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1강 마가복음 9장 강해

너희는 저의 말을 들으라


마가복음 (9:1-13)



\"마침 구름이 와서 저희를 덮으며 구름 속에서 소리가 나되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니 너희는 저의 말을 들으라(7).\"

마가복음 1장에서 8장까지를 전반부라고 하면 9장부터는 후반부라고 할 수 있습니다. 전반부에서 우리는 \'예수님은 누구신가?(Who is Jesus?)\' 예수님의 인격에 대해 공부했습니다. 후반부인 9-16장에서는 \'예수님은 무엇을 하셨는가?(What has Jesus done?)\' 예수님의 사역에 대해서 배울 수 있습니다.

오늘 말씀은 예수님께서 제자들과 함께 높은 산에 올라가 영광스러운 모습으로 변형되신 사건입니다. 이 변형되신 사건은 예수님의 성육신, 십자가의 죽으심, 부활 및 승천과 더불어 예수님 생애에 있어 중요한 사건 중의 하나입니다. 예수님께서 변형되신 사건은 십자가 후에 일어날 부활의 영광스러운 모습을 예표적으로 보여 주신 것입니다. 이 시간 우리가 말씀을 통하여 영광스러우신 예수님의 모습을 내면에 조각할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또한 우리 주님의 음성을 듣고 순종하는 삶을 살기를 기도합니다.

첫째, 변형되신 예수님(1-3). 1절을 보십시오. \"또 저희에게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여기 섰는 사람 중에 죽기 전에 하나님의 나라가 권능으로 임하는 것을 볼 자들도 있느니라 하시니라.\" 이 말씀은 가까이는 제자들이 변화산에서 변형되실 예수님을 볼 사건을 가르키는 말씀이요, 멀리는 오순절 성령 강림의 역사와 복음의 폭발적인 확산을 통한 하나님 나라의 확장을 의미합니다. 2,3절을 보십시오. \"엿새 후에 예수께서 베드로와 야고보와 요한을 데리시고 따로 높은 산에 올라가셨더니, 저희 앞에서 변형되사 그 옷이 광채가 나며 세상에서 빨래하는 자가 그렇게 희게 할 수 없을 만큼 심히 희어졌더라.\" \'엿새 후\' 는 예수님께서 베드로의 신앙 고백을 들으시고 십자가의 고난과 부활에 관한 말씀을 하신 6일째 후를 말합니다. 성경 저자가 이처럼 엿새 후라고 구체적인 날짜를 제시하는 이유는 변화산에서의 예수님의 변형이 허무맹랑하고 신화적인 이야기가 아니라 역사적인 사실임을 밝히기 위함입니다. 제자들은 예수님으로부터 십자가에 관한 이야기를 듣자 근심과 두려움이 생겼습니다. 그들의 얼굴은 갑자기 어두워졌습니다. 예수님은 이런 제자들 가운데 세 제자만 데리고 높은 산에 오르셨습니다. 여기서 \'높은 산\' 은 헬몬 산을 말합니다. 이 산은 일명 설산이라 할만큼 항상 눈으로 덮여 있는 아름다운 산입니다. 예수님은 이 곳에서 세 제자에게 변형된 모습을 보여 주셨습니다. \'변형되었다\'는 것은 헬라어로 \'메타모르포데(μεταμορφωφη)\'로 외형의 변화가 아닌 본질적인 변화를 의미합니다. 변형되신 예수님의 옷은 최신형 손빨래 세탁기나 공기 방울 세탁기로 빨아도 그렇게 희게 할 수 없을 정도로 심히 희어졌으며, 옷은 번쩍번쩍 광채가 났습니다.

그러면 예수님은 왜 세 제자만 데리고 산에 오르셔서 변형되셨습니까? 아마도 세 제자가 십자가를 가장 부담스러워 했던 것 같습니다. 그들은 예수님께서 기도 모임이나 ATM 모임을 갖자고 하면 \'또 십자가 이야기를 하시겠지\' 하며 인상을 쓰며 몸을 비틀었습니다. 또 베드로는 신앙 고백으로 예수님께 인정을 받았다가 사단이라고 책망을 받아 밥맛도 잃고 의기소침해 있었습니다. 그래서 이들에게 십자가를 통한 영광을 보여 주시기 위해 세 제자만 데리고 올라가셨습니다. 그리고 예수님께서 세 제자만 데리고 올라가심은 수제자를 양성하시고자 함에 있습니다. 예수님은 야이로의 딸을 살리실 때나 겟세마네에서 기도하실 때와 같이 중요한 일이 있을 때마다 세 제자를 데리고 가셨습니다. 예수님께서 이처럼 수제자를 양성하시고자 하실 때 제자들의 공동체에 금이 갈 수 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베드로를 중심으로 한 야고보, 요한의 분명한 영적 질서를 세워서, 하나님의 구원 역사를 계속 이루어 나가고자 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 수제자 양성에 힘쓰셨을 때 후에 그들은 교회의 기둥이 되어 영광스러운 예수님의 부활의 증인들이 되었습니다.

그러면 변화산에서 변형되기 이전 예수님의 모습은 어떠했습니까? 예수님은 가난하고 병든 죄인들을 섬기시느라고 지칠 대로 지쳐 있었습니다. 예수님은 양들의 죄악과 허물, 슬픔과 운명을 담당하시느라고 파김치처럼 되셨습니다. 예수님은 모든 사람들로부터 멸시, 천대를 받고 조롱과 미움을 받으셨기 때문에 슬픔의 사람이 되셨습니다. 예수님의 옷은 남루했습니다. 예수님은 유행과 전혀 거리가 먼 차림으로 다니셨습니다. 예수님의 얼굴은 문제 많은 양들로 인해 마른 덩굴처럼 되셨고, 중동의 강렬한 태양 빛에 그을려 시커멓게 되었을 것입니다. 새도 저물면 찾아가 쉴 둥지가 있고, 여우도 굴이 있지만 예수님은 누우실 곳 하나 없었습니다. 일찌기 이사야 선지자는 예수님에 대해서 이렇게 예언했습니다. \"그는 주 앞에서 자라나기를 연한 순 같고 마른 땅에서 나온 줄기 같아서 고운 모양도 없고 풍채도 없은즉 우리의 보기에 흠모할 만한 아름다운 것이 없도다 그는 멸시를 받아서 사람에게 싫어 버린 바 되었으며 간고를 많이 겪었으며 질고를 아는 자라 마치 사람들에게 얼굴을 가리우고 보지 않음을 받는 자 같아서 멸시를 당하였고 우리도 그를 귀히 여기지 아니하였도다(사53:2,3).\"

그러나 예수님의 본래 모습은 이런 분이 아니십니다. 예수님은 본래 천지를 창조하신 권능의 하나님이십니다. 예수님은 거룩하시고 영광스러운 분이십니다. 예수님은 죄인들이 감히 그 앞에 설 수 없는 영광스럽고 찬란하신 분이십니다. \'흰 옷\' 은 영광과 권세, 거룩함과 순결, 승리의 상징입니다. 사도 요한은 밧모 섬에서 영광스러운 예수님, 거룩하시고 순결하신 예수님, 승리의 예수님을 보았습니다. \"촛대 사이에 인자 같은 이가 발에 끌리는 옷을 입고, 가슴에 금띠를 띠고, 그 머리와 털의 희기가 흰 양털 같고 눈 같으며, 그의 눈은 불꽃 같고, 그의 발은 풀무에 단련한 빛난 주석 같고, 그의 음성은 많은 물소리와 같으며, 그 오른 손에 일곱 별이 있고, 그 입에서 좌우에 날선 검이 나오고, 그 얼굴은 해가 힘있게 비취는 것 같더라(계1:13-16).\" 예수님은 가슴에 금띠를 띤 왕이십니다. 예수님은 머리털의 희기가 흰 양털 같이 순결하시고 거룩하십니다. 그의 눈은 불꽃 같이 영적인 통찰력이 있어 그 앞에서는 죄악을 숨길 수 없습니다. 발은 추하고 더러운 것이지만 예수님의 발은 빛난 주석과 같이 심판의 권세가 있습니다. 그의 음성은 나이아가라 폭포와 같이 우렁차고 청아했습니다. 그의 입에는 혼과 영과 골수를 쪼갤 수 있는 말씀이 있습니다. 그의 얼굴은 해가 힘있게 비취는 것과 같이 힘과 소망이 있습니다. 이 예수님을 영접할 때 우리의 눈동자는 초롱초롱 빛나고, 검고 창백한 우리의 얼굴은 환하게 됩니다. 그의 오른손에는 일곱 별이 찬란히 빛났습니다. 이는 전 세계 교회를 말합니다. 예수님은 전 세계의 교회를 통치하십니다. 요한은 이 예수님을 똑바로 쳐다볼 수가 없었습니다. 이처럼 예수님은 영화로우시고 영광스럽고 거룩하신 분이십니다. 예수님은 하늘 나라의 높은 보좌에 앉으셔서 인생들을 구원하시고 심판하시는 분이십니다. 예수님은 생명의 주이십니다. 예수님은 장차 영광 가운데 다시 오실 만왕의 왕이십니다(막8:38). 예수님은 우리의 경배와 찬양을 받으시기에 합당하신 분이십니다(계5:2). 그런데 예수님께서 영광과 경배를 받기 위해서는 십자가에 돌아가셔야만 합니다. 이것이 구약에 예언된 메시야관이요, 구원 역사 방법입니다. 그런데 제자들은 이 엄청난 구원의 도리를 이해할 수 없었고, 영접할 수 없었습니다. 예수님은 이런 제자들에게 영광스러운 부활의 모습을 보여 주심으로 십자가의 복음을 심으셨습니다. 베드로는 후에 이 변형되신 예수님을 보고 예수님께서 영광으로 다시 오실 것을 증거했습니다(벧후1:16,17).

우리는 예수님을 생각하면 영광과 거룩함보다 예수님을 믿고 고난받고 무시받는 성도들을 생각하기 쉽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을 자신의 처지에 맞춰서 생각합니다. 김요나단 목자님은 예수님하면 늘 여유가 없어 쪼들리시는 예수님을 연상합니다. 김안드레 목자님은 잠이 부족하여 졸리신 예수님, 수잔나 사모님은 우수에 젖으신 예수님, 한한나 목자님은 고독하신 예수님, 이바나바 목자님은 굶기를 밥먹 듯하시는 예수님을 떠올립니다. 어떤 분은 항상 배척받으시는 예수님, 어떤 분은 초라하신 예수님을 생각하기 쉽습니다. 이처럼 사람들은 부활의 승리보다 십자가에 돌아가신 슬프고 처절하신 예수님만을 생각하기 쉽습니다. 그래서 신앙 생활이란 십자가를 지고 죽도록 고생만 하다가 끝나는 것으로 생각하여 부담을 느낄 때가 있습니다. 사실 우리는 신앙 생활을 할 때 많은 고난을 당합니다. 학생 목자들은 버스 토큰 밖에 없는데 물질을 드려 헌신합니다. 사모님들은 아기를 맡기고 양들을 돕는 것이 쉽지 않습니다. 아기까지 맡기고 심방갔는데 양들로부터 바람맞고 이상한 사람 취급받을 때 말할 수 없는 고독감을 느끼기도 합니다. 사랑과 진심을 다 쏟아 부어 섬겼는데도 목자의 가슴에 상처만 주고 떠나가는 양들, 얄미운 그 사람이 아니라 얄미운 양으로 인해 가슴이 찢어질 것 같을 때가 한 두 번이 아닙니다. 이런 때 떠오르는 예수님은 죽도록 고난을 당하시고 죽으신 예수님, 슬픈 예수님의 모습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언제나 십자가 고난 후에 임할 흰 옷 입으신 영광스러운 예수님의 모습을 새겨야 합니다. 부활하신 예수님, 승리의 예수님, 빛나고 높은 보좌에 오르신 예수님, 장차 오실 영광의 예수님을 바라보아야 합니다. 이 예수님을 바라볼 때 현재 당하는 나의 내면의 모든 슬픔과 고통과 고독과 아픔이 눈녹 듯이 사라지게 됩니다. 이 예수님을 마음에 새길 때 결코 십자가가 부담스럽지 않습니다. 십자가가 부끄럽지 않습니다. 이 때 십자가는 영광의 십자가가 됩니다. 바울이 그토록 십자가를 사랑했던 이유는 장차 임할 영광의 면류관을 바라보았기 때문입니다. \"내가 선한 싸움을 싸우고 나의 달려갈 길을 마치고 믿음을 지켰으니 이제 후로는 나를 위하여 의의 면류관이 예비되었으므로 주 곧 의로우신 재판장이 그 날에 내게 주실 것이니, 내게만 아니라 주의 나타나심을 사모하는 모든 자에게니라(딤후4:7,8)\" 그는 이렇게 간증했습니다. \"생각컨대 현재의 고난은 장차 우리에게 나타날 영광과 족히 비교할 수 없도다(롬8:18).\" 베드로는 십자가를 부담스러워 해서 할 수만 있으면 피하고자 했습니다. 그러나 그가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났을 때 십자가에 대한 자세가 달라져 고난받는 성도들을 권면하고 있습니다. \"사랑하는 자들아 너희를 시련하려고 오는 불 시험을 이상한 일 당하는 것 같이 이상히 여기지 말고, 오직 너희가 그리스도의 고난에 참예하는 것으로 즐거워하라(벧전4:12,13a).\" 베드로의 심령에는 고통스럽고 어두운 십자가의 그림자가 사라지고 영광스러운 부활의 모습이 조각되기 시작했습니다. 우리는 눈을 들어 흰 옷을 입으신 영화로우신 예수님을 바라보아야 합니다. 이 예수님을 생각하며 찬송가 87장을 불러 봅시다. \"내 주님 입으신 그 옷은 참 아름다워라. 그 향기 내 맘에 사무쳐 내 기쁨되도다 시온 성보다 더 찬란한 저 천성 떠나서 이 천한 세상 오신 주 참 내 구주님.\" 예수님은 영광과 존귀를 받으시기에 합당하신 주님이십니다. 이 예수님을 섬길 수 있는 은혜를 주신 하나님을 찬양합니다.

둘째, 너희는 저의 말을 들으라(4-8). 제자들은 변형되신 예수님의 모습을 보고 깜짝 놀랐습니다. 그런데 잠시 후 그들은 더 놀라운 광경을 보게 되었습니다. 4절을 보십시오. \"이에 엘리야가 모세와 함께 저희에게 나타나 예수로 더불어 말씀하거늘\" 이들이 바로 이 때 나타난 것은 예수님의 십자가의 죽으심을 준비하기 위함입니다. 누가복음 9:31절을 보면 이들의 대화 내용은 예루살렘에서 있을 예수님의 십자가 죽으심에 관한 것이었습니다. 예수님은 엘리야와 모세와 대화하심으로 자신의 십자가 죽으심의 의미를 제자들에게 가르쳐 주고자 하셨습니다. 제자들은 예수님의 죽으심을 보통 사람들의 죽음과 같은 것으로 이해했습니다. 죽음은 모든 것의 끝이요, 패배요, 실패로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베드로는 예수님께서 죽으셔야 한다고 할 때 결사반대하였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죽으심은 보통 사람의 죽음과는 전혀 다릅니다. 모세는 율법의 대표요(출19:90), 엘리야는 선지자의 대표입니다(말4:6). 그러므로 예수님은 율법과 선지자에 의해서 예언된 메시야입니다. 그리고 모세와 엘리야의 공통점을 살펴보면 자기 백성을 죄에서 구원하기 위하여 많은 고난을 받은 고난의 종들이라는 것입니다. 모세는 애굽에서 노예 생활을 하던 이스라엘을 출애굽시키기 위해 많은 고난을 받은 하나님의 종이었습니다. 엘리야는 북이스라엘 아합 왕 때 아합 왕과 이세벨과 싸우며 당시 우상 숭배에 빠진 백성들을 구원하느라고 많은 고난을 받았습니다(왕상19장). 그러나 이들은 고난을 통하여 영광과 기쁨을 얻었습니다. 모세는 하나님을 직접 대면하는 영광을 얻었고, 엘리야는 죽음을 보지 않고 승천했습니다. 그러나 이들이 얻은 영광이 아무리 크다 해도 장차 오실 메시야의 영광과 족히 비교할 수 없습니다. 예수님은 이들과 대화하심으로 십자가 뒤의 영광이 얼마나 영광스럽고 아름다운가를 새롭게 하여 주셨습니다. 이 광경을 본 베드로의 반응이 어떠했습니까? 5절을 보십시오. \"랍비여 우리가 여기 있는 것이 좋사오니 우리가 초막 셋을 짓되 하나는 주를 위하여, 하나는 모세를 위하여, 하나는 엘리야를 위하여 하사이다 하니\" 베드로는 예수님께서 변형되신 이 장면의 중대함과 장엄한 뜻을 알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그는 초막 셋을 지어 옹기종기 모여 살자고 제안했습니다. 그의 이 말은 예수님과 모세와 엘리야를 위해서 하는 말 같지만 그 속 마음은 자신들을 위해서 그렇게 하자는 것입니다. 베드로는 초막 셋을 지어 자신은 예수님의 비서실장이 되어 모시고 살고, 야고보는 모세의 비서실장, 요한은 엘리야의 비서실장이 되게 하자는 것입니다. 6절을 보면 저자는 이 상황에 대해서 \"이는 저희가 심히 무서워함으로 저가 무슨 말을 하는지 알지 못함이더라\" 라고 설명하고 있습니다. 즉 베드로가 너무나 놀란 나머지 자기도 모르게 말을 내뱉은 것입니다. 이는 그의 잠재의식 가운데 숨어 있던 속 생각이 무의식적으로 튀어 나온 것입니다.

그 동안 베드로는 예수님을 따르기 위하여 많은 고생을 했습니다. 식사하실 겨를도 없이 열정적으로 복음을 전하시는 예수님을 따라 다니다 원치 않게 밥을 굶은 적이 한 두 번이 아니었습니다. 배가 고파 길에 있는 밀이삭을 좀 잘라 먹으면 바리새인들이 어느새 현장에서 포착하여 정죄의 손가락질을 하였습니다. 예수님의 수제자 자리를 놓고 벌이는 요한과 야고보와의 보이지 않지만 불꽃 튀는 경쟁은 그의 영혼을 몹시 피곤하게 하였습니다. 더군다나 요즘 들어 예수님의 제자훈련 강도가 점점 강해지고 십자가가 무겁게만 느껴졌습니다. 그는 더 이상 고생하고 싶지 않았습니다. 산 밑으로 내려가고자 할 때 성격 문제로 동역하기 어려운 다른 제자들과 귀신들려 날뛰는 무리들과 말썽피는 양들의 얼굴이 떠올랐습니다. \'앞으로 얼마나 더 많은 고난이 남아 있을까? 얼마나 더 자신을 희생해야 하는가?\' 이런 저런 생각을 하니 산 아래로는 내려가고 싶지 않았습니다. 그는 더 이상 무거운 십자가를 감당하고 싶지 않았습니다. 변화산에 있는 동안 그는 모든 근심과 시름을 떨쳐 버릴 수 있었습니다. 그는 변화산에서의 이 십자가 없는 영광이 영원히 지속되길 바랬습니다. 그는 아름다운 헬몬 산 위에 아담한 one room 초막을 짓고 사랑하는 예수님을 모시고 영원히 행복하게 살기를 원했습니다. 베드로의 이런 신앙을 일컬어 초막 신앙이라고 합니다. 이런 초막 신앙은 현대인들의 내면 깊은 곳에 잠재해 있습니다. 초막 신앙의 특징은 비전도 사명도 없는 것이요, 십자가 없는 영광만을 추구하는 것입니다. 우리에게도 쉽게 편하게 영광만을 누리고자 하는 초막 신앙이 있습니다. 수양회에 양들을 많이 초청하길 원하지만 심방하고 fishing하기는 싫어합니다. 많은 열매를 맺는 풍성한 삶을 살길 원하지만 영적으로 투쟁하는 삶을 살기를 원치 않습니다. House Church가 되어 헌신하고 섬기는 삶을 살기보다 비둘기 둥지를 이루어 그 안에서 살고자 합니다. 세계 선교 일선에 나아가 적극적으로 고난을 받기보다 본국에 남아 적당히 안주하며 중심이나 지키고자 합니다. 바로 이런 초막 신앙은 우리가 싸워 이겨야 할 대적입니다. 예수님은 적극적으로 고난을 감당하셨습니다. 이를 통하여 영광을 얻으셨습니다. NO cross, no crown. 이는 불변의 진리입니다. 크리스챤은 예수님을 배우는 자들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초막에 머물러 영광만을 누리고자 하는 생각을 회개하고 적극적으로 예수님을 따르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7절을 보십시오. \"마침 구름이 와서 저희를 덮으며 구름 속에서 소리가 나되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니 너희는 저의 말을 들으라 하는지라.\" 구름은 하나님의 임재를 가르킵니다(출24:15,16). 하나님은 제자들에게 예수님을 나의 사랑하는 아들이라고 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 예수님을 내 사랑하는 아들이라고 직접 계시하신 것은 \'예수님의 메시야 대관식 때(막1:11)\'와 \'십자가를 지시기 전(요12:28)\' 입니다. 이 사실에서 볼 때 성부의 출현은 예수님 사건의 중요한 때에 나타나심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변화산에서의 예수님의 변형이 얼마나 중요한 사건인가 알 수 있습니다. 하나님은 제자들에게 \'너희는 저의 말을 들으라\' 하고 말씀하셨습니다. 이 말씀을 통해서 제자들이 현재 예수님의 말씀을 전혀 영접하지 않고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그들은 자기들이 듣기 좋은 말은 잘 영접하였습니다. 그러나 십자가, 고난, 희생과 같이 부담스러운 말씀은 아예 귀마개를 하고 듣지 않았습니다. 하나님은 이런 제자들을 돕기 위해서 나타나셔서 말씀으로 예수님을 지원해 주셨습니다. 그러면 \'너희는 저의 말을 들으라\' 이 말씀이 오늘날 우리에게는 어떤 의미가 있습니까? 디모데후서 4:3,4절은 다음과 같이 말씀합니다. \"때가 이르리니 사람이 바른 교훈을 받지 아니하며 귀가 가려워서 자기의 사욕을 좇을 스승을 많이 두고 또 그 귀를 진리에서 돌이켜 허탄한 이야기를 좇으리라.\" 이 말씀처럼 사람들은 진리의 말씀에 관심을 갖지 않고 귀를 기울이지 않습니다. 사람들은 자신에게 유익이 되는 소리에 관심을 가지고 귀를 쫑긋 세우고 듣습니다. 요즘 사람들이 가장 관심을 가지고 듣는 소리는 재산을 손쉽게 늘리는 재테크에 관한 이야기입니다. \'돈을 벌려면 우량주를 사야 한다, 정보 통신주가 가장 좋다\' 이런 이야기가 들리면 만사를 제쳐 두고 듣고자 기를 씁니다. 자매님들은 굶지 않고 살 빼는 방법이 있다는 소리가 들리면 어떻게든 듣고자 합니다. 그래서 요즘 드림다이어트, 한방다이어트, 영자의 다이어트 등이 인기를 끌고 있습니다. 또 사람들은 부담 없는 소리를 듣기를 좋아합니다. 그래서 요즘은 교회에서도 십자가에 관한 말씀보다는 위안의 메세지를 전하는 곳에 사람들이 많이 몰립니다. 제가 들은 이야기인데 요즘 성장하고 있는 모교회에서는 교회를 마치 에덴 동산처럼 아름답게 꾸며 놓고 메세지도 주로 십자가나 헌신에 대한 메세지보다 위로의 메세지만을 주로 전한다고 합니다. 때문에 이 곳에는 심리적 안정을 찾고자 하는 뜨내기 성도들이 많이 몰린다고 합니다. 그리고 요즘은 세기말적인 불안과 미래에 대한 호기심 때문에 점장이의 말에 귀를 기울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이런 세상의 소리에 귀를 기울여서는 되지 않습니다. 진리의 말씀, 하나님이 말씀에 귀를 기울여야 합니다. 사람이 어떤 소리를 듣느냐는 매우 중요합니다. 왜냐하면 이에 따라 그 사람의 삶이 달라지기 때문입니다. 사람이 세속주의와 쾌락주의의 소리를 들으면 세속적인 사람, 쾌락의 노예가 되어 버립니다. 사람이 내면의 절망의 소리를 들으면 소망을 잃어버리고 심하면 자살을 하게 됩니다. 세상의 상대적인 소리를 들으면 회의적이 되고 불신에 빠지게 됩니다. 자유주의 신학의 소리를 들으면 혼돈 가운데 빠져서 생명의 길을 갈 수 없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말씀은 내 발에 등이요 내 길에 빛이 되기 때문에(시119:105), 말씀을 들을 때 생명의 길을 갈 수 있고 영생을 얻을 수 있습니다. 또한 말씀은 우리에게 소망을 주고 영적인 힘을 줍니다. 하나님은 말씀하십니다. \"너희는 저의 말을 들으라.\" 우리는 이 시대에 예수님이 우리에게 주시는 말씀을 들어야 합니다. 부담스러울지라도 십자가에 대한 말씀을 듣고 순종하여야 합니다. 왜냐하면 말씀을 듣고 영접할 때 믿음이 자라고 견고해지기 때문입니다. 위대한 믿음의 사람들은 모두 말씀을 듣고 변화된 사람들입니다. 우리가 잘 아는 마르틴 루터는 로마서1:17절 말씀을 통해서 변화되었습니다. 또 어거스틴은 로마서13:12-14절 말씀을 통해 변화되었습니다. 이처럼 우리가 말씀에 순종할 때 말씀은 우리를 살리고, 값지게 하고, 위대케 하고, 열매를 맺게 합니다. 뿐만 아니라 구원에 이르게 하고 영광스러운 삶을 살게 합니다. 말씀을 듣는 것이 생명과 구원의 길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자기의 뜻을 하나님께 관철시키고자 애를 쓰지만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고자 하시는 메세지는 듣고자 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신앙이란 내가 원하는 것보다 예수님께서 원하시는 것을 듣고 순종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순수 복음 신앙입니다. 그런데 우리가 말씀을 듣기 위해서는 욕심과 사심을 버리고 성령으로 충만해야 합니다. 이 때 세미한 주님의 음성을 들을 수 있습니다.

8절을 보십시오. 제자들이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있을 때 예수님과 자기들만이 남아 있는 것을 보았습니다. 모세도, 엘리야도, 자기들의 아름다운 꿈과 이상도 어디론가 사라지고 오직 예수님만이 남았습니다. 우리는 여기에서 우리가 믿고, 소망하고, 따라야 할 분은 오직 예수님 밖에 없음을 알 수 있습니다. 양도, 동역자도, 자식도, 우리가 절대적으로 따르고 경배해야 할 대상이 되지 못합니다. 예수님만이 생명의 길, 완전한 길이십니다. 예수님만이 선한 목자가 되셔서 우리 생명을 보호하여 주시며, 우리의 슬픈 눈물을 닦아 주시며, 아픔을 어루만져 주십니다. 9-13절에서 예수님은 엘리야와 메시야의 관계에 대해 질문하는 제자들에게 성경에 기록된 참된 메시야관을 설명하여 주셨습니다. 성경에 기록된 메시야는 십자가 고난을 통하여 영광을 얻으시는 분이십니다. 그리고 구약에 예언된 엘리야는 세례 요한입니다. 그러나 백성들은 세례 요한을 목 베어 죽였습니다.

예수님은 영화로우시며 거룩하신 분이십니다. 예수님은 십자가를 통하여 이 영광을 얻으셔야 했습니다. 예수님은 영광을 얻기 위해 고통스럽고 외로운 십자가의 길을 걸으셔야만 했습니다. 우리도 영광을 얻기 위해서는 예수님이 가신 십자가의 길을 걸어야 합니다. 십자가의 말씀을 들어야 합니다. 예수님의 말씀이 부담스럽고 영접하기 힘이 들지라도 우리에게 생명을 주는 말씀이므로 들어야 합니다. 이 때 생명과 영광이 있습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