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0강 마가복음 2장 강해


내가 죄인을 부르러 왔노라


마가복음 제 5 강(2:13-17)



\"예수께서 들으시고 저희에게 이르시되 건강한 자에게는 의원이 쓸 데 없고 병든 자에게라야 쓸 데 있느니라. 내가 의인을 부르러 온 것이 아니요 죄인을 부르러 왔노라(2:17).\"

우리는 내적 치유란 책을 읽고 또 심포지엄을 듣는 가운데 우리의 내면이 여러 모양으로 병들어 있음을 발견케 되었습니다. 우리가 이처럼 병든 내면을 어떻게 치유할 수 있습니까? 오늘 본문 말씀에는 겉은 멀쩡하지만 내면이 깊이 병든 세리 레위가 나옵니다. 그는 인생의 올바른 목적과 방향을 알지 못해 아무도 치료할 수 없는 영혼의 중병을 앓고 있었습니다. 예수님은 이런 그를 찾아가시고 \"나를 좇으라\" 하심으로 그의 삶의 목적과 방향을 바로 잡아 주셨습니다. 그리고 3년 반 동안 그와 동고동락하심으로 그의 병든 영혼을 치료하여 주셔서 건강한 삶을 살게 하셨습니다. 본문을 통해 우리의 병든 몸과 병든 마음과 병든 영혼을 치료해 주시는 치료자 예수님을 배울 수 있습니다. 이 예수님 안에서 병들고 상한 마음을 온전히 치료함 받고 건강한 삶을 살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첫째, 나를 좇으라(13,14). 13절을 보십시오. 예수님은 중풍병자를 고치신 후에 바닷가로 나가셨습니다. 그러자 무리들도 바닷가로 나아왔습니다. 예수님은 이들에게 조곤조곤하게 하나님의 말씀을 가르쳐 주셨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예수님의 말씀을 듣기 위해 바닷가로 나갔고 가버나움 거리는 텅 비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이 거리 한복판에 있는 가버나움 세관에 힘 없이 앉아 먼 산을 바라보는 한 사람이 있었습니다. 그가 바로 알패오의 아들 세리 레위였습니다. 당시 로마의 식민지 세금 정책은 크게 두 가지로 나뉘어졌습니다. 인두세와 같이 누구나 다 내야 하는 세금은 로마 관리가 직접 징수하고, 민원의 소지가 많은 통행세나 관세와 같은 것은 이스라엘 현지인을 고용해 징수하도록 했습니다. 현지인을 고용할 때에는 공개 입찰을 통해 뽑기도 하고 시험을 쳐서 선발하기도 했습니다. 이렇게 세리가 된 사람은 로마 정부와 일정한 금액에 정식으로 계약을 맺었습니다. 그래서 일단 세리가 되면 본전을 뽑기 위해 인정 사정 없이 세금을 거둬 들였습니다. 마차를 타고 가면 주행세, 걸어다니면 보행세, 길에 서서 쉬거나 사람을 기다리면 정차세, 자리 깔고 앉으면 주차세를 받아 냈습니다. 또 소가 새끼를 나면 소득세, 술취한 사람에게는 취득세 등 명분도 근거도 없이 무조건 세금 고지서를 내고 독촉장을 보내고, 그래도 안 내면 로마의 공권력을 동원하여 거두었습니다. 이렇게 거둬들인 세금 중에 계약한 금액만 로마에 주고 나머지는 전부 자기 주머니에 \'in my pocket\'했습니다. 세금도 세금이지만 여기 저기서 갖다 주는 떡값과 떡고물만 해도 상당했습니다. 이로 인해 세리는 단시일내 어마어마한 부를 축적할 수 있었습니다. 특히 이 곳은 교통의 요충지로 관세나 통행세가 많아 수입이 가장 짭짤한 곳이었습니다.

레위도 이 곳에서 세리 생활을 시작한 지 몇 달 안 되어 하얀 별장을 짓고, 파워 핸들에 오토매틱으로 로마제 사륜마차도 한 대 뽑았습니다. 하인들을 부리며 여가도 즐겼습니다. 또한 돈만 주면 들어갈 수 있는 예루살렘 대학원 최고 경영자 과정을 수료하고 명예 박사학위도 하나 샀습니다. 또 여우 같은 아내와 결혼하여 토끼 같은 자식들도 생겼습니다. 그는 돈이 이렇게 좋은 것인 줄 예전엔 미처 몰랐습니다. 그는 돈맛을 알았습니다. 그는 돈으로 자신이 원하는 모든 것을 살 수 있을 것 같았습니다. 그러나 시간이 지남에 따라 그는 세상에서 돈으로 살 수 없는 것이 있다는 것을 깨닫기 시작했습니다. 그는 돈으로 좋은 저택은 살 수 있었지만 행복은 살 수 없었습니다. 비싼 보석은 살 수 있었지만 내면의 참 만족은 살 수 없었습니다. 순간의 쾌락은 살 수 있었지만 영원한 기쁨은 살 수 없었습니다. 그는 돈만 많았지, 항상 사람들로부터 공인된 죄인으로 손가락질 받고 침뱉음을 받아야 했습니다. 당시 세리는 창녀들이 낳은 사생아보다도 더 천한 계층으로 분류되었습니다. 그는 회당에서 출교되었고, 사회로부터 철저하게 소외당하였습니다. 그는 죄의식과 소외감이란 상한 마음으로 미칠 것만 같았습니다. 그는 마음을 털어 놓고 대화할 만한 친구가 필요했습니다. 그러나 아무도 이기적인 그의 친구가 되기를 원치 않았습니다. 그래서 하루는 누군가와 마음 속의 솔직한 대화를 해보고자 Internet에 들어가 chatting을 해 보았습니다. 하지만 온통 세리에 대한 욕설만 나와 있는 것을 보고 더욱 더 상처를 받았습니다. 그는 독한 술을 마시며 지난 날을 돌이켜 보았습니다. \'이렇게 사는 게 아니었는데…\' 후회도 해 보았지만 돌이키기에는 너무나 멀리 와 있었습니다.

그런데 이런 그에게도 예수님에 대한 소문이 들렸습니다. 예수님께서 각색 병든 자들을 고쳐 주시고 어떤 추한 죄인도 받아 주신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는 멀리서라도 이 예수님을 한 번 만나 보고 싶었습니다. 사람들이 예수님의 말씀을 들으러 바닷가로 갈 때 그도 같이 가서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싶었습니다. 그러나 사람들의 따가운 눈총과 추한 자신의 모습을 생각할 때 도저히 나아갈 수 없었습니다. 그는 모든 병든 자와 죄인들이 나아가는 그 자리에도 낄 수 없는 자신을 볼 때 너무나 절망스러웠습니다. 오늘 따라 세관에 앉아 있는 자신이 한 없이 초라하고 비참해 보였습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지나가시다가 이런 그를 보시고 다가오시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사람들은 멸시하고 정죄하는 눈으로 그를 쳐다보았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깊은 이해와 사랑의 눈으로 그를 보셨습니다. 예수님은 그 영혼이 허무와 고독의 심연에서 울부짖고 있는 것을 보셨습니다. 예수님은 그가 이기심으로 병든 내면만 치료받으면 위대한 하나님의 사람이 될 가능성을 발견하시고 소망의 눈으로 그를 보셨습니다. 그리고 그에게 말씀하셨습니다. \"나를 좇으라.\" 이 말씀은 세리 레위에게 임한 놀라운 죄 사함의 음성이요, 구원의 음성입니다. 이는 그가 과거 어떤 삶을 살았든지 문제삼지 않으시고 그의 모든 죄를 용서해 주시겠다는 말씀입니다. 또 그의 인생 목적과 방향을 바로 잡아 주시는 말씀입니다. 레위는 마음만 먹으면 무엇이든 할 수 있는 능력 있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런데 그는 하나님께서 주신 이 능력과 재능을 자기만을 위해 썼습니다. 그가 불행하게 된 원인은 인생의 목적과 방향이 잘못되어 있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그가 더 이상 자기만을 위해 살지 않고 예수님을 좇는 삶을 살도록 그를 예수님의 제자로 불러 주셨습니다.

예수님을 좇는 삶이란 예수님을 배우고, 왕 되신 예수님을 내 삶의 중심에 모시고 사는 것을 말합니다. 왕 되신 예수님을 좆을 때 내면에 죄 사함의 은혜가 있습니다. 왕 되신 예수님을 좇을 때 자유함을 누릴 수 있습니다. 왕 되신 예수님을 좇을 때 무슨 일을 하든지 자발적으로 하게 됩니다. 우리가 신앙 생활을 하면서도 자유함이 없고 자발성이 없는 것은 왕 되신 예수님을 좇지 않고 다른 것을 좇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예수님을 좇기보다 UBF의 매력적인 이념과 비전을 좇아 신앙 생활을 할 수 있습니다. 또 존경하는 목자님이나 훌륭한 믿음의 선배들을 좇아 신앙 생활하기 쉽습니다. 그리고 유학생 선교사로 나가 20대 박사가 되고자 하는 자기 꿈을 가지고 좇을 수 있습니다. 아니면 \'나는 UBF 밖에 갈 데가 없다\' 는 운명적인 생각으로 좇을 수 있습니다. 아니면 \'이 나이에 어디 가서 또 무엇을 하나\' 하고 좇을 수 있습니다. 아니면 습관을 따라 좇을 수 있습니다. 우리는 \'왕 되신 예수님을 좇고 있는가, 아니면 다른 것을 좇고 있는가?\' 심각하게 질문을 던져 보아야 하겠습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따르면서도 자유함이 없고, 자발성이 없이 끌려 다니는 분들은 왕 되신 예수님을 좇지 않기 때문입니다. UBF의 주인은 왕 되신 예수님이십니다. 미국의 건국 이념은 왕 되신 예수님이었습니다. 그들은 이 기초 위에서 언덕 위의 도시를 세우고 찬란한 기독교 문화를 꽃피울 수 있었습니다. 우리는 왕 되신 예수님이 우리의 삶과 가정의 중심이 되도록 해야 하겠습니다. 이 때 건강하고 행복한 신앙 생활을 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세리 레위를 제자로 부르신 것은 당시로서는 혁명적인 사건이었습니다. 레위는 여러모로 볼 때 예수님의 제자가 될 수 없었습니다. 예수님이 공인된 죄인이요, 돈 냄새나는 세리를 제자로 부르셨다는 것은 예수님의 이미지를 손상시키고, 제자들의 질을 떨어뜨리는 일입니다. 사람들은 예수님이 자금 사정이 좋지 않아 레위로부터 거액의 헌금을 받고 그를 제자로 삼으신 것이 아닌가 오해할 수도 있습니다. 또 지금은 괜찮지만 나중에 금융실명제가 전격 실시되어 레위가 여러 은행에 분산 예치해 놓았던 수천억원의 비자금이 발견되기라도 한다면 참으로 감당할 수 없는 사태가 오게 될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이 모든 것을 개의치 않고 그를 제자로 부르셨습니다. 이는 병든 그의 영혼을 불쌍히 여기셨기 때문입니다. 또 그가 변화되기만 하면 장차 위대한 하나님의 종이 될 소망을 보셨기 때문입니다. 특히 예수님은 그가 꼼꼼하게 정리해 놓은 세금 장부를 보시고 장차 마태복음을 기록할 뛰어난 성서학자가 될 가능성을 보셨습니다. 예수님은 현재 병든 그의 모습을 보지 않고 장차 변화될 그의 모습에 큰 희망을 보고 부르셨습니다.

그러면 부르심을 받은 레위의 반응이 어떠했습니까? 14b절을 보십시오. \"일어나 좇으니라.\" 그는 부르심을 받았을 때 두말하지 않고 즉시 일어나 좇았습니다. 그가 이렇게 즉시 일어나 좇는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닙니다. 부르심을 받았을 때 한편으로는 지난날의 죄악된 생활을 청산하고 새로운 인생을 살고 싶지만, 또 한편으로는 이 때까지 쌓아 온 모든 것을 잃지 않을까 하는 두려움과 또 속박받지나 않을까 하는 두려움이 있기 마련입니다. 또 떡값만 해도 수억 원이 넘게 들어오던 안정된 직장을 버리고자 할 때 아쉬움과 장래에 대한 염려도 있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는 이 모든 것을 계산하지 않고 다만 예수님만을 바라보고 일어나 좇았습니다. 그는 결정적일 때 결단하는 믿음의 용기가 있었습니다. 이 결단으로 인해 그는 그 동안 모은 많은 것을 잃었지만 가장 귀한 예수님을 얻었습니다. 예수님 안에서 잃어 버린 자아를 찾고, 양심을 찾았습니다. 삶의 목적과 방향을 찾고 잃어 버린 하나님의 형상을 찾았습니다. 그는 예수님의 소망과 희망대로 위대한 하나님의 종이요, 마태복음을 기록한 성(聖) 마태가 되었습니다. 예수님을 좇기 전 그의 행복론은 간단했습니다. \"돈 많은 자는 복이 있나니 세상이 다 저희 것임이요 … 백(Background) 있는 자는 복이 있나니 세금을 적게 낼 것임이요.\" 그러나 그는 예수님을 좇은 후 가치관이 온전히 변화되어서 사람의 행복을 이렇게 노래하고 있습니다. \"심령이 가난한 자는 복이 있나니 천국이 저희 것임이요, … 의에 주리고 목마른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배부를 것임이요…(마5:1,6).\"

둘째, 죄인을 부르러 오신 예수님(15-17). 레위가 일어나 예수님을 좇았을 때 그의 내면에는 놀라운 변화가 일어났습니다. 그가 일어나 좇음으로 하나님과의 관계성이 회복되고 사람들과의 관계성이 회복되었습니다. 이 때 그의 내면에는 지금까지 맛볼 수 없었던 행복과 기쁨이 생겼습니다. 그래서 그는 예수님을 위해 큰 잔치를 베풀었습니다. 그리고 김세리, 이세리, 강세리, 왕세리, 요술공주 세리 등 많은 세리와 죄인들을 조건 없이 초청하였습니다. 레위의 변화된 모습에 은혜를 받고 나온 세리와 죄인들이 예수님과 제자들과 함께 어우러져 은혜로운 천국 잔치가 벌어졌습니다. 당시 엄격한 율법 사회에서 예수님이 세리와 같은 공인된 죄인들과 식사하신다는 것은 또 하나의 파격적인 사건이었습니다. 예수님은 아무도 함께 하지 않는 세리와 죄인들과 함께 식사하심으로 고독한 그들의 친구가 되어 주셨습니다. 이 예수님의 사랑에 감격하여 완악한 세리와 죄인들의 마음이 녹아 내렸습니다. 돈독이 올라 있던 그들의 눈에서는 회개와 감사의 눈물이 하염 없이 흘러내렸습니다.

이 아름다운 천국 잔치가 한창 무르익어 갈 무렵 냄새를 맡고 찾아온 불청객들이 있었습니다. 그들은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이었습니다. 그들은 예수님이 세리와 죄인과 함께 식사하시는 것을 보고 격렬하게 제자들을 비난했습니다. \"어찌하여 세리와 죄인들과 함께 먹고 마시는가?\" 이들은 경건한 율법주의자들로서 세속에 물들지 않고 율법을 좇아 사는 사람들이었습니다. 율법을 철저하게 지키고자 하는 이들의 열심과 경건한 생활을 하고자 하는 열망은 좋은 것입니다. 문제는 이것이 그들의 의가 되어 그것으로 다른 사람을 정죄하고 판단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들은 사람이 죄를 지으면 그것으로 모든 것이 끝나고 더 이상 소망이 없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들에게는 인간의 연약함에 대한 이해와 긍휼이 없었습니다.

예수님은 이런 그들에게 예수님이 왜 세리와 죄인들과 함께 먹고 마시는가, 더 나아가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신 목적이 무엇인가를 설명해 주셨습니다. 17절을 다 같이 읽겠습니다. \"예수께서 들으시고 저희에게 이르시되 건강한 자에게는 의원이 쓸 데 없고 병든 자에게라야 쓸 데 있느니라. 내가 의인을 부르러 온 것이 아니요 죄인을 부르러 왔노라 하시니라.\" 예수님은 죄인을 병든 자, 의인을 건강한 자, 그리고 구주를 의사에 비유해서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죄를 하나의 병으로 보셨습니다. 죄는 질병과 같이 다루기가 힘이 듭니다. 사람이 병에 걸리면 힘을 쓸 수 없고, 일을 할 수 없는 것과 같이 사람이 죄를 지으면 내적인 힘을 상실하여 힘이 없고, 심령이 막혀 하나님을 섬길 수 없고, 기도도 할 수 없습니다. 병이 사람을 추하고 흉측하게 하듯이 죄도 사람을 추하고 흉측하게 합니다. 병이 전염되듯이 죄도 다른 사람에게 전염이 됩니다. 병이 치료를 받지 않으면 죽음에 이르게 하듯이 죄도 사함을 받지 않으면 죽음에 이르게 합니다. 병든 자에게 의사가 필요하듯이 죄인에게는 구주가 절대적으로 필요합니다.

예수님은 바로 죄인들의 구주요 영적인 의사로 오셨습니다. 의사가 병과 환자를 분리해서 보듯이 예수님도 죄와 죄인을 분리해서 보십니다. 죄는 미워하시지만 죄인은 지극히 사랑하십니다. 의사가 병든 자를 이해하듯이 예수님은 죄인들을 이해하십니다. 의사가 중환자에게 더 큰 관심과 애정을 가지듯이 예수님도 큰 죄에 빠진 사람들을 더 세심하게 돌보십니다. 그러나 의사가 병을 고치는 데는 한계가 있습니다. 자기가 전공한 분야가 아니면 손도 대지 못하고 다른 병원으로 가보라고 합니다. 또한 아무리 숙달된 전문의가 최선을 다해 진료를 해도 고칠 수 없는 질병이 허다합니다. 겉으로 보이는 외상이나 타박상, 골절상 같은 것은 쉽게 치료를 하지만 속으로 들어가면 갈수록 점점 치료가 힘들어집니다. 그래서 정신병원에 가보면 치료를 받고 있는 사람보다 쇠창살에 감금되어 있는 사람이 훨씬 더 많습니다. 무엇보다 세상 의사들은 영혼이 병든 사람들에 대해서는 아무런 치료도 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죄로 인해 병든 우리의 영혼을 치료하시는 영적인 의사요 구주로 오셨습니다. 예수님은 모든 질병에 대해서 전문의가 되셔서 종합적으로 우리를 치료해 주십니다. 예수님은 우리의 병든 몸과 병든 생각과 병든 마음과 병든 영혼을 치료하셔서 삶 전체를 건강하게 해 주십니다.

세리 레위는 세상 의사가 진단해 볼 때 아무 병이 없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러나 영적인 의사이신 예수님께서 보실 때 그는 영혼이 깊이 병들어 장기 입원 치료가 필요한 중병환자였습니다. 그의 영혼은 이기심과 경쟁심, 탐욕으로 깊이 병들어 있었습니다. 그의 영혼은 진정한 삶의 목적과 방향을 알지 못해 허무와 절망의 병을 앓고 있었습니다. 이로 인해 그는 원치 않게 하나님을 슬프시게 하고 다른 사람들의 행복을 파괴하는 삶을 살았습니다. 이처럼 예수님은 우리를 보실 때 병든 자로 보십니다. 어떤 분은 자신의 외모에 대한 열등감으로 인해 마음이 병들어 있습니다. 어떤 분은 화목하지 못한 가정과 복잡한 가정 문제로 인해 내면이 깊이 병들어 있습니다. 또 어떤 분은 원치 않는 대학, 원치 않는 학과에 들어왔다는 패배감과 실패감으로 병들어 있습니다. 그리고 많은 사람들이 다른 사람과의 관계성 문제로 내면에 상처를 받고 병들어 있습니다. 우리가 다른 사람과 관계성을 잘 맺지 못하고 쉽게 상처를 받는 것은 내 마음이 이기심으로 병들어 있기 때문입니다. 무엇보다도 우리는 죄로 인해 하나님의 형상을 잃고 영혼이 깊이 병들어 있습니다. 많은 젊은이들이 정욕으로 인한 상한 마음이 있습니다. 연약함으로 인해 죄를 짓고 죄의식으로 어찌할 바를 몰라 두려움과 불안 가운에 삽니다.

세상 의사들은 우리의 이런 병을 치료할 수 없습니다. 죄 문제를 해결해 줄 수 없습니다. 세상 의사들에게 죄 문제를 들고 나가 고통을 호소하면 이건 병이 아니라 단지 심리적인 현상이라고 합니다. 병도 아닌 걸 가지고 고민하고 괴로워하는 그게 바로 병이라고 합니다. 죄로 병든 우리의 마음과 영혼은 예수님만이 치료하실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예수님은 죄인을 부르러 오셨기 때문입니다. 만일 예수님께서 의인을 부르러 오셨다면 우리 중 한 사람도 죄에서 구원을 받지 못할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의인을 부르러 오지 않으시고 죄인을 부르러 오셨습니다. 사도 바울은 이 사실을 깨닫고 감격하여 이렇게 외쳤습니다. \"미쁘다 모든 사람이 받을 만한 이 말이여 그리스도 예수께서 죄인을 구원하시려고 세상에 임하셨다 하였도다. 내가 죄인 중에 괴수니라(딤전1:15).\" 예수님은 죄인을 부르러 이 땅에 오시고 죄인들을 위해 십자가에 달려 물과 피를 다 흘리셨습니다. 뿐만 아니라 죽은 지 사흘만에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하심으로 사망 권세를 파하시고 승리하셨습니다. 이 예수님의 용서의 사랑은 죄로 병든 내면을 치료하는 힘이 있습니다. 예수님의 은혜와 긍휼은 상처난 마음을 치료하는 능력이 있습니다. 예수님의 말씀은 우리의 열등감과 운명을 극복케 하는 권세가 있습니다. 예수님은 죄로 인해 몸과 마음과 영혼이 병든 우리를 하나님의 말씀과 거룩한 사랑으로 치료해 주십니다. 이 예수님께 나아가 병든 내면을 치료받을 때 누구든지 건강한 삶을 살 수 있습니다. 어제 말씀을 전하신 황제임스 선배님은 열등감과 이기심으로 병든 분이었습니다. 이 분은 공고에서 쇠를 깎다가 단지 대졸 사원이 고졸 사원보다 월급을 더 많이 받는다는 1차원적인 이유 때문에 대학에 들어왔습니다. 그런데 인하대에 3지망으로 들어옴으로 더 깊은 열등감과 패배감으로 병들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을 통해 병든 내면이 치유되었을 때 능력 있게 대학 생활을 승리하고, 건강한 삶을 살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27살의 젊은 나이에 해방 이후 한국 최초로 Moscow 대학에서 물리학 박사학위를 받고 돌아와 삼성 고등기술연구소에서 근무하며 후배들을 말씀으로 돕고 있습니다. 이와 같이 예수님은 어떤 병든 사람도 치료하여 새 사람이 되게 하시고, 건강한 삶을 살게 하시는 치료의 능력자가 되십니다. 실로 예수님은 상한 갈대도 꺾지 않으시고 꺼져 가는 심지도 끄지 않으시는 소망과 긍휼의 주님이십니다.

예수님은 죄로 병든 우리를 구원하시고 치료해 주시기 위해 영적인 의사로 이 땅에 오셨습니다. 이 예수님 안에서 병든 내면을 치료받고 건강한 삶을 살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