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9강 마 3:11-12절 강해
요한의 사역/그리스도에 대한 증거
마태복음 3:11-12
메시아 왕국의 도래는 메시아 왕의 도래를 의미합니다. 요한은 그 왕이 한 인간으로 오 시며, 그가 문 앞에 가까이 이르렀음을 알고 있었습니다. 그리하여 요한의 설교는 그 왕의 강림을 선포하면서 그 절정에 이르고 있습니다. 이 설교를 살펴 봅시다.
1. 메시아의 탁월함을 나타낸 요한의 겸손
이 부분에서 첫째로 주목할 것은 \"오시는 이\" 앞에서 그의 탁월함을 나타낸 이 용감한 요한의 극도의 겸손입니다.
그는 \"...내 뒤에 오시는 이는 나보다 능력이 많으시니\"라고 말했습니다. \"보다 능력이 많으시니\"에 해당하는 이스퀴로테로스는 \'강력한, 능력있는\'을 뜻하는 이스퀴로스(헬 2478)의 비교급으로, \'더욱 능력있는\' 이란 의미를 가집니다. 따라서 문자적으로 \'나보다 더 능력이 있으시니(혹은 강력하시니)\'라고 번역할 수 있습니다.
\"오시는 이\"는 낡은 세계를 개혁내지 심판하고 새로운 세계를 가져올 메시아시니 메시아는 모든 점에 있어서 요한보다 한없이 탁월한 분이십니다.
요한은 이 메시아의 현전에서 자기는 \"그의 신을 들기도 감당치 못하겠노라\"고 했습니다. \"신\"에 해당하는 휘포데마(헬5266)는 \'밑에 매는 것\'이란 의미입니다. \"들기도\"에 해당하는 바스타조(헬941)는 \'나르려고 들어 올리다, 나르다\'를 뜻합니다. 그리고 \"감당치\" 에 해당하는 이카노스(헬2425)는 \'충분한, 가치있는, 자격있는\'이란 의미입니다. 따라서 이 문구는 문자적으로 \'신을 들어 줄 자격도 없다\'라고 번역할 수 있습니다.
누가복음에는 \"그 신들메를 풀기도 감당치 못하겠노라\"고 되어 있지만, 두 기자는 다신 시중을 드는 행위를 말하고 있습니다.
유대인들의 신은 가죽으로 된 창만을 가죽끈으로 묶게 되어있읍니다. 그래서 손님이나 주인의 신 끈을 풀어주고 발을 씻어주는 일이 있었는데 이것은 종들 중에 가장 낮은 종이 하는 일이었습니다. 후기 탈무드에 의하면 종된 사람은 엎드려 신들메를 풀어주는 일 외에는 모든 일에 있어서 그 주인을 섬겨야 하나니 이처럼 제자된 사람은 그 스승 을 섬겨야 한다고 했읍니다. 요한은 초자연적으로 오실 심판자 그리스도의 현전에서 자 기는 감히 종노릇 조차 할 자격이 없다고 생각하고 말했습니다.
요한은 하나님의 나라와 그 나라의 왕이 가까이 왔다는 것을 알리고 사람들의 마음에 그것을 받을 수 있는 길을 준비시키기 위하여 하나님이 보내신 소리나 전령자에 불과한 한 선지자입니다.
그러나 요한은 구약의 모든 선지자 보다 위대한 선지자요, 엘리야의 심령과 능력으로 나타난 특별한 능력의 선지자입니다.
그러나 그리스도는 이 요한보다 위대한 선지자입니다 -그리스도는 모든 선지자들과 요한이 예언한 그리스도의 영과 은혜로 나타나실 하늘 나라의 왕이십니다.
이것은 요한이 전하려한 가장 큰 진리이며, 그것을 표현한 방법은 그의 겸손을 보였읍니다. 요한은 그리스도와 자기와의 차이를 가장 정당히 평했으니 그리스도는 높고 자기는 낮아 그는 그리스도에게 한 비천한 종으로서도 가까이 할 자격이 없는 자라고 하여 그리스도를 영화롭게 했습니다.
불같은 온갖 힘, 의로운 책망과 분노, 불굴의 용기가 온유한 복종 속으로 녹아듭니다. 요한은 자기 힘의 한계를 알고 있으며, \'오실 이\'의 무한한 탁월성을 즐거운 마음으로 인정하고 있습니다.
그는 그러한 겸손한 자세에서 결코 벗어나지 않았습니다. 요한의 제자들이 시사한대로 그리스도가 공중 앞에서 최초로 인식된 것은 요한을 통해서였으나 그리스도가 요한을 훨씬 앞지르게 되자 그들은 스승의 마음 속에 이에 대한 저질적인 질투심을 일으키고자 하였습니다.
그러나 그 때 요한은 확고부동한 자아 포기에서, 단지 \"그는 흥하여야 하겠고 나는 쇠하여야 하리라\"라고 대답을 하였을 뿐입니다. 요한은 \'자신이 사랑한 태양(그리스도)의 빛 속에서 이울어 가는 것\'을 기쁘게 생각하였습니다.
오랫 동안 가정적(家庭的) 즐거움을 누리지 못한 이 외로운 금욕주의자의 입술에서 나온, 그 애달픈 말속에는, 자제된 감정과 겸손한 사랑이 얼마나 풍부합니까! \"신부를 취하는 자는 신랑이나...나는...기쁨이 충만하였노라\"(요3:29).
2. 메시아의 선물에 대한 요한의 놀라운 인식
요한은 그 다음 대조로, 자기보다 오시는 메시아가 가져오는 선물과 더불어 그의 능력과 사명이 얼마나 크신가를 보였읍니다. 요한은 \"나는 너희로 회개케 하기 위하여 물로 세(침)례를 주거니와\"라고 말했읍니다.
요한은 자신이 주는 세(침)례가 세(침)례의 물처럼 생명을 부여할 수 없는 차거운 것임을 알고 있었습니다.
세(침)례에 있어서 요한이 할 수 있는 최대의 능력은 인간 생명의 표면에만 도달하는 물로 세(침)례를 주는 일이고, 그것은 최상의 경우라도 회개로 하나님의 통치를 받으려 고하는 자들에게 외적 표시를 하는 것으로써, 내적 은혜의 외적 상징이요, 오는 좋은 것의 그림자에 지나지 않습니다.
물세(침)례는 단지 정화를 상징하는 것에 불과하였습니다. 자신의 의(義)에 대한 설교 자체가 의를 낳을 수 없었듯이 물세(침)례도 정화를 가져다 줄 수는 없었습니다.
그러므로 요한의 세(침)례는 그 자체 아무 효과나 결과가 없고, 요한보다 능력이 크신 그리스도가 수여할 성령과 불의 세(침)례를 위한 준비입니다.
그러나 메시아는 강력한 성령의 은사를 가지고 오실 것입니다. 요한은 \"그는 성령과 불로 너희에게 세(침)례를 주실 것이요\"라고 말했습니다. \"성령과 불로\"라는 표현은 히브리 어법으로 쓴 것으로 불의 성령을 뜻합니다 -성령 세(침)례가 곧 불 세(침)례인 것입니다.
그 실례로 성령이 오순절 날에 부어질 때, 불의 혀 같이 갈라져서 각 사람 위에 임한 일이 있습니다. 그리스도께서 그의 세(침)례에서 하실 수 있고, 하실 일은 인간 생명의 내면, 곧 인간 본질의 깊은 곳에 도달, 그것에 생명을 주고, 그것을 자기 모양으로 변화 시키고, 인격의 더러운 얼룩을 철저히 정결케 하고, 마음을 따뜻하게 녹이는 성령 혹은 불 세(침)례를 주는 것입니다.
물의 상징적 의미와 성령과 불의 상징적 의미와 대조는 Levertoff가 잘 표현했읍니다. 그는 \'물은 오직 표면에 닿으며, 정결케 할지라도 영구적 성과가 없으며, 이것에 대조해 서 성령은 그것이 어디서 역사하든지 마음을 감동케 하고 거기에 생명을 만들며, 불은 그것의 목적(目的)을 잡아 그것을 녹이거나 온전히 살라버린다\'고 했습니다. 불은 쇠를 녹여 쇠똥을 제거하여 더 질(質)을 좋게 하고, 새로운 형태를 만들 수 있게 하며, 어떤 물체를 완전히 태워 없애 버립니다.
예로부터 불은 신적 본성의 상징이었습니다. 여기에는 파괴적인 의미뿐만 아니라 생명을 부여하고 깨끗케 하고 기쁨을 주고 열매를 맺게하고 변화시킨다는 의미도 내포되어 있었습니다. 옛부터 하나님의 영이 모든 육체에 부어지리라는 약속은 메시야의 왕국과 결부되어 왔었습니다.
그리스도의 세(침)례는 그의 능력과 말씀에 순종하는 사람들에게 수여하는 새 생명의 능력이요, 정결케 하는 불이요, 그것은 결국 이스라엘 중에서 참 이스라엘을 구별해 낼 것입니다. 이는 \"내저 표면적 유대인이 유대인이 아니요 표면적 육신의 할례가 할례가 아니라 오직 이면적 유대인이 유대인이며 할례는 마음에 할찌니 신령에 있고 의문에 있지 아니한 것이라\"는 바울의 말에서 분명해집니다(롬2:28-29).
3. 심판에 대한 요한의 새로운 예언
요한은 메시아가 시행할 심판에 대하여 예언합니다. 요한은 그리스도께서 \"손에 키를 들고 자기의 타작 마당을 정하게 하사 알곡은 모아 곡간에 들이고 쭉정이는 꺼지지 않는 불에 태우시리라\"고 말했읍니다.
연속되는 세 구절 모두가 끝에 \"불로\"라는 반복구를 가지고 있는데, 첫 번째와 세번째 것은 파괴적인 불을 가리키고 있습니다. 두번째는 깨끗케 하시는 성령을 가리킵니다. 그러나 파괴하는 불이 깨끗케 하는 불과 무관하지 않습니다. 동일한 하나의 신적 불꽃 이 환영하고 복종하는 자는 순결하게 만들고, 거역하고 경멸하는 자는 태워버립니다.
키질하는 농부, 바람 부는 타작 마당, 저장되는 밀. 뿌리 없고 생명 없고 가치 없는 쭉정이, 가을 들판의 한 모퉁이에 지핀 사나운 불, 거기에서 완전히 불살라지는 쭉정이 등등, 시골 냄새가 물씬 풍기는 이 소박한 비유적 표현들은 설명을 필요로 하지 않는다.
\"키\"에 해당하는 프튀온(헬4425)는 \'키질하는 삽\'을 가리킵니다. 이 키는 타작한 곡식을 공중에 올려서 쭉정이를 바람에 날려버리는 역할을 합니다(렘15:7). 그래서 알곡과 쭉정이를 구별합니다. 그리스도의 손에 든 키는 심판자로서 그의 구별하는 능력과 권위를 가리킵니다.
\"타작 마당\"(할톤,헬257)은 그리스도의 보이는 교회이며(사2I:10), 이 교회는 타작 마당 에 알곡과 쭉정이가 섞여있는 것처럼, 알곡과 같은 가치 있고 유용한 참신자와 쭉정이 같은 공허하고 무가치한 신자들이 섞여 있는 것입니다. 많은 경우에 그들을 바로 식별 하기엔 불가능합니다. - 때때로 거짓 고백은 그렇게 진실한 것같고, 은혜는 그렇게 미약해 보이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리스도의 타작 마당인 교회가 정결하게 될 날이 옵니다. 그 날에 그리스도는 손에 든 \"키\"로 쭉정이 신자들로부터 알곡 신자들을 구별해낼 것입니다. 그리하여 알곡 신자들은 모아 곡간, 즉 안전과 행복의 장소인 천국에 들이고, 쭉정이 신자들은 모아 꺼지지 않는 불, 영원한 고통과 형벌의 장소인 지옥불에 던질 것입니다.
모든 사람은 불의 세(침)례를 받든지, 불에 타든지 해야 합니다. 제삼의 선택은 없습니다.
우리가 요한이 자기의 능력과 사명과 그리스도의 그것을 대조한 것을 살펴보면,
요한의 세(침)례는 물로 인간 생명의 표면만 적시는 것이나 예수님이 주시는 세(침)례는 성령과 불로 인간 생명의 내면에 도달하며 그것을 정결케 할 것입니다.
요한은 오직 구별하는 교리를 전할 수 있고, 그 말씀과 상징으로 신자와 날신자를 외적으로 구별하나 예수님은 교회를 정하게 하실 것이니 구별하는 능력과 권위로 참 신자 와 거짓 신자를 구별하실 것입니다.
요한은 복음을 받은 자에게 오직 위로의 말을 하고, 천국을 약속할수 있으나 그리스도 는 그들에게 위로를 실제로 주시며, 그들을 모아 천국에 들일 것입니다.
요한은 쭉정이 신자나 위선자를 오직 위협하여 \"좋은 열매 맺지 아니하는 나무마다 찍어 불에 던지우리라\"고 말할 수 있으나 예수님은 그 위협을 시행하실 수 있고, 그들을 꺼지지 않는 불에 태울 것입니다.
요한은 이와 같은 대조로 자기의 능력과 사명보다 그리스도의 것은 무한이 탁월하다는 것을 선언함으로, 그의 청중을 그리스도에게 인도했으니 그는 오실 그리스도와 그로부터 큰 것을 기대하도록 하고, 자기가 백성에게서 얻은 모든 이익을 그리스도에게 돌린 것 입니다.
끝으로 말하고자 하는 것은 본문에서 성령을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수여되는 것으로 명백하게 예언한 반면, 회개와 외형적인 세(침)례가 다룰수 없는 죄를 그리스도께서 제거 하신다는, 그리스도의 속죄 제사 사역에 대해서는 전혀 여기에 암시가 없습니다.
요한복음은 그 후에 있었던 세(침)례 요한의 발언들을 담고 있습니다. 그것은 그리스도 의 수세(침}후에 나온 것이며, \"보라 세상 죄를 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 양이로다\"라 는 그의 메시지였습니다.
이것은 최후의 가장 큰 예언성입니다. 하늘 나라의 선포, 능하고 의로우신 왕에 대한선포, 그의 오심이 심판의 불을 지피고 복된 정화의 불을 일으켜 모든 인간을 분류하여 둘 중 어느 한 곳으로 집어 던진다는 선언은, 소망은 물론 공포의 요소들을 내포하고 있었습니다. 이러한 선언은 그 마지막 메시지를 통해 완성될 필요가 있었습니다.
세(침)례 요한과 같은 행위는 언제나 하나님의 진실한 사람의 성격입니다. 하나님의 진실한 사람은 자기의 주 그리스도를 무한히 높이고 자기를 낮춤으로 주 그리스도를 영화롭게 합니다.
그는 자기의 주 그리스도에게 속하고, 또한 주 그리스도에게 돌려야 할것으로, 자기와 자기의 직무의 영예가 되게 하는 것을 결코 허락치 않을 것입니다. 그는 바울과 같이 \"우리가 우리를 전파하는 것이 아니라 오직 그리스도 예수의 주 되신 것과 또 예수를 위하여 우리가 너희의 종된 것을 전파함이라\"(고후4:5)고 말할 것입니다.
경건치 않은 자를 위하여 죽으시고 부활하신 그리스도를 천거하는 것과 죄인들을 구원하는 그리스도의 사랑과 능력을 알게 하는 것이 그의 전도의 중요한 목적이 될 것입니다. 그는 흥하여야하고 나는 쇠하여야 한다는 것이 그의 전도의 중요한 원리가 될 것 입니다.
요한과 같이 주님의 사명자는 그의 선포를 마쳤을 때, 이제 그에게는 쇠하여 가는일 외에 더 이상 아무일도 남아 있지 않습니다. 그는 일출 전의 산들바람과 같은 존재입니다. 산들바람은 일어나 \'새벽이다! 새벽이다!\'라고 외치면서 사라져 갑니다.
그는 십자가에 못박힌 그리스도가 높아지기만 한다면 자신의 이름이 잊어지는 것을 오히려 만족하게 여길 것입니다.
여러분 우리는 하나님의 진실한 사람입니까? 그러면 이와 같은 선한 사람의 행위를 가져야 합니다. 우리는 전도자의 신앙이 건전한지 또는 그가 한 선생으로서 우리의 신임을 받을만한지 알수 있읍니까? 그것은 우리가 그의 가르침에서 그리스도가 어디에 있는가를 알아보는 것입니다.
우리는 우리가 열중한 설교에서 우리 자신 은혜를 받고 있는지 알 수 있읍니까? 우리 는 그 설교의 효과가 우리의 평가에서 그리스도를 높이는 것인지 우리 자신에게 물어 봅시다. 실제로 우리에게 유익을 주는 전도자는 우리로 하여금 그리스도를 더욱 생각하게 할 것입니다.
우리가 그리스도를 높이면 그리스도는 우리를 높이실 것입니다. 많은 일군들이 타락하는 것은 청중들이 그들에게 주는 영예를 그리스도에게 돌리지 아니하거나 그리스도가 받아야 할 영광을 자기가 가로채기 때문입니다.
우리 주님을 바로 전하고 높여 영화롭게 합시다. - 아멘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