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1강 마가복음 2,3,장 강해


네 손을 내밀라


마가복음 제 6 강(2:23-3:12)



\"그 사람에게 이르시되 네 손을 내밀라 하시니 그가 내밀매 그 손이 回復되었더라(5b).\"

內容과 形式은 반드시 있어야 합니다. 內容만 있고 形式이 없을 때 無秩序하게 되고, 반면에 內容은 없고 形式만 있게 될 때 形式的이 됩니다. 猶太人들은 律法의 內容과 目的을 喪失하여 形式的이 되었습니다. 特別히 安息日을 지키는 데 있어서는 더욱 더 그러했습니다. 그들은 本來의 內容과 目的을 喪失하고 安息日法 自體에 매이게 되었습니다. 예수님은 그런 猶太人들에게 眞正한 安息日의 意味를 말씀해 주십니다. 本文을 통해 우리 속에 있는 形式的인 信仰 生活을 悔改하고 眞實한 信仰 生活을 하기를 기도합니다. 예수님께 병든 손을 내밀어 회복되기를 기도합니다.

첫째, 예수님은 본래 성경의 뜻을 일깨워 주셨습니다(23-26). 어느날 예수님은 제자들과 함께 밀밭 사이로 지나가셨습니다. 이 때 제자들은 밀이삭을 잘라 비벼 먹었습니다. 이 날은 마침 안식일이었습니다. 이것을 지켜보고 있던 바리새인들은 예수님께 달려와 따졌습니다. \'저희가 어찌하여 안식일에 하지 못할 일을 하고 있나이까?\' 안식일에 밀이삭을 잘라 먹은 것이 안식일을 어겼다는 것입니다. 유대인들은 안식일을 거룩히 지키기 위해 39條 234項을 만들었습니다. 이런 조항 중에 추수, 타작, 키질 등을 해서는 안 된다는 조항이 있습니다. 이런 조항을 만든 의도는 어떻게 해서든지 안식일을 잘 지키기 위함이었습니다. 그런데 그들은 내용과 목적과 방법을 상실하여 빈 껍질만 남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제자들이 밀이삭을 자른 것은 추수요, 비빈 것은 타작이요, \'훅\' 분 것은 키질한 것으로 생각했습니다. \'어찌하여 안식일에 하지 못할 일을 하나이까?\' 여기에는 오직 정죄만 있을 뿐 이해와 용서와 사랑이 없습니다.

이 때 예수님은 하나님 역사의 이미지를 제고하기 위해 제자들을 책망하실 수 있습니다. \'또 말썽을 부렸느냐! 그렇게 내면성이 없어서 어떻게 하냐? 너희들 때문에 복음 역사가 완전히 망하게 됐어!\' 그러나 예수님은 다윗의 例를 들어 제자들의 正當性을 말씀하셨습니다. 25,26절을 보십시오. \"예수께서 가라사대 다윗이 자기와 및 함께한 자들이 핍절되어 시장할 때에 한 일을 읽지 못하였느냐? 그가 아비아달 대제사장 때에 하나님의 전에 들어가서 제사장 외에는 먹지 못하는 진설병을 먹고 함께한 자들에게도 주지 아니하였느냐?\" 다윗이 사울에게 쫓겨 놋 땅으로 망명가게 되었습니다. 이 때 그는 너무 시장하여 제사장 이외에는 먹지 못하는 진설병을 먹고, 자기와 함께한 자들에게도 주었습니다. 진설餠이란 성소 안에 있는 金床 위에 이스라엘의 12지파를 따라 12개의 떡을 두 줄로 차려 놓은 것으로, 매 금요일에 새 떡으로 갈아 놓고 거둔 것은 제사장이 먹었습니다(레24:9). 다윗은 분명히 법을 어겼습니다. 그러므로 다윗은 율법에 의해 처벌을 받아야 옳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다윗을 정죄하지 않으셨습니다. 또한 유대인들도 다윗이 율법을 어겼다고 비난하지 않았습니다. 이는 다윗이 위대해서 뿐만 아니라 고의로 율법을 어긴 것이 아니라 배가 고파 먹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다윗의 형편을 이해하셨습니다. 이처럼 예수님은 제자들의 형편을 이해하셨습니다. 반면 바리새인들은 율법의 참된 의미를 알지 못했습니다. 제자들의 입장을 조금도 이해하려 하지 않고 법의 잣대로 그들을 정죄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그들의 잘못을 깨우쳐 주셨습니다. \"예수께서 가라사대 다윗이 자기와 및 함께한 자들이 핍절되어 시장할 때에 한 일을 읽지 못하였느냐?\" \'읽지 못하였느냐?\' 것은 \'새롭게 다시 배우라\' 는 뜻입니다. 그들은 성경 지식을 많이 알고 있었지만 성경의 참 뜻을 이해하지 못했습니다. 마태복음 12:7절을 보면 성경의 참 뜻을 이렇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나는 자비를 원하고 제사를 원치 아니하노라 하신 뜻을 너희가 알았더면 무죄한 자를 죄로 정치 아니하였으리라.\" 하나님은 형식적인 제사를 원치 않습니다. 하나님은 자비를 원하십니다. 그들이 율법의 참 뜻을 알지 못했을 때 그들은 형식만 있는 형식주의자가 되어 이해와 용서와 사랑이 없었습니다. 우리도 본래의 뜻을 상실하고 형식화될 때 형식주의자가 됩니다. 우리는 무슨 일을 하든지 본래 의미를 생각하며 내용이 있는 신앙 생활을 해야 하겠습니다.

둘째, 예수님은 안식일의 주인되심을 일깨워 주셨습니다(27,28). 예수님은 계속하여 그들의 잘못을 깨우쳐 주셨습니다. 27절을 보십시오. \"또 가라사대 안식일은 사람을 위하여 있는 것이요, 사람이 안식일을 위하여 있는 것이 아니니\" 율법이란 문자 자체보다 정신이 중요합니다. 율법의 생명은 사람을 사람답게 하고, 사람을 살리는 데 있으며, 인간과 인간과의 질서, 인간과 하나님과의 질서를 세우는 데 있습니다. 그리고 그 본질은 사랑입니다. 그런데 그들에게 있어서의 율법은 사람들을 심판하는 잣대였습니다. 그들은 사람을 살리는 율법을 이용하여 사람을 정죄했습니다.

그러면 안식일은 어떤 날입니까? 하나님은 천지를 창조하시고 일곱째 날을 복주셔서 거룩하게 하셨습니다. 이는 하나님이 그 창조하시며 만드셨던 모든 일을 마치시고 이 날에 안식하셨기 때문입니다(창2:1-3). 하나님은 모세에게 안식일을 거룩히 지키도록 10계명 중의 넷째 계명으로 주셨습니다. \"안식일을 기억하여 거룩히 지키라. 엿새 동안은 힘써 네 모든 일을 행할 것이나 제 칠 일은 너의 하나님 여호와의 안식일인즉 너나 네 아들이나 네 딸이나 네 남종이나 네 여종이나 네 육축이나 네 문 안에 유하는 객이라도 아무 일도 하지 말라. 이는 엿새 동안에 나 여호와가 하늘과 땅과 바다와 그 가운데 모든 것을 만들고 제 칠 일에 쉬었음이라. 그러므로 나 여호와가 안식일을 복되게 하여 그 날을 거룩하게 하였음이라(출20:8-11).\" 우리가 진정으로 안식일을 지키려면 첫째는 6일 동안 자기에게 주어진 모든 일을 힘써 행해야 합니다. 6일 동안 빈둥빈둥 논 사람들은 안식일을 지킬 수 없습니다. 아니 주일에 안식할 자격이 없습니다. 설령 안식일을 지킨다 할지라도 밀린 숙제, 밀린 업무, 밀린 빨래, 밀린 공부 등으로 인해 마음에 기쁨이 없고 오히려 부담이 됩니다. 안식일인 주일날 바쁜 사람들은 평소 자기 일을 안 한 사람들입니다. 주일날 왜 목자들이 전화통이 불나도록 전화를 합니까? 6일 동안 놀다가 주일에 일대일 팀 수와 양을 초청하여 주일예배 숫자를 채우려고 하기 때문이 아닐까 생각됩니다. 6일 동안 열심히 일한 목자들은 주일에 바쁠 하등의 이유가 없습니다. 월요일에 계획을 세워서 일해 보십시오. 심방을 해야 할 사람, 전화로 심방할 사람, 편지를 보낼 사람, 카운셀링이 필요한 사람, 茶를 나누며 대화가 필요한 사람, 집으로 초청하여 대화를 해야 할 사람들을 나누어 기도하여 보십시오. 시간을 아껴 일해 보십시오. 주일은 바쁘고 스트레스를 받는 날이 아니라 영적인 축제가 될 것입니다. 우리는 주일이 영적인 축제, spiritual festival이 되도록 해야 하겠습니다. 둘째는 안식일을 거룩히 지켜야 합니다. \'거룩하다\'는 뜻은 \'구별한다\'는 뜻입니다. 안식일은 다른 날과 구별된 날입니다. 그러므로 다른 날과는 구별시켜 지켜야 합니다. 옷차림도 달라야 합니다. 평소에는 청바지 차림으로 다닐지라도 이 날만큼은 형제들은 정장을 하고, 자매들은 화장도 하고, 옷 매무새도 단정히 가꾸고 예배에 참석해야 합니다. 형식적이어서는 안 되지만 형식은 갖춰야 합니다. 셋째는 안식일을 경건하게 보내야 합니다. 娛樂을 삼가야 합니다. 예배를 드리고, 말씀을 읽고, 기도하고, 양들과 함께 찬양을 하고, 도움이 필요한 사람들을 심방해야 합니다. 우리가 주일날 선후배들과 곳곳에서 대화를 나누고, 기도하고, 찬양하고, 서로 격려하여 힘을 주는 모습을 한 번 생각해 보십시오. 이것이 천국이 아닐까요? 그런데 주일날 무엇이 그리 할 일이 많아 바쁜 지 모르겠습니다. 그리고 예배 끝나고 집에 가서 TV를 보고, 잠이나 자면 되겠습니까? 6일 동안 죄 짓고 주일날을 제사드리는 날로 알고 제사만 드리면 되겠습니까? 이런 사람들은 반드시 월요병을 앓게 됩니다. 그러나 주일을 잘 지키는 분들은 영육간에 쉼과 힘을 얻어 건강한 삶을 살게 됩니다. 한 주를 힘차게 시작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안식일을 주신 것은 사랑의 법의 결정체입니다. 만일 안식일이 없다면 인간들은 어떻게 되었겠습니까? 365일, 아니 일생동안 안식일이 없이 일만 한다고 생각해 보십시오. 사람들은 스트레스를 받아 모두 죽을 것입니다. 그리고 안식일을 주신 것은 천국의 예표입니다. 우리가 천국에 가서 무엇을 하겠습니까? 우리 주님과 영원토록 안식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안식일을 통해 하나님의 크신 사랑을 깨닫게 됩니다.

28절을 보십시오. \"이러므로 인자는 안식일에도 주인이니라.\" 창세기에 나오는 안식일은 천지창조의 안식일입니다. 그러나 신명기 5:15절을 보면 이스라엘 백성들은 안식일을 애굽에서 출애굽한 날을 기념하여 지켰습니다. 그런데 지금은 예수님께서 죽으시고 부활하신 날을 안식일, 주일로 정하여 지키고 있습니다. 모든 구약은 예수 그리스도의 예표이기 때문입니다. 출애굽은 곧 예수 그리스도의 보배로운 피로 구속하시겠다는 예표입니다. 그러므로 주일은 예수님을 중심으로 해야 합니다. 그리고 \'인자는 안식일에도 주인\' 이란 \'예수님은 성육신 하나님이시다\' 라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으로, 안식일을 제정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은 예배와 경배와 찬양과 영광을 받으시기에 합당하신 분이십니다. 안식일은 예수님을 중심으로 지켜야 합니다.

셋째, 한 가운데 서라(3:1-4). 바리새인들은 무슨 꼬투리만 있으면 예수님의 제자들을 정죄하고, 예수님을 비난했습니다(2:7,8,16,18,24). 그러나 그들은 예수님의 말씀 앞에 번번히 실패했습니다. 이제 그들은 예수님께 대한 눈초리가 더욱 더 날카로워졌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그들을 조금도 두려워하지 않고 회당에서 말씀을 가르치고 양들을 돌보셨습니다(1). 마침 회당 안에 한 편 손 마른 사람이 마른 손을 호주머니에 넣고 한 쪽 구석에 앉아 있었습니다. 누가복음 6:6절을 보면 오른손이 말랐다고 했습니다. 그리고 로마의 교부인 Zerom에 의하면 石手長이라고 합니다. 석수는 손으로 먹고 사는 사람들입니다. 석수장에게 손을 못쓴다는 것은 치명적입니다. 하나님은 인간을 창조하실 때 효과적으로 일할 수 있도록 두 손을 만들어 주셨습니다. 그런데 그는 일을 할 수 없게 되었습니다. 사람들이 악수를 청할 때 얼마나 힘들었겠습니까? 왼손을 내밀 수 밖에 없었을 것입니다. 왼손을 내민다는 것은 원수들과 악수할 때입니다. 그는 많은 사람들로부터 많은 오해를 받았을 것입니다. 그리고 만일 그가 결혼을 하지 않았다면 결혼식장에 갔을 때 신랑 신부가 하얀 장갑을 끼고 예물 교환하는 모습을 볼 때 얼마나 힘들었겠습니까? 우리는 기도할 때 두 손을 모아 기도합니다. 그런데 그는 기도할 때 한 손을 내밀고 기도해야 합니다. 그러므로 그는 자연히 기도를 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는 사람들이 많이 모이는 곳에는 절대로 가지 않았을 것입니다. 수양회나 주일 예배에도 참석하지 않고, 일대일 성경 공부만 살짝하고 나갔을 것입니다. 그는 한 손이 마름으로 마음과 생각과 생활이 모두 말라 버렸습니다. 사실 한 손이 말랐다 하여 생명에 문제가 있는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그는 이것이 인생의 문제가 되어 그의 내면은 어둡고 운명적이며 열등감과 자의식의 골이 깊이 패여 있었습니다. 학점이 나쁜 사람은 학점 이야기만 하면 그 자리에 앉아 있기가 거북하여 자리를 피합니다. 학과나 학교에 대한 열등감이 있는 사람은 \'學\'자만 나와도 쥐구멍이라도 있으면 들어가고자 합니다. 그는 누가 \'손\'자만 이야기하면 그 자리를 피하곤 했을 것입니다. 그의 내면은 깊은 열등감과 자의식으로 병을 앓고 있었습니다.

그런 그에게도 예수님의 능력과 사랑의 소식이 들려 왔습니다. 그는 예수님으로부터 나음을 입고자 사람들의 눈을 피해 회당에 들어와 앉아 있었습니다. 예수님은 자비와 사랑이 가득한 눈빛으로 그를 보셨습니다. 예수님은 그를 불쌍히 여기고 돕고자 하셨습니다. 그러나 회당 안에는 악한 마음을 품고 있는 바리새인들이 이 사람을 고치시는가 엿보고 있었습니다. \'엿본다\'란 \'παρετηρουν(파레테룬)\'으로 못된 의도로 예의 관찰하는 것을 말합니다. 사람을 돕는 것은 참으로 좋은 일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선한 일을 하고자 하실 때 사람들로부터 비방을 받으셔야 했습니다. 예수님께서 이처럼 선한 일을 하고자 하실 때 비방을 받으셨는데 하물며 우리야 당연한 일입니다. 우리가 좋은 말을 듣고자 좋은 일을 하고자 한다면 아예 좋은 일 하기를 포기해야 합니다. 저는 악령과 죄악에 시달리는 쓸모 없는 자를 복음으로 도와 예수님을 잘 믿게 하고, 또 결혼도 할 수 없는 사람을 중매를 서서 결혼까지 시킨 적이 있습니다. 이것은 잘한 일 아닙니까? 그런데 개중에는 이 은혜도 모르고 저를 비방하는 자도 있습니다. 또 어떤 사람은 저와 저의 모임을 비방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이 때 마음이 상하고, 섭섭한 생각이 들 때가 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조금도 비방을 받으실 일이 없는데도 비방을 받으셨습니다. 이 예수님을 생각하니 저의 생각이 얼마나 천박한가 심히 부끄럽습니다.

우리 속담에 \'소가 없으면 외양간이 깨끗하다\' 란 말이 있습니다. 소를 먹이려면 외양간이 있어야 하고, 그렇게 되면 냄새가 나고, 파리가 끼기 마련입니다. 외양간이 깨끗하려면 소를 먹이지 않으면 됩니다. 사람들로부터 욕을 먹지 않으려면 아무 일도 안 하면 됩니다. 선한 일을 하려면 어려움이 있고, 비방을 듣기 마련입니다. 이 때 사람들은 어떻게 합니까? 대개 사람들은 이런 상황에서 \'누이 좋고 매부 좋다\' 란 말을 회상하며 적당히 타협하고자 합니다. 신변과 이미지 관리를 위해 아예 포기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아니면 내일로 미룰 수 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어떻게 하셨습니까? 회당 안의 분위기는 기도의 향기, 말씀의 향기보다는 독기가 서려 있는 殺氣가 등등했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예수님은 그들과 조금도 타협하지 않으셨습니다. 예수님은 바리새인들에게 도전하여 정면으로 그를 돕고자 하셨습니다. \"한 가운데 일어서라. 안식일에 선을 행하는 것과 악을 행하는 것, 생명을 구하는 것과 죽이는 것, 어느 것이 옳으냐(3,4)?\" 여기에서 참된 용기가 무엇인가를 알 수 있습니다. 참된 勇氣란 善을 위해 조금도 타협하지 않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뜨거운 가슴으로 그를 돕고자 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선한 목자가 되셔서 자기 목숨을 조금도 아까워하지 않으셨습니다. 만일 우리가 생명이 아깝고, 비방이 두려워서, 자신의 이미지 관리를 위해 선한 일을 포기한다면 이는 불신앙입니다. 우리는 선한 일을 하다가, 복음을 전하고 양들을 돕다가 비방이 두려워 이를 포기한 적이 얼마나 많습니까? 우리는 이 시간에 불신앙을 회개하여야 하겠습니다.

그들은 마땅히 \'생명을 살리고 선을 행하는 것이 옳습니다\' 대답해야 옳습니다. 그런데 그들은 잠잠했습니다. 이는 그들이 이것을 시인하면 자신들의 생각이 잘못되었음과 예수님을 송사하고자 하는 계획을 포기해야만 했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선악의 분별력과 생명에 대한 존엄성이 없었습니다. 그들은 낡은 가죽 부대가 되어서 우리 주님의 말씀을 들어도 양심에 가책이 없었습니다. 예수님은 그들의 완악함을 보시고 분노하셨습니다(5a). 완악함이란 자신의 죄를 알면서도 값싼 자존심과 기득권을 유지하고자 하는 욕심 때문에 고의로 회개치 않는 마음입니다. 예수님은 사랑이 많고 온유하시기 때문에 좀처럼 화를 내지 않으십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그들의 완악함을 보시고 분노하셨습니다. 이는 고의적으로 회개치 않았기 때문입니다. 로마서 2:5절은 말씀합니다. \"다만 네 고집과 회개치 아니한 마음을 따라 진노의 날, 곧 하나님의 의로우신 판단이 나타나는 그 날에 임할 진노를 네게 쌓는도다.\"

넷째, 네 손을 내밀라(5,6). 예수님은 한 손 마른 사람에게 명령하셨습니다. \"네 손을 내밀라(5b).\" 이는 그에게 임한 구원의 음성이요, 사랑의 음성이요, 목자의 음성이었습니다. 그러나 그가 사람들 앞에서 그의 병든 손을 내민다는 것은 죽기보다 힘든 일입니다. 특히 바리새인들을 바라보면 도저히 손을 내밀 수 없습니다. 그러나 그는 손을 내밀었습니다. 그러면 그가 어떻게 손을 내밀 수 있었습니까? 그는 예수님으로부터 목자의 심정을 보았습니다. 목숨을 아까워하지 않고 한 생명을 살리고자 하시는 뜨거운 사랑을 읽었습니다. 예수님의 사랑을 깨닫게 되었을 때 예수님께 대한 신뢰감이 생겼습니다. 자기를 예수님께 맡길 수 있었습니다. 예수님의 사랑과 목자의 심정은 그를 사로 잡았습니다. 이 때 손을 내밀 수 있었습니다.

우리는 예수님의 십자가 용서의 사랑을 알았을 때 내면의 추한 죄악을 주님께 들고 나갔습니다. 나의 모든 병든 내면을 주님께 들고 나갔습니다. 정환종 목자는 습진으로 인해 자살까지 하고자 했습니다. 그러나 그는 우리 주님의 사랑을 알았을 때 이를 들고 나아가 내외적으로 치유되어 건강한 삶을 살고 있습니다. 우리가 예수님의 십자가의 구속의 사랑을 전하고, 또 목자의 사랑이 양들에게 젖어들 때 양들은 병든 손을 주님께 내밀 수 있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억지로 손을 비틀어서 빼도록 합니다. 그 때 그가 억지로 손을 내밀지는 몰라도 후에는 문제에 빠져 삐뚤어지게 됩니다.

\"네 손을 내밀라!\" 이는 바리새인들의 완악한 마음을 회개시키고, 그에게 믿음과 순종을 요구하는 말씀입니다. 예수님은 믿음이 있는 자에게만 역사하십니다. 그는 예수님의 말씀에 순종하여 믿음으로 수치심과 자의식을 깨고 병든 손을 내밀었습니다. 이 손은 믿음의 손, 순종의 손, 기도의 손이었습니다. 이 때 마른 손이 회복되었습니다.

예수님은 회복자로 오셨습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형상을 회복하시기 위해 오셨습니다. 예수님은 죄로 병들어 쓸모 없는 자들의 영혼을 회복하시기 위해 오셨습니다. 본래의 목적대로 살도록 하시기 위해 오셨습니다. 인간다운 삶을 살도록 하시기 위해 오셨습니다. 예수님은 병든 사람을 회복하여 강건케 하시고자 오셨습니다. 예수님은 죄로 상처난 사람을 회복시켜 온전한 사람이 되도록 하시기 위해 오셨습니다. 운명적인 사람을 밝고 활기찬 사람이 되도록 하시기 위해 오셨습니다. 이제 그는 검은 장갑을 벗었습니다. 그의 내면에 자리 잡고 있던 어두움과 부정적인 생각, 운명과 슬픔, 자의식이 사라지고 그의 심령에 생명과 빛이 임했습니다. 그의 얼굴은 달덩이처럼 환해졌습니다. 우리도 믿음으로 병들고 추한 죄를 주님께 내밀면 죄 사함을 받게 됩니다. 우리가 믿음으로 더러운 죄악의 손을 내밀어 죄 사함을 받기를 기도합니다.

바리새인들은 근본적으로 함께 할 수 없는 헤롯당과 함께 한 마음이 되어 예수님을 죽이고자 했습니다(6). 예수님은 한 영혼을 귀히 여기시는 선한 목자이십니다. 사람들은 쓸모 있으면 취하고 쓸모 없으면 버립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영혼 자체를 사랑하십니다. 예수님은 생명을 버리시기까지 사랑하십니다. 예수님은 이를 위해 십자가에 죽으셨습니다. 예수님은 꺼져가는 심지도 끄지 않으시고, 상한 갈대도 꺾지 않으시는 긍휼의 주님이십니다.

다섯째, 목자를 찾는 무리들(7-12). 예수님은 제자들과 함께 바닷가로 물러가셨습니다. 이 때 갈릴리, 유대, 예루살렘, 그리고 이방 땅인 요단강 건너편 두로와 시돈 근처에서 허다한 무리들이 몰려왔습니다. 그들은 예수님의 행하신 큰 일을 듣고 나아왔습니다. 여기에서 \'큰 일\' 이란 예수님께서 생명을 무릅쓰고 한 손 마른 사람을 고치신 사건을 의미합니다. 무리들은 한 손 마른 사람을 고치신 예수님이야말로 참 목자임을 알았습니다. 그들은 목자를 애타게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참 목자가 없어 방황했습니다. 당시 공의의 상징인 헤롯당들은 여우 같이 음란했으며 불의했습니다. 양심과 거룩의 상징인 바리새인들은 낡은 가죽 부대가 되어 심령이 부패했습니다. 그들은 양들을 이용하고 율법의 사슬에다 얽어 매었습니다. 그 시대는 도움이 필요한 양들은 많았지만 양들을 도울 목자가 없었습니다. 예수님은 그 시대를 \'추수할 곡식은 많지만 추수할 일꾼이 심히 부족하다\' 하셨습니다. 오늘날도 마찬가지입니다. 양들이 없는 것이 문제가 아니라 목자가 없는 것이 문제입니다. 양들은 많지만 그들에게 말씀을 가르쳐 주고 영혼을 책임성 있게 돌볼 목자가 없습니다. 사람들이 필요로 하는 것은 선한 목자 예수님입니다. 예수님은 그들의 선한 목자가 되셨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