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6강 마가복음 5장 강해


소녀야 일어나라


마가복음  (5:21-24,35-43)



\"그 아이의 손을 잡고 가라사대 달리다굼 하시니 번역하면 곧 소녀야, 내가 네게 말하노니 일어나라 하심이라(41).\"

Happy Easter! 오늘은 예수님께서 사망 권세를 파하시고 부활하신 날입니다. 부활하신 예수님을 찬양합니다. 본문에는 시름시름 앓다가 죽은 소녀가 나옵니다. 죽음은 사람들을 슬프게 합니다. 죽음은 사람들을 무기력하게 하고 두렵게 합니다. 죽음은 사람들을 한계적이게 하고 허무하게 합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죽은 자를 살리셨습니다. \"소녀야 내가 네게 말하노니 일어나라.\" 이에 소녀가 곧 일어나 걸어갔습니다. 예수님은 생명의 수여자, Life-Giver, 생명의 근원이십니다. 이 시간 말씀을 통해 생명의 수여자되시는 예수님을 깊이 영접하기를 기도합니다.

첫째, 예수님께 간구한 회당장 야이로(21-24). 예수님께서 무리들을 돕기 위해 바닷가에 계셨을 때 무리 가운데서 황급히 달려 나온 한 사람이 있었습니다. 그는 바로 회당장 야이로였습니다. 유대 사회는 회당을 중심으로 이루어졌습니다. 회당장은 회당 건물을 유지하고 보존할 뿐만 아니라 안식일마다 예배를 섬기고 모든 행정적인 업무를 맡아 감당했습니다. 가벼운 재판을 하는 업무도 수행했습니다. 회당장은 평신도들이 감당하였는데 백성들로부터 존경받는 명예로운 직분이었습니다. 야이로는 회당장으로서 근엄하고 위엄 있게 보이기 위해서 턱수염도 기르고, 품위 있는 긴 예복을 입었을 것입니다. 야이로는 조금도 부족함이 없이 행복한 삶을 영위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어느날 예기치 않게 야이로의 가정에 어두움의 그림자가 찾아왔습니다. 그것은 금이야 옥이야 키우던 사랑스러운 딸이 원인 모를 병에 걸려 시름시름 앓아 죽어 가게 된 것이었습니다. 그의 딸은 12살로 막 피어나는 꽃봉오리와 같이 아름답게 자라나고 있었습니다. 사람들의 보기에도 귀여운데 아버지 야이로에게는 이 딸이 얼마나 귀여웠겠습니까? 고된 하루 일을 끝내고 집으로 돌아왔을 때 딸이 \'아빠\'하고 부르면 모든 피로가 싹 가시고 무한한 삶의 행복을 느꼈을 것입니다. 딸은 그에게 기쁨의 대상이었습니다. 그런데 이러한 딸이 열이 40도를 오르내리며 죽어 가는 것이었습니다. 용하다는 의사를 불러 보았지만 아무 소용이 없었습니다. 죽음의 사자가 시시각각 어린 딸에게 다가올 때 그는 절망의 늪으로 빠져들기 시작했습니다. 이런 절망적인 상황에서 그가 할 수 있는 일이라고는 아무 것도 없었습니다. 그러나 그는 가만히 앉아만 있을 수 없었습니다. 그는 믿음으로 예수님께 나아갔습니다. 야이로는 절망적인 상황 가운데서 예수님이 오셨다는 소문을 들었습니다. 그는 소문을 듣자마자 회당장 웃옷을 입을 겨를도 없이 예수님께 달려갔습니다. 그리고 많은 사람들이 보는 앞에서 예수님의 발 아래 엎드려 많이 간구했습니다. \"내 어린 딸이 죽게 되었사오니 오셔서 그 위에 손을 얹으사 그로 구원을 얻어 살게 하소서. 예수님, 제발 와 주세요, 와 주세요?\" 그가 이렇게 예수님께 나아와 간구한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었습니다. 그에게는 회당장으로서의 위신과 체면이 있습니다. 사람들은 위신과 체면을 매우 중요시 여깁니다. 어떤 아버지는 자식에게 \"자존심이 꺾이는 날 자살하라\" 유언을 남겼다고 합니다. 자존심 때문에 죽으면 죽었지 도움을 요청하지 않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우리 가운데도 예수님께 나오면 예수님이 우리의 모든 죄를 해결하신다는 것을 알면서도 자존심 때문에 남들이 나의 내면을 알면 어떻게 할까 하는 두려움 때문에 예수님께 나오지 못하는 분이 있습니다. 그러나 야이로는 모든 자존심을 다 버리고 예수님께 나아와 겸손하게 도움을 요청했습니다. 그는 겸손의 사람이었습니다.

또 당시 종교지도자들은 예수님에 대해서 비판적이고 적대적이었습니다. 이런 시대 분위기 가운데서 공개적으로 예수님께 나아오는 것은 그들에게 미움을 사서, 그 사회에서 매장될 지도 모르는 위험한 일이었습니다. 그러나 야이로는 이 모든 것에도 불구하고 다만 믿음으로 예수님께 나아왔습니다. 야이로는 예수님을 절대적으로 믿고 신뢰하고 존경하고 사랑했습니다. 그에게는 예수님이 오셔서 딸의 머리에 손을 얹고 기도하기만 하면 나을 것이라는 믿음이 있었습니다. 그는 믿음의 사람이었습니다.

그리고 그는 딸에 대한 애정이 있었습니다. 아버지가 딸을 사랑하는 것은 당연한 것이라고 생각할 지 모릅니다. 그러나 오늘날 이 시대의 가장 심각한 문제 중의 하나가 아버지 문제입니다. 많은 사람들의 소감을 들어보면 아버지 문제로 큰 고통을 당하여 아버지를 미워하는 사람들이 의외로 많은 것에 놀라게 됩니다. 또 미국이나 소련이나 멕시코에서는 무책임하게 이혼하여 자식들에게 깊은 상처를 주는 아버지들이 많습니다. 러시아는 이혼한 가정이 70%나 되어 대부분의 학생들이 아버지 없이 어머니하고만 살고 있다고 합니다. 그러나 야이로는 자기보다 딸을 더 생각했습니다. 그는 딸에 대한 애정이 있었습니다. 그는 좋은 아버지였습니다.

예수님께 대한 믿음과 딸에 대한 애타는 아비의 심정은 그로 하여금 체면과 자의식과 모든 어려움을 뛰어 넘어 주님께 나아가 간절히 기도하게 했습니다. 유대인은 12살이면 성년취급을 합니다. 우리는 대학 1,2학년 때 성년식을 합니다. 막 피어나는 대학 지성인들은 본문에 나오는 딸과 같다고 볼 수 있습니다. 이런 청순한 젊은이들이 시름시름 죽어 가고 있습니다. 어떤 분은 깊은 열등감과 관계성 문제로 시름시름 앓고 있습니다. 어떤 분은 인생의 방향을 몰라 시름시름 앓고 있습니다. 어떤 분은 육신의 쾌락으로 시름시름 앓고 있습니다. 깊은 시기심과 운명으로 앓고 있습니다. 저는 한 형제님을 알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 분은 사람과의 관계성 문제로 하루종일 기숙방에서 컴퓨터와 지냅니다. 이로 인해 고독으로 시름시름 앓고 있습니다. 이처럼 지성인들은 각기 많은 문제를 안은 채 살아 가고 있습니다. 이들을 어떻게 도울 수 있습니까? 예수님께 대한 믿음과 양들에 대한 아비의 마음이 있을 때 그들을 도울 수 있습니다. 애타는 목자의 심정이 있을 때 도울 수 있습니다. 간절한 심정을 가지고 예수님께 나아와 기도할 때 도울 수 있습니다. 이런 목자를 둔 사람들은 반드시 살아납니다. 우리가 이 시대 지성인들의 선한 목자요, 영적인 아비요, 어미가 되어서 지성인들의 문제를 가슴에 품고 예수님께 나아가 기도함으로 그들이 치료되기를 기도합니다.

둘째, 소녀야! 일어나라(35-43). 예수님께서 노중에서 혈루증 앓는 여인을 고쳐 주고 계실 때 회당장의 집으로부터 사람들이 와서 절망적인 소식을 알려 주었습니다. \"회당장님! 죽었어요, 죽었어. 영자가 죽었어요. 이젠 끝났어요, 끝났어.\" 그들의 말은 딸이 죽었으니 예수님을 더 괴롭게 하지 말고 빨리 가서 장례식을 치를 준비나 해야 된다는 것이었습니다. 이들은 예수님을 크게 생각해 주는 것 같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예수님께서 병든 사람은 살릴 수 있지만 죽은 사람은 살릴 수 없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들은 예수님의 능력을 제한했습니다. 그러면 \'죽었나이다\' 이 말이 주는 뜻이 무엇입니까? 이 말은 일말의 가능성이 완전히 사라졌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조금이라도 살아 있으면 어떻게 해 보겠는데 이제 희망이 없다는 것입니다. 끝났다는 것입니다. \'죽었다\'는 소리에 야이로의 온 몸은 힘이 쫙 빠져 몸을 가눌 수가 없었습니다. 그리고 죽음은 영원한 이별을 의미합니다. 사랑하는 딸을 다시 볼 수 없다고 생각하니 그는 한 없는 슬픔에 하염 없이 흐르는 눈물을 주체할 수가 없었습니다. 사랑하는 사람을 다시 볼 수 없는 것처럼 큰 슬픔은 없을 것입니다. 우리 어머니들은 자식을 군대 보낼 때 몰래 눈물을 흘리십니다. 그러나 통닭 싸들고 면회가서 다시 만날 수 있다는 희망 때문에 슬퍼하지 않습니다. 부모님들은 곱게 키운 딸을 시집 보낼 때 눈물을 흘립니다. 그러나 다시 만날 수 있기에 슬퍼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당신의 딸이 죽었나이다\' 하는 말을 들었을 때 그는 절망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이처럼 죽음은 우리의 소망을 송두리째 앗아갑니다. 죽음은 우리에게 무기력을 심어 줍니다. 무엇보다 죽음은 야이로의 마음 가운데 죽음에 대한 공포를 심어 주었습니다. 36절에서 예수님이 야이로에게 \"두려워 말고 믿기만 하라\" 하신 것을 보면 야이로의 마음에 얼마나 많은 두려움이 생겼는가를 알 수 있습니다. 이 두려움은 죽음으로 인해 오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 두려움은 사단이 심어 주는 것입니다. 사단은 사람들의 말을 통해 야이로의 마음에 두려움을 심었습니다. 회당장의 집에서 온 사람들의 말은 야이로를 위하고 예수님을 위하는 말 같지만 실상은 야이로의 마음에 두려움을 심었습니다. 이는 간교한 사단의 역사였습니다. 예수님은 하인들이 하는 말을 옆에서 들으시고 야이로의 마음 속에 불신과 두려움이 자리잡기 전에 재빨리 믿음을 심으셨습니다. \"두려워 말고 믿기만 하라(36).\"

우리에게는 여러가지 두려움, 공포가 있습니다. 높은 곳에 올라갈 때 느끼는 고공공포증, 넓은 곳에 나아갈 때 느끼는 공간공포증, 사람 앞에 나아가면 수줍어져서 얼굴이 붉어지는 홍안공포증, 혼자 있으면 무슨 일이 일어날 것 같은 독거공포증, 조금 아프면 혹시 요절하는 것이 아닌가, 암은 아닌가 하는 통증공포증이 있습니다. 무엇보다도 장래에 대한 두려움이 있습니다. 취직과 건강에 대한 두려움, 학점에 대한 두려움, 결혼에 대한 두려움, 자녀에 대한 두려움, 세상 아내들은 남편들이 바람을 피우지 않을까 하는 두려움이 있습니다. 두려움이 생기면 매사에 소심해지고 확신이 없습니다. 객관성을 상실하여 즐거운 일이 있어도 즐겁지 않고, 맛있는 음식을 먹어도 맛이 없고, 은혜스러운 말씀을 들어도 감동이 없습니다. 심리적으로 불안하여 눈이 커지고, 신경이 예민해져 신경질을 부립니다. 원망하고 불평합니다. 이처럼 두려움은 인간을 병들게 하고 인간의 실존을 상실케 합니다. 두려움은 우리를 멸망의 길로 인도하는 가장 큰 원수입니다. 하나님은 두려워하는 자를 가장 싫어하십니다. 계시록 21:8절에 보면 두려워하는 자는 지옥행 제 1 호입니다. 반면에 믿음은 힘과 능력을 줍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것은 두려워하는 마음이 아니요 오직 능력과 사랑과 근신하는 마음입니다(딤후1:7). 그러므로 신앙 생활이란 두려움과 싸우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두려움의 영에 사로 잡혀 있는 우리에게 명령하십니다. \"두려워 말고 믿기만 하라(Don\'t be afraid, just believe!).\"

그러면 두려움은 어디서 온 것입니까? 창세기에 보면 하나님은 우리 인간을 위해 아름다운 에덴 동산을 창조하시고 그 곳에서 축복을 마음껏 누리도록 하셨습니다. 그런데 아담의 하나님께 대한 불순종과 죄를 범함으로 인간의 내면에는 두려움이 들어왔습니다. 두려움은 하나님과의 관계성 단절에서 옵니다. 그러므로 두려움을 해결하는 방법은 하나님과 올바른 관계성을 맺는 것 밖에 없습니다. 똑같은 상황과 사건 속에서도 하나님과 올바른 관계성을 맺은 자들은 그 내면이 담대합니다. 반면 하나님을 바라보지 못하는 자들은 두려워합니다. 민수기 13장에 보면 이스라엘 12지파 두령들이 가나안 땅을 정탐한 후 보고하는 장면이 나옵니다. 10두령들은 장대한 아낙 자손을 보고 두려움에 사로 잡혀 이렇게 보고했습니다. \"우리가 가나안 땅에 가 보니 그 곳은 과연 젖과 꿀이 흐르는 땅이더이다. 그러나 그 땅 거민은 강하고 성읍은 견고하고 심히 클 뿐 아니라 그 곳에 사는 백성들은 신장이 장대하고 아낙 자손은 대장부로서 우리는 스스로 보기에도 메뚜기 같더이다(민13:27-33).\" 불신에 찬 보고를 들은 백성들은 절망에 빠져 밤새도록 통곡하며 울었습니다. 하나님은 두려워하는 그들에게 어느 때까지 이들이 나를 멸시하겠느냐고 무섭게 진노하셨습니다. 두려워하는 것은 하나님을 멸시하는 것입니다. 두려워하는 것은 하나님의 능력을 믿지 못하는 불신에서 옵니다. 하나님은 그들에게 진노하셔서 모두 광야에서 엎드러지게 하셨습니다. 그러나 믿음의 용사 여호수아와 갈렙은 달랐습니다. 그들은 두려워하며 동요하는 백성들을 안돈시키며 말했습니다. \"우리가 곧 올라가 그 땅을 취하자. 능히 이기리라. 그들은 우리 밥이라. 그들의 보호자는 그들에게서 떠났고 여호와는 우리와 함께 하시느니라. 그들을 두려워 말라.\" 이처럼 하나님께 대한 믿음이 있을 때 상황과 조건은 전혀 문제가 되지 않습니다. 믿음으로 승리할 수 있습니다. 그러면 \'믿기만 하라\' 는 말씀의 뜻이 무엇입니까?

야이로는 처음에는 믿음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사람들의 불신의 소리로 인해 믿음이 흔들리고 있습니다. 예수님은 처음 소유했던 믿음을 계속 소유할 수 있기를 원하십니다. 예수님은 상황에 따라서 믿음이 흔들리지 않기를 원하십니다. 믿음이란 어떤 상황에서도 요동치 않는 것입니다. 그러면 우리가 어떻게 해야 믿음의 용사가 될 수 있습니까? 예수님께 대한 믿음이 있을 때입니다. 예수님은 천지를 창조하시고 천지를 주관하시는 권능의 주님이십니다. 예수님을 믿는 믿음이 있을 때 어떤 두려움도 이길 수 있습니다. 이 시간도 나와 함께 하시는 하나님, 나를 보호하여 주시는 하나님, 나의 방패가 되어 주시는 하나님, 권능의 하나님을 믿을 때 어떤 상황에서도 담대한 믿음의 용사가 될 수 있습니다.

야이로에게 믿음을 심으신 예수님은 베드로와 야고보와 요한만 데리시고 집으로 가셨습니다. 야이로의 집에 갔을 때 분위기가 어떠했습니까? 야이로의 집에는 훤화하는 소리와 울며 통곡하는 소리로 가득했습니다. 울음 바다였습니다. 그들은 죽음 앞에 절망하며 슬퍼했습니다. 그들은 죽은 아이의 어머니를 위로하며 같이 울어 주었습니다. \'영자 어머니, 실컷 울으세요!\' 초상집에서는 같이 울어 주는 것이 최고의 미덕입니다. 아이의 아버지인 야이로가 도착한 것을 보자 사람들은 더욱 큰 소리로 울었습니다. 이는 부활의 소망이 없는 현장을 말해 주고 있습니다. 이 때 예수님은 무엇이라 말씀하십니까? 39절을 보십시오. \"너희가 어찌하여 훤화하며 우느냐 이 아이가 죽은 것이 아니라 잔다.\" \'어찌하여 우느냐?\' 이 말씀은 울고 있는 그들을 책망하시는 말씀입니다. 이제 더 이상 울 필요가 없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믿지 못하는 그들의 믿음 없음을 안타까워 하시는 음성입니다. 예수님 안에는 죽음이 없습니다. 그러므로 울 필요가 없습니다. 잔다는 뜻이 무엇입니까? \'잔다\'는 것은 다시 깨어남을 전제로 하는 말씀입니다. 다시 깨어나기 때문에 우리는 틈만 있으면 잠을 잡니다. 지금 이 예배 시간에도 틈틈이 자는 분이 있습니다. 사람이 죽었을 때 예수님이 없는 곳과 예수님이 계신 곳은 완전히 다릅니다. 예수님이 없는 곳은 절망과 허무와 슬픔과 체념이 지배하지만, 예수님이 계신 곳은 잠시 이별하는 슬픔은 있지만 하늘 나라에서 다시 만날 수 있다는 희망과 더 좋은 곳으로 가서 영원한 안식을 누리기 때문에 감사와 찬송으로 가득 차게 됩니다. 믿음이 좋으신 4자녀의 어머니가 있었습니다. 그녀는 임종을 앞두고 4자녀 앞에서 인사를 했습니다. 그런데 3자녀에게는 \'good-night\'하고 인사했는데 한 자녀에게만 \'good-bye\'하고 인사했습니다. 그래서 그 자녀는 물었습니다. \'어머니 왜 저에게만 good-bye하고 인사하십니까?\' 그 때 어머니는 대답했습니다. \'네 형과 동생들은 예수님을 믿기 때문에 다시 하나님 나라에서 만날 수 있지만 너는 예수님을 안 믿으니 이것이 영원한 이별이어서 good-bye라고 인사해야 되겠구나!\' 이 때 그 자녀는 회개하고 예수님을 믿었다고 합니다. 이처럼 예수님 안에서의 죽음은 다시 만난다는 희망이 있기 때문에 슬프지 않습니다. 깨어 보니 하나님 나라에서 다시 만나게 되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아이가 잔다고 말씀하시자 사람들은 비웃었습니다. 이에 예수님은 불신하는 자들을 다 내어 보내시고 세 제자들과 아이의 부모만 데리고 가셨습니다. 그리고 죽은 아이의 손을 잡고 말씀하셨습니다. \"달리다굼!\" \"소녀야 내가 네게 말하노니 일어나라!\" 이 때 소녀는 곧 일어나 걸었습니다. 죽은 아이는 생명의 주의 음성을 듣고 일어났습니다. 예수님은 생명의 수여자, Life Giver가 되셨습니다. 야이로의 딸을 살리신 예수님은 생명의 근원이시요, 부활의 주님이십니다. 창세기 2:7절은 말씀하십니다. \"하나님이 흙으로 사람을 지으시고 생기를 그 코에 불어 넣으시니 사람이 생령이 된지라.\" 예수님은 우리 인생들에게 생명을 수여하시는 생명의 수여자가 되십니다. \"소녀야, 내가 네게 말하노니 일어나라!\" 요한복음 5:25절은 말씀하십니다.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죽은 자들이 하나님의 아들의 음성을 들을 때가 오나니 곧 이 때라. 듣는 자는 살아나리라.\" 말씀을 들을 때 죽은 자들이 살아납니다. 말씀을 들을 때 죽은 영혼이 소생합니다. 사람들은 자기의 기호에 맞는 말만 듣고자 합니다. 먹는 이야기나 결혼 이야기는 은밀히 이야기해도 잘 듣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말씀을 들어야 됩니다. \'듣는다\'는 것은 \'귀를 기울인다, 경청한다, 순종한다, 관심을 갖는다, 겸허하게 배운다\' 는 뜻으로, 말씀에 대한 자세를 말합니다. \'듣는다\'는 것은 \'말씀을 사랑한다\' 는 뜻입니다. 그런데 말씀을 들어도 듣지 못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이는 어렵고 힘들어서 못 듣는 것이 아니라 듣는 자세의 문제입니다. 우리는 말씀 앞에 겸손해야 합니다. 말씀을 듣고 순종하면 생명과 구원의 역사가 일어납니다. 말씀은 살아서 운동력이 있습니다. 말씀은 좌우에 날선 어떤 검보다도 예리하여 혼과 영과 및 관절과 골수를 찔러 쪼갤 수 있습니다. 말씀은 마음의 생각과 뜻을 감찰할 수 있습니다(히4:12). 말씀은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에 이르는 지혜가 있습니다. 듣고 순종하면 죽은 자들이 살아납니다. 한 말씀이라도 듣고 순종하면 살아납니다. 한 말씀이라도 영접하기만 하면 구원을 받습니다. 상한 마음이 치료됩니다. 패인 마음이 매꿔집니다. 열등감이 치료됩니다. 소녀가 생명의 수여자 예수님으로 인해 이제는 모든 사람들에게 기쁨과 감격을 주었습니다. 예수님은 생명의 수여자가 되십니다.

예수님은 말씀하십니다. \"내가 네게 말하노니 일어나라!\" \"달리다굼!\" 죄악에 잠자는 우리 영혼을 깨우십니다. 잠들어 있는 우리 영혼을 흔들어 깨우십니다. 우리 중에 어떤 사람은 캄캄한 길을 홀로 걸어가다 지치고 곤하여 깊은 잠이 들었습니다. 어떤 사람은 어두운 죄악의 길을 걸어가다 상하고 찢기어 깊이 잠들어 있습니다. 어떤 분은 세상을 향해 마음대로 고집하며 가다가 길을 잃어 방황하는 영혼도 있습니다. 어떤 분은 절망과 슬픔 속에 잠 들어 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말씀하십니다. \"달리다굼!\" \"깨어라, 일어나라, 걸어가라!\" 예수님의 말씀으로 살아나기를 기도합니다.

예수님은 마른 막대기에서 싹이 나게 하시고 반석에서 샘물이 나게 하십니다. 예수님은 죽은 영혼을 깨우시고 소생시키시는 생명의 수여자가 되십니다. 이 예수님으로 말미암아 우리 영혼이 소생하고 걸어가는 아름다운 역사가 있기를 기도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