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3강 마 2:1-3절 강해


왕의 탄생과 박사들의 여행




마태복음 2:1-3



마태복음은 왕의 복음입니다. 이 복음서는 유대 특유의 색채를 띠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이 기사는 한층 더 놀라운 것이라고 하겠습니다.
그 이유는 이 기사가 그리스도의 사역의 세계성을 강조하기 좋아하는 누가가 기록한 복음서에나 차라리 어울릴법한 내용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이방인을 이스라엘의 빛 가운데로 모으는 것 곧 그리스도의 사역의 세계성은 참 유대교의 본질적 요소였습니다. 그러므로 이 기사가 왕의 영광을 묘사하고 있는 마태복음에 기록된 것은 의의가 있고 당연한 것입니다.
그러면 본문의 외적 또는 내적 내용이 전하는 교훈을 살펴보겠습니다.

1. 박사들이 왕을 찾아 예루살렘에 도착함

(1) 헤롯왕 때에 새 왕이 유대 베들레헴에 탄생하셨습니다. “헤롯왕 때에”. 헤롯은 헬라어로는 헤로데스이며, 히브리어로는 호레도스입니다. 헤롯은‘한 영웅의 출신’이란 뜻이며, 예수님과 사도 시대에 유대에서 세력을 휘둘렀던 왕가의 이름입니다.
헤롯왕은 대왕으로 별칭되는 헤롯 대왕이며, 이두매의 안티파터(Antipater)의 아들입니 다.

안토니(Antonny)의 제의와 옥타비안(Octavan)의 동의를 얻어 로마 원로원에서 B.C. 40 년에 유대의 왕으로 임명되었으며, 유대 나라의 강한 반대를 극복하고 B.C. 37년에 왕국을 장악했습니다. 그는 전쟁에 용맹하고 노련했으며 학식이 있고 명민했습니다.

그러나 동시에 극히 의심이 많고 잔인했습니다. 그는 하스몬(Hasmonean) 왕가 전체를 멸족시키고 자기의 통치에 반대한 다수의 유대인들을 사형에 처했습니다. 나아가서는 자기가 극히 사랑한 아내였던 하스몬 가계의 마리암네(Mariamne)와 그녀가 낳아준 자기의 두 아들까지 죽였습니다.
그리고 그는 특히 로마의 관습과 제도를 좋아하여 모방하고, 자기 백성에게 무거운 세금을 부과했습니다. 이런 행위 때문에, 그의 빛나는 성전 재건 업적과 기타 친절한 행 위에도 불구하고 유대인들의 환심을 사지 못했습니다. 그는 나이 70세, 재위 37년, B.C. 4년경에 죽었습니다.

그의 말년에 왕 그리스도께서 탄생하셨습니다. 헤롯은‘왕이 나셨다’는 소식을 접하고 최후 발악으로 베들레헴과 그 모든 지경 안에 있는 두살 아래의 남자 아이들을 학살했습니다.

이 잔인한 군왕의 시대에 우리의 왕 그리스도께서는“유대 베들레헴”에서 태어났습니다.
“유대”는 헬라어로 유다이아, 히브리어로 예후다 입니다. 이스라엘 땅은 네 행정 구역 으로 나누어져 있었는데, 갈릴리는 북쪽 부분, 사마리아는 중앙 부분, 이두매는 동쪽 부 분, 유대는 남쪽 부분이었습니다. 예루살렘은 유대에 있었으며, 헤롯 대왕이 네 행정 구역 모두를 통치하는 수도였습니다.

“베들레헴”, 헬라어 베들레엠은 히브리어 베트-레헴을 음역한 것이며, 베트(집, house)와 레헴(빵, 떡 bread )이 결합된 것으로서 ‘떡집’을 의미합니다.
이 마을은 현대의 베이트 라흠(Beit Lahm)으로, 예루살렘에서 남서쪽 5마일 지점에 위치한 유대 산지의 마을입니다.
이 마을은 유다 지파의 중심지였습니다. 유명한 가문, 곧 베레스의 후손들이 여기에서 살았으며, 사사 시대에 이 가문에는 다윗의 조상 보아스와 아버지 이새가 속했습니다. 이 마을은 다윗의 고향(삼상 16 : 1; 17 : 12; 20 : 6)이었으며, 메시야 탄생지로 예언되었습니다(미 5 : 2). 예수 그리스도는 떡집에서 생명의 떡으로, 다윗의 고향에서 다윗의 자손으로, 메시야의 탄생지에서 메시야로 나오신 것입니다.

(2) 박사들이 새 왕을 찾아 예루살렘을 방문했습니다. 이 동방의 여행자들에 대한 신비에 쌓인듯한 기사에는 확실히 우리의 호기심이나 상상력을 크게 자극하는 무엇인가가 있습니다.
- 그들은 어디에서 왔는가?
- 그들은 얼마의 기간 동안 여행하여 왔는가?
- 그들은 몇명이었는가?
- 그들의 신분은 무엇인가?
- 그들은 그 후에 어디로 갔는가?

이 모든 의문은 아직 미해결로 남아있습니다. 그들은 홀연히 이야기 속에 등장하여 새 왕께 경배를 드린 다음 말없이 슬며시 사라져 버립니다.
중세의 멋없는 전통은 그들에 관한 많은 것들을 사실인양 알려주고 있습니다.―그들은 세 사람이었고 왕들이라고 하며, 이름까지도 밝히고 있습니다. 그들의 이름은 카스파르 (Caspar), 멜키올(Melchior), 발타잘(Balthasar)이라고 전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요금만 지불하면 오늘날 코론 성당의 높은 제단 뒤면 성소에서 소위 그들의 유골도 볼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 전통이 밝혀주는 것보다 마태복음의 이 기사가 전해주는 불명확성이 훨씬 더 인상적이고 더욱 믿음직스럽습니다. 때로는 반쪽이 전체라고 보여주는 것보다 한층 더 감명을 줍니다.

그들은 “동방으로부터”(아포 아나톨론) 왔습니다. 동방, 즉 아나톨레(헬395)는‘별들 의 떠오름’이라는 의미를 가지고 있으며, 여기서는 하늘의 방위로서 ‘해뜨는 곳’인 ‘동쪽’을 의미합니다.
이것으로 그들의 국적을 확정지으려고 하는 것은 쓸데 없는 일입니다. 다만 우리는 그 들이 동방에서 왔다는 것을 읽고 알 뿐입니다. 그 동방이 페르샤인지 바벨론인지 분명히 알 수 없습니다. 그들은 어쩌면 신비한 동양의 한층 심원한 어느 장소에서 왔는지도 모릅니다.

그들의 신분은 마고스(헬3097)입니다. 본문에 마고스의 복수 마고이로 나오는데 ‘마고스들’입니다. 마고스는 후일에‘마술사’를 가리키기도 하지만 이 구절에서 는 전혀 다른 유형의 인물로, 비교적인(esoteric) 지식에 정통했던 사람들,‘별들에 관한 관찰’을 매우 중요시 하여 주의깊은 관찰을 했던 특별한 지혜를 가진 현인을 가리키 는 것으로 봅니다.
그들은 학식이나 권위에 있어서 영향력을 행사하는 띄어난 과학자들로서 철학, 과학, 천문학에 능통하였습니다. 그러면서도 아마 메시야 왕에 관한 지식을 알고 있었던 자들 일지도 모릅니다.

그러면 박사들이 무엇에 인도를 받아 왔습니까? 그들은 \"그의 별을 보고\"(에 이도멘 가르 아우투 톤 아스테라) 왔습니다. 가르(헬1063)는 그들의 반응에 대한 이유를 나타냅니다. 그들이 유대인의 왕의 거처를 묻는 이유는 동방에서“그의 별”을 보았기 때문입니다.
아스테르(헬792; 별)는 구약성경에서 하나님의 명령을 준행하며 그의 영광을 선포한다고 했습니다(사 40:26; 시19:1).

고대인들은 흔히 위대한 통치자의 탄생을 하늘의 이상한 현상들과 결부시키곤 했습니다. \"그의 별\"은 민수기 24:17에 기초하여 메시야적 대망과 일치하며, 왕의 탄생과 더불어 시작되는 왕국의 영광스런 새 시대의 개막을 알리는 표징입니다.
박사들은 하늘에서 \"그의 별\"을 보았으며, 그의 별은 그들을 인도했습니다.
그들이 \"별\"을 보았다는 것은 전술한 바의 자신들의 학문(천문학)을 통해 하나님의 인도를 받았다는 것을 고백하는 것입니다.

“그의 별을 보고”― 별의 성격 등 부차적인 문제들이 해결된다 하더라도 그들이 주는 교훈은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즉 ‘하나님의 인도’라고 밖에 말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하늘에 나타난 이 표적과 이 별에 관한 해석은 하나님으로부터 나온 것입니다. 그 별이 자연적인 천문학적 현상이었든, 초자연적 어떤 빛이었든, 그리고 그 별에 관한 해석이 박사들 자신의 학문적 연구의 결과였든, 하나님의 지혜의 숨결에 도움을 입은 것이었든 이는 하나님의 인도입니다.

우리는 박사들이 그들의 지혜로 메시야의 별의 이상을 보았다고 생각해도 좋을 것입니다.
그러므로 마고스들은 하나님께서 계시를 받은 백성(이스라엘)의 한계 밖에서도 다양한 방법을 통해 사람들의 마음을 움직여 진리를 찾는 영혼들을 빛으로 인도하신다는 위대한 진리의 전형적인 표본이라 하겠습니다.

아기 예수님의 요람 앞에 선 이 낯선자들은 하나님의 메시지를 받은 이스라엘 밖 사람 들의 대열에 선 자들입니다. 이같은 자들로는 신비한 멜기세덱을 필두로 하여, 야곱으로부터 한 별이 일어나는 것을 본 그 예언자, 그리고 넓게는 끈기있게 진리를 찾는 허다한 사람들이 있습니다.

이른바 인간의 지혜는 하나님의 선물입니다. 그 지혜 자체는 불완전하고 해결하지 못한 문제도 많지만, 지혜의 최고 기능은 인간을 예수 그리스도께로 인도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제반 학문의 주님이십니다. 또한 인간에게 속한 모든 것의 주님이십니다.
현재의 외적 현상은 온통 정반대 인듯합니다. 그러나 실상은 온갖 지식의 진정한 범주 와 지식의 분명한 목적은 예수님을 인식하도록 인간을 이끄는데 있다고 해도 좋습니다. 당신에게 있는 작은 빛을 최대한 활용하십시오.

“유대인의 왕으로 나신 이가 어디 계시뇨”라는 마고스들의 질문은 의미심장합니다. 우리는 이 마고스들에게서, 그들의 이 질문에서 이방 종교들이 지닌 가장 심원한 의미 의 한 형태를 볼 수 있습니다.
그렇치 않습니까? 이러한 신앙들은 그 자체 속에 그리스도교와의 접촉점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들은 거짓과 혐오스러운 음험한 잔인성 및 음탕한 것, 그외에도 요람 속의 왕 예수 그리스도만이 홀로 채우실 수 있는 결핍의 고백을 간직하고 있습니다.
현대의 불신 선생들은 그리스도와 이방 종교가 똑같이 인간 고유의 종교적 기능이 낳은 산물이라고 말합니다.

요즈음 한국에서 종교다원주의에 대한 논의가 일고 있습니다. 종교다원주의가 무엇입니까?
이화여대 정대현 교수는 종교다원주의란‘모든 종교는 각기 구원의 방식을 갖는다’라는 명제로 요약할 수 있으며, 그것은‘모든 종교는 구원을 갖는다’란 명제와 구별되어야 한다고 지적했습니다. 잘 밝혀주었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사실 이방 종교는 결핍을 호소하는 하나의 신앙 고백이요, 기독교는 결핍을 채워주는 유일한 선물입니다.
진실로 그 박사들의 질문 “왕으로나신 이가 어디 계시뇨”가 이방 종교의 고백인 것 입니다.
이방 종교의 제사는 인간 속죄와 화해의 필요성을 선포하는 것입니다. 신들이 인간의 몸을 입고 내려온다는 이교의 이야기들은 하나님의 육체적 현현(성육신)에 대한 인간의 갈망을 대변해 주고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요람과 십자가는 이교 및 모든 인류의 슬픈 질문들에 대한 하늘의 응답입니다.
그들은“내가 어떻게 하여야 구원을 얻으리까”라고 묻습니다. 우리는 그들에게 “주 예수를 믿으라 그리하면 너와 네 집이 구원을 얻으리라”고 대답해 주어야 합니다.

마고스들의 방문 목적은 새 왕을 경배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들은 “그에게 경배하러 왔노라”고 했습니다.

2. 헤롯과 온 예루살렘이 왕의 탄생에 관한 소식을 듣고 소동함

헤롯과 온 예루살렘이“유대인의 왕으로 나신 이가 어디 계시뇨…우리가 그에게 경배 하러 왔다”란 박사들의 말을 듣고 소동했습니다.

“소동한지라”에 해당하는 에타라크데는 타랏소(헬 5015;‘동요시키다, 혼란시키다, 놀라게하다, 고민하게 하다, 괴롭히다’등)의 수동 과거로 놀라거나 두려워하는 것과 같은 감정적 동요의 뜻을 지니고 있습니다. 즉 정신에 두려움이나 공포로 타격이나 충격을 가하는 것과 관련됩니다.
그들은 유대인의 왕 메시야의 탄생에 관한 소식을 듣고 이런 충격을 받은 것입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행위에 의해서 야기되는 정신적 충격이라 하겠습니다.

(1) 먼저 헤롯 왕이 두려워했습니다. 헤롯은 다윗의 왕위를 계승할 합법적 상속자가 아니었습니다. 그는 진정한 왕을 흉내내는 왕위 찬탈자였습니다. 이름에 \'대(大)\' 자가 붙은 대부분의 왕이 그렇듯이 헤롯의 위대성도 주로 그의 극악무도함에 있었습니다.
그는 흉포하고 음탕하고 교활했습니다. 무자비한 통치를 했습니다. 이제 그도 최후의 노년기를 보내면서 자신의 악행이 낳은 두려움에 휩싸여 있었습니다.
헤롯은 이 외국인 박사들의 말을 듣고 자기 보좌의 안전을 위해 걱정하게 되었습니다. 아마도 헤롯은 박사들이 자신을 퇴위 시키려는 어떤 음모를 숨기고 있다고 생각하지는 않았을 것입니다.
만일 그렇게 생각했다면 그 외국인 박사들을 즉석에서 해치우고 말았을 것입니다. 그러나 헤롯은 왕의 행세를 하는 자기 앞에서 새 왕을 찾아 경배하려는 박사들에 대해 괘씸하게 여겼을 것이 확실합니다.

실로 헤롯은 교활한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마음 속으로 이 박사들을 이용하여 그 갓난 적수를 찾아 없애고 그후 그들까지도 살해하리라 생각했을 것입니다.
- 헤롯은 만일 예수님이 정말 상속자라면 내분이 일어날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 헤롯은 잔인해서 많은 적(敵)이 있었기 때문에 누군가가 자기를 이를 계기로 타도 하려 할 것이라고 의심했습求?
- 헤롯은 유대인들이 한 종교적 인물을 중심으로 연합하는 신앙적 백성이 되는 것을 원치 아니했습니다.
- 또 이런 일로 그의 보좌가 위태롭게 될 수 있기 때문에 두려워한 것입니다.

헤롯은 박사들의 질문에서 항간에 널리 퍼진 메시야 대망 사상을 감지했습니다. 그는 메시야에 대한 희망이 전 국민의 가슴 속에 불꽃으로 화할 태세를 갖춘 채 달아오르는 잔화처럼 묻혀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습니다.
그는 자신이 왕위 찬탈자라는 것과 어느 순간에 백성들의 끓어오르는 증오와 소망이 자신과 자신의 벼락 출세로 얻은 왕위를 불태워 버릴 수도 있다는 것을 깊이 인식하고 있었습니다.

메시야의 강림은 솟아오르는 샘물 또는 장미빛 여명의 도래처럼 기쁨이 되어야 합니다. 그러나 그는 만왕의 왕이 가까이 이르렀다는 좋은 소식에 오히려 떨고 있었습니다. 그 악한 양심은 두려움으로 가득 차 있었습니다. 그의 극악한 죄악이 그를 떨게 하였습니다.

(2) 온 예루살렘이 소동했습니다. 온 예루살렘이 소동했다는 사실은 비극적 이고 상도를 벗어난 태도입니다. 박사들이 예루살렘에 도착했을 때“그의 별”,곧 새 왕의 별이 사라진 것은 의미심장합니다.
박사들은 예루살렘 왕성에 갓 태어난 왕이 계실 것을 기대하면서, 그리고 그 왕의 도성이 그의 탄생에 당연히 크게 기뻐하리라 생각하면서, 그 도성을 향해 갔습니다. 그러나 그들이 거리를 이리 저리 헤집고 다녔으나 그 왕에 대해 조금이라도 아는 어떤 사람도 만나지 못했습니다.

그들은 분명히 어떤 산 중턱에서 멀리 어렴풋이 밝은 빛이 나는 것을 보고 정작 그 지점에 이르자 그 빛이 완전히 사라져 버렸을 때의 느낌, 바로 그런 기분이었을 것입니다.
박사들의 유대인의 왕으로 나신 이가 어디 계시뇨? 라는 질문은 자신들이 동방에서 보았던 현상과 예루살렘에서 접한 상황간의 현격한 차이에 당황하였음을 시사하고 있습니다. 그들은 그들의 질문의 파급 효과를 목도하면서 분명히 가일층 혼란스러웠을 것입니다.
예루살렘의 그 누구도 자신들의 왕의 탄생에 대해 전혀 모르고 있었습니다. 이것만으로 도 확실히 이상한 일이었습니다.

한 걸음 나아가 박사들은 그 왕에 관심을 가지고 대망하는 아무도 만나지 못했습니다. 아무도 그 왕을 원치 않았던 것입니다. 이것이야말로 더 더욱 이상한 일이었습니다. 오래전 한 선지자가“시온”을 향해“네 왕이 네게 오나니 크게 기뻐할지어다”(슥9: 9)라고 외친 적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예루살렘 사람들은 새 왕의 탄생에 관한 소식을 접하면서도 기뻐하지 아니했습니다. 오히려 근심과 걱정, 두려움이 이 모든 사람의 얼굴에 구름처럼 덮여 있었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 그 일부 원인은 많은 사람이 이기심으로 인하여 헤롯과 결탁하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 그 일부 원인은 사람들이 부정과 부패에 너무 익숙해져 있었기 때문입니다.
- 그 일부 원인은 메시야 대망 사상이 외적으로 폭발함으로 말미암아 저 무자비한 폭군 헤롯이 잔인한 행동을 저지를까 사람들이 두려워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새로운 박사들, 곧 소망을 파악하고 이스라엘의 메시야 안에서 한 참예를 주장하는 이방인의 열성적 마음을 대표하는 이 마고스들은 왕 자신의 친 백성이 이에 무 관심함을 보았습니다.
그리고 박사들이 왕 자신의 친백성의 무관심에 자극을 받았다면, 크게 놀랄 수 밖에 없습니다.
어두웠던 수백년 세월을 통해 큰 빛으로 비쳐왔던 그 약속이 마침내 성취의 문턱에 다 달았다는 희소식이 환영을 받지 못하는 것을 보았을 때 크게 놀랄 수 밖에 없었습니다. 따라서 복음사의 첫 페이지는 이미 슬픈 결과를 예기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사람들이 동서남북으로부터 와서 하나님의 나라 잔치에 참여할 것이나 너희 자신들은 쫓겨날 것이다”

성도 여러분, 세계가 기대에 찬 눈으로 바라보는, 21세기의 선교 대국으로 부상하려는 한국 교회는 지금 어떻습니까?
우리는 이 나라의 기독교를 찾아오는 새로운 구도자들에게 무엇을 보여주고 있습니까? 우리에게 메시야의 별빛인 정직이 있습니까?
사랑이 있습니까?
교권과 명예와 물질에 눈이 멀고, 부정과 불의로 그의 별빛을 가리우고 있는 것이 아닙니까?
우리는 혹시나 그리스도와 그 나라에 대해 흥미를 잃거나 어떤 무관심으로 살고 있지 않습니까?
우리 자신을 검토하고, 이 왕의 성탄을 맞이하여 그에 대한 우리의 신앙을 새롭게 합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