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자일지라도 마가복음 (10:32-52) \"인자의 온 것은 섬김을 받으려 함이 아니라 도리어 섬기려 하고 자기 목숨을 많은 사람의 대속물로 주려 함이니라(45).\" 사람이면 누구나 한 번 밖에 없는 인생을 가치 있고, 의미 있게 살고 싶어합니다. 사람이면 누구나 많은 사람들로부터 섬김을 받으며 살고 싶지, 섬기는 삶을 살고 싶지는 않을 것입니다. 사람들이 높은 자리에 앉고자 하는 것도 아래 사람을 부리고, 많은 사람들로부터 섬김을 받기 위해서일 것입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title을 얻기 위해 열심을 다 합니다. 과연 섬김을 받는 삶이 위대한 삶일까요? 과연 섬김을 받는 것이 정말 행복한 삶일까요? 섬김을 받는 것과 섬기는 것, 어느 것이 정말 의미가 있을까요? 어느 것이 정말 위대하고, 행복한 삶일까요? 이 시간 하나님의 아들이실지라도 섬기러 오신 예수님을 배워 진정으로 위대한 삶, 진정으로 행복한 삶을 살기를 기도합니다. 첫째, 십자가와 부활을 가르치시는 예수님(32-34). \"예루살렘으로 올라가는 길에 예수께서 제자들 앞에 서서 가시는데 저희가 놀라고 좇는 자들은 두려워하더라(32).\" 예루살렘은 고난과 침뱉음과 십자가와 죽음이 예수님을 기다리고 있는 곳입니다. 여러분은 이런 곳이 있다면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피하여 가든지, 아니면 그 곳을 아예 가려 하지 않을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비장한 각오로 제자들 앞에 서서 고난의 길을 향해 올라가시고자 결단하셨습니다. 이 때 제자들은 놀라고, 따르는 무리들은 두려워했습니다. 예루살렘으로 가시는 예수님의 모습은 긴장되어 있었습니다. 예수님의 얼굴은 중대한 결의에 차 있으셨습니다. 무언가 심상치 않은 일이 일어날 것만 같았습니다. 제자들은 왕이 되셔서 하루 아침에 예루살렘 성을 접수하여 왕이 되지나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기도 했습니다. 이런 예수님을 볼 때 제자들은 놀라고, 따르는 무리들은 두려워했습니다. 예수님은 이런 제자들에게 세 번째 고난에 대해 말씀하셨습니다. 33,34절을 보십시오. \"보라! 우리가 예루살렘에 올라가노니 인자가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에게 넘기우매 저희가 죽이기로 결안하고, 이방인들에게 넘겨 주겠고, 그들은 능욕하며 침뱉으며 채찍질하고, 죽일 것이니 저는 삼 일만에 살아나리라 하시니라.\" 세 번째 말씀은 전에 말씀하신 것보다 더 구체적이며 상세합니다. 예루살렘에서 고난을 받으시고, 능욕받고, 침뱉음과 채찍질을 맞으심과 이방인의 손에 넘기우게 될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방인의 손\' 이란 로마 군병들로, 유대인들로서는 가장 모욕적인 일입니다. 그리고 예수님은 삼 일만에 부활하실 것을 말씀하셨습니다. 제자들은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에서 사람들의 인기와 영광을 얻을 것으로 기대했는데 오히려 예수님께서 사람들로부터 버림받으시며, 능욕당하고, 채찍질당하고, 죽임을 당하신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과거 가난과 자신의 외모와 자신의 성격으로 인해 많은 고통을 느꼈습니다. 그런데 우리가 고통하고 괴로워하였던 것은 가난이나 성격이나 외모로 인함보다도 사람들과 사회로부터 버림받고, 무시당할 것에 대한 두려움 때문이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사람들로부터 버림 받지 않고, 인정을 받으려고 많은 애를 써야 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오히려 능욕을 당하시고, 침뱉음을 당하시며, 죽임을 당하시고, 삼 일만에 살아나야 하신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왜 버림을 받으셔야 했습니까? 이사야서 4a절을 보면 이렇게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는 실로 우리의 질고를 지고 우리의 슬픔을 당하였거늘\" 우리의 질고로 인함입니다. 세상에는 성한 사람이 한 명도 없습니다. 그런데 누구도 나의 질병을 해결할 수 없습니다. 아니 해결은 그만두고 이해만이라도 해 주면 좋겠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십자가에서 우리의 모든 질고와 슬픔을 이해하시고 해결해 주셨습니다. 예수님은 이를 위해 슬픔의 사람이요, 고난의 사람이 되셨습니다. 그런데 이사야서 53:4b절을 보면 사람들은 예수님과 아무 상관이 없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이사야서 53:5절을 보십시오. \"그가 찔림은 우리의 허물을 인함이요, 그가 상함은 우리의 죄악을 인함이라. 그가 징계를 받음으로 우리가 평화를 누리고 그가 채찍에 맞음으로 우리가 나음을 입었도다.\" 예수님은 나의 죄와 허물로 인해 고난을 받으셨습니다. 예수님은 나의 죄 때문에 십자가를 지고 골고다 언덕을 오르셔야 했습니다. 나의 더러운 생각 때문에 날카로운 가시면류관을 쓰셔야 했습니다. 나의 시기심과 거짓과 미움이 예수님의 뺨을 때렸습니다. 나의 더러운 정욕이 채찍이 되어 예수님의 살을 찢었습니다. 나의 불신앙과 불순종이 굵은 대못이 되어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았습니다. 나의 탐욕이 날카로운 창이 되어 예수님의 옆구리를 찔렀습니다. 아무 죄 없으신 예수님께서 나의 죄 때문에 십자가에서 피흘려 죽으신 것입니다. 예수님은 세 번씩이나 십자가의 고난과 부활의 영광을 말씀하셨습니다. 이는 예수님의 죽으심은 우연적인 것이 아니라, 성경에 기록된 필연적인 사건임을 가르쳐 주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에 가셔서 갑자기 돌아가시게 되면 제자들은 예수님께서 우연히, 아니면 힘이 없어 그런 줄 알고 실족당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구약의 예언대로 고난을 받으시고, 능욕받으시고, 침뱉음과 채찍질을 맞으셔야 하셨습니다. 그리고 현재 제자들은 십자가의 말씀을 영접하려 하지 않습니다. 그들은 십자가 이야기만 나오면 귀를 막아 버리고, 묻기조차 두려워했고, 깜짝깜짝 놀랐습니다. 반면에 자기들의 이상과 꿈은 깨지 않고 고이고이 간직하고 있었습니다. 예수님은 이런 제자들의 마음을 복음의 망치로 깨어 십자가의 복음을 심으셨습니다. 이는 십자가의 복음만이 인간의 근본 문제를 해결하고, 부활의 영광에 참예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롬8:18). 우리는 신앙 생활하면 \'믿고 축복\' 으로 생각합니다. 물론 믿고 축복도 받습니다. 그러나 이보다 십자가의 고난을 사랑해야 함을 배우게 됩니다. 고난이 없는 영광은 결코 있을 수 없다는 것은 평범한 진리입니다. 그런데도 우리는 이 진리를 자주 잃어 버립니다. 우리가 양을 얻으려면 많은 어려움을 당해야 합니다. 사람들이 시원한 물가로 피서갈 때 뙤약볕의 길을 걸어 심방하고, 일대일로 성경을 가르쳐야 합니다. 무더운 밤에 모기를 좇으며 소감을 써야 합니다. 이런 고난과 희생을 통해 양을 얻고, 예수님의 제자로 성장하게 됩니다. 뿐만 아니라 양들을 도울 때도 십자가를 가르쳐야 함을 배울 수 있습니다. 우리는 양들에게 \'예수님을 믿으면 무조건 좋다, 반드시 좋은 일만 생긴다\' 고만 가르쳐서는 안 됩니다. \'경건하게 살고자 하는 자들은 반드시 핍박을 받는다\' 는 것도 가르쳐야 합니다(딤후3:12). 그렇지 않으면 실제적으로 핍박을 받을 때 신앙 생활이 잘못된 것이 아닌가 의심하고 회의에 빠지게 됩니다. 그러나 이런 사실을 알고 핍박을 받으면 능히 이길 수 있습니다. 예수님을 믿으면 희생과 헌신도 있음을 가르쳐야 됩니다. 자기 부인과 자기 십자가를 지도록 도와야 됩니다. 그러나 사람들은 누구나 희생하기를 싫어합니다. 사람은 누구나 욕심대로 살기를 좋아합니다. 사람은 누구나 easy going의 삶을 원합니다. 그러나 우리는 자기 본성대로 살고 싶은 마음을 부인하고, 십자가의 고난을 사랑해야 합니다. 우리는 한탕주의를 버리고, 땀흘려 삶의 질을 향상시키고, 부를 축적해야 합니다. 땀흘린 그 결실로 풍요로운 삶을 구가하는 것이 참된 자본주의입니다. 땀흘려 좋은 성적을 얻고, 땀흘려 title을 얻고자 해야 합니다. 이 시대가 컴퓨터 시대요, 정보화의 시대라 할지라도 십자가의 고난을 사랑해야 합니다. 한국은 어느 민족보다 목에 십자가를 달고, 십자가 벨트를 하고 다니기를 좋아합니다. 그런데 십자가를 지기는 싫어합니다. 그러나 우리는 십자가의 고난을 사랑해야 합니다. 십자가는 생명과 영광과 진리의 길입니다. 고난의 십자가만이 인생을 위대케 합니다. 둘째, 섬기는 종의 도리를 가르치시는 예수님(35-45). 35절을 보십시오. 예수님께서 말씀을 하고 계실 때 제자들은 무슨 생각을 하고 있습니까? 제자들은 그 말씀을 받아들이지 않았습니다. 그런 말은 받아들이고 싶지도 않았습니다. 그들은 예수님이 영광을 얻을 것이라는 생각에 사로 잡혀 있었습니다. 야고보와 요한은 예수님께 나와 무엇이든지 원하는 것을 달라고 했습니다. 예수님은 그들에게 그들의 소원을 물어 보셨습니다. 야고보와 요한은 재빠르게 예수님의 좌우에 앉게 해 달라고 대답했습니다. 그들은 예수님이 영광 얻을 것을 믿어 의심치 않았습니다. 그들은 열 두 보좌에 앉아 이스라엘의 열 두 지파를 심판하리라는 말씀이 곧 이루어지리라 확신했습니다(마19:28). 그리고 변화산 상의 영광을 떠 올리곤 했습니다. 예수님은 이런 제자들에게 말씀하십니다. 38절을 보십시오. \"너희 구하는 것을 너희가 알지 못하는도다. 너희가 나의 마시는 잔을 마시며, 나의 받는 세례를 받을 수 있느냐?\" 두 제자는 자기들이 뭘 구하는지, 주의 영광이 무엇인지, 예수님의 좌우편에 앉는 것이 무엇인지, 그 자리가 얼마나 고난과 책임이 있고, 또 그들이 감당할 수 있는 자리인지도 몰랐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그 자리가 그냥 좋아 보였습니다. 여기에서 \'마시는 잔\' 은 십자가의 고통을 말하며, \'받는 세례\' 는 십자가의 죽음을 의미합니다(롬6장). 예수님은 그들에게 영광을 얻기 전에 십자가의 고난에 동참해야 됨을 말씀하셨습니다. 이 때 야고보와 요한은 자신 있게 대답했습니다. \'할 수 있습니다(We can.).\' 그들은 영광만 주신다면 그 어떤 것도 할 각오가 되어 있다고 했습니다. 이 때 예수님은 그들의 생각이 어떠하든지 인정해 주셨습니다(38). 그들은 자신의 대답대로, 야고보는 가장 먼저 순교의 잔을, 요한은 오랫동안 밧모 섬에서 십자가를 지고 예수님의 고난에 동참했습니다. 예수님은 장차 그들이 주의 영광을 위하여 살 것을 아시고 긍정적으로 받아 주셨습니다. 그러나 좌우에 앉는 것은 나의 줄 것이 아니라 누구를 위해 예비되었든지 그들이 얻을 것이라 하셨습니다(40). 예수님은 그들이 예수님을 위하여 살 뿐만 아니라 하나님의 절대적인 주권 앞에 살도록 방향을 잡아 주셨습니다. 41절을 보십시오. 제자들은 야고보와 요한이 예수님께 은밀히 청탁했다는 소식을 듣자 모두 분을 내었습니다. 그들은 한 수 놓쳤다는 데서 오는 분함이 더 컸습니다. 이를 볼 때 제자들은 드러내지 않았을 뿐 모두에게 나름대로의 인간적인 야망이 있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이것은 남자들의 세계만 있는 것이 아니라 여성들의 세계에도 있고, 목자들의 세계만에 있는 것이 아니라 자매들의 세계에도 있습니다. 어떤 점에서 사람은 야망을 가져야 합니다. 그래서 어떤 사람은 \'젊은이여, 야망을 가져라\' 했습니다. 그러나 야망은 자기 욕심으로 출발하기 때문에 반드시 죄를 낳습니다. 히틀러는 게르만 민족을 통한 유럽 통일의 야망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 때 그는 엄청난 피를 흘렸습니다. 반면 요한 웨슬레이는 예수 그리스도를 통한 세계 복음화의 비전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이 비전은 하나님께서 주신 것이기 때문에 인류에게 기쁨과 평화를 가져다 주었으며 또 실현되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인간적인 야망을 버리고 영적인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예수님은 인간적인 야망으로 속이 시끄러운 제자들을 불러 모으시고, 가장 위대한 사람이 누구이며, 가장 위대해지는 비밀을 가르쳐 주셨습니다. 42절을 보십시오. \"예수께서 불러다가 이르시되 이방인의 소위 집권자들이 저희를 임의로 주관하고, 그 대인들이 저희에게 권세를 부리는 줄을 너희가 알거니와\" \'이방인의 집권자\' 란 당시 이스라엘을 통치하던 로마제국의 정치지도자들을 의미합니다. 그들은 막강한 군사력을 이용하여 이스라엘을 비롯하여 세계를 강압적으로 다스리고 임의로 주관했습니다. 그들은 권력을 남용하여 자기들이 원하는 대로 법을 만들어 통치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힘 앞에 무력해야 했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로마를 몰아내고 장로 대통령이 나와 다스리기를 열망했습니다. 그러나 누가 지배해도 마찬가지입니다. 정치란 힘의 역학이기 때문에 강자는 약자를 주관하고, 권세를 부리게 되어 있습니다. 洞 書記만 해도 권세를 부리게 되어 있습니다. 이 때문에 사람들은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대권을 잡고자 합니다. 제자들도 이런 모습을 보았기 때문에 높은 자리에 올라 백마를 타고 다니며 한 번 원하는 대로 세상을 살아보고 싶었습니다. 그리고 자기들의 wife들에게는 \'여사\' 소리를 들려 주고 싶었습니다. 그들은 이 꿈 때문에 지금까지 모든 훈련을 기쁨으로 감당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너희는 좀 달라야 한다\" 고 말씀하십니다. 43,44절을 보십시오. \"너희 중에는 그렇지 아니하니, 너희 중에 누구든지 크고자 하는 자는 너희를 섬기는 자가 되고, 너희 중에 누구든지 으뜸이 되고자 하는 자는 모든 사람의 종이 되어야 하리라.\" 이 말씀은 예나 지금이나 역설적인 말씀인 것 같습니다. 주인이 하인을 섬기고, 스승이 제자를 섬긴다는 것은 상상할 수 없습니다. 높은 자가 낮은 자를 섬기고, 낮은 자는 높은 자를 섬기는 것이 마땅한 도리입니다. 섬기는 일은 낮은 자의 몫이요, 섬긴다는 것은 하나의 굴욕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너희는 좀 달라야 한다\" 고 말씀하십니다. \'너희 중에 누구든지 크고자 하는 자는 너희를 섬기는 자가 되고, 너희 중에 누구든지 으뜸이 되고자 하는 자는 모든 사람의 종이 되어야 하리라.\' 이 말씀은 역설적인 말씀인 것 같지만 진리의 말씀입니다. 모세의 위대함은 이스라엘을 출애굽시킨 데 있지 않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을 유모와 같이 품고 섬긴 데 있습니다. 룻은 모압에서 부족함이 없이 살던 여인이었습니다. 그런데 나오미 집에 시집 온 후로 모든 일이 뒤틀렸습니다. 남편을 잃고 재산도 잃었습니다. 결국 시어머니와 룻만이 남았습니다. 시어머니는 룻이 고향에 가서 재혼하도록 했습니다. 그러나 룻은 시어머니를 끝까지 섬겼습니다. 유대 땅 베들레헴에 와서도 매일 이삭을 주우러 나갔습니다. 이삭을 주워서 시어머니를 섬겼습니다. 이삭을 줍는 것이 쉬운 일입니까? 하루 종일 허리를 굽혀야 합니다. 하루 종일 이삭을 주워도 한 되도 되지 않습니다. 수고한 것에 비해 얻는 것이 너무 적습니다. 그래도 그는 불평이나 원망을 하지 않았습니다. 룻의 이런 섬김은 베들레헴의 신사요, 부자인 보아스를 감동시켰습니다. 결국 보아스의 아내가 되어 오벳을 낳았습니다. 오벳은 다윗의 할아버지입니다. 그리하여 룻은 그리스도의 족보에 오르는 인물이 되었습니다. 섬기는 자가 위대한 자가 됩니다. 그런데 섬기는 데 어떤 자세로 섬겨야 합니까? 44절을 보십시오. \"너희 중에 누구든지 으뜸이 되고자 하는 자는 모든 사람의 종이 되어야 하리라.\" 종의 자세로 섬겨야 합니다. 우리가 종의 자세로 섬기지 않을 때 \'나는 이만큼 했으니 너도 이만큼 해야 한다\' 는 요구하는 마음이 생기기 쉽습니다. 그 때 우리는 어느 때까지 섬겨야 하는가 불평과 원망이 생기게 됩니다. 그러나 종은 요구하는 마음을 가질 수 없습니다. 자기의 義를 내세울 수 없습니다. 누가복음 17:7-10절은 종의 자세를 이렇게 기록하고 있습니다. \'너희 중에 뉘게 밭을 갈거나 양을 치거나 하는 종이 있어 밭에서 돌아 오면 저더러 곧 와 앉아서 먹으라 할 자가 있느냐? 도리어 저더러 내 먹을 것을 예비하고, 띠를 띠고 나의 먹고 마시는 동안에 수종 들고, 너는 그 후에 먹고 마시라 하지 않겠느냐? 명한 대로 하였다고 종에게 사례하겠느냐? 이와 같이 너희도 명령받은 것을 다 행한 후에 이르기를 우리는 무익한 종이라. 우리의 하여야 할 일을 한 것 뿐이라 할지니라 하지 않겠느냐?\' 종은 섬기는 자입니다. 섬긴 후에 자기 의를 구하거나 내세울 수 없습니다. 그러면 구체적으로 어떻게 하는 것이 섬기는 것입니까? 첫째로 관심을 갖는 것입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다른 사람에 대하여 관심을 갖기를 원치 않습니다. 오히려 지나친 관심은 실례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관심은 사랑입니다. 사랑이 없으면 관심을 가질 수 없습니다. 그런데 관심을 가지려면 많은 희생과 헌신과 겸손과 이해가 요구됩니다. 자존심을 버리는 아픔이 있습니다. 자기의 이기심을 깨는 아픔이 있습니다. \'위대하다\'는 것은 얼마나 많은 사람에게 깊은 관심을 갖느냐에 있습니다. 아기와 자기에게만 관심을 갖는 자는 남편이요, 아버지 밖에 되지 못합니다. 그러나 세계에 관심을 갖게 되면 세계인이 됩니다. 관심의 폭과 깊이를 통해 섬김의 폭과 깊이를 알 수 있습니다. 둘째로 말씀과 기도로 섬기는 것입니다. 우리는 섬긴다 하면 주로 화장실 청소, 센타 청소, 설거지하고 과일과 음료수를 양들에게 대접하는 것으로 생각합니다. 물론 이런 것도 섬기는 생활입니다. 그러나 양들을 가장 잘 섬기는 생활은 기도와 말씀으로 섬기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틈만 있으면 양들은 말씀과 기도로 섬겨 주셨습니다. 이 때 죽었던 영혼들이 살아났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은 실질적인 문제도 해결하여 주셨습니다. 우리가 양들을 섬기고 동역자들을 섬긴다는 것은 바로 말씀으로 죄 문제를 돕고, 그의 실제적인 인생 문제를 해결하여 주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섬김의 본을 보여 주셨습니다. 어떻게 보여 주셨습니까? 45절을 보십시오. \"인자의 온 것은 섬김을 받으려 함이 아니라 도리어 섬기려 하고, 자기 목숨을 많은 사람의 대속물로 주려 함이니라.\" 예수님의 본체는 하나님이십니다(빌2:6). 예수님은 마땅히 섬김과 경배를 받기에 합당한 분이십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하나님의 아들일지라도 하늘 나라의 모든 영광과 특권을 버리고, 인생들을 섬기기 위해 이 땅에 오셨습니다. 예수님의 생애는 한마디로 섬김의 생애입니다. 뿐만 아니라 예수님은 많은 사람들의 대속물이 되기까지 섬기셨습니다. 구약에 보면 죄를 사함받기 위해서는 반드시 희생 제물을 드려야 했습니다. 예수님은 속죄 제물, 희생 제물이 되셨습니다. 예수님은 내가 고난을 받을 자리에서 나 대신 고난을 받으셨습니다. 예수님은 내가 침뱉음을 받아야 할 자리에서 나 대신 침뱉음을 당하셨습니다. 예수님은 내가 받아야 할 심판의 자리에서 나 대신 심판을 받으셨습니다. 예수님은 내가 죽어야 할 그 자리에서 나 대신 죽으셨습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아들이실지라도 우리를 섬겨 주시되 십자가에 죽기까지 섬겨 주셨습니다. 이 예수님의 섬김을 통해 저와 여러분이 구원을 받았습니다. 우리가 이 예수님을 배울 때 어떤 사람도 섬길 수 있습니다. 이 예수님을 배울 때 우리도 위대한 생을 살 수 있습니다. 세상의 자리는 제한되어 있어 무서운 경쟁을 하지만 영적 자리는 제한되어 있지 않습니다. \'누구든지\' 예수님을 배우기만 하면 됩니다. 우리가 집에서, 각 직장에서, 각기 공동체 내에서 서로 섬기려고 한다면 이 공동체는 아름다운 공동체가 될 것입니다. 이런 섬기는 곳에는 갈등이 있을 수 없습니다. 섬기는 곳에는 은혜와 기쁨과 사랑과 용서와 아름다움이 있습니다. 에덴이 따로 없습니다. 섬김이 있는 곳이 바로 아름다운 에덴인 것입니다. 셋째, 바디매오의 소원을 들어 주신 예수님(46-52). 예수님께서 여리고에 이르셨을 때 디매오의 아들인 바디매오라는 소경거지가 앉아 있었습니다. 그는 이름도 없는 소경거지였습니다. 그는 예수님이 오신다는 소문을 어떻게 들었는 지 외쳤습니다. \'다윗의 자손 예수여! 나를 불쌍히 여기소서!\' \'다윗의 자손\' 이란 약속된 메시야를 의미합니다. 그는 소경거지였지만 예수님을 알았습니다. 그리고 그의 기도는 겸손하고 간절했습니다. 이 때 제자들은 시끄럽다고 꾸짖었습니다. \'시끄러워! 시끄러워! 소경거지가 감히 어디서 떠드는 거야! 비키지 못해!\' 이 때 소경거지 바디매오는 더욱 더 크게 소리질렀습니다. \'다윗의 자손 예수여! 나를 불쌍히 여기소서!\' 예수님은 바디매오를 부르셔서 그의 소원을 물어 보셨습니다. 바디매오는 보기를 원한다는 한 가지 기도 제목이 있었습니다. 그는 거지 신세를 면해 달라든지, 아니면 돈을 달라는 현실 문제를 놓고 기도하지 않았습니다. 그는 근본적인 문제를 놓고 예수님께 기도했습니다. 그는 제자들과는 달랐습니다. 그는 비록 눈은 멀었지만 영적이었습니다. 예수님은 그의 기도 제목을 들으시고 그의 눈을 뜨게 하셨습니다. 지금 예수님의 발길은 십자가를 향한 무거운 발길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소경거지에게 깊은 관심을 갖고 섬기셨습니다. 제자들은 사업적이었지만, 예수님은 그를 불쌍히 여기셔서 섬기셨습니다. 예수님은 실로 선한 목자이십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아들이실지라도 죽기까지 병든 인생들을 섬기셨습니다. 이로 인해 죄로 병든 인생들이 살아났습니다. 우리도 예수님을 배워 섬김의 종들이 되기를 기도합니다. 우리의 가정과 각기 직장과 캠퍼스, 그리고 우리 모임이 섬기는 분들로 가득 채워질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