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3강 마가복음 4장 강해
열매 맺는 비결
마가복음 4:1-20)
\"좋은 땅에 뿌리웠다는 것은 곧 말씀을 듣고 받아 삼십 배와 육십 배와 백 배의 결실을 하는 자니라(20).\"
성경에 보면 예수님은 여러 가지 비유를 들어 말씀하셨습니다. 그 중에 가장 대표적인 것이 씨 뿌리는 자의 비유입니다. 예수님은 본문에서 열매 맺는 비밀을 말씀하십니다. 인간이 열매를 맺는 것은 하나님께서 주신 사명이자 축복입니다. 그러면 누가 열매를 많이 맺을 수 있습니까? 열매 맺는 비밀을 배워 풍성한 열매를 맺어야 하겠습니다.
첫째, 비유로 말씀하시는 예수님(1-3a, 9-12). 예수님은 다시 바닷가에서 말씀을 가르치셨습니다. 이 때 많은 사람들이 모여 들었습니다. 이에 예수님은 배에 오르셔서 뱃머리를 강단 삼아 말씀을 가르치셨습니다(1). 예수님의 청아한 음성이 조용한 파도를 타고 울려 퍼졌습니다. 무리들은 육지에서 병풍처럼 둘러 앉아 숨을 죽이며 예수님의 말씀에 귀를 기울이고 있었습니다. 예수님은 여러가지 비유로 말씀하셨습니다. 비유로 말씀하신 목적이 무엇입니까?
첫째는 듣는 사람들이 알아 듣도록 함입니다. 언어는 신호입니다. 언어가 다르면 오해를 불러 일으킵니다. 고양이와 강아지가 왜 싸우는 지 아십니까? 선천적으로 미워서 그런 것이 아닙니다. 그것은 신호가 다르기 때문입니다. 개는 좋을 때에는 꼬리를 밑으로 하고 흔듭니다. 반면에 고양이는 위로 쳐듭니다. 그리고 고양이의 화난 표시는 꼬리를 밑으로 내리는 반면에 강아지는 올립니다. 그러니 서로 철천지 원수가 될 수 밖에 없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그들이 알아 들을 수 있도록 영원한 것을 시간적인 것으로, 초월적인 것을 내적인 것으로, 경험하지 못한 것을 이미 경험한 것으로, 못본 것을 본 것으로 설명하셨습니다. 이것이 비유요, 비유의 원천입니다. 우리는 양들로부터 통하지 않는다는 말을 많이 듣습니다. 이것은 양들에게도 문제가 있지만 우리에게도 문제가 있습니다. 우리는 양들과 통할 수 있도록 그들의 세계로 들어가 대화를 해야 합니다.
둘째는 마음이 완악한 자들에게는 모르게 하고자 함입니다. \"하나님 나라의 비밀을 너희에게는 주었으나 외인에게는 모든 것을 비유로 하나니 이는 저희로 보기는 보아도 알지 못하며, 듣기는 들어도 깨닫지 못하게 하여 돌이켜 죄 사함을 얻지 못하게 하려 함이니라(11,12).\" 비밀은 귀한 것이고 또 감추어진 것입니다. 아무나 알 수 있다면 이것은 이미 비밀이 아닙니다. 하나님 나라는 하나님이 다스리는 진리의 세계, 구원의 세계, 은혜의 세계, 빛의 세계, 생명의 세계입니다. 하나님 나라는 값진 진주와 같이 보배롭고 귀합니다. 진주는 그 가치를 아는 자만이 귀하게 여깁니다. 그 가치를 모르는 자는 돼지에게 진주를 주는 것과 같습니다. 돼지는 진주의 귀중함을 알지 못하기 때문에 밟아 버립니다. 그러므로 영적 소원을 가지고 말씀을 공부하는 자에게는 주어지지만 완악한 사람들에게는 하나님 나라의 비밀이 숨기어졌습니다(마11:25). 또 비유는 깊은 뜻이 함축되어 있기 때문에 생각해야만이 알 수 있습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이 생각하는 지성인이 되도록 비유로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은 말씀을 하시기 전에 \"들으라(3a)\" 하심으로 주의를 환기시키셨습니다. 무리 가운데에는 여러 종류의 사람들이 있었을 것입니다. 어떤 사람은 친구가 가자니까 단순한 호기심으로, 또 어떤 사람은 도서관에서 공부하다가 선배의 권유로, 어떤 사람은 비판적인 자세로, 어떤 사람은 졸면서 듣는 사람도 있었을 것입니다. 감정이 풍부한 사람, 지적이고 도덕적인 사람도 있었을 것입니다. 또 어떤 사람은 처음부터 졸기로 작정하고 온 사람도 있었을 것입니다. 그리고 아무 문제 의식 없이 듣는 사람도 있었을 것입니다. 예수님은 이를 아시고 말씀을 듣도록 주의를 환기시키셨습니다. 그리고 9절을 보면 비유의 말씀을 다 전하시고 \"들을 귀 있는 자는 들으라\" 로 끝을 맺으셨습니다. 말씀은 듣고자 하기만 하면 다 들을 수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둘째, 씨는 뿌려져야 합니다(3b). 한 농부가 씨를 뿌리러 밭으로 나갔습니다. 더러는 길가에 떨어지고, 더러는 돌밭에 떨어지고, 더러는 엉뚱하게 가시덤불의 땅에 떨어지기도 했습니다. 그리고 옥토에 떨어지기도 했습니다. 그런데 어떻게 씨를 뿌리기에 길가에 떨어지고, 돌밭에 떨어지고, 가시덤불밭에 떨어지고, 옥토에 떨어질 수 있는가 의아하게 생각할 수 있습니다. 요즈음에는 비닐 하우스에서 싹을 낸 후에 옮겨 심거나 정교하게 씨를 뿌린 후에 흙을 덮습니다. 그러나 당시에는 바람에 날려 씨를 뿌리거나 아니면 씨앗을 넣은 자루 밑에 구멍을 내고 나귀가 이리 저리 다니도록 하여 씨를 뿌렸다고 합니다. 그러다 보니 바람에 날려 목적하지 않았던 길가, 돌밭, 가시덤불에도 떨어졌던 것입니다. 여기에서 \'뿌렸다\'는 것은 \'선포한다\'는 \'케리그마\'의 뜻이 내포되어 있습니다. \'부뚜막에 있는 소금도 넣어야 짜다\' 라는 말이 있듯이 밭이 있고, 씨앗이 있다 할지라도 뿌리는 자가 없으면 씨앗이 결코 싹을 낼 수 없는 것처럼 복음을 전할 때만이 생명의 역사, 창조의 역사, 구원의 역사가 일어나게 됩니다. 그런데 이는 많은 사람들이 복음을 들을 수 있도록 넓게 전하라는 말씀입니다. 우리는 한 사람에게 인격적으로 지속적으로 복음을 전해야 하지만 또 많은 사람들이 들을 수 있도록 넓게 전해야 합니다. 에스겔서를 보면 듣든지 안 듣든지 너희는 말씀을 전파하라고 했습니다. 이 때 복음을 듣고 안 듣는 것은 듣는 자의 책임이지만 만에 하나라도 복음을 듣지 못해 구원을 받지 못한다면 이는 전하지 않은 자의 책임입니다. 그에게는 화가 임하게 됩니다(고전9:16). 성경은 \'내가 그 피 값을 네 손에서 찾을 것이라(겔3:20, 33:8)\' 했습니다. 얼마나 무서운 말씀입니까? 그러므로 봄학기에는 힘써 복음을 전하되 넓게 전해야 하겠습니다.
셋째, 길가에 떨어진 씨(4,15). 4,15절을 보십시오. \"뿌릴 새 더러는 길가에 떨어지매 새들이 와서 먹어 버렸고, 말씀이 길가에 뿌리웠다는 것은 이들이니 곧 말씀을 들었을 때에 사단이 즉시 와서 저희에게 뿌리운 말씀을 빼앗는 것이요.\" 길가에 뿌린 씨앗은 새들이 와서 주워 먹어 버린다는 것입니다. 옥토에 떨어져서 흙으로 잘 덮여진 씨앗이라면 새가 먹을 수 없습니다. 사람들이 다녀 반들반들한 길가에 씨가 떨어져 환하게 보일 때 안 먹을 새가 어디에 있겠습니까? 새들은 \'이게 웬 떡이냐\' 하며 삼켜 버렸습니다. 길가와 같은 밭은 굳은 땅을 말합니다. 이런 밭에서는 결실을 기대할 수 없습니다. 이런 마음은 굳은 마음, 밟힌 마음, 닫혀진 마음, 고집스러운 마음, 교만한 마음입니다. 이런 사람들은 마음의 귀가 어두워 말씀을 들을 수 없습니다. 사람이 망할 때 먼저 귀부터 먼다는 말이 있습니다. 독재자들의 末路를 보면 모두 마음의 귀가 멀어 사람들의 말을 귀담아 들으려 하지 않고, 양심의 소리에 귀를 막습니다. 이런 사람은 반드시 망합니다. 그러면 왜 사람들은 길가와 같이 마음이 굳어지게 됩니까?
첫째는 경험 때문입니다. 사람이 경험을 반복해 나갈 때 자기 나름대로의 세계관이 형성되고, 주관이 생기게 됩니다. 사람에게 경험은 중요하고 필요한 것입니다. 그런데 한 번 경험하게 되면 생각이 고정되어 객관적이 되지 못하고, 주관적이 되고, 자기 우상에 빠지기 쉽습니다. 그래서 생각이 둔해지고 판단이 흐려지고 나중에 남는 것은 고집만 남게 됩니다. 사람들은 \'내가 다 경험했는데\' 하며 고집을 부리며 말씀을 영접하려 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경험을 했다고 다 아는 것이 아니며 경험하지 못했다고 다 모르는 것은 아닙니다. 아기를 낳았다고 모두 산부인과 의사가 되고, 아기를 낳은 경험이 없다고 산부인과 의사가 못되는 것은 아닙니다. 그리고 사람들은 몇 번의 경험을 가지고 보편화하려 합니다. 여자들은 \'남자들은 모두 믿을 것이 못된다\' 고 말합니다. 도대체 몇 사람의 남자들에게 속았기에 남자들은 믿을 것이 못된다고 말할 수 있습니까? 사람들은 \'신자들은 말만 잘해, UBF 사람들은 모두 어떻다\' 고 합니다. 아니 몇 사람들의 신자들과 몇 사람들의 UBF 형제 자매들을 만났기에 그렇게 속단할 수 있습니까? 자기의 작은 경험을 가지고 과장하고 보편화하는 것을 小兒病的이라 합니다. 사람들은 많은 사람에게 속아 왔기 때문에 예수님 말씀도 믿지 못하겠다 합니다. 이런 사람들은 생각이 굳어져 자기만 옳다며 누구의 말도 듣지 않습니다.
둘째는 편견 때문입니다. 사람이 선입관으로 꽉 차 있을 때 자기 고집에 집착하여 다른 사람들의 의견이나 새로운 지식을 믿으려 하지 않습니다. 요한복음 1:45-51절을 보면 빌립은 자기 친구 나다나엘에게 전도를 했습니다. 이 때 나다나엘은 \'나사렛에서 무슨 선한 것이 날 수 있느냐\' 며 일단 거부했습니다. 그러나 그는 선입견을 버리고 예수님께로 나왔습니다. 그러나 종교지도자들인 바리새인이나 서기관들은 선입견을 버리지 못했습니다. 이미 자기가 가지고 있는 지식만을 절대화했습니다. 그들은 길가와 같은 마음이 되어 복음을 영접하지 못했습니다. 그리고 길가와 같은 마음은 무관심과 습관적인 신앙 생활에서 옵니다. 다시 말해 신앙이 문화화될 때입니다. 신앙이 문화화될 때 아무 느낌 없이 교회 문턱을 왔다갔다합니다. 이런 사람은 뺀질뺀질 닳아 습관만 남습니다. 이처럼 종교적인 의식과 습관에 매이게 될 때 구원과 생명, 믿음과 창조의 역사가 일어날 수 없습니다. 마치 참새가 씨를 재빠르게 쪼아 먹는 것과 같이 사단이 말씀을 받지 못하도록 빼앗아 가 버립니다.
이런 길가와 같은 마음은 깨뜨리고 부수고 깊이 갈아 씨앗이 머물 수 있도록 해야 합니다. 내가 깨뜨리지 않으시면 하나님이 깨뜨리십니다. 내가 겸손하지 않으면 하나님께서 겸손케 하십니다. 하나님은 시험을 통해 깨뜨리시고 부수어 겸손케 하십니다. 감당키 어려운 하나님의 시련을 겪은 후에 손을 들게 합니다. 다 깨뜨리고 잘고 곱게 부수어 겸손하게 될 때 말씀은 생명과 구원의 역사, 창조의 역사로 나타나게 됩니다.
넷째, 돌밭에 떨어진 씨(5-7,16,17), 더러는 흙이 별로 없는 돌밭에 떨어졌습니다. 씨는 뿌리를 내려 싹이 돋았습니다. 이 때 따스한 햇빛이 비취자 돋아난 싹은 돌 때문에 깊이 뿌리를 내리지 못해 그만 말라 죽고 말았습니다. 16,17절에서 이 비유의 뜻을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또 이와 같이 돌밭에 뿌리웠다는 것은 이들이니 곧 말씀을 들을 때에 즉시 기쁨으로 받으나 그 속에 뿌리가 없어 잠간 견디다가 말씀을 인하여 환난이나 핍박이 일어나는 때에는 곧 넘어지는 자요.\" 돌밭과 같은 마음은 깊이가 없는 것이 문제입니다. \'깊이가 없다\' 는 것은 \'머무를 곳이 없다\' 는 것입니다. 이는 말씀을 전 인격을 가지고 전적으로 받아들이는 것이 아니라 어느 한 부분만을 받아들이기 때문입니다. 이런 사람은 말씀을 들을 때 \'아멘. 할렐루야!\' 합니다. 그런데 \'무엇을 배웠습니까?\' 물으면 \'글쎄요\' 합니다. 이처럼 감정적인 신앙은 지적으로 아는 게 없게 됩니다. 이런 사람은 확 뜨거워졌다가 확 식어 버립니다. 한국인의 특징을 어떤 사람은 신바람과 恨이 동시에 서려 있다고 했습니다. 그래서 기분이 좋아 신바람이 나면 망해 가는 기업도 살리고, 반면에 恨을 품게 되면 잘되어 나가던 기업도 하루 아침에 망하게 된다고 했습니다. 너무나 감정적이어서 깊이가 없고, 뿌리가 없습니다. 부끄러운 이야기지만 한국 사람들에게만 6개월이라는 학습 세례가 있습니다. 선교사들이 예수님을 믿는다고 하여 세례를 주었더니 그 다음날 달아나 버리더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조금도 책임의식이나 죄의식이 없더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선교사들은 예수님을 믿는다고 해도 믿을 수 없어 6개월간 지켜 본 후에 세례를 주게 된 것입니다. 얼마나 부끄럽습니까?
또 사람들은 말씀을 듣고는 \'바로 이것이야!\' 무릎을 칩니다. 그러나 가슴이 싸늘하여 생활 속에 복음의 변화가 일어나지 않습니다. 우리는 보통 장로교 하면 메마른 것 같습니다. 그러나 칼빈은 경건한 삶을 \'하나님의 마음을 상하게 하지 않고자 하는 뜨거운 열정이다\' 라 했습니다. 신앙은 지적일 뿐만 아니라 열정이 있어야 합니다. 그런가 하면 의지적인 사람도 있습니다. 이들은 말씀을 도덕적으로 받아들입니다. 말씀을 聖賢의 말씀 정도로 생각합니다. 그런 사람들은 선한 삶, 희생과 헌신적인 삶을 좋아합니다. 그러나 심령의 깊은 곳에서는 생명의 역사가 일어나지 않습니다. 올바른 신앙 생활은 지성과 감성과 의지가 조화되어야 합니다.
돌밭은 현재적이고 찰라적입니다. 왜 우리가 예수님을 믿고 기뻐하게 됩니까? 하나님의 자녀된 기쁨, 죄 사함 받은 기쁨 때문이 아닙니까? 하나님의 자녀가 됨으로 모든 죄를 사함받았다는 사실, 과거에 지은 죄와 죄책감, 저주와 죄의식으로부터 해방된다고 생각할 때 이 사실은 엄청난 감격과 기쁨입니다. 그런데 우리가 이런 영적인 축복을 받았으면 사명도 있음을 알아야 합니다. 축복은 사명으로 통합니다. 건강을 복으로 받은 사람은 건강을 가지고 일해야지 허랑방탕하게 살면 안 됩니다. 지식의 축복을 받았으면 지식을 가지고 더 많은 일을 해야 합니다. 성경 공부의 은사를 받았으면 더 열심히 성경을 가르쳐야 합니다. 우리가 사명을 감당하지 않으면 받은 바 축복이 안개처럼 사라지게 됩니다. 우리는 현재적이고 찰나적이고 순간적인 기쁨만 생각하는 흥분에 빠져서는 안 됩니다. 거기에는 희생이 있고, 고통과 아픔이 있습니다. 핍박과 환난이 있습니다. 친구들로부터 소외당하고, 부모님들로부터의 핍박도 있습니다. 비바람을 맞으며 자란 나무가 오히려 강해지는 것처럼 역경과 고난과 환난과 핍박에서 생명은 자라게 됩니다. 이것은 생명의 이치이자 근원입니다. 핍박이 있음으로 복음 전파가 더 잘 되고, 환난이 있음으로 순수한 믿음이 생기게 되고, 견고케 됩니다. 우리를 깨어 있게 하고, 진실되게 합니다. 우리의 헛된 소망을 버리고 하나님 나라의 소망을 갖게 합니다.
돌밭과 같은 마음은 첫째는 예수님 안에 뿌리를 깊이 내려야 합니다. 골로새서 2:6,7절은 \"너희가 그리스도 예수를 주로 받았으니 그 안에서 행하되 그 안에 뿌리를 박으며\" 라 했습니다. \'예수님 안에 뿌리를 박으라\' 는 말씀은 예수님과 깊은 인격적인 관계성을 맺으라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 group 신앙이 아니라 구원의 은혜가 분명한 개인 신앙을 갖는 것입니다. 개인 신앙이 있는 분은 어떤 분위기나 상황에서도 요동치 않습니다. 이런 분들은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예수님을 좇습니다. 어려울 때 집에 가서 드러눕지 않고 오히려 불사조와 같이 적극적으로 도전합니다. 개인 신앙은 자립적인 신앙이요, 자립 신앙은 곧 복음 신앙입니다.
둘째는 부르심에 뿌리를 내려야 됩니다. 사람은 한 곳에 매이기를 싫어합니다. 그래서 벌나비처럼 이곳 저곳을 떠돌아 다닙니다. 요즈음 떠돌이 신자들이 많다고 합니다. 이는 사명의 십자가를 지기 싫어하기 때문입니다. 이런 사람들은 결코 열매를 맺을 수 없습니다. 나무가 한 곳에 뿌리를 내려야 열매를 맺을 수 있는 것처럼 한 곳에 뿌리를 내릴 때 믿음이 성장하고, 열매를 맺을 수 있습니다.
셋째는 하나님의 말씀에 뿌리를 내려야 됩니다. 예수님은 요한복음 8:31, 15:4절에서 \"내 안에 거하라\" 고 하셨습니다. 여기에서 \'거하라\'는 말은 말씀 안에 뿌리를 내리라는 것입니다. 말씀에 뿌리를 내린 사람은 말씀을 중심으로 생각하고, 말씀을 중심으로 계획하고, 생활합니다. 말씀에 기초한 인생관과 가치관, 세계관과 역사관을 갖습니다. 말씀이 그 사람의 인격과 사상과 영혼을 지배합니다. 이 때 마음 깊은 곳에 있는 죄악, 이상과 꿈, 안일 등을 깰 수 있습니다. 바로 우리가 일용할 양식과 소감을 쓰는 것은 말씀의 지배를 받아 바위를 깨고 믿음의 뿌리를 내리는 작업입니다.
다섯째, 가시떨기밭에 떨어진 씨(7,18,19). 더러는 가시떨기밭에 떨어졌습니다. 이 밭은 옥토와 같이 땅이 부드럽습니다. 씨는 싹을 내고, 뿌리를 깊이 내려 무성하게 자랐습니다. 그런데 가시가 더 빨리 자라 기운을 막아 열매를 맺지 못했습니다. 예수님은 이를 18,19절에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또 어떤 이는 가시떨기에 뿌리우는 자니 이들은 말씀을 듣되 세상의 염려와 재리의 유혹과 기타 욕심이 들어와 말씀을 막아 결실치 못하게 되는 자요.\" 가시떨기밭 같은 마음은 말씀보다 가시떨기가 더 빨리 자라 가시에 찔리고, 잡초에게 영양을 빼앗기고, 그것들에 가려 햇볕도, 바람도 제대로 못받아 허약하다는 것입니다. 이는 염려와 재리의 유혹과 기타 욕심 때문입니다.
세상에는 염려할 것이 많습니다. 의식주의 염려, 학점에 대한 염려, 취업에 대한 염려, 건강에 대한 염려, 결혼에 대한 염려, 결혼 후에는 아기를 낳을 것에 대한 염려, 아기를 갖게 되면 정상적인 아기를 낳을 수 있을까 하는 염려, 20대도 안 되어 노후 대책에 대한 염려 등이 있습니다. 어떤 분은 대상이 없이 염려합니다. 심리학자의 말에 의하면 염려 가운데 50%는 전혀 있을 수 없는 염려, 40%는 있을 지 없을 지 모르는 염려, 10%는 꼭 그렇게 되겠다는 것인데 거기에 대한 보장은 1%도 안 된다는 것입니다. 결국 1%도 안 되는 불투명한 것을 가지고 염려한다는 것입니다. 이를 볼 때 염려는 시간 낭비, 건강 낭비, 젊음의 낭비입니다. 이처럼 사람들은 염려를 창조하는 염려 공장을 가지고 다닙니다. 사람이 염려를 하게 되면 심령에 기쁨을 상실하여 얼굴이 어둡습니다. 그런데 염려는 현재보다 미래에 대한 것으로 하나님을 불신하는 데서 옵니다. 그리고 자기가 자신을 책임지고자 하는 데서 옵니다. 우리는 자신을 책임질 수가 없고, 염려한다고 해결되지 않습니다. 염려는 백해무익합니다. 예수님은 염려하는 제자들에게 염려는 이방인들이 하는 것이라 하시고, 믿음이 적은 자들이라고 책망하시고, 염려 대신에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 하셨습니다(마6:33). 우리가 구할 때 하나님은 10년 후에 세계 지성사를 움직일 목자 박사로 축복하여 주실 것입니다.
재리의 유혹은 재물에 대한 욕심입니다. 이생의 염려가 결핍 상태에서 오는 것이라면 재리는 좀 더 잘 살고자 하는 욕심에서 오는 것입니다. 사람들은 돈만 있으면 행복하리라 생각합니다. 그래서 돈을 사랑하고 재물에 욕심을 갖습니다. 그러나 이는 큰 착각입니다. 욕망이란 끝이 없어 마치 목이 마르다고 바닷물을 퍼 마시는 것과 같습니다. 그리고 돈이 있다고 행복한 것은 아닙니다. 그리고 사람이 재물의 유혹이 생기면 십자가, 헌신, 희생이란 단어가 부담스럽습니다. 그러다가 자신도 모르게 시험에 들어 믿음에서 떨어지게 됩니다. 그렇다고 돈이 필요 없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는 할 수 있는 대로 돈을 많이 벌어야 하지만 돈을 사랑해서는 안 됩니다(딤전6:10). 그리고 돈을 버는 것도 배워야 하지만 돈을 쓰는 비결도 배워야 합니다. 돈이란 반드시 어디인가에 쓰여지게 됩니다. 주와 복음을 위하여 돈이 쓰여질 때 가장 아름답습니다.
기타 욕심의 가시입니다. 기타 욕심은 명예욕과 일락, 즉 정욕입니다. 특히 우리는 젊기 때문에 정욕과 명예욕의 가시에 찔리기 쉽습니다. 우리는 인생을 즐기고, 잔재미를 누리고 싶은 유혹이 있습니다. 주일날 영화도 보고, 등산도 하고 싶습니다. 특히 육신적인 캠퍼스 분위기의 영향을 따라 연애도 하고 싶고, 캠퍼스 커플이 되고 싶은 유혹도 있습니다. 정욕을 즐기고 싶은 유혹이 있습니다. 이런 정욕의 유혹에 빠질 때 순간적인 쾌락은 있을 지 모르지만 후에는 헤어날 수 없는 허무와 공허만이 있습니다. 심한 죄의식과 심판에 대한 두려움으로 고통하게 됩니다(롬8:13, 약1:15). 정욕은 우리 인격과 영혼을 파괴합니다. 정욕은 우리를 무력하게 하고 정신을 황폐케 합니다. 그러므로 이 정욕의 가시는 처음부터 제거해야 합니다. 염려, 재리의 유혹, 욕심의 가시 등은 우리 주위의 곳곳에 산재되어 있습니다. 조금만 방심하면 이런 것들이 우리의 믿음을 막습니다. 생명과 기쁨과 평화를 앗아가 버립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힘써 이런 가시에 찔리지 않도록 성령을 간구하여야 합니다(갈5:16).
여섯째, 좋은 마음 밭(8,20). 더러는 좋은 땅에 떨어졌습니다. 좋은 땅은 돌이 없어 흙이 부드럽고, 잡초나 가시덤불이 없어 순수하고 깨끗합니다. 흙이 깊어서 씨를 깊이 받아들입니다. 씨는 싹이 나고, 뿌리를 깊이 내려 마음껏 수분을 빨아 올렸습니다. 그리고 햇빛을 충분히 받아 왕성하게 무럭무럭 자랐습니다. 때로는 폭풍우를 만나 흔들리기도 하지만 오히려 그 때마다 뿌리를 깊이 내리고 성장했습니다. 때가 되자 꽃을 피우고 탐스러운 열매를 맺어 30배, 60배, 100배의 결실을 맺었습니다. 20절을 보십시오 \"좋은 땅에 뿌리웠다는 것은 곧 말씀을 듣고 받아 30배와 60배와 100배의 결실을 하는 자니라.\" 좋은 마음 밭은 말씀을 듣고 받습니다. 말씀을 사랑하며 말씀을 가까이 합니다. 말씀 앞에 겸손하며, 말씀을 귀히 여기며, 말씀을 기초로 생각하고, 말씀대로 살고자 합니다. 말씀에 순종하고, 말씀 앞에 회개합니다. 누가복음 8:15절을 보면 \"듣고 지키어 인내로 결실하는 자라\" 했습니다. 말씀이 내 안에서 뿌리를 내리고 자라도록 소감을 쓰고 말씀을 읽고 기도합니다. 이런 사람들은 내면이 순수합니다. 이런 사람들에게는 말씀이 그의 인생관과 사상과 가치관이 됩니다. 이런 사람에게는 시냇가에 심은 나무와 같이 그 잎사귀가 마르지 않고 철따라 풍성한 과실이 맺히게 됩니다. 이런 사람은 밝고 힘이 있으며 생명력이 넘치고 기쁨과 감사가 넘칩니다. 또 열매를 맺는 데 중요한 것은 인내입니다. 사람들이 열매를 맺지 못함은 조급함 때문입니다. 식물은 속성 재배할 수 있지만 사람은 속성 재배할 수 없습니다. 우리는 변화되지 않는 자신의 내면을 보고 절망하고, 열매를 맺지 못하는 자신을 바라보고 절망합니다. 그러나 우리가 낙심치 않고 인내할 때 반드시 열매를 맺습니다. 하나님은 반드시 기대 이상으로 축복하셔서 30배, 60배, 100배의 풍성한 열매를 맺게 하십니다. 내적으로 성령의 열매인 사랑, 희락, 화평, 오래 참음, 자비, 양선, 충성, 온유, 절제의 열매를 맺습니다. 그리고 외적으로는 전도의 열매가 주렁주렁 열리게 됩니다. 좋은 마음 밭이 되어 내·외적으로 풍성한 열매를 맺을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