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4강 마가복음 1장 강해
마가복음 1장 9-11절
마가복음(4) 신앙생활은 내려가는 생활입니다
세례 요한은 자기가 주님의 길을 예비하는 자이고
주님 앞에서는 자기가 아무 것도 아니라는 확고한 의식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9절을 보면 전혀 다른 장면이 연출됩니다.
예수님께서 요단강에서 세례 요한으로부터 세례를 받으신 것입니다.
메시야를 예비하는 사람이 어떻게 메시야에게 세례를 베풀 수 있습니까?
왜 예수님께서는 죄인처럼 되어 요단강으로 들어가서 세례를 받으십니까?
이 예수님의 세례에는 몇 가지 의미가 있습니다.
1. 첫째, 예수님이 낮은 곳으로 <내려가셨다>는 의미입니다.
왜 예수님이 세례 요한에게 세례를 받으셨습니까?
신앙생활은 높은 곳에서 낮은 곳으로 내려가야 한다는 교훈 때문입니다.
우리의 신앙생활은 예수님처럼 내려가는 생활이어야 합니다.
죽고자 하는 사람은 살고, 살고자 하는 사람은 죽는다고 했습니다.
사람을 섬기는 자가 섬김을 받는다고 했습니다.
높아지고자 하는 사람은 낮아지고 낮아지고자 하는 사람은 결국 높아집니다.
그리고 죽어야만 부활이 있고, 죽어야만 한 알의 밀이 백 배의 결실을 맺습니다.
우리들의 세상살이에서도 고민과 갈등과 다툼 그리고 자존심의 깊은 상처로 인해서
마음이 상하고 화를 내는 것도 모두 이 내려가는 생활이 서툴러서 그런 것입니다.
내려가기만 하면 이 모든 문제는 아주 간단하게 해결됩니다.
그래서 신앙생활은 낮은 곳으로 내려가는 생활입니다.
보세요! 우리의 신앙의 뜻은 날마다 저 놓은 곳을 향하여 나아가야 하지만
신앙의 생활은 저 낮은 곳을 향하여 날마다 내려가는 생활이어야 합니다.
그 때 비로소 신앙이 주는 신비스러운 힘과 하늘의 평화를 누리게 됩니다.
2. 둘째, 죄인의 자리로 <내려가셨다>다는 의미입니다.
세례는 누가 받는 것입니까? 죄인이 받는 것입니다.
예수님도 요단강으로 친히 내려 가셔서 세례를 받으셨습니다.
그것은 죄가 있어서가 아니라 스스로 죄인의 모습이 되신 것입니다.
이 주님의 모습은 우리에게 어떤 도전을 줍니까?
주님께서도 스스로를 죄인의 모습으로 낮아지신 것은 큰 교훈이 있습니다.
그것은 자기들이 제일 옳게 산다고 제발 믿지 말라는 것입니다.
그런 모습을 보여주고, 그런 냄새를 풍기면 주님의 삶은 나오지 않습니다.
다른 사람들을 죄인이라고 멸시하는 그런 냄새는 절대 풍기지 말아야 합니다.
항상 심령이 가난한 자, 애통하는 자의 모습이 있어야 합니다.
3. 셋째, 죽음의 자리로 <내려가셨다>는 의미가 있습니다.
세례는 원래 온몸을 강물에 침수시키는 예식입니다.
내 전신이 물 속에 들어가는 것은 이제 나는 완전히 죽었다는 의미이며
내가 다시 물 속에서 나오게 되면 이제 나는 예수와 함께 다시 살았다는 의미로서
즉 영적으로 다시 태어남을 뜻하는 것입니다.
이제 우리 모두 요단강으로 들어가는 존재가 되어야 합니다.
우리 교회는 분당 정자동 126-1번지에 존재하고 있지만
그런 주소와 달리 우리의 영적 주소는 항상 요단강에 있어야 합니다.
왜 교회 건물 위에 십자가를 세웁니까?
이 십자가 아래에 있는 사람들은 다 요단강에 있는 사람이라는 표시입니다.
이 요단강의 의미를 아는 사람이어야 그가 곧 부활절을 맞이할 수 있고,
그리고 주님의 부활절을 맞이한 사람이라야 성령강림절을 맞이할 수 있습니다.
여러분! 요단강의 역사가 없이 성령 강림의 역사가 있음을 믿지 마십시오.
우리는 무속인이 아니지 않습니까? 기독교가 무속신앙을 따라가면 됩니까?
우리는 십자가를 지고서야 성령 충만할 수 있는 줄 알아야 합니다.
주님이 세례 받을 때 어떤 일이 일어났습니까? 10절을 보십시오.
\"곧 물에서 올라오실 새 하늘이 갈라짐과
성령이 비둘기 같이 자기에 내려오심을 보시더니.\"
어떤 성경학자는 이 구절을 보면서 두 번째 창조라는 말을 썼습니다.
창세기 1장에서 처음 창조의 역사가 일어날 때 어떤 일이 있었습니까?
땅에 혼돈과 공허와 흑암이 있을 때 하나님의 신이 수면에 운행했습니다.
바로 그 다음에 빛의 역사가 시작되었습니다.
그런데 본문에서 예수님이 요단강에서 세례를 받으실 때
하늘 문이 열리면서 성령이 임하여 요단강 위에 운행하셨습니다.
그런 장면이 창조의 장면과 유사하다고 해서 두 번째 창조라는 용어를 쓴 것입니다.
믿는 사람과 믿지 않는 사람의 차이가 무엇입니까?
이 두 번째 창조 세계의 질서 안에 살고 있느냐 그렇지 않는냐의 차이입니다.
그리고 하늘이 갈라졌다는 말은 하늘문이 열렸다는 말입니다.
아담의 불순종으로 닫혔던 하늘이 주님의 순종으로 열렸다는 말입니다.
그리고 나서 성령이 비둘기 같이 내려왔습니다.
우리는 성령을 받지 않고는 신앙생활을 제대로 할 수 없음을 압니다.
그런데 문제는 성령이 어떻게 임하고 성령을 어떻게 받느냐 하는 것입니다.
어떤 분은 성령을 받으려고 하늘까지 올라가려고 하는 분들이 있습니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우리가 성령 받으러 올라가는 것이 아니라
성령이 우리에게 내려온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겸허하고 빈 마음이 중요합니다.
그리고 성령이 어떻게 임했습니까? 10절을 보니까 비둘기 같이 임했습니다.
성령님은 독수리같이 임하지도 않았고 참새같이 임하지도 않았습니다.
독수리는 힘, 강요, 강탈을 상징하는 새입니다.
어떤 분은 성령을 받았다고 하는데 독수리같이 임한 성령을 받은 것 같습니다.
이기적이고, 자기밖에 모르고, 적극적이라고 하지만
그 자기 중심적인 적극적인 신앙 때문에 상처받는 주변 사람들이 많습니다.
반대로 참새는 수다, 불안, 가벼움을 상징하는 새입니다.
어떤 분은 성령을 받았다고 하는데 참새같이 임한 성령을 받은 것 같습니다.
교회 안에서는 \"성령이여! 오소서!\"라고 하면서 열심히 파닥거리지만
집에 와서는 또 불안과 염려와 그리스도인답지 못한 모습을 보입니다.
그리고 입만 살아서 주변 사람들에게 믿음을 주지 못합니다.
우리는 독수리나 참새같이 임하는 성령이 아니라 비둘기같이 임하는 성령을 받아야 합니다.
그래서 성령 받은 자에게는 위로, 평화, 부드러움, 온유함이 꼭 있어야 합니다.
특별히 비둘기같이 임하는 성령님에 대한 묘사는
성령님이 사람의 마음에 위로와 평화를 주는 분임을 보여줍니다.
성령께서 예수님 위에 임하실 때 비둘기같이 임하셨습니다.
그래서 주님은 완벽한 평화의 사자로 공생애를 시작하셨습니다.
그리고 주님은 오늘 우리에게도 이 평화를 주문하고 계십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하나님을 위해서 일하는 것보다 더 중요한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나의 일을 통해서 그리스도의 평화가 전달되고 있는가 하는 것입니다.
오늘 이 아침 비둘기같이 임했던 성령의 역사가 여러분에게 임하여
상처와 아픔이 없는 건강한 믿음 공동체의 초석이 다 되길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