네 죄 사함을 받았느니라 마가복음 2:1-12 \"예수께서 저희의 믿음을 보시고 중풍병자에게 이르시되 소자야, 네 죄 사함을 받았느니라 하시니(5)\" 세상 사람들은 사람을 판단할 때 그 외모와 행위를 보고 판단합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외모를 가꾸고, 세상 권세와 명예와 부를 소유하고자 합니다. 이로 인해 세상은 갈수록 삭막해지고, 인간성이 고갈되어 가고 있으며, 부정부패가 심화되어 가고 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믿음을 보십니다. 예수님은 믿음의 사람을 찾으시고, 믿음의 사람을 귀히 여기시고, 믿음의 사람들의 죄를 사하여 주십니다. \"예수께서 저희의 믿음을 보시고 중풍병자에게 이르시되 소자야, 네 죄 사함을 받았느니라.\" 우리가 믿음의 사람이 되어 죄 사함을 받고, 청년다운 힘찬 삶을 살기를 기도합니다. 첫째, 중풍병자와 그의 네 친구들(1-4). 예수님께서 문둥병자를 고쳐 주신 수일 후 다시 가버나움에 들어가셨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예수님이 집에 계신다는 소문을 듣고 용신할 수 없을 만큼 모여 들었습니다. 소문은 중요합니다. 일본 家電製品하면 좋은 제품으로 소문이 나 있습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어떤 나라의 제품보다 日本 家電製品을 選好합니다. 반면에 어떤 나라의 商品은 소문이 좋지 않아 아무리 잘 만들어도 팔리지 않습니다. 예수님의 말씀은 권세가 있었습니다. 예수님은 각색 병든 자를 고쳐 주시고, 귀신을 내쫓았습니다. 예수님은 문둥병자를 손으로 어루만져 주시고 그를 깨끗하게 치료하여 주셨습니다. 이런 소문이 온 도시에 퍼졌습니다. 이런 소문을 듣고 많은 사람들이 몰려 왔습니다. 이를 볼 때에 복음 역사를 섬기는 데 소문이 좋아야 함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러기 위해서 우리는 말씀을 사랑하고, 말씀대로 살아야 합니다. 경건한 삶을 살아야 합니다.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해야 합니다. 예수님께 온 사람들은 모두가 자신의 인생 문제를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들은 참 진리를 알지 못해 방황하는 사람들이요, 치열한 생존경쟁에 지치고 피곤한 자들이었습니다. 그들은 악령에 시달리고, 사람들로부터 상처받아 사랑과 쉼이 필요한 자들이었습니다. 그들은 감정적이어서 쉽게 토라지는 사람들이요, 눈먼 강아지와 같이 어디로 와서 어디로 가는 지도 모르는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들은 현실의 유익만?쫓아 사는 불쌍한 자들이었습니다. 그들은 중병에 걸려 있으면서도 중병에 걸렸는 지조차 모르는 無知한 자들이었습니다. 그들은 자신의 각종 질병과 인생 문제를 치료받고자 예수님께 나왔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그들의 병을 고쳐 주시기보다 먼저 道를 말씀하셨습니다. \'道\'란 참된 진리, 천국 복음을 말합니다. 이를 볼 때 예수님께서 오신 것은 병을 고치러 오신 것이 아니라 말씀을 선포하시기 위해 오셨음을 알 수 있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은 육신의 질병보다 영적인 무지에서 오는 영적인 질병을 더 심각하게 보심을 알 수 있습니다. 3절을 보십시오. 예수님께서 \'道\'를 가르치고 계실 때에 한 중풍병자가 네 친구들에 의해 들려져 나왔습니다. 사람들은 자기 有益이 있어야 친구를 사귑니다. 그런데 중풍병자로부터 무슨 도움을 받고, 무슨 德을 볼 수 있겠습니까? 그들은 條件 없이 친구를 사랑했습니다. 그들은 그에게 예수님을 증거했습니다. 예수님이 계신 데에 한 번 가 보자고 했습니다. 그는 비록 병석에 누워 있었지만 좋은 信仰的인 친구들을 두고 있었습니다. 성경은 \'좋은 친구를 사귀면 智慧를 얻고 못된 친구를 얻으면 욕을 얻는다\' 고 했습니다. 좋은 친구를 사귀는 것은 참으로 중요합니다. 좋은 친구가 모여 들면 좋은 이야기를 듣게 됩니다. 그로 인해 좋은 일을 만나게 됩니다. 많은 사람들이 못쓰게 되는 것은 친구를 잘못 사귀어서입니다. 잘못된 사람들을 보면 그 주위에 반드시 나쁜 친구들이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좋은 친구를 사귀어야 합니다. 本來 병자는 고집이 셉니다. 특히 오랫동안 病床에 누워 있는 사람들은 더 그러합니다. 본문에 나오는 중풍병자도 例外는 아닐 것입니다. 그는 \'내 눈으로 예수님의 능력을 확인하지 않고는 가지 않겠다\' 고 頑强히 버틸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는 친구들의 勸告를 받아들였습니다. 그는 친구들을 信賴했습니다. 그는 친구들이 예수님의 능력을 보았으면 나도 본 것이나 다름이 없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는 間接 傳達을 直接 傳達로 받아들였습니다. 이것이 진정한 믿음입니다. 우리가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죽으시고 부활하신 것을 직접 보았습니까? 예수님께서 승천하시는 것을 직접 보았습니까? 우리는 성경에 기록되었기 때문에 믿는 것 아닙니까? 성경의 내용은 무엇이며, 누가 썼습니까? 사도들이 하나님의 계시를 받아 예수님의 모든 행하심과 가르침을 기록한 것이 아닙니까? 그러므로 베드로가 보고, 12사도가 보고, 사도 바울이 보았으면 우리도 본 것으로 믿어야 합니다. 그들은 예수님을 집으로 모시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예수님께로 그를 데리고 갔습니다. \'믿음\'이란 現實과 視空間을 떠나 영적으로 더 가까이 가는 것입니다. 우리가 왜 예배를 봅니까? 예수님께 더 가까이 가기 위함입니다. 왜 우리가 성경을 읽습니까? 하나님께로 더 가까이 가기 위함입니다. 그들은 친구를 데리고 예수님께로 나갔습니다. 그런데 그들은 문전에서부터 人의 障壁에 부딪쳐 더 이상 나갈 수 없게 되었습니다. 우리도 믿음으로 살고자 할 때, 그리고 선한 일을 하고자 할 때 반드시 장애물에 부딪히게 됩니다. 이는 믿음의 역사 뿐만 아니라 매사가 다 그러합니다. 사업에 성공한 사람들의 자서전을 보면 무슨 일을 하고자 할 때 반드시 장애물이 있었다고 토로하는 것을 보게 됩니다. 특히 開拓者들은 더 그러한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우리가 수양회와 일대일 성경을 공부하고자 하면 반드시 크고 작은 장벽에 부딪칩니다. 家庭 問題, 經濟 問題, 親舊 問題, 體面 問題 등의 장벽에 부딪힙니다. 세계 선교를 하고자 할 때 言語의 障壁과 文化의 障壁에 부딪칩니다. 그런데 우리는 이런 장애물 앞에 크게 두 가지 자세를 가질 수 있습니다. \'뒤로 물러서느냐, 아니면 挑戰하느냐?\' 우리가 장벽 앞에서 체념하고 抛棄하면 마음은 不信과 敗北感에 사로 잡혀 運命的인 사람이 됩니다. 그러나 挑戰하고자 할 때 狀況은 달라지게 됩니다. 挑戰하고자 하면 길이 생기고, 創造的인 知慧와 勇氣가 생기고 肯定的이 됩니다. 自信感이 생깁니다. 바로 \'믿음\'이란 障碍物 앞에서 뒤로 물러서는 것이 아니라 前進하는 것입니다(히10:38,39). 이 때 體驗的인 산 믿음을 배우게 됩니다. 중풍병자를 메고 온 네 친구들은 장애물 앞에서 抛棄하거나, 延期하거나, 諦念하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It\'s now and never\' 지금 아니면 안 된다는 切迫한 心情으로 예수님께로 나아가고자 했습니다. 이 때 지붕이 보였습니다. 그들은 지붕에 올라갔습니다. 그들은 지붕을 뚫었습니다. 그들은 훤하게 뚫린 곳으로 중풍병자를 예수님 바로 앞으로 달아 내렸습니다. 그들이 이렇게 할 수 있었던 것은 친구에 대한 불타는 사랑과 믿음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한 영혼을 사랑하는 人間愛가 있었습니다. 그들은 單純한 믿음이 있었습니다. 그 때 그들은 팔을 걷어 올리고 행동할 수 있었습니다. 그 때 그들은 보상을 각오하고 남의 지붕을 뚫을 수 있었습니다. 진정한 친구란 손해를 보며 도와 주는 것입니다. 이처럼 그들이 믿음과 사랑이 있었을 때 하나가 될 수 있었고, 합심하여 친구를 예수님께로 달아 내릴 수 있었습니다. 믿음은 행동하는 動因이 됩니다. 믿음은 不可能에 挑戰케 하며, 合心케 하며, 能力을 행케 합니다. 바울은 心情의 사람이요, 믿음의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로마에 대한 牧者의 心情이 있었습니다. 그는 로마에 가서 복음을 전하고자 여러 번 시도했습니다. 그 때마다 길이 막혔습니다. 그러나 그는 조금도 諦念하지 않고 \'어찌하든지\' 나아가고자 믿음으로 挑戰했습니다. 그 때 길이 열려 로마에 복음을 전할 수 있었습니다. 우리는 김베드로 선교사믿음으로 어학에 도전했습니다. 그는 믿음으로 학문의 십자가에 도전했습니다. 그는 믿음으로 job에 도전했습니다. 그는 믿음으로 일대일 성경 공부와 제자 양성에 도전했습니다. 그의 신념은 \'내가 언제 실력으로 했냐, 믿음으로 했지\' 였습니다. 그 때 그는 박사학위도 얻고, 좋은 job도 얻고, 많은 양들을 예수님의 제자로 굳게 세울 수 있었습니다. 이처럼 挑戰하는 믿음은 偉大한 역사를 創出할 수 있고, 創出할 수 原動力이 됩니다. 김마가 목자가 미국 선교사로 나가고자 할 때 많은 障碍物이 있습니다. 그러나 끝까지 切迫한 心情을 가지고 挑戰할 때 길이 열릴 것입니다. 우리 앞에는 학생 180명 弟子 養成의 기도 제목이 있습니다. 믿음으로 挑戰할 때 능히 이룰 것을 믿습니다. 둘째, 저희의 믿음을 보신 예수님(5a). 네 친구는 지붕을 뚫고 중풍병자를 달아 내렸습니다. 아무리 좋게 봐 주어도 그들의 行爲는 無禮합니다. 예수님이 계신 곳은 갑자기 먼지가 날리고, 쥐똥이 떨어지는 등 아수라장이 되었을 것입니다. 이 때 근엄한 바리새인이 있었다면 뭐라고 했겠습니까? \'저런 싹 수 없는 놈들, 저런 무례한 놈들이 있어\' 하며 욕을 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그들을 어떻게 보셨습니까? \"저희의 믿음을 보시고\" 예수님은 그들의 믿음을 보시고 크게 감동하셨습니다. 세상 사람들은 行爲를 보고 판단합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그들의 行爲보다 믿음을 보셨습니다. 사람들은 주로 매너를 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믿음을 보십니다. 사람들은 인간의 외모와 人間 條件을 보고 결혼 상대자를 결정합니다. 그리고 국회의원을 뽑을 때도 內面性보다는 學緣이나 地緣, 血緣을 보고 판단하여 찍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믿음만을 보십니다. 사람들은 율법과 자기 나름대로의 가치관을 가지고 판단합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그 사람의 숨은 겨자씨 만한 믿음을 보십니다. 사무엘상 16:7절을 보면 하나님께서 사람을 부르실 때 어떤 사람을 부르시는가를 말씀하고 있습니다. \"여호와께서 사무엘에게 이르시되 그 容貌와 身長을 보지 말라. 내가 이미 그를 버렸노라. 나의 보는 것은 사람과 같지 아니하리니 사람은 外貌를 보거니와 나 여호와는 中心을 보느니라.\" 사람들은 身長과 容貌와 能力을 보고 판단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內面의 中心을 보고 부르십니다. 아벨과 가인은 모두 하나님께 제사를 드렸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믿음으로 드린 아벨의 제사를 받으셨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믿음의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믿음\'이란 하나님께 希望을 갖는 것이요, 하나님께 자신을 傳爆的으로 맡기고 信賴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때로 사람들로부터 \'너무 지나치게 믿는다, 믿어도 너무한다\' 는 말을 듣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우리의 믿음을 보시고 크게 기뻐하십니다. 이 믿음을 祝福하셔서 世界 知性界에 놀라운 복음 역사를 이루고 계십니다. 셋째, 죄를 용서하여 주신 예수님(5b-12). 5b를 보십시오. \"소자야 네 죄 사함을 받았느니라.\" 예수님은 그들의 믿음을 축복하시고 중풍병자를 소자, 아들로 영접하여 주셨습니다. 예수님은 그를 어떻게 도우십니까? 예수님은 마땅히 중풍병을 고쳐 주셔야 옳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죄를 사하여 주셨습니다. \"소자야 네 죄 사함을 받았느니라.\" 왜 그랬을까요? 사람들은 중풍병만 나으면 그의 모든 人生 問題가 解決될 것으로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근본 문제를 도와 주십니다. 겉으로 보면 중풍병이 그를 못쓰게 하는 것 같습니다. 그러나 그를 못쓰게 하는 것은 죄입니다. 김영삼 정부는 한국병을 치료한다고 사정 없이 사정의 칼날을 휘둘렀습니다. 그러나 청와대 안방을 관리하는 장아무개는 엄청난 부정을 저질렀습니다. 왜 그러합니까? 근본 문제인 죄 문제가 해결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한국병을 치료하려고 하다가 신한국병이 생겼습니다. 사람을 돕는 原則은 症狀의 치료가 아닌 根本 罪 問題를 돕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근본 문제인 죄 문제를 돕고자 하십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먼저 그의 죄를 사하여 주셨습니다. 그러면 중풍병자는 어떤 점에서 죄인입니까? 첫째는 無氣力입니다. 중풍병은 여러 원인으로 뇌혈관이 터져서 팔다리 등 신체의 일부가 마비되는 것입니다. 신체가 마비되어 자기 마음대로 할 수 없기 때문에 무기력하게 살 수 밖에 없습니다. 그러나 어떤 경우라 할지라도 무기력한 삶은 하나님 앞에서 큰 죄입니다. 인간은 自立的인 存在로 지음 받았습니다. 그런데 사람이 죄를 지으면 무기력하게 됩니다. 힘이 장사였던 삼손도 스캔들에 빠졌을 때 힘을 잃었습니다. 지혜의 왕이라고 불리던 솔로몬도 이방 여인에게 마음을 뺏겼을 때 지혜와 총명을 잃어버리고 어리석은 자가 되었습니다. 그러므로 인간은 죄 사함을 받아야 합니다. 이 때 무기력한 삶에서 힘찬 삶을 살 수 있습니다. 둘째는 依存心입니다. 중풍병자는 어쩔 수 없이 남의 도움을 받아 가며 살아야 할 존재입니다. 그러나 問題는 이로 인해 그 내면에 依存心이 생기는 것입니다. 의존적인 사람은 능히 할 수 있는 것도 父母를 의지하고 다른 사람을 의지합니다. 그러나 인간은 자립적인 존재입니다. \'자립\'이란 전능하신 하나님을 의지하는 것입니다. 사람이 전능하신 하나님을 의지하지 않고 사람을 의지할 때 중풍병자처럼 쓸모 없게 됩니다. 자매가 형제를 의지하고, 형제가 자매를 의지하고, 물질을 의지하고, 권력을 의지하게 되면 비참하게 됩니다. 약소국이 강대국을 의지하면 강대국의 노예가 됩니다. 그러므로 죄 사함을 받아 의존심에서 벗어나야 합니다. 그 때 능력 있는 삶을 살 수 있습니다. 셋째는 감사치 않는 것입니다. 중풍병자가 처음 도움을 받을 때에는 \'나 같은 사람을 도와 주시다니\' 하며 감사해 하였습니다. 그런데 점점 도움을 받다 보니 \'형편이 이러한데 도움을 받는 것은 당연치 않는가\' 생각합니다. 그래서 좀 도와 주지 않으면 원망하고 불평하고 신경질을 부립니다. 자신의 신세를 한탄하고 남을 원망하다가 하나님께서 주신 능력 한 번 써 보지 못하고 高貴한 靑春을 다 虛費합니다. 그러나 인간은 어떤 환경 가운데서도 감사해야 합니다. 죄의 뿌리가 무엇인지 아십니까? 하나님께 감사치 않는 것입니다. 기쁠 때나, 슬플 때나, 일이 잘 될 때나, 안 될 때에도 감사하는 것입니다. 사실 이는 어려운 일입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향하신 뜻은 범사에 감사하는 것입니다. 죄는 사람을 無氣力하게 하고, 依存的이 됩니다. 그러나 죄 문제만 해결되면 절망적인 狀況에서도 感謝할 수 있고, 自立的이고 能力 있는 삶을 살 수 있습니다. 사람들은 살아가면서 알게 모르게 죄를 많이 짓습니다. 죄를 짓고 죄의식에 시달립니다. 우리가 어떻게 죄와 죄의식에서 벗어날 수 있습니까? 죄는 인간의 힘, 노력, 의지, 嚴格한 宗敎 行爲로도 解決되지 않습니다. 하나님께서 罪를 사해 주셔야 합니다. \'죄\'란 너와 나의 관계가 아니라 하나님과의 관계이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이 사실을 달란트 비유를 들어 말씀하셨습니다. 인간 상호간의 빚은 100데나리온에 불과하지만 하나님께 대한 빚은 일만 달란트입니다. 100데나리온은 약 400만원에 해당합니다. 이는 努力하면 능히 갚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금 일만 달란트는 250년의 품삯입니다. 이것은 인간의 힘으로 도저히 갚을 수 없습니다. 인간은 이 빚 때문에 인생을 破産하고 심판을 받아야 했습니다. 예수님은 이런 인간을 救援하기 위해 이 땅에 오셨습니다. 그리고 믿음으로 나오는 자들의 빚을 蕩減하여 주십니다(마18:21-35). 예수님은 죄를 사하기 위해 십자가 상에서 피를 흘리셨습니다. 이 보혈의 피는 어떤 죄인이라 할지라도 깨끗케 하실 수 있습니다. 예수님의 피는 능력의 피요, 구원의 피요, 용서의 피입니다. 예수님께서 중풍병자에게 죄 사함을 선포하시자 그 곳에 앉아 있던 어떤 서기관들이 듣고 깜짝 놀라 속으로 중얼거렸습니다. \"이 사람이 어찌 이렇게 말하는가 참람하도다. 오직 하나님 한 분 외에는 누가 능히 죄를 사하겠느냐?\" 그들의 견해는 맞습니다. 하나님 한 분 외에는 누구도 죄를 사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예수님이 이 땅에 오신 하나님이신 줄 알지 못했습니다. 예수님은 그들에게 \'중풍병자에게 네 죄 사함을 받았느니라 하는 말과 일어나 네 상을 가지고 걸어가라 하는 말이 어느 것이 쉽겠느냐\' 물으셨습니다. 둘 다 인간의 힘으로는 불가능한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땅에서 죄를 사하는 권세가 있는 줄 알게 하시기 위해 중풍병자에게 말씀하셨습니다. \"내가 네게 이르노니 일어나 네 상을 가지고 집으로 가라.\" 그러자 그는 無氣力의 상, 依存心의 상, 不平과 怨望의 상을 들고, 모든 사람이 보는 앞에서 당당히 걸어갔습니다. 눈에 보이지 않는 사죄의 역사가 중풍병자가 일어나 걷게 되는 외적인 역사로 나타났습니다. 赦罪의 恩惠를 받을 때 不平하던 자가 범사에 感謝하게 되고, 無氣力하고 依存的인 자가 迫力 있고, 自立的인 인생을 살게 됩니다. 강영우 박사는 눈이 멀어 운명적으로 살 분이었습니다. 그러나 그는 예수님을 만나 자신의 한계를 넘어서 위대한 삶을 살고 있습니다. 그는 이렇게 干證합니다. \'눈이 먼 것은 좀 不便할 뿐이다. 오히려 새로운 삶에 挑戰할 수 있는 기회가 되었다.\' 예수님을 만났을 때 자신의 運命을 탓하던 삶에서 자기 인생을 開拓하며 사는 위대한 삶을 살고 있습니다. 예수님은 믿음을 보십니다. 예수님은 믿음을 보시고 죄를 사하여 주십니다. 예수님은 죄를 사하실 수 있는 권세가 있습니다. 우리가 믿음으로 죄 사함을 덧입고 일어나 걷는 역사가 있기를 기도합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