믿음의 능력, 기도의 능력 마가복음 제 (9:14-29) \"예수께서 이르시되 할 수 있거든이 무슨 말이냐 믿는 자에게는 능치 못할 일이 없느니라 하시니(23)\" 본문은 9:1-13절 말씀과 대조가 됩니다. 유명한 화가인 라파엘은 변화산 상의 영광스러운 광경과 산 아래의 참경을 화폭에다가 대조적으로 그렸습니다. 변화산 상은 영광과 거룩과 소망이 충만합니다. 그러나 산 아래는 치욕과 슬픔과 낙망이 가득합니다. 왜 그렇습니까? 그것은 믿음이 없는 세대이기 때문입니다. 믿음이 없는 세대는 죄악이 관영합니다. 믿음이 없는 세대는 소망이 없습니다. 믿음이 없는 세대는 더럽고 추합니다. 믿음이 없는 세대는 악령이 날뜁니다. 믿음이 없는 세대는 절대적인 가치관이 붕괴되어 혼돈과 공허와 어두움이 가득합니다. 이런 곳에는 하나님의 능력의 역사가 임할 수 없습니다. 하나님은 믿음이 있는 자에게, 믿음이 있는 곳에, 믿음이 있는 시간에 그 능력을 나타내십니다. 본문을 통해 예수님께 대한 믿음을 가지고 한계 상황에 도전하여 승리하기를 기도합니다. 첫째, 믿음이 없는 세대여(14-19)! 예수님은 세 제자와 함께 변화산에서 무리와 제자들이 기다리고 있는 산 아래로 내려 오셨습니다. 이 때 9명의 제자들이 많은 사람들에게 둘러싸여 비지땀을 뻘뻘 흘리며 서기관들과 변론하고 있었습니다(14). 이는 벙어리 귀신들린 어린 아이를 고치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아버지가 벙어리 귀신들린 어린 아이를 데리고 오자 제자들은 각기 귀신들린 아이를 고치고자 했습니다. 먼저 안드레가 \'예수의 이름으로 물러가라!\' 외쳤습니다. 그러나 귀신은 나가지 않았습니다. 그러자 도마가 \'아니야, 나사렛 예수가 빠졌어\' 하며 \'나사렛 예수의 이름으로 물러가라!\' 외쳤습니다. 그래도 귀신이 나가지 않았습니다. 그러자 제자들은 9명이 합심하여 외쳤습니다. \'귀신아 물러가라! 아멘.\' 그래도 귀신은 꼼짝하지 않았습니다. 이를 본 서기관들은 chance를 잡았다는 듯이 조롱하며 비난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러면 그렇지, 너희가 무슨 권세로 귀신을 내어 쫓고, 무슨 자격으로 복음을 전하느냐?\' 이 때 제자들은 이에 뒤질세라 열변을 토하며 변론했습니다. 그러나 복음을 전하는데 변론은 백해무익합니다. 그래서 성경은 변론을 경계합니다. \"어리석고 무식한 변론을 버리라. 이에서 다툼이 나는 줄 앎이라(딤후2:23).\" 변론은 자기를 광 내고, 자신의 무능력과 자신의 죄나 잘못을 합리화하고자 하는 데서 옵니다. 그러나 성경은 말합니다. \"하나님의 나라는 말에 있지 아니하고 오직 능력에 있음이라(고전4:20).\" 바로 이 때 예수님께서 오셨습니다. 무리들은 예수님의 얼굴에서 거룩함과 영광을 보고 심히 놀라며 인사했습니다. 또 제자들은 한참 몰리고 있는 상황에 예수님이 오시니 참으로 반가웠습니다. 이에 무리 중 하나가 예수님께 나아와 딱한 사정을 호소했습니다. 17,18절을 보십시오. \"선생님, 벙어리 귀신들린 내 아들을 선생님께 데려 왔나이다. 귀신이 어디서든지 저를 잡으면 거꾸러져 거품을 흘리며 이를 갈며 그리고 파리하여 가는지라. 내가 선생의 제자들에게 내어 쫓아 달라 하였으나 저희가 능히 하지 못하더이다.\" 이런 자식을 둔 아버지의 마음이 어떠했을까요? 부모는 자식이 조금만 아파도 걱정이 이만 저만이 아닙니다. 그런데 이 아이는 말을 못할 뿐 아니라 거꾸러져 눈을 부릅뜨고 거품을 흘리며 이를 갈며 파리하여지니 그 심정이 어떠했을까요? 그런 자식을 볼 때마다 아버지의 가슴은 갈기갈기 찢어질 것만 같았습니다. 사랑하는 아들이 죽은 사람처럼 되는 것을 볼 때마다 그 아버지도 죽은 사람처럼 되는 것만 같았습니다. 아버지는 언제 불에 들어갈 지, 물구덩이로 들어갈 지, 길을 가다가 넘어져 거품을 흘릴 지 늘 걱정이 되었습니다. 아버지는 아들을 고치기 위해 유명한 병원은 다 찾아가 보았습니다. 그러나 그는 고칠 수 없었습니다. 아버지는 이런 절실한 문제를 가지고 예수님께 나아왔습니다. 그러나 제자들은 고치지 못했습니다. 그러면 왜 그들은 아이를 고치지 못했을까요? 마가복음 6장을 보면 제자들은 귀신을 내어 쫓고 병자를 고친 적이 있습니다. 이들의 능력의 소식이 헤롯 궁에까지 들어가 헤롯은 혹시 자신이 목 베어 죽인 세례 요한이 다시 살아난 것이 아닌가 하고 두려움에 시달리기도 했습니다. 그런 능력을 행한 그들이 왜 귀신들린 어린 아이를 고치지 못하고 쩔쩔매고 있을까요? 귀신들린 어린 아이를 고치고자 하는 동기가 잘못되었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하나님 중심이 아닌 자기 중심적으로 그를 고치고자 했습니다. 그들은 목자의 심정보다 자기 광을 내고자 했습니다. 그들은 예수님이 베드로와 야고보, 요한만을 데리고 산상 수양회를 가신 것에 대해 심사가 편치 못했습니다. 왜 그들만 데리고 가셨을까, 예수님께서 그들과 장차 메시야 왕국을 건설할 내각을 구상하시는 것은 아닐까 등 헛 생각을 하고 있었습니다. 불쌍한 양을 돕기보다는 인간적인 생각에 빠져 있었습니다. 그 때 어린 아이를 고칠 리 없습니다. 그리고 그들은 예수님이 없는 틈을 이용하여 그 귀신들린 어린 아이를 고침으로 자신들의 능력을 인정받고자 하는 마음이 있었습니다. 그리고 그들은 과거의 경험을 의지했기 때문에 고칠 수 없었습니다. 하나님의 역사는 인간의 역사가 아니라 성령의 역사입니다. 그러므로 위로부터 능력을 덧입어야만 합니다. 그들이 처음 전도 여행을 할 때에는 오직 예수님만을 의지했습니다. 그러나 이제 그들은 예수님보다는 경험을 더 의지했습니다. 자신의 머리와 지혜를 의지했습니다. 이러했을 때 두 명이 합심하여 큰 일을 행했던 그들이 아홉 명이 합심해도 귀신 하나 내쫓지 못했습니다. 하나님의 역사는 과거에 내가 무엇을 했다는 것은 아무 소용이 없습니다. 과거에 큰 일을 행했어도 현재 믿음이 없으면 아무런 능력을 행할 수 없습니다. 하나님의 역사는 붕어빵을 만드는 기계처럼 능력을 복제하는 것이 아닙니다. 새 믿음, 산 믿음을 통해 능력을 나타내십니다. 동기와 목적이 순수할 때 능력을 행하십니다. 19절을 보십시오. \"믿음이 없는 세대여! 내가 얼마나 너희와 함께 있으며, 얼마나 너희를 참으리요, 그를 내게로 데려 오라 하시매\" 예수님은 어린 아이의 문제보다 믿음이 없는 세대를 보시고 탄식하셨습니다. 이는 탄식을 넘어선 예수님의 비애입니다. \'믿음이 없다\' 란 \'아피스토스\'로 \'믿음이 고갈된, 믿음이 전혀 없음\' 을 말합니다. \'세대\'란 동시대에 사는 모두를 포함합니다. 제자들과 서기관들, 아이 그리고 아이의 아버지와 무리들 모두 믿음이 없다는 것입니다. 특히 서기관들과 제자들을 가리킵니다. 서기관들은 그 시대의 양심의 심볼이었습니다. 그들은 가난과 악령에 시달리는 백성들의 성경 선생이요, 목자들이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그러하지 못했습니다. 그들은 악령에 시달리는 어린 아이를 돕고자 하는 심정이 없었습니다. 그들은 고치든, 못 고치든 간에 고치고자 애쓰는 제자들의 마음을 귀하게 여겨야 했습니다. 그런데 그들은 오히려 제자들을 비난만 하고 있습니다. 그들은 위선적이고 형식적이었습니다. 예수님은 그들을 보시고 통탄하셨습니다. 그러나 더 통탄하신 것은 제자들의 무능력이었습니다. \"믿음이 없는 세대여, 내가 얼마나 너희와 함께 있으며, 얼마나 너희를 참으리요?\"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여러 모양으로 믿음을 심으셨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예수님이 계시지 않았을 때 문제 앞에서 아무 것도 할 수 없었습니다. 그들은 전혀 믿음이 없었습니다. 예수님은 그런 그들을 책망하셨습니다. 그러면 믿음이 없다는 것은 무엇을 말합니까? \'믿음\'이란 하나님께 대한 바른 자세입니다. 인간의 하나님께 대한 자세는 경외하는 것이요, 만물에 대한 자세는 다스리는 것이고, 인간에 대한 자세는 서로 사랑하는 것입니다. 이 질서를 지키는 것이 바로 믿음입니다. 이 질서를 지킬 때 우리는 하나님의 형상인 의와 사랑과 거룩함을 소유할 수 있습니다. 이 질서가 깨질 때 사람들은 동물로 전락하여 물질과 쾌락의 노예가 됩니다. 사람이 물질과 정욕의 노예가 될 때 악령에 시달리게 됩니다. 오늘날 이 사회가 왜 이처럼 윤리와 도덕이 땅에 떨어져 짐승들이 사는 세계처럼 되어 가고 있습니까? 중산층의 유부녀들이 생활비를 보태기 위해, 심심해서 윤락행위를 하였다는 충격적인 보도가 있습니다. 오늘날 가정과 사회가 왜 이처럼 걷잡을 수 없이 흔들리고 있습니까? 이는 믿음이 없는 세대이기 때문입니다. 우리도 하나님과의 관계가 어그러져서 믿음을 잃게 될 때 헛 생각을 하게 되고, 정욕과 쾌락의 노예가 되는 것은 시간 문제입니다. 믿음이 없는 세대는 죄악이 관영합니다. 믿음이 없는 세대는 슬픔이 가득합니다. 믿음이 없는 세대는 소망이 없습니다. 믿음이 없는 세대는 더럽고 추합니다. 믿음이 없는 세대는 절대적인 가치관이 붕괴되어 혼돈과 공허와 어두움이 가득합니다. 믿음이 없는 세대는 악령이 판을 치게 됩니다. 믿음이 없는 세대는 소돔과 고모라와 같이 성도덕이 타락하여 동성연애가 난무하고, 근친상간이 성행하게 됩니다. 그러면 병든 사회를 어떻게 치료할 수 있습니까? 하나님께로 돌아와 믿음을 회복해야 합니다. 하나님께로 돌아와 하나님의 형상을 덧입어야 합니다. 우리의 내면에 하나님의 공의와 사랑과 거룩이 임해야 합니다. 이 때 병든 사회를 치료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은 말씀하십니다. \"믿음이 없는 세대여, 내가 얼마나 너희와 함께 있으며, 얼마나 너희를 참으리요?\" 이 시간에 내가 정말 믿음이 있는가, 믿음의 흉내만 내는 것은 아닌가 한 번 돌이켜 보아야 하겠습니다. 믿음이 없는 세대에 믿음을 소유하여 믿음의 역사를 이루기를 기도합니다. 우리의 모든 삶의 기초가 믿음에 기초한 삶이 되어야 하겠습니다. 둘째, 할 수 있거든이 무슨 말이냐(20-23). 20절을 보십시오. 아버지가 예수님께 아이를 데리고 오자 귀신은 더 발작하여 그 아이로 심히 경련을 일으키게 하고, 엎드러져 거품을 흘리게 했습니다. 이 때 아버지는 예수님께 데리고 와도 소용이 없구나 생각할 수 있습니다. 이처럼 귀신은 아버지에게 불신을 심었습니다. 이 때 예수님은 아버지에게 물었습니다. \'언제부터 이렇게 되었습니까?\' 지금 죽어 가고 있는 상황에 언제부터 이렇게 되었는가는 그렇게 중요한 것이 아닙니다. 당장 시급한 것은 고치는 것입니다. 그리고 언제부터 이렇게 되었느냐 물으셨기 때문에 이를 대답하려면 한참 걸리게 됩니다. 그렇게 되면 이 아이는 종치고 막 내리게 됩니다. 그런데도 예수님은 아이의 상황에 대해 자세히 묻습니다. 이는 예수님께서 몰라서 물으신 것이 아니라 아버지와의 관계성을 맺고자 함에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보실 때 아이의 병도 병이지만 아버지의 믿음을 돕는 것이 더 중요함을 아셨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아버지와 관계성을 맺고자 대화를 요청하신 것입니다. 이 때 아버지의 대답이 무엇입니까? 21b,22절을 보십시오. \"어릴 때부터니이다. 귀신이 저를 죽이려고 불과 물에 자주 던졌나이다. 그러나 무엇을 하실 수 있거든 우리를 불쌍히 여기사 도와 주옵소서!\" 귀신은 죽이는 데 그 목적이 있습니다. 귀신은 인간성을 파괴하고 영과 육을 파괴시킵니다. 귀신은 고귀한 하나님의 형상을 파괴시킵니다. 귀신은 한 두 번이 아니라 계속하여 관계성을 파괴시킵니다. 이제 아버지는 예수님과의 관계성을 맺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아버지는 예수님께 무엇을 간구했습니까? \'무엇을 하실 수 있거든\' 아버지는 가정법을 사용하여 제자들과 같이 고칠 수 없으면 그만 두시라는 것입니다. 괜히 고친다고 하시다가 못 고치면 창피만 당하니 아예 못 고치면 처음부터 그만 두라는 것입니다. 반면에 고칠 수 있으면 한 번 고쳐 보라는 것입니다. 아버지는 믿음이 좋고 겸손한 것 같습니다. 그러나 그는 예수님께 대한 믿음이 없었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아버지의 마음을 충분히 이해할 수 있습니다. 아버지는 믿음을 가지고 나왔습니다. 그런데 제자들은 고치지 못했습니다. 그리고 예수님께 데리고 오니 귀신은 더 발작합니다. 예수님이 고치기에는 상태가 너무 심한 것 같습니다. 아들의 상황을 보나 현재 자신의 상황을 보나 절망할 수 밖에 없습니다. 예수님을 불신할 수 밖에 없습니다. 예수님은 이런 그를 어떻게 도우셨습니까? 23절을 보십시오. \"할 수 있거든이 무슨 말이냐? 믿는 자에게는 능치 못할 일이 없느니라.\" 예수님은 그의 불신을 책망하셨습니다. 예수님은 불신을 가장 미워하십니다. 예수님은 믿음이 없음을 가장 슬퍼하십니다. 반면에 믿음이 있는 자들을 기뻐하십니다. 불신은 가장 큰 죄입니다. 이 불신은 도덕적인 죄보다 더 큰 죄악입니다. 예수님은 우리가 실패한다고 책망하지 않습니다. 예수님은 눈에 보이는 업적을 따라 책망치 않습니다. 예수님은 불신을 책망하십니다. 예수님께는 가정이 없습니다. 예수님께는 조건이 붙을 수 없습니다. 예수님께는 anything이 없습니다. 예수님께는 부정이 없습니다. 예수님은 늘 긍정적입니다. \"할 수 있거든이 무슨 말이냐? 믿는 자에게는 능치 못할 일이 없느니라.\" 예수님은 모든 것을 하실 수 있습니다. 예수님을 믿는 자에게는 불가능이 없습니다. 믿음은 모든 불가능을 가능케 합니다. 믿음이란 현재의 상황이 문제가 되지 않습니다. 믿음은 현재의 역경을 디디고 일어서게 합니다. 믿음은 어떤 절망도 극복할 수 있습니다. 믿음은 자신의 지혜와 능력으로 할 수 없는 것을 하게 합니다. 믿음은 연약함과 한계를 극복하게 합니다. 믿음은 이성을 초월합니다. 믿음은 불가능에 도전하여 믿음의 꽃을 피우게 합니다. 바울은 믿음의 능력을 체험하고 이렇게 고백했습니다. \"내게 능력 주시는 자 안에서 내가 모든 것을 할 수 있느니라(빌4:13).\" 우리는 21세기 지성계에 영향력을 끼칠 수 있는 목자 박사 120명을 위해 기도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우리의 현재의 상황을 보면 불가능해 보입니다. 현재 우리의 언어는 형편 없습니다. 그렇다고 실력이 있는 것도 아닙니다. 그렇다고 믿음이 있는 것도 아닙니다. 그러나 우리가 하나님을 믿을 때 가능합니다. 하나님을 믿는 모든 분들은 현재의 상황을 극복하고 위대한 역사를 이루었습니다. 미국의 김마가 선교사가 하나님을 믿는 믿음으로 미국으로 나갔을 때 토플 성적 없이 special student로 입학의 길이 열렸습니다. 그리고 차후 토플을 봐서 600점을 맞으면 됩니다. 김뭇별 목자는 중고교 때 사람들 앞에서 책도 제대로 읽지 못하던 분이었습니다. 그러나 그가 하나님을 믿었을 때 목자가 되어 올 9월에 나고야 박사 과정에 들어갈 수 있게 되었습니다. 장스펄젼 목자는 대학원 입학 시험을 보다가 학부 학점에 대한 두려움 때문에 시험을 포기하고 낙향하여 가스 레인지 만드는 공장에 취직을 했었습니다. 그러나 이제 그는 믿음으로 목자 박사에 도전합니다. 또 김요나단 목자는 현재 집안 상황을 볼 때 도저히 대학원에 들어갈 수 없는 상황입니다. 그러나 그가 단순히 하나님을 믿는 믿음으로 도전했을 때 하나님은 모든 길을 열어 주셨습니다. 6년 전 황제임스 목자가 러시아를 개척한다는 것은 도저히 있을 수 없는 상황이었습니다. 그러나 그는 믿음으로 도전하여 모스크바 4일 비자로 모스크바에 입성했습니다. 그리고 그는 4일 비자로 4년 비자를 받아냈습니다. 그리고 그는 믿음으로 도전하여 러시아의 첫 선교사요, 1945년 이후 첫 모스크바 박사가 되었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역사를 이루려면 현실의 상황이란 복병에 부딪치게 됩니다. 그러나 하나님을 믿는 믿음이 있을 때 현재의 상황은 전혀 문제가 되지 않습니다. 믿음이란 현실적인 문제를 뛰어넘는 것입니다. 우리가 현실적인 상황에 도전하여 1:1 300팀을 이루고, 180명 제자 양성을 이룰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그리고 10년 내에 목자 박사 120명 역사를 이룰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할 수 있거든이 무슨 말이냐? 믿는 자에게는 능치 못할 일이 없느니라.\" 믿음만 있으면 무엇이든지 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이 믿음은 100% 온전한 믿음입니다. 1%라도 불신이 있으면 믿음이 아닙니다. 마태복음에서는 겨자씨 만한 믿음이라 할지라도 온전하여야 된다고 말씀합니다. 겨자씨 만한 믿음만 있어도 태산을 옮겨 바다를 메꿀 수 있습니다. 그러나 우주만한 믿음이라 할지라도 1%의 불신이 있으면 아무런 일을 행할 수 없습니다. 예수님은 겨자씨만한 믿음이라도 100%의 온전한 믿음을 원하십니다. 우리는 젊고 유능한 지성인들이기 때문에 내 힘과 내 지혜와 열정과 젊음을 가지고 무엇이든지 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그러나 살다 보면 인간의 힘과 능력과 지혜로 할 수 없는 것이 참으로 많습니다. 특히나 영적 세계는 더욱 더 그러합니다. 양들을 돕다 보면 내 힘과 의지로는 한 사람도 도울 수 없음을 절실히 깨닫습니다. 우리의 지혜는 한계가 있습니다. 나의 힘은 한계가 있습니다. 나의 능력은 한계가 있습니다. 그러나 온전한 믿음을 소유할 때 자신의 한계를 넘어서서 큰 일을 행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우리가 믿음으로 살고자 할 때 싸워야 할 대적은 의심입니다. 우리가 신앙 생활을 하다 보면 순간적으로 의심이 엄습합니다. 그러나 믿음이란 의심과 싸우는 것입니다. \"오직 믿음으로 구하고 조금도 의심하지 말라. 의심하는 자는 마치 바람에 밀려 요동하는 바다 물결 같으니, 이런 사람은 무엇이든지 주께 얻기를 생각하지 말라. 두 마음을 품어 모든 일에 정함이 없는 자로다(약1:6-8).\" 예수님은 말씀하십니다. \"하나님을 믿으라.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누구든지 이 산더러 들리어 바다에 던지우라 하며, 그 말하는 것이 이를 줄 믿고 마음에 의심치 아니하면 그대로 되리라(막11:22,23).\" 우리에게 가장 중요한 것은 성공과 실패가 아니라 온전한 믿음입니다. 온전한 믿음은 역사를 창조할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온전한 믿음을 갖고자 힘써야 합니다. 셋째, 내가 믿나이다(24). 책망을 들은 아이의 아버지는 정신이 바짝 나서 외쳤습니다. \"내가 믿나이다.\" 그러나 현실은 그 마음에 불신의 세력을 제어할 수 없었습니다. 자신의 힘으로는 불신과 절망을 몰아내고 싶어도 몰아낼 수 없었습니다. 그래서 그는 믿음이 없음을 도와 달라고 간구합니다. \"내가 믿나이다. 믿음 없는 것을 도와 주소서!\" 이것은 그의 신앙 고백입니다. 이제 그는 아이의 병보다 겸손히 자신에게 믿음을 달라고 간구했습니다. 이제 그는 어린 아이에서 자신을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바로 이것이 믿음이요, 영적인 투쟁입니다. 우리는 양을 돕는 목자들이기 때문에 양들 걱정을 하다가 자신의 믿음에 대해 소홀하기 쉽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양들 문제도 중요하지만 자신의 믿음 없음을 애통해야 합니다. 내가 믿음이 없는데 어떻게 양들을 도울 수 있습니까? 내가 믿음이 없으면 양들이 와도 도울 수 없습니다. 저의 목자 생활을 돌이켜 보면 양이 없어 양을 돕지 못한 것이 아니라 믿음이 없어 양을 돕지 못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자신이 믿음이 없음을 애통히 여기고 자신의 믿음을 위해 기도해야 합니다. 넷째, 기도 외에는 이런 유가 없느니라(25-29). 25절을 보십시오. 예수님은 더러운 귀신을 꾸짖으셨습니다. \"벙어리 되고 귀먹은 귀신아! 내가 네게 명하노니 그 아이에게서 나오고 다시 들어가지 말라(25).\" 이 때 귀신이 그 아이에게 경련을 일으키고 나갔습니다. 아이는 새 사람이 되었습니다. 예수님의 말씀 권세 앞에는 어떤 악령의 세력도 거꾸러집니다. 예수님께서 집에 들어가시자 제자들이 예수님께 조용히 물었습니다. \"우리는 어찌하여 능히 그 귀신을 쫓아내지 못하였나이까?\" 예수님은 말씀하십니다. \"기도 외에 다른 것으로는 이런 유가 나갈 수 없느니라(29).\" 예수님은 제자들이 아이를 고치지 못한 원인은 기도하지 않은 데 있음을 가르쳐 주셨습니다. 기도란 예수님을 의지하는 것이요, 믿음의 표현이요, 하나님과 바른 관계의 표현입니다. 기도는 믿음을 지속시킬 수 있습니다. 기도는 모든 불신과 부정, 운명적인 생각과 죄의 소욕을 이길 수 있습니다. \"할 수 있거든이 무슨 말이냐? 믿는 자에게는 능치 못할 일이 없느니라.\" 우리가 하나님을 믿음으로 불가능에 도전하여 승리의 역사를 이루기를 기도합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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