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7강 마 2:16-18절 강해
유아 학살과 예언의 성취
마태복음 2:16-18
1. 무죄한 유아들의 학살
먼저 살인자 헤롯에 대해 생각해 봅시다. 우리가 헤롯에 관해 알고 있는 모든 정보를 토대로 하여 추론해 보면, 헤롯의 격렬한 분노는 이 동방 박사들이 간특하게도 자기를 속이고 회심{會心)의 미소를 지으며 사라졌으리라는 회의감에서 더욱 불타올랐습니다.
본문에 보면“이에 박사들에게 속을 줄을 알고 심히 노하였다”고 했습니다.“속은”에 해당하는 헬라어 멤파이조(헬1702) 는 (I) \'...에서 놀다, ...를 조롱(우롱)하다\', (2} \'미흑 하다, 속이다\'를 의미합니다. 일반적으로 \'속았다\'는 의미로 번역하거나 해석하지만, 이 단어에는 \'조롱이나 우롱당했다\'는 의미도 포함되어 있습니다.
그리고 헤룻의 격렬한 분노는 그들 박사들의 선동으로 어린 왕을 보호하려는 무장대가 일어날 수도 있으리라는 공포감에서 더욱 불타올랐습니다. 그래서 헤롯은 새로 탄생한 왕 예수를 죽이려는 강박관념에 사로잡혀 있었습니다.
헤롯은 학식이 있고 영민했지만 의심많고 잔인했습니다. 그는 왕권을 위해 살인하는 일에는 노련한 대가였습니다. 그는 왕위에 오르자마자 유대인의 최고 법원인 산혜드린을 근절시키기 시작했습니다. 그 후 300명의 그 법령 위원들을 살해했습니다.
그후에 그가 극히 사랑한 아내였던 하스몬 가계의 마리암네와 장모 알렉 산드리라와 장남인 안티파트와 두 아들 알렉산드와 아리스토볼루스를 죽였습니다. 그리고 자기의 통치에 반대한 다수의 유대인들을 사형에 처했습니다.
이러한 헤롯이 왕으로 오실 이가 태어났다는 소식을 접하고 그대로 조용히 있을리 만무했습니다.
우리는 헤롯이 박사들에게“별이 나타난 때”둥 자세히 질문한 것을 알고 있습니다(마 2:7이하). 그때까지 그는 교활하게 살해의 단계에 들어가기 위해 그 아이의 나이를 계산하고 있었습니다.
이제 그는 자기의 계획을 빠르고도 야만적 행동으로 옮겨놓았습니다. 그는“베들레헴과 그 모든 지경 안에 있는 두살 아래의 사내아이를 다 죽이라”고 명령했습니다(참조:W. Barclay).
유아 대량학살에 대해서 요세푸스의 기록에는 전혀 언급이 없습니다. 그래서 이 사건을 비역사적 사건이라고 생각한 비평가들이 있습니다. 그것에 대해서 말하자면, 이 사건은 요세푸스가 글을 쓰기 94년 전에 일어난 일로 빠뜨릴 수도 있었습니다.
마카울레이(Macaulay)는 자기 역사에서 가장 부피가 두터운 그 당시 사건의 기록자인 유명한 일기 기록자 에벨린{Evelyn)은 결코 굴렌코우의 대량 학살로 언급치 않았다고 그 가능성을 지적했습니다.
비평가들은 복음서 기자의 이야기를 불신하고 싶은 마음이 간절했으나 그렇게 할만한 근거를 찾기가 너무나 어려웠을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그들은 요세푸스의 지면 밖에 있는 것은 아무 것도 믿을 수 없다는 괴이한 억설에 빠질 수 밖에 없는 것입니다. 사람들이 어떤 사건이 언급되어 있기를 바라는 그 지면에 그 사건이 언급되어 있지 않다고 해서 바로 그 사건이 실제로 없었다고는 할 수 없는 것입니다.
베들레헴 같은 조그마한 마을에 살던 두살 이하의 어린아이는 얼마되지 않았을것입니 다. 아마 도 20-30명을 넘지 못했을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 잔인한 이두매 폭군이 저지른, 얼마안되는 무죄한 어린이들에 대한 학살은 그 심한 고통을 당한 부모들 외에는 동 시대 사람들이 거의 알지 못했거나 무관심했을 것입니다.
이 늙은 폭군의 광란적 잔인성과 그의 고통스런 회의에 얽힌 이야기가 틀림없는 진실 이라는데 대해 의심할만한 하등의 근거가 없습니다. 라드너는 4세기의 이방 작가 마크 로비우스(Macrobius)의 글을 인용하여, ‘아우쿠스투스(Augustus, B.C. 63- AD. 14, 로마 황제)는 유대인의 왕 헤롯이 두살 이하의 아이들을 수리아에서 죽이도록 명령했으며, 그중에는 자기 아들 한명도 포함되었다는 보고를 받았다’고 했습니다.
돌라 예수{Toldath Jesu) 라 하는 랍비의 글에서도‘그 왕은 베들레빔에서 발견되는 모든 아이들을 죽이도록 명령했다’라고했습니다(참조,.J. A. Macolonald).
사망의 그늘이 그를 둘러싸고 앙상해져 가는 손아귀에서 권력이 빠져나가기 시작함에 따라 그의 흥포성은 더욱 크게 일어났을 것입니다.
선에 대한 걷잡을 수 없는 증오에 불타고 그 모든 적대 행위에서 이미 실패로 운명지워졌던 이 불신앙적 노인에 대해 성경이 묘사하고 있는 온갖 비극 적 그림 가운데 본 문의 그림보다 더 붉은 색체를 띤 것은 없습니다.
정당한 왕이신 요람 속의 유아와 가기 싫은 죽음의 길을 향해 달려가고 있던 어떠한 일이있더라도 죽음만큼은 피하고 싶었던 이 헤롯은 얼마나 대조적인가?
헤룻은 왕이신 그리스도에 대한 온갖 대적이 무용한 짓임을 보여주는 하나의 상징입니 다. 헤롯은 그의 손을 피로 더럽혔지만 아기 예수를 해치지는 못했습니다. 혜롯은 인간 이 임명한 왕이고 예수님은 하나님께서 임명하신 왕이십니다. 아무도 하나님의 계획을 방해하지 못합니다. 사람들은 하나님의 계획을 방해하려는 시도로 인해 오직 자신을 상하게 할 뿐입니다.
헤롯은 이 새로 탄생하신 왕이 어느날 왕위를 빼았을 것이라고 두려워했습니다. 그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오시는 이유를 완전히 오해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헤롯의 왕위를 원하지 않으셨습니다. 그는 헤롯의 삶의 왕이 되기를 원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그에 게 영원한 생명을 주시기 원하셨지 그의 현재의 생명을 제거하기 원하신 것이 아닙니다.
오늘날 사람들은 실재로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참된 자유와 평화와 기쁨을 주시기 원할 때 그리스도께서 무엇을 제거하시기를 원하신다고 종종 두려워합니다. 그래서 어떤 강박관념에 사로잡혀 불행을 자초하는 일을 저지릅니다(Life of Application Bible).
이것과 관련해 좀더 생각해 보겠습니다. 헤롯은 옛 예언을 믿으며서도 선지자들이 예언 한 주의 그리스도를 찾아 죽이려 했습니다. 그는 성경을 하나님의 말씀으로 받아들이면 서도 지극히 높으신 자의 뜻을 좌절시키려고 노력했습니다.
이 얼마나 이상하고 불행한 모순입니까? 그의 마음은 성경의 신적 권위를 인정하는 한편 하나님의 뜻에 정면 도전하여 반역했습니다. 발람과 같이 그는 땅의 보잘것 없는 벌레 같으면서도 하나님의 뜻의 발전을 저지할 수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발람과 같이 그 는 자신의 이기적 목적을 위해 하나님의 사랑과 투쟁했습니다.
그는 아기 예수를 하나님에 의해 지정된 그의 백성 이스라엘 의 통치자로 믿었지만 그 어린 왕이 자기의 지상 보좌를 위태롭게 할지도 모른다고 생각하고는 할 수만 있으면 그 어린 왕을 죽이려고 했습니다. 정말 무서운 사악입니다.
사랑하는 형제 여러분, 그리스도를 믿는다고 고백하면서 그의 가난한 백성을 압제하며, 혹은 자기 자신들의 이기적 목적을 위하여 그의 교회의 사역과 진보를 반대하는 자들이 얼마나 많습니까?
이들의 사악은 헤롯의 사악과 오직 강도만 다를 뿐 동질의 사악입니다. 우리는 이러한 죄를 범하지 않았는지, 지금 범하고 있지나 않은지 생각해 봅시다(B. C. Caffin).
2. 학살당한 유아들.
이 유아들의 운명은 참으로 이상하며, 인류 역사에서 가장 슬픈 장면 중의 하나입니다. 그것이 암시하는 문제는 신비한 것이며, 그중에서 어떤 것은 전혀 대답이 불가능합니다.
어린 아이들의 죽음은 항상 신비입니다.‘어찌하여 무죄한 유아들이 그러한 큰 고통을 당하도록 허락해야 하는지 이해할 수가 없다’라고 사람들은 말합니다. 죽음의 심한 고통으로 일그러진 어린 아이의 얼굴, 슬픈 광경을 보면 더욱 그러한 생각이 듭니다. 이 고난의 큰 신비가 무엇입니까?
어떤 사람들은 그 유아들의 죽음이 미래에 범할 더 큰 죄악을 피하는 수단이라고 말합니다. 그러나 그 경우에 있어서도 어린 아이를 구원하는 방법은 매우 이해하기 어럽습니다.
어떤 사람들은 유아들이 자의적인 것은 아니지만 그리스도 때문에 또는 그의 안전을 위해 죽었기 때문에 실제적으로 순교자들이라고 말합니다. 맥클라렌은‘순교의 어린 꽃,회리 바람에 꺽인 장미가 되어 긴 순교자의 행렬에서 선두를 달리고 있다. …그들이 하나님과 어린 양의 첫 열매가 되어 지금 종려나무를 든 무리 가운데 섞여 있으리라고 확신해도 좋다’라고 말했으며, 어거스틴은‘오 행복한 어린 것들이여! 세상에 태어나 시험을 당해 보지 않고 투쟁을 해보지 않았지만 이미 면류관을 쓰고 있도다’라고 말 했습니다.
그러나 이 유아들의 죽음을 그리스도교에 속한 순교자들이라고 보기는 어럽습니다. 우 리는 그들의 죽음을 선구자 요한의 사명과 같이 중대한 사건으로 평가할지라도 구약시대의 종말, 새시대의 시작에 일어난 한 사건으로 보아야 할 것입니다.
따라서 이 무죄한 유아들의 죽음은 하나님의 뜻과 통치에 대해 계속 도전해 온 원수의 최후 발악, 하나님의 새시대의 탄생을 고하는 고난과 회생 그리고 이 고난과 비극에도 불구하고 그리스도로 말미암은 구원의 영광이 도래할 것이라는 소망을 알려줍니다.
또 한가지 기억할 것은 이것은 전통적으로 무고한 유아 학살로 알려진 인간들에 의해 저질러진 무죄한 사람들의 고난을 묘사하고 있습니다. 인간이 받는 고난은 모두 응당 받아야 할 보웅이기 때문에 받는 것은 아닙니다. 인간은 시기 와 야심으로 인하여 악을 행하게 되고 그로 인하여 무죄한 사람들이 고난을 당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인간의 무서운 잔학 행위까지도 이용하여 그의 말씀을 이루시며, 그의 목적을 성취하시며, 사람들을 그의 구원으로 인도하시는 것 입니다(Disciple\'s study Bible).
3. 예언의 성취.
예레미야라는 이름은‘여호와가(그의 대적?)을 쫓아내다,’또는‘여호와가(그 벼락을?) 집어던지다’라는 뜻입니다.
그는 눈물의 선지자로 부르기도 하는 유명한 이스라엘의 선지자이며, B.C. 627년 경부 터 예루살렘 멸망시(B.C.586) 까지 예언자로 사역했습니다. 그후에 그는 애굽으로 떠나 갔는데 아마 거기서 죽은 듯합니다. 그는 예레미야 3l:15에서“라마에서 슬퍼하며 크게 통곡하는 소리가 들리니 라헬이 그 자식을 위하여 애곡하는 것이라 그가 자식이 없으므로 위로받기를 거절하였도다”라는 여호와의 말씀을 전하고 있습니다.
라마는 \'높은 곳\'이라는 뜻의 지리적 명칭이며, 베냐민 지파에 속하는 성읍입니다. 베들레헴 북쪽으로 벧엘에 이르는 도로변에 위치해 있습니다.
야곱이 고향으로 돌아올 때, 그의 아내 라헬이 죽어 이 베들레헴 길가에 장사하게 되었습니다(창 36 :l9). 예레미야 3l:l5은 유대인들이 바벨론으로 사로잡혀가는 포로들의 집 합 장소가 라마였는데, 그들의 조상 라헬이 길가 무덤에서 그것을 보고 슬피 울며 크게 애곡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호세아서의 그 구절처럼(2:l5) 이 구절도 역시 예언이 아닙니다. 이 문장은 l2 지파 중 세 지파의 조상을 낳은 그 위대한 어머니가 무덤 속에서 포로로 잡혀간 자식 들에 관해서 흥분하여 동양적인 날카로운 통곡 소리를 높이듯, 아주 풍부한 상상력으로 서 매우 기묘하게 그녀를 다시 체현시키고 있는 내용입니다. 베들레헴 무덤으로부터의 그 절망적인 통곡성이 예루살렘을 넘어 멀리 북쪽으로 라마까지 들리고 있는 셈입니다. 이 구절은 사실을 묘사한 것이 아니라 단순히 재난의 개념을 전달하기 위해 죽은 어머니를 울고 있는 것처럼 시적 으로 체현시킨 것입니다.
마태는 그와 동일한 슬픔의 곡성이 이 비극의 현장에서 아주 가까운, 오랫동안 침묵해온 그 무덤(라헬의 무덤)으로부터 다시 한번 들려왔을 것이라고 상상하며, 예레미야 3l:l5의 말씀을 인용하고 있는 것입니다. -“라마에서 슬퍼허며 크게 통곡하는 소리가 들리니 라헬이 그 자식을 위하여 애곡하는 것이라 그가 자 식이 없으므로 위로받기를 거절하였도다 함이 이루어졌느니라”(마 2:l8).
“슬퍼하며 크게 통곡하는 소리\" 는 \'큰 애통과 통곡\'을 의미합니다. \"위로받기를 거절하였도다\"라는 말은 \'그가…위로 받고자 하지 아니하였도다\'라고 번역할 수 있습니다. 야곱이 자기 아들 요셉을 위해 애통할 때 모든 자녀가 위로하되 그가 위로를 받지 아 아니했습니다. 야곱이나 여기 라헬이나 그들의 슬픔이 너무나 큰 것이었기 때문에 위로를 받지 아니했습니다.
베들레헴의 어머니들의 슬픔은 너무나 큰 슬픔이었습니다. 조상의 이 두번째 울음은 첫 번째 애곡의 쓰라림보다 더욱 비통한 것이었습니다. 왜냐하면 이는 무죄한 아이들의 실제적인 육살육에 대한 애곡이며, 그토록 오래 기다려온 왕이 강림하시자 비극이 또한 그토록 빨리 닥쳐온데 대한 울음이었기 때문입니다.
이 유아 학살 사건이 그 규모 자체는 작았지만 사건의 장본인이 왕위를 찬탈한 유대인 의 왕 헤롯, 사건의 동기 즉 하나님이 보내신 왕을 죽이려 했다는 사실, 이 사건의 무죄한 어린 희생자들, 그리고 베들레헴이 그 현장이 되었다는 사실 등과 관련해 볼때, 이 재난은 하나님의 제반 약속과 천년의 소망을 한낱 물거품으로 만들어버리는 듯했던 바벨론 포로 생활보다 더 쓰라린 국가적 비운의 짐을 싣고 있는 것입니다(A.Maclaren).
그러나 더 나아가서 생각해보면 그리스도의 탄생과, 흩어진 자들을 또 모으고 영구한 평화 가 실현되는 미래에 대한 약속은 큰 회생으로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새 일의 계시를 반드시 뒤따르는 증거는 고난이며, 이 무죄한 유아들은 이 고난에 제일 먼저 참여한 자 들입니다.
그의 고난에 참여한 그들, 그리고 모든 사람들은 그의 영광에도 참여할 것입니다. 그러므로 애곡하는 베들레헴의 어머니들은 마태가 인용한 바로 그 다음에 나오는 위로의 말(렘31:l6-17) 보다 더 깊고 더 큰 위로를 받을 것입니다.
예레미야 31장의 전체 내용은 하나님의 약속으로 이스라엘에게 준 회복의 소망과 관렬 되어 있습니다.- 복음서 기자가 이 비극적 사건을 다루면서 이것을 참작하지 않고 간과해 버릴수 없는 것이었습니다. 따라서“이루어졌느니라”는 말은 나름대로의 충분한 타당성을 가지고 있다고 하겠습니다.
Colin Brown은 예언의 성취에 대해,‘이 신약 구절들은 종말론적 현재의 입장에서 이해되는 것이다. 이 구약 구절들은 단순하게 에언으로 다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기대 (anticipations)로 다루어진 것이다. 이 원 예언이 언급될 때 그 언급은 유대 백성의 역사 (history)에 상당히 중요한 것이었다. 그것은 역사에서 일어났거나 또는 일어나고 있었던 어떤 일이었다. 마태의 성취의 사상은 사실상 유대인들이 생각한 그 사건은 어떤 그와 유사한 사건에 대해 여기한대로 된 것에도 의의가 있으나 궁극적으로 인류의 구 원을 위한 하나님의 목적들에 있어서 더욱 중요한 의의를 가진다. 이런 의미에서 이것 은 후자가 전자를 성취하는 것이다’라고 말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