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2강 마가복음 3장 강해


자기의 원하는 자들을 부르신 예수님


마가복음 제 7 강(3:13-35)



\"또 산에 오르사 자기의 원하는 자들을 부르시니 나아온지라(13).\"

우리는 마가복음 3:1-12절을 통해 그 時代 狀況이 어떠했는가를 알 수 있었습니다. 그 시대는 時代의 얼굴이라 할 政治指導者들인 헤롯당은 淫亂의 代名詞요, 時代의 良心이라 할 宗敎指導者인 바리새인들은 僞善의 代名詞였습니다. 이런 時代에 무슨 希望이 있겠습니까? 그러나 예수님은 밤이 맟도록 祈禱하셨습니다(눅6:12). 예수님은 祈禱 중에 指導者 養成의 重要性을 아시고 指導者 養成의 方向을 잡으셨습니다. 本文을 통해 弟子 養成의 重要性과 예수님께서 弟子들에게 두신 비전을 배우기를 기도합니다.

첫째, 자기의 원하는 자들을 부르신 예수님(13a). 13a절을 보십시오. \"또 산에 오르사 자기의 원하는 자들을 부르시니\" 예수님은 자기의 원하는 자들을 부르셨습니다. 여기에서 볼 때 예수님의 제자가 되는 것은 자기가 원해서 되는 것이 아님을 알 수 있습니다. 여기에는 인간 조건이나 자기 의지나 뜻이 조금도 개입될 수 없습니다. 예수님의 제자가 되는 것은 하나님의 절대적인 주권에 속한 것입니다. 그러면 예수님은 어떤 사람을 원할까요? 대개 사람들은 외모를 보고 사람을 뽑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중심을 보고 사람을 뽑습니다. 사람들은 자기의 뜻과 스타일에 맞는 사람들을 뽑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하나님의 마음에 합한 자를 뽑습니다. 당시 사람들은 낡은 가죽 부대들인 바리새인들을 지도자로 삼았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새 가죽 부대들인 예수님께 열린 마음을 가진 자들을 부르셨습니다. 하나님은 시대 시대마다 열린 마음을 가진 자들을 부르셔서 하나님의 구원 역사를 이루셨습니다. 하나님께 열린 마음을 가진 사람들은 믿음이 있고, 겸손하며 배우고자 합니다. 하나님께 순종합니다. 하나님은 이런 사람들을 쓰십니다. 아브라함이 그러했고, 사무엘이 그러했고, 다윗이 그러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우리를 다 아시고 부르십니다. 우리의 약점도 아시고 장점도 아십니다. 우리의 위대함과 우리의 허물을 다 아십니다.

둘째, 예수님께로 나아온 제자들(13b). 그들은 예수님께로 나아왔습니다(13b). \'나아왔다\'는 것은 예수님의 제자가 되겠다는 믿음의 결단입니다. 이 결단은 위대한 결단입니다. 어떻게 이런 결단을 할 수 있습니까? 바리새인들의 예수님께 대한 감정은 날로 날로 악화되어만 갔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은 빛도 이름도 없는 무명의 전도자였습니다. 그런데도 어떻게 그들이 예수님의 제자가 되겠다고 나올 수 있었습니까? 이는 그들에게 향한 예수님의 비전과 믿음을 보았기 때문입니다. 제자들은 세상 만민을 구원코자 하시는 예수님의 믿음을 보았습니다. 제자들은 그들을 1세기의 역사의 주역이요, 세계 역사의 흐름을 바꾸고자 하시는 예수님의 비전을 보았습니다. 제자들이 믿음과 비전을 보았을 때 벅차 오르는 가슴을 억제할 수 없었습니다. 비전과 소망과 믿음은 그들의 가슴을 울렁이게 했습니다. 비전과 소망과 믿음은 그들을 black hall 같이 예수님께로 빠져 들게 했습니다. 이처럼 비전과 믿음은 사람을 위대케 합니다. 비전은 자력과 같고, 비행기의 intake와 같이 강력하게 끄는 힘이 있습니다. 비전은 어떤 역경과 어려움도 극복케 합니다. 예수님의 믿음과 비전을 보았을 때 예수님께로 나아갈 수 있었습니다.

저는 1985년 W.M.R.에서 이사무엘 선교사님을 통해 USSR을 개척이란 거대한 비전과 소망을 보았습니다. 이 비전은 저의 가슴을 뜨겁게 했습니다. 그러나 많은 사람들이 이 비전이 이루어지리라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왜냐하면 당시 USSR은 철의 장막이요, 지하 교회에서 예수님을 믿던 성도들이 시베리아로 유배를 당하며, 외국 사람들이 성경을 가지고 입국하다가 발각되면 추방당한다는 소식이 들려 왔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저는 1995년까지 이 비전이 이루어지리라 확신했습니다. 그런데 많은 분들이 USSR 개척은 미국에 의해 개척되리라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저는 한국 사람들에 의해서, 그것도 인하대 목자들을 통해서 이루어지리라는 비전과 믿음을 보았습니다. 저는 인천 개척 6주년 기념 예배 때 \'내가 후에 로마도 보아야 하리라\' 는 말씀과 88올림픽 때에 인천 국제 여객 터미널 앞에서 러시아 양들을 초청하면서 이 비전을 보게 되었습니다. 이 비전에 빠져 들었던 분들이 황제임스, 김베드로, 박이삭 선교사들입니다. USSR 개척이라는 비전과 믿음은 그들의 마음을 설레이게 했으며, 모든 것을 주님께 맡기고 선교사로 나가게 했습니다. 그 때 그들은 위대한 복음 역사를 이루었습니다. 그런데 저는 한 동안 비전이 보이지 않아 답답한 목자 생활을 해야 했습니다. 목자들은 4년 동안 믿음을 배우고 졸업하면 월요일부터 토요일 늦게까지 일터에서 일하다가 늦게 돌아옵니다. 몇 년 있으면 21세기가 다가오는데 어떻게 이런 우리가 세계 만민의 제사장 나라가 될 수 있으며, 지성계를 변화시킬 수 있는가 고민하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저는 기도 중에 10년 내에 120명 목자 박사들을 양성할 비전을 보게 되었습니다. 이들이 세계 지성사를 바꾸어 놓을 비전을 보게 되었습니다. 우리가 이 비전을 소유할 때 21세기에 하나님의 구속 역사를 이루는 주역들이 될 것입니다.

셋째, 열 두 제자를 세우신 목적(14,15). 14a절을 보십시오. \"이에 열 둘을 세우셨으니\" 예수님은 12명을 세우셨습니다. 그런데 이는 너무 작은 숫자 같습니다. 온 세계를 복음으로 정복하려면 120명이나 1,200명 정도는 키워야 할 것 같습니다. 그러나 여기에는 큰 뜻이 있습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 열 두 지파를 세우셔서 만민을 구원하고자 하셨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이 축복을 감당하지 못했습니다. 예수님은 이제 12명을 새 이스라엘로 세우셔서 만민을 구원하고자 하셨습니다. 그리고 12란 숫자는 완전한 숫자입니다. 또한 여기에는 소수 몇 사람을 키우고자 하시는 뜻이 있습니다. 역사는 많은 수에 의해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언제나 소수 몇 사람을 통해 창조되어 갑니다. 하나님은 시대마다 믿음의 종들을 부르셔서 역사의 위기를 극복하고 역사를 계승하셨습니다. 미국사를 볼 때 미국 이민 초기에는 윈슬롭을 통해 미국의 위기를 극복했으며, 그리고 디모데 드왓이트, 윗트 필드, 요나단 에드워드 등을 통해 미국의 위기를 건졌습니다. 이것은 미국 뿐만 아니라 모든 인류 역사의 공통점입니다. 그러면 그 목적이 무엇입니까?

첫째로 예수님을 배우도록 함입니다(14b). \"이는 자기와 함께 있게 하시고\" 예수님은 제자들이 예수님의 전 생애와 전 인격을 배워 예수님께 대한 믿음을 갖기를 원하셨습니다. 예수님과 깊은 사랑의 관계성을 맺고 그들의 병든 내면이 치료받기를 원하셨습니다. 예수님의 형상을 잘 배워서 예수님의 사람들, little Jesus가 되기를 원하셨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3년 반 동안 예수님의 은혜, 섬김, 순종, 사랑, 온유, 믿음, 십자가, 가치관, 비전, 예수님의 목자의 심정 등, total education을 했습니다. 한마디로 예수님을 본 받도록 했습니다. 예수님은 요한복음 17:8절에서 \"나는 아버지께서 내게 주신 말씀들을 저희에게 주었사오며 저희는 이것을 받고 내가 아버지께로부터 나온 줄을 참으로 아오며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줄도 믿었사옵나이다\" 말씀하십니다. 그들은 예수님과 함께 함으로 예수님을 주요, 그리스도로 고백할 수 있었습니다. 빌립보서 3:10-12절을 보면 사도 바울이 예수님을 얼마나 알고자 했는가를 알 수 있습니다. \"내가 그리스도와 그 부활의 권능과 그 고난에 참예함을 알려 하여 그의 죽으심을 본 받아 어찌하든지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에 이르려 하노니 내가 이미 얻었다 함도 아니요, 온전히 이루었다 함도 아니라 오직 내가 그리스도 예수께 잡힌 바 된 그것을 잡으려고 좇아가노라.\" 그리고 푯대를 향하여 달려 간다고 했습니다(빌3:14). 바로 예수님과 함께 하도록 하심은 예수님의 인격과 사역을 배우도록 함입니다. 이는 기술의 전수나 지식 전달이 아닌 인격과 인격이 부딪혀 배우는 산 교육입니다. 또한 예수님께서 이들과 함께 하심은 험한 세상으로부터 보호하고자 하심입니다.

둘째로 세상에 나아가 배운 바를 증거하는 것입니다. 14c절을 보십시오. \"또 보내사 전도도 하며\" \'보내사\'란 \'사도\'란 뜻이 있습니다. 예수님은 그들을 키워서 세상으로 내보내십니다. 세상은 마귀의 역사가 있는 곳이요, 죄와 죽음이 지배하는 곳입니다. 사람들은 세상 일에는 관심이 많으나 영적인 일에는 관심이 없습니다. 예수님은 이런 세상에 제자들을 보내어 말씀을 가르쳐 영적인 무지를 깨우쳐 주도록 하셨습니다. 예수님은 그들을 세상으로 보내셔서 사죄의 복음, 부활의 복음을 전하여 생명의 빛, 희망의 빛이 세상에 임하도록 하셨습니다. 하나님은 지금도 우리를 훈련시켜서 캠퍼스로, 세계로 내보내십니다.

셋째로 영적인 권세자가 되도록 하심입니다. 사람을 근본적으로 괴롭히는 것은 시대 문제나 물질 문제, 인간 문제가 아닙니다. 아담 이후로 우리를 괴롭히는 것은 악령의 세력입니다. 그러므로 우리의 원수는 사람이나 체제나 제도가 아닌 사단입니다. 사단은 우리를 교묘히 괴롭힙니다. 하나님의 역사를 파괴하고 불신과 의심과 회의를 심습니다. 우리를 불안하게 하고 초조하게 합니다. 정욕, 욕심, 물질의 노예로 만들어 우리를 미치게 합니다. 각종 질병과 악령에 시달리게 합니다. 그런데 사단은 우리의 힘으로 파할 수 없습니다. 영적인 권세를 덧입어야 됩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성령을 주심으로 영적인 권세를 덧입혀 주셨습니다.

넷째, 열 두 제자들에게 두신 예수님의 희망(16-19). 16-19절을 보십시오. 예수님은 12명의 사도를 세우셔서 공동체를 만드셨습니다. 공동체를 만들어 사도를 양성코자 하셨습니다. 공동체를 이루기 위해서는 헌신과 사랑과 이해가 요구됩니다. 옆을 볼 수 있어야 합니다. 그런데 성격이 다르고, 출신 성분이 다른 사람들이 공동체를 이룬다는 것은 그리 쉽지 않습니다. 그러나 공동체를 이루어 하나가 될 때 엄청난 힘과 영향력을 발휘할 수 있습니다. 제자들이 12공동체를 이루어 예수님의 가르침과 훈련을 받았을 때 1세기의 역사를 바꾸어 놓는 역사의 주역들이 될 수 있었습니다.

12공동체의 일원 중에 제일 먼저 베드로가 나옵니다. 베드로는 무식하고 용감했습니다. 그는 나서기를 좋아하고 뒷감당을 하지 못하면서도 큰 소리를 잘 치는 big mouth였습니다. 그러나 그에게는 순수한 열정과 순수함이 있었습니다. 그는 예수님을 뜨겁게 사랑했습니다. 그는 장차 반석이 될 만한 그릇이었습니다. 그래서 현재는 모래알 같지만 베드로, 반석이라고 했습니다. 야고보와 요한은 소심한 성격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그들에게는 \'우뢰의 아들\' 이란 별명을 지어 주심으로 요한은 세상 만민을 향한 요한복음과 계시록을 기록하고, 야고보는 첫 순교자가 될 수 있었습니다. 마태는 매국노 세리 출신이요, 시몬은 운동권 출신입니다. 안드레는 불가능에 도전하는 사람이었습니다. 빌립은 계산적인 사람이요, 도마는 의심병에 시달리는 사람이었습니다. 다대오, 야고보는 자리만 지켜 역사 환경을 만드는 사람이요, 바돌로매는 눈물을 잘 흘리는 순정파였습니다. 가룟 유다는 예수님을 배반할 자였습니다.

12공동체를 이룬 개인 개인을 보면 인간적인 기초도 없고, 배우지 못한 어부 출신들입니다. 형식도 없고 내용도 없는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들은 사회적인 배경도 없고 가문도 변변치 않습니다. 그들은 내 놓을 만한 명함 한 장 없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예수님의 부르심에 순종하여 나아 온 자들이요, 겸손히 배우고자 한 자들입니다. 또 이들은 과거 어떤 생활을 했든지 간에 모든 것을 버리고 예수님을 좇은 자들입니다. 예수님은 이들을 장차 위대한 사도요, 역사의 주역으로 키우고자 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이들을 키우기만 하면 아름답고 보배로운 자들이 될 것으로 보셨습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이 현재 굴러다니는 광석 같지만 잘 다듬기만 하면 위대한 예술품이 될 것으로 보셨습니다. 예수님은 소망과 비전을 가지고 삼 년 반 동안 인내와 겸손과 사랑으로 제자들을 키우셨습니다. 마침내 예수님의 비전과 인내와 사랑으로 그들은 위대한 사도들이 되었습니다. 예수님은 우리들도 큰 소망과 비전을 가지고 부르셨습니다. 우리의 내면을 볼 때 천박합니다. 겸손하지도 못하고 충성심도 없습니다. 형식과 내용도 없습니다. 인간 기초가 없습니다. 쉽게 자리에 눕습니다. 양은 그만 두고 자기 자신 하나 감당치 못합니다. 생각은 좁고 편협합니다. 우리는 불의에 잘 빠집니다. 다른 사람은 다 목자 박사가 되어도 나는 안 될 것이라고 자학합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나의 겉모습과 내면이 어떠하든지 간에 큰 소망과 큰 비전을 두고 세계 지성사를 변화시킬 목자 박사로 부르셨습니다. 다만 우리가 해야 할 일은 낙심치 않고 이 소망을 붙들고 나아가기만 하면 됩니다. 이 때 예수님의 좋은 제자로 빚어지게 됩니다.

다섯째, 성령을 훼방하는 죄(20-30). 20절을 보십시오. 예수님은 열 두 제자들을 부르신 후 산에서 내려오셔서 가버나움의 한 집에 계셨습니다. 이 때 많은 무리들이 예수님께로 몰려왔습니다. 예수님은 그들을 모두 가슴에 품고 그들의 병든 상처를 싸매어 주시고 치료하여 주셨습니다. 예수님은 그들을 섬기시느라고 식사할 겨를도 없었습니다. 사람들은 보통 먹고 마시고 쉬는 것을 우선적으로 생각하여 먹지 않으면 아무 일도 할 수 없다고 생각합니다. 세상 사람들의 삶의 철학은 우선은 먹고 쉬는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먹는 문제보다 양들을 먼저 돌보셨습니다. 이를 본 사람들은 예수님이 미쳤다고 생각했습니다(21). \'미쳤다\'는 것은 \'정신이 제 자리에 있지 않고 나갔다\' 는 뜻입니다. 그들은 상식적으로 생각할 때 예수님을 이해할 수 없었습니다. 예수님이 식사도 안 하며 열심히 일하시면 수입이라도 좋아야 하는데 그렇지도 않았습니다. 예수님은 양을 돌본다고 가정의 장남으로서 가족도 돌보지 않았습니다. 데리고 다니는 제자들은 신분이 별로 좋지 않고 꾀재재합니다. 또한 예수님의 가르침은 혁신적입니다. 세상 사람들은 조금만 앞서 가면 튄다며 견제를 받습니다. 세상 사람들은 아무리 생각해도 예수님의 삶의 스타일, 행동, 교육 등을 이해할 수 없었습니다.

그런데 세상 사람들은 무엇인가에 미쳐 있습니다. 어떤 사람은 돈에 미쳐 있습니다. 어떤 사람은 권력에 미쳐 있습니다. 어떤 사람은 정욕에 미쳐 있습니다. 어떤 사람은 운동에 미쳐 있습니다. 어떤 사람은 오락과 만화에 미쳐 있습니다. 어떤 사람은 영화에 미쳐 있으며, 담배와 마약에 미쳐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예수님께 미친 자들이요, 일대일 성경 공부와 21세기의 역사의 주역이 될 비전과 세계 선교에 미친 자들입니다. 미치기는 미쳤는데 옳게 미친 거룩한 자들입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육신의 정욕에 미쳐 밤거리를 헤매면 젊으니까 그렇다며 이해합니다. 명예와 권세에 미쳐 공부하는 사람을 보면 칭찬하고, 물질에 미쳐 돈을 버는 사람들을 본 받으라고 합니다. 부모님들은 돈을 벌기 위해 맞벌이를 하면 만사를 제쳐 놓고 아기를 봐 줍니다. 그런데 우리가 양 치고 하나님의 일을 하면 이해는 커녕 미쳤다고 욕하고, 여러 모양으로 핍박합니다. 그런데 이는 내가 신앙 생활을 잘못하는 것이라 올바르게 하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복음을 전하다가 쇠사슬에 묶이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그는 조금도 문제에 빠지지 않고 로마 총독인 베스도에게 복음을 전했습니다. 그 때 베스도는 \'바울아 네가 미쳤도다. 네 많은 학문이 너를 미치게 한다\' 했습니다(행26:24). 이 때 바울은 말하였습니다. \"베스도 각하여 내가 미친 것이 아니요, 참되고 정신 차린 말을 하나이다(행26:25).\" 더 나아가 바울은 아그립바 왕에게 \'결박한 것 외에는 다 나와 같이 되기를 원한다\' 했습니다(행26:29). 우리도 바울처럼 우리에게 미쳤다고 하는 사람들에게 더 적극적으로 복음을 전하여 예수님께 더 미친 사람이 되어야 하겠습니다.

세상 사람들이 예수님을 보고 미쳤다고 하는 것은 이해할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세상 사람들은 영적으로 무지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바리새인들은 알면서도 예수님의 역사를 곡해하고 왜곡하여 흑색 선전했습니다. 그들은 귀신의 왕을 힘입어 한다느니, 바알세불을 힘입어 귀신을 내어 쫓는다고 비난했습니다(마12:24). 바알세불은 사단의 별명이요, 귀신의 우두머리입니다. 그들은 예수님의 이루신 역사는 부인할 수 없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예수님의 능력의 원천을 사단에게 돌렸습니다. 그들은 시기심의 노예가 되어 성령의 역사를 부인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비난하는 그들을 어떻게 대했습니까? 23-27절을 보십시오. \"사단이 어찌 사단을 쫓아낼 수 있느냐? 또 만일 나라가 스스로 분쟁하면 그 나라가 설 수 없고, 만일 집이 스스로 분쟁하면 그 집이 설 수 없고, 만일 사단이 자기를 거스려 일어나 분쟁하면 설 수 없고 이에 망하느니라. 사람이 먼저 강한 자를 결박치 않고는 그 강한 자의 집에 들어가 세간을 늑탈치 못하리니 결박한 후에야 그 집을 늑탈하리라.\" 이 비유에서 강한 자는 사단을 말하고, 집 세간은 사단에게 고통을 받는 인간을 말합니다. 그리고 강한 자를 결박하는 강한 자는 그리스도를 가리킵니다. 여기서 볼 때 인간은 연약하고, 사단은 강하며, 예수님은 더 강함을 알 수 있습니다. 사단은 연약한 인간을 자기의 소유로 삼아 마음대로 지배합니다. 사단은 우리의 이성과 감정과 의지를 지배합니다. 사단은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을 대적하게 하고 육신의 본능을 좇아 살도록 합니다. 사단은 인간으로 하여금 죄의 종 노릇하게 하여 행복과 자유를 앗아갑니다. 인간은 사단의 지배로부터 벗어나고자 해도 힘이 없어 벗어날 수 없습니다.

정욕의 세력에서 벗어나 순결하고 거룩한 삶을 살고 싶지만 마음대로 안 됩니다. 인간의 의지와 성실로는 죄의 소욕에서 벗어날 수 없습니다. 이는 사단이 인간보다 훨씬 강하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문제에 빠졌을 때 말씀 공부와 기도보다 내 힘과 의지와 경험으로 해결해 보고자 애를 씁니다. 우리가 양들을 도울 때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는 \'열 번 찍어 안 넘어가는 나무가 없다\' 는 속담을 붙들고 열심히 돕고자 해도 양들의 마음은 요지부동입니다. 이 때 우리는 절망하거나 소망을 끊습니다. 그러나 겸손하게 주님을 의지하고, 말씀을 붙들고, 간절히 기도할 때 죄의 소욕을 물리칠 수 있고, 양들의 마음에 역사하는 사단의 권세를 물리칠 수 있습니다. 예수님은 사단의 세력을 파할 수 있는 힘의 근원이십니다.

이제 예수님은 악의에 찬 비난을 하는 서기관들에게 무서운 경고를 하셨습니다. 28,29절을 보십시오.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사람의 모든 죄와 무릇 훼방하는 훼방은 사하심을 얻되, 누구든지 성령을 훼방하는 자는 사하심을 영원히 얻지 못하고 영원한 죄에 처하느니라 하시니\" 이 말씀에서 볼 때 용서받을 수 있는 죄가 있고, 용서받을 수 없는 죄가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인간은 살아가면서 생각과 말과 행동으로 수없이 죄를 짓습니다. 인간은 실로 죄 중에 태어나서 죄 가운데서 살다가 죄로 인해 죽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자신이 죄인임을 인식하고 진실되게 죄를 고백하면 예수님은 그 보배로운 피로 우리를 용서하여 주십니다. 예수님은 어떤 죄를 지었다 할지라도 용서하십니다.

그러나 용서받지 못할 죄가 있습니다. 이는 성령을 훼방하는 죄입니다. 성령을 훼방하는 자는 성령의 역사를 고의적으로 부정하고, 고의로 회개하기를 거부하고, 진리를 왜곡합니다. 성경은 이런 죄를 이렇게 경고합니다. \"한 번 비췸을 얻고 하늘의 은사를 맛보고 성령에 참예한 바 되고 하나님의 선한 말씀과 내세의 능력을 맛보고 타락한 자들은 다시 새롭게 하여 회개케 할 수 없나니, 이는 자기가 하나님의 아들을 다시 십자가에 못 박아 현저히 욕을 보임이라(히6:4-6).\" 또 성경은 경고합니다. \"우리가 진리를 아는 지식을 받은 후 짐짓 죄를 범한즉 다시 속죄하는 제사가 없고, 오직 무서운 마음으로 심판을 기다리는 것과 대적하는 자를 소멸할 맹렬한 불만 있으리라(히10:26,27).\" 그런데 우리는 이 말씀을 듣고, 하나님의 은혜를 배반하고 도망갔다가 회개하고 돌아온 후 자기가 혹시 용서받지 못할 죄를 범한 것이 아닌가 하고 고민할 수 있습니다. 이런 분은 한마디로 그런 죄를 범하지 않았습니다. 왜냐하면 고민하는 양심, 구원에 대한 열망, 버림받을 것에 대한 두려움, 내세에 대한 관심, 하나님의 진노로부터 벗어나고자 하는 소원 등, 이 모든 것은 용서받지 못할 죄를 범한 자의 마음에서는 찾아볼 수 없기 때문입니다.

여섯째, 예수님의 진정한 가족(31-35). 무리가 예수님을 둘러 앉았다가 가족들이 밖에서 찾고 있음을 알려 주었습니다(32). 무리들은 예수님이 모든 것을 제쳐 두고 가족들을 맞을 것으로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사람들의 가족관을 완전히 뒤집어 놓으셨습니다. 예수님은 누가 내 모친이며 동생들이냐 하시고 주위 사람들을 둘러보시며 말씀하셨습니다. \"내 모친과 내 동생들을 보라! 누구든지 하나님의 뜻대로 하는 자는 내 형제요, 자매요, 모친이니라(34,35).\" 예수님의 가족관은 혈육으로 맺어진 관계가 아니라 하나님의 뜻으로 맺어진 영적 관계입니다. 예수님의 가족관은 예수 그리스도의 피의 은혜로 거듭난 자들이 하나님을 한 아버지로 모시는 것입니다(요1:12). 그러므로 신자들은 모두 하나님을 한 아버지로 모신 형제들입니다. 이는 그리스도의 피를 나누었기 때문에 그 어떤 관계보다도 진한 것입니다. 혈육으로 맺어진 가족은 언젠가는 죽음으로 헤어집니다. 죽음이 아니더라도 여러가지 이해 관계로 남보다 더 좋지 않은 관계로 지내는 수도 있습니다. 이처럼 육신의 가족은 영원하지 못합니다. 그러나 그리스도의 피로 맺어진 영적인 가족은 영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