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9강 마가복음 7장 강해


이 말을 하였으니


마가복음 (7:24-37)



\"예수께서 가라사대 이 말을 하였으니 돌아가라. 귀신이 네 딸에게서 나갔느니라 하시매(29)\"

우리는 지난 주 광풍 앞에 믿음이 없어 두려워하는 제자들의 모습을 보았습니다. 제자들의 모습이 바로 우리들의 모습입니다. 우리는 물질의 광풍, 염려의 광풍, 불신의 광풍, 회의의 광풍, 병마의 광풍 앞에 두려워합니다. 우리 주님은 이런 제자들에게 \'어찌하여 믿음이 없느냐?\' 책망하십니다. 주님, 저희의 믿음 없음을 불쌍히 여겨 주십시오. 광풍 앞에 실질적인 산 믿음을 갖기를 원합니다. 주님 도와 주십시오.

누가 구원을 받습니까? 누가 주님으로부터 인정을 받을 수 있습니까? 유대 사람이라고 다 구원을 받습니까? 성경을 많이 안다고 구원을 받습니까? 신앙 연륜이 많다고 구원을 받습니까? 인격이 훌륭하다고 구원을 받습니까? 아닙니다. 오직 믿음을 통해서만이 구원을 받습니다. 예수님은 과거나 현재, 또는 처지, 신분을 보시지 않습니다. 믿음이 있는가, 없는가만을 보십니다. 예수님은 불신의 사람을 인정치 않고 믿음의 사람을 인정하십니다. 본문에 보면 헬라인이요, 수로보니게 족속인 이방 여인이 나옵니다. 그는 혈통으로나, 신분으로나 구원을 받을 수 없었습니다. 그러나 그녀는 하나님을 전적으로 신뢰했습니다. 하나님의 주권을 영접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께 긍휼을 구했습니다. 주님은 그녀의 믿음을 받으시고 그녀의 딸을 구원하여 주셨습니다. 오늘 말씀을 통해 예수님의 마음을 움직이는 믿음의 사람이요, 기도의 사람이 되기를 기도합니다.

첫째, 주여 옳소이다마는(24-28). 24절을 보십시오. 예수님은 갈릴리를 떠나 두로 지경의 한 집에 들어가셔서 조용한 시간을 갖고자 하셨습니다(두로는 갈릴리에서 북서쪽에 위치한 항구도시로 이방 지역이었음). 그러나 예수님은 몰려오는 무리들로 인해 조용히 쉬실 수 없었습니다. 25,26절을 보십시오. \"이에 더러운 귀신들린 어린 딸을 둔 한 여자가 예수의 소문을 듣고 곧 와서 그 발 아래 엎드리니 그 여자는 헬라인이요, 수로보니게 족속이라. 자기 딸에게서 귀신 쫓아 주시기를 간구하거늘\" 예수님께 찾아와 발 아래 엎드려 간구하는 여인이 있었습니다. 그녀는 헬라인이요, 수로보니게 족속이었습니다. 이 여인에게 귀여운 딸이 있었습니다. 부모는 자녀를 키울 때 아들은 굴려서 키우고, 딸은 아들과 달리 곱게곱게 키우고자 합니다. 딸은 엄마의 소원대로 곱게곱게 자랐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부터인가 이상한 짓을 하기 시작했습니다. 눈이 돌아가고 갑자기 소리를 고래고래 질렀습니다. 부모는 놀라서 병원을 찾았습니다. 그러나 아무 효험이 없었습니다. 이방 지역이기 때문에 점장이를 찾기도 하고, 굿도 해 보았습니다. 그러나 딸은 오히려 더 심해 가기만 했습니다. 이제 어머니는 자기의 의지와 힘과 노력으로는 어쩔 수 없음을 알았습니다. 어떤 약도, 어떤 사람도, 어떤 방법으로도 딸을 고칠 수 없음을 알았습니다. 그는 이제 포기할 수 밖에 없었습니다. 그 때 예수님께서 두로 지경의 한 집에 계신다는 소문을 듣게 되었습니다. 그녀는 일찌기 예수님께서 한 손 마른 사람을 고쳐 주신 놀라운 소식을 들었습니다(막3:8). 그녀는 예수님께서 광풍을 잔잔케 하시고, 혈루증 앓는 여인을 고치시고, 야이로의 딸을 살려 주신 소식도 들었습니다. 보리떡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로 5,000명을 먹이신 소문도 들었습니다. 귀신들려 날뛰는 거라사 청년을 고치신 소문도 들었습니다. 그녀는 이런 소문을 듣고 예수님께 대한 믿음을 갖게 되었습니다. 믿음은 들음에서 나오고, 복음은 전파를 통해 증거됩니다.

사실 그녀가 믿음을 갖는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닙니다. 그녀는 헬라인으로 교만합니다. 수로보니게 지역은 이방 땅으로 영적으로 무지합니다. 요세프스에 의하면 그들은 유대인에 대한 강한 敵意를 품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녀는 예수님께 나왔습니다. 무엇이 그녀로 하여금 예수님을 믿도록 했습니까? 무엇이 그녀를 예수님께로 나오게 만들었습니까? 딸로 인한 광풍이었습니다. 이 광풍은 오히려 예수님께로 나오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이를 볼 때 인생의 광풍은 결코 나쁜 것만은 아님을 알 수 있습니다. 인생의 광풍을 통해 인간의 연약함을 깨닫고 주님께 나오게 됩니다. 우리는 이런 경우를 많이 볼 수 있습니다. 과기처 장관인 정근모 장로는 세계적인 석학입니다. 인간적으로 보면 그 분은 예수님을 믿기 어려운 분입니다. 그러나 그 분은 자기 아들의 병마를 통해 주님을 믿게 되었다고 고백하는 것을 보았습니다.

예수님은 소문을 듣고 곧 와서 발 아래 엎드려 간구하는 여인을 어떻게 대했습니까? 27절을 보십시오. \"자녀로 먼저 배불리 먹게 할지니 자녀의 떡을 취하여 개들에게 던짐이 마땅치 아니하니라.\" 예수님은 유대인을 사랑스러운 \'자녀\'로 표현하고, 이 여인을 \'개\'로 표현했습니다. 여기에서 말하는 개란 애완용 개를 말합니다. 어찌했든 \'개\'는 개입니다. 당시 개란 말은 불명예, 더러운 것의 상징입니다. 유대인들에게 비친 이방인들의 모습은 개 같이 보였습니다. 그들은 우상을 섬겼습니다. 그들은 음란했습니다. 그들은 개 같이 무질서했습니다. 그들은 개처럼 도덕적으로 불결했습니다. 그들은 구원을 받을 수 없는 사람들이었습니다. 예수님은 한마디로 \'당신은 개이기 때문에 구원을 받을 수 없으니 가라\' 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아주 치욕적인 말로 이 여인을 거절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지금까지 도움을 요청하는 사람들에게 도움을 거절한 적이 없습니다. 어떤 사람이라 할지라도 모두 영접하셨습니다. 특히 예수님은 자매님들을 섬세하게 돌보셨습니다. 요한복음 4장에 보면 예수님은 사마리아 여인의 자존심을 건드리지 않고 섬세하게 도우셨습니다. 요한복음 8장에 보면 현장에서 간음하다 잡힌 여인을 용서하여 주셨습니다. \"나도 너를 정죄치 아니하노니 다시는 죄를 범치 말라.\" 예수님은 자매님들을 섬세하게 도와야 됨을 잘 아십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이 여인에게는 너무나 심한 말씀을 하신 것 같습니다. \'지렁이도 밟으면 꿈틀거린다\' 는 데 아무리 이방 여인이라 할지라도 이렇게 직접 대 놓고 모욕적인 말씀을 하실 수 있을까요? 특히 예수님께로부터 이런 무시를 받는다는 것은 더욱 견디기 힘듭니다. 사람이 가장 참기 힘든 것은 사람들로부터 무시받고, 자존심이 짓밟힘을 당할 때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이런 때에도 견딜 수 있는 것은 사람들은 나를 무시해도 예수님은 나를 인정하여 주시고, 받아 주시고 이해하여 주시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나를 박대하시면 나는 갈 곳이 없습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찾아온 양에게 이런 말씀을 하시다니 우리는 예수님을 이해할 수 없습니다. 예수님께서 왜 이런 말씀을 하셨을까요? 만민의 구주 예수님께서 어떻게 이런 말씀을 하실 수 있습니까? 이는 이 여인이 복음을 받을 만한 믿음이 있는가 test해 보시기 위함이었습니다. 예수님은 그릇이 준비된 사람에게 축복을 주십니다. 그리고 복음은 너무 귀한 것이기 때문에 아무에게나 줄 수 없습니다. 돼지에게 진주를 주면 그 가치를 알지 못하기 때문에 밟아 버립니다. 마찬가지로 복음을 받을 자세가 갖춰지지 않는 사람에게 복음을 주게 되면 복음의 가치를 알지 못하기 때문에 함부로 대하게 됩니다. 예수님은 하나님께 대한 자세, 구원과 영생을 받을 준비가 되어 있는 자에게 구원을 베풀어 주십니다. 그리고 \'먼저\'라는 말씀 속에 하나님으로부터 구원을 받을 개연성이 내포되어 있습니다. 유대인이 먼저요, 헬라인이 다음이라는 것은 구원 역사의 원칙입니다. 이 비밀을 알 때 기도할 수 있습니다. 그렇다고 아무나 예수님은 \'개\'라고 모욕을 주셔서 실족시키지 않습니다. 예수님은 시험을 감당할 만한 사람에게 시험하십니다.

예수님의 말씀에 여인이 어떻게 반응을 나타내었습니까? 28절을 보십시오. \"주여 옳소이다마는 상 아래 개들도 아이들의 먹던 부스러기를 먹나이다.\" 이 여인은 자존심을 극복하고 예수님의 말씀이 전적으로 옳다고 시인했습니다. 그녀는 예수님의 말씀에 조금도 반발하지 않았습니다. 보통 여자들 같으면 감정을 이길 수 없어 예수님의 넥타이를 붙잡고 \'좋다, 나는 개다, 한번 개맛을 보라\' 며 달려 들어 물어 뜯을 수 있습니다. 아니면 인종차별, 지역감정을 부추긴다고 \'이판 사판 공사판이다\' 며 정말 개판을 칠 수 있습니다. 아니면 \'소문과 다른데\' 하며 실망의 눈초리로 돌아갈 수 있습니다. 아니면 \'쪽 팔리게 개 취급을 받으면서 구원을 받고 싶지 않다\' 며 문을 쾅 닫고 나갈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녀는 \'상 아래 개들도 아이들이 먹던 부스러기를 먹지 않습니까?\' 하며 긍휼을 구했습니다. 개는 주인이 밥을 주지 않는다고 주인이 먹는 빵을 결코 뺏아 먹지 않습니다. 개는 상 아래에서 긍휼을 구할 뿐입니다. 이 여인은 개 철학을 영접하고 감정과 자기 자신을 이겼습니다. 그러면 이 여인이 어떻게 이렇게 할 수 있었습니까?

첫째로 그녀는 예수님 앞에서 참된 자아를 발견했습니다. 이 여인은 헬라 여인으로서의 신분을 부인하고 겸손히 은혜의 부스러기를 간구했습니다. 대개 사람들은 사람들 앞에서 자신의 존재를 찾습니다. 이런 사람들은 늘 비교의식으로 고통합니다. 그러나 이 여인은 하나님 앞에서 자신이 어떤 존재인가를 찾았습니다. 대개 사람들은 자신의 신분을 과대 포장하여 자신을 나타냅니다. 그러나 그녀는 자신의 신분과 혈통을 내세우지 않았습니다. 그녀는 자신이 하나님으로부터 은혜를 받을 수 없는 비천한 자임을 알았습니다. 그녀는 하나님 앞에서 은혜를 받을 수 없는 비천한 자임을 알았습니다.

다윗은 왕이 되었을 때도 하나님 앞에서 자신의 존재를 잃지 않았습니다. 그는 양똥 치던 목동 시절을 기억하고 하나님께 감사했습니다. \"주 여호와여! 나는 누구오며, 내 집은 무엇이관대 나로 이에 이르게 하셨나이까(삼하7:18)?\" 바울은 인간적으로 볼 때 엘리트 중의 엘리트였습니다. 그는 학문적으로도 누구도 따라갈 수 없는 사람이었습니다(빌3:4-6). 그리고 영적으로는 더 말할 것도 없습니다. 그는 많은 교회를 개척했습니다. 그러나 그는 늘 비천한 자신을 구원하신 하나님을 기억했습니다. 그는 고린도전서 15:10절에서 이렇게 간증했습니다. \"그러나 나의 나 된 것은 하나님의 은혜로 된 것이니, 내게 주신 그의 은혜가 헛되지 아니하여, 내가 모든 사도보다 더 많이 수고하였으나 내가 아니요, 오직 나와 함께 하신 하나님의 은혜로라.\" 우리는 과거에 형편없던 죄인들이었습니다. 우리는 거짓과 위선과 정욕으로 병든 자들이었습니다. 우리는 부모와 조상의 망령된 행실을 미워하면서도 이를 좇던 자들이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보배로운 피로 구원받고, 하나님의 거룩한 자녀가 되었습니다. 우리는 비천한 자신을 구원하신 하나님 앞에서 자신의 존재 의미를 찾을 수 있어야 하겠습니다.

둘째로 예수님의 사랑에 대한 믿음이 있었습니다. 여인이 모욕적인 말을 들었지만 예수님의 사랑을 조금도 의심치 않았습니다. 믿음이란 어떤 경우에도 하나님을 전폭적으로 신뢰하고 그 사랑을 의심치 않는 것입니다. 아브라함이 사랑하는 독자 이삭을 바치라는 말씀에도 순종할 수 있었던 것은 하나님을 전폭적으로 신뢰하고 그의 사랑을 조금도 의심치 않았기 때문입니다. 어떤 어려운 형편에 처할지라도 하나님을 전폭적으로 신뢰하고, 그의 사랑을 의심치 않을 때 여유를 갖고 승리할 수 있습니다. 바울은 어떤 역경과 환난 가운데서도 주님의 사랑을 의심치 않았습니다. \"내가 확신하노니 사망이나 생명이나 천사들이나 권세자들이나 현재 일이나 장래 일이나 능력이나 높음이나 깊음이나 다른 아무 피조물이라도 우리를 우리 주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하나님의 사랑에서 끊을 수 없으리라(롬8:38,39).\"

셋째로 딸에 대한 애타는 심정이 있었습니다. 아무리 딸이지만 흉악한 귀신들린 딸을 사랑한다는 것은 쉽지 않습니다. 정박아 수용소에 가 보면 부모들이 감당할 수 없어 버린 아이들로 가득 차 있습니다. 그러나 마태복음 15:25절을 보면 \'저를 도와 달라\' 고 기도했습니다. 그녀는 자신의 딸의 아픔을 자기의 아픔으로 여겼습니다. 딸의 아픔을 자신의 아픔으로 여겼을 때 자신의 모든 문제를 넘어서서 주님께 나와 기도할 수 있었습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알지 못해 방황하는 양떼들의 아픔을 나의 아픔으로 여길 때 상황과 조건과 신분을 벗어나 주님께 중보기도할 수 있습니다. 바로 딸에 대한 뜨거운 마음이 있었을 때 그녀가 믿음의 여인이 될 수 있었습니다. 딸에 대한 불타는 사랑이 있었을 때 어떤 수치나 모욕도 감당할 수 있었습니다. 우리도 양을 구원하고자 하는 사랑이 있을 때 어떤 형편 가운데서도 주님께 간절히 매달릴 수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의 심령은 뜨거운 마음이 없고 덤덤합니다. 그리하여 여름 수양회에 양들을 초청하지 못합니다. 우리의 심령에 양들에 대한 뜨거운 사랑이 없음을 애통해 합니다. 주님 뜨거운 마음을 주십시오.

넷째로 예수님의 주권을 인정했습니다. 여인은 무시를 받으면서도 \'주여!\' 했습니다. 그녀는 예수님을 \'주\'로 영접했습니다. 그녀는 예수님께서 자신에게 구원을 베풀고 안 베푸는 것은 전적으로 주님께 있음을 영접했습니다. 구원은 예수님의 선물이지 의무가 아님을 알았습니다. 대개 사람들이 마음이 삐뚤어지는 것은 하나님의 주권을 영접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은혜를 당연한 권리로 생각합니다. 그래서 조금 기도하고 나서 기도를 들어주시지 않으면 하나님을 원망합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기도가 응답되면 사람들은 자기가 잘나서 그런 줄 알고 교만하게 됩니다. 우리가 하나님께 대한 선한 주권을 영접하지 않을 때 자신도 모르게 원망하고 앙칼지게 대들기 쉽습니다. 그러나 선한 주권을 영접하게 되면 어떤 형편 속에서도 하나님을 신뢰할 수 있습니다. 매사 하나님께 감사하고 기뻐할 수 있습니다. 욥은 부자로 다복한 한 가정의 가장이었습니다. 그런데 어느날 사단의 시기로 가족을 다 잃고 온 몸은 욕창이 나 너무 괴로워서 기와 조각으로 몸을 긁고 있었습니다. 이 때 아내가 하나님을 저주하고 죽으라고 했습니다. 그러나 그는 하나님의 주권을 영접하고 이렇게 대답했습니다. \"우리가 하나님께 복을 받았은즉 재앙도 받지 아니하겠느뇨(욥2:10).\" 그는 선한 주권신앙을 소유한 믿음의 사람이었습니다. 그 후 그는 잃었던 모든 것을 얻을 수 있었습니다. 그렇습니다. 하나님은 주권자가 되셔서 그의 선한 주권대로 역사하십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선한 길로 인도하시고 가장 좋은 것을 주십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어떤 상황에서도 하나님을 신뢰할 수 있고, 기도할 수 있고, 감사할 수 있고, 언제든지 \"주여! 옳소이다\" 할 수 있습니다. 그 때 그녀는 예수님께 나와 긍휼을 구할 수 있었습니다.

둘째, 이 말을 하였으니(29,30). 29절을 보십시오. \"예수께서 가라사대 이 말을 하였으니 돌아가라 귀신이 네 딸에게서 나갔느니라 하시매\" 예수님은 이 여인의 복음적인 말에 감동을 받았습니다. 마태복음 15:28절에는 \"여자야 네 믿음이 크도다\" 했습니다. 예수님은 여인의 믿음에 감동을 받으시고 그 믿음을 축복하셨습니다. \"이 말을 하였으니 돌아가라.\" \'이 말을 하였으니\' \'말\'이란 참으로 중요합니다. 말은 그 사람의 인격과 사상의 표현입니다. 불신적인 사람은 불신적인 말만 합니다. 마가복음 7:21-23절을 보면 악한 생각을 하는 사람, 악한 마음을 가진 사람은 그 입에서 악한 말을 한다고 하였습니다. 깡패들이 쓰는 단어는 폭력적이고 상스럽습니다. 탐욕적인 사람들은 그 말하는 것이 탐욕스럽습니다. 정욕적인 사람들은 그 말하는 것이 정욕적입니다. 마음이 복음화되지 않은 사람은 자신도 모르게 유행가와 상스러운 말이 튀어 나옵니다. 그러나 복음화된 사람은 자신도 모르게 찬양이 흘러 넘칩니다. 사람들에게 믿음을 심고, 힘을 주고, 소망을 심고, 비전을 심습니다. 이처럼 말은 사람을 죽이기도 하고 살리기도 합니다. 그래서 우리 속담에 \'말 한 마디로 천 량 빚을 갚는다\' 는 말이 있습니다. 이처럼 말은 중요합니다. 우리는 믿음의 필터로 말을 삼가야 하겠습니다. 정수기의 필터 기능이 마비되면 물을 정수할 수 없습니다. 이 여인도 사람이기 때문에 자존심이 있습니다. 그것도 헬라 여인입니다. 속에서 많은 생각이 오갈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녀는 믿음의 필터로 그 모든 악한 생각을 배제했습니다. 그에게도 불신과 회의의 말이 있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녀는 믿음의 필터로 자신을 이겼습니다. 믿음의 필터는 그녀를 겸손케 하였고 은혜만을 간구케 했습니다. 이 때 예수님은 그녀의 복음신앙을 기뻐하시고 이를 축복하셨습니다. \"귀신이 네 딸에게서 나갔느니라.\" 그녀가 집에 돌아가 보니 아이에게서 귀신이 나가 온전해져 있었습니다(30). 오늘날 사회가 이처럼 험악한 것은 믿음의 필터 기능이 마비되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사회는 시끄럽습니다. 나오는 대로 말을 내뱉기 때문에 사회는 거칠어집니다. 우리는 믿음의 필터로 인본적이고 죄악된 말을 삼가야 하겠습니다.

그리고 이 여인은 상황이 어떠하든, 예수님께서 무슨 말씀을 하시든 기도했습니다. 우리는 기도하다가 안 되면 기도를 포기합니다. 그러나 그녀는 끈질기게 기도했습니다. 그녀는 과부의 한 맺힌 기도를 했습니다. 그녀는 자기를 부인하고 끝까지 기도했습니다. 예수님은 그녀의 중보기도를 기뻐 받으셨습니다. 우리가 양들을 위해서 끈질기게 중보기도할 때 예수님은 기도를 들으시고 그에게 위대한 일을 행하십니다. 우리는 자녀들이나 양들의 마음을 변화시킬 수는 없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그들의 회심을 위해 기도할 수 있습니다. 이 때 하나님은 우리의 중보기도를 받으셔서 양들의 마음을 변화시켜 주십니다. 모니카는 탕자 어거스틴을 위해서 일생동안 중보기도했습니다. 하나님은 모니카의 중보기도를 들으시고 그를 위대한 하나님의 종이 되게 하셨습니다. 우리가 선교사들과 목자를 위해서 기도할 때 하나님은 우리의 기도를 들으셔서 그들을 통해 반드시 큰 역사를 이루십니다. 그런데 중보기도는 자신을 위해서 진실되게 기도하는 사람만이 할 수 있습니다. 실로 나를 위해 기도하는 한 사람만이라도 있다면 그 사람은 축복받은 사람입니다. 그 사람이 당장은 변화되지 않을지라도 끝까지 중보기도합시다. 우리의 당대에 이루어지지 않을지라도 중보기도를 해야 할 것입니다. 우리 당대에 세계가 복음화가 안 된다 할지라도 끝까지 세계 지성인들을 위해서 중보기도해야 할 것입니다. 여름 수양회 초청 역사가 부진합니다. 그러나 우리가 끝까지 중보기도할 때 하나님은 저희의 기도를 응답하여 주실 것입니다.

셋째, 에바다(31-37). 예수님은 이방 지역을 두루 심방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이방 땅에 복음을 심고자 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이방 선교를 위해 열정을 쏟으셨습니다. 예수님께서 데가볼리에 이르셨을 때였습니다. 귀 먹고 어눌한 한 사람이 사람들에 의해 나왔습니다. 귀가 먹고 어눌하니 오해가 많았을 것입니다. 한 마디도 통하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예수님께 안수하여 고쳐주기를 바랬습니다. 예수님은 그를 인격적으로 고쳐 주고자 따로 데리고 갔습니다. 예수님은 그를 데리고 가서 손가락으로 양 귀에 넣고 침을 뱉아 그의 혀에 대시고 하늘을 우러러 탄식하시며 말씀하셨습니다. \"에바다!\" 이는 열리라는 뜻입니다(34). 그 때 그의 귀가 뚫리고 입이 열렸습니다.

오늘날도 귀 먹고 어눌한 자가 많습니다. 영적으로 꽉 막혀 예수님의 말씀을 이해할 수 없습니다. 영적인 뜻을 분별할 수 없습니다. 참으로 답답합니다. 이런 사람들은 귀가 뚫리고 혀가 풀려야 합니다. 귀가 뚫리고 혀가 풀릴 때 영적 세계를 밝히 볼 수 있고, 말할 수 있습니다. 사도 바울은 이렇게 말했습니다. \"우리가 이제는 거울로 보는 것 같이 희미하나 그 때에는 얼굴과 얼굴을 대하여 볼 것이요, 이제는 내가 부분적으로 아나 그 때에는 주께서 나를 아신 것 같이 내가 온전히 알리라(고전13:12).\"

수로보니게 여인은 이방 여인이었지만 믿음이 있었습니다. 그녀는 마음으로 예수님을 경외하며 겸손히 은혜를 구했습니다. 예수님은 그의 믿음과 기도를 기뻐하시고 축복하셨습니다. 우리 중에 수로보니게 여인과 같은 위대한 믿음의 여성들이 많이 나오도록 기도합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