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사렛에 귀환과 예언의 성취 마태복음 2:19-23 1. 나사렛으로 귀환 대 헤롯은 불치의 병으로 B.C 4년에 죽었습니다. 이“혜롯이 죽은 후에 주의 사자가 애굽에서 요셉에게”꿈에 다시 나타나서 지시했습니다. 구름 기둥이 움직일 때까지는 움직이지 않고 하나님의 인도를 끈기있게 기다리는 자들은 결코 실망하는 법이 없으며, 또 잘못된 길로 갈수도 없습니다. 주의 천사는 전에 요셉에게“…애굽으로 피하여 내가 네게 이르기까지 거기 있으라” 고 지시했습니다. 요셉은 그 천사의 지시에 순종했습니다. 하나님의 분명한 지시가 있을 때까지 인내로 기다렸습니다. 천사는 자기에게 한번 순종하고 계속 기다리는 자, 요셉에게 다시 찾아왔습니다. 요셉은 자아포기적 순종의 한 모형이자 그 순종에 대한 보상의 한 실례였습니다. 이 세번째 천사의 출현에 관한 묘사는 전번의 것과 같은 말로 묘사되어있습니다. 천사의 출현은 어떤 친숙한 존재의 출현이었습니다. 그의 명령은 전번의 지시와 똑같은 말이 반복되었습니다. “일어니 아기와 그 모친을 데리고 … 가라.”“가라”고 지시 한 곳 은 이제는“애굽”이 아니라 “이스라엘 땅”입니다. 이어서 하나님의 아들(국가 이스라엘)을 애굽에서 불러내기 위한 첫 단계였던, 모세 에게 주어진 그 명령이 여기서 암시적으로 언급됩니다. -“네 생명을 찾던 자가 다 죽었느니라”(출 4:19) - 이 말씀은 모세에게 이스라엘을 위해 애굽으로 돌아가라고 준 격려였습니다. “아기의 목숨을 찾던 자들이 죽었느니라”는 말씀이 또한 요셉에게 격려로 주어집니다. “목숨”에 해당하는 헬라어 프쉬케는 \'숨쉬다, 불다\' 를 뜻하는 프쉬코(헬5590)에서 유래했으며,‘영혼, 생명’을 뜻합니다. 따라서 본래는‘호흡,’즉‘생명의 호흡’ 을 의미하며, 여기서는 생명을 의미합니다. 생명을 찾는다는 것은 보통 죽이려고 찾는 것을 의미합니다(삼상 24:10; 25:29; 26:20; 삼하 4:8; 왕상 l9:10, 14; 렘 11:2l; 시 35:4 등). 이 하나의 문장은 대적들의 첫번째의 시도가 실패로 돌아간 것을 간략히 지적한 것입니다. 그리고 마치 아직 살아있는 사람을 위해 비석에 새겨놓은 비문과도 같은 것입니다. -즉 그리스도를 분쇄하고 그의 사역을 방해하려는 후속적인 온갖 공작의 종말을 알려주는 하나의 예언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연약한 어린 아이의 손이 이 무쇠같은 온갖 주먹이나 펜을 잡은 손가락보다 더강합니다. 그리스도는 살아서 자라납니다. 헤롯은 쇠약해지고 죽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여러분이 그리스도 안에서 선한 길을 걷고 있다면, 어떤 선한 계획 을 수행하고 있다면 그래서 어떤 장애를 직면할 때,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여 지혜롭게 대처하면 그 장애는 곧 사라질 것입니다. 요셉은 천사의 지시를 따라“일어나 아기와 그 모친을 데리고 이스라엘 땅으로 들어” 왔습니다. 명령의 이행에 관한 이 기술에서도 전번과 마찬가지로 그 명령이 다시 문자적으로 반복됨으로서,하늘의 지시에 대한 요셉의 신속하고 정확한 순종이 강조되어 있습니다. 그리고“아기를… 데리고”라고 계속 반복 언급하는데서 우리는 아기를 보호하고 돌보는 요셉의 사명과 책임이 얼마나 중차대 한가를 엿볼수 있습니다. 분명히 요셉은 베들레헴으로 돌아갈 심산이었을 것입니다. 그는 아마 나사렛이“이스라엘의 땅으로 가라”는 천사의 지시와 어울리기 어렵다고 생각했거나 흑은 다윗의 도시가 다윗의 후예에게 어울리는 고향이라고 생각했을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요셉은 예기치 않았던 소식을 접했습니다. 이스라엘 땅에 들어왔을 때 아켈라오 가 죽은 부친 헤롯을 이어 임금이 되었다는 소식이었습니다. 아켈라오( \'백성을 다스린 다\')는 헤롯 대왕이 사마리아인 말다게에게서 낳은 아들입니다. 그는 아버지가 죽은 후 10년 동안 유다, 사마리아, 이두메를 다스렸습니다. 그러나 유대인과 사마리아인들이 그 의 압제 정치를 로마에 호소함으로 아우구스디누스 황제에 의해 비엔나로 추방되고 거기서 죽었습니다. 아켈라오는 아주 폭력적이고 잔인한 사람으로서 그의 통치권을 장악할 때 3000명의 영향력있는 사람들을 학살했습니다. 그러므로 요셉은“거기로 가기를 무서워 했습니다.”“거기로”는 유대 지방을 가리킵니다. “무서워하더니”에 해당하는 헬라어 엡호베데(헬5399; 두려워하다, 경외하다)는 여기서‘두려워(무서워)하다’라는 의미를 가지며, 과거 수동태 디포넌트 동사로 무서워하는 원인이 있음을 나타냅니다. 요셉은 폭군을 무서워했습니다. 요셉은 갈피를 잡을수 없어 하늘의 하나님을 향해 인도해 달라고 호소했습니다. 그리고 네번째로 다시 한번 그의 노정에 대한 하나님의 지시를 꿈으로 받았습니다. 요셉이 천사를 통해 하나님의 지시를 받았는지에 대해서는 본문이 말하지 않습니다. 하나님께서 요셉의 가족이 이 사악한 통치자의 통치권 안으로 들어가는 것을 원치 아니 하셨습니다. 때때로 어떤 두려움은 하나님의 경고입니다. 그래서 요셉이 그곳 유다 지방으로 가기를 무서워하던차 더 분명한 하나님의 지시를 받고 갈릴리 지방으로 들어가 나사렛이란 동네에 와서 살았습니다. 여기서도 하나님께서는 요셉을 한 걸음씩 인도하셨다는 것을 기억하십시요 나사렛(나자렛; 헬3480}는 하부 갈릴리의 마을로 언덕 위에 건설되었으며, 매우 아름다운 지역에 있습니다. 예루살렘으로부티 3일 길의 거리였으며, 디베라에서는 8시간 거리 입니다. 이 나사렛은 탁월한 인물을 낼 수 없는 것으로 알려졌으며(요 l:46), 약성경에나 요세푸스의 기록에서나 탈무드(만일 탈무드에서 예수 그리스도께 붙여준 벤‘네체르’라는 호칭에서 본 단어를 인지할 수 없다면)에서도 한번도 언급되지 않은 비천하고 궁벽한 마을입니다. 피비린내가 덜나는 안디바 치하의 이 나사렛은 잘알려져 있지 않은 곳이었으므로 더욱 안전한 곳이었습니다. 그 파란 많은 피난 생활을 거친 후 그토록 기이했던 새로운 체험과 생각을 품고서, 과 묵하고 지조 굳은 요셉과 은유한 마리아는 자신들의 신비한 책무와 비밀을 간직한채 초라한 옛 집으로 되돌아왔습니다. 2 예언의 성취 예수님께서“나사렛이란 동네에 와서 살았습니다. 그래서 선지자들로 말미암아 나사렛 사람으로 칭하게 되리라고 말씀하신 것이 이루어지게 되었습니다.” 마태는 다시 한번 하나 이상의 예언을 떠올립니다. 전자는 마치 한 가지 이상 여러 개 예언의 취지를 총팔하듯, 복수형“선지자들”(프로페톤)이란 말을 사용했습니다. 그런데 저자가 표현하고 있는 문장은 구약성경의 어느 선지서에서도 발견되지 않습니다. 그러면 그 예수님이 나사렛에 와서 사신 것을 그 예언의 성취로 본 것은 무엇을 의미합니까? 그 해답을 몇 가지로 제시할 수 있습니다. (1) 누군가를“나사렛 사람”이라 칭한다는 것은 곧 그를 비천하고 경멸받는 자로 부르는 것입니다. 갈릴리는 한 선지자가 자라나기에 너무나 메마르고 멸시받는 땅 이었습니다(요 7:14, 52). 모든 갈릴리인들은 그들의 교양의 부족과 멋없는 사두리와 이방인과의 교제 때문에 멸시를 받고 있었습니다(Plummer). 갈릴리의 한 작은 마을 나사렛은 선한 것을 낼 수 없는 것으로 알려질만큼 갈릴리의 다른 고을들보다 평판이 좋지 못했습니다. 그리스도를 편든 니고데모의 소심한 호소에 대해 바리새인들이 퍼붓 조소와 사심없는 나다나엘의 질문이 이를 증명하고 있습니다. 바리새인들은 니고데모에 대답하여 “고하여 보라 갈릴리에서는 선지자가 나지 못하느니라”고 경멸했습니다. 나다나엘은“나사렛에서 무슨 선한 것이 날 수 있느냐”고 멸시했습니다. 그리스도가 나사렛에 거주함으로서, “나사렛 사람”으로 불리게되었다는 사실, 그리하여 모든 갈릴리인들, 특히 그의 마을 주민들에게 붙어다닌 경멸을 공유했다는 사실은 온갖 미천함과 치욕이 그의 몫으로 집중한 것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이 나사렛이란 이름은 십자가에서 그리스도의 머리 위에, 이스라엘의 왕이라는 그의 주장에 대한 하나의 조롱섞인 간전 증언으로서“나사렛 예수 유대인의 왕”이라는 패가 내걸려 있었습니다. 마태의 인용문의 의미에 대한 이러한 해석이 마태가 이사야 11:1 의 예언을 염두에 두고 있었을 가능성까지 배제하는 것은 아닙니다. (2) 구약성경에서 메시야는“가지”흑은 \'어린 가지\'이며 네체르(히5342)입니다. 사사기 I3:5, 7에 하나님의 성별한 자를 뜻하는 나지르(히5139)는 이사야 11:1 에서 이새의… 뿌리에서 나는“한 가지”네체르(히5342)와 동일시됩니다. 이 예언의 의미는 다윗 가문이 그러터기만 남은 나무처럼 극히도 미천한 상태에 처해 있을 때 나타나게 될 다윗의 후손이, 군왕같은 화려한 모습이나 고상한 상태가 아닌, 미천하고 가냘프고 무가치한 모양으로 출현한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사야 53장에서 그는 멸시를 받는 자로 예언되었습니다. 나사렛이란 이름은 아마도 어원적으로 이런 단어와 관계가 있을 것이며, 또 앞에 말한 사실이나 예언이 그리스도가 일생 내내“나사렛 사람”으로 불렸다는 바로 그 사실로 성취되었다고 볼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이 나사렛 동네에 살게 되었다는 사실에서 예언의 성취를 본 것은 멸시 받는 나사렛이 예수님께서 하나님의 성별하신 자인 동시에 다윗의 가문에서 싹튼 메시아로 멸시를 받는다는 것을 지적하기 때문입니다. 그리고“가지”라는 명칭과“나사렛”이란 단어가 가지는 발음상의 유사성은 그리스도 를 위해 선택된 거주지의 의미를 지적해 주는 길잡이 역할을 합니다. 거기에서 거주하셨다는 단순한 사실과 그로 인해 경멸이 따라붙었다는 사실이, 본문에서 언급된 예언들 을 모두 규명한 것은 아닙니다. 그러한 문자적이고 외적인 성취가 없다하더라도 예언들은 훌륭히 성취되었다고 할수있습니다. 그러나 이러한 외적 성취는 나귀를 타고 입성하신다는 예언의 문자적 성취 및 그리스도의 생애에 나타난 기타 여러 사례들처럼 지각이 우둔한 자들로 하여금, 그리스도가 모든 예언의 주제이시며, 그리스도의 생애 속에서는 사소 한 것도 의미가 있고 그 무엇 도 우연이 아님을 보다 분명하게 깨닫게 해 줍니다(참조 :A. Maclaren).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