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0강 마 3:11절 강해


성령의 불 세례(침례)(1)


마태복음 3:11



성경에서 우리 주님의 선구자 요한의 모습보다 더 애달픈 모습은 없습니다. 그는 외롭고 금욕적인 삶을 살고, 자기가 속한 온갖 사회질서와 싸워야 했습니다.
다음으로는 자유로운 광야 생활에서 감옥 생활로 바뀌고, 불건전한 회의감에 고통을 받았습니다. 마침내 방탕한 한 여인의 증오와 음탕한 한 남자의 비뚤어진 명예 의식의 회생물로 살해당하였습니다. 그는 실로 \'주님의 짐\'을 지지 않으면 안되었던 인물이었습니다.
그러나 아마도 가장 애달픈 모습은 그의 인격 속에 무서운 강인성과 절대적 겸손이 조합된 현상일 것입니다. 자신이 책망해야 했던 이 백성들을 그는 어떻게 대하였습니까! 하지만 순간적으로, \"내 뒤에 오시는 이\" 앞에서, 섬광으로 번쩍이는 눈빛이 가장 겸비한 자아포기의 자세로 가라앉지 않았습니까!
수많은 유혹 앞에서도 요한 자신에 대한 스스로의 묘사에 얼마나 충실하였습니까! \" 나는 하나의 목소리이다\". -그 이상 아무 것도 아니었습니다. 그의 힘찬 팔은 언제나 \"하나님의 어린 양\"만을 지적하였습니다. 자신의 한계를 그처럼 명백하게 인식하는 이는 매우 드뭅니다. 그리고 자존심과 야망이 그리스도를 경쟁자와 적으로 간주하도록 자 극함에도 불구하고, 그 한계 속에 그처럼 만족스러운 마음으로 머물면서, 그분의 빛나 는 영광만을 그처럼 감사한 마음으로 묵묵히 받아들이는 자는, 더한층 드뭅니다.

본문의 말씀은 자기 사역의 가치에 대한 요한의 고상한 관념과 그리스도의 사역과 비교해 볼 때 그 사역의 무가치에 대한 겸손한 의식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나는 물로 세례(침례)를 주거니와 그는 불로 세례(침례)를 주실 것이요\". 이 두 요소의 차이가 엄청나듯 그리스도의 사역과 나(요한)의 사역의 차이도 그러합니다.
하나는 외적 정화를 가져다 주지만 하나는 내적으로 침투하는 능력이 있습니다. 이 불은 모든 사람들을 샅샅이 찾아내 불순물과 오물을 깨끗이 태울 것입니다.
본문의 전후를 보면, 우리 주님의 사역이 요한의 사역과 관련하여 3중적으로 기술되 고, 각 부분의 끝에는 \"불\"이라는 반복 어구가 있는데, 본문이 이 셋 중의 가운데에 위치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 세개의 불은 동일한 효과를 가져다 주지 않습니다.

첫째와 마지막 것은 파괴시키는 불이며, 두번째는 깨끗하게 하는 불입니다. 첫째와 셋째는 위협이지만, 둘째는 전적으로 하나의 약속입니다.
열매 맺지 못하는 나무와, 주님의 키의 바람으로 타작 마당에서 날려 가는 가벼운 쭉정이를 태우는 불이있습니다. 반면 어떤 온실 속의 온화한 열기처럼, 열매 맺지 못하는 나무까지도 꽃피게 만들고, 그 가지에 귀중한 열매가 열리게 하는 불도 있습니다.
그리스도의 강림은 파괴의 불을 지필 수도 있으나 강림의 목적은 우리를 성령의 불 세례{침례) 가운데 집어 넣어 정화와 생명을 얻게 하는데 있습니다.
다음으로 본문을 살펴볼 때 우리는,
- 하나님의 영이 상징적으로 표현된 점,
- 그리스도께서 이를 우리에게 내리신다는 사실,
- 그리고 그것이 우리에게 미치는 영향, 이 세 가지를 생각할 수 있습니다.
이제 이 세 가지 사항에 대해 각각 고려할 점들을 제시해 보려고 합니다.

1. 성령은 불입니다.

이 진리를 실례로 설명하는데 시간을 들일 필요는 없을 것입니다. 그러나 필자가 생각하기로, 본문의 말씀에 대해 왕왕 이상한 오해가 있는 것 같아, 그 점에 대해서는 짚고 넘어가고 싶습니다.
사람들은 때로 본문의 \"그는 성령과 불로 너희에게 세례(침례)를 주실 것이요\"라는 구절을 읽으면서, 앞부분-\"성령으로 세례(침례)를 주실 것이요\"은 그리스도를 믿는자들, 따라서 성화시키시는 그리스도의 능력의 복을 받는 자들과 관련된 반면, 후반부- \"불로 세례(침례)를 주실 것이요\"는 불신자들에 대한 위협이라고 생각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본문의 앞뒤 구절들에 나타난 상징의 의미는 어떻든 간에 본문 자체 속의 의미는 단 하나 밖에 있을 수 없습니다. 즉 하나님의 성령이 깨끗케 하시는 힘을 발휘하신다는 것입니다. 성령 세례(침례)가 따로 있고 불 세례(침례)가 따로 있는 것이 아니라 전자는 실체이며, 후자는 그 실체의 상징입니다.

종종 오해를 불러 일으키고 있는 이 상징의 의미에 대해 간략히 살펴보는 것도 좋을 것입니다. 세계 어느 곳에서나 불은 신적 에너지를 나타내는 것으로 생각되어 왔습니다.
이교에서도 빛에 대한 숭배와 아울러 불에 대한 숭배가 공존하였습니다. 그 잔인한 몰록 예배와 그 모든 혐오스런 짓들까지도 신속한 불의 힘과 붉은 불꽃이 영광스런 속성들의 상징이라는 관념에 기초를 두고 있었습니다. 이러한 사상이 어두워지고, 손상되고, 잘못 인식되고, 의식을 통해 잔인하게 표출되었지만, 그럼에도 그 생각 자체는 올바른 것이었습니다.

성경은 처음부터 이런 관념을 사용하고 있습니다. 사례를 열거하자면 너무나도 많습니다. 그러나 몇 가지만 예를 들어 보겠습니다.
하나님과 아브라함 간에 언약이 체결될 때, 연기나는 풀무와, 쪼갠 제물 사이로 지나는 횃불을 통해 하나님의 임재가 표현되었습니다. 그 후의 모든 계시는 그 언약에 기초를 두고 있습니다.
출애굽의 대장정을 위한 준비였던, 하나님의 이름에 관한 위대한 계시가 모세에게 주어질 때도 광야에 여기 저기 흩어져 있는, 한 가시 나무에 불이 붙었으나 사라지지는 않는 광경이 표적으로 나타났습니다.

통상적으로 이 꺼지지 않는 불꽃은 노예 생활의 도가니 속에서도 멸망당하지 않는 이스라엘을 상징한다고 해석되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 해석은, 불꽃이 \"나는 스스로 있는 자니라\"라는 심오한 말씀과 동일한 취지, 동일한 의미를 가지고 있다는 해석보다 덜 자연스럽습니다.
계시 그 자체인 이 이름은 그와 똑갈은 진리, 즉 자존하시는 위대한 하나님의 지침없는 권능과 다함없는 생명을 상징적으로 표현하는 그 표적을 수반하였던 것입니다. 지존자 하나님은
- 뜻하시나 변하지 않으시고,
- 행하시나 기운을 잃지 않으시며,
- 주시나 결코 가난해지지 않으시고,
- 우주를 채우시나 스스로가 같은 한 존재로 계시며,
- 불타고 계시나 사라지지 않는 \"스스로 있는 자\"이십니다.
이 진리가 불꽃으로 상징화되었습니다.

나아가, 광야의 이스라엘에게 하나님의 인도와 보호의 보증이자 상징적 표시로서 구름 기둥과 불기둥이 나타났음을 우리는 잘 알고 있습니다. 이 기둥이 정오의 뜨거운 태양빛 속에서는 물결치는 연기 기둥처럼 보였으나 어둠이 내리면 중심부에서 작열 하는 불빛을 내어 잠이 든 진을 가로질러 타오르는 호위의 불기둥이 되었습니다.
선지자는 말합니다. \"우리 중에 누가 영영히 타는 것과 함께 거하리요\". 그 답변은 한 시편에서 \"여호와여 주의 장막에 거할자 누구오며\"라는 질문에 대해 답하고 있는 내용과 유사하다 하겠습니다.
이러한 유사한 내용은 물론 이사야서의 그 구절 전체 어조를 보더라도 이사야에게 있어서 \"영영히 타는 것\"은 하나님의 상징적 칭호였다는 결론이 불가피하게 도출됩니다(참조 :사33:I4; 시15편).
그리고 기타 모든 관련 구절들은 차치해 두고라도, 알다시피 주님께서도 친히 요한과 똑같은 상징을 분명히 동일한 의미로 사용하셨던 것입니다. 자기 사역의 완성을 갈망하면서 주님은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내가 불을 땅에 던지러 왔노니 이 불이 이미 붙었으면 내가 무엇을 원하리요\".
오순절의 \"불의 혀\"도 동일한 교훈을 가르쳐 줍니다. 밧모섬의 선견자도 \"하나님의 일곱 영\"인 \"일곱 등불 켠 것\"이 보좌 앞에 있는 모습을 보았습니다.
이러한 일련의 상징적 표현들이 보여주듯이 신성의 어떤 양상, 특히 하나님의 성령의 어떤 양상이 불로써 표현되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그 양상은 무엇입니까? 이에 대한 답변으로 \'하나님의 성령의 속성과 직무는 성경에서 결코 파괴적인 것으로 묘사되지 않는다\'는 사실을 나는 상기시키고 싶습니다.
다만 성령이 마음 속에 일으키는 죄에 대한 자각을 형벌로 간주할 수 있다고 치면 성령의 사역은 형벌이라고도 볼 수 있겠습니다. 좌우간 하나님의 영의 불은 고통과 죽음을 일으키는 어떤 진노의 불이 아니라 빛과 기쁨과 평화를 가져오는 자비로운 전능 의 힘입니다.
불이 되시는 성령은 생명을 주시는 영이십니다. 그러므로 본문에서 언급된 이 상징은 공포와 파멸의 요소를 가지고 있지 않고 소망으로 가득하며 약속으로 밝게 빛나고 있습니다.
이를 보다 일반적으토 신성에 적용한다하더라도 역시 동일한 의미를 가집니다. 하나님을 타는 불꽃으로 묘사하는 성경 구절들을 보면서, 대부분의 독자들은 무의식적으로 이를 하나님의 진노에 대한 계시로 해석합니다. 우리는 그러한 상징 속에 신성의 형벌 적, 파괴적 측면이 존재한다는 것을 결코 부인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확실한 것은 오로지 그러한 의미만 있지는 않다는 사실입니다. 그리고 파괴적 의미가 그 상징의 주요 의미는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인간들을 향해 하나님의 이름이 지니는 복되고 즐거운 양상들을 의미하고 있음이 분명한 그러한 문맥에서 이 상징이 거듭 거듭 사용되었습니다.
이 상징 속에 이중적 의미가 있다는 것은 의심할 여지없이 이 상징에 내포된 표현상 의 묘미라 하겠습니다. - 동일한 속성에 의해, 하나님이 자기를 사랑하는 자들에게는 생명이 되시고 자기로부터 등을 돌리는 자들에게는 사망이 되신다는 사실을 보여주기에 알맞은 표현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그 이름의 밝은 측면과 두려운 측면이 본질적으로 하나라는 것과 양자 간의 차이는 그 양상들을 바라보는 눈의 차이에서 발생한다는 것이 사실이지만, 그럼에도 이 불의 상징은 양자 중 후자 아닌 전자 ,즉 밝은 면과 주로 관련되어 있습니다.

이 상징 속의 주관념은 깨끗하게 만들고 변화를 가져오는, 신속한 에너지와 침투력있는 능력에 있다고 생각합니다. 이 불은 빛과 열의 원천입니다.
그것은 무엇이든 붙잡아 재로 만들어 버리는 불이라기보다 차가운 죽은 물질을 사로 잡아 거기에 불꽃을 일으켜 훨훨타오르게 만들고 밝게 빛나는 자기 모습과 같게 이를 변화시키는 불입니다.
그 불은 하늘을 향해 솟아 오르고 땅의 티끌들을 뽀족하게 치솟는 불꽃으로 날립니다. 적어도 이 불은 가시적인 것들의 총체입니다. - 요컨대 그것은 사망의 불이 아닌 생명의 불이며 하나님의 상징입니다.
- 불은 변화시키는 하나님의 권능,
- 하나님의 은혜가 미치는, 녹이고 깨끗케 하고 살리는 영향력,
- 하나님의 압도적 사랑의 따스함을 우리에게 말해 줍니다.
불이 심판파 형벌과 파괴라는 저변을 가지고 있는 것도 사실이지만 그 표면에는 축복과 생명의 부여와 성화시키는 권능이 있습니다. 그러므로 \"그는 성령과 불로 너희에게 세례(침례)를 주실 것이요\"라는 세례(침례) 요한의 말은 즐거운 회소식인 것입니다.

2. 그리스도는 우리를 이 하나님의 불 속에 잠기게 하십니다.

본문의 \"물로...성령과 불로\"라는 문구는 문자적으로 \'물 안에...성령과 불 안에\'를 의미합니다. 누가복음 3:16의 병행문구 \"물로...성령과 불로...\"도 \"물로\"는 처격으로, 역시 위와 동일한 의미를 가집니다.
주석가들 중 아주 정확한 해석을 하고 있는 한 분인 Meyer은, 이 구절에 대한 설명에서, 여기에 전치사가 [엔]이 세례(침례)가 이루어지는 방편을 표현한 것이 아니라 \'안 에(in)\'라는 의미로서, 물이라는 요소 안에서 세례(침례)가 이루어진다는 점을 표현하는 이상, 이 구절은 물에 완전히 잠기는 침례의 개념으로 이해되어야 한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이러한 진술에 동의하기를 주저하는 자는 극히 드물다고 나는 생각합니다. 이 말이 옳다면, 우리가 하나님의 영 속으로 들어가 그와 완벽한 접촉이 이루어진다는 이 은유야 말로 정말로 웅대한 개념을 전달해주고 있습니다.
이 은유는 우리의 전존재가, 생을 변화시키는 그 권능에 완전히 잠기게 된다는 것을 정말로 잘표현하고 있습니다.

이 비유에 의해 그 약속에 그와 같은 강렬한 의미가 형성되고 있다는 점을 제외하고도 이 말씀은 또 하나의 중요한 문제를 우리 앞에 뚜렷하게 던져주고 있습니다. 즉 그 것은 인간의 차가운 상태를 하나님의 불로 흠뻑 적시는데 그리스도께서 그 매개체 역할을 하신다는 사실입니다.
요한의 이 증언은 자신에 대한 그리스도의 주장과, 그리고 이 문제에 대한 성경의 대의 전체와 완벽한 조화를 이루고 있습니다. 그리스도는 성령의 주이십니다. 그는 그 불을 지상에 던지러 오셨습니다. 주님은 그 붉은 빛의 선물을 하늘로부터 필멸의 인생들 에게 가져다 주시며 자기 인성의 상한 갈대로 이를 전달하십니다.

그의 자비로운 계획에 따라 그는 우리를 위해 결박당하고 고난을 당하셨으나 마침내 그 결박에서 풀려나시고(그 결박이 그를 붙잡아둔다는 것은 불가능하였다), \"하나님이 오른손으로 예수를 높이시매... 그가... 이것을 부어 주셨습니다\"(행2:33).
그리스도의 능한 사역이 생명을 부여하는 권능으로 하여금 우리 안에 거하도록 길을 열어 놓으셨습니다. 성령은 때때로 임하는 선물이 아니라 항존적으로 임재해 계시는 존재이며, 옛날처럼 특별한 직무를 위해 특별한 능력을 베푸는 존재가 아니라 근본 토대로 부터 인간의 인격을 거룩하게 하시는 분이십니다.
주님은 우리에게 보혜사를 보내시겠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우리가 이러한 고상한 주제 들에 대해서는 아는 것이 별로 없지만, 분명하게 알 수 있는 것은 그리스도라는 선물을 이어 하나님의 성령이 충만하게 부어져야 하는 여러 이유 가운데, 한 가지 이유는 개인적, 주관적 영감의 정도가 객관적 계시의 분량에 따라 변한다는 것입니다.
계시된 진리는 성령의 사역의 조건이자 도구입니다. 이 성령의 검이 더욱 날카로울수록 성령의 권능도 더욱 강해질 것입니다.

따라서, 성자의 메시지와 그의 삶, 죽음, 부활, 승리를 통해 하나님의 계시가 완성될 때 비로소 충만하고 영구한 성령의 선물이 가능하였습니다. 성령의 선물은 새로운 계시를 만들기 위해 주어진 것이 아니라, 영구적으로 전파된 말씀{word) 속에 들어 있는 모든 것을 밝히기 위해 주어진 것입니다. 그리스도안에 하나님의 이름 전체가 내포되어 있는 것입니다.

어쨌든 주요한 문제는 그리스도께서 성령을 주신다는 사실입니다. 예수님 안에서, 그 리고 예수님에 의해 당신과 나는 깨끗케 하는 이 불과 실제로 접촉하게 됩니다. 그리스도의 사역이 없었다면 그 불은 결코 지상에서 타오르지 않았을 것이다.
또 주의 사역에 대한 우리의 믿음이 없다면 그 불은 결코 우리의 영혼을 깨끗하게 하지 못할 것입니다. 하나님의 성령은 그리스도교의 원리들이 이를 믿는 사람들에게 미치는 어떤 도덕적 영향력의 동의어가 아닙니다.
이 원리들은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계시된 진리로서, 성령께서 자신의 지극히 고귀한 사역을 수행하시는 수단입니다. 이 진리들에 대한 내적 수용, 이 진리들이 계시하고 있는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은 우리가 그 깨끗케 하는 권능을 소유하는데 있어 절대적으로 필수불가결한 것입니다.
성경의 약속은, \"그를 믿는 자의 받을 성령\"(요7:39)이라고 표현하고 있습니다. 우리 가 예수를 믿지 않는다면 하나님의 그 선물이 기타 수단을 통해서도 우리에게 올수있다고 제아무리 공상의 나래를 편다 하더라도 우리의 맹신적 미혹과 잘못된 노력에 대해 오직 다음과 같은 준엄한 응답이 다가을 뿐입니다: \"이 도에는 네가 관계도 없고 분깃될 것도 없느니라\"(행8:22).

오 ! 영적 상승을, 지성적 계발을, 숭고한 열정의 불을, 순결한 마음의 헌신을 추구하고 있는 자들이여, 우리 주 그리스도 안을 제외하고 어느 곳에서 그 장엄하면서도 겸손한 음성, 엄숙하면서도 사랑에 찬 책망과 부드러운 긍휼과 우리의 눈멀음에 대한 탄식 및 슬픔과 간절한 탄원과 신적 권위 등이 뒤섞인 그 어조를 들을 수 있겠습니까? -\"네가 만일 하나님의 선물과 또 네게 물좀 달라 하는 이가 누구인줄 알았더면 네가 그에게 구하였을 것이요 그가 생수를 네게 주었으리라\".
사람들은 차갑고 불결하고 어둡고 죽어 있습니다: 그러나 여기에 깨끗하게 만들고, 밝게 비추고, 생명을 줄 수 있는 하나님의 불이 있습니다. 우리의 커다란 빈핍 상태와 완전 충족적인 하나님의 에너지 사이의 진정한 접촉이 어떻게 하면 발생합니까?
한 음성이 우리 모든 그리스도인들의 영혼에 그에 대한 답변을 들려주고 계십니다: \"내가 보혜사를 보내리라\"(요l4-l5장).

형제들이여, 우리 모두 그를 붙잡도록 합시다. 그리고 겸비한 신앙으로, 그 불의 강물 속으로 우리를 몰아 넣어 달라고 그에게 간구하도록 합시다.
이 불의 강물은 한편으로는 불임에도 불구하고 하나님과 어린양의 보좌로부터 나오는 생명수의 강이기도 합니다. 요한은 \"그는 성령과 불로 너희에게 세례(침례)를 주실 것이요\"라고 외치고 있습니다. - 아멘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