찬에 대해 이런 교훈을 남겨 놓았다. \"자기 동료와 싸움을 한 사람은 그들이 화해하기 전까지는 성찬에 참여하지 못하게 하라.\" \"이 떡이 전에는 산에 흩어져 있었는데 함께 모임으로 하나의 일치를 이루듯이 교회도 땅 끝까지 흩어져 있으나 함께 모여 하나님의 나라를 이루게 된다.\" 이 두 인용은 평화와 일치가 예배의 본질적 의미임을 밝히고 있다.
순교자 성 저스틴(St. Justin)은 성만찬은 그리스도인들이 고아와 과부, 혹은 병으로 도움이 필요한 자, 이방인들이 에게 그들의 헌금을 가져오는 순간이라고 했다. 성 키프리안(St. Cyprian)은 가난한 자를 위한 헌금 없이 오는 부자가 있다면 그들은 성찬에 참여하지 못하게 하였다. 교부들은 약한 자를 억압하는 자들로는 헌금을 받지 말라고 가르쳤다.
밀라노의 교부 암브로시우스(St. Amrose)는 데오도시우스(Theodosius)황제가 데살로니카에서 수천 명의 시민을 교살하는 대학살을 했다는 통고를 받았을 때 암브로시우스는 데오도시우스황제에게 편지를 내어 대학살에 대해 신랄하게 비판하고 회개를 촉구했으며 당시 전통적으로 행해지던 황제의 승리를 축하하는 미사를 거부했다.
개혁교회의 예배에는 두 가지에 초점이 모아져 있다. 하나는 그리스도의 주권을 굳게 세우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우상 숭배 배격이었다. 종교 개혁자들의 교황 권에 대한 반대나 우상 숭배 배격은 그리스도 외에는 어떤 존재도 인간 숭배의 대상이 될 수 없다는 것의 천명이다. 이의 전통에 따라 칼 바르트(Karl Barth)로 대표되는 독일 고백 교회는 자연신학을 비판한다. 개혁 교회 전통의 예배는 세상 어떤 주권도 그리스도의 주권을 넘어설 수 없다는 의미를 갖고 있다. 개혁 교회 전통은 또한 정치와 복음이 대립될 때 복음의 우선권을 선언하고 있다.
파라과이 아순시온(Asuncion)의 대주교 이스마엘 로론(Ismael Rolon)은 국가 독립 기념일에 전통적으로 행해 온 테 데움(Te Deum)미사 집례를 거부했다. 이스마엘 로론 대주교는 그 이유를 이렇게 밝혔다. \"사회에 연결된 자유와 권리가 조직적으로 유린될 대 해방이 말 이상의 의미를 지니지 못할 때 기독교 공동체와 그 교회가 그들의 삶과 해방의 복음적 선교의 실행에 극심한 방해를 받을 때 국가 독립일 의 영웅적 행위를 기념하는 감사예배의 의미를 전혀 없기 때문이다.\"
위에서 예시한 이러한 예배 관은 예언자의 전통대로 예배는 불의와 억압이 자행되고 있는 동안에는 축연될 수 없다는 신학적 의미를 담고 있다. 다시 말하면 예배와 불의, 예배와 억압은 양립할 수 없다는 의미이다.
3. 한국교회 예배의 정치적 의미
한국교회 예배는 민족적 위기 때마다 역사적 현실에 대해 응답했다. 한국 개신교는 3.1운동을 통해 예배의 정치적 의미 (Political implication of worship)를 경험하게 된다. 기독교 교육을 받은 지성인들이 독립운동에 깊이 관여하고 이에 대한 일제의 견제가 심해짐에 따라 교회의 정치적 참여로 한 민족의 운명보다는 오히려 어렵게 열린 전도의 문이 닫힐까봐 염려한 선교부는 그 특유한 보수적 신앙에 근거하여 교회의 비정치화 작업을 시도한다. 그러나 이러한 정책이 한국 그리스도인들의 정치적 증언의 길을 막지는 못했다. 한국 기독교인들은 성서를 역사적 정황에서 읽었다. 출애굽기는 한국 상황으로 그대로 옮겨져 이해되었다. 3월 1일 평양 한 중학교 교정에서 있은 고종 황제 추모 예배는 독립운동 시위로 그대로 발전되었다. 예배를 드린다는 것은 그대로 행동으로 증언하는데 까지 이르게 되었다. 3.1운동 당시가 한국교회 신앙에 있어서는 보수적 신앙과 진보적 신앙이 완전히 일체가 된 소중한 경험이었다.
그러나 삼일운동에 참여함으로 독립이 오리라는 기대 속에 역동적으로 참여한 한국 그리스도인들은 3.1운동이 성과 없이 끝나자 깊은 좌절을 맛보게 되었다. 한국교회는 3.1운동 여파에 대해 두 가지 방향으로 반응을 보였는데 한 방향은 소수 지식인들과 청년들에 의해서 전개된 것으로서 이들의 접근은 독립 역량을 구체적으로 키우기 위해 농촌 계몽운동 같은 것을 통해 의식화 운동으로 한 방향으로 이루어졌다. 또 다른 한 방향은 부흥 운동이었다. 이 때의 부흥 운동은 3.1운동의 충격으로 인한 좌절을 달래기 위해 말세신앙과 치유와 이적 및 신비주의적 경향으로 흘렀다. 말세신앙은 길 선주 목사에 의해 심어졌고 치유와 이적을 중시한 부흥회는 김익두 목사에 의해 주도되었고 신비신앙은 이용도 목사에 의해 주입되었다. 이때부터 한국개신교회의 예배에는 강력한 이원적 종말신앙, 신유와 이적 추구의 집회, 신비주의 등이 한국교회 예배에 상당히 견고하게 자리를 잡게 된다.
1930년대의 한국교회의 예배가 신비주의, 타계적 말세신앙, 주정주의 등에 입각하였다면 1930년대 말에서 해방 때까지로 이어지는 한국교회 예배의 최고 이슈는 신사 참배 문제였다. 신사 참배의 경험은 예배의 정치적 의미를 다시 한번 경험하는 계기가 되었다. 일제는 단순히 국민의례라고 하면서 신사 참배를 한국교회에 강요했고 한국교회는 제1계명을 범할 수 없다는 차원에서 거부했다. 사가(史家)들은 기독교의 신사 참배 거부가 순전히 종교적이었지 정치적 의미가 없었다고 강조한다. 그러나 신사 참배를 거부했던 한국 크리스천들의 입장보다도 일제 당국의 반응을 보면 정치적 의미가 상당히 짙게 나타난다. 신사참배 거부자에 대한 조서를 통해서 보면 일제 당국이 가장 꺼려한 부분이 재림신앙과 하나님의 나라의 도래였다. 일제는 이 두 가지의 신앙을 역사적으로, 정치적으로 이해했고 그리스도가 왕으로 재림하고 하나님의 나라가 이 땅에 건설되는 것이 곧 일제의 천황이 폐위되고 일제의 지배가 종식되는 정치적인 사건으로 이해했다. 따라서 신사 참배 거부는 일제 당국에 가장 위협적인 종교적 행위가 되었다. 따라서 제1계명의 철저한 준수는 그것이 철저할 때 자연히 정치적 의미를 지닌다.
해방 직후의 상황은 해방의 기쁨으로 예배의 자유를 누리기보다는 신사 참배 문제를 둘러싼 배반의 문제로 교회가 분열되는 아픔을 겪는다. 신사 참배를 한 교역자들은 자숙과 참회의 모습을 보이지 못하고 신사 참배를 끝까지 거부했던 옥중 성도를 중심으로 한 그룹은 그것을 신앙의 순수를 판정하는 기준으로 삼아 신사 참배자들을 숙청의 대상으로 삼았다. 이후 한국 동란으로 이어지는 과정에서 한국 그리스도인들은 무질서 속에 방황하면서 온갖 신흥 종파와 사이비 신앙에 의해 현혹된다. 정치적 혼란과 방황은 종교적 혼란과 방황으로 연결되었다.
1960년대 말에서 70년대 80년대로 이어지는 경제 개발과 군사 독재 상황은 한국 교회에도 적지 않는 영향을 끼쳤다. 군사 정권에 의한 억압적 상황에 대해 대부분의 한국교회는 주정주의적 예배와 치유, 신비, 방언, 성령운동 등으로 특징지어지는 예배를 통해 민중들을 역사적 상황에서 도피하게 하고 피안의 세계로 은신하게 하는 길을 제시했다. 기도원 운동이 왕성히 전개되며 치유와 이적, 탈 현세적 신앙, 신비주의적 성향과 극도의 주정주의적 예배는 그리스도인들의 정치적 의식을 탈 정치화시켰다. 이런 이점 때문에 인권 탄압에 맞서고 정치적 억압에 맞서는 교회의 예언적 예배는 탄압된 반면 성령운동 방향은 자유롭게 발전하였다.
1970년대 군사 정권의 폭압적 상황은 한국교회로 하여금 다시 예배의 정치적 의미를 경험하게 한다. 산업선교로 시작된 노동자의 고난에 참여하는 선교적 경험, 정치적 억압에 대해 민주화 운동으로 맞서는 교회의 경험은 예배가 피안적 위로로서만 존재할 것이 아니라 예언적 소리가 되게 하는 필요를 절감한다. 유신의 선포 이후에 수감된 구속자들의 가족들이 아무로부터도 위로를 받지 못할 때 기독교회관에서 목요 기도회를 시작하게 되는데 이 기도회는 당국이 가장 두려워하는 예배 행위였다. 소수의 그리스도인들이 모여 기도하는 모임에 수백 명의 경찰이 동원되어 경비하는 해프닝을 벌였다. 이 예배는 여의도에서 모인 백만 명이 모이는 예배보다도 이 땅위에 권세 잡은 자들이 훨씬 더 두려워하는 예배가 되었다. 1970년대의 이 경험은 1919년 3.1운동 때와 1930년대 후반의 신사참배때 한국교회가 경험한 정치적 의미를 지닌 예배에 대한 세 번째의 경험이었다.
민족 분단, 통일과 관련하여 한국교회는 분단 40여년동안 전혀 아무것도 행하지 못했다. 국가의 반공주의에 따라 교회는 극심한 반공주의의 이념과 동일화하였다. 박정희 시대에 미국 반공주의를 한국에 수입하기 위해 온 칼 메킨타이어의 영향으로 한국교회는 극심하게 분열되고 교회를 반공주의로 무장한다. 이런 상황 가운데 1988년 한국기독교교회협의회 주도로 그 동안의 타부였던 통일 논의 금기의 전통을 깨고 \"민족의 통일과 평화에 대한 한국기독교회의 선언\"을 발표했다. 이 선언은 한국교회 안에 첨예한 논쟁을 불러 일으켰다. 북한교회의 진정성에 대한 의문이 거듭 제기되었다. 그러나 5공화국의 북방 정책에 따라 남북 그리스도인들의 만남이 제한된 상황 속에서나마 허용되었을 때 많은 보수교회 지도자들은 공산당 정권의 꼭두각시 지나지 않는다고 비방했던 조선기독교도연맹 대표들을 해외에서 만나는데 주저하지 않았다.
한국교회의 통일에 대한 열망은 북한이 최근 맞이한 식량 부족 상황과 맞물려 열광적으로 나타났다. 굶주린 북한 주민을 그리스도의 사랑으로 먹이자는 데 진보적 보수적 교회의 구별이 없었다. 남한 교회가 굶주린 북한 동포를 위해 모은 헌금의 액수는 상상을 초월하였다. 반공 교육을 철저히 받은 어린이들이 저금통을 털었고 교계 지도자들의 방북이 빈번하게 일어났다. 이 위기 상황으로 한국교회는 통일과 관련해 새로운 전기를 맞고 있다.
성서와 역사적 교회의 경험에서 그려지는 예배는 첫째 인간의 모든 이념과 체제, 조작을 넘어서서 존재하는 하나님의 주권을 선포하는 것이며 둘째 인간의 소외, 억압, 가난, 질병, 전쟁은 사회적 불안과 모순에 대해 민감하게 반응하며 거기에 평화와 정의 일치와 화해의 메시지를 선포하는 의무를 행해야 하고 셋째 이러한 사회적 고통이 존재하는데도 이를 외면한 채 형식화되고 제도화되고 미화되는 예배는 의미 없는 예배이며 넷째 예배가 한 인간 체제의 이념에 종속되거나 그것을 찬양하고 섬기는 일을 우상 숭배에 해당하며 혹 이를 강요받았을 때는 단호하게 거부해야 한다.
이런 관점에서 볼 때 한국교회의 예배는 민족의 최대의 모순이며 고통인 분단에 대해 외면할 수 없고 이념과 체제를 넘어서서 하나님의 평화와 정의 일치와 화해의 메시지를 선포해야 하며 분단을 정당화하는 어떤 요구에서 \"아니요\"라고 선언해야 한다.
4. 예배 - 화해의 예술
\"우리 이슬람, 기독교, 유대교 모두는 같은 하나님 앞에 경배합니다. 하나님의 가르침과 계명은 사랑과 진실과 안보와 평화의 메시지입니다.\" 1977년 11월 20일 안와르 사다트(Anwar Sadat)이집트 대통령은 카이로에서 예루살렘으로 날아가 이스라엘 정부와 국회 앞에서 서로간에 숙적이었던 아랍 세계와 이스라엘간에 존재하는 공동의 신앙 유산을 상기시키면서 평화정착안을 제안했다. 사다트는 예루살렘에 있는 홀로코스트 기념 박물관 야드 바궑(Yad Vashem)을 방문하고 방명록에 이렇게 기록했다. \"이제 인류의 모든 고통을 종식시키자!\" 그는 비록 4년 뒤 자기 나라 군인에게 암살 당하고 아직도 중동 평화는 요원하지만 그의 이 평화 주도는 중동의 정치적 힘의 균형과 사회적, 경제적, 문화적 관계를 재구성하는데 결정적인 역할을 하였다.
빌리 브란트(Willy Brant)가 독일 수상으로 재직하고 있을 동안에 폴란드를 국빈 방문한 적이 있다. 브란트는 폴란드 방문중 와르샤와(Warsaw)봉기 기념비에 헌화하기로 되어 있었다. 브란트는 화환을 바치고 약간 고개를 숙여 경의를 표하는 통상적인 의전(儀典)대신에 독일이 폴란드에 가한 억압에 대한 철저한 인식과 사죄의 표시로 이 기념비 앞에 무릎을 꿇었다. 빌리 브란트의 이 전격적인 행동은 통상적인 정치 의전(Political liturgy)을 도덕적, 종교적 차원으로 승화시켰다. 브란트의 이 굴욕적으로 보이는 정치 의전은 일부의 반발이 있었지만 대다수의 독일인과 폴란드 국민간에 화해와 역사 바로 세우기의 상징적인 행위로 환영했고 그 이후 독일과 동구권간에 관계 정상화로 이어졌던 유명한 동방 정책(Ostpolitik)을 실현하는 도덕적 정신적 화해의 기초를 닦았다. 그는 세속화된 프로테스탄트 신자로서 한번도 자기가 매 주일 교회에 가는 신자라고 밝힌 적이 없지만 그는 참회와 용서라는 종교적 개념을 정치에 실천한 것이다. 그가 와르샤와 봉기비 앞에 무릎을 꾼 행위를 \"Confessio oris\", 입술로 행하는 고백이었다면 그의 동방 정책(Ostpolitik)은 \"Satisfactio operis\" 행동으로 고백을 만족케 하는 화해의 예술(Art of Reconciliation)이었다.
예배는 사회적 불의, 모순, 민중이 당하는 억압, 권력의 횡포와 양립할 수 없다, 그것은 바로 예배란 하나님이 창조주이심과 그리스도의 주권을 선포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예배는 어떤 인간의 이념이나 사회적 체제도 능가하는 초월적 의미를 지니고 있다. 예배가 인간의 특정한 이념에 예속될 수도 없고 동일화 할 수 없다. 율법과 복음의 대립이 생겼을 때 예배는 복음의 우선권을 선언한다. 예배의 궁극적 목표는 모든 사람을 그리스도안에 일치하게 하는 것이다. 예배의 목표는 대립과 소외, 비판과 정죄가 아닌 사랑과 용서를 통한 화해를 목표로 한다.
남아프리카의 인권 운동가 넬슨 만델라(Nelson Mandela)가 25년간 감옥에 갇혀 있는 동안 만델라의 아내도 연금을 당했다. 어느 날 데스몬드 투투 주교가 이 만델라의 아내에게 성찬을 베풀러 갔다. 경찰은 투투 주교로 하여금 집에 들어가지 못하게 했다. 그래서 겨우 성찬을 나누도록 허락 받은 장소가 투투의 자동차 안이었고 그 자동차를 경찰이 에워싼 체 떡을 떼고 잔을 나누었다. 몇 달이 지난 다음에 다시 투투 주교가 만델라 부인에게 성찬을 나누러 갔을 때는 이번에는 집은 철조망으로 바리케이드가 쳐졌고 자동차에서 성찬을 나누는 것도 허용되지 않았다. 그래서 이번에는 철조망을 사이에 두고 떡을 떼어 주고 잔을 나누며 성찬을 행했다. 투투주교가 만델라 부인과 경찰이 감시하고 있는 자동차 안에서, 심지어 철조망을 사이에 둔 채로 나눈 그 성찬 이처럼 철조망도 뚫고 나누는 하나님의 함께 하심에 대한 확인이고 증거이며 그 어떤 장벽도 막을 수 없는 하나님의 임재의 증거이다.
한국교회는 \"원수된 것, 곧 의문에 속한 계명의 율법을 자기 육체로 폐하시고 둘로 자기의 안에서 한 새 사람을 지어 화평하게 하신\" 우리의 평화, 그리스도처럼 인간과 인간의 역사가 세운 원수, 의문에 속한 이념을 복음으로 폐하고 남과 북으로 갈라진 이 민족을 한 민족으로 새로 화평하게 하는 일을 할 수 있을까? 우리는 비록 몸으로는 넘어가지 못하지만 우리의 기도와 찬양과 고백과 참회와 교제와 해방의 일치의 복음 선포는 인간적 이데올로기를 넘고 체제를 넘고 군사분계선을 넘어 갈 수 있을까?
주)
1) W.C.C. One World, November 1986, pp.4-7
2) Didache 14:2 The Apostolic Father: A Translation and Commentary, Vol;. 3 \"Barnabas
and the Didache, by Robert A. Kraft (New Tork: Nelson, 1965), p. 173
3) didache 9:4 ibid., p.16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