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 가족의 애굽 피난과 예언의 성취 마태복음 2:13-15 델리취는 그의 저서, New lnvestigations in to the Origin and plan of the Canonical Gospels(정경 복음서의 기원과 구성에 대한 새 연구)에서 마태복음이 모세 오경의 형식에 입각하여 구성되었음을 설명하려 했습니다. 양자간의 유추는 다소 무리가 없지 않으나 그 일부 인상적인 상응점이 있는 것은 사실입니다. 그는 마태복음 l장부터 2장 15절까지를 창세기와 상응하는 것으로 간주합니다. 마태복음의 이 부분은“예수 그리스도의 세계”로 시작하여, 구약성경의 창세기가 이스라엘의 애굽 이주로 끝나는 것과 같이 성{聖) 가족의 애굽 도피로 끝납니다. 그리고 마태복음 2장 16절부터 산상수훈 끝까지의 단락은 출애굽기와 상응하며, 이 부분에서 병행점들이 두드러지게 나타납니다. - 헤롯이 베들레헴의 죄없는 아이들을 살해한 것은 바로가 히브리 아이들을 죽인 것 과 상응합니다. - 이스라엘의 출애굽은 성 가족의 나사렛으로 귀환과 상응합니다. - 모세가 수풀가에서 소명을 받은 것은 예수님이 침례(세례) 받으신 것과 상응합니다. - 광야에서 이스라엘의 40년간 세월은 광야에서 예수님의 40 일간의 굶주림과 시험받으심과 상응합니다. - 시내산에서 율법하사는 하나님 나라의 새 법을 담고 있는 산상수훈과 상응합니다. 설사 기자가 이 복음서를 오경의 구성에 따라 만들었다고 가정 하지 않더라도, 우리는 이스라엘 민족 생활의 시초와 그리스도 생애의 개시 사이에는 상응점이 있다고 보지 않을수 없습니다. 본문(2:13-23)은 이 대응점을 두드러지게 부각시키고 있습니다. 이 본문은 세개의 소단락으로 나누어지는데 각각 그 핵심 속에 구약의 예언을 담고 있습니다. 1. 애굽으로의 도피 (1) 박사들이 떠난 후에“주의 사자”가 꿈에 요셉에게 나타났습니다. “주의”에 해당하는 헬라어 퀴리우는 퀴리오스(헬2962; 주, 통치자\')의 속격이며. 이 단어가 여기서와 같이 속격으로 사용될 때 특별히‘구약의 여호와의 개념’으로 사용 됩니다.“사자”에 해당하는 헬라어 앙겔로스(32)는 인간적인 사자에도, 하나님의 사자, 곧 하늘의 천사에 대해서도 사용되었습니다. 그러나 주의 사자{흑은 천사}라고 할 때는 다른 천사들과 구별됩니다. 주의 사자는 구약의 여호와의 사자와 같은 표현으로서 여호와에게서 특별한 임무를 부여받은 천적(天的) 존재로 그의 배후에서는 천사의 개념이 완전히 사라집니다. 따라서 그를 보는 것은 여호와를 보는 것과 같은 의미를 가집니다. 요셉은 박사들이 떠난 직후에 이 꿈을 꾸었던 것으로 추정됩니다. 주의 천사는 박사들 보다 횔씬 이전에 의로운 요셉에게 나타나서 마리아가 잉태된 내막을 밝혀줌으로서, 그 의 괴로운 가슴을 편안하게 해준바 있습니다. 우리는 여기서 하나님의 계시에 대한 정보를 얻습니다. 마리아에게는 천사가 그녀의 깨어있는 상태에서 나타났습니다. 마리아는 그 부드러운 눈빛으로 천사를 바라볼 수 있었고 그녀의 순종적인 귀는 천사의 음성을 들을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보다 낮은 영적 수준에 있는 요셉에게는 보다 낮은 형태의 계시 방법인 꿈에 의한 계시가 필요했습니다. 이러한 계시는 받는자 편에서 보다 감수성이 약하다는 것과 전달 내용에 있어서 중요성이 보다 낮다는 것을 시시해 줍니다. 꿈에 의한 계시는 요셉의 수용능력에 알맞는 독특한 형태였습니다. 이러한 방법으로 네번이나 그에게 주어졌던 것으로 언급되어 있습니다. 박사들에 대한 경고 역시 꿈으로 전달되었습니다. “지시하심을 받아”에 해당하는 헬라어 크레마티조(헬5537)는‘신탁을 구히는 자에게 응답하다, 신적 명령이나 경고를 주다, 하늘로부터 가르치다’란 의미로서‘하나님의 지시하심’을 가리킵니다. 박사들은 꿈에 하나님의 지시하심을 받아 다른 길로 고국으로 돌아갔습니다. 우리는 여기서 야곱의 아들 요셉의 유년기에도 이처럼 꿈이 두드러지게 나타났다는 것을 상기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이 꿈은 이스라엘의 애굽으로의 이주와 관련되어 있습니다. 요셉의 생애는 이스라엘을 애굽으로 이주시키기 위하여 형성된 것입니다. 성가족 의 애굽으로 피난 역시 꿈과 연관되어 있습니다. 꿈은 분명히 하나님이 그의 의사를 인간에게 전하는 계시 방법 중의 하나입니다. 마리아의 경우와 요셉, 동방박사들의 경우에서 보는 바와 같이 오늘날에도 특별히 꿈에 천적 지시를 받는 신자들이 있는가 하면, 마리아와 같이 깨어 있는 상태, 곧 일상생활 속에서 천적 지시를 받는 신자도 있습니다. 민수기 12:6에 보면“내 말을 들으라 너희 중에 선지자가 있으면 나 여호와가 이상 으로 나를 그에게 알리기도 하고 꿈으로 그와 말하기도 하거니와 내 종 모세와는 그렇치 아니하니…그와는 내가 대면하여 명백히 말한다”하나님은 말씀하셨습니다. 지금 시대는 고대 시대(흑은 구약시대)와는 달리 우리에게 하나님의 말씀이 주어지고 성령이 내주하고 계시기 때문에, 꿈보다 일상생활에서 하나님의 지시와 경고를 더욱 분명히 받습니다. 하나님은 성령과 말씀을 통해서 우리에게 직접 말씀하십니다. 이런 높은 영적 수준에 있는 신자는 참으로 복이 있는 자입니다. (2) 주의 사자는 애굽으로 피난하라는 지시를 했습니다. 헬라어 원문의 순서대로 그 내용을 살펴보겠습니다. “너는 일어나서 그 아기와 그의 모친을 데리고 애굽으로 피난하라.” 여기에‘데리고’에 해당하는 파랄라베는 \'받아들이다, 자기에게로 취하거나 데리고 온다\' 를 뜻하는 파랄람바노(헬3880)의 명령형입니다. 신약성경에서 사람과 함께 사용될 때, 어떤 사람을 자기에게로 취하거나 데리고 가는데 는 많은 사람들 중에 그를 특별히 선택했다든가, 그 선택한 사람과 특별히 깊은 관계를 맺는다든가, 그 사람에 대한 특별한 책임과 의무를 진다든가. 흑은 특별한 계획을 알리려한다든가 하는 특별한 목적이 게재되어 있기 마련입니다. 이러한 의미가 이 명령에도 포함되어 있습니다. 요셉은 예수님의 친아버지는 아닐지라도 예수님의 법률상 아버지로서 아이의 안전과 안녕에 대한 책임과 의무가 있습니다. 그러나 이‘자기에게로 취하라’는 명령에는 아버지 이상의 가장 깊은 영적 관계를 받아들이라는 명령을 포함하고 있습니다. 주의 천사는 천사들은 물론, 인간들의 주님이신 아이 앞에 마치 경배라도 하듯이 , 자연적인 순서를 바꾸어“아기와 그의 모친”이라고 언급하고 있습니다. 무엇을 가르쳐 줍니까? - 아기 예수가 가장 중요합니다. - 아기 예수가 최고의 관심사입니다. - 우선 순위에 있어서 아기 예수가 첫째입니다. - 여행도, 거주와 직업의 선택도 아기 예수와 관련하여, 하나님의 말씀을 따 라 결정해야 합니다. - 요셉은 이렇게 성가족을 돌보아야 합니다. 이것은 요람 주변에서 일어난 수많은 표적들이 말없는 요셉에게 가르치고 있었던 그 교훈, 즉 마리아와 그는 아기 예수를 돌보는 비천한 시중꾼에 불과하다는 교훈을 심화 시켜줍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와 그의 교회를 보호하고 돌볼 책임이 있습니다. 요셉과 같이 그 책임과 의무를 다하고 있습니까? 주의 천사는“애굽으로 피하라”라고 일러줍니다.‘피하라’에 해당하는 휴게는‘도피하다, 도주하여 안전을 구하다’를 뜻하는 헬라어 휴고(헬5343)의 명령형이며, \'도주하여 안전을 구하라\'를 의미합니다. 옛날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의 보호와 양육을 위해 애굽에 한 장소{지방)를 예비하신 것 과 같이, 아기 예수의 보호와 양육을 위하여 애굽에 한 장소를 예비해 두신 것입니다. ‘애굽의 도피’는 단순한 구출 방편이 아니라 그와 반대로 그리스도의 생활에 지속적 영향을 미칠 요인 형성과 잇따라 계속되는 생의 사건을 통해 지극히 고상한 인격 및 방향을 형성하기 위한 것입니다\' (W. G. Elmslie, in the Expositor). \"그리고 내가 네게 이르기까지 거기 있으라.\" 주의 천사의 지시없이 함부로 거처를 옮겨서는 안됩니다. 철저하게 주의 천사의 지시를 따라 행동하라는 명령입니다. 천사의 지시는 올 것이며, 그 지시없이 함부로 거처를 옮겨서는 안됩니다. 그런데 지금은 부분적인 지시만 주고 나머지는 미래를 위해 어둠 속에 남겨둔 것은, 하나님의 인도 방법에 따른 것이었습니다. 하나님은 거의 언제나 바로 다음의 의무에 대해서만 충분한 빛을 주시고 그 후의 일 에 대해서는 그렇게 하시지 않습니다. 지금 지시받은 의무를 행하면 그 다음 의무에 대 해 지시가 오는 것입니다. 예를들면 하인들이“항아리에 물을 채우라”는 예수님의 명령을 이행했을 때, 예수님은 “이제는 떠서 연회장에게 갖다 주라”고 명령하셨습니다. “왜냐하면 헤롯이 그(아기)를 멸하기 위해 그 아기를 찾으려 하기 때문이다.” 이 문장에서 부정사의 우설적 용법이 등장하는데, 멜로(헬3195; 하려고 한다)와 부정사 제테인(헬2212)으로 구성되며, \'찾으려고 한다\'를 의미합니다. 이 구성은 미래적 의미를 나타내며, 여기서 그것이 계획된 행동이라는 것을 암시합니다. 아기 예수를 찾아 죽이는 것이 헤롯의 계획이라는 것입니다. 천사는 이것이 아기가 애굽으로 도피해야 할 이유라고 전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아주 어린 유아기 때부터 거듭해서 위험에 직면했습니다. 처음에는 아 기 왕을 경배하기 위해 찾아온 박사들을 통해 아기 왕을 찾아 처치하려고 했습니다. 그것이 실패로 돌아가자 또다시 그 왕을 찾아 멸하려는 계획을 세웠습니다. 그래서 요셉은 애굽으로 피난하라는 지시를 초자연적인 꿈으로 받았습니다. 유대인들이 애굽으로 피난하는 것은 흔히 있는 일이었습니다. 이스라엘 민족의 역사 초기에 아브라함의 가족이 기근을 피해 애굽으로 피난한 적이 있으며{창 l2:10). 그후 셉, 야곱의 가족이 애굽으로 이주, 400년간 거주하며 한 민족으로 성장하여 출애굽했습니다. 예수님께서 오시기전 수세기동안 기근 등 어려움이 있을 때 종종 애굽으로 피난했으며 어떤 위험이나 폭군이나 박해로 유대인의 생명을 위협할 때 그들은 애굽으로 피난했습니다. 그 결과로 애굽에 있는 모든 도시에는 유대인의 이주 마을이 있었습니다. 알렉산드리아 시에는 백만명이 넘는 유대인들이 있었고 이 도시의 어떤 곳에는 완전히 유대인들이 석권하고 있었습니다. 성 가족이 애굽에 도착했을 때 그들은 이방인같이 느껴지지 않았습니다. 어느 마을이나 어느 도시나 도피처를 찾아 피난온 유대인들이 없는 곳이 없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그들을 비교적 쉽게 정착할 수 있고 이웃을 만날 수 있는 곳으로 인도하셨던 것입니다. 애굽에서 예수님이 얼마동안 체류하셨는지는 확실히 알 수 없습니다(참조, W. Barclay). 이 사건에서 우리는 하나님의 은혜와 섭리적 인도 및 준비를 엿볼 수 있습니다. 성가족 은 우리 주님이 유년기에 박사들로부터 값진 예물을 받고 경배를 받은 후에 핍박과 시련을 당했습니다. 우리 주님의 초기 생애는 그리스도교 역사나 그리스도인의 개인생활에서 거듭 반복되는 인생의 부침이나 변천을 보여줍니다. 성공과 번영과 찬란한 햇빛이 난국과 핍박과 그리고 외관상 실패로 보이는 구름에 감싸이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것은 우리가 예상해야할 일인 것입니다. 제자가 스승보다 높지 못하고 종이 그의 상전보다 높지 않으나 하나님은 자기 백성을 보살펴 주십니다. 하나님의 섭리는 다가오는 시련을 위해 그들을 준비시키시며 그의 장중에 있으면 우리는 안전합니다. “어찌하여 열방이 분노하며, 민족들이 허사로 경영하는가? 지상의 왕들이 자기를 내세 우고 방백 흑은 서로 공모하여 주와 기름부음을 받으신 자를 대적하나 하늘에 계신 자가 웃으심이여 주께서 저희를 비웃으실 뿐입니다. 하나님와 가장 비천한 종이 때때로 가장 강한 원수의 계획을 망가뜨립니다. 이것은 하나님께서 그들과 함께 하시기 때문입니다. 요셉도 잔인한 헤롯의 마수로부터 어린 예수 를 보호했습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섭리적 인도로 되어진 것 입니다. 우리도 신실한 요셉과 같이 겸손과 순종의 자세로 하나님의 뜻에 복종하면 어려움을 당할 때 하나님은 안전한 곳으로 인도하실 것입니다. 우리는 이 구절의 문장 구조에서 또 하나의 교훈을 얻습니다. 한글 개역 성경 에는 “혜롯이 아기를 찾아죽이려 하니 일어나 … 피하여”라고 번역되어 있습니다. 명령의 이유가 먼저 나오고 명령이 뒤따릅니다. 그러나 헬라어 본문은 앞에서 이미 살펴본 바와같이“일어나… 피하라…”라는 명령이 먼저 나오고 그 뒤를 따라서, “왜냐하면 헤롯이 그 아기를 멸하기 위해 찾으려 하기 때문이다”라는 이유가 나옵니다. 이것은 우리에게 무엇을 가르치고 있습니까?- 이유나 결과를 묻거나 고려하기 전에 하나님의 명령에 먼저 복종하라는 것입니다. 이유나 결과도 중요하지만 그보다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순종이 더 중요하다는 것입니다. 주님의 말씀이기 때문에 순종하는 자는 반드시 하나님의 복과 인도를 받습니다. (3) 그가 일어나서 밤에 아기와 그의 모친을 데리고 애굽으로 떠나갔습니다. 명령의 이행에 관한 기술에서 그 명령이 다시 문자적으로 반복됨으로서, 하늘의 지시에 대한 요셉의 신속하고 정확한 순종이 강조되어 있습니다. 여하한 망설임도, 여하한 거리낌도, 여하한 지체도 없었습니다. 그는 꿈을 꾼 바로 그 밤에 일어났습니다. 그리고 재빨리 간단한 채비를 갖추었습니다. 박사들의 선물은 그들의 피난길에 간소한 필수품을 제공하는데 도움이 되었을 것입니다. 날이 새기 전에 그들은 서둘러 길을 떠났습니다. 그리하여 성가족은 잔인한 헤롯의 손에서 벗어나 애굽에서 안주하게 되었습니다. 우리는 여기서 하나님의 분명한 명령에 주저하지 않는 재빠른 복종의 파업을 배워야 합니다. 오직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신속하고도 강한 결심과 재빠른 복종을 하는 자만 이 생의 승리자가 되는 것입니다. 많은 그리스도인들은 결심의 부족이나 느린 복종 때문에 생애에 실패를 거듭합니다. 우리의 의무가 단순히 복종해야 할 때 우리는 얼마나 주저하고 의문합니까? 그리스도께서 더욱 높은 봉사로 전진하도록 명령하실 때 우리는 우리 자신의 길과 방법과 에 얼마나 집착합니까? 우리는‘거기서 나오라’할 때 머뭇거리고‘앞만 바라보고 곧장 가라’고 할 때 뒤로 돌아보지 아니했습니까? 우리는 그리스도의 뜻이 첫격이고 내 뜻은 그것을 따라야한다는 생의 문법을 잊어버리지 말아야 합니다. 의무의 길, 그리스도의 길을 따르는 길은 때때로 우리의 마음에 맞지 않고 힘들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우리는 혈육과 의논하지 말아야 합니다. 우리는 예수님이‘가라’할 때 곧장 앞으로‘가야’하며, 어떤 일을‘하라’하실 때 담대히, 단호히 그것을‘해야’하는 것입니다. 군인들은 명령을 들으면 모든 소리, 위험의 소리나 죽음 자체의 소리까지도 도외시합니다. 그리스도께서 우리에게 말씀하실 때 주저의 여지나 의심의 여지를 남김없이 영혼에 완전히 채워야 합니다. 요셉은 꿈에 천사의‘피하라’는 지시를 받고 즉시 복종하여 아기 예수를 잔인한 헤롯의 마수로부터 구했습니다. 베드로는“그물을 내려 고기를 잡으라”는 주님의 명령이 떨어지자 말자 “말씀에 의지하여 내가 그물을 내리나이다”고 대답하고는 그렇게 하여 많은 고기를 잡았습니다. 주님의 모친은 가나의 하인들에게“너회에게 무슨 말씀을 하시든지 그대로 하라”고 말했습니다. “무슨 말씀을 하시든지 그대로”\'는 의무의 한계요 미(美)의 한계입니다. 그리스도의 뜻을 자기의 뜻으로 하고 그가 무슨 말?을 하시든지 그대로 전적으로 행하 는 사람은 어느 곳에서나 생의 물이 포도주로 변하고, 생의 보통 것이 신성한 것으로 향상되는 가나의 이적과 같은 경험을 가질 것입니다. 빛에 가까이 걸어가는 사람은 확실히 빛에서 걸을 것입니다. 이렇게 행하면 우리는 조만간 큰 상급을 얻을 것입니다. 2. 예언의 성취 옛 족장 이스라엘과 그의 가족이 하나님의 섭리적 인도로 기근을 피하여 애굽으로 이주했으며, 400년간 애굽에서 하나님의 돌보심을 받으며 한 민족으로 성장했습니다(창 45:6, 7). 그 후에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그의 \'아들\'로서 그곳에서 불러내신 것입니다 (출 4:22, 23; 호 11:1). 이와 같이 아기 예수도 하나님의 섭리적 인도로 잔인한 헤롯을 피하여 애굽에 와서 헤롯이 죽기까지 거기 있었으며, 그 후에 그곳에서 나왔습니다. 마태는“이는 주께서 선지자로 말씀하신 바 애굽에서 내 아들을 불렀다 함을 이루려 하심”이라고 중언합니다. 이 인용절은 호세아 11:1을 인용한 것이며, 호세아의 말은“이스라엘이 어렸을 때 내가 사랑하여 내 아들을 애굽에서 블러내었다”입니다. 마태는 거룩한 주의 가족이 애굽에 서 돌아온 것을 이 호세아의 예언의 성취로 보았습니다. 이 기사에서 가장 중요한 부분은 마태가 이 사건과 호세아의 말 사이에서 인식하고 있는 관계입니다. 예언의 성취라는 차원에 있어서 이것을 장차 올 것에 대한 예언이 그대로 적중하였다는 의미로 이해할 것이 아닙니다. 왜냐하면 호세아가 분명히 출애굽 사건을 언급하고 있는 것이지, 예수님의 어릴 때에 애굽으로부터 돌아온 것에 관해 말한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본래의 호세아서 문맥에서 보면 이 인용구는 결코 예언이 아니며, 단지 하나님이 이스라엘을 다루신 역사에 대한 애정이 깃든 일부분의 요약적 발언에 불과합니다. 선지자는 그 역사적 사실을 언급함으로 말미암아 동시대인들의 가슴 속에 회개와 믿음을 심어주고자 했던 것입니다. 그렇다면 마태가 호세아 선지자의 말을 예언으로 간주하고 아기 예수의 도피를 그 예언의 성취로 본 것에 대해 어떻게 그 정당성을 설명할 것입니까? 그 해답은 구약 성경 전체에 흐르는 국가적 이스라엘과 개인적 이스라엘 간의 둥비 (anakgy} 에서 찾아야 합니다. 그리고 이 해답은 이사야 예언서의 두번째 부분에서 분명하게 드러납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이스라엘에게 예정되었으나 이스라엘이 이루지 못한 것을 이루는 자, 즉 진정한 하나님의 종, 그의 기름부음을 받은 자, 그의 아들, 하나님의 이름을 제상에 전해주는 중보자였습니다. 이스라엘 국가의 이상은 그리스도안에서 실현되었습니다. 예수님의 짧은 애굽 체류는 이스라엘의 400년 애굽 생활이 달성한 바와 동일한 목적을 그리스도의 삶 속에서 실현 시켜 주었습니다. 즉 애굽 생활이 예수님을 적(敵)으로부터 보호해주고 그에게 자라날 여건을 마련해 주었던 것입니다. 마치 유아기의 이스라엘 국가가 하나님에게 대적하는 세계의 상징이었던 그 나라의 무릎에서 부지불식간에 양육되었듯이, 어린 그리스도도 거기서 보호를 받고 성장하셨습니다. 예언이란, 그것이 바로 역사이기 때문에 예언이 되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역사는 모두 미래의 그림자였기 때문이며, 그리스도는 참 이스라엘이자 하나님의 아들이었기 때문입니다(A. Maclaren). 그러므로 그것은 보다 더 깊은 의미에서 예언의 성취인 것입니다. 즉 진정한 하나님의 아들은 이스라엘 민족이 아니라 예수님이라는 것, 그것도 호세아가 언급하고 유대인들 이 역사상 위대한 사건 중의 하나로 간주하는 본래의 출애굽 사건을 외관상 무의미하게 보였으나 사실상 인류를 위하여 가장 뜻깊고 중요한 것으로 판명될 바로 그 사건의 예시적 그림자에 불과했다는 사실입니다(Colin Bown). A]ix는 Midrash Tehillim의 저자는 시편 2편에 대해서 왕 메시야(The King Messiah) 의 신비는 율법과 선지자와 성문서에 밝혀져 있다. 율법에서 그것은\"이스라엘은 내 아 들,내 장자라\"고 기록되어 있다{출 4:꼬)고 말하고 랍비나단(Rabbi Nathan)은 Schemath Rabba에서 이 말에 대하여 \'내가 야곱을 내 장자로 삼은 것과 같이(출 4: 멥), 내가 메시야를 내 장자로 삼았다\'. 이는 \'내가 또 저를 내 장자로 삼고 세계 열왕 의 으뜸이 되게 하며 라고 말한바와 같다\'고 말한다고 해석했다. 이 해석은 이스라엘인 야곱의 중요 역사는 이스라엘인 메시야의 예표이다는 것을 확증해 줍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