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으니라 마가복음 제 13 강(5:24-34) \"예수께서 가라사대 딸아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으니 평안히 가라. 네 병에서 놓여 건강할지어다(34).\" 예수님께서 병자를 고치신 사건들을 보면 환자들이 예수님을 찾아오기도 하고, 예수님께서 몸소 찾아가시기도 했습니다. 그 때마다 예수님께서 치유해 주셨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그들을 치유하실 때 인간 조건을 보지 않고 그들의 믿음을 보고 치유하십니다. 본문에서 예수님께서 혈루증 앓는 여인을 구원하신 것도 여인의 믿음을 보시고 치유하셨습니다. 그녀는 믿음의 여인이었습니다. 그녀가 예수님께로 나갈 수 있었던 것도 믿음이요, 예수님께 나가 예수님의 옷자락을 만진 것도 믿음입니다. 예수님은 이 여인의 믿음을 보시고 병든 내면과 병든 몸을 온전히 치유해 주셨습니다. 본문을 통해 우리가 믿음으로 예수님께 나아가 내면의 질병, 육신의 질병을 치유할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예수님은 회당장 야이로의 간절한 기도와 믿음을 보고 그의 딸을 고쳐 주시고자 야이로의 집으로 향하셨습니다(24). 이 때 많은 사람들이 예수님을 따라가며 에워싸 밀었습니다. 이 무리 가운데에는 밀고 밀리면서 남몰래 예수님께로 한 걸음 한 걸음 다가오는 한 여인이 있었습니다. 그녀는 어떤 여인입니까? 첫째로 이방 여인입니다. 25,26절을 보십시오. \"열 두 해를 혈루증으로 앓는 한 여자가 있어 많은 의원에게 많은 괴로움을 받았고, 있던 것도 다 허비하였으되 아무 효험이 없고, 도리어 더 중하여졌던 차에\" 유세비우스의 역사가에 의하면 이 여인은 가이사랴 빌립보에서 온 이방 여인이라고 합니다. 당시 유대인들에게 비쳐진 이방인은 버려진 존재였습니다. 하물며 이방 여인은 말할 것도 없습니다. 유대인들은 어린 아이들과 함께 여인들을 셈에 넣지 않았습니다. 여자의 생명쯤은 아주 대수롭지 않게 여김을 받던 시대에 살아가던 여인이었습니다. 둘째로 건강을 잃어 버린 여인입니다. 건강을 잃는다는 것은 모든 것을 다 잃어 버린 것이나 다름이 없습니다. 우리가 돈과 명예와 권세, 아기자기한 가정이 있다 할지라도 건강을 상실할 때 이런 것들은 아무 소용이 없습니다. 건강을 잃는다는 것은 우리가 소유하고 있는 몇 가지 중에 한 가지를 잃는 것이 아니라 모든 것을 다 잃는 것과 똑같습니다. 본문에 나오는 여인은 혈루증으로 12년간 고질병을 앓고 있습니다. 혈루증은 끊임 없이 출혈하는 부인병 중의 하나입니다. 그는 병을 고치기 위해 유명하다는 병원은 다 찾아가 보았지만 아무 효험을 얻지 못했습니다. 오히려 의사들은 병을 고치지도 못하면서 돈만 꼬박꼬박 다 받았습니다. 이로 인해 그녀는 건강을 잃고 모든 가산을 탕진했습니다. 결국 남은 것이라고는 절망과 슬픔과 불신과 부정한 자라는 깊은 죄의식과 수치심, 고독 뿐이었습니다. 셋째로 아름다움을 잃은 여인입니다. 여인들은 누구나 아름다움을 추구합니다. 아름다워지고자 하는 것은 여인들의 본능입니다. 그런데 이 여인은 미에 대해, 아름다움에 대해 희망을 버린 지 오래됐습니다. 인기고 사랑이고 매력이고 다 사라진 지 오래됐습니다. 얼굴에 화장하는 재미를 포기한 지도 오래됐습니다. 이 여인은 여자로서의 자기 위치를 포기한 지 오래됐습니다. 만일 이 여인이 20세에 병을 앓기 시작했다면 지금은 서른 두 살입니다. 12년이나 되는 긴 병을 앓고 살았으니 가장 아름다운 시절, 인생의 꽃다운 시절을 병으로 허망하게 허비하고 말았습니다. 거기다 12년간 피를 흘렸기 때문에 야윌 대로 야위어 꼬챙이 같았을 것입니다. 넷째로 소속감을 상실한 여인입니다. 사람은 누구에게나 두 가지 본능이 있습니다. 하나는 所有慾이요, 또 하나는 所屬慾입니다. 사람이면 누구나 美를 소유하고 싶습니다. 名譽를 소유하고 싶고, 富를 소유하고 싶고, 權勢를 소유하고 싶습니다. 그리고 사람은 누구나 알려지기를 바랍니다. 누구엔가 잘 보이고 싶고, 또 누군가가 나를 알아 주기 바라고, 관심 가져 주기를 바랍니다. 그런데 이 여인이 지금 많은 군중 속에 들어가 있어도 누구 하나 관심 가져 주는 사람이 없습니다. 그녀는 군중 속에 버려진 존재입니다. 가든지 오든지 관심이 없는 존재입니다. 있어도 그만, 없어도 그만인 존재입니다. 살아도 그만이요, 죽어도 그만인 존재입니다. 사람이 못살더라도 소속감만 있으면 아무리 힘들어도 살아갈 수 있습니다. 그러나 소속감을 상실할 때 고독으로 못쓰게 됩니다. 현대인들은 풍요로운 사회에서 풍요로운 삶을 살고 있습니다. 그러나 군중 속의 고독으로 인해 많은 사람들이 정신분열증을 앓고 있습니다. 그녀는 너무 고독하고 외로워서 죽고 싶은 때가 한 두 번이 아니었을 것입니다. 이처럼 그녀의 내면은 황폐할 대로 황폐해져 있습니다. 다섯째로 율법에 의하면 부정한 여인입니다. 레위기 15:25-27절에 보면 이 병은 부정한 병입니다. 그래서 그가 쓴 물건과 옷들은 부정하여 다른 사람이 만지면 그도 부정했습니다. 그녀는 부정의 근원이었습니다. 그러므로 그녀의 마음은 늘 가해망상증에 시달려야 했습니다. \'나는 다른 사람에게 악영향만 끼치는 자야! 나는 일찍 죽어야 해! 나는 일찍 그만 두어야 해!\' 그리고 이 여인은 결혼도 할 수 없습니다. 만일 했다면 남편으로부터 버림을 받아야 합니다. 이상에서 볼 때 그녀는 모든 것을 상실한 여인입니다. 재산도 잃고, 친구도 잃고, 아름다움도 잃고, 사람들로부터 버림을 받아 누구와도 함께 할 수 없는 불행한 여인입니다. 종교적으로도 버림을 받아 예배도 참석할 수 없습니다. 그녀는 모든 관계에서 다 떠나야 하는 불쌍한 여인입니다. 모두로부터 관심 밖에 있는 버려진 여인이었습니다. 그녀가 이렇게 된 것은 혈루증이란 고질병 때문입니다. 이 고질병이 여인의 모든 꿈과 아름다움과 모든 것을 앗아갔습니다. 이 고질병으로 인해 마음의 질병, 영적인 질병까지 앓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사람은 누구나 고질병이 있다는 사실을 알아야 합니다. 겉으로 사람들을 보면 모두가 건강한 것 같습니다. 그러나 사람은 누구나 고질병을 가지고 삽니다. 고질병으로 인해 많은 사람들이 병든 삶을 살고 있습니다. 그러면 그녀가 어떻게 이 고질병으로부터 나음을 입고 건강한 삶을 살 수 있었습니까? 첫째로 장벽을 뚫고 나갔습니다. 어느날 이 여인은 예수님께서 지나가신다는 기쁜 소식을 들었습니다. 그녀는 예수님께서 어떤 몹쓸 병도 다 고쳐 주신다는 소식을 들었습니다. 이 소식은 그녀에게 희망을 주었습니다. 절망도 컸던 만큼 소망도 컸습니다. 그러나 그녀가 예수님께 나가기 위해서는 많은 장벽이 있었습니다. 연약한 몸으로 그 수많은 무리를 헤치고 나아간다는 것은 어려운 일이었습니다. 또한 자의식, 율법적인 생각 등이 있었습니다. 그리고 순간순간 불신이 생기기도 했습니다. 사람이 하지 못하면 하나님도 못한다고 생각하는 분들이 있습니다. 다른 데서 못하면 예수님도 할 수 없다는 불신을 가진 분들이 있습니다. \'혹시나\' 하다가 \'역시나\' 하는 경우가 얼마나 많습니까? 그러나 그녀는 \'혹시나\'가 아닌 절대적으로, 절박한 심정으로 예수님을 믿고 나갔습니다. 우리는 입으로 \'할렐루야! 아멘!\' 하면서도 마음으로 \'과연 될까?\' 의심하는 경우가 얼마나 많습니까? 그러나 그녀는 예수님의 능력을 조금도 의심치 않았습니다. 우리는 성경을 공부하면서 \'정말 나의 내면이 변화될까?\' 의심하는 경우가 얼마나 많습니까? 우리는 양들과 성경을 공부하면서 \'정말 이 양이 변화될까?\' 의심하는 경우가 얼마나 많습니까? 우리는 목자 박사가 되고자 기도하지만 \'내가 과연 할 수 있을까?\' 의심하는 경우가 얼마나 많습니까? 우리가 기도하면서도 \'기도는 기도고 현실은 현실이다\' 며 불신할 때가 얼마나 많습니까? 이처럼 우리에게는 의심하는 의심병이 있습니다. 그러나 그녀는 순간순간 찾아오는 의심을 기도와 믿음과 소망과 설레임으로 극복했습니다. 소망과 믿음은 그녀에게 삶의 용기를 주었습니다. 여기저기에서 절망했지만 예수님께는 소망을 두었습니다. 그녀는 불신과 의심, 자의식, 율법적인 생각을 버리고 무리를 헤치고 나갔습니다. 그녀는 모든 장벽을 극복하고 예수님께 나갔습니다. 여기에서 볼 때 예수님께로 나가고자 할 때 반드시 장벽이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중풍병자가 예수님께로 나가고자 할 때에 人의 장벽이 그를 막았었습니다. 문둥병자가 예수님께로 나가고자 할 때에도 장벽이 있었습니다. 이처럼 우리가 믿음의 역사를 이루고자 할 때 반드시 장벽이 있습니다. 우리는 120명 목자 박사를 양성하는 기도 제목이 있습니다. 목자 박사를 양성하여 캠퍼스를 새롭게 하고, 지성계를 새롭게 하고자 하는 기도 제목이 있습니다. 그런데 막상 목자 박사가 되고자 할 때 그에 따르는 장벽이 우리 앞에 놓여 있습니다. 첫째는 어학의 장벽이 있습니다. 우리가 미국에 가서 박사학위를 받으려면 토플 580점 이상은 맞아야 합니다. 저도 목자 박사가 되고자 할 때 어학의 장벽이 있습니다. 둘째는 문화의 장벽이 있습니다. 문화적인 장벽을 아무 것도 아닐 것 같이 생각하는 분도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문화적인 장벽은 태산 같이 높은 장벽입니다. 요즈음 신문을 보니 불란서에 유학간 학생들이 불란서 문화에 적응하지 못해 자살하고 정신착란증을 앓고 있다는 보도를 읽은 적이 있습니다. 이런 장벽을 어떻게 넘을 수 있습니까? 이처럼 높고 높은 장벽을 뛰어 넘을 수 있는 길은 순간순간 찾아오는 불신을 깨고 하나님께 대한 믿음과 소망을 가지고 도전하는 것입니다. 이 때 우리는 믿음의 능력을 체험할 수 있습니다. 둘째로 믿음으로 예수님의 옷자락을 만졌습니다. 여인은 마침내 기회를 포착하여 예수님께 가까이 이르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그녀는 예수님께 가까이 오기는 했지만 어떻게 해야 할 지 몰랐습니다. \'예수님\' 하고 소리를 질러야 할 지, 어떻게 해야 할 지 몰랐습니다. 사실 여인은 \'예수님\' 하고 부를 수 있는 용기도 없고 고쳐 달라고 애원할 수도 없었습니다. 그러나 기회를 놓칠 수는 없었습니다. 그녀는 기회를 포착하여 예수님께 가까이 나갔습니다. \'좀 더 가까이, 좀 더 가까이\' 그렇습니다. 그녀는 드디어 많은 장벽을 뚫고 예수님의 뒤로 가서 예수님의 옷자락을 살며시 만졌습니다. \"이는 내가 그의 옷에만 손을 대어도 구원을 얻으리라(28)\" 는 믿음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녀가 믿음으로 예수님의 옷자락을 만졌을 때 어떻게 되었습니까? 29절을 보십시오. \"이에 그의 혈루 근원이 곧 마르매 병이 나은 줄을 몸에 깨달으니라.\" 혈루 근원이 곧 말랐습니다. 어떻게 이런 일이 있을 수 있습니까? 많은 사람들이 예수님을 만지고 비비며 야단법석을 떨었습니다. 그러나 그들에게는 아무런 역사가 일어나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이 여인은 예수님의 옷자락만 만졌는데도 놀라운 역사가 일어났습니다. 이는 믿음으로 손을 댔기 때문입니다. \'옷자락에 손을 댔다\' 는 것은 단순한 touch가 아닙니다. 이는 헬라어로 \'합토(απτω)\'로, 옷자락을 당긴 것을 말합니다. 그녀는 분명한 목적과 뜻을 가지고 행동을 했습니다. 그녀는 생각과 뜻과 마음을 두고 믿음으로 만졌습니다. 그녀는 일생에 한 번 있을까 말까 한 절박한 심정을 가지고 만졌습니다. 그녀는 기회를 놓치지 않고자 하는 마음을 가지고 예수님의 옷자락을 만졌습니다. 그녀는 믿음으로 옷자락을 만졌습니다. 그녀는 믿음의 여인이었습니다. 그리고 그녀는 겸손했습니다. 그녀는 문둥병자처럼 예수님께 나가 \'원하시면 내 혈루병을 고쳐 주십시오\'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녀는 감히 예수님께 \'내 병을 고쳐 주십시오\' 할 수 없었습니다. 그래서 그녀는 살짝 예수님의 뒤로 가서 옷자락을 만진 것입니다. 하나님은 겸손한 자를 귀히 여기십니다. 출애굽기 3:11절을 보면 모세는 말씀합니다. \"내가 누구관대 바로에게 가며 이스라엘 자손을 애굽에서 건져내리이까?\" 그리고 시편 기자는 시편 8편 4절에 이렇게 고백합니다. \"사람이 무엇이관대 주께서 저를 생각하시며, 인자가 무엇이관대 주께서 저를 권고하시나이까?\" 오늘날 많은 사람들이 믿음을 가지고 살아갑니다. 그러나 우리 중에는 선배가 권하여 할 수 없이 마지 못해 성경을 공부하고, 예배에 참석하는 분들이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종말론적으로, 절박한 심정을 가지고, 필사적으로 자신의 인생 문제를 해결해야겠다는 믿음, 의지, 뜻을 가지고 나가야 합니다. 생명을 걸어야 합니다. 정성을 다하여 나와야 합니다. 옷도 제일 좋은 옷을 입고 단정한 자세를 가지고 나와야 합니다. 가능하면 화장도 하고 나와야 합니다. 그런데 우리는 사람을 만나려고 갈 때에는 그렇게 모양을 내는데 하나님 앞에 나올 때에는 되는 대로 나옵니다. 이것은 잘못된 태도입니다. 마음과 정성, 믿음이 중요합니다. 그리고 기회가 왔을 때 기회를 빨리 포착해야 합니다. 기회가 왔지만 기회를 잡지 못해 못쓰게 된 사람들이 얼마나 많습니까? 충성의 기회, 헌신의 기회를 잃어 하나님께 쓰임을 받지 못하게 된 경우가 얼마나 많습니까? 그러나 그녀는 기회를 잘 포착했습니다. 우리는 어떤 경우에든지 예수님께 가까이 가려는 마음이 있어야 합니다. 예수님과 만남의 관계를 이루어야 합니다. 멀리서 듣고 보는 것이 아닙니다. 멀리서 앙망하는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을 가까이에서 만나는 역사가 있어야 합니다. 떨리는 마음으로, 수줍은 듯, 애틋하게 살짝 옷자락을 잡아 당기는 여인의 모습을 한 번 상상해 보시오. 참으로 훌륭한 믿음의 여인입니다. 그녀는 예수님의 옷자락에도 능력이 있음을 믿었습니다. 그녀는 기도한 대로 이루어질 것을 믿었습니다. 그렇습니다. 우리가 마음 속으로 의심치 않고 믿으면 산을 옮겨 바다를 메꿀 수 있습니다. 예수님은 우리에게 말씀하십니다. \"하나님을 믿으라.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누구든지 이 산더러 들리어 바다에 던지우라 하며, 그 말하는 것이 이룰 줄 믿고 마음에 의심치 아니하면 그대로 되리라(막11:22,23).\" 믿음은 모든 불가능을 가능케 합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믿음의 통로를 통해서 역사하십니다. 이 여인은 너무나 기뻐 환호성을 지르고 싶었습니다. 그는 빨리 무리 속에서 살짝 빠져 나가 부모님께 이를 알리고 싶었습니다. 이 때 예수님은 돌이켜 말씀하셨습니다. \"누가 내 옷에 손을 대었느냐(30)?\" 이 말을 들은 여인은 깜짝 놀랐습니다. 예수님의 몸에 손을 댄 사람이 얼마나 많습니까? \'옷깃을 스치는 사람도 많은데 어떻게 이 사실을 알 수 있는가, 어떻게 이 사실을 꼭집어 알아 보셨을까?\' 놀랐습니다. 예수님은 찾으십니다. \'누구냐?\' 그런데 몰라서 물은 것이 아닙니다. 능력이 나간 것을 아신 주님께서 이 여자를 몰라서 물으셨겠습니까? 여인이 스스로 고백하고 나오기를 원하셨습니다. \'누가 내 옷에 손을 댔느냐? 우연히 만진 사람 말고, 어쩌다 만진 사람 말고, 믿음으로 만진 사람이 누구냐?\' 찾고 계십니다. 그 믿음의 한 여인을 찾고 계십니다. 예수님은 믿음의 여인을 찾아서 개인적으로 만나 주십니다. 사랑은 personal love, 인격적인 사랑입니다. 예수님은 이런 믿음의 사람을 기어이 만나 주십니다. 이 때 제자들은 이 많은 사람이 밀고 당기는데 누가 예수님의 옷에 손을 대었는 지 어떻게 알 수 있느냐고 반문했습니다. 제자들은 예수님의 깊은 영적 통찰력을 알지 못했습니다. 이 여인은 더 이상 숨길 수 없게 되었습니다. 이 여인은 두려워 떨며 모든 사실을 고백했습니다. \"두려워하여 떨며 와서 그 앞에 엎드려 모든 사실을 여짜온대(33)\" 이 여인은 모든 부끄러움을 드러내었습니다. 그리고 자신에게 이루어진 믿음의 역사를 드러내었습니다. 그러면 예수님은 왜 이 여인으로부터 고백을 듣기 원하십니까? 34절을 보십시오. \"예수께서 가라사대 딸아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으니 평안히 가라. 네 병에서 놓여 건강할지어다.\" 첫째는 참 평안을 주시고자 함입니다. 이 여인은 믿음으로 행했지만 몰래 행했기 때문에 불안했습니다. 예수님은 이를 드러냄으로써 이 여인에게 평안을 주시고자 하셨습니다. 예수님은 그의 심령을 사로 잡고 있는 모든 두려움을 해결하고자 하셨습니다. \"딸아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으니 평안히 가라.\" 이 말씀은 여인에게 임한 은혜스러운 사죄의 음성입니다. \'평안히 가라\' 는 것은 영적인 구원을 말합니다. 이 여인은 하나님께서 주시는 평안을 가슴에 가득히 안고 물러 가게 되었습니다. 둘째는 믿음을 온전케 하시고자 함에 있습니다. 예수님은 육신의 병 뿐만 아니라 영적으로도 구원받기를 원하셨습니다. 마음으로 믿어 의에 이르고 입으로 시인하여 구원에 이릅니다(롬10:10). 셋째는 예수님과 깊은 인격적인 관계성을 맺기 위함입니다. 믿음이란 하나님과의 올바른 관계성을 맺는 것입니다. 바로 우리가 소감을 쓰는 것도 예수님과 인격적인 관계성과 올바른 관계성을 맺고자 함에 있습니다. 예수님은 여인의 믿음을 드러내어 믿음을 축복하시고, 또 야이로와 주위 사람들에게 믿음을 심으셨습니다. 사람에게는 누구나 고질병이 있습니다. 어떤 사람은 육신의 고질병을, 어떤 사람은 마음의 고질병을, 어떤 사람은 영적인 고질병을 앓고 있습니다. 어떤 사람은 자의식이 많아 사람 앞에 서면 혀가 굳어 말을 못하는 고질병이 있습니다. 열등감의 고질병이 있습니다. 미움과 시기심의 고질병이 있습니다. 조금 어려우면 자리에 드러눕는 고질병이 있습니다. 사람들은 이런 문제를 해결해 보고자 환경을 바꾸어 보기도 합니다. 이 때 조금은 해결이 되는 듯 싶습니다. 그러나 시간이 지나면 마찬가지입니다. 그리고 사람들은 이런 것을 고질병으로 생각하지 않고 성격 문제로 생각하는 분들이 있습니다. 그러나 이런 것들은 성격의 문제가 아니라 치유받아야 할 고질병입니다. 우리가 이 고질병을 믿음으로 예수님께 들고 나갈 때 나음을 입을 수 있습니다. 그런데 이 여인은 혈루증 때문에 예수님을 만나게 되었습니다. 이 사람이 환자가 아니었다면 예수님께 나오지 않았을 것입니다. 이 여자는 그런 불행으로 예수님을 만났고, 육적, 영적으로 다 구원을 받았습니다. 그리스도 안에 있는 자에게는 모든 것이 다 은혜입니다. 실패도 은혜요, 질병도 은혜요, 마지막에는 죽음도 은혜입니다. 그 속에 하나님의 경륜과 사랑이 내포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만날 때 불행이 다행으로 바뀌어집니다. 높은 가치의 의미로 바뀝니다. 실패 때문에, 병마 때문에, 불행한 일 때문에, 답답한 일 때문에, 남보다 불행한 일 때문에 예수님을 찾습니다. 예수님을 만나는 순간에 불행은 나에게 축복이 됩니다. 남다른 사랑이 나와 함께 하셨다는 것을 깨닫고 간증하게 됩니다. 예수님께서 혈루증 앓는 여인을 치유한다는 것은 예수님의 스케줄 중에 없는 일이었습니다. 예수님은 죽어 가는 야이로의 딸을 고쳐 주고자 가시는 길이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애틋한 믿음, 포기치 않는 믿음, 절박한 믿음을 보시고 길을 멈추시고 그녀를 치유하여 주셨습니다. 예수님은 믿음만 있으면 스케줄을 변경하시고 믿음의 사람을 찾아 능력을 행하십니다. 이 예수님은 은혜의 주님이십니다. 예수님은 여인의 믿음을 받으시고 구원하여 주셨습니다. 믿음이란 장벽을 뚫고 나가는 것입니다. 믿음이란 의심과 두려움을 극복하고 절박한 심정을 갖고 나가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역사는 믿음의 역사입니다. 하나님은 믿음이란 통로로 역사하십니다. 우리가 믿음을 소유할 때 어떤 고질병도 치유될 수 있습니다. 우리가 믿음의 사람이 되어 병든 내면과 육신이 치유되기를 기도합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