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님의 비둘기(1)
마태복음 3:16-17
마태복음3:16-17 이 마태복음은 왕의 복음입니다. 마태복음은 예수님을 오래 전에 약속한 메시아, 다윗의 아들로 말하고 있습니다. 예수님과 그의 사역에 대한 이러한 인식은 마태복음 전체에 두루 퍼져 있지만, 특별히 서두 부분에서 사건의 선택을 결정하고 문체에 특색을 부여하는데 있어 더욱 뚜렷히 나타나 있습니다. 그 때문에 마태복음서 초두의 계보는 그리스도가 다윗왕 의 혈통임을 강조합니다. 또한 동방 박사들의 이야기도 그러한 각도에서 소개됩니다. 그들은 갓 태어난 유대인의 왕을 찾아와 경배를 드렸습니다. 그리스도의 순수한 가난과 유아적인 무사기는 왕위를 찬탈한 잔인한 헤롯의 왕궁 및 성격과 좋은 대조를 이루고 있습니다. 그리고 세례(침례) 요한의 설교가 \"천국이 가까왔느니라\"는 말로 약술되고 있는 것도 맥락을 같이 합니다. 요한은 전진하는 왕의 어가 앞에 달리며, 졸고 있은 그 민족을 향해 \'왕이 오셨다! 왕이 오셨다!\'라고 외쳐대는 사자였습니다. 예수님의 왕적 위엄과 연결된 동일한 맥락에서 우리는 예수님의 수세(침)을 메시아 직무의 공적 취임으로 간주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성령의 강림을 왕의 기름 부음, 곧 왕의 대관식으로 간주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이 세례(침례)를 받으시고 물에서 올라 오실 때 하늘로부터 주어진 명백 한 지시의 온유한 표징인 비둘기가 날개를 펄럭이며 예수님 위에 내려와,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 기름부움받은 메시야, 이스리엘과 세계의 왕임을 선포하였습니다. 우리는 이 사건을 살펴보면서 단 두 가지 사항, 즉 이 사건과 예수님의 관계, 그리고 이 사건과 우리의 관계를 짚어 보고자 합니다. 1. 이 사건과 예수님의 관계 1) 우리는 이 사건에서 먼저 왕의 대관식을 보게 됩니다. 요한은 \"하늘이 열리고 하나님의 성령이 비둘기 같이 내려 자기(예수님) 위에 임 하심\"을 보았습니다. 그리고 하늘로서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요 내 기뻐하는 자라\"는 소리를 들었습니다. 우리는 여기서 하늘이 어떻게 열렸는지, 비둘기로 나타난 실체가 무엇인지에 관해 객관적으로 이해 시킬수 있는 아무 자료가 없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그 들려온 소리는 하나님의 음성이었으며, 내려온 것은 하나님 의 영이 었다는 것을 지적하는 것으로 충분합니다. 우리는 요한이 하나님의 특별한 은혜로, 혹은 선지자적 방식으로 그 광경을 보고 들었다고 생각합니다. 다음으로 일어나는 문제는 이 성령 강림의 목적에 관한 것입니다. 이것은 분명히 왕에게 기름을 붓는 왕의 대관식이었습니다. - 인간은 왕이 된 연후에 왕관을 씁니다. - 대관식은 왕이라는 신분의 결과이지 원인이 아닙니다. - 대관식은 기존 사실의 공식적인 엄숙한 선포입니다. - 왕관을 쓴다하여 어떤 부가적 권력이나 어떤 새로운 권위가 오는 것이 아닙니다. 그러므로 요한복음은 이 위대한 사실의 제일 목적이 메시아가 누구인가에 대한 하나님의 엄숙한 지적이었음을 뚜렷하게 진술하고 있습니다. 이러한 고지는 먼저 요한에게 주어졌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요한으로 하여금 메시아를 다른 사림들에게 증언하도록 하기 위해서 였습니다. 뒤를 잇고 있는 \"하늘로서의 소리\"는 성령이 임하신 예수님의 신분과 사명을 선포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항상 우리가 기억해야 할 것이 있습니다. 이 사건이 예수님께 대한 하나님의 성령의 작동 개시도, 그의 메시아 신분과 메시아 의식의 개시, 그의 성자 신분의 개시도 아니었다는 점입니다. 그 날은 실제로 아들이 태어난 날이 아니었습니다. 세례(침례)를 받기 전에 이미 메시아 되심에 대한 의식이 있었습니다. 이러한 사실은 겸손과 권위가 독특하게 접착된 다음의 말씀이 증언하고 있습니다: 우리 주님은 \"이제 허락하라 우리가 이와같이 하여 모든 의를 이루는 것이 합당하니라\"고 하셨습니다. 그리고 세례(침례) 받기 전에, 심지어 탄생하기 전에도 그 하나님의 성령은 그의 인성에 작용하였습니다. 또 하늘이 열리기전, 비둘기가 그의 머리 위에 내려 오기 전, 영원 전부터 그는 아버지의 품속의 아들이었습니다. 그러므로 성경의 가르침을 정확히 따른다면, 본문의 사건은 권능과 성령 전달의 개시가 아니라 다음과 같은 점에서 한 단계 진보라고 생각합니다. 그리스도의 세례(침례)는 메시아직의 공식적 취임이었던 까닭에 그것은 그의 인생 발전의 획기적 사건이었습니다. 그는 산 중에 자리잡은 그 갈릴리의 궁벽한 마을의 무명 생활에서 벗어나 공생 의 길에 나선 것입니다. 그는 창칼이 놓인 길 위로 이제 첫 발을 내디디었습니다. 이 길은 그가 십자가까지 걸어가야 할 길이었습니다. 그리스도의 인성은 시간의 제약을 받고 역량의 확대와 증대가 가능한 것입니다. 그리스도는 대표 인간으로서 새로운 직무를 위한 은사의 증가를 필요로 하는 것 입니다. 그러므로 성령은 그의 새로운 메시야의 소명과 사역에 대비해 충분한 준비를 갖을 수 있도록 그의 인간성의 발전을 위해 부워진 것입니다. 그리스도의 인성은 우리처럼 하나님의 성령의 계속적인 강림을 필요로 하였습니다. 그리고 그의 인성은 죄가 없었으므로, 성령을 완전하게 받을수 있었습니다. 우리 주님은 친히 선언하신대로 자신에게 죄가 없음을 알고 계셨지만 머리를 굽히고 자신에게 불필요한 회개의 세례(침례)를 받았습니다. 이와 똑같은 맥락에서 우리 주님은 후에 자신에게는 불필요하지만 머리를 숙이고 반드시 받아야 하는 더 쓰라리고 더 슬픈 세례(침례)를 받으셨습니다. 이는 전자에 있어서든 후자에 있어 서든 모두 스스로 형제들과 일체를 이루고자 하셨기 때문입니다. - 하나님의 성령은 탄생 이전에 주님의 인성을 지으셨습니다. - 하나님의 성령은 그의 거룩한 유아기와 자라나는 청년기에 그안에 거하고 계셨습니다. - 그리고 이제 하나님의 성령은 그의 공적 생애의 시작에서 그에게 한량없이 주어졌습니다. 성령이 이렇게 그리스도에게 강림한 이유가 무엇입니까? 그것이 필요하였습니다. - 예수님 위에 성령의 강림은 그의 선지직의 자격 때문에 필요했습니다. 선지자들은 항상 하나님의 영으로 말합니다. 예수님은 그의 선지직을 그의 신적 본질로 아니라 성령의 영감으로 이행하셨습니다. - 그가 전도하기 시작하셨을 때 주의 영이 그에게 임했습니다. - 예수님 위에 성령의 강림은 그의 백성을 위한 주직, 즉 교회의 머리시기 때문에 필요했습니다. 예수님은 그에게 임한 성령의 은혜를 그가 이루신 공로와 함께 그의 백성에게 이끌어 주려하신 것입니다. 머리에 부은 기름은 옷자락에 흘러내립니다. 예수님은 인간에게 선물들을 주시기 위하여 성령의 선물들을 받으신 것입니다(골 2:9-10). - 예수님 위에 성령의 강림은 기타 새로운 요망에 의해, 그리고 메시아 사역을 충분히 감당하기 위해 필요했습니다. 그러므로 사랑하는 여러분, 그리스도께서 하나님의 성령으로 세례(침례)를 받으신 사건을 통해, 우리는 실현된 인성의 이상(ideal)을 보게 됩니다. 인성은 언제나 의존적이며, 순결을 위해 그 거룩한 영향력을 늘 필요로 하며, 모든 기공마다 그 신적 은사를 받아야 하는 것입니다. 너무나도 자주 중단되고 끊기는, 우리의 제한적이고 국부적인 성령 수용과 얼마나 대조적입니까? 죄로 인해 우리의 마음 속에는 잠겨 있는 모든 문들, 악덕과 자아로 인해 우리 영혼 속에는 어두워져 있는 온갖 창문이 그리스도에게는 그 날에 활짝 열려 밝게 빛나는 조명을 받았습니다. 그러므로 \"아버지께서 그에게 성령을 한량없이 주셨던\" 것입니다. 우리는 여기서 삶의 비결을 배웁시다. 우리의 잠겨진 모든 문을 열어 놓고 회개 하고 기도합시다. 그렇게 하여 우리의 영적 성장과 우리의 사명을 위하여 성령의 충만을 받읍시다. 2) 다음으로 이 상징의 의미를 생각해 봅시다. 요한이 부정확하지는 않으나 불완전한 관념을 가지고 그가 선표한 메시아로부터 무엇을 기대했는지 생각해 보시오. 그에게 있어서는 왕의 오심이 일차적으로, 주로 심판을 위한 강림이었습니다. 요한의 말대로는 이스라엘의 옛 소망을 아름답게 감싸는 것보다 더 무서운 것은 없는 것입니다. 요한은 왕이 오시고 계시며, 그 왕의 오심은 두려운 일이 될 것으로 믿고 있었습니다. - 심판이 왕을 앞서 가며, 왕은 \"손에 키\"를 들고 계시며, \"꺼지지 않은 불\" 을 지피고 그속에 열매없는 잎 많은 나무들을 집어 던져 불살라 버립니다. 이것은 요한이 기대한 최악의 일이었으며, 최상의 일은 메시아의 능력으로 이루어지는 성령 세례(침례)였습니다. 그러나 성령 세례(침례)도 소생시키는 역할을 하지만 불이며, 한편으로 기쁨을 주면서도 한편으로 샅샅이 찾아 파멸시키는 것입니다. 요한은 자기의 친척 목수, 나사렛 예수가 메시아로 지명될 때 두 가지 경이를 보았습니다. - 이 사람이 그리스도라는 것과 자기가 소멸시키는 불로 생각했던 성령 이 비둘기 모양으로 그의 머리에 내려왔다는 것입니다. 구약성경의 상징적 표현들과 자연시가 연합하여 이 상징을 적절히 표현해 줍니다. 이 상징이 무엇을 의미합니까? 첫째로 옛 세상의 시초에 \"하나님의 신(성령)은 수면에 운행하시니라\"말과 관련 하여 생각하면 비둘기는 성령의 강림으로 인한 그리스도의 새 창조의 능력을 나타냅니다. 여기에 \"운행하시니라\"고 번역된 히브리어 라하프는 어미 새가 부드러운 가슴과 날개를 펴서 어린 생명을 감싸고 소생시키고 기르는 행위를 의미하기도 합니다(신 32:11). 둘째로 레위기 1:14에 보면, 비둘기는 순결한 새로서, 오직 제물용으로 허용되었습니다. 그리스도는 영원한 성령에 의하여 흠 없는 자신을 하나님께 드려 속죄사역 을 완수한 것입니다. 셋째로 비둘기는 노아 홍수 때에 그 입에 갓딴 감람 잎사귀를 물고와 방주에 있는 자들에게 홍수의 감소와 가까운 구원의 복음을 전했습니다. 성령이 비둘기 같이 그리스도에게 임한 것은 그가 평화와 화해의 감람 가지를 세상에 가지고 오셔서 자비와 사랑의 큰 복음을 전파하는 천국에서 온 비둘기이심을 보입니다. 우리는 그 의 말씀에서 그 비둘기의 날개 소리를 듣고 그의 부활의 말씀에서 감람 새 잎을 봅니다. 모든 민족들은 비둘기를 온유와 부드러움과 신실함의 상징으로 여겼습니다. 이런 모든 연상 관념으로 인해 복되신 성령강림이 비둘기 형체를 취하였던 것입니다. 넷째로 그렇다면 이 비둘기의 상징은 왕의 인격에 대해 무엇을 말해주고 있습니까? 순결이 그의 왕권의 토대입니다. 온유와 부드러움이 정벌의 무기이며, 통치의 홀입니다. 비둘기가 강한 날개와 구부러진 발톱, 날카로운 부리를 가진 로마의 독수리와 부정하고 탐욕스런 온갖 날짐승들보다 더욱 멀리 빨리 날것입니다. 옛 선지자는 \"시온의 딸이 크게 기뻐할지어다. 네 왕이 네게 임하나니 그는 겸손하여서 나귀를 타나니\"라고 말했습니다. 그는 무력의 전마를 타지 않습니다. 이 말씀은 하나님 나라의 참 본성을 교훈합니다. 조롱자들은 예수님의 이마에 가시 면류관을 씌우고 그의 손에 갈대 홀을 쥐어 주면서 \"그 앞에 무릎을 꿇고 유대인의 왕이여 평안할지어다\" 라고 자신들이 이해 하지 못하는 깊은 진리를 부지 불식간에 내뱉었지만, 그들의 이러한 언행 역시 진정한 왕국의 참 본질을 교훈한 것이었습니다. 바로 이러한 교훈들을 여기 본문의 말씀도 우리에게 전해주고 있습니다. 그것은 온유가 정복한다는 교훈, 그리스도의 왕은 고난에 기초를 두고 온유로 통치한다는 교훈이었습니다. 옛 시인은 예언자적 환상의 황홀경에서 신랑되신 그리스도의 강림을 바라보면서 전쟁과 평화의 영상들을 묘하게 화합시켜 노래했습니다. - \"왕은 진리와 온유와 공의를 위하여 위엄있게 타고 승전하소서 왕의 오른 손이 왕에게 두려운 일을 가르치리이다. 왕의 살이 날카로워 왕의 원수의 염통을 뚫으니 만민이 왕의 앞에 엎드려 지는도다\" (시 45:4,5). 이 싯구의 교훈이 바로 주님께서 가시 면류관을 쓰실 때 가르침받은 교훈과 동 일한 것입니다. 그리고 주님의 대관식 날에, 앞으로 숙인 반짝이는 머리 위에 내려 온 것은 하늘의 비둘기였으며, 이는 온유와 부드러움이 전능자의 의복이라는 선언 이었습니다.(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