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4강 마가복음 4장 강해

말씀과 하나님 나라


마가복음 (4:21-34)



\"또 가라사대 하나님 나라는 사람이 씨를 땅에 뿌림과 같으니(26)\"

우리는 열매 맺는 秘訣을 통해 말씀을 듣는 姿勢의 重要性을 알게 되었습니다. 말씀을 겸손히 듣고 받아 忍耐할 때 30배, 60배, 100배의 結實을 얻게 됩니다. 오늘 말씀에는 전파자의 重要性과 말씀의 神秘, 말씀의 能力에 대해 記錄되어 있습니다. 생명 역사, 구원 역사, 하나님 나라는 말씀을 傳함으로 시작됩니다. 그래서 말씀 전파는 소중한 것입니다. 본문을 통해 일대일 성경 공부가 얼마나 소중한가를 깨닫고 이를 충성스럽게 감당하여 하나님 나라가 확장되기를 기도합니다.

첫째, 등불의 비유(21-25). 21절을 보십시오. \"또 저희에게 이르시되 사람이 등불을 가져오는 것은 말 아래나 평상 아래나 두려 함이냐? 등경 위에 두려 함이 아니냐?\" 말은 곡물을 측량하는 그릇이고, 평상은 침상을 말합니다. 사람이 등불을 켜는 이유는 어두움을 밝히기 위함입니다. 그래서 예전이나 지금이나 사람들은 등불을 켜서 말 아래나 평상 아래에 두지 않고 말 위에나 평상 위에 놓습니다. 우리 중에 전기 스탠드를 책상 밑에 놓고 쓰는 사람은 한 사람도 없을 것입니다. 등경의 생명은 어두움을 밝히는 데 있습니다. 그러므로 할 수만 있으면 등경을 켜서 상 위에 놓아야 합니다. 그러면 \'등경을 상 위에 두라\' 는 뜻이 무엇입니까? 이는 말씀을 첫 자리에 두라는 뜻입니다. 사람은 무엇인가를 마음의 첫 자리에 두고 삽니다. 어떤 사람은 물질을, 어떤 사람은 명예를, 어떤 사람은 권세를, 어떤 사람은 사람을, 어떤 사람은 사상을, 어떤 사람은 자기 나름대로의 가치관을 마음의 첫 자리에 두고 삽니다. 이런 사람들의 겉모습은 화려하고 아름다워 보일 지 모르지만 그들의 내면은 어둡습니다. 어둡기 때문에 방향 감각과 분별력을 상실하여 죄의 유혹에 쉽게 넘어집니다. 그리고 예수님을 믿는다고 하지만 믿지 않는 사람들보다 더 시커멓게 하고 다녀 다른 사람들을 부담스럽게 하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이는 말씀을 평상이나 말 아래 두기 때문입니다. 이런 사람들은 말씀을 귀하게 여기지 않습니다. 말씀을 최고의 가치로 두지 않습니다. 말씀은 말씀이고, 나는 나고, 현실은 현실이라고 생각합니다. 말씀을 자기 삶에 전혀 적용하지 않습니다. 좋은 것만 받아들이고, 부담스러운 말씀은 받아들이지 않습니다. 박사 목자는 받아들이고, 목자 박사는 부담스러워 합니다. 센타에 늘 있다가 토요일 소감 발표 모임 때에는 바람 같이 사라집니다. 이런 사람들의 얼굴은 늘 심각하고, 연탄 장수처럼 어둡고, 38년된 중풍병자처럼 무기력합니다. 그러나 말씀을 공부하고 말씀을 마음의 첫 자리에 두고, 말씀을 자신의 삶에 적용하는 분들의 내면은 밝고 맑고 힘이 있으며, 생명력이 있습니다. 죄의 소욕을 이기고 거룩한 삶을 삽니다. 분명한 방향과 목적이 있어 어떤 경우에도 흔들리지 않습니다. 선과 악, 참과 거짓, 아름다운 것과 추한 것, 깨끗한 것과 더러운 것을 분별하여 시대를 본 받지 않습니다. 목자 박사의 비전과 21세기 역사의 주역이 될 소망으로 불타게 됩니다. 이런 사람들은 세계 지성계와 이웃과 동료들에게 선한 영향력을 끼칩니다.

이는 말씀은 등경, 곧 빛이기 때문입니다. 시편 기자는 \"주의 말씀은 내 발에 등이요, 내 길에 빛이니이다(시119:105)\" 라 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어두움을 밝히고 인생이 나아가야 할 길을 제시해 줍니다. 말씀은 인생이 어디서 와서 어디로 가는 존재이며, 인생의 목적과 참된 희망이 무엇인가를 가르쳐 줍니다. 말씀은 사람이 어떻게 살아야 의미 있고, 가치 있고, 보람되고, 행복한 삶을 살 수 있는가를 가르쳐 줍니다. 또 빛은 예수님이십니다. 예수님은 요한복음 8:12절에서 \"나는 세상의 빛이니 나를 따르는 자는 어두움에 다니지 아니하고 생명의 빛을 얻으리라\" 하셨습니다. 어두움은 사단이 지배하는 세계입니다. 사단은 우리 인간의 힘으로 물리칠 수 없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사단의 세력을 물리칠 수 있습니다. 빛 되신 예수님을 영접할 때 무기력한 인생에서 약동하는 인생으로, 절망적인 삶에서 희망찬 삶으로, 어둡던 인생에서 밝고 빛난 인생으로, 죄악된 삶에서 거룩한 삶으로, 매사에 부정적인 인생에서 매사 긍정적인 인생으로, 패배적인 생각에 시달리던 자가 승리하는 힘찬 삶을 살 수 있습니다. 예수님은 어두움의 세력, 사단의 세력을 물리칠 수 있는 빛의 근원이십니다.

22절을 보십시오. \"드러내려 하지 않고는 숨긴 것이 없고, 나타내려 하지 않고는 감추인 것이 없느니라.\" 예수님께서 비유로 말씀하시는 궁극적인 목적은 진리를 은폐하기 위함이 아니라 드러내는 데 있습니다. 복음은 보배와 같이 귀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아무나 그 비밀을 알 수 없습니다. \'들을 귀\' 가 있는 자만이 들을 수 있습니다(23). 그리고 24a절을 볼 때 삼갈 때 찾을 수 있습니다. \'삼가라\'는 것은 \'주의 깊게 생각하라\' 는 뜻입니다. 말씀은 깊이 생각하면 생각하는 것 만큼 받고, 또 더 받게 되지만 생각하지 않는 자는 있는 것마저도 빼앗깁니다(24b,25). 영적인 성장은 신앙 년수에 비례하지 않습니다. 말씀을 얼마나 깊이 생각하여 자신의 삶에 적용하느냐에 달려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비유로 말씀하신 후 먼저 그 뜻을 설명해 주지 않고 묻기까지 기다리신 것도 제자들에게 생각하도록 함에 있습니다. 그런데 생각은 저절로 생기는 것이 아니라 많은 노력을 필요로 합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이를 귀찮아하여 생각하려 하지 않습니다. 이는 한국 지성인들의 문제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수한 두뇌를 가지고 있으면서도 노벨상 하나 못탑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깊은 바다와 같아서 그 안에는 지혜와 지식의 모든 보화가 감추어져 있습니다(골2:3). 예수님은 많은 비유로 저희가 알아 들을 수 있는 대로 말씀을 가르쳐 주셨습니다(33). 예수님은 하나님 나라의 모든 비밀을 제자들에게 가르쳐 주시기를 기뻐하셨습니다(34, 시78:2). 우리가 탐구심을 가지고 공부하여 구원과 은혜와 사랑과 온유와 진리와 믿음의 세계가 깊어지기를 기도합니다.

둘째, 자라나는 씨의 비유(26-29). 첫째로 하나님의 나라는 말씀을 전파함으로 시작됩니다. 26절을 보십시오. \"또 가라사대 하나님의 나라는 사람이 씨를 땅에 뿌림과 같으니\" 하나님의 나라는 막연하고 추상적인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나라는 사람이 말씀의 씨를 뿌리는 구체적이고 실제적인 일을 통해서 이루어집니다. \'뿌린다\'는 것은 헬라어로 \'던진다\'는 뜻입니다. 농부가 씨를 뿌릴 때에 그릇에 씨를 담아 넓게 뿌립니다. 아무리 좋은 씨라 할지라도 뿌리지 않으면 아무런 역사를 이룰 수 없습니다. \'부뚜막의 소금도 넣어야 짜다\' 란 말이 있듯이 말씀에 생명이 있고, 빛이 있다 할지라도 뿌리지 않으면 아무런 생명 역사가 일어날 수 없습니다. 고생스럽지만 열심히 말씀을 전할 때 생명의 역사, 구원의 역사, 믿음의 역사가 일어납니다.

한국 교회는 1945년 해방 이후 양적으로 급성장하여 세계에 괄목할 만한 교세로 성장했습니다. 그래서 세계 최대의 대형 교회, 세계 10대 대형 교회의 절반이 한국에 있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90년 이후로 성장이 둔화되어 한국 교회가 서구화되는 것이 아닌가 하고 큰 걱정을 하고 있습니다. 많은 분들이 한국 교회의 성장 둔화의 원인을 여러가지 이유를 들어 설명하고 있습니다. 첫째는 성장의 자만심과 둘째는 선교 중심으로부터의 이탈, 셋째는 문화의 충격을 들고 있습니다. 과학의 발달과 기술로 인한 편리주의와 다양한 문화의 도전과 충격으로 인해 탈신앙화, 탈교회화, 탈윤리화의 길로 치닫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 중에 많은 사람들은 세계 선교 초유의 성장이라는 포만감에 젖어 전도를 안 한다는 데서 그 원인을 찾고 있습니다. 이는 우리도 예외는 아닙니다. 우리는 몇 년전만 해도 일대일 200팀은 기본이었습니다. 그리고 목동 이상은 양을 치고, 평신도 목자들은 퇴근하자마자 센타에 와서 양을 치고, 사모들은 애기를 맡기고 양을 치는 것은 기본이고 당연한 것으로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요즈음에는 양을 치지 않습니다. 평신도 목자들은 금요일 말씀 공부할 때와 토요일 소감 발표할 때 얼굴을 내밀고는 보이지 않습니다. 그래서 센타는 텅텅 비어 있습니다. 우리가 일대일 말씀 공부를 안 한다는 것은 어떤 이유로도 변명할 수 없습니다. 이제 이렇게 센타가 계속 텅텅 비게 된다면 세를 놓을 수 밖에 없습니다. 이제 우리는 선택을 해야 합니다. 센타를 세 놓을 것인가, 아니면 일대일로 채울 것인가, 캠퍼스를 살릴 것인가, 아니면 내버려 둘 것인가, 지성계에 영향을 끼칠 것인가, 아니면 영향을 받을 것인가, 둘 중의 하나를 택해야 합니다.

예수님의 유언적인 말씀이 무엇입니까? 복음서의 끝 장을 보면 말씀을 전하라는 것입니다. 너희는 말씀을 가르쳐 지키게 하라, 너희는 온 천하에 다니며 복음을 전파하라, 너희는 예루살렘으로부터 시작한 복음을 모든 족속에게 전파하라, 어린 양을 먹이라는 것입니다(마28:20, 막16:15, 눅24:47, 요21:15). 그리고 사도행전 1:8절을 보면 땅 끝까지 이르러 복음을 전파하라는 것입니다. 사도들은 이 명령에 순종하여 그 많은 핍박을 받으면서도 말씀을 전파했습니다(행2:42,5:20,42,6:4). 목을 내놓고 말씀을 전파했습니다. 사도 바울도 예수님의 말씀에 순종하여 가는 곳마다 쉼 없이 하나님의 말씀을 전했습니다. 그리고 제자 디모데에게 엄히 명했습니다. \"하나님 앞과 산 자와 죽은 자를 심판하실 그리스도 예수 앞에서 그의 나타나실 것과 그의 나라를 두고 엄히 명하노니 너는 말씀을 전파하라. 때를 얻든지 못얻든지 항상 힘쓰라(딤후4:1,2a).\" 에스겔은 \"그들은 심히 패역한 자라 듣든지 아니 듣든지 너는 내 말로 고할지어다(겔2:7)\" 했습니다. 미국은 독립 전쟁과 불란서 혁명의 여파인 인본주의와 이성주의의 영향으로 영적으로나 도덕적으로 空洞化 현상을 맞이한 적이 있습니다. 그 때 S.V.M.은 \'우리의 손으로 우리의 세대에 세계 복음화\' 를 외치며 열심히 복음을 전파했습니다. 그 때 조상들의 위대한 복음 신앙을 회복할 수 있었으며, 위기로부터 미국을 건질 수 있었습니다. 믿음과 구원의 역사는 들음에서 나고, 들음은 그리스도의 말씀을 전파함으로 이루어집니다(롬10:17). 우리는 결단해야 합니다. 예수님의 지상명령에 순종하여 팔을 걷어 올리고 캠퍼스로 나아가 fishing하여 양을 쳐야 합니다. 이것이 우리의 위기를 극복할 수 있는 길입니다.

둘째로 성장케 하는 분은 하나님이십니다. 27절을 보십시오. \"저가 밤낮 자고 깨고 하는 중에 씨가 나서 자라되 그 어떻게 된 것을 알지 못하느니라.\" 농부가 씨를 뿌리고 가꾸고 여러 모양으로 수고를 하지만 자라나게 하시는 분은 오직 하나님이십니다. 씨앗을 주신 분도 하나님이시고, 다 자란 씨를 거두어 들인 분도 하나님이십니다. 우리가 아무리 열심히 씨를 뿌리고 가꾸어도 하나님께서 비를 내리지 않고, 햇빛을 주시지 않으면 소용이 없습니다. 그리고 씨에는 생명이 있기 때문에 햇빛과 물, 그리고 땅에서의 수분과 무기질 등이 서로 조화하여 배젖이 썩어 배가 껍질을 비집고 싹이 나옵니다. 싹이 자라서 꽃이 피고 열매를 맺습니다. 생명이 자란다는 것은 신비하고도 놀라운 일입니다. 오늘날 과학이 아무리 발달해도 생명을 창조할 수 없고, 자라게 할 수 없습니다. 다만 오늘의 과학은 생명은 생명에서 나온다는 법칙만을 밝힐 뿐입니다.

이처럼 말씀도 그 자체에 생명이 있습니다. 생명이 있어 자랍니다(히4:12). 말씀은 생명이 있어 내면에 떨어지게 되면 자기도 모르게 자랍니다. 주일학교 때에 떨어진 말씀이 대학 때에 싹이 나는 사람도 있습니다. 몇 년 전 여름 수양회 때에 받은 말씀이 오랜 후에 싹이 나고 자라는 분도 있습니다. 우리는 말씀을 전해도 싹이 전혀 날 기미가 보이지 않는 분들을 보면 실망할 때가 있습니다. 때로 내가 전하는 말씀 역사가 무슨 의미가 있는가 절망할 때가 있습니다. 그러나 언젠가는 말씀이 싹이 나서 자라게 됩니다. 이것이 생명의 역사요, 말씀의 역사입니다. 이것이 생명의 능력이요, 말씀의 능력입니다. 이것이 생명의 신비요, 말씀의 신비입니다.

그리고 우리는 때로 내가 말씀의 씨를 뿌렸기 때문에 내가 사람을 키우는 것처럼 생각할 때가 많습니다. 그러나 이는 큰 착각입니다. 우리는 생명을 자라게 하는 데 전혀 개입할 수 없습니다. 우리가 하는 일은 말씀의 씨가 잘 성장하도록 환경을 만들어 줄 뿐입니다. 고린도전서 3장을 보면 \'씨를 뿌린 자도 있고, 물을 주는 자도 있지만 자라게 하는 분은 오직 하나님이시다\' 라고 했습니다. 뿐만 아니라 다른 것은 아무 것도 아니라고 했습니다. 생명에는 세 가지 신비, 즉 발생의 신비, 자람의 신비, 사망의 신비가 있습니다. 이것은 오직 하나님만이 하실 수 있는 신비로운 것입니다. 이 사실을 믿을 때 우리는 하나님께 기도할 수 있고, 열매에 연연하지 않고 말씀을 전할 수 있습니다.

셋째로 씨가 성장하는 데에는 과정이 있습니다. 28,29절을 보십시오. \"땅이 스스로 열매를 맺되 처음에는 싹이요, 다음에는 이삭이요, 그 다음에는 이삭에 충실한 곡식이라. 열매가 익으면 곧 낫을 대나니 이는 추수 때가 이르렀음이니라.\" 씨는 진실합니다. 씨는 결코 비약하는 법이 없이 과정을 거쳐 단계적으로 성장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단계 단계에 맞게 양육해야 합니다. 첫 단계는 싹입니다. 일반적으로 싹은 연약하기 때문에 섬세히 돌봐 주어야 합니다. 어린 싹에게 비료를 주면 타 죽듯이 말씀도 적당히 주어야 합니다. 어린 양들에게 \'자기 부인을 하라\' 하면 \'자기 부인하라\' 는 것을 자기 아내와 이혼하라는 말로 오해하기 쉽습니다. 말씀도 너무 많이 주면 안 됩니다. 그리고 곡식마다 특성이 있듯이 양들도 다 특성이 있습니다. 그러므로 똑같은 말씀이라도 그 사람에게 맞도록 전해야 합니다. 다음 단계는 싹이 나면 잎사귀를 내어 이삭 단계에 이르게 됩니다. 이 때는 말씀을 공부하고 어느 정도 자란 시절입니다. 이 때 목자는 어느 정도 자랐기 때문에 안심하고 스스로 자라도록 하기 쉽습니다. 그러나 꽃이 피고 열매를 막 맺으려 할 때 유난히 병충해와 폭풍우가 많듯이 세상으로부터 많은 유혹을 받을 시기입니다. 목자로부터 사랑도 받지 못하고, 또 양 치는 것도 뜻대로 안 되기 때문에 회의를 갖게 됩니다. 이 때 목자들로부터 사랑을 받고자 엉뚱한 짓을 합니다. 목자들이 그것도 모르고 정죄할 때 큰 상처를 받고 실족하게 됩니다. 그리고 이삭 단계를 지나면 곡식이 맺히게 됩니다. 이 때는 충실한 곡식이 맺히도록 햇빛을 많이 받도록 하고, 때를 잘 맞추어 추수를 해야 합니다. 추수는 한 개인이 복음의 말씀을 듣고 구원받는 것을 의미하기도 하고, 또 최후 심판의 날을 의미하기도 합니다. 최후 심판의 날이 이르면 예수님께서 심판장이 되셔서 알곡은 모아 곡간에 들이시고, 쭉정이는 불에 태워 버리게 됩니다(눅3:17). 우리가 인생을 함부로 살 수 없고 두렵고 떨림으로 열매 맺는 생활을 해야 하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이처럼 작든 크든 생명 역사에는 과정이 있습니다. 처음부터 열매를 맺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가 자녀를 기르는 것도 과정이 있습니다. 낳자마자 유능한 인간이 되지 않습니다. 신앙적인 교육과 인간 교육, 일반 교육 과정을 통해 훌륭한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신앙 인격도 마찬가지입니다. 갑자기 성숙한 사람이 되는 것이 아닙니다. 말씀을 계속 주게 되면 믿음이 자라게 됩니다. 그런데 우리는 자라지 않는 양들을 보면 답답합니다. 너무 답답하여 울기도 합니다. 그러나 때가 되면 싹이 나고, 싹이 조금씩 조금씩 푸르게 됩니다. 그리고 꽃을 피우고, 열매를 맺습니다. 그런데 열매는 처음 심었던 씨와 같이 됩니다. 처음에 콩이면 그 열매도 콩이고, 처음에 밀이면 그 열매도 밀입니다. 생명을 심어 생명을 거두고, 복음을 심어 복음을 거두게 됩니다. 그리스도를 심어 그리스도와 같은 인격이 맺어지게 됩니다. 에베소서 4:15절을 보면 \'그에게까지 자라라\' 했습니다. 그리스도 안에서 그리스도와 한 몸이 되어 그리스도처럼 되라는 것입니다. 감히 우리가 그리스도에까지 이르려면 얼마나 많은 훈련과 시련을 겪어야 하겠습니까? 많은 시련은 성장으로 향하는 과정입니다. 이런 성장 과정을 통해 결실이 생기게 됩니다. 이제 성장은 정지되고 열매를 맺혀 익었으면 거두어 들입니다. 이 순간을 위해 긴 세월을 기다려 온 것입니다. 인생도 완숙한 나이에 이르게 되면 하나님 나라에 가게 됩니다.

셋째, 겨자씨 비유(30-34). 예수님은 계속해서 겨자씨 비유로 하나님 나라를 설명해 주셨습니다. \"겨자씨 한 알과 같으니 땅에 심길 때에는 땅 위의 모든 씨보다 작은 것이로되 심긴 후에는 자라서 모든 나물보다 커지며 큰 가지를 내니 공중의 새들이 그 그늘에 깃들일 만큼 되느니라(31,32).\" 겨자씨는 볼펜으로 점을 찍어 놓은 정도로 작은 씨입니다. 그런데 거기에는 생명이 있습니다. 그래서 이를 심으면 4-7m가 되는 큰 나무로 자라나 피곤하고 지친 공중의 새들이 찾아와 쉼을 얻습니다. 성경에서 큰 나무는 왕국을 상징합니다. 공중의 새들이 그 가지에 깃든다는 것은 수많은 나라 백성들이 그리스도 왕국 안에 들어와 영적 쉼을 얻고 구원을 얻게 됨을 말씀합니다(겔17:23;31:5,6).

씨는 아무리 보잘 것 없어도 생명이 있기 때문에 귀합니다. 죽어 있는 것 같지만 다시 살아나고, 미미한 것 같으나 엄청난 역사를 이루는 것이 생명입니다. 생명은 거대한 바위도 깰 수 있고, 딱딱한 아스팔트도 헤칠 수 있습니다. 이것이 놀라운 생명이요, 신비입니다. 여기에 생명의 소중함, 생명의 능력, 생명의 위대함이 있습니다. 금시계와 콩 한 주먹은 교환의 가치 측면에서 보면 금시계가 귀하고, 생명적인 차원에서 보면 콩이 더 귀합니다. 교환의 가치를 귀히 생각하는 사람은 금시계를 택할 것이고, 생명을 귀한 것으로 생각하는 사람은 콩을 택할 것입니다. 그러나 외딴 섬에서 누구의 판단이 현명합니까? 금시계를 택한 사람은 굶어 죽고, 콩을 택한 사람은 생명을 보존할 것입니다.

예수님은 세상의 구주가 되시지만 말구유에서 초라한 한 아기로 태어나셨습니다. 이는 당시 천하를 호령하던 로마 제국과 비교해 볼 때 너무나 초라합니다. 작은 베들레헴, 갈릴리, 예루살렘에서의 예수님의 사역, 골고다에서 죽으신 사건 등은 인류 역사의 현장에서 보면 미미한 겨자씨와 같습니다. 신통치 못한 12제자를 놓고 시작한 역사 또한 겨자씨 역사와 같습니다. 거기에는 배반할 가룟 유다가 있습니다. 누가복음 12:32절을 보면 예수님은 그들을 \'적은 무리\' 라 하셨습니다. 그러나 복음에는 생명이 있습니다. 복음은 생명이 있기 때문에 자라나 온 세계를 정복했습니다. 복음 역사는 가장 작게 시작하여 가장 큰 것으로 이루어졌습니다. 사도 바울의 로마에서의 셋집 역사는 겨자씨와 같았지만 말씀은 생명이 있어 A.D. 313년에 로마를 정복했습니다. 또 두란노 서원에서의 일대일 공부는 미미한 겨자씨와 같았지만 말씀은 생명이 있어 소아시아를 정복했습니다. 한국 교회는 1885년 부활절에 언더우드 선교사님이 제물포항에 발을 내디딤으로 시작되었습니다. 언더우드와 아펜셀러는 같은 배를 타고 인천항에 도착했습니다. 그런데 그들은 누가 먼저 내릴 것인가 고민을 했다고 합니다. 그 때 언더우드가 \'내가 먼저 내리겠다\' 며 먼저 첫 발을 내디뎠습니다. 바로 이 한 분의 첫 발을 내디딤으로 복음 역사가 시작되었습니다. 이는 겨자씨 같지만 생명이 있어 한국 교회를 일으켜 세웠습니다. 이사무엘 선교사님과 배사라 선교사님으로부터 시작한 UBF 복음 역사도 처음에는 겨자씨와 같이 작고 미미했습니다. 그러나 말씀에는 생명이 있어 이제는 자라 세계 지성계에 큰 영향력을 끼치는 큰 모임으로 성장하게 되었습니다.

링컨을 위대케 한 것도 말씀을 통한 생명 역사입니다. 그는 8살 때 어머니를 여의었습니다. 그러나 그는 좋은 계모를 만나 성경을 읽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그는 불행하게도 14살 때 계모를 여의었습니다. 그는 많은 고생을 해야 했습니다. 그는 많은 시련과 역경 속에서도 말씀을 붙들었습니다. 그 때 그는 미국의 대통령이자 많은 사람들로부터 존경을 받는 인물이 되었습니다. 그를 위대케 한 것이 무엇입니까? 작은 포켓 성경입니다. 그는 대통령 취임식 때 나를 위대케 한 것은 계모가 선물한 포켓 성경이라며 포켓 성경을 꺼내 보여 주었다고 합니다. 성경은 그의 신앙 인격을 자라게 하였으며 큰 거목으로 키웠습니다.

말씀에는 생명이 있습니다. 말씀을 뿌릴 때 말씀 자체에 생명이 있기 때문에 언젠가는 놀라운 역사가 일어나게 됩니다. 우리는 하나님께서 겨자씨와 같은 이 백성, 젊은 지성인들을 통해 전 세계에 하나님 나라를 이루실 놀라운 환상을 보게 됩니다. 비록 우리의 믿음이 겨자씨와 같이 미미할지라도 목자 박사가 될 희망을 갖게 됩니다. 말씀의 씨를 뿌려서 어두운 이 세상에 하나님의 나라가 속히 이루어지기를 기도합니다.

마가복음 제 10 강(4:35-41)

어찌 믿음이 없느냐

\"예수께서 깨어 바람을 꾸짖으시며 바다더러 이르시되 잠잠하라 고요하라 하시니 바람이 그치고 아주 잔잔하여지더라(39).\"

사람들은 인생의 여정을 항해로 많이 비유합니다. 항해를 하다 보면 크고 작은 많은 사건들을 만나게 됩니다. 미풍도 만나고 큰 광풍도 만나게 됩니다. 이런 일련의 사건들을 만날 때 거기에 대한 자세도 천차만별합니다. 어떤 사람은 운명적이 되어 체념하고, 어떤 사람은 하나님을 원망하고, 부모를 원망하고, 그 상황을 원망합니다. 그리고 어떤 사람은 믿음으로 도전하여 마음의 평강을 찾습니다.

본문은 항해 중에 일어난 사건입니다. 항해 중에 갑자기 큰 광풍이 일어났습니다. 이 때 예수님은 고물에서 편안히 주무셨습니다. 반면에 제자들은 광풍 앞에 믿음을 잃어버리고 예수님을 원망하고 있습니다. \'선생님이여, 우리가 죽게 된 것을 왜 안 돌아 보십니까?\' 예수님은 제자들의 울부짖는 음성을 듣고 일어나셔서 말씀 한 마디로 큰 광풍을 잔잔케 하셨습니다. 그리고 제자들의 믿음 없음을 책망하셨습니다. \'어찌하여 두려워하느냐? 어찌하여 믿음이 없느냐?\' 이 사건을 통해 예수님은 창조주가 되셔서 모든 만물의 주관자요, 만물을 다스리는 주인이 되심을 드러내셨습니다. 모든 자연은 저절로 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피조물입니다. 창세기 1장 1절은 우리의 신앙 고백의 기초가 되어 우리는 \"전능하사 천지를 만드신 하나님 아버지를 믿사오며\" 로 신앙 고백을 합니다. 하나님은 창조주이십니다. 모든 만물의 근원, 만물의 목적, 만물의 종말이 하나님께 있습니다. 오늘 말씀을 통해 창조주 하나님을 믿음으로 어떤 역경 가운데서도 믿음을 잃지 않는 믿음의 용사가 되기를 기도합니다.

첫째, 심히 두려워하는 제자들(35-38). 예수님은 하루종일 말씀을 가르치시고 저녁 때가 되자 제자들에게 말씀하셨습니다. \"우리가 저편으로 건너가자!\" 그러자 제자들은 배를 준비하여 예수님을 태우고 항해를 시작했습니다. 그 날 따라 붉게 물든 저녁 노을은 장관이었습니다. 이곳 저곳에서 갈매기가 나르고, 물새들이 노래하며 산들바람까지 불었습니다. 실로 한 폭의 그림과 같았습니다. 제자들은 이제 30배, 60배, 100배의 결실을 얻을 수 있다는 희망과 겨자씨 비유를 통해 믿음의 거목이 될 소망에 부풀어 있었습니다. 그들은 신이 나서 힘차게 노를 저었습니다. 배는 잔잔한 호수를 미끄러지듯이 나아갔습니다. 그들의 입에서는 절로 찬송이 흘러 나왔습니다. 그들은 예수님의 제자가 되기를 잘 했다고 생각했습니다. 실로 행복의 순간이었습니다. 그러나 이 행복은 큰 광풍으로 인해 순식간에 깨어지고 말았습니다. 호수 한 가운데 이르렀을 때 잔잔한 물결이 갑자기 큰 광풍으로 돌변하여 파도가 일어 배를 삼킬 것만 같았습니다. \'큰 광풍\' 이란 헬라어로 메가톤급의 광풍을 말합니다(1메가톤 : TNT 100만톤의 에너지).

갈릴리 호수는 평소에는 거울처럼 맑고 잔잔합니다. 그러나 지정학적으로 볼 때 갈릴리는 지중해보다 200m나 낮고, 또 주위에 높은 산들로 둘러 싸여 있어 갑자기 바람이 불어 닥치면 요단 강이 하나의 굴뚝 역할을 해 더욱 더 세찬 바람으로 돌변한다고 합니다. 이 돌풍은 누구도 예측할 수 없습니다. 제자들은 어부 생활을 통해 이런 광풍을 자주 만나곤 했습니다. 그럴 때마다 그들은 어떻게 위기를 모면하곤 했습니다. 그러나 이번의 광풍은 예전과 달랐습니다. 그들은 옛 전공과 경험을 의지하여 큰 광풍으로 삼킬 듯 밀려 오는 세찬 파도와 싸웠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광풍을 제어할 수 없었습니다. 그들의 상식과 경험, 전공과 노력, 힘은 아무 소용이 없었습니다. 배가 금새 뒤집혀 죽을 것만 같았습니다. 광풍으로 인해 제자들의 내면에 두려움의 광풍, 의심의 광풍, 절망의 광풍이 일기 시작했습니다. 그들의 얼굴은 죽음의 공포로 사색이 되기 시작했습니다.

이런 위기 가운데 예수님은 무엇을 하셨습니까? 예수님은 하루종일 말씀을 가르치셨기 때문에 너무 피곤하셔서 배가 출발하자 곧 고물에서 베개를 베시고 주무셨습니다(38a). 이 안식은 열심히 일한 후에 맛볼 수 있는 안식입니다. 이 안식은 하나님을 전폭적으로 신뢰함으로 하나님 안에서 누릴 수 있는 참된 안식이요, 축복입니다. 예수님은 한 번도 하나님을 의심한 적이 없습니다. 예수님은 참혹한 십자가의 죽으심 앞에서도 하나님의 사랑을 의심치 않으셨습니다. 이 때 예수님은 어떤 상황에서도 참된 안식을 누릴 수 있으셨습니다. 생존경쟁과 불확실성의 시대에 살고 있는 많은 현대인들이 불면증에 시달립니다. 그러나 우리가 주님을 전폭적으로 신뢰하고 열심히 일대일 성경을 공부하고, 십자가를 힘써 감당할 때 방에 들어가는 순간 코를 골게 될 것입니다. 이는 행복 중의 행복입니다. 그러나 빈둥빈둥 노는 사람들은 단잠을 이룰 수 없어 빈대떡 신세가 되다가 악몽을 꾸게 될 것입니다. 하나님은 그 사랑하시는 자에게 단잠을 주십니다(시127:2).

이 때 제자들은 울부짖으며 예수님을 깨웠습니다. \"선생님이여 우리의 죽게 된 것을 돌아보지 아니하시나이까(38b)?\" 제자들은 모든 것을 버리고 예수님을 따랐습니다. 마태는 돈벌이가 좋은 세리 직업을 버리고 예수님을 좇았습니다. 그런데 갑자기 큰 광풍으로 죽게 된다고 생각하니 자신도 모르게 원망의 소리가 튀어 나왔습니다. 그들은 예수님을 믿지 않는 사람들이 탄 배에 큰 광풍이 이는 것은 이해가 가지만 예수님이 탄 배에 큰 광풍이 이는 것은 이해할 수 없었습니다. 그것도 예수님을 믿고자 모든 것을 버린 그들의 배에 광풍이 인다는 것은 이해할 수 없었습니다. 그들은 예수님을 믿으면 끝까지 잘 나가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우리는 이런 생각을 하는 제자들의 마음을 이해할 수 있습니다. 우리도 예수님을 믿으면 아프지 않고, 성적도 좋고, 돈도 많이 벌고, 좋은 직장도 구하고, 좋은 신랑감도 만나야 되는 등 잘 나가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예기치 않게 병마와 죽음, 화재, 교통사고, 아버지의 사업 실패, 부모님의 핍박, 성적이 저공 비행하다가 F학점의 미사일 맞는 등 어려움을 당할 때 하나님을 원망합니다. 그리고 광풍을 만날 때 죄를 져서 그런 것이 아닌가, 예수님을 믿지만 부처의 제자가 되어 인과응보적으로 생각합니다. 한사가랴 목자의 누님이 암으로 고생을 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많은 성도들이 \'남편인 정집사가 죄가 많아서 회개시키기 위함이다\' 한다고 합니다. 물론 죄에 대한 징계로 인한 광풍도 있습니다. 그러나 모든 광풍이 죄에 대한 하나님의 심판만은 아닙니다. 욥을 보면 욥이 죄를 져서 큰 시련을 만난 것은 아닙니다. 욥은 하나님을 사랑하는 의인이었습니다. 그런데 사단이 욥의 신앙을 시기하여 그를 넘어뜨리고자 시련을 준 것입니다. 그리고 믿음의 사람들에게 일어나는 일련의 광풍은 하나님의 선하신 뜻이 있다는 사실을 알아야 합니다. 하나님은 광풍을 통해서 우리의 믿음을 순수케 하시고 성숙하게 하십니다. 하나님은 광풍을 통해서 헛된 소망을 버리고 하나님 나라의 산 소망을 갖게 하십니다. 하나님은 광풍을 통해서 기도의 능력을 체험하도록 하시고 믿음의 용사로 키우십니다. 온실의 화초는 연약합니다. 그러나 風霜을 겪으며 자란 나무는 어떤 광풍 가운데서도 끄덕하지 않습니다. 사도 바울은 복음을 전하다가 여러 번 죽을 고비를 겪었습니다. 사도 바울은 광풍의 의미를 깨닫고 이렇게 말했습니다. \"이는 우리로 자기를 의뢰하지 말고 오직 죽은 자를 다시 살리시는 하나님만 의뢰하게 하심이라(고후1:9).\" 다윗도 광풍의 의미를 깨닫고 이렇게 노래했습니다. \"고난 당한 것이 내게 유익이라. 이로 인하여 내가 주의 율례를 배우게 되었나이다(시119:71).\"

그리고 광풍을 만날 때 예수님께서 모르시는 것은 아닌가 생각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우리의 광풍을 잘 알고 계십니다. 그러면 광풍을 왜 빨리 잔잔케 하지 않으셨는가, 제자들을 죽도록 고생시키시다가 도와 주시는 잔인하신 분이 아닌가 생각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한 가지 분명한 것은 예수님은 잔인하신 분이 아니고 사랑의 주님이시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광풍을 빨리 잔잔케 하시고 안 하시는 것은 하나님의 주권에 속한 것이라는 사실입니다. 그리고 여기에는 하나님의 선하신 뜻이 있음을 알아야 합니다. 요한복음 11장을 보면 예수님은 사랑하는 나사로가 죽었다는 소식을 듣고도 이틀이나 유하셨습니다. 그것은 마리아와 마르다에게 부활의 믿음을 심고자 하심입니다. 이처럼 예수님께서 큰 광풍을 즉시 잔잔케 하지 않으심은 제자들에게 광풍 중에도 요동치 않는 믿음을 심고자 하심입니다.

그들은 마땅히 주무시는 예수님을 더 염려해야 옳습니다. 그들은 두 눈을 뜨고 있습니다. 그들은 정 안 되면 배에서 뛰어 내려 헤엄을 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주무시고 계십니다. 속된 말로 예수님은 앉아서 당하실 수 있습니다. 그들이 정말 예수님의 제자라면 예수님을 더 걱정해야 옳습니다. 아니 주무시는 분을 깨워 위기를 모면토록 해야 옳습니다. \'예수님, 지금 이렇게 주무시면 위험합니다\' 이렇게 해야 옳습니다. 그런데 주무시는 분에게 원망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36절을 보면 다른 배들도 있습니다. 그들이 정말 목자라면 다른 배들의 사람들을 걱정해야 옳습니다. 그런데 자신들만 죽게 되었다고 원망하고 있습니다. 이처럼 원망은 자신만을 생각할 때 생깁니다. 남을 먼저 생각하면 결코 원망이 생기지 않습니다. 또 제자들의 원망은 자신들이 죽으면 하나님의 구원 역사는 끝장이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를 돌보지 않고 주무시는 것이 말이 되느냐입니다. 그러나 베드로가 빠져 죽어도 하나님의 구원 역사는 중단되지 않습니다. 베드로가 순교해도 하나님 나라는 확장됩니다. 하나님의 역사는 인간들의 형편에 따라 좌우되지 않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내가 죽으면 하나님의 역사가 끝장이다, 내가 역사가 동참하지 않으면 끝장이다, 내가 도망가면 하나님의 역사는 망한다\' 는 생각을 가질 수 있습니다. 저도 초기에 김바울, 윤요한, 김다윗 목자들이 모두 군에 갈 때 하나님의 역사가 망하는 것이 아닌가 걱정을 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 역사는 망하지 않았습니다. 하나님의 역사는 사람들에 의해 중단되거나 실패하지 않습니다. 광풍은 있어도 주님의 뜻은 이루어집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어떤 광풍 속에서도 예수님을 원망해서는 안 됩니다. 원망 섞인 기도를 하거나 또 남을 원망해서는 안 됩니다. 하나님의 선한 역사를 바라보고 감사할 수 있어야 합니다. 크리스챤에게 있어서 감사는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향하신 하나님의 뜻입니다. 감사는 그 사람의 신앙의 척도입니다. 절망 중에도 하나님의 뜻을 찾고 감사 기도해야 합니다. 환난 중에도 예수님의 능력을 의심치 말고 감사 기도해야 합니다. 고통 중에도 하나님께서 우리의 진정한 도움자가 되시고 피난처가 되심을 믿고 감사 기도해야 합니다.

둘째, 광풍을 잔잔케 하신 예수님(39-41). 예수님은 제자들의 원망의 절규를 들으시고 눈을 뜨셨습니다. 예수님께서 일어나셔서 먼저 무엇을 하셨습니까? 39절을 보십시오. 예수께서 깨어 바람을 꾸짖으시며 바다에게 명하셨습니다. \"잠잠하라! 고요하라!\" 그러자 바람이 그치고 아주 잔잔하여졌습니다. \'아주 잔잔하다\' 란 헬라어로 메카톤급의 잔잔함을 말합니다. 메카톤급의 광풍이 주님의 말씀 한 마디로 메가톤급의 잔잔함이 되었습니다. 이 예수님은 어떤 분이십니까?

첫째로 예수님은 자연을 지배하시는 권능자가 되십니다. 예수님께서 성난 파도를 향하여 \"잠잠하라! 고요하라!\" 명령하시자 즉시 멈췄습니다. 현대 과학이 아무리 발달하였다 할지라도 태풍의 발생 지점과 시간, 경로 등만을 알 수 있을 뿐 태풍을 잔잔케 할 수는 없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말씀은 권세가 있어 광풍을 잔잔케 하실 수 있습니다. 예수님은 천지를 창조하시고 지배하시는 창조주 하나님이십니다. 이 예수님은 태초에 말씀 한 마디로 천지를 창조하셨습니다. 혼돈과 공허와 흑암이 온 땅에 충만할 때 \"빛이 있으라\" 말씀하시자 순식간에 흑암의 세력이 물러가고 온 세상을 밝히는 빛이 생겼습니다. 우리가 어떤 광풍 속에서도 우리 주님의 음성을 들을 때 요동치 않습니다.

둘째로 예수님은 광풍을 꾸짖을 때 그 이면에 역사하는 사단의 세력을 꾸짖으셨습니다. \'잠잠하라\'는 말씀은 귀신을 내어 쫓을 때 쓰는 단어입니다. 사단은 예수님과 제자들을 바다에 빠뜨려 죽게 함으로 인류 구속 역사를 끝장내고자 했습니다. 그러나 사단이 결코 예수님이 타신 배를 파선시킬 수 없습니다. 예수님은 사망 권세를 파하신 부활의 권능자가 되시기 때문입니다. 사단은 기회만 있으면 우리를 믿음에서 떠나도록 미혹합니다. 그러나 사망 권세를 파하신 예수님과 함께 있는 한 그 어떤 세력도 우리를 넘어뜨릴 수 없습니다. 사도 바울은 이렇게 간증했습니다. \"우리가 알거니와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 곧 그 뜻대로 부르심을 입은 자들에게는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느니라(롬8:28).\" 계속하여 말씀합니다. \"누가 우리를 그리스도의 사랑에서 끊으리요, 환난이나 곤고나 핍박이나 기근이나 적신이나 위험이나 칼이랴 ....... 그러나 이 모든 일에 우리를 사랑하시는 이로 말미암아 우리가 넉넉히 이기느니라. 내가 확신하노니 사망이나 생명이나 천사들이나 권세자들이나 현재 일이나 장래 일이나 능력이나 높음이나 깊음이나 다른 아무 피조물이라도 우리를 우리 주 예수 안에 있는 하나님의 사랑에서 끊을 수 없으리라(롬8:35-38).\" 아멘.

예수님은 성난 광풍을 잔잔케 하시고 제자들을 위로하셔야 옳을 것 같습니다. 그러나 40절을 보십시오. \"이에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어찌하여 이렇게 무서워하느냐? 너희가 어찌 믿음이 없느냐?\" 예수님은 광풍에 대해서는 전혀 말씀하시지 않고 그들의 믿음 없음을 책망하셨습니다. 이는 풍랑이 문제가 아니라 나와 하나님과의 문제요, 믿음의 문제이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문제가 없을 때에 하나님을 조금도 불신하거나 원망하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제자들은 풍랑이 일자 믿음을 모두 잃어 버렸습니다. 광풍 앞에서 하나님을 보지 못했습니다. 하나님을 믿지 못했습니다. 이는 맑은 날씨에는 태양이 있지만 먹구름이 끼고 비바람이 칠 때에는 태양이 없다고 생각하는 것과 같습니다. 청명한 날씨에도 태양은 떠 있고, 비바람이 치는 날에도 태양은 구름 위에 항상 존재합니다. 다만 구름에 가리워서 보지 못할 뿐입니다. 이처럼 하나님은 우리의 상황에 따라 계시고 안 계시는 분이 아닙니다. 하나님은 항상 계십니다. 항상 우리와 함께 하십니다. 그러면 제자들의 믿음 없음을 책망하시는 예수님은 어떤 분이십니까?

첫째로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두려움을 극복하도록 하셨습니다. 믿음이란 무엇입니까? 믿음이란 예수님을 신뢰하고 의지하는 것입니다. 믿음이란 어떤 상황에서도 독생자를 주신 그 크신 사랑을 의심치 않는 것입니다. 독생자를 주신 하나님께서 세상 끝날까지 나와 함께 하심을 의심치 않는 것입니다(마28:19,20). 예수님께서 그들을 부르신 것은 제자 1년만에 물고기 밥이 되도록 부르신 것이 아닙니다. 그런데 그들은 두려움 앞에서 예수님의 사랑과 소망, 지금까지 체험한 믿음의 역사를 광풍에 다 날려 보냈습니다. 낮에 공부했던 은혜로운 말씀을 까맣게 잊어 버렸습니다. 믿음이란 실전에 강해야 됩니다. 청명한 날씨에 믿는다면 폭풍우 치는 칠흑 같은 밤에도 믿어야 됩니다. 그러나 그들은 두려움 앞에 불신자처럼 되었습니다. 바로 믿음으로 산다는 것은 두려움을 극복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들은 두려움을 이기지 못했습니다. 사람이 두려움에 사로 잡힐 때 마음이 오그라들고, 손발이 마비되고, 생각이 부정적으로 됩니다. 원망하고 완악해집니다. 갑자기 얼굴이 어두워지고, 미친 행동을 합니다. 사람이 두려움에 사로 잡히면 능히 할 수 있는 것도 못합니다. 하나님은 이 두려움을 가장 싫어하십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 쓰임받기 위해서는 두려움을 반드시 극복해야 됩니다.

우리에게는 많은 두려움이 있습니다. 장래에 대한 막연한 두려움이 있습니다. 핍박에 대한 두려움, 자녀들의 교육에 대한 두려움, 직장에 대한 두려움, 건강에 대한 두려움, 물질에 대한 두려움, 자신의 성격으로 사회 생활을 잘할 수 있을까 하는 두려움, 경쟁적인 사회에서 믿음으로 살다가 망하는 것이 아닌가 하는 두려움 등이 있습니다. 그런데 현대 의학과 과학이 아무리 발달했어도 두려움을 해결할 수 없고, 다만 그 증상만 알 뿐입니다. 그러나 주의 말씀은 나의 내면에 두려움을 해결할 수 있습니다. 다윗은 그 생애에 많은 죽을 고비가 있었습니다. 그 때 그는 자신의 힘과 의지로는 내면의 두려움을 해결할 수 없었습니다. 그러나 그가 힘되신 하나님을 만났을 때 그의 내면에 모든 두려움을 극복할 수 있었습니다. 그는 이렇게 노래했습니다. \"나의 힘이 되신 여호와여! 내가 주를 사랑하나이다. 여호와는 나의 반석이시요, 나의 요새시요, 나를 건지시는 자시요, 나의 하나님이시요, 나의 피할 바위시요, 나의 방패시요, 나의 구원의 뿔이시요, 나의 산성이시로다(시18:1,2).\" 모세는 넘실대는 홍해를 앞에 두고, 철병거로 무장한 애굽 군사들의 추격을 받으며 두려워 떠는 백성들을 향해 외쳤습니다. \"너희는 두려워 말고 가만히 서서 여호와께서 오늘날 너희를 위하여 행하시는 구원을 보라. 너희가 오늘 본 애굽 사람을 또 다시는 영원히 보지 못하리라(출14:13).\" 예수님은 두려움을 물리칠 수 있는 근원이 되십니다.

둘째로 예수님은 제자들이 믿음의 능력을 갖기를 원하셨습니다. \"너희가 어찌 믿음이 없느냐?\" 이 말씀은 믿음의 능력을 가지라는 말씀입니다. 한 마디로 믿음은 능력입니다. 믿음이 있을 때 어떤 광풍 가운데서도 요동치 않습니다. 그러나 믿음이 없는 자는 미풍 앞에서도 짠물을 마시고 익사하게 됩니다. 우리가 믿음만 있으면 어떤 인생의 광풍도 이기고 하나님 나라를 향해 힘차게 항진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을 믿으라(막11:22).\" 태산을 옮길 수 있고 역경을 이길 수 있습니다. 히브리서 11장을 보면 믿음의 영웅들이 나옵니다. \"또 어떤 이들은 희롱과 채찍질 뿐 아니라 결박과 옥에 갇히는 시험도 받았으며 돌로 치는 것과 톱으로 켜는 것과 시험과 칼에 죽는 것을 당하고 양과 염소의 가죽을 입고 유리하여 궁핍과 환난과 학대를 받았으니 이런 사람은 세상이 감당치 못하도다. 저희가 광야와 산중과 암혈과 토굴에 유리하였느니라(히11:36-38).\" 믿음의 용사들은 믿음으로 세상의 모든 악을 이겼습니다. 그들은 믿음으로 모든 연약함을 극복하고, 절망을 극복하고, 불가능을 극복하고 새 역사를 창조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430년간 노예 생활로 인하여 노예 근성에 찌들어 있었습니다. 그들은 틈만 있으면 헛 생각을 했습니다. 그들은 육신적이었습니다. 그들은 내일이 없었으며 희망이 없었습니다. 그러나 훈련을 받고 믿음의 사람들이 되었을 때 100만 대군이 홍해를 육지 같이 건널 수 있었습니다. 노예 백성에서 강한 하나님의 군사가 되었습니다. 믿음은 사람의 생각, 사상, 습관, 철학 등을 180도 바꾸어 놓습니다. 우리는 캠퍼스의 상황을 보고 절망합니다. 여름 수양회를 준비하고자 할 때 양들의 형편과 자신의 형편을 바라보고 절망합니다. 그러나 우리가 믿음만 있으면 상황이 문제가 아닙니다. 우리가 믿음만 있으면 summer ministry를 능히 이룰 수 있습니다. 믿음이란 불가능에 도전하는 것입니다. 믿음이란 불가능을 가능케 하는 것입니다.

셋째로 제자들을 강한 믿음의 용사로 키우셨습니다. 파도가 휘몰아칠 때 예수님의 얼굴에 바닷물이 덮쳐 예수님도 잠이 깨셨을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이론적인 믿음보다 실제적인 믿음을 심고자 제자들을 광풍으로 몰아 넣으셨습니다. 예수님은 광풍 훈련을 통해서 광풍이 많은 시대에 요동치 않고 믿음의 용사들이 되기를 원하셨습니다. 사자가 백수의 왕자가 되고, 독수리가 하늘의 왕자가 되는 것은 우연히 되는 것이 아니라 피나는 훈련을 통해서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때로 우리가 광풍을 만나 고통하고 있을 때 침묵하시기도 합니다.

제자들은 이 사건을 통해서 예수님을 기이히 여기고 예수님의 인격에 대해 관심을 갖게 되었습니다. \"저희가 심히 두려워하여 서로 말하되 저가 뉘기에 바람과 바다라도 순종하는고 하였더라(41).\" \'심히 두려웠다\' 는 것은 메카톤급의 경외심을 말합니다. 그리고 그들은 지금까지 예수님의 인격에 대해서는 별로 관심이 없고, 사건에 관심이 많았습니다. 그러나 이제 제자들의 마음에 놀라운 변화가 일어났습니다. 제자들은 예수님을 경외하고 예수님의 인격에 관심을 갖기 시작했습니다. \'예수님은 누구신가?\' 이는 후에 예수님을 그리스도로 영접하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예수님은 말씀으로 광풍을 잔잔케 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자연까지도 지배하시는 전능하신 하나님이십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을 믿음의 용사로 키우십니다. 예수님은 앞으로 닥칠 무서운 풍랑 속에서도 요동치 않는 믿음의 용사로 키우십니다. 전능하신 하나님을 믿음으로 믿음의 용사들이 되기를 기도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