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5강 마 2:9-12절 강해

박사들이 왕께 드린 경배와 선물



마태복음 2:9-12




나는 여기서 재 출현한 별의 인도와 박사들이 새 왕을 경배하고 예물을 드린 것에 대하여 생각하겠습니다.

1. 박사들은 다시 출현한 별의 인도를 받아 왕을 찾았습니다.


앞에서 언급한바 있지만 다시 생각해 봅시다. 박사들은 그들의 지혜와 학문(천문학)을 통하여 왕의 별을 보고 별을 따라 이스라엘의 수도 예루살렘에 도착했습니다. 그러나 거기서 그의 별이 사라졌습니다. 그 땅의 백성을 통하여서는 그의 별을 볼 수가 없었습니다.
박사들은 왕궁에서 성경 학자들이 증언한 하나님의 말씀을 통하여 “그의 별을” 다시 보게되었습니다. 그들이 동방에서 보았던 그별이 이제 다시 나타나서 그들 앞에서 계속 행하여 어린 왕이 있는 곳 위에 와서 머물러 섰습니다.
이 별이 일반적인 별이었을리 없습니다. 보통 별은 베들레헴의 모든 집들 중에서 오로지 그 집만을 정확히 지적해 줄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그들은 재 출현한 별을 보고 대단히 큰 기쁨으로 기뻐했습니다. 별의 재 출현에 기쁨이 폭발하는 모습은 요며칠간의 당혹감을 생생하게 시사해줍니다.
그들의 큰 기쁨은 성경 학자들의 무심한 태도로 인해 아마 일말의 불안감을 지니고 있는 중에서도 그 예언에 대한 가르침을 그대로 받아들였던 신앙의 승리였습니다.

그들은 그 집에 들어가서 왕을 찾아 보았습니다. 분명히 그들의 신앙은 왕을 찾아 내었을 때에 그 초라하고 빈궁한 모습으로 인해 여느때보다 더 큰 시련을 겪었을 것입니다. 극도의 연약함 가운데서 최고의 신적 능력이 나타나는 그리스도교의 위대한 역설(파라 독스)이 깜짝 놀랄만한 형태로 그들 앞에 다가왔습니다.
- 어머니의 무릎 위에 앉아 있는 이 아이,
- 경배를 표할 만한 아무런 건덕지도 없는 이 아이,
- 우리의 값비싼 선물이 격에 어울리지 않는 듯한 빈곤 속에 있는 이 아이,
-이 아이가 왕이라니!

그의 탄생이 별을 타오르게 하고 우리를 여기까지 인도하였단 말인가? 이것이 전부란 말인가? 인간의 상식으론 믿을 수 없는 일이었습니다. 박사들의 동방 종교에서 성육신 사상이 생소한 것은 아니었습니다. 그들의 동방 군주 정치는 화려했습니다. 그들은 기대했던 일과 실제로 발견한 모습 간의 현격한 차이에 분명히 충격을 받았을 것입니다.

그들은 여기서 모든 인간이 배워야 할 교훈을 배우게 되었습니다. 그 교훈이 무엇입니까?
- 그리스도는 인간들의 기대를 충족시키는 동시에 실망시키기도 한다는 것입니다.
- 가장 강력한 권능은 비천한 모습을 입는다는 것입니다. 권능이 연약함 속에 싸여 있고 왕권이 비천함을 입고 있는 것입니다.
- 그리고 하나님의 최고의 현현은 어머니의 무릎 위에 안긴 한 무력한 아이로 시작 된다는 것입니다.
성육신은 어떤 기괴한 형태나 파괴적 속성을 가지고 나타나는 것이 아니라 정상적 성장 단계를 통과하는 연약한 유아의 모습으로 나타나는 것입니다. 박사들은 이것을 알았습니다. 오늘날의 현인들이 이 박사들처럼 현명했으면 합니다.

2. 박사들은 새 왕에게 경배와 예물을 드렸습니다.


박사들은 아기를 보았을 때,“엎드려 아기께 경배하였습니다.”엎드리는 것은 자기를 낮추어 존경 또는 경의를 표하는 태도입니다.“경배하고”에 해당하는 헬라어 프로스퀴네오(4352)는‘무릎을 꿇거나 부복하여 절하거나 경배한다’란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이 단어는 사람에게 표하는 경의와 신들에 대한 경배와 예배에 대해 사용되었습니다.

우리는 박사들의 경배가 의미하는 바를 분명히 알지 못합니다. 그러나 어쨋든 그것은 분명히 한 지상의 왕에 대한 단순한 경배 이상의 무언가를 내포하고 있었습니다. 그들의 경배는 경계선상에서 넘어가는 자세였습니다.
어느 정도 유별한 하나님의 임재를 통해 왕의 우월성 또는 신성을 부분적으로 파악하고서 그에 대해 복종과 경배를 드린 것으로 생각됩니다.
그들은 \"그에게 경배하러 왔으며\"(2:2), 그에게 경배하였습니다. 예수님께 나아오면(요 1 : 29, 47) 그의 제자가 됩니다. 동방에서 마고스들이 온 것도 이와 동일한 의미가 내포 되어 있으며, 동시에 이방인이 예수님께 나아온 것을 상징하는 것입니다.

이것 또한 이방인들이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는 것을 나타냅니다(마 8 : 11; 롬 11 : 28)(W. Mundle). 마고스들은 이방에서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와서 새 왕께 경배함으로 그의 친백성이 되었습니다(2 : 11).

박사들이 경배를 드린 후에 \"보배함을 열어 황금과 유향과 몰약을 예물로 드렸습니다\". 이런 선물은 박사들이 살던 땅의 특산품이었습니다.
실용적인 사람들은 이러한 가정에 그와같은 것을 주는 것이 무슨 소용이 있겠는가? 라고 말할 것입니다. 그러나 사랑은 계산하지 않습니다. 우리가 가진 최고 최선의 것을 그에게 바치고 싶어하는 충동은 그가 기쁘게 받으실만한 것입니다. 한편 우리는 이 선물들이 성가족에게 유용한 것이었다고 생각합니다.

우리는 여기서 그리스도에 대한 참된 인식은 언제나 그에 대한 자발적인 최선의 헌신 과 봉사를 수반할 것이라는 교훈을 배우는 것이 좋을 것입니다.

더 나아가서 박사들이 이 선물들을 드린 것은 하나님의 섭리로 드린 것으로 의미 심장한 것입니다. 박사들은 황금을 그의 왕권에 대한 인정 표시로, 유향을 그의 신성과 제사장 직분(중보, 히 7 : 25) 인정 표시로, 몰약을 그의 죽음과 부활 인식의 표시로 드린 것입니다.

황금(크뤼소스, 헬5557). 이 단어는 ‘금’을 뜻하며, 금은 불변, 불멸하기 때문에 큰 가치와 지속적 가치의 상징이 되기도 합니다(잠 8 : 18, 19; 고전 3 : 12). 여러 시대를 거 치면서 왕족들은 왕관과 왕좌, 잔들과 그릇들을 만드는데 금을 사했으므로(왕상 10:18, 21; 에 1:7) ‘금’은 왕에게 드리는 적합한 선물이 되었습니다.

동방박사들은 \'금\'을 아기 예수께 예물로 드렸는데 중세 전통은 이것이 그의 왕권을 상징하는 것이라고 합니다.
예수님은 왕이십니다. 그는 힘으로써가 아니라 사랑으로 통치하십니다. 그는 사람들의 마음을 지배하되 왕좌로써가 아니라 십자가로써 하십니다.
예수 그리스도가 왕이시라는 것을 항상 잘 기억해야 합니다. 우리는 예수님을 우리와 평등하게 도저히 만날 수 없습니다. 우리는 언제나 완전한 순종과 겸손한 태도로 그를 만나야 합니다.

유향(리바노스, 헬3030), 일반 세속 헬라어에서 리바노스는 인디아, 아라비아와 소말리아(Somalia) 산의 보스웰리아 카르테리(Boswellia Carterii)라는 유향 나무인데 의미가 확대되어 사용된 파생어 리바노토스(헬3031)는 나무의 진(gum)에서 나는 향기로운 향 이란 의미로 사용되었습니다.
구약성경에서 이 두 단어가‘유향’이란 의미로 사용되었으며, 대상 9 : 29에만 리바노 토스가 나오고, 다른 구절에서는 리바노스가 나옵니다. 잘 부숴지며 반짝거리며 쓴 맛 이 나는 유향은 값비싼 향이지만 피웠을 때는 만족감을 줍니다(cant 3 : 6; 4 : 6, 14). 정결한 유향은 구약시대에 예배에서 진설병
(레 24 : 7) 및 소제 예물(레 2 : 2)과 함께 태워졌습니다.

신약성경 요한계시록 8 : 3, 5에서 향과 향로(리바노토스)를 중보 기도 및 심판과 연결 지우는 것은 하나님의 목적을 성취함에 있어서 그리스도인의 기도 능력을 나타냅니다. 박사들이 아기 예수님에게 가져왔던 리바노스는 그분의 신성과 중보를 위한 그의 제사장 직분(히 7 : 25)을 상징합니다. 이방인들이 메시야에게 유향을 가지고 오리라는 것은 유대인이 예기하고 있었던 것입니다(사 60 : 6).

제사장의 임무는 인간이 하나님께 나아가는 길을 열어 주는 것입니다. 제사장은 사람과 하나님 사이에 교랑을 세우는 사람입니다. 제사장을 나타내는 라틴어 폰티팻스 (pantifex)는 다리를 건설하는 자(bridge - builder)란 의미를 지니고 있습니다. 예수님 이 하신 일이 바로 이것입니다.
예수님은 하나님 존전으로 향한 길을 여시어 인간이 바로 하나님 앞에 나아갈 수 있게 하셨습니다.

몰약(스뮈르나, 헬4667). 스뮈르나는 소말리랜드(Somaliland), 이디오피아(Ethiopia), 아 라비아(Arabia)에서 자라는 콤미포라 뮈르하(Commiphora myrrha) 나무에서 나오는 진액인데, 좋은 향기를 내는 이 진액은 줄기와 가지들에서 채취합니다.
70인역본은 스뮈르나를 히브리어 모르(mor)나 모르(mor)의 역어로 사용합니다. 출애굽기 30:23에서 이것은 회막과 제사장의 성별에 사용하는 관유에 있어서 중요한 구성 성분입니다. 시 45(44) : 8에서 몰약의 향기는 하나님께서 선택된 왕에게 붓는 기쁨의 기름과 연관하여 언급됩니다.
신약에서 니고데모는 장사를 위하여 상당한 양의 몰약과 침향을 가져왔습니다(요 9 : 39). 이는 분명 일반적 관습과 일치하는 행동입니다(참조 : 요 11 : 44). 그러나, 그가 많은 양의 순수한 향료를 가져왔다는 사실은 예수님께 대한 그의 값진 헌신 행위를 입증하는 것이며, 이는 마리아의 행동에 유사한 것입니다(요 12 : 2­11).

그 기사에서 예수께서는 그녀의 선물을 자신의“장례”(요 12 : 7) 문제에 적용시켰으며, 비슷한 단어들이 이 구절과 공관복음 병행구들에서도 등장합니다.
유대인들은 애굽 사람들처럼 향료로써 시체를 방부처리하지는 않았으나, 시체에 몰약과 향기 높은 향료를 놓는 것은 시체의 보존을 뜻하는 것이었으며, 유대인의 사고에 있어 서 이것은 부활의 필수 요건이었습니다. 예컨데 마리아와 니고데모는 그들이 이해하였던 것 이상의 의의 깊은 행위를 수행하였던 것입니다.
공관복음이든 요한복음이든 복음서들은 다음과 같은 사실을 주장하고 있는 듯합니다. 즉 이 행위들은 의의가 깊은 것이므로 복음서에 그 기사를 포함시킬만한 가치가 있다는 것이다. 우리는 의의 깊은 그 몰약과 선사를, 아기 예수께서 받은 그것과 비교해 볼 수 있습니다(마 2 : 11). 즉 그것은 일찍이 예수의 장례의 상징이자 부활의 예기 (expectation)를 시사해 준 것입니다.〕

예수님은 사람들을 위해 살고 사람들을 위해 죽으려고 세상에 오셨습니다. 예수님은 우리의 죄를 없이 하기 위하여 죽으시고 우리를 의롭다 하기 위하여 다시 살아나셨습니다.(롬 4 : 25).

왕을 위한 황금, 제사장을 위한 유황, 죽은 자를 위한 몰약이 박사들이 드린 선물이었습니다. 그들의 행위는 예수님이 참된 왕이시요, 완전한 제사장이시요, 인간을 위한 가 장 위대한 구속주가 되심을 예언하고 증거했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박사들의 신앙은 정말 놀라운 신앙이었습니다. 그들은 그리스도를 보기 전에, 유대 종교 지도자들이 그리스도를 믿지 않고 있을 때 그리스도를 믿었습니다. 그들의 큰 믿음을 보십시오. 마리아의 무릎 위에 앉은 어린 아기 예수를 보았을 때 그를 왕으로 믿고 경배하고 예물을 드렸습니다.
박사들은 아기 예수 앞에 갔을 때 그가 그리스도이시다 라고 가르치는 표적을 보지 못 했습니다.

단지 박사들은 힘이 없고 연약하고 우리 자신의 어떤 어머니의 어린 아기처럼 어머니 의 품을 필요로하는 유아 외에 아무 것도 보지 못했습니다. 여느 어린 아기와 마찬가지 로 강보에 싸여 있는 초라한 모습 외에 아무것도 보지 못했습니다.
그러나 박사들은 그 유아, 어린 아기를 보았을 때 세상의 구세주 왕을 보았다고 믿었으며 겸손히 엎드려 경배했습니다. 우리는 전 성경에서 이런 큰 신앙을 읽지 못했습니다. 이 박사들에 비해 우리의 신앙은 어떻습니까?
사람들은 그리스도는 유대인의 왕이시니 예루살렘 왕궁에 나시사 고운 옷을 입으시고 좋은 방에 누워 있으리라 생각하기 쉽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 구주 그리스도 주이신 표적은 그가 강보에 싸여 낮고 천한 구유에 누인 사실입니다.

그리스도께서 이 세상에 오시어 받으신 첫 선물은 구유요, 마지막 선물은 십자가입니다. 그러므로 그가 구주 그리스도 주이신 표적은 고난과 비천이고 세상 영광이 아니었습니다.
인간이 명예와 영화를 즐기고 자기의 보잘 것 없는 지식을 어리석게 자랑하는 현실에 서 가난한 목수를 양부로 하고 태어나서 구유에 누운 예수는 외관으로 초라하여 고운 모양도 없고 풍체도 없고 인간이 보기에 흠모할 만한 아름다운 것이 없어 세인에게 무시와 멸시와 조롱을 당할지 모르나 그는 낮고 천하고 모욕을 당하는 이들의 친구가 되어 친히 동정하고 구원한 구주신 것입니다.

그가 찔림은 우리의 허물을 인함이요 그가 상함은 우리의 죄악을 인함이라 그가 징계를 받음으로 우리가 평화를 누리고 그가 채찍에 매맞음으로 우리가 나음을 입은 것입니다.
진실로 그의 전생애는 우리를 구원하는 십자가의 생애입니다. 우리가 가난과 고난과 모욕을 당할 때마다 하늘의 영광을 버리고 죄와 고통에서 신음하는 인간을 동정한 그리스도의 모습과 그의 뜨거운 십자가의 사랑을 깊이 생각합시다.

그러면 우리는 총칼 앞에서도 담대히 설 수 있고, 세상의 재물과 명예와 향락에 마음을 더럽히지 않고 가난과 고통에도 참으며, 모욕과 천대 받음에도 불구하고 하나님께 감사 하며 그리스도를 따를 수 있을 것입니다.
여러분 이렇게 삽시다. 오늘 우리의 왕 예수 그리스도의 성탄 기념일을 통하여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에게 하나님과 우리의 왕이 주시는 기쁨과 평화가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할렐루야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