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8강 마가복음 6장강해


너희가 먹을 것을 주라


마가복음 (6:30-44)



\"대답하여 가라사대 너희가 먹을 것을 주라 하시니(37a)\"

本文 말씀은 예수님의 十字架의 죽으심과 復活과 함께 四福音書에 나오는 말씀으로 아주 重要한 말씀입니다. 여기에는 양떼들에 대한 예수님의 牧者의 心情이 잘 나타나 있습니다. 또 指導者가 갖추어야 할 德目이 잘 나타나 있습니다. 본문을 통해 이 시대와 캠퍼스에 대한 책임감을 가지고 먹일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첫째, 여러가지로 가르치신 예수님(30-34). \"사도들이 예수께 모여 자기들의 행한 것과 가르친 것을 낱낱이 고하니(30)\" 6:1-29절을 보면 예수님은 제자들을 둘씩 둘씩 짝을 지어 세상으로 내 보내셨습니다. 그들은 회개의 복음을 전파했습니다. 그리고 그들은 많은 귀신을 쫓아내고 많은 병인에게 기름을 발라 고쳤습니다. 그들의 전도 여행은 대성공적이었습니다. 이제 그들은 돌아와서 예수님께 모여 자기들의 행한 것과 가르친 것을 낱낱히 보고했습니다. 사도행전을 보면 사도 바울은 전도 여행을 마친 후 자신을 파송한 안디옥 교회에 가서 선교보고회를 가졌습니다. 제자들은 각자 하나님께서 이루신 역사를 보고했습니다. 베드로는 \'내가 언제 실력으로 했냐! 믿음으로 했지!\', 요한은 \'예수님 안에 운명은 없다\', 야고보는 \'3류 인생을 일류 인생인 목자 박사로\' 라는 주제로 보고를 했습니다. 평소 말이 없던 바돌로매도 \'뒤에서 호박씨를 까던 사람을 쓰신 하나님\' 이라는 주제로 사자후를 토했습니다. 그들은 모두 위대한 사도가 될 가능성에 큰 힘을 얻었습니다.

예수님은 그들의 선교보고를 다 들으시고 그들에게 쉼이 좀 필요함을 아시고 한적한 곳에 가서 잠깐 쉬도록 하셨습니다(31). 쉼과 노는 것은 차원이 다릅니다. 노는 것은 백수들이 할 일 없어 빈둥빈둥 대는 것이지만 쉼은 열심히 일한 자만이 누릴 수 있는 특권입니다. 쉼은 재충전하여 내일을 향해 도전할 수 있게 합니다. 그런데 많은 사람들이 쉼과 노는 것을 구분하지 못해 빈둥빈둥 놀면서도 쉼이 필요하다며 시도 때도 없이 잠을 잡니다. 그러나 이는 큰 죄악입니다. 그런데 어떻게 쉼을 갖느냐는 매우 중요합니다. 바로 그 사람의 쉼을 보면 그 사람의 신앙의 척도를 알 수 있습니다. 대개 사람들은 쉼을 잠이나 TV로 때웁니다. 그러나 이런 저속한 쉼보다는 성경을 읽고 기도와 찬양과 좋은 양서를 읽고 음악을 감상하는 것은 가장 좋은 쉼일 것입니다. 예수님은 기도하심으로 쉼을 가지셨습니다. 우리가 하나님 안에 있을 때 참 쉼을 가질 수 있습니다. 예수님은 우리를 푸른 초장에 누이시고 쉴 만한 물가로 인도하시는 선한 목자가 되십니다(시23:2).

제자들은 오랜만에 휴가를 얻어 설레이는 마음으로 예수님과 함께 배를 타고 한적한 곳으로 가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예수님과 함께 잠깐도 쉴 수 없게 되었습니다. 33절을 보면 무리들이 예수님의 일행보다 먼저 와서 예수님을 기다리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제자들은 모처럼의 휴식을 빼앗아 간 그들이 한없이 원망스러웠을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그들과 달랐습니다. 34절을 보십시오. \"예수께서 나오사 큰 무리를 보시고 그 목자 없는 양 같음을 인하여 불쌍히 여기사 이에 여러가지로 가르치시더라.\" 예수님은 그들을 조금도 부담스러워 하지 않으셨습니다. 누가복음 9:11절을 보면 예수님은 그들을 환영하셨습니다(He welcomed them). 바리새인들은 그들을 율법도 모르는 무식한 자들이라고 정죄하고, 헤롯당은 데모나 하는 골치 아픈 대상으로 여겼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나오셔서 큰 무리를 보시고 그 목자 없는 양 같음을 인하여 불쌍히 여기셨습니다. \'불쌍히 여기는 마음\' 은 값싼 동정이 아닙니다. 헬라어로 \'스프랑크논-腸\'의 어원에서 나온 \'스프랑크니조마이\'로, 장이 끊어질 만큼의 아픔을 말합니다. 우리말에 \'애간장이 탄다\' 는 말이 있는데 이를 두고 하는 말입니다. 얼마나 아프면 장이 녹아나겠습니까? 애간장이 탄다는 말의 유래는 다음과 같습니다. 새끼 원숭이를 빼앗긴 어미 원숭이가 하도 슬피 울어 해부해 보니 장이 다 녹았다는 것입니다. 이처럼 그들을 보는 예수님은 장이 녹을 만큼 그들의 아픔이 예수님의 아픔이 되고, 그들의 고통이 예수님의 고통이 되고, 그들의 고독이 예수님의 고독이 되고, 그들의 슬픔이 예수님의 슬픔이 되셨습니다. 예수님은 어떤 점에서 그들을 불쌍히 여기셨습니까?

첫째로 그들이 목자 없는 양 같음을 인해 불쌍히 여기셨습니다. 예수님께서 그들을 불쌍히 여기심은 정치적으로 자유가 없어서가 아닙니다. 경제적으로 빈곤하여서도 아닙니다. 예수님은 그들이 목자 없는 양 같음을 인해 불쌍히 여기셨습니다. 목자 없는 양은 참으로 불쌍합니다. 모든 동물은 반드시 공격 무기 아니면 방어 무기를 가지고 있습니다. 곰은 둔한 동물의 상징으로 표현되지만 사나운 발톱을 가지고 있습니다. 집에서 키우는 애완 동물에게도 무서운 공격 무기가 있습니다. 그러나 양은 공격 무기나 방어 무기를 가지고 있지 않습니다. 그래서 이리나 곰, 사자와 같은 맹수의 습격을 받게 되면 무방비 상태이기 때문에 그대로 잡혀 죽게 됩니다. 그리고 양은 눈이 근시이기 때문에 한 치 앞도 보지 못합니다. 또 자기 중심적이어서 먹을 것만 있으면 죽는 줄도 모르고 달려 가다가 구덩이에 빠지기도 하고, 독풀을 뜯어 먹어 죽기도 합니다. 그러므로 양은 반드시 목자의 인도와 보호를 받아야 합니다. 그 때 사나운 짐승으로부터 보호를 받게 되고, 푸른 초장과 시원한 시내에서 풀을 뜯고 물을 마시며 통통하게 살을 찌울 수 있습니다. 그러나 목자의 보호와 인도를 받지 못할 때 양은 빼빼 마르게 되고, 언제 어느 때 어떻게 될 지 모르게 됩니다. 저는 목자 없는 양의 모습을 이렇게 말할 수 있습니다. \"해는 져서 어두운 데 찾아 오는 목자 없어, 밝은 달만 쳐다 보니 눈물만 흐르네.\" 이처럼 목자 없는 양은 가장 불쌍합니다.

사람은 여러 면에서 양과 비슷합니다. 그래서 성경은 인간을 양으로, 하나님과 예수님을 목자로 비유하고 있습니다. 다윗은 이렇게 시를 읊었습니다. \"여호와는 나의 목자시니 내가 부족함이 없으리로다. 그가 나를 푸른 초장에 누이시며 쉴 만한 물가으로 인도하시는도다(시23편).\" 하나님을 목자로 모시고 산 다윗은 행복했습니다. 그의 영혼은 시와 찬미로 가득했습니다. 또한 이스라엘 백성들이 선한 목자를 만났을 때에 그들은 행복했습니다. 그러나 그렇지 못했을 때 그들은 不幸했습니다. 사사 시대에는 목자 없이 자기 소신대로 생활했습니다. 그 때 그들은 한 번도 마음 놓고 쉼을 갖지 못했습니다. 그러나 다윗이 목자가 되어 공의와 사랑으로 다스렸을 때 그들은 행복했습니다. 예수님 시대에도 목자가 없었던 것은 아니었습니다. 그러나 당시 목자라 할 수 있는 헤롯과 바리새인들은 그들의 참 목자가 되지 못했습니다. 그들은 음란하고 위선적이었으며 권위적이었습니다. 그 때 그들은 참 자유와 기쁨과 쉼과 행복을 누리지 못했습니다.

오늘날 지성인들은 많은 문제를 안고 살아 갑니다. 그러나 가장 중요한 것은 그들을 책임성 있게 돌볼 목자가 없는 것이 문제입니다. 학생들의 목자라 할 수 있는 교수님들은 바빠서 학생들을 깊이 이해하고, 사랑하고, 책임성 있게 지속적으로 도울 수 없습니다. 정치인들에게 비친 대학생들은 골치 아픈 존재로 생각될 것입니다. 부모님들은 일단 대학만 들여 보내면 깊은 관심을 두지 않습니다. 딸이 술을 마시고 취한 모습으로 집에 와도 상관하지 않습니다. 실로 대학생들은 없으면 아쉬운 존재요, 있으면 귀찮은 존재일 뿐입니다. 노동자들을 불쌍히 여기는 사람은 많아도 대학생들을 불쌍히 여기는 사람은 별로 없습니다. 그러나 대학생들만큼 불쌍한 사람도 없을 것입니다. 겉으로 보면 대학생들은 지성과 낭만이 있는 것 같습니다. 특히 서구 대학생들은 더욱 더 그러한 것 같습니다. 그러나 그들의 소감을 들어 보면 모두가 죄로 괴로워하고 있습니다. 진정한 목자가 없어서 많은 대학생들이 거짓 가치관과 병든 사상으로 죽어 가고 있습니다. 진리의 길을 찾지 못하여 방황합니다. 그러면 우리는 과연 그들을 어떤 눈으로 보고 있습니까? 우리는 노랗게 염색하고 다니는 학생들, 옷차림이 정숙하지 못한 학생들, 술을 마시고 업여 가는 남녀 학생들을 볼 때 \'아니 저런 놈들이 다 있어!\' 하며 정죄하지는 않습니까? 아니 그들을 부러워하지는 않습니까? 그러나 우리 주님은 무리들을 보시고 불쌍히 여기셔서 그들의 목자가 되어 주셨습니다. 예수님은 그들의 목자가 되셔서 그들을 이해하시고, 사랑으로 섬겨 주셨습니다. 눈물로 기도하여 주셨습니다. 이로 인해 그들은 살아났습니다. 목자의 기본적인 것은 불쌍히 여기는 마음을 갖는 것입니다.

둘째로 그들이 영적으로 무지하기 때문에 불쌍히 여기셨습니다. 예수님께서 그들을 불쌍히 여기시고 하신 일이 무엇입니까? 동정하지 않으셨습니다. 사람을 돕는 데 동정은 금물입니다. 동정은 사람을 중풍병자로 만듭니다. 예수님은 이에 여러가지로 가르치셨습니다(34b). 누가복음 9:11절을 보면 예수님은 하나님 나라의 일을 가르치셨습니다. 예수님께서 이들에게 말씀을 가르치신 것을 볼 때 그들이 영적으로 무지함을 알 수 있습니다. 그들은 영적으로 무지하여 현실 세계에만 얽매여 있었습니다. 그들은 영적으로 무지하여 인간은 어디에서 와서 어디로 가는 존재이며, 어떻게 사는 것이 참된 삶이며, 무엇을 위해 살 때 의미가 있고, 가치가 있는가 등 인간의 근원적인 문제를 알지 못했습니다. 그들은 말씀이 없어 육신과 정욕과 감정을 좇아 살았습니다. 예수님은 그들의 영적 무지를 깨우쳐 주시고자 여러가지 말씀을 가르치셨습니다. 예수님은 그들을 보실 때 절망할 수 밖에 없었지만 절망치 않고 그들을 도우셨습니다. 말씀이 없어 비전이 없는 그들에게 비전을 심으셨습니다. 돼지처럼 땅에 코를 박고 사는 그들에게 말씀을 가르침으로 믿음과 소망을 심으시고, 기도를 심으셨습니다. 실로 이 시대에도 말씀이 절실히 필요합니다. 오늘날 대학생들도 겉으로 볼 때 아무 부족함이 없어 보입니다. 육신적으로는 너무 잘 먹어 배가 나와 있지만 그들의 영혼은 피폐되어 있으며, 그들의 심령은 말씀을 듣지 못한 기갈로 인해 빼빼 말라 있습니다(암8:11-13). 이 시대에 우리가 해야 할 일이 무엇입니까? 말씀을 가르치는 것입니다. 생명의 말씀이 생명의 열매를 맺습니다. 말씀은 병든 인생을 건강한 사람으로 치료할 수 있으며, 죽어 가는 영혼을 소생시킬 수 있습니다. 말씀은 방황하는 지성인들을 생명과 진리의 길로 인도할 수 있습니다. 우리가 힘써 생명의 말씀을 심을 때 방황하는 지성인들이 하나님께로 돌아올 것입니다. 우리는 말씀의 불이 활활 타오르기까지 말씀을 묵상하고 말씀을 가르쳐야 하겠습니다.

둘째, 오천 명을 먹이신 예수님(35-40). 35절을 보십시오. \"때가 저물어 가매 제자들이 예수께 나아와 여짜오되 이곳은 빈 들이요, 때도 저물어 가니\" 제자들은 잠깐의 쉼을 포기하고 인내심으로 말씀을 들었습니다. 이제 해가 서산으로 뉘엿뉘엿 저물어 갔습니다. 제자들의 배에서 꼬륵꼬륵 소리가 나기 시작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해가 서산에 지는 것도 모르시는 양 말씀을 가르치셨습니다. 제자들은 이제나 저제나 끝나기를 바랬습니다. 그런데 끝나는 듯 싶으면 예수님은 다시 주제를 바꾸어 \'결론적으로, 끝으로, 마지막으로, 요약해 보면\' 하시면서 계속하여 말씀을 가르치셨습니다. 제자들은 더 이상 참을 수 없어, 자신들의 형편을 알릴 겸하여 현재 상황을 말하였습니다. 제자들은 그 동안 목자 훈련을 받았기 때문에 차마 무리들 앞에서 배가 고프다고 말할 수는 없었습니다. 또 제자들은 전도 여행을 통해 양들에 대한 자세가 조금 달라지게 되었습니다. 이제 제자들은 무리들을 외면치 않고 그들의 형편에 관심을 갖게 되었습니다. 제자들은 저물기 전에 무리들을 두루 촌과 마을로 보내어 각자 사 먹게 하자고 했습니다(36). 우리는 이렇게 말하는 제자들의 형편을 이해할 수 있습니다. 이 곳은 빈 들이요, 저물고, 또 남자만 오천 명입니다. 자신들이 가진 것이라고는 버스표 한 장도 없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무리들을 먹인다고 생각하는 사람이 있다면 그 사람이 이상한 사람일 것입니다. 그들의 생각은 지극히 합리적이고, 정상적이었습니다. 그들의 생각은 빨리 보내면 보낼수록 좋다는 것입니다. 그들의 형편에서 이런 문제를 제기한 것만으로도 귀합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명령하십니다. 37절을 보십시오. \"너희가 먹을 것을 주라 하시니\" 이것은 제자들이 꿈에도 생각할 수 없었던 명령입니다. 이 말씀은 헬라어로 \'과거 명령형\' 으로 계속적인 뜻이 있습니다. 계속 먹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면 예수님께서 제자들의 형편을 알지 못해서 하신 말씀입니까? 예수님은 누구보다도 제자들의 형편과 주위의 여건을 잘 아십니다. 이 곳은 빈 들이요, 때가 저물어 가는 것도 잘 아십니다. 이 예수님은 현재 우리의 형편도 잘 아십니다. 이 시대가 저물어 가는 20세기 말로 영적으로, 정신적으로 황폐화되어 탈도덕화, 탈윤리화, 탈신앙화의 시대라는 것도 아십니다. 이데올로기의 시작과 그 종말을 고한 것도 아십니다. 이로 인해 사상적인 빈곤과 그 빈곤을 채우기 위해 죄와 향락과 물질의 노예로 전락하고 있음도 잘 아십니다. 우리 주님은 캠퍼스 상황이 복음 전하기에 쉽지 않음도 잘 아십니다. 평신도 목자들의 형편도 잘 아십니다. 대학원 목자들과 학생 목자들의 형편도 잘 아십니다. 세계 캠퍼스를 개척한다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 지도 잘 아십니다. 세계 지성사와 지성계에 영향을 끼치고 그들을 돕는다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가를 잘 아십니다. 그런데도 예수님은 \"너희가 먹을 것을 주라\" 명령하십니다. 이는 제자들을 지도자인 목자로 키우고자 하심입니다. 지도자의 덕목이 무엇입니까?

첫째로 책임감입니다. 제자들은 무리들에 대해 관심을 가졌지만 자신들의 형편을 넘어서지 못했습니다. 목자는 문제 제기나 최선을 다 했다고 나 몰라라 하면 안 됩니다. 목자는 자기 형편을 넘어서서 그 위기의 상황을 해결할 수 있어야 합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이 무리들의 목자가 되어 책임감을 가지고 형편과 상황을 넘어서서 먹이기를 원하셨습니다. 많은 사람들은 지도자가 되기를 원합니다. 그러나 무슨 일에 책임지려 하지 않습니다. 책임성 있게 일하기는 싫어합니다. 왜 그러합니까? 책임감 뒤에는 희생이 따르기 때문입니다. 자기의 시간과 물질을 드려야 하기 때문에 책임을 지려 하지 않습니다. 특히 목자는 양들의 죄 문제와 인생 문제를 도와 주어야 할 책임이 있습니다. 그런데 양들에게 알아서 하라고 한다면 이는 목자라 할 수 없습니다. 목자는 \'내가 양들을 돕지 않으면 안 된다\' 는 강한 책임감을 가져야 합니다. 시대와 민족과 세계에 대한 책임감을 가져야 합니다. 책임성을 갖고 돕는 선교회는 성장합니다. 그러나 책임성 없이 형편을 따라 되는 대로 하는 선교회는 성장하지 않습니다. 우리는 부족하더라도 책임성 있는 목자가 되어야 하겠습니다.

둘째로 목자의 심정입니다. 책임감만으로는 양들을 먹이는 데 한계가 있습니다. 양들을 먹이려면 목자의 심정이 있어야 됩니다. 우리는 때로 \'양들을 왜 내가 먹여야 하는가?\' 생각할 때가 있습니다. 모세는 말을 잘 듣지 않고 뺑돌뺑돌거리는 백성들 때문에 속이 상해 하나님께 울부짖으며 이렇게 기도한 적이 있습니다. \'내가 낳았습니까? 내가 왜 이들을 도와야 됩니까?\' 그러면 우리가 왜 양들을 도와야 합니까? 왜 우리가 세계 지성인들을 먹여야 합니까? 우리는 양들과 아무 상관이 없습니다. 내가 낳은 자식도 아닙니다. 내가 키운 자식도 아닙니다. 그런데 왜 우리는 성경 공부하지 않겠다고 하는 양들을 찾아가 도와야 합니까? 왜 그들을 위해 눈물로 기도를 해야 합니까? 그래도 인하대생들은 동문이기 때문에 돕는 것이 이해가 갑니다. 그런데 왜 우리를 괴롭혔던 일본을 위해 기도하고 선교사를 파송해야 합니까? 우리가 왜 미국을 위해 기도하고 그들을 돕고자 합니까? 이는 우리가 목자이기 때문입니다. 목자의 심정은 빚진 자의 심정에서 옵니다. 우리는 과거 죄 가운데 방황하다가 영원히 멸망할 자들이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선배 목자들의 사랑과 섬김으로 예수님을 만나 구원을 받아 영생을 얻었습니다. 예수님은 나를 위하여 십자가에서 많은 고난을 받으시고, 물과 피를 다 쏟으시고 처참하게 죽으셨습니다. 우리는 예수님의 십자가의 은혜로 구원을 받고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습니다. 하나님의 영광에 참예하는 자가 되었습니다. 목자 박사의 큰 비전과 희망을 갖게 되었습니다. 이제 우리는 예수님께 은혜의 빚, 사랑의 빚, 섬김의 빚을 졌습니다. 빚진 자는 빚을 반드시 갚아야 합니다. 빚을 지고도 갚지 않는 자는 사기꾼입니다. 빚을 졌으면 반드시 갚아야 하고, 갚는 것은 당연한 것입니다. 이는 의무이기 전의 문제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 은혜의 빚, 사랑의 빚, 섬김의 빚을 양떼들에게 갚아야 됩니다. 목자의 심정은 빚진 자의 심정에서 나옵니다. 빚진 자의 심정이 없는 신앙 생활은 율법적인 신앙 생활로 여기에는 억지가 따릅니다. 그러나 빚진 자의 신앙 생활은 은혜와 기쁨이 넘칩니다. 사도 바울이 지칠 줄 모르게 복음 역사와 세계 선교를 감당할 수 있었던 것은 빚진 자의 심정이 있었기 때문입니다(롬1:14). 그의 목자의 심정은 빚진 자의 심정에서 나왔고, 그의 빚진 자의 심정은 그를 위대케 했습니다.

셋째로 믿음을 갖도록 함입니다. 제자들이 무리들을 먹이고자 하는 책임감과 또 목자의 심정이 있어도 현실은 엄연한 현실입니다. 어떻게 그 많은 무리들을 먹일 수 있습니까? 그러므로 제자들은 예수님께 나아가 기도하고 매달릴 수 밖에 없습니다. 바로 믿음이란 \'나는 할 수 없지만 예수님께서는 할 수 있다\' 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믿음을 원하셨습니다. 믿음은 불가능을 가능케 합니다. 믿는 자에게는 능치 못함이 없습니다.

너희가 먹을 것을 주라는 말씀을 제자들은 어떻게 받아들였습니까? \"우리가 가서 200데나리온의 떡을 사다 먹이리이까?\" 제자들은 오천 명을 먹이려면 200데나리온의 떡이 필요하다고 계산했습니다. 200데나리온은 200일의 장정 품삯에 해당되는 거금입니다. 한 사람의 임금이 5만원씩 한다고 해도 천 만원이나 됩니다. 이는 한마디로 불가능한 일입니다. 그래서 그들은 \'No!\' 했습니다. 그들은 200데나리온만 생각하다가 부정적이고 운명적이 되었습니다. 많은 분들이 제자들처럼 200데나리온만 생각합니다. \'돈이 있어야 한다, 시간이 있어야 한다, 능력이 있어야 한다, 재능이 있어야 한다\' 는 등 생각합니다. 예수님은 없는 200데나리온만 찾고 있는 제자들에게 명령하셨습니다. \"너희에게 떡 몇 개가 있는가 가서 보라(38).\" 예수님은 앉아서 부정적인 생각을 하는 제자들에게 \'떡 몇 조각이 있는가 가서 보라\' 하셨습니다. 생각만 하지 말고 가서 보라 하십니다. 민완 형사들은 전화통만 붙들고 소리지르지 않고 발로 뛴다고 합니다. 마찬가지로 위대한 목자는 앉아서 계산만 하지 않습니다. 입으로만 심방하고 말로만 일대일한다고 하지 않습니다. 위대한 목자는 믿음의 행동을 합니다. 믿음은 이론이 아니라 실질적인 행동을 요구합니다. 이 때 제자들은 가서 알아 보았습니다. 그 때 제자들은 보리떡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를 들고 있는 어린 아이를 발견했습니다. 그것은 어린 아이의 간식에 불과합니다. 그러나 이를 지나치지 않고 예수님께 들고 나왔습니다.

예수님은 5병2어를 가져왔을 때 제자들에게 무리들을 떼지어 푸른 잔디 위에 앉도록 하셨습니다. 그리고 이를 하늘을 우러러 감사 기도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아무리 작은 것이라도 믿음으로 드린 것을 귀하게 여기십니다. 예수님은 기도하신 후 떡을 떼어 제자들에게 주어 무리 앞에 놓게 하셨습니다. 이 때 남자만 오천 명이 배불리 먹이고 12광주리가 남았습니다.

예수님은 없는 것을 원치 않습니다. 예수님은 우리의 5병2어를 원하십니다. 시간의 5병2어, 물질의 5병2어, 편지의 5병2어, 기도의 5병2어, 일대일 성경 공부의 5병2어, 눈물의 5병2어, 그리고 각기 재능의 5병2어를 원하십니다. 예수님은 이를 기뻐 받으십니다. 우리가 진심, 기도, 시간, 사랑, 눈물, 물질, 믿음, 일대일 성경 공부를 드릴 때 예수님은 이를 축사하셔서 세계를 먹이십니다. 우리의 5병2어를 축복하신 하나님께 감사를 드립니다.

지도자는 책임성이 있어야 합니다. 믿음이 있어야 합니다. 상한 목자의 심정이 있어야 합니다. 五餠二魚를 드려야 합니다. 책임감과 믿음과 상한 목자의 심정만 있으면 불가능을 가능케 합니다. 역사를 창조할 수 있습니다. 세계를 먹일 수 있습니다. 우리가 오병이어를 드릴 때 인천 전 캠퍼스와 세계 캠퍼스를 먹일 수 있습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